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1 13:59

방콕 주말여행 (3) 매우 더웠던 왕궁과 왓포 └ 방콕 주말여행 (2019)

1.

방콕에 관한 가이드북, 블로그 글, 신문기사, 여행사 일정표, 하여간 어느 매체를 읽던지, 방콕에 가면 꼭 들러야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바로 왕궁과 왓포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의 경복궁과 남산 같은 느낌일까. 태국에서 손꼽는 머스트 씨 관광지라고 한다.

요새 들어 힘들게 관광지 구경하는 것보다 그냥 낯선 곳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걸 선호하게 됐지만, 그래도 외국인 친구가 우리나라 놀러와서 경복궁이랑 남산 안가봤다고 하면 "거기 안가고 뭐했어!"라고 외치며 데려가야 할 의무감에 젖을 것 같다. 나는 미래에 언젠가 사귈 태국인 친구를 위해, 왕궁과 왓포 정도는 미리 가보기로 했다. 미래의 태국인 친구는 그러한 의무감과 고뇌에 빠지지 않겠지. 나는 참 좋은 친구야.





2.

카오산 로드 쪽에 있는 숙소에서 천천히 걸어 30분, 왕궁에 도착했다. 왕궁까지 가는 내내 그늘 하나 없는 땡볕이라 무지 더웠다. 웬만하면 택시를 타시라.

여튼 왕궁.

태국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곳이다.

왕궁 안쪽엔 어전(차크리 마하쁘라삿)과 종교사원(왓 프라깨우)이 근접해 있는데, 태국에서의 왕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관저와 사원이 함께 있는 게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사진은 사원인 왓 프라깨우의 일부.

태국에서는 왕을 살아있는 부처라 하며 신성시한다고 한다. 왕궁까지 걸어오는 내내 길거리마다 왕의 초상화나 사진이 극진히 모셔져있는 걸 보며 신기하다 싶었다. 국왕을 신처럼 받드는 것에 대해 자국민들이 아무런 불만이 없다면 외국인인 내가 뭐라 할 건 없겠으나, 입헌군주제도 아니고 공화정에서 살아온 나로썬 영 기이한 느낌이 든다.





입장료는 500바트 (한화 약 2만원).

태국 물가치고는 비싸지만, '반드시 가야할 곳'이란 타이틀이 붙은 관광지가 늘 그렇듯 사람은 미어터진다. 심지어 그늘도 많지 않다. 이놈의 왕궁은 땡볕 뿐이고 바람조차 뜨겁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인파에 밀려 30분 정도 구경하다가 완전 넉다운. 구경이고 뭐고 그 이후엔 카페에서 쥬스 쪽쪽 빨다가 나왔다.





왕궁의 건물들은 세상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건물 양식인데, 또 하나하나 뜯어보면 무슨 여행 사진에서 제법 봤던 것 같은 양식들이 모여있다. 알고보니 방콕의 왕궁은 동남아 양식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곳이라고 한다. 나야 동남아 쪽을 아직 많이 다니지 않았으니, 이런 양식을 낯설게 본 것 같다.

앞으로 동남아 쪽도 쫄래쫄래 많이 돌아다니면 눈에 익겠지.





건물 자체는 참 화려했다. 꾸미려면 이렇게 꾸며야지! 하는 느낌. 빛을 반사시키는 장식물이 많아 가뜩이나 이글거리는 태양빛이 사방으로 번졌고 그래서 더 반짝거리고 빛나보였다. 꼭 화장대나 보석함에 달린 장식 같았다.

근데 그 예쁘장한게 가까이 가서 보면 쪼끔 조잡한 느낌이 든다. 실수한 곳도 있고, 접착제가 보이는 곳도 많고. 아무래도 '멀리서 어떻게 보일지'를 염두에 두고 꾸민 것 같다.

