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 22:40

타이중 (9) 공항으로 └ 타이중 힐링여행

1.

타이중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마음 속으로 정해둔 시간에 일어나 대충 준비를 하고 호텔 로비로 나가보니, 막 출근한 싱위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소품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강아지처럼 달려와 반가워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샀다며 타이완의 과자와 젤리를 안겨줬다. 나는 뭘 이런 걸 다 사왔냐며 고마워하다가, 그녀에게 슬픈 소식(?)을 알렸다.

나 : 싱위! 나 이따가 비행기 타러 가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싱위 : 네? 왜죠? 왜죠? 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녀는 뭔가 부당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한국어로 "왜죠?"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근데 그 억양이 무진장 귀엽다. 나는 그녀의 "왜죠?"를 더 듣기 위해 오버해서 아쉬워했고, 그녀는 내 바람대로 왜죠를 잔뜩 해줬다. 나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징징거리는 그녀를 달래줬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늦게 웨이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웨이 : 나 지금 너희 호텔 앞인데 문이 잠겨있어.
웨이 : 지금 시간대에는 키가 있어야 문이 열린다는데.
웨이 : 문 좀 열어주지 않을래.
웨이 : 열어줘...


으앗!





2.

나는 굴러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문을 열어줬다. 호텔 건물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웨이는, 날 보고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했다. 나는 웨이를 데리고 2층 로비로 올라갔다. 로비에 있던 싱위는 웨이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챘다.

싱위 : 아, 이 분이 그...?
나 : 응. 맞아. 얘가 웨이야.


싱위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나왔다고 신기해하며 웨이에게 인사했다. 웨이는 당황하며 눈을 끔뻑이다가, 머쓱한 얼굴로 인사를 받아줬다. 그리고 한동안은 싱위를 바라보지 않고 나만 보며 말했다. 왜인지 싱위를 어려워하는 느낌인데. 젊은 여성을 어려워하는 웨이라니. 내게 있어 굉장히 생소하고 희귀한 광경이었는지라 - 나는 전혀 어려워하질 않으니! - 재밌게 구경했다.

웨이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궁금한 게 있다며 싱위에게 무언가를 물어봤다. 웨이의 질문을 들은 싱위는 - 웨이는 허공을 보며 물어봤기 때문에 싱위는 이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 친절하게 답을 해줬다. 처음엔 나를 배려해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몇몇 단어에서 막힌 싱위는 중국어를 쓰기 시작했고 곧 모든 대화는 중국어로 이루어졌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웨이 : 쟤(나)랑 아침밥 먹을만한 곳 있음?
싱위 : 이쪽으로 가면 있음.
웨이 : 나 검색해서 알아온 곳도 있는데.
싱위 : 거기는 저쪽으로 가야함. 거기도 괜찮음.


그리고 이어지는 가게 외관 묘사, 추천 메뉴, 가는 방법 등등.

입이 근질근질했던 나는, 둘의 딱딱한 대화에 몇번이나 끼어들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입을 열면 간신히 중국어로 균형을 잡은 언어체계(?)가 다시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입다물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기다리는 건 지루하다. 알 수 없는 중국어를 옆에서 들으며 따분해진 나는, 호텔 로비 소파로 걸어가 벌러덩 누웠다. 아이 푹신해라. 나는 머리를 대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일어나서 편지 쓴 게 좀 피곤했긴 했나보다.

얼마나 지났을까. 웨이가 일어나라며 나를 발로 툭툭 걷어차는 바람에 깼다. 음냐. 잘자고 있었는데. 나는 괘씸하다는 듯 웨이에게 누워서 발길질을 했고, 싱위는 옆에서 키득거리며 우리를 바라봤다.

웨이 : 어제 잠 못 잤어?
나 : 아니 뭐... 근데 아침밥 먹으러 갈 거야?
웨이 : 응. 저쪽에 괜찮은 곳이 있대. 가까워.


나는 시계를 보고 공항으로 가는 시간을 대충 계산해보았다. 어제 구글로 호텔(타이중 역)에서 타이중 공항까지 거리를 찍어봤을 때 19km 정도 나왔었는데. 운전을 안해서 거리에 감이 없지만... 뭐 19km 정도면 금방 가지 않나? 그럼 지금 웨이와 아침 먹을 여유 정도는 있겠군.

이 모든 생각을 거의 3초 정도에 끝낸 나는,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나 : 그래, 밥집이 어디라고?





3.

싱위는 자신이 근무시간만 아니면 같이 갔을 거라며 아쉬워했고, 나는 싱위의 몫까지 먹고 오겠다며 화이팅 포즈를 취했다. 웨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안하다가, 나와 같이 밖으로 나갔다.

밥집을 향해 가는 동안, 웨이가 나에게 물었다.

웨이 : 저 여자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한국어가 유창한 것 같아서.
나 : 나도 믿기 힘들지만 싱위는 타이완 사람이야.
웨이 : 그래? 대단하네.


웨이는 싱위가 한국말을 잘 하니까 나랑 더 긴밀하고 상세한 대화를 나눴을거라며 부러워했다. 내가 싱위와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와 자기와 영어로 대화를 할 때의 표정이나 억양이 많이 다르다나.

나 : 그럴거야. 나 말하는 거 조금 이상하지 않아? 영어 쓰는 거 너무 어려워.
웨이 : 너 남미에 있을 땐 말 잘했잖아?
나 : 다 까먹었어. 한국에선 영어 안 쓴다고. 그래서 나 너랑 할 얘기 많은데 자신이 없어서 입을 못 열고 있어.
웨이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랬어?


웨이는 웃으며 그럼 자신이 한국어를 배워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일 쉬운 한국어 단어 하나만 알려달라고 했다.

나 : 제일 쉬운 단어는 이거. "응!".
웨이 : 응? 응이 뭐야?
나 : Yes가 "응"이야!
웨이 "응!" ㅋㅋㅋㅋㅋㅋ 뭔가 웃기다.


"응!"의 발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때부터 계속 "응!"을 쓰는 웨이였다.

웨이 : 그러고보니, 우리도 타이완어가 있는데.
나 : 응? 타이완어랑 중국어랑 다른 거였어?
웨이 : "응". 좀 달라.


그러면서 자신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겐 중국어를 쓰고, 상대가 타이완인이라는게 확실해지면 그 때부터 타이완어를 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싱위랑도 처음 만났기 때문에 타이완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썼다고 했다.

나 : 안불편해? 그렇게 나눠쓰는거?
웨이 : "응". 우리는 그냥 그렇게 써왔는데.


음, 마치 우리나라에서 지방 사람들이 표준어 쓰다가 동향인 만나면 사투리 쓰는 그런 느낌인가? 나는 이해를 할듯 말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웨이가 가리키는 밥집으로 들어갔다.





4.

웨이와 함께 간 타이중의 현지 밥집은,




분리되어 있으나 뭘 하는지 아주 잘 보이는 주방과,




에어컨은 없지만 그늘이라 어느정도 더위를 견딜만한 테이블을 갖고 있었다.

주방 구역의 카운터라 할 수 있는 곳에는 밥과 반찬, 국물 요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것들 중에 먹고 싶은 것들을 몇 개 고르면, 직원 아줌마가 접시 하나하나를 따져 계산을 해준 뒤, 우리 자리까지 음식을 가져다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는 메인메뉴 하나를 시키면 사이드메뉴가 알아서 딸려나오는데. 이곳은 별다른 메인메뉴 없이, 사이드메뉴만 골라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 조금 생소했다.

나는 웨이의 도움을 받아 메뉴를 골랐고, 카운터 앞에서 아침식사값을 치르기 위해 돈을 꺼냈으나, 결국 이것도 웨이가 사줬다. 나는 환전해온 돈이 많이 남았으니 제발 내 돈을 쓰게 해달라고 말했으나, 웨이는

웨이 : 오, 그래? 그럼 다음에 올 때 환전 안해도 되겠네.

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 : 다음? 다음 언제?
웨이 : 너 타이완에서 타이베이랑 타이중만 본 거잖아.
나 : 응. 그렇지.
웨이 : 이봐, 타이난을 안갔잖아! 타이완에 왔으면 타이난을 가야지.
나 : 타이난? 남쪽에 있는 곳?
웨이 : 응. 그리고 가오슝이랑 컨딩도 가야하고. 화롄도 가야지. 너 타이완 올 일 많아. 돈 아껴둬.


...타이완 전국일주를 시킬 셈인가!?

웨이 : 다음번엔 타이난에서 보자고.

멋대로 타이난에서 약속을 잡는 웨이. 어쩔 수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음번엔 거기서 더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다.




