2019/01/13 23:36

'씀' (3) 대나무숲

또다시 새벽감성 한가득인 단발성 글들. 잠들기 전 '씀' 앱에서 잘근잘근 씹어뱉었던 글들이다. 2018년 여름~겨울에 썼음.

내 이야기도 있고 아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것도 있음.





글감 : 사소함

오늘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할 시간이 남았다. 내린 커피는 물이 딱 맞았는지 어느 때보다 맛있었다. 지하철에선 바로 자리가 났다. 회사 앞 공원의 바람은 시원했고 요청한 서류는 이미 도착해있었고 점심 메뉴는 유난히 맛깔났다. 퇴근길 버스는 시간 맞춰 딱 도착했고 나는 평소보다 빠르게 집에 들어왔다.

이런 사소한 행운을 조금 더 찾게 된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글감 : 여행의 목적

나는 너를 잊기 위해 쿠바에 갔다. 사실 잊기 위해 여행을 할 정도로 우리 사이에 거창한 뭔가가 있진 않았다. 잠깐 마음이 갔을 뿐이었고 서로 확인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헤어짐이란 단어를 쓰기 민망하게도 헤어졌다. 내버려두면 잊혀질 사이였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잊기 위해 쿠바에 갔다. 지저분한 도시에서, 조용한 시골에서, 반짝이는 등대에서, 투명한 해변에서 나는 너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잊기 위해 생각했고 잊기 위해 떠올렸고 잊기 위해 마주했다. 그리고 결국 잊지 못했다.

여행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불만족스럽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외로운 여행 중 곱씹을 만한 아름다운 스토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글감 : 훗날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다, 먼 훗날에도 가슴 아파하며 너를 떠올릴 거다, 너는 그렇게 계속해서 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거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거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딱 3개월이었다. 네가 잊혀지고 다른 사람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되는 시간이 말이다.

어라? 진짜 사랑했었는데? 아니었나? 아니었나봐. 진짜가 아니니까 이렇게 빨리 잊혀진 거야. 가짜에 열중했다니 그것 참 아까운 시간이었네. 뭐에 홀렸었나봐.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은 진짜 사랑해야지. 이 사람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고, 먼 훗날에도 가슴 아파하며 떠올리고, 계속해서 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사람이도록 해야지.

그 다른 사람과 헤어지고 2개월이 흘렀다. 이번엔 고작 2개월만에 또다른 사람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라? 진짜 사랑했었는데? 아니었나?

그게 몇 번 반복됐다. 나는 드디어 내 패턴을 깨달았다. 내 마음은 현재 감정에 충실한 것 뿐이었다. 이후의 사랑에 이전의 사랑이 가려진다고 해서 이전의 것이 가짜 마음은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내 이전의 모든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참 느리게도 깨달았다.





글감 : 신기루

당신이 지금 내게 느끼는 감정.
곧 사라지겠지만 내가 기억할게요.





글감 : 실감

당신은 내가 우울할 땐 즐거운 이야기를, 내가 즐거울 땐 우울한 이야길 하더라. 당신과 이야기를 하면 지칠 땐 더 지치고 화날 땐 더 화나더라. 안맞을 땐 뭐 이렇게 안맞나 싶을 정도로 엇나가더라. 보고 싶을 땐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을 땐 기다려야 하더라. 취향은 왜 또 그렇게 다르고 식성도 왜 또 그렇게 다른지. 방금 전의 대화로 그걸 또 실감했다. 당신은 나랑 참 맞지 않는구나 하고.

그렇게 나와 맞지 않는 당신을 나는 참 좋아해서 여기까지 왔다. 당신도 당신과 맞지 않는 나를 참 좋아해서 여기까지 왔구나. 너나 나나 참 고생이다.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을 그렇게나 좋아한 바람에.





글감 : 헤어짐

헤어지고 오는 길에 어느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정한 가족을 봤다. 2, 3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가 아버지 품에 안겨 방긋 웃고 있었다. 모습이 예뻐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더니 아기가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작고 고운 인형 같은 손에는 긍정적 호의 이외의 어떤 의도도 담겨있지 않았고 나는 홀린 듯 내 손을 들어 아기에게 흔들어줬다. 아기는 만족한 듯 찡긋 웃었고 곧 그 가족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아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마주 웃어줬다.