여태까지 내가 경이롭다 생각했던 건축물들은 크리스트교의 대성당이나 아랍권의 궁전 등이었는데, 그런 곳들은 신앙에 의한 장인정신으로 꾸며지는 경우가 많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정밀하고 눈여겨 보지 않는 부분까지 손대는 세밀함 - 신에게 바치는 거니까! - 이 있었다. 그런데 이 태국의 왕궁은 그런 종교적 장인정신보다는 효율적 프로젝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밀작업을 하기 어려운 후덥지근한 날씨속에서 어떻게 하면 덜 고생하며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일까 하는 고민이 엿보이는.

이렇게 쓰면 평가가 박한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인간적이어서 좋았다는 걸 쓰고 싶었을 뿐이다.





왓 프라깨우의 기둥들.

날마다 퍼붓는 스콜을 닮은 듯한 곧은 직선이 마음에 들었다. 비가 와도 예쁠 것 같은데. 인적이 드물 때 반짝거리는 기둥 아래에 쪼그려 앉아 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인적이 드물 때'가 없을 것 같지만.




왓 프라깨우에서 담 하나를 넘어가면 어전인 차크리 마하쁘라삿으로 갈 수 있다. 라마 5세 때 유럽을 순방하고 나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높게 솟은 지붕과 금박을 제외한다면, 꼭 유럽의 궁전 같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여긴 왓 프라깨우보다 더 그늘이 없다. 사진은 흐린 날씨처럼 보이는데 반대쪽 하늘은 쨍쨍했고 덕분에 목 뒤가 몹시 따가웠다.

다들 필사적으로 궁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던데,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나는 훌륭한 곳이군 음음 하며 빠르게 통과했다.




차크리 마하쁘라삿에서 박물관 쪽으로 가면 카페 하나가 나온다.

관광지 내부에 위치한 카페라니 맛이 정말 없을 것만 같고 무지 비쌀 것만 같고 들어가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이 태양 아래에선 어쩔 수 없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에어컨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행복해...

이곳에선 망고 패션 후르츠 쥬스(80바트, 한화 약 3천원)를 사먹었는데, 너무 달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까지 달게 만들 필요는... 으... 그렇지만 에어컨이 시원하니 그것에 감사하며 쉬어가기로 했다.





3.

음료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왕궁 내 박물관은... 도저히 둘러볼 컨디션이 아니다. 빨리 짐 맡겨둔 숙소로 돌아가 체크인하고 씻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체크인 시간에 비해 시계는 아직 이르고 나는 좀 더 어디선가 시간을 때워야한다.

태국에서 왕궁 다음으로 유명한 곳은 왓 포다. 왓 포는 방콕이란 도시가 건설되기 전인 16세기에 지어진 사원으로, 그 역사와 유래가 깊다고 한다.

허나 그 정도의 정보론 끌리지 않는다. 내가 왓 포에 갈 원동력이 될만한 정보가 있을까 찾아봤더니, 이곳엔 대형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와불상, 누워있는 부처상이라니. 지금 당장 시원한 어딘가에 눕고 싶은 나로썬 매우 부럽기 짝이 없다. 그래, 그 와불상을 보러 가보기로 했다.




왕궁의 하얀 성벽을 따라 쭉 내려가면 왓포가 나온다. 성벽은 왜 이리 길고 날씨는 왜 이리 후덥지근하던지. 비척비척 걸어갔다.





4.

왓포에 도착했다.

왓포 입장료는 200바트(약 8천원). 입장료에는 생수 한 병을 무료로 주는 쿠폰이 포함되어 있다. 왓포 내부에 생수 나눠주는 곳이 있는데 거기 자원봉사자 분께서 (직원인지 자원봉사자인지 잘 모르겠지만 종교시설이라 자원봉사자분이 아닐까 싶다) 쿠폰을 받고 생수를 나눠주신다.

부처님의 자비가 담긴 생명수... 감사하며 받아마셨다.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둘러본 왓포는 왕궁보단 그늘이 많고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사원 마당의 정원과 나무 덕분이다.




와불이 모셔져 있다는 곳부터 찾아갔다. 이곳은 신발을 벗어야지만 들어갈 수 있다. 앞에서 나눠주는 비닐봉투에 신발을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그래도 바람길에 위치했는데 앞뒤로 뚫린 구조여서 내부는 꽤 시원한 편이었다.