이윽고 아침식사가 나왔다. 조금 단촐해보이지만 맛있었다!

맛은 괜찮았는데, 웨이가 자꾸 옆에서,

웨이 : 여기보다 타이난이 더 맛있어. 타이난에 내가 잘 아는 밥집이 있거든. 아, 타이난의 그 밥집! 진짜 괜찮은데. 너 다음번에 타이난 안가면 후회할 걸.

등등으로 방해 아닌 방해를 해대는 통에 정신 사납게 먹었다. 에잇, 성가셔. 간다고. 다음에 타이난 가고 만다, 진짜!





5.

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공항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짐을 쌌다. 싱위는 계속 한숨을 내쉬며 나보고 하루만 더 있으라고 했고,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정말 그러고 싶다고 했다. 싱위는 더 뭐라고 하려다가, 전화가 걸려와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 사이 웨이는 내 옆에서 아무 말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뭘하고 있나 봤더니, 구글을 이용해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찾고 있었다.

나 : 안찾아봐도 괜찮아! 나 공항에서 타고 온 버스 알거든. 그거 타면 돼.
웨이 : ......너 몇시 비행기랬지?
나 : 나? 열한시!
웨이 : ......있잖아, 내 생각에 국제선은 최소한 1, 2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말야.
나 : 응! 공항 가까우니까, 상관 없어.
웨이 : ......구글에는 2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

나 : 어? 잠깐만, 공항까지 분명 19km라고 했는데? 맞지?
웨이 : 응, 여기도 그렇게 뜨는데.
나 : 19km면 가까운 거 아냐? 왜 2시간이나 걸려?
웨이 : 버스잖아. 타이완은 교통체증이 심하기도 하고... 어디보자... 공항가는 버스가 시내를 관통하네. 그럼 이 시간이 맞아. 여기 트래픽잼 엄청나거든. 너 올 때도 버스 타고 왔다며. 그 때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 안나?


아...

맞다. 타이중 첫날 버스타고 시내로 들어올 때, 분명 해가 떠있을 때 탔는데 석양도 보고 땅거미도 보고 야경까지 보다가 타이중 역 근처에 내렸었더랬다. 맞네, 한참 걸렸던 게 맞는 것 같아...

나 : 헉, 어떡하지! 어떡하지!

내가 소란을 피우자, 전화를 끊은 싱위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싱위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했고, 싱위는 어머어머거리다가 내 옆의 웨이와 빠르게 중국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길 하는거지?

나는 둘을 내버려두고 주섬주섬 짐 싸는 걸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떡하지? 버스 타면 100% 늦을 것 같은데.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이란 말인가!





6.

...난제고 위기고 뭐고, 택시 타면 그만이다. 나는 3초만에 평정심을 되찾고 택시나 타야겠다고 다짐했다. 버스가 늦을 것 같으면 택시를 타는 게 상식적이지. 무슨 호들갑이람, 나 자신. 택시 아저씨한테 안 막히는 구간으로 가달라고,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해야겠다. 그래봤자 19km인데 뭐. 따블 따따블은 어디든 제시간에 갈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잖아!

다시 가벼워진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소파에 기댄 내게, 이야기를 끝낸 두 타이완인들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비장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싱위 : 이 호텔 옆에 스쿠터 대여점이 있어요.
웨이 : 나는 스쿠터를 빌릴 수 있고 말이야. 짧게 빌리는 건 무지 저렴해.


응?

나 : 스쿠터? 아냐. 나 택시타면 돼.

타이완인들은 내 말에 손사래를 쳤다.

웨이 : 뭐라고? 왜 택시를 타지? 택시는 비싸다고.
싱위 : 그리고 택시도 길 막히면 꼼짝못해요. 어제 우리 타봤잖아요.


그러면서 자꾸 스쿠터가 짱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수세에 몰려 택시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나 : 길 막혀서 택시도 못가면 스쿠터라고 별 수 있나?
웨이 : "응!". 스쿠터는 차들 사이로 막 갈 수 있다고.
나 : 짐은? 짐은 어쩌고? 나 캐리어 있다고.
웨이 : 내 다리 밑에 끼고 달리면 돼.
나 : 위험하지 않을까? 택시 트렁크에다 넣으면...
싱위 : 택시는 비싸요. 돈 쓰지 마요.
나 : 아냐! 나 돈 많아! 돈 써도 돼!


나는 그들에게 '일부러 현금서비스를 받아 환전을 해왔지만 정작 현지에서 신용카드를 주로 써서 겁나 많이 남은 타이완 돈'을 보여주며 나의 재력 - 택시는 탈 수 있을 - 을 강조했다. 게다가 버스가 아닌 택시라면 밀리는 중심가는 피할 수 있을테고 그럼 제법 금방 도착하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리고 뭐... 솔직히 말하면, 난 스쿠터가 무지 무섭다. 올 봄에 미니미니랑 경주에서 스쿠터 탈 때도 겁나 쫄아서 오들오들거리며 탔었다. 내가 뒤에서 정신 못차리는 걸 본 미니미니는 '다시는 두 발 달린 걸 태우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게다가 이번엔 짐도 많은데. 괜히 짐 싣고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해? 이번 타이중 여행은 정말 힐링힐링했는데 이게 이번 생의 마지막 여행이 되면 어떡하냐고!

이렇게 나는 1. 충분한 돈 / 2. 긍정적인 전망 / 3. 개인적인 공포 등의 근거를 들어 그들을 설득했다. 물론 공항에 가는 건 난데, 대체 왜 내가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타이완 사람들은...

웨이 : 하하하. 거절할 필요 없어. 스쿠터 잠깐 빌려서 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건 일도 아니지.
나 : 여태까지 내 이야기를 뭘로 들은 거야! 나 택시 탈 거라니까!
싱위 : 정말 잘됐어요! 내가 태워주고 싶지만, 일 때문에 말이에요.
나 : 이봐, 나 택시 탈 거라곳!
웨이 : 나 베스트 드라이버라서. 내가 태워주면 돼.
나 : 아니, 택시를...
싱위 : 나도 베스트 드라이번데. 아쉽게 됐어요.
나 : 택시...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날 스쿠터에 태워 공항에 보내고 있었다! 아니 상상속에선 벌써 공항에 도착했다! 아니 비행기 타고 한국 날라가는 중이다! 왜죠? 얘네 왜 이래!? 왜 이렇게 스쿠터를 좋아해!?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던 나였지만, 적어도 이 당시의 나에겐 택시를 탈 자유의지와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어버버거리다가 어느새 웨이가 빌려온 스쿠터에 올라타게 되었고, 진심어린 싱위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떠났다.

뭐야 이거...





7.

나 : 아악! 너무 빨라! 살려줘!
웨이 : ...지금 40으로 달리고 있어. 좀 더 바람을 느끼며 편안하게 있으라고.


나는 웨이 뒤에 앉아 입으로만 호들갑을 떨었다. 온몸을 이용하여 내 두려움과 떨림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운전하는 웨이를 방해하게 되겠지. 그럼 웨이는 운전 부주의로 사고를 내고 그럼 나는... 나는...!

나 : 아아아악! 나 죽는다! 아이고... 아이고!
웨이 : 알았어! 30으로 달릴게! 30! 너 왜 이렇게 겁쟁이야?


웨이는 뒤에서 징징거리는 날 놀리며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자신의 발 밑에 위치한 캐리어를 안정적으로 고정시키며 한숨을 쉬었다.

웨이 : 네가 겁이 아주아주 많다는 걸 이제 알겠어. 대체 혼자 여행은 어떻게 다니는 거야?
나 : 보통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스쿠터 탈 일은 없어! 난 무면허라고!
웨이 : 음... 여튼 난 학생 때부터 스쿠터를 탔어. 그리고 무사고 운전자야. 좀 더 나를 믿도록 해.


웨이는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어 내가 스쿠터가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도록 노력했다. 너 회사 일은 어떠냐, 난 최근에 이직했는데 보스가 완전 구리다, 맨날 야근한다, 나쁜 새끼다, 너 전공이 뭐랬더라, 화공이냐, 같은 공돌이네, 너도 야근 많이 하겠네, 뭐 너는 야근 안한다고, 왜 너는 야근 안함, 이런 젠장 다른 얘기 하자, 왜 타이완 여름에 왔냐, 여름은 덥지 않냐, 10월이나 11월 이 때가 좋다, 여름휴가 때문에 지금 온거라니, 비행기값은 얼마였냐, 왤케 비싸냐, 여름휴가철이라 그랬단 거냐, 한국인들의 여름휴가는 다 똑같은 거냐, 그거 디게 이상하다, 알았어 다른 얘기 하겠다, 목마르면 말해라, 저기 음료수가게 많다, 너 온천 좋아하지 않냐, 볼리비아에서 온천 갔던 거 생각난다, 타이완에 온천 많다, 다음에 놀러오면 온천가자 등등...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많이 하나, 무서워 죽겠는데 그냥 내버려두지, 운전에나 집중했으면...' 등등으로 생각했던 나는, 어느새 웨이의 화술에 말려 대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와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자, 점점 스쿠터의 속도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겁쟁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웨이에게 박수를! 그는 정말 이런 것에 재능이 있다니까.