엘리베이터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그 귀여운 아기를 떠올리곤 하하 웃었다. 문에 내 어색한 웃음이 비쳤다. 나는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고 웃다가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내 포기를 수락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나도 저런 가정을 만들 수 있었을까? 당신도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었을까? 나는 그런 당신 옆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재잘댈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고 의미 없는 상상이다. 이제 와서 무슨.

헤어지고 오는 길, 나는 어느 엘리베이터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글감 : 자취

그렇게 사랑해주고도 부족함에 미안해하는 바보같은 사람. 나 같은 게 붙잡고 있어도 되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멍청한 사람. 다른 것보다도 내가 행복한 게 최우선이라는 기막힌 사람.

그 핑계 같고 거짓말 같은 말들이 빈말이 아님을 나는 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의 자취가 그러하니.





글감 : 오후 4시

퇴근까지 앞으로 한 시간!





글감 : 명장면

내 인생 명장면 갱신이 시급하다.





글감 : 지금까지

내 인생은 전반적으로 엉망이었고 지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여태까지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아닌가보다. 아무나 붙잡고 엉엉 울면서 신세한탄 하고 싶은 밤이다.

술 때문이다.





글감 : 적어두다

바닷가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글씨를 적었다.

- 안녕.

곧 파도가 내 인사를 실어갔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답장을 기다리지만 파도는 아무것도 전해주질 않는다. 너는 아마 아주 먼 곳에 있나봐. 그래서 답이 오려면 오래 걸리나 보다.

이 짧은 인사도 전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너는.





글감 : 어둠

놀이터의 어두운 미끄럼틀에 걸터앉은 아줌마도 참 외롭고 힘든가 보다, 삶이.

같은 어둠 속 미끄럼틀 옆 그네에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글감 : 나에게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안다.
괜찮다.





글감 : 산타클로스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에는 산타클로스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가본 적은 없다. 몇 년 전엔가, 배낭 여행을 준비하다가, 그런 마을이 이 세상에 있단 걸 가이드북에서 봤었다.

크리스마스 한정, 대가없이 주어지는 선물 시스템의 희생자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홀로 어딘가 깊은 숲속 자택에서 빨간 연휴에 독박쓰고 일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어, 조금 안도했다. 함께라면 외롭진 않겠지.





글감 : 무엇을 더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으며, 너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의견을 교환하고 싶었다. 오가는 언어 속에서 이해와 배움이 있기를 바랬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공유하길 원했다.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받길 원했다. 그리고 그것 뿐이었다. 내가 원한 것들은.

그러나 그 봄날의 벤치에서 네가 나에게 "대체 뭘 더 원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런 것들을 원한다고 답하지 못했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더 이상 나에게 원하지 마라"는 요구였으니.





글감 : 새벽 하늘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 새벽에 교회에 가서 한동안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계절은 입김이 나오는 추운 겨울이었고, 나는 몸을 움츠린 채 덜덜 떨며 언 골목길을 걸어 교회엘 갔다.

어린 나의 소원과 어려운 목사님의 말씀, 간절했던 기도의 내용과 후일의 결과 따위는 이제와서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추운 겨울, 골목길 위로 펼쳐졌던 그 새벽 하늘의 별빛은 아직도 선명하다.





글감 : 남아 있는 것

여기쯤에 있다고 하자 당신은 화를 냈다. 다 버리라고 했다. 노력해서 버렸지만 아직도 남은 게 있다.

그 남은 게 아직도 여기쯤에 있다고 하면 당신은 또 화를 낼까. 화를 내도 좋으니 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글감 : 출근

오늘 아침, 나와 동갑인 직원들이 나이 먹기 싫다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십대는 너무 좋을 때고 이십대는 너무 빛날 때라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 젊음과 아름다움이 가득했던 시절이 그립다고, 자신들은 이미 늙었단 이야길 했다.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라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나는 아직 늙었단 표현을 쓰기엔 멀었고, 아니 그보단,

나는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전혀 돌아가고 싶질 않다. 내 이십대는 가난했다. 이십대엔 앞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의 그 서투름, 무지함, 실수와 좌절, 어려움, 민망함, 부끄러움,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상처, 어처구니없는 뻔뻔함, 아프고 괴로운 기억들. 또 겪으라면 난 못할 것 같다. 겪었다는 표현은 순하다. 또 저지르라면 난 못할 것 같다. 삶을 저지르는 나이였다. 이십대는.