내부엔 기둥이 많아, 와불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 제한적이었다. 하긴, 당시 기술로 이 정도 크기의 건물에 이 정도 개수의 기둥이 아니라면 힘을 분산시키기 어려웠을 것 같다.




기둥 사이로 본 와불의 얼굴.

일기장에 '평온한 와불의 얼굴'이라고 적었다가 찍찍 지우고 '나를 놀리는 것만 같은 와불의 얼굴'이라고 다시 적었다. 눕고자 하는 욕망이 커서 그리 보였나. 부처님 죄송합니다.




발이나 얼굴 쪽에서 보면 길이가 46m나 되는 와불 전체를 한번에 감상할 수 있다.

동선상 얼굴 앞쪽으로 들어가 발 자개가 있는 곳에서 한바퀴 돌고 얼굴 뒤쪽으로 나가게 되는데, 얼굴 앞쪽은 늘 사람이 모여있어서 관람하기가 어렵다. 키 큰 서양인들이 펼치는 강력 수비(?)를 뚫 수 없었던 나로썬 발쪽과 얼굴 뒤쪽에서나 좀 관람할 수 있었다. 나 대한민국 평균 킨데... 씨이...




이건 뒷모습. 엄청 높아보이는 베개와 뒷머리 등의 디테일에 집중할 수 있다. 특히 베개 장식이 엄청 정교하고 화려했다.




와불을 감상하고 나온 뒤, 다시 신발을 신고 불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불탑은 도자기 장식을 이용하여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까 왕궁 쪽의 왓 프라깨우도 그렇고, 태국의 사원들은 오색빛깔로 반짝이는 게 기본인가 보다. 축소 모형이나 모형을 이용한 악세사리 있으면 하나 사가고 싶은걸.




가까이서 보면 요런 모양. 역시 내구성이나 디테일은 쪼오끔 아쉽다.





와불상과 불탑을 본 뒤, 왓 포의 대웅전으로 향했는데, 주말이라 무슨 행사를 하고 있었는지 시끌벅쩍했다. 지역 주민들과 스님들이 음식을 나눠먹고 있었는데, 법당 구경하려다가 괜히 들쑤시고 다니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 그냥 축제 분위기를 엿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5.

왕궁, 왓 포를 다 보고나니 점심 때였다. 아침보다 몇 배는 더 무더워졌다. 얼마나 더웠냐면 아까 왓 포에서 봤던 스님들의 의상처럼 얇은 천을 몸에 대충 두르기만 하고 싶다 생각할 정도였다.

이젠 지쳤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체크인하고 씻고 싶다. 체크인 시간까진 아직 1, 2시간 남았지만 앞에서 죽치고 기다려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택시에 탑승했다. 호텔 이름을 불렀지만 잘 모르길래, 호텔 앞에 있는 송크란 사원을 말했더니 바로 알아듣고 출발했다. 앞으로 숙소에 가고 싶으면 송크란 사원을 불러야겠군.

택시는 바가지를 씌웠고 (왓 포 → 카오산 로드 가는데 200바트 (약 8천원) 냈다. 이쪽 길이 차량이 많아 늘 밀리긴 하지만 2.5km밖에 안된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 비싸게 받은 거다.) 아직 이 동네 물가를 잘 모르던 나는 그대로 당했다. 원래 왕궁이나 왓 포 쪽에 방콕 초보 여행자들이 많은 걸 알고 많이들 비싸게 부른다고 한다. 그래봤자 몇 천원 차이지만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가자 날 불쌍히 여겨준 호텔 직원이 체크인을 바로 해줬고,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객실로 들어가 에어컨을 강풍으로 맞춰놓고 신나게 샤워를 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짜뚜짝 주말시장에서 계속!




+ 그 외 왕궁, 왓 포 사진들
























2019/09/07 14:45

방콕 주말여행 (2) 어묵국수와 콘파이, 반 차트 호텔 └ 방콕 주말여행 (2019)

1.