난 어느새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주변 풍경을 둘러볼 여유까지 갖게 되었다.





8.

나 : 웨이. 저 네모칸은 뭐야?

횡단보도 바로 앞 가장 오른쪽 차선에는, 차가 두어대 정도 들어갈 크기의 하얀 네모칸이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횡단보도에 신호가 걸리면, 그 네모칸으로 스쿠터들이 잔뜩 몰려와 정차를 하는 것이었다. 스쿠터 전용 정차 공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웨이를 통해 한번 더 확인을 받기로 했다.

웨이 : 네 짐작이 맞아. 신호에 걸린 스쿠터들이 저 안쪽으로 안들어가면 불법이야. 안전을 위해서.

스쿠터가 워낙 많이 다녀서 타이완의 이륜차 사고율을 걱정하던 나는, 나름의 안전장치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옆으로 작은 스쿠터가 한 대 지나갔다.

나 : ...어? 뭐야, 방금 지나간 인간 덩어리는!?...
웨이 : 오! 네 명이 한 스쿠터에 탑승했군.


내겐 그야말로 진풍경이었지만, 웨이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광경인 것 같았다. 웨이가 하도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길래, 나는 웨이에게 물었다.

나 : 저래도 괜찮아? 위험하잖아!
웨이 : 음... 뭐 괜찮지 않겠어? 다들 헬멧은 썼잖아.


나는 다시 이 나라의 이륜차 사고율을 걱정하기로 했다.





9.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든 이 지역의 교통사고율을 걱정하든 상관없이, 스쿠터는 열심히 제 갈 길을 달려갔다.

타이중의 하늘은 뭉게구름 가득한 짙은 파란색이었다. 태양은 남동쪽 하늘에서 이글거렸고, 그 덕분에 노출된 팔다리는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썬크림을 꼼꼼하게 바를 걸 그랬다.

웨이가 모는 스쿠터는 쫄보인 누구씨 덕분에 그렇게 빠르진 않았지만, 막힘없이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 차량이 많아 교통체증이 심하다던 도로구간이 대체 어디인질 모르겠다. 차가 막혀도 차 사이로 지나다니는 스쿠터를 타고 있어서 체감하지 못하겠군.

귀에서는 펄럭이는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바람, 그 바람 덕분에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도 시원하게 달릴 수 있었다. 싱위의 말에 의하면, 많은 스쿠터 때문에 타이완의 대기오염은 심각한 수준이랬는데, 새파란 하늘 아래에서 청량한(듯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다.

시내를 빠져나오자 한가로운 논밭과 작은 강이 나왔다. 저 멀리로는 도시의 빌딩들이 아스라히 보였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카메라를 꺼내고 싶어졌지만, 카메라는 내 엉덩이 아래 오토바이 수납공간에 들어있었다. 나는 작은 아쉬움을 느끼며 보이는 광경 그대로를 내 망막에 담았다. 잊지 않길 바라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한채,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건물이, 어째 내가 타이중에 도착하며 봤던 그 공항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내가 이런 공항에 내렸던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이곳은 경비가 엄청 삼엄했다... 공항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분위기여도 괜찮은가?

나 : 여기 맞아? 뭔가 이상한데...
웨이 : 어... 여기가 어디냐면...



[타이중 공군기지 공항 후문]


웨이 : ...라는데?
나 : ...뭐어어어!? 어디라꼬!?


공항에 데려다달랬더니 공군기지엘 데려왔잖아!

웨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답게 빠르게 진정했다. 그리고 마침 주변에서 서성이던 사람들(군인은 아니었고 일반인이었는데, 왜 공군기지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에게 길을 물었다. 그들 왈, 우리의 원래 목적지인 타이중 공항은 타이중 공군기지 공항 후문에서 길을 돌아나와 더 가야한단다.

웨이 : 음. 아마도 내가 구글맵에 목적지를 잘못 찍었나봐.
나 : 오! 네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놀라운데. 그래도 뭐, 덕분에 좋은 풍경 봤잖아.
웨이 :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시간 내에 공항에 갈 수 있을지... 으음...


정작 비행기를 타야하는 나보다 더 걱정하던 웨이는, 헬멧을 고쳐쓰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시계를 한 번 보고, 구글맵을 한 번 보고, 나를 흘낏 돌아보더니,

웨이 : 우리 빨리 가야돼! 달릴게!

라고 말한 뒤, 아까와는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진장 무서웠지만 웨이가 달려주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건 결국 나였기에, 그냥 얌전히 눈을 질끈 감고 구구단을 외우며 버텼더랬다. 그래서 그 이후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10.

웨이 : 도착했다!
나 : 우아아아! 도착했다! 살아있다! 감사하다!


드디어 진짜 공항에 도착했다! 살아서 공항에 도착했다! 넘나 기쁜 것이다! 시간도 아슬아슬 세이프!

나는 스쿠터에서 내리자마자 웨이와 양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경직된 근육들을 주무르며 에구에구 소리를 냈다. 웨이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익숙한 듯 스쿠터에서 짐을 꺼내어 내게 넘겨줬다. 나는 웨이를 바라보며 뭐라고 그럴듯한 작별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웨이는,

웨이 : 빨리 들어가! 체크인 시간 끝나겠어!

라며 나를 보챘다. 그 급한 말투에 나도 덩달아 급하게 짐을 챙기고, 허겁지겁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몸을 돌려 웨이에게 달려가 새벽에 쓴 편지와 도시락통을 건네줬다. 이거 쓰느라고 잠도 못잤는데 깜빡하고 못 줄 뻔했다! 웨이는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얼결에 받아들었지만, 그답게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다시 내 등을 떠밀었다.

웨이 : 얼른 가서 수속 밟으라고!
나 : 알았어! 타이난에서 봐!
웨이 : ㅋㅋㅋㅋㅋ 그래! 다음엔 타이난에서 보자고!


그렇게 타이난에서 보자는 약속이 이번 타이중 여행의 마침표가 되어줬다.





11.

웨이는 내가 수속을 마친 뒤 게이트 입구까지 무사히 이동했다는 걸 페이스북 메세지로 확인한 후에야 공항을 떠났다. 혹시라도 내가 비행기를 놓쳤을 때를 대비하여 주차장에서 기다려준 것이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는 늘 감사하고 미안하다. 나는 웨이에게 감사 문자를 보냈다.

탑승을 기다리다가 싱위에게서 온 카톡을 뒤늦게 확인했다. 그녀는 나와의 이별에 아쉬움을 표하는 한편, 자신이 아침에 건네준 초콜릿 등의 선물 봉투를 꼭 뜯어보라고 전했다. 선물 봉투 속에는 곱게 접힌 손편지가 들어있었다. 서툰 한글로 적힌 손편지를 읽으며 나는 거의 울 뻔했다.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타이완이 내게 선물해준 다양한 인연들과 사건들을 떠올렸다.

우선 웨이와 싱위를 빼놓을 수 없겠지. 이 둘은 타이완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 외에도 시내로 들어오면서 버스비를 대신 내준 언니, 자신은 날씬하니까 네 무거운 짐을 자기 쪽으로 놓으라던 청년, 궁원안과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소개해준 직원, 이중제에서 얼결에 구입한 만두를 함께 나눠먹은 가족들, 얼수이 역의 상냥한 역무원들, 지지셴에서 만난 경찰 가족들, 르웨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부부와 백화점에서 날 위해 모여줬던 직원들 등 정말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 뿐만이 아니라 멋진 풍경과 경험들도 얻었다. 처청의 나무 내음과 둥파러우 도시락, 르웨탄까지 가는 버스에서 들은 음악, 르웨탄 호수의 맑은 공기와 자전거 도전기, 시원하진 않았지만 재밌는 체험이었던 마사지샵, 도심 속 정원 카페와 야시장까지...

하나하나 즐겁고 따뜻한 일들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여행의 설렘을 느끼게 해주고 두근거림을 불러일으켜준 타이완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비행기는 궤도에 올랐고, 안전벨트 싸인에 불이 꺼졌다. 나는 좌석 테이블을 내리고,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를 꺼내어 일기를 써내려갔다...