출퇴근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지금의 생활이 훨씬 낫다. 누군가 나타나서 이십대로 돌아가 다시 살라고 하면 아마 나는 월급 한 달치 주면서 제발 여기 남게 해달라고 하겠지. 뭐, 지금 당장은 그렇다. 여기서 십 년이 더 지나면 어떨는지는 모르겠으나.





글감 : 안다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걸 너도 안다. 네가 그걸 알게 된 것까지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했고 내가 모른 척하는 것까지 너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것까지 나는 다 안다. 그렇지만 나도 너도 모른 척했다.

이 정도면 우리 둘 다 알아도 그건 없는 거다. 모르는 거다. 그래서 나는 결국 모른다.






2019/01/13 08:33

일상 180113 일상

1.

드으디이어어 독립!!!!

했는데 아직 인터넷 연결을 안해서 노트북을 못쓰...지만 집 꾸미느라 시간도 체력도 부족해서 어차피 놋북 앞에 앉을 시간도 (의자도) 없는 것...이다만 그래도 넘나 행벅하다아!!

중소기업 전세자금대출이라는 짱좋은 1퍼짜리 대출과 꽁깃돈을 이케이케 모아 (나는 돈을 분산시켜서 모으는 편이라 많은 상품을 깨야만 했다 흑흑) 들어온 스윗 마이 홈이다. 물론 남의 집이지만 마이 홈이다아!!

독립한다고 주변에서 이래저래 도와준 사람들이 많아 역시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나는 여기저기서 사랑받고 있구나 흑흑 하고 깨달은 날들이었다. 아직 살 만 하다.





2.

대학원!!!!

다니게 됐다 나는 3월부터 19학번이다!!! 이것도 중소기업 직장인 상대로 무슨 혜택 있길래 그걸로 신청했더니 등록금 무지 싸게 갈 수 있게 됐다. 혜택 받을 수 있는 학교 찾다보니 주말마다 지방 내려가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공부할 수 있게 된 건 넘나 좋다.

회사 부담금이 쪼꼼 있어서 회사 동의가 필요해가지고 쭈뼛거리며 여쭤봤는데 대표님이 이야기 들으시더니 울 회사에 석사 생기는 거냐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시곤 도장 찍어주셨다. 감사하다.





3.

요샌 일이 넘 바쁜데 다 처음 해보는 거라 넘 재밌다. 벤처의 즐거움이로다. 근데 재밌어서 넘 열중하다보니 요새는 일만 엄청 한다. 주변에선 남친 없으니까 저런다고 빨리 남자 소개 받으라고 하는데 지금 내 남친은 일이다. 일 너무 재미쪙. 우헤헤.

그러다가 옆자리 직원에게 그렇게 일하다가 쓰러지는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쓰러지는 것까진 모르겠으나 체력 쪼달리는 건 좀 있는 것 같아서 좀 무리해서라도 휴식을 취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니면 체력을 좀 길러야...

어디보자 이 근처에 헬스장이...

으으...  헬ㅅ...

쿨... zzz





4.

...잠들면 안돼!

커텐 좀 보러 나가야겠다. 빨리 커텐을 쳐야 늦잠을 잘 수 있어! 집도 더 따뜻해질 거야!

여튼 저는 일케 지내고 있습니다. 인터넷 연결되면 여행기 들고 찾아올게용. 뿅!



2018/12/28 23:08

겨울 유럽여행 (35) 로마 : 목욕의 성지와 성스러운 계단 ├ 겨울 유럽여행 (2018)

1.

카타콤베에서 아피아 가도로 돌아가 버스를 탔다.




고대 로마의 길, Via Appia Antica.

아피아 가도는 수도 로마에서 저 남쪽 장화모양 끝부분의 항구도시 브린디시까지 560km를 연결했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간선도로다.

지금은 로마 근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길을 따라 로마 귀족들의 무덤이나 크리스트교인들의 카타콤베 등을 볼 수 있다. 휴일엔 차가 다니지 않아, 자전거나 도보를 이용해 고대 로마의 숨결을 느끼며 트래킹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참고로 평일엔 위험할 것 같다. 길도 좁은데 차량은 제법 빠르게 다니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산 세바스티아노의 문(아피아 문)을 보았다.

산 세바스티아노의 문은 19세기까지 로마시의 경계가 되어준 로마 제국 시절의 방벽 - 아우렐리우스 성벽에 나있는 거대한 문이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모두 이 관문을 통과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강점기 이전, 한양의 남대문이라 하면 될까.