숙소를 바꾸러 가는 길.

그러고보니 아침을 먹지 않았다. 이전 숙소에서 무진장 화가 났던 터라,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빼먹을 뻔 했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기운이 쭉 빠질테지.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요새는 여행을 떠나기 전, 가이드북을 보는 대신 구글맵으로 숙소나 관광지 주변의 평점 좋은 음식점들을 즐겨찾기 해놓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 덕분에 별다른 고민 없이 즐겨찾기 된 음식점 중 동선 상에 있는 음식점엘 들어갔다.


음식점 이름은 찌라옌타포(어묵국수).

118 Chakrabongse Rd, Khwaeng Chana Songkhram, Khet Phra Nakhon, Krung Thep Maha Nakhon 10200
https://maps.app.goo.gl/dVeWwbiKNxs88bAQ9




여긴 선풍기 돌아가는 로컬 음식점이다. 아직 오전이라 그렇게까지 덥지 않아 다행이다. 한낮에 먹기엔 국물 음식이라 땀을 잔뜩 뺄 것 같다.




음식점 주인은 한가로운 태도로 한국어 메뉴를 건네줬다.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음식점인가 보다.

면, 국물, 사이즈, 추가 메뉴 등을 고를 수 있다. 한국어로 적혀 있어서 쉽게 고를 수 있었다.




어묵국수 등장. 스몰 사이즈 시켜서 60바트.

양이 생각보다 적었다. 포만감을 느끼고 싶은 분은 라지 사이즈를 시켜야 할 것 같다. 나는 (요새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원래 소식하는 편이라 요 정도 양에도 만족하며 먹었다.

면은 쫄깃했고 국물도 괜찮았다. 오뎅은 그냥저냥. 우리나라 오뎅보다는 훨씬 괜찮은 맛이긴 했으나... 원래 오뎅이란 걸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정확한 평가가 어렵다. 대신 유부는 아닌데 뭔가 흐물거리는? 얇은 튀김을 물에 적신 듯한? 하여간 뭔가 흐느적거리는 건더기가 있었는데 그게 참 맛있었다.




깨끗하게 비움.

국물 뜨끈한 걸 먹고나니 기부니가 좋아졌다. 값을 치르고 인사한 뒤 나왔다.





2.

조금 걷다보니 무진장 더워졌다. 선풍기 탈탈탈 돌아가는 가게에서 뜨거운 국물을 드링킹한 뒤 땡볕을 걷는 거니, 더워지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간식을 먹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가장 가까운 맥도날드에 왔다. 태국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콘파이'를 먹기 위해서다.


카오산로드 맥도날드

48 Khaosan Rd, Khwaeng Talat Yot, Khet Phra Nakhon, Krung Thep Maha Nakhon 10200
https://goo.gl/maps/kTvtxLjXV6Yi76eo7


나는 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도 "콘파이 먹어야 돼" "콘파이 진짜 맛있어" "콘파이는 꼭 먹어봐" "콘파이, 콘파이" 거리길래, '콘파이'라는 고유명사를 가진 태국 전통음식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태국 맥도날드에선 전통음식도 파는구나, 라이스 버거나 불고기 버거 같은 느낌인가, 어쨌든 반드시 먹어야 한다니 시켜보자, 하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라 Corn Pie였다.

...

맥도날드에서 주문하기 직전, 메뉴에 써있는 Corn Pie를 보며 어찌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콘파이가 콘파이였다니!




예상을 뛰어넘은 매우 평범한 음식이었으나 다들 꼭 먹어보라고 했으니 일단 주문했다. 가격도 저렴했다. 겨우 26바트. 한화 1000원 정도다.

콘파이만 시키면 외로울 것 같아서 파인애플파이와 아이스 커피도 함께 시켰다. 새로 조리해야 한다고 좀 기다려야 한단다. 워머에 있던 게 아니라 새로 조리한 거라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적당한 창가 쪽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일기를 썼다.