12.

여태까지 그 일기에 적힌 내용으로 얼추 포스팅해왔다. 포스팅을 하는 동안, 따뜻함으로 가득찬 여행의 기억들을 다룰 수 있어서 즐거웠다. 정말인지 힐링힐링한 여행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장에 적힌 글만 남았는데, 조금 부끄럽지만 이 글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당시의 나는 힘들었던 과거의 나와 앞으로도 힘들 미래의 내게 건방지게도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벅차고 두근거리는,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여기는, 여행길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어떤 감정과 감각들이 있다.

다신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두근거림, 나에게 없거나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용기, 더 넓은 세상의 누군가를 만나 나의 답답함을 토로할 수 있는 속 시원함,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주어지는 준비된 행운, 어쨌든 모두 잘 될 것만 같은 낙관적인 생각... 따위의.

여행이 막 끝난 지금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절대적인 확신 속에서 긍정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들을 삶에 치여 금방 잊을 것이다. 아마 잊는다는 것도 모르고 잊을 것이다. 늘 그래왔다.

하지만 괜찮다. 적당한 때에 다시 떠나면 된다. 그럼 희미하게 잊혀졌던 그 모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감각들은,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날 찾아올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전부 내 안에 있으니."







끝!




2017/09/13 11:57

타이중 (8) 웨이와 펑자 야시장 └ 타이중 힐링여행

1.

타이중의 펑자 야시장(펑지아 야시장, 逢甲夜市)은 타이베이의 스린 야시장과 쌍벽을 이루는 타이완의 거대 야시장이다. 펑자 야시장을 내 짧은 어휘력을 발휘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음식, 무지 많다. 사람, 무지 많다. 규모, 무지 크다. 눈에 보이는 단어는 오직 한자.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오직 중국어. 아이고 정신없어라.

다른 포스팅에서도 몇 번 밝혔지만, 나는 맛없는 음식점을 골라 들어가는 저주받은 능력이 있으며, 자매품으로 유명한 맛집에 찾아가도 맛없는 메뉴를 골라버리는 눈물 나는 능력이 있다. 덕분에 그렇게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혼자 뭔가 맛있는 걸 제대로 먹어본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다.

게다가 나는 중알못이다. 메뉴를 암만 들여다봐도 까막눈인 나로썬 대체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아예 야채메뉴인지 고기메뉴인지 매운지 달달한지 시큼한지도 모르겠다. 알 수 있을리 없지. 내가 아는 중국어는 "너 졸라 잘생겼어!" 뿐이니.

그런 내가 펑자 야시장에 혼자 갔다면?

아마 나는 옛날 개그 만화에 나오는 빙글빙글 눈을 내 안면에 이식한 채로 무수한 인파에 치여 어버버하며 다니다가 이상한 음식만 잔뜩 먹고 엄한 곳에 화풀이나 했을 것이다. 혼자였다면 말이다.





2.

하지만! 이 날의 내겐 웨이가 있었다. 그냥 웨이도 아니다, 웨이X2, 웨이웨이다!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웨이는 타이중에 제법 와본 적이 있어서 - 친척이 산다고 했다 - 펑자 야시장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완벽한 일일 가이드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어지럽게 적혀있는 중국어 간판 아래를 거침없이 파고드는 웨이를 보며 뒤에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웨이는 그런 날 돌아보더니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웨이 : 너 중국어 할 줄 알아?
나 : 에이, 알면 너랑 중국어로 얘기했겠지!
웨이 : 그럼 대체 혼자 여행을 어떻게 다니는 거야?


나는 웨이에게 칫칫칫 손가락을 흔들었다.

나 : 웨이!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웨이 : 어?
나 : 나는 스페인어를 1도 모르는데 남미를 여행했다고.


웨이는 그 때가 떠올랐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신기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언어를 모르는데 그 나라를 여행할 수 있을까 하는 표정. 하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에 능통한 그로썬 말이 안 통하는 지역에서 여행을 다닌다는 게 생소하겠지. 내겐 그 편이 더 신기하지만 말이다.

나 : 어쨌든! 나는 언어는 잘 몰라도 인복은 있어서 어딜 가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것 봐! 오늘은 내게 네가 있잖아!
웨이 : 하하하! 그래. 오늘은 내가 도와줄게. 그럼 먹을 준비는 됐지?






3.

펑자 야시장 초입에서, 웨이는 목이 마르니까 음료수부터 마시자고 했다.

웨이가 데려간 곳은 펑자 야시장 어딘가의 파파야 우유(무과니우나이, 木瓜牛奶)집이었다. 파파야 우유라니! 맛있는 거 + 맛있는 거 = 아주 맛있는 거다! 나는 좋다고 박수를 치며 파파야 우유를 주문했다.

이어서 계산을 하려는데, 웨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을 꺼내어 내 것까지 돈을 내려고 했다. 응? 그럴 순 없지. 싱위가 타이완에선 미안한 사람한테 맛있는 거 사주는 거랬는데. 그렇다면 내가 사야한다고!

나 : 웨이. 내가 낼 거니까 넣어둬.
웨이 : 하하하. 이 정도는 내가 살 수 있어.
나 : 아냐! 내가 사준다고.
웨이 : 하하. 내가 산다니까.
나 : 내가 사준다고오! 나 돈 많아!
웨이 : 아니, 괜찮다니... 우엌... 잠깐...


나는 당황해하는 웨이를 밀친 뒤 그를 필사적으로 디펜스하며 종업원에게 내 돈을 건넸다. 그러나 종업원은 내 돈을 받더니 멀뚱멀뚱하게 웨이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니 왜 이래!? 빨리 계산을 해달라고! 그 멀뚱멀뚱한 종업원에게 웨이는 자신의 돈을 건네려고 했다. 안 돼! 내가 살 거야! 나는 그의 팔을 나꿔채어 이상한 각도로 틀었다.

웨이 : 으아앜, 이게 무슨 짓...
나 : 내가! 내가 산다고! 가만히 있어!
웨이 : 아니, 이 팔 좀, 여기 돈... 잠깐, 내 팔, 으읔...


종업원은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가 갸웃거리며 우리의 싸움(?)을 구경했다. 아니, 저 종업원은 왜 하라는 계산은 안 해주고 우리를 구경하는 거야! 웨이는 포기를 모르는 듯 자신의 돈을 종업원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이 자식! 내가 산다니까! 얼른 내 돈으로 계산을 하란 말이지!

당연하지만 질량이 두 배가 되어버린 웨이를 내가 힘으로 이길 순 없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웨이는 그새 내 팔목을 제압(?)했고, 한숨을 돌린 듯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풍경이었을 것이다. 팔목이 붙잡힌 채 우앙 내가 살거야 우아아앙 소리치고 있는 나, 그리고 그 꼴을 어딘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종업원, 뭔 일인가 몰려들어 구경하는 행인들...

웨이는 주스 하나를 사먹으려는 것 뿐인데 이게 웬 소란인가 싶었는지,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여전히 우아앙 거리는 내게 소리쳤다.

웨이 : 리! 우리 돈을 덜 냈어! 계산하려면 내가 들고 있는 돈까지 내야 돼!

...


......어?


나는 우아아앙 거리던걸 멈추고 웨이를 빤히 바라봤다.

나 : 아, 나 돈 적게 낸 거야?
웨이 : 그래!
나 : 그럼 아까부터 네가 건네주려던 그 돈이... 그 돈이었어?
웨이 : 그래!
나 : ......


난 그럼 내가 쏘겠다고 말하면서 모자란 돈으로 계산을 하려고 했던 거야!? 그리고 그 모자란 돈을 메우려는 웨이를 필사적으로 막은 거야!? 우아아아앙 종업원이 뭐라고 생각했을까!! 겁나 부끄럽다!!

나는 난데없는 난투극을 벌인 부끄러움과 종업원의 일을 방해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웨이에게 미안할 짓을 하나 더 추가해 버린 자괴감과 암산에 대한 자부심 무너짐 등등의 감정으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끙끙거렸다. 으아, 얼굴 화끈거려!




곧 파파야 우유가 나왔다. 그 사이 웨이가 종업원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는지, 웨이와 종업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웃지마, 웃지말라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

나는 격렬한 운동(?) 덕분인지 목이 말라서 파파야 우유를 금방 해치워버렸다. 덕분에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마셨다. 맛있는 거 + 맛있는 거 = 무지 맛있는 거... 일 텐데... 허겁지겁 마셔서 뭔 맛인지도 몰랐던 건 조금 슬프군.