내려서 구경이라도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버스가 쉼없이 달려가 그냥 창밖으로 보고 말았다.






안 내리고 얌전히 있었더니 로마의 버스가 아우렐리우스 성벽 투어를 선물해줬다. 고마워라.

마지막 사진의 아치를 통해 성벽 안쪽 시내로 들어왔다.








2.

콜로세움으로 되돌아갈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구글맵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버스에서 충동적으로 내렸다.

버스 노선상에 카라칼라 욕장이 있잖아! 어머 여긴 가야해!




카라칼라 욕장Terme di Caracalla은 카라칼라 황제 시절에 지어진 공중 목욕탕이다.

사실 단순히 목욕탕이라 하기엔 어마어마한 규모로, 둘러보다보면 신전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니, 나 같은 목욕 예찬자에겐 신전,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런 곳을 안 갈 수는 없지!




입장료는 8유로. 티켓에 0유로처럼 찍힌 건 왠지 열받음.

입장권과 함께 VR을 일정 가격 내에서 빌려주던데, 아마 과거 모습을 복원해놓은 형태를 볼 수 있는 VR인 것 같았다.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빌리지 않은 이유는 매표소 언니가 나한테는 얘기 안해주고 내 뒤에 티켓 끊으러 온 백인 커플한테만 그 VR을 소개해줬기 때문. 왠지 열받아서 보고 있었더니 그 다음에 티켓을 끊은 일본인 여자애들한테도 소개 안해줬다. 흔한 인종 차별주의자였군...

결국 빈정 상해서 - 흥 그딴 VR 누가 빌려! 흥흥! - 안빌렸는데 지금은 좀 후회중이다. 뭐라 쏘아붙이고 빌릴 걸.




어쨌든 VR은 없는 상태로 입장.

로마 제일의 목욕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사하는 인부들 위로 쭉 뻗은 성벽... 아니 욕장의 벽.

아까 본 아우렐리우스 성벽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이게 목욕탕의 벽이라고? 방벽이 아니고?





지금은 그 틀만 남아있지만, 저 옛날 욕장의 벽면은 번쩍번쩍한 대리석과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었을 것이며, 군데군데 거대한 기둥과 화려한 분수를 설치하여 그 웅대함을 뽐냈을 것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봤다...

...흥! 나의 상상력은 짱짱이기 때문에 VR 따위 없어도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고!

아직까지도 VR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좁디 좁은 속을 뽐내는 enat이었다.





타일과 그림 장식, 모자이크 장식 일부.




로마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흔한 흑/백 모자이크. 얘네 참 모자이크 장식 좋아한다. 물론 이곳은 습기가 많은 곳이니 모자이크로 꾸미는게 제일 나았을 것 같긴 하다.

근데 이건 바닥 장식인가? 아니, 역시 벽화겠지. 만약 바닥 장식이라면 돌이 제법 촘촘하고 거칠어 보이는데, 밟을 때 좀 아프고 걸리적거렸을테지.





요게 바닥에 깔린 모자이크. 아까 본 모자이크보단 맨들맨들해보인다.

...옛날 목욕탕 이용한 사람들은 여길 맨발로 다녔을까? 아니면 신발을 신고 다녔나? 그럼 바닥이 엄청 더러워졌을텐데? 실내화가 따로 있었나? 입구에서 갈아신는 건가? 입구에 신발장도 있었을까? 신발장이 있었다면 신발장은 어떤 식으로 관리됐을까? 역시 번거로우니까 그냥 자기 신발 신고 들어갔나?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세척하는 공간이 있었을까? 바닥이 더러워져도 별로 신경을 안썼을까?

궁금하다. 목욕탕을 좋아하는 나는 요런 사소한 것들이 매우 궁금하다!





카라칼라 욕장은 크기도 크기이지만, 그 큰 규모의 욕장이 여러개의 벽으로 나뉘어 기능별로 구분되어 있다. 거기에 또 놀랐다.


* 이 욕장은 아래와 같이 나뉘어 있으니, 이용에 참고 바람.

- 열탕 (칼라디움) : 가장 안쪽에 원형으로 지어져 있음.
- 온탕 (테피다리움) : 칼라디움 아래에 위치함.
- 냉탕 (프리기다리움) : 테피다리움 아래쪽에 구분되어 지어져 있으며, 두 개의 회랑과 나라티오로 나갈 수 있음.
- 실외 수영장 (나라티오) : 프리기다리움과 연결되어 있음.