7분 정도의 기다림 후에 나온 콘파이(26바트), 파인애플파이(26바트), 아이스 커피(50바트), 다 합쳐서 102바트.




콘파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태국의 전통음식' → '콘이 들어간 파이'로 격하(?)됐을 땐 솔직히 실망했었는데, 한입 두입 먹다보니 고소하고 달달하며 쫀득한 그 맛이 매우 훌륭했다. 이래서 다들 먹으라고 했던 거군. 기다린 보람이 있는 맛이었다.

콘파이 옆에서 광고하고 있길래 덩달아 시켰던 파인애플파이는, 캔 파인애플과 파인애플 쨈을 섞어 만든 듯한 달달함이 느껴졌다. 황도처럼 설탕이나 시럽에 절여진 과일의 식감이란... 이 역시 매우 훌륭했다.

1천원짜리 맥도날드 디저트 메뉴인 주제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감탄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3.

어묵국수와 콘파이 덕분에 배도 차고, 에어컨 바람 덕분에 몸도 식으니 기운이 살아났다. 아침에 있었던 실랑이도 새까맣게 잊었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의 카오산 로드.

어딘가 가이드북 같은 데서 봤을 법한 풍경을 보고 있으니 흥이 올라왔다. 특히나 방콕 여행은 무지 옛날부터 - 대학생 때 일정과 비용을 계산해뒀던 엑셀파일이 클라우드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가고 싶었으나 아껴뒀던 - 나중에 직장인 되면 주말 여행지로 여길 가보자! 라는 느낌으로 - 곳들 중 하나라서, 감흥이 남달랐다.

으흐... 나 지금 방콕에 있잖아!

빨리 숙소에 짐 풀고 관광을 시작해야겠다!





4.

이번에 바꾼 숙소는 카오산 로드와 람부뜨리 로드의 딱 중간에 걸쳐있는 반 차트 호텔이라는 곳이었다.


반 차트 호텔(Baan Chart).

98 Chakrabongse Rd, Khwaeng Talat Yot, Khet Phra Nakhon, Krung Thep Maha Nakhon 10200
https://goo.gl/maps/ZiZztqbUiz7NdpUF8


총평부터 말하자면 저렴한 가격에 지내는데 큰 불편함 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기다 왔다. 물론 내가 바로 이전 숙소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해서 그 대비 효과로 이곳이 엄청 좋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나... 내 기분이라 그걸 어떻게 배제할 순 없고, 하여간 무지 좋았다.


아래로는 숙소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들.




1) 숙소 위치는 환상적이다. 아래로 1, 2분 내려가면 카오산 로드요, 위로 1, 2분 올라가면 람부뜨리 로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숙소 바로 왼쪽에는 버거킹이, 바로 오른쪽에는 스타벅스가 있다. 좌버거킹 우스타벅스라니 세상 어딜 가도 두렵지 않은 다국적 프랜차이즈의 끝판왕 조합이다.





2) 버거킹과 스타벅스 사이로 조금 들어가면, 시원한 나무 지붕 그늘의 1층 홀이 나온다. 호텔 로비 겸 식당이다. 홀 안쪽엔 리셉션과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체크인 할 때 아이스크림 무료 쿠폰을 주니 이용해보시라. 리셉션 오른쪽으론 화장실이 있다.

3) 아이스크림 가게 옆으로 엘리베이터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갈 수 있으며, 옥상에도 갈 수 있다. 옥상에는 아주 작은 수영장이 있는데, 수영장이라기보단 넓은 욕장 같은 느낌이다. 사실 수영장 있다고 해서 조금 두근두근했는데, 저녁에 이용하러 올라갔다가 짜게 식었다. 흑흑.





4) 객실은 ㄷ자로 도로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나는 ㄷ자의 가장 끝에 배치되어 도로와 가까워서 소음이 좀 있었으나, 에어컨을 틀자 그 모든 소음이 묻혔다. 에어컨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5) 객실키는 진짜 키로, 돌려서 잠그는 구조다. 카드키나 번호키가 아니라 조금 불편하긴 했다.