4.

웨이는 풀이 죽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웨이 : 다음으로 먹을 건 말야. 엄청 맛있는 건데 말이야.
나 : ...엄청 맛있는 거! 뭔데뭔데?


엄청 맛있는 거라는 단어를 듣고 수치심에서 빠르게 회복한 나는 웨이가 가는 대로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웨이 : 핫도그야. 대만식 핫도그. 따창바오샤오창.
나 : 따... 뭐? 이름 어렵네. 맛있어?
웨이 : 맛있어. 너 엄청 좋아할걸.





웨이가 데리고 간 핫도그 집 따창바오샤오창(大腸包小腸)은 대기줄이 있었다. 웨이는 내 눈치를 보며 줄서서 기다려볼까 하고 물었고, 나는 핫도그란 음식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게 아니니 기다리자고 했다. 웨이는 이거 진짜 맛있을 거라고, 기대하라고 했다.

예상대로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 차례가 왔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사겠다며 지갑을 꺼냈지만, 웨이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그보다 더 빠르게 계산대 앞을 사수했다.

나 : 비켜! 내가 살 거라고!
웨이 : 리. 한국에서는 보통 나이 많은 사람이 음식을 사지 않나? 그리고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아.
나 : 여긴 타이완이야! 한국 이야기는 한국에서 하라고!


나는 웨이를 끌어내고 계산대 앞에 서려고 했지만, 웨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튕겨져나갔다!

웨이 : 네가 살찐 나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웨이는 자신만만하게 계산대 앞을 사수했다. 아까 같은 기습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뭐야 이 막강한 방어력은?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웨이가 계산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웨이가 의기양양하게 사준 대만식 핫도그 따창바오샤오창.

웨이 : 뜨거우니까 조심하라고.
나 : 한국 사람들은 뜨거운 거 잘 먹어. 우린 팔팔 끓는 상태의 찌개를 매일 저녁 먹는다고... 앗 뜨거!
웨이 : 조심하라고.


나는 뜨거운 핫도그를 후후 불어가며 겉모습을 훑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빵에 소시지가 껴져있는 모양새는 그야말로 평범한 핫도그군. 핫도그라면 토론토에서 돈 없을 때 밥 대신 엄청 많이 먹었는데. 핫도그 고렙이라고, 이 몸께서 말야. 웬만한 핫도그로는 그렇게 쉽게 만족할 수 없는데, 이 녀석은 어떨까? 어디 한 입.

...

......!!!!

나 : 뭐야 이거!?
웨이 : 왜? 이상해?
나 : 뭐야 뭐야 이거!? 웨이, 맛있어가 중국어로 뭐지?
웨이 : 응? 하오츠.
나 : 하오츠! 하오츠 하오츠! 겁나 맛있잖아!


이건 평범한 핫도그가 아니었다. 소시지도 맛있었지만 그보다도 소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부분! 그냥 하얀 빵이라고 생각했는데 빵이 아니었다! 엄청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우면서 쫀득쫀득한 이 식감... 그걸 석쇠 위에서 적당하게 익힌 맛... 우와, 이 하얀 부분이 진짜 맛있다!

나 : 이거 빵이 아냐! 이거 뭐야?
웨이 : 아, 그거. 뭔지 알게 되면 싫어할 텐데.
나 : 뭔데, 뭔데?


웨이는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말했다.

웨이 : 듣고 놀라지 마, 이건 돼지 창자에 찹쌀을 넣은 거야! 창자! 내장에!

...

뭘 놀라?

순대잖아 그거?

나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 : 에이, 창자가 뭐! 한국에서도 창자 정도는 먹는다고.

웨이는 제법이란 표정을 지었다.

웨이 : 그래? 한국에서도 내장을 먹는단 말야?
나 : 응! 한국에서 순대 안 먹어봤어?
웨이 : 누가 데려가서 소개해줬으면 먹었을 텐데 말이지.
나 : ...으라차차차! 다음 음식은 내가 사겠어! 아니 앞으로 남은 음식은 내가 다 사겠어!


죄송합니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제 죄를 잊을 뻔 했네요...

하여간 저 소시지의 어려운 이름 "따창바오샤오창"은, 음식 그대로를 설명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따창(대장, 그러니까 여기 선 찹쌀순대)으로 샤오창(소장, 그러니까 여기선 소시지)을 바오(싸먹는 빵)했다고.

한국에서도 따창바오샤오창을 팔면 완전 자주 사먹을 것 같은데. 대만에 다녀온 지 한 달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생각나는 맛이다. 음음. 이거 진짜 맛있었어. 별 다섯 개 추천 꽝.





5.

웨이 : 그러고 보니, 취두부는 먹어봤어?
나 : 취두부? 그게 뭐야?


웨이 왈, 취두부(臭豆腐)란 '엄청 냄새가 고약하지만 맛은 괜찮은 발효 두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먹긴 힘들 거라면서 넘어가자고 했다.

웨이는 나를 알고 저렇게 이야기한 걸까, 아니면 모르고 저렇게 이야기한 걸까.

내가 먹기 힘들 거라니.

내가 먹기 힘들 거라니!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안 먹을 수가 있어!

내 맛의 스펙트럼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난 발효 음식 짱 좋아한다. 한국은 김치와 청국장의 나라란 말이지. 어릴 적 할머니 집에 가서 청국장 말리는 방에 들어가 청국장과 함께 포근하게 잠들곤 했던 나였다고! 냄새가 고약하면 얼마나 고약할까! 가자, 취두부를 먹으러!

나는 웨이의 "네가 먹긴 힘들 거야"라는 말에 쓸데없이 자극받아 취두부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는 네까짓 게 먹을 수 있을까 하는 태도를 고수했고, 나는 더욱더 불타올라 빨리 취두부집으로 안내하라고 성질을 부렸다.




웨이 : 그렇다면 어디보자, 저기 괜찮은 집이 있네.
나 : 좋아! 이건 내가 살 거야! 비켜!


웨이가 가리킨 음식점으로 우다다 달려가 돈부터 내민 덕에, 이번 음식은 내가 살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어떻게 주문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주인에게 무턱대고 돈만 내밀었기에, 주문은 뒤에서 한숨을 쉬며 달려온 웨이가 했다.




곧 상자에 취두부가 담겨져 나왔다. 웨이는 이 외국인이 취두부 냄새에 어떻게 기겁하나 기대하며 나를 바라봤지만, 의외로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뭐야, 고약한 냄새라며?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데? 나는 웨이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고, 웨이는 준비한 폭죽이 불발이 된 듯 한 표정으로 날 보며 실망해했다. 물론 냄새가 진짜 고약했더라도 쎈 척 하기 위해 티를 내지 말아야지 다짐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쎈 척도 아니었고 진짜 그냥 괜찮았다.

내가 비염이 있어서 냄새를 잘 못 맡긴 하지만... 그래서 그랬나?

웨이 : 냄새가 괜찮다니... 그렇지, 맛은 어때?
나 : 오물오물. 오. 괜찮다. 겉은 바삭거리고 속은 촉촉해. 양념 맛도 좋고!
웨이 : 네가 좋다니 다행이긴 한데...


좀 놀라는 척이라도 해줄 걸 그랬나? 나는 뭔가 못마땅한 눈치의 웨이를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취두부를 해치웠다.





6.

취두부를 먹으며 야시장을 둘러보다가, 해산물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내가 해산물 가게를 바라보고 있자, 웨이는 먹어보고 싶냐고 물었다.

나 : 응! 나 해산물 좋아하거든.
웨이 : 해산물을? 의외네.
나 : 의외라니? 내 고향은 항구도시라고.


웨이는 그러냐며 음식을 주문했다. 웨이가 취두부 상자를 들고 있어서 그에겐 손이 없었고, 그 덕에 이번에도 내가 음식을 살 수 있었다. 웨이는 계속해서 자기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내라고 외쳤지만, 나는 어떻게 외간 남자의 주머니를 뒤질 수 있냐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

해산물 가게에선 번호표를 나눠주고 있었다. 웨이는 우리가 들고 있는 번호가 19라며, 저기서 19를 부르면 음식을 받아오라고 내게 알려줬다.

웨이 : 근데 19가 중국어로 뭔지는 알아?
나 : 어휴, 설마 그것도 모를까봐? 나 중국어로 숫자 정도는 셀 줄 알아! 이얼산쓰!