그 외 도서관, 회의실, 오락실 등의 시설 완비. 카운터에서 안내.



...이용하고 싶어!





전세계 목욕애호가들의 심금을 울렸던(?) 제국의 공중 목욕탕 카라칼라 욕장은, 그래서 21세기 현재, 돌만 남아있다. 애석한 일이다...

부탁인데 로마시는 근처에 복원 목욕탕을 설립해주길 바란다. 규모가 작아도 좋고 복원물이 조악해도 좋으며 이름만 '카라칼라'여도 좋으니 작은 목욕탕 하나만 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 같은 목욕인들이 성지순례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자, 기억해내! 너희는 목욕의 민족이었다고!




참고로 이 유적, 목욕은커녕 요새는 객석을 마련해서 오페라 같은 걸 상영한다고 한다. 두배로 애석한 일이다...

아닌가? 그 시절 목욕탕은 오락시설이었으니, 비슷한 오락시설인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것도 뭐... 끼워맞추면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봐야겠다. 장기인 무용으로 이 무대를 장악해본다! 가자, 나의 몸!






음, 무대로 손색이 없군! 오페라 관람하면 멋지긴 하겠다. 저런 멋진 백그라운드가 있으니.

...다시보니 민망해서 구글에서 제공해주는 무료 음악을 깔았다. 어휴, 뭐하는 거야 저기서...





3.

멋진(?) 동영상을 얻어서 뿌듯한 마음으로 카라칼라 욕장을 나섰다.

로마의 거리는 맑고 쾌적했다. 역시 로마는 1월이지. 룰루랄라거리며 걸어다녔다. 마침 테르미니 쪽에 약속이 있어서, 그쪽으로 슬슬 걸어봤다. 아래부터는 걸으면서 본 것들. 로마의 시내 사진.




사람 사는 동네.




오렌지? 맞나? 하여간 주렁주렁. 1월 맞아?




낙엽 청소하고 모아둔 자리에 팁 박스가 있었음. 팁이 원하는 만큼 안쌓이면 다시 더럽히는 걸까...




라테라노 궁전 옆 광장. 한산하니 좋았다.




그 광장에서 보이던 오벨리스크. 이놈의 오벨리스크는 왤케 곳곳에 많아.




로마 4대 성당 (또 몇대 나왔다 그놈의 몇대) 중 하나라고 하는 라테라노 대성당.

이 근처 배회할 때 하늘은 푸르르고 거리는 한적하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적당해서 기부니가 매우 좋았음.




똑같은 폼으로 걷는 두 남성의 뒷태. 그 뒤쪽으로 보이는 포르타 산 조반니.

저것도 위에서 봤던 아우렐리우스 성벽의 일부라는데, 요기껀 벽이 낮은 편이다. 아까 버스에서 봤던 그 높은 성벽은 증축한 걸까? 아님 여기가 뭔가 특수한 기능을 해서 일부러 요렇게 지은 건가? 잘 모르겠당.




요긴 스칼라 산타. 외관 공사 중인데 거대한 광고판을 붙여놔서 못보고 지나칠 뻔 했다.

여긴 좀 특이한 걸로 유명하던데... 들렀다 가야겠다.





4.

스칼라 산타Scala Sancta는 어떤 성스러운 계단을 보관하고 있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그 성스러운 계단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독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였다.

그 계단은 빌라도가 머물던 로마 총독부의 계단이다.




그 말인즉, 이 계단은 예수가 십자가형 선고를 받을 때 재판장을 향해 올라갔다가 채찍질을 받으며 끌려 내려갔던, 그 계단이라는 거다. 그래서 많은 순례자들이 당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계단을 무릎으로만 기어서 올라가며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나는 무릎이 좋지 않은 편이라, 아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로 어떤 신실한 순례자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맹하게 있던 나는 그들의 기세에 떠밀려 어느새 계단에 무릎을 딛고 서게 되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이미 뒷쪽에 일렬로 무릎을 딛고 선 순례자들은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며 계단을 기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진지함을 뚫고 아래로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으으, 으으...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오르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빠르게 올라야겠다. 그러나 내 앞에는 가족 단위로 온 순례자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약간의 틈이라도 생기면 거길 파고들어 얼른 올라갈텐데, 왜인지 그들은 속도를 맞추어 나란히 길막(?)을 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분들 역시 신실하고 깊은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는지, 역시 절박한 몸짓으로 기도를 하며 매우 천천히 계단을 기어올랐다.