6) 객실 바닥과 벽지를 어두운 색으로 꾸며서 전반적으로 살짝 캄캄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싫지는 않았다. 화장실도 깨끗했다. 어메니티는 록시땅. 향이 좋았다. 타일과 장식 배치가 중국스러운 느낌이어서, 초창기 신서유기에 나오는 숙소 같구나 생각했다. 게임해야 될 것 같다.

7) 근데 어메니티 중에 면도기가 없다. 다리털 제모 안하고 갔는데 제모크림이나 면도기도 안들고 가서, 있으면 좋겠다 막연하게 생각했으나 없었다. 아쉬워라. 반바지나 원피스 등등의 복장을 주로 착용했고 그래서 되도록 제모를 하고 싶었으나... 별 수 없다. 그냥 북슬거리는 채로 다녔다. 그 상태로 마사지 받으러 갔으니 마사지사에겐 매우 미안할 따름이다.

8) 밤마다 1층 야외 홀에서 콘서트가 열린다. 이거는 취향을 좀 탈 것 같은데, 그게 시끄러워서 짜증날 수도 있고, 음악이 좋아서 흥얼거릴 수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 하루는 목소리 엄청 깨끗한 언니가 빗소리와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맥주 마시면서 듣다가 너무 행복해서 계속 히죽히죽 웃던 기억이 난다. 방콕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9) 체크아웃하면 기념품으로 작은 록시땅 핸드크림과 샤워젤을 준다. 지금 내 책상 앞에 있다. 원래 핸드크림 이런거 잘 안사는데 (안사도 어디선가 선물로 자꾸 들어온다. 선물로 만만한 제품군인 것 같다.) 보고 있으니 요 호텔과 방콕 생각이 나며 기분이 좋아진다.


하여간 무지 즐겁게 머물렀던 호텔 요약 끗!





5.

체크인 시간은 오후였는데, 내가 너무 빨리가서 객실 정리조차 되어있지 않다고 했다. 그야 뭐, 전 숙소에서 아침에 뛰쳐나와 이제 막 아침식사를 하고 온 참이니, 호텔 입장에선 굉장히 이른 시간이긴 하다. 그래서 체크인은 이따 오후에 하기로 하고, 짐만 맡겨두고 왕궁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왕궁이랑 왓포를 구경하고 돌아와서도 체크인 시간이 남아있었는데, 직원 앞에서 알짱거리며 얼굴 계속 비췄더니 그냥 얼리 체크인 해줬다. 불쌍해보였나... 헤헤...





6.

숙소에 짐을 맡긴 뒤 로비 소파에 앉아 구글맵으로 거리를 확인하니, 15분 정도만 걸어가면 왕궁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가깝잖아? 그렇다면 슬슬 걸어가야겠다.

물론 그건 지도상, 이론상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나는 절반 정도 지나고 나서야 왜 택시를 타지 않았는가에 대해 후회하고 말았다. 이 더운 땡볕 아래를 15분이나 걷는다는 건 내 자신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행위였다. 그리고 뭐가 15분이람. 초행길이다보니 30분 넘게 걸렸다.

그래서 그 이후부턴 거의 택시만 타고 다닌 것 같다.

뭐... 그냥... 걸어다니며 밝고 깨끗한 방콕을 둘러본 것에 의의를 두며... 당시에 찍은 사진들을 쭉 올려본다.




파란 하늘 아래 코끼리.




짜오프라야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강의 다리 건널 때 찍은 사진.

길거리에 사람 한 명도 없었음.




바람이 잘 불어서 그나마 시원했다.

펄럭이는 국기.




지도에 찍힌대로 걸어왔는데 왕궁 입구는 여기가 아니란다. 담벼락만 보이다니... 털썩.

내 체력과 더위와는 상관없이 하늘은 참 예뻤다.




역시 하늘이 예뻐서 찍은 사진.

아래 노란 건물은 무슨 정부기관 건물 같은 거겠지.





7.