그러면서 1부터 10까지 (힘겨워하며) 수를 세자, 웨이는 놀라워하며 중국어를 배운 거냐고 물었다. 나는 예전에 잠깐 학원에 다녔다가 회사를 때려친 바람에 돈이 없어서 중간에 학원도 때려치웠다고 얘기한 뒤, 학원에서 배운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나 : 나는 한국인입니다! (중국어)
웨이 : 그리고?
나 : 어? 어... 그게 다야.
웨이 : 흠. 그거 알아? 사실 네가 한국인인 건 한국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거야.
나 : ......
웨이 : 전혀 쓸데없는 문장만 배웠군.


이이이익!




그 앞에서 취두부를 다 먹은 후에야 조개(바지락인가? 사실 조개랑 바지락 구분을 잘 못한다. 그냥 조개라고 하자)찜이 나왔다. 갈릭 버터를 발라 은은하게 마늘 향이 풍기는 찜이었다. 조개도 알맞게 익어서 부드럽게 씹혔다. 강한 양념의 취두부를 먹다보니 담백한 게 끌렸었는데, 마침 이 은은한 향의 조개찜이 그걸 해소해줬다. 매우 좋군!

웨이 : 먹을 만해?
나 : 하오쯔! 해산물이 맛없을 리 없지!






7.

내가 조개찜을 워낙 맛있게 먹는 바람에, 웨이는 한두 개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 내가 도중에 먹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몇 번이나 권했지만, 웨이는 굶은 여동생을 보는 듯한 측은한 눈으로 그냥 너 많이 먹으라고 했다. 흠. 그럼 사양않고.

웨이는 나보고 배가 부르냐고 물었고, 어느 정도 배가 찬 나는 이제 디저트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웨이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웨이 : 디저트로는 고구마볼이 좋겠어. 이게 뭐냐면...
나 : 그거 알아! 나 그거 아까 싱위랑 먹었거든.
웨이 : 뭐! 벌써 먹었다고?


웨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야시장의 고구마볼이 더 맛있을 거라며 또 먹으러가자고 했다. 나는 아까 우웨이챠오탕에서 먹었던 맛있는 고구마볼을 떠올리며, 마침 한 번 더 먹고 싶었는데 잘됐구나 싶어져서 가보기로 했다.




웨이가 데려간 고구마볼 가게는 줄이 꽤 길었다. 맛있기로 소문난 집인가 보다. 여태껏 먹기만 해서 배가 어느정도 채워진 우리로썬 음식을 서둘러 먹을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웨이 : 리. 이번엔 네가 주문을 해봐.
나 : 좋아. 뭐라고 하면 돼?


웨이는 내가 할 말을 알려줬다. 그래서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했더니, 제법 괜찮은 발음이라며 칭찬해줬다. 하핫! 내가 좀 중국어에 소질이 있는 편이지! 음과 리듬을 잘 타거든! 의기양양해진 나는 웨이에게 다른 문장도 배워서 재잘재잘 따라해댔다. 그러다가 정작 주문할 땐 처음에 배운 문장을 까먹어서 결국 웨이가 주문해야만 했다.

웨이 : 소질은 있으나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 : 시끄러워!





이건 주인아저씨가 비닐 봉투에 담아준 귀여운 고구마볼!

웨이 : 어때?
나 : 맛있어.
웨이 : 그 싱위라는 자와 카페에서 먹은 고구마볼이 맛있어, 아님 이게 더 맛있어?


둘 다 똑같은 고구마볼인데... 예의상 더 맛있다고 해줘야하나?

나 : 뭐... 음... 이게 더 맛있어.
웨이 : 그럴 줄 알았어!


웨이가 만족해하는 걸 보고 잘했구나 싶었다.





8.

웨이와 야시장을 누비며 실컷 먹은 뒤, 왔던 길로 다시 빠져나가는데, 아까는 보지 못했던 특이한 가게를 발견했다.




그 가게의 작은 수조에선 살아있는 새우가 헤엄치고 있었다. 내가 헤엄치는 새우들을 빤히 바라보자, 옆에 있던 웨이는 그 가게가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새우가게"라고 설명했다.

나 : 왜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거야?
웨이 : 껍데기를 벗겨주거든. 먹기 편하게.
나 : 오!


새우 껍데기 까먹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그걸 까주다니, 이런 착한 가게가 다 있나! 나는 웨이에게 우리도 게으른 사람들이 되자고 말한 뒤, 신이 나서 새우를 주문했다. 새우! 새우! 새우는 늘 옳지!

그러자 주인아저씨가 살아있는 새우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꼬치에 꽂기 시작했다. 꼬치에 관통당해 꿈틀거리는 새우들은 곧 불판에 올려졌다. 새우들은 불판 위에서 괴로운 듯 마지막 몸부림을 치다가, 서서히 굳어갔다...




나 : 웨이, 새우가, 새우가 죽어가고 있어!
웨이 : 죽는다고 하지마! 그들은 먹기 좋게 조리되는 거야.
나 : 하지만... 새우가 우리 때문에...
웨이 : 더 이상 말하지마.


우리가 쓸데없는 대화를 하는 사이, 그 새우들은 먹음직스럽게 구워졌고, 아저씨는 우리에게 구워진 새우들을 건넸다.

나 : 어쩐지 미안해지는데...
웨이 : 맛있게 먹자고! 그게 이 새우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된 새우... 숙연한 분위기 속 한 입 베어 문 새우는 엄청 맛있어서 다섯마리를 한큐에 끝냈다. 젠장, 이렇게까지 맛있을 줄이야... 너희들... 고맙다... 냠냠.





9.

웨이 : 이제 빙수를 먹자. 여기 어디에 유명한 빙수집이 있다고 하더라.
나 : 뭐, 또 먹자고? 배 안 불러?
웨이 : 뭐, 배가 벌써 부르다고?






아직도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웨이가 검색해서 찾아간 집은 大甲芋頭城라고 하는 가게였다. 타로가 들어간 빙수로 유명한 곳이랬는데, 나는 이미 배가 엄청나게 불러서 타로가 들어갈지 의문이었다.

나 : 웨이. 나는 배 엄청 부른데. 남기면 어떡하지?
웨이 : 그래? 그럼 맛만 봐. 나머진 내가 다 먹을게.


남미에서 만난 웨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쳤을 텐데, 지금의 웨이웨이가 그런 말을 하니 믿음직하다.

나 : 좋아! 먹자!




주문한 빙수. 이건 웨이가 샀다.

타로 빙수 가게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시장 구석의 가게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가, 정말 맛이 있나 기대했는데, 내가 배가 불러서 그랬는지 맛은 그냥 그랬다. 평범하게 갈린 얼음 위 타로와 떡, 망고와 팥... 토핑이 식사 대용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배부른 것들만 모여있던 걸 빼놓곤 특별할 건 없었는데 말이지.

웨이 : 엄청 맛있는데. 더 안 먹어? 내가 다 먹는다?

...역시 내가 배가 불러서 그랬나? 웨이는 정말 맛있게 먹더라.





10.

나 : 배 무지무지 불러!
웨이 : 소화시킬 겸 쇼핑할래?
나 : 좋아!







그래서 우리는 늦게까지 쇼핑을 했다. 유명한 펑리수 가게에서 예쁘게 포장된 펑리수도 구입했으며, 나중에 포스팅할 '썬케이크'를 위해 오만 군데의 편의점을 순례하기도 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겼고, 웨이는 졸려서 눈이 반쯤 감긴 나(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라 11시만 넘어져도 사고가 느려진다)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나 : 음, 만난 지 얼마 안됐는데. 먼저 들어가서 미안. 하암.
웨이 : 내가 너무 늦게 왔잖아. 내일 비행기 시간이 언제였지?
나 : 내일 11시!
웨이 : 그럼 아침은 같이 먹을 수 있겠네. 내일 아침에 봐!
나 : 음냐. 내일 봐~


그리곤 호텔로 들어가 대충 씻고 침대 위에서 뻗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깼다. 아직 졸린 눈을 꿈뻑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웨이는 어디서 자는 거지?

...친척집에 가서 자는 건가?

...아니면 숙소 예약이라도 했나?

...내일 아침에 언제 보지?

...아침 11시 국제선이면 2시간 전엔 가야 할텐데 아침을 같이 먹을 수 있나?

뭐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보니 잠에서 깨어났다.

근데 얘 진짜 어디서 자는 거지? 왜 아까는 그 생각을 못했지? 나 그렇게 피곤했나? 웨이는 나 때문에 타이베이에서 퇴근 후에 타이중까지 온 건데 정작 난 그가 어디서 자는지 신경도 안 썼다니. 반성하라, 나만 생각하는 나 자신...