그러니까,

[스칼라 산타의 성 계단]

- 신실한 순례자들 -
----- 나 ------
- 신실한 순례자들 -


이런 모양새였다. 앞뒤로 막혔다!

나는 순례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드릴 기도야 뭐... 감사... 회개... 참회... 뭐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릎이 아픈 채로는 생각도 잘 나질 않는다. 으으 무릎 시려워... 그냥 저기 성당 의자에 앉아서 드리면 안될까요...

안 된다~

너는 그 신실한 순례자들 사이에 껴서 올라와야 하느니라~

계단 오르면서 반성 좀 해라~


뭐 그런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지만... 그리 생각할만한 상황이었다. 나는 울상이 된 얼굴로 시린 무릎을 계속 비비며, 그 기도 오래하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스칼라 산타의 계단을 올랐다...




그 짧은 계단을 오랜 시간 걸려서 올랐다. 위쪽은 예배당이었고 의자가 있었다. 후들거리며 일어서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아이고 내 무릎.

잠시 의자에 앉아 쉬며 천장화를 올려다봤다. 기도도 했던 것 같다.

음, 사실 이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무슨 기도를 했는지, 일기장에 써두질 않아 지금은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고보니 다녀온지 1년이 다 되어가네. 작년 오늘 정도에 프라하에서 고기 강매를 당했었는데. 하하. 고작 1년 전의 일인데 엄청 옛날일 같다.

그렇게 과거의 나와 신만이 기억하는 기도를 드린 뒤, 관리인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관리인 왈, 점심시간이라 잠시 문을 닫는다고, 다시 오고 싶으면 오후에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한번 더 오면 내 무릎이 아작날 것 같으니 절대 다시 오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내려가는 계단. 다행히 이 계단은 두 발로 내려갈 수 있다.




구약 성서의 내용이 그려진 벽화를 보며 터덜터덜 내려왔다. 사실 구약은 공감가지 않는 내용들이 많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호불호가 무슨 상관이겠느냐마는. 이런 말 하면 혼날라나. 하하.





5.

산타 스칼라에서 15분 정도 더 걸으면 약속장소인 테르미니 역이다.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보기로 한 사람은, 근처 숙소에 들러 짐을 풀고 나오겠다고 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으슥한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어딜 갈까 구글링을 하다가, 젤라테리아 파씨Gelateria Fassi라는 곳을 찾았다.




요기. 안에 들어가면 꽤 넓고 테이블도 많다. 테르미니 역 근처는 땅값이 싼가 보다.




계산대에서 직원에게 값을 치른 뒤, 영수증을 들고 아이스크림 매대에 가서 맛을 골랐다. 계산대 직원도, 아이스크림을 퍼주는 직원도, 다들 생글생글 웃으며 일을 했다. 이런 친절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았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무슨 맛을 골라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직원에게 추천을 받았다. 어떤 맛을 골랐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직원이 골라준대로 고르긴 했다.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아선 아마 맛에 임팩트가 있었던 건 아니었나보지.




요게 그 젤라또 컵. 작은 컵인데 맛을 3가지나 고를 수 있고, 위에 생크림까지 올려준다. 가격은 놀라지 마시라 1.6유로. 3가지 맛 초이스에 1.6유로라니 뭐 이런 착한 가격이 다 있어!

맛은 평범한 축이었(지 않나 짐작하)는데, 그 저렴한 가격과 3가지나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마음에 들었다. 또 직원도 친절하고, 가게 내부도 쾌적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나는 만나기로 한 사람이 조금 늦게 나오기를, 그래서 내가 이 젤라또 가게에 좀 더 오래 머물기를 살짝 바랐다.




오! 마침 만나기로 한 사람이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단다. 그 사람은 내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완전 아니올시다! 이쪽은 럭키에 땡큐베리감사다!

왜냐면 왜냐면, 나는 지금 로마의 분위기 좋고 따뜻한 젤라또 가게에 있거든. 얼마든지 기다림이란 행위를 할 수 있다. 나는 걱정 말라고, 천천히 오라고 답한 뒤, 이 젤라또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델로 끄적거리며 시간을 놀렸다.




로마에 1도 감흥 없다는 요리사 아재와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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