반성할 일이 하나 생기자, 더 반성해야할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 아직 웨이에게 미안하단 말도 안했단 말이지. 어제 너무 재밌게 노느라 말하는 걸 까먹었다... 아니, 핑계다. 까먹었다기보단 분위기가 좀 안맞기도 했고, 내가 무진장 부끄럽기도 했고... 뭐 그래서 어물쩡 넘어가버렸다.

어쩌지? 아침에라도 얘기할까? 나 너한테 엄청 미안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나는 아침에 웨이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는 나 자신을 상상했으나, 음, 아무래도 무진장 부끄러워서 못할 것 같았다. 얼굴 보고 말하려니까 힘들구나. 그렇다면 차라리 편지를 쓰자.

그래서 그 꼭두새벽에, 머리맡에 있던 스탠드를 켜고, 옆에 둔 노트 뒷장을 찢어 끄적끄적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러저러해서 미안해. 그리고 이러저러해서 미안하고... 꾸벅... 아이쿠. 자면 안돼. 이러저러했고... 이러저러했어... 꾸벅꾸벅...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간신히 편지를 써낸 나는, 처청에서 샀던 도시락 통을 떠올리곤 그곳에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간식으로 먹으려고 한국에서 가져왔던 여러 과자나 누룽지 등을 담았다. 그랬더니 제법 봐줄만한 선물 세트가 탄생했다. 나는 그 세트에 만족해하며 도시락 통을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자고, 이따 웨이를 만나 아침을 먹어야겠다...




타이중 마지막 날에서 계속!





2017/09/01 13:03

타이중 (7.5) 그 나쁜 이야기 └ 타이중 힐링여행





1.

웨이가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취준생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기 한 달 전, 페이스북 메세지로 내게 자신의 여행 소식을 알렸다. 나는 당시 이력서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의 소식에 반가워하며 한국에 오면 내게 바로 연락하라고 답했다.


웨이.

남미를 여행하다가 만난 타이완인 여행자.

그는 타이완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일 때문에 어린 시절을 코스타리카에서 보냈다. 덕분에 그는 중국어와 스페인어, 영어라는 세계에서 제일 많이 쓰는 언어 1, 2, 3위 모두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언어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가 한 번도 잘난 척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내 생각에 그 정도 스펙이면 한 두 번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웨이는 날렵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태평한 말투와 느긋한 성격을 가졌으며 (코스타리카인의 특징일까?), 남 돕기를 즐겨하지만 생색은 절대 내지 않는 (타이완인의 특징이겠지?) 선한 청년이었다. 남미에서 그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이 온다 하니, 나로썬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밖에. 나는 드디어 남미에서의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웨이가 오면 어딜 갈지를 고민도 해보고, 맛집도 찾아보고, 그랬다. 그랬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여러 기업들의 서류 광탈 파티를 목도해야만 했고, 엄청나게 우울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당시에 사귀었던 남자친구와도 이별 수순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우울함은 배가 됐다. 여행이라도 가면 좋을텐데 돈은 없고, 미래의 내게 돈을 빌리기엔 그 돈을 갚을 직장도 없고. 에라이, 모르겠다. 우울해진 나는 정신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동굴에 들어가 틀어박혔다.

그렇게 우울했던 한 달하고도 2주 뒤, 나는 고만고만하고 별 볼 일 없는 회사(지금의 회사가 아니다)에 들어갔다. 나를 아낀다며 징그러운 눈빛과 느끼한 말투, 성적인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유부남 팀장 밑에서 일하는 건 참으로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뭐가 됐든간에 일정 시간에 주어진 노동을 하고 돈을 받는 행위는 사람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돈을 벌어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 나는 아침에 학원에 들러 중국어를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됐고, 주말에 친구를 만나 밥을 사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됐고, 퇴근길에 맥주를 사서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그 놈의 돈 덕분에 여유가 생긴 나는, 별 생각없이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다가, 즐겨찾기를 잘못 눌러 페이스북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 뭐지 이거.

어어...... 알림 숫자가 쩌네.

어어어...... 근데 수신인은 1명이네. 뭘까 이 알림은?

......

웨이에게 메세지가 잔뜩 와 있었다!


웨이 : 나 한국 도착했어! 우리 어디서 볼까?
웨이 : 언제 시간이 돼? 지금 많이 바쁜가봐.
웨이 : 음... 많이 바쁜거야? 아니면 무슨 일 있어?
웨이 : 네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어.
웨이 : 괜찮아? 못보고 가네... 한국은 즐거웠어.
웨이 :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뭔가 잘못됐어?



......

아아아아아악! 그건 몇 개월 전의 메세지였다! 그리고 나는 페이스북 메신저 앱을 따로 깔아놓지 않아서, 페이스북에 직접 로그인하고 들어가야 메세지를 볼 수 있었다!

나 : 웨이! 어떡해! 나! 너무 미안해! 내가 멍청해서! 내가 바보라!

웨이에게 메세지를 보낸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

웨이 : 괜찮아? 잘 있는거야?
나 : 응, 나 괜찮은데, 내가 완전 까먹어버려서, 너무 미안해... 내가 바보라서...
웨이 : 하하하. 아무 일도 없다니 다행이야. 왠지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나 : 으아아아... 너무 미안해...


뭐라고 할 만한 변명거리도 만들 수 없었다! 이건 그냥 완전 내가 바보라서... 내가 멍청이라서!

나 : 미안해애애...
웨이 : 하하하. 괜찮다니까.






2.

그 이후, 나는 웨이와 거의 연락을 하지 못했다. 미안해서 뭐라고 말도 못 붙이겠는 거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사정을 상담했을 때, 다들 "어이구 세상에, 그건 너무했다, 나 같으면 연락 다시 못한다, 좋은 친구 한 명 잃었다, 에이 원래 여행 중에 만난 사이가 다 그렇지" 운운의 이야기를 했다. 귀가 얇은데다가 소심한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가 싶어져 혼자 슬퍼하고 맘껏 미안해하다가 결국엔 제풀에 지쳐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에휴, 걔네들 말이 맞아. 사실 언제 또 볼 일이 있겠어. 원래 여행 중에 만난 사이가 다 그렇지, 뭐.

그러나 1년 후, 그 볼일이 생겼다. 내가 타이베이로 여행가면서 말이다.

타이베이는 멋진 도시였지만, 여행 내내 웨이에게 연락을 해볼까 말까 만나볼까 말까 고민을 하느라 마음이 편치 못했다. 바다 건너 여행을 왔는데 이렇게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나는 타이베이에 체류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고민만 잔뜩 하다가, 출국 전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웨이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나 : 웨이, 나 타이베이에 왔어... 근데 못보고 가네... 일은 어때? ...잘 지내지?

수 분 후, 웨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웨이 : 어? 타이베이라고? 여행 온 거야?
나 : 어...
웨이 : 근데 왔다가 그냥 간다고? 왜 진작 연락하지 않은 거야?
나 : 어... 음... 네가 바쁠 거라 생각해서...
웨이 : 내가? 일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너 볼 시간은 있었다고?
나 : 어... 음... 오... 나, 내가 바빴거든... 여행하느라...


웨이는 약간 한숨을 내쉬는 듯한 느낌(그는 남미여행 중에도 내가 뭔가 실수를 하거나 바보같은 짓을 하면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도와줬었다)으로, 그래서 타이베이는 어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타이베이는 너무너무 좋았다고, 타이완 사람들은 다들 너처럼 착했고 그 덕분에 여행하기 너무너무 좋았다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웨이는 네가 즐거운 여행을 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웨이 : 하지만 다음에 올 땐 미리 연락을 하라고.
나 : 응...


나중에 한국에 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또 이야기를 해봤다. 저번에 한국에 왔는데 내가 못만났던 걔, 걔네 나라 갔다 왔는데 메세지만 몇 개 주고받고 말았다 운운...

그러자 다들 나보고 똥멍청아, 연락을 안할거면 끝까지 하지 말지, 왜 어정쩡하게 연락해서 더 어색하게 만드냐, 너 같으면 외국인 친구가 외국에서 약속 파토내고 나중에 한국 놀러와서 나 왔다감ㅋ 이러고 그냥 가면 어떤 기분일 것 같냐, 놀리는 거냐 운운의 이야기를 했다.

팔랑귀에 무진장 소심한 나는 또다시 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 맞아... 나도 참... 차라리 그냥 연락하지 말걸. 그것도 그래, 뭣하러 보지도 않을 거면서 "나... 왔다 가..."라고 소심하게 남긴 거람. 으으, 미안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어...

나는 왜 자꾸 얘한테만 미안할 짓을 골라서 하는걸까. 난 진짜 똥멍청이가 맞나보다...

이 이후로 더더욱 연락을 못했다. 무진장 미안하고 어색해져서.





3.

그리고 다시 1년 뒤. 이번 타이중 여행.

원래 타이완을 갈 생각은 없었지만, 여름 휴가 성수기에 탈만한 비행기가 이것밖에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웨이에게 연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1년 전보다 더 소심해진 내가 "미쳤어! 무슨 염치가 있다고 또 연락을 해!"라며 나를 말렸다.

그러나 미니미니는 옆에서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이번엔 웨이라는 사람에게 꼭 연락하라고 충고했다. 자기가 보기엔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어색하고 미안한 건 금방 사라질 것 같다는 거였다. 나는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물었고, 미니미니는 자기가 나보다 몇 년 더 살아서 안다고 답했다. 흥. 나이 많아서 좋겠군.

어쨌든 나는 이번에도 어색해서 연락은 못할 것 같다고 완고하게 대답했고, 미니미니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연락을 하지 않으면 거기서 더 후회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후회는... 뭐... 그냥 쉬러 가는 건데, 뭐. 무슨 후회할 게 있다고. 남미 여행도 벌써 3년 전의 이야기라고. 이제 와서, 뭐...





4.

그러나 앞서 포스팅했던 것처럼, 타이중으로 가는 기내에서, 나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뭉게구름을!

이 뭉게구름은 평범한 뭉게구름이 아니었다. 내 여행자 모드를 깨우는 도화선과도 같은 매개체였다. 비행기 창문 너머의 뭉게구름은 캐나다에서, 쿠바에서, 남미에서, 유럽에서 날 들뜨게 만들어준 멋진 풍경을 생각나게 했다. 덕분에 나는 여행의 감각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여행으로 인해 들뜨고 설레는 이 감각, 이 울렁거리는 감각을 나는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 이 고마운 사람들을 나는 어째서 잊고 지냈던 거야!

가슴 속에서 내 본능과 이성, 감성 등을 통제하는 내가 엄숙하게 법봉(?)을 두들겼다. 지금부터 여행자 모드 ON이야! 그러니까, 보다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좋아하고 용기가 넘쳐나고 철면피를 깔았던 나, ON이야! 탕탕탕!

여행자 모드가 켜진 나는, 타이중 공항에 내리자마자 충동적으로 웨이에게 연락했다.

나 : 웨이! 나 타이중 왔어! 이번엔 좀 길게 있어! 토요일까지 있을 거야! 그 사이에 만나자!

메세지를 보내놓고, 입국 심사를 받고 수하물을 찾은 뒤 공항으로 나왔다.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받고, 시내로 갈 수 있는 버스를 잡아타고, 버스비가 없어서 모르는 타이완 언니가 대신 내주는 등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나는 간신히 땀을 닦고 버스에 앉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웨이에게서 벌써 메세지가 와있었다.

웨이 : 오! 타이중이라고? 또 여행왔구나! 근데 나 이번주는 일 때문에 바쁜데...


앗, 바쁘다고? 일이 많이 바쁜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내게 기분이 많이 상해있어서 핑계를 대는 걸까? 어쩌지?

일상 속에선 이렇게도 재보고 저렇게도 재보며 꾸물꾸물 비관적 발동동 소심한 내가, 여행자 모드가 되면 거짓말 같이 사라진다. 나는 마치 내가 늘 그랬던양 뻔뻔해져서 웨이에게 말했다.

나 : 안돼! 봐야 돼! 보자! 타이베이에 산댔나? 내가 거기로 갈게! 너는 나를 봐야해. 나도 너를 봐야해!
웨이 : 뭐? 타이베이로 온다고? 아냐, 잠깐만 있어봐...


웨이는 잠깐 고민하는 텀을 두더니, 다시 메세지를 보냈다.

웨이 : 나 금요일 밤에 시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때 타이중 내려갈거니까 올라오지마.
나 : 왜? 나 타이베이까지 갈 수 있어!
웨이 : 너 토요일에 비행기 타잖아. 그러려면 금요일 밤엔 타이중에 있는게 나아.


역시 세심하다. 난 그런 건 1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웨이 : 그렇지, 타이중에서 제일 큰 야시장 알아?
나 : 가이드북에서 봤어! 펑자 야시장 말하는 거지?
웨이 : 응. 거기 나랑 갈거니까 그 때까지 거기 가지마!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았어.
웨이 : 그럼 금요일날 봐!
나 : 응! 금요일!


웨이와 잡은 약속 덕분에 가벼운 마음이 된 나는, 타이중에서 엄청나게 활개를 치며 여행을 다녔던 것이었다...





5.

나 : ......라는 이야기에요. 어때요?

싱위는 음, 음, 하며 고개를 까딱까딱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싱위 : 그 분이 엄청 착한 분이라는 건 알겠어요!

같은 타이완인인 싱위가 보기에도 그런가보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싱위에게 물어보았다. 한국에선 보통 술을 사주며 어색한 거나 미안한 거나 뭐 그런 해묵은 감정들을 풀곤 하는데, 타이완식의 사과방법은 뭐냐고. 그러자 싱위는,

싱위 : 밥을 사요! 맛있는 밥을 사면 좋아요.

라고 했다.

나 :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 펑자 야시장에 가서 밥을 사야겠네요!

내 말에, 싱위는 환하게 웃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싱위 : 응! 아주 많이 사줘야할 것 같아요!

...싱위는 웃으면서 사람 찔리게하는 구석이 있구만. 나는 알았다고 했다.





6.

저녁이 되어 싱위와 헤어지고, 나는 호텔 로비에서 웨이를 기다렸다. 원래는 내가 역으로 마중을 가려고 했는데, 웨이가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나보고 호텔 로비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 역에서 길이 엇갈릴 게 뭐 있어? 하지만 워낙 완고하게 말해서 그냥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으윽, 막상 만나면 뭐라고 말하지? 엄청 어색할 것 같아! 왜 이렇게 다리가 달달 떨리지. 설마 지금 긴장한 거야? 무슨 면접장에 온 것 같아. 어디 우황청심환 같은 거 없나? 아이 참, 진정하자고. 근데 진짜 보자마자 뭐라고 말하지. 평범하게 잘 지냈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괜히 허세 떨면서 헤이 브로 어쩌구 하면서 시작할까? 아냐, 역시 평범하게 가자. 처음엔 엄청 밝게 "웨이! 롱 타임 노 씨!"를 해주자고. 그리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사과를 해야지. 응, 그래, 사과. 어디서 애플 파이라도 사올 걸 그랬어! 그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애플이 사과고, 미안하다도 사과야. 그리고 이건 너에게 주는 사과야!"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애플 파이! 사과! 지금 얼른 편의점에 가서 사과쥬스라도 사오자!

사과쥬스를 사오기 위해 몸을 어정쩡하게 일으키는 순간, 호텔 로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시간에 체크인 하는 사람이 있나? 아니면 설마?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고, 직원들에게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느낌으로 손을 가로젓는 남자를 발견했다. 저 남자! 분명 웨이다! 뒷모습이 웨이야! 꽁지머리는 잘라냈지만 알 수 있어! 나는 막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웨이를 향해, 머릿속에서 연습한대로 밝게 웃었다. 그리고 준비한 대사를 외치려고 했다. 응, 외치려고 했다.

나 : 웨이! 여기야! 롱 타임...
웨이 : 응? 오! 리! 거기 있었구나!
나 : ......
웨이 : 리,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나 : ......?
웨이 : 리?


나 : 누... 누구세요!?!??!?


웨이는 웨이X2가 되어 있었다!


그 날렵했던 턱선은 어디로 간 거야? 민첩해보이던 팔다리는 또 어디로 간 거고! 방랑자 포스 물씬 풍기는 살짝 마른 체구였지 않았나? 대체 타이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나는 이렇게 티를 내면 실례잖아 생각하면서도,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웨이는 내 얼어있는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웨이 : 이봐, 나 웨이 맞다고. 두 배가 됐지만 말이야.

그 태평하고 느긋한 말투와 어조는 분명 웨이가 맞았다. 나는 웨이X2가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말하는 걸 보며 웃음이 터졌다. 그 때부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정말, 뭐야, 뭐가 일어난 거야, 네게!
웨이 : 이봐, 나 여기 와서 15킬로 이상이 쪘다고. 타이완은 정말 먹을 게 많아.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바보가! 적당히 먹었어야지!
웨이 : 자, 먹으러 가자! 펑자 야시장으로!


나는 어색한 것도 잊고 깔깔거리고 웃으며 웨이를 따라나갔다. 사과, 뭐, 나중에 하자! 일단 먹으러 가자고!



펑자 야시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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