여차저차 왕궁 입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테러 위험 때문인지 짐 검사를 하더라.

검사를 받고 펜스 안쪽으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먹통이 됐다. 화면이 까매지더니 초록색 안드로이드가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거였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너무 열받아서 그런 건가? 생수통 가져다대고 그늘에서 식히고 입으로 후후 불어주니까 10분 뒤에 정신차리더라.

어찌보면 알량한 폰 하나에 기대어 여행을 하고 있는 건데 아찔했다. 지도, 카메라, 호텔주소, 음식점, 관광정보, 비상연락처 모조리 다 이 폰 하나에 들어있는 건데... 가뜩이나 땀투성이였는데 거기에 식은땀이 추가로 흘렀다.

너무 더울 땐 핸드폰을 혹사시키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가방 안에 잘 갈무리해두고, 왕궁으로 입장했다.





왕궁에서 계속!






+ 딴 얘기

그렇게 나와 방콕 여행을 무사히 마쳤던 폰은 어제 막 운명을 다했다. 외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는데, 그걸 어떻게든 주워보려다가 손에서 한 번 튕겨서 아스팔트 바닥에 정면으로 내리꽂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대표님 왈, "화나는 일이 있냐, 왜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던지냐"라더라.

이 핸드폰도 원래 폰 떨궈서 고장나는 바람에 친구가 가지고 있던 예비폰 받은 건데... 미안해 친구...

손에 이상한 게 씌였나... 왜 핸드폰을 못떨궈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고 계신 방콕 여행 사진은 제 핸드폰의 유작입니다...

그냥... 그냥 그렇다구요...




2019/09/05 11:09

방콕 주말여행 (1) 거짓말쟁이 숙소 └ 방콕 주말여행 (2019)

1.

6월 말, 방콕에 다녀왔다.

왜 갔냐고 하면 순전히 금요일 외근 때문이었다. 금요일날 코엑스 쪽에서 업무 처리할 게 있었는데, 일 끝나고 집까지 돌아가기가 무지 귀찮았다. 우리 집은 인천이다.

그래서 코엑스 도심공항을 통해 여행이나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 끝나면 인천 공항이니까 집까지 가기 편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적당한 비행기표를 구해 다녀온 곳이 바로 방콕이다.

당시엔 무지 합리적이고 치밀한 생각 같았는데 써놓고 나니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생각 같다. [서울→인천]이 싫어서 [서울→방콕→인천]이라니.


...그래, 그냥 여행이 가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2.

일정.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좀 게으르고 체력이 딸려 관광이나 맛집에 욕심없이 다니는 편이라 그에 걸맞는 일정임.


(금, 늦은 밤 출발)

(토) 1일차 : 아침식사 (오뎅국수, 맥도날드) - 왕궁 관광 - 휴식 - 점심식사 (크루아 압손) - 짜뚜짝 주말시장 - 저녁식사 (우텅, 길거리 음식) - 타이마사지
(일) 2일차 : 아침식사 (스트리트 카페) - 시암 아이쇼핑 - 점심식사 (솜땀누아, 애프터 유) - 타이마사지 - 저녁식사 (숙소 펍) - 왓 아룬 야경
(월) 3일차 : 늦잠 - 쑤언팍깟 궁전 - 아점 (팩토리 커피, 지하철 빵) - 요리교실 수업 - 점저 (요리교실) - 공항

(화, 이른 새벽 도착)



이동수단은 줄곧 택시였다. (요리교실 찾아갈 때 딱 한번 전철 이용해봤다. 전철은 무지 일본스럽더라.)

그랩 깔아놓고 갔어야 했는데 핸드폰 바꾼 담에 그랩 인증 안 받은 채로 심카드도 바꿔놔서 그냥 그랩 안쓰고 택시 잡아탔다. 그래서 좀 불편했다. 여행지에서의 택시란 놈은 일단 바가지 쓰고 보니... 다행히 방콕은 미터기 켜놓은 택시가 많아 다행이었다. 

혹여 저 같은 동남아 단기 여행자라면 한국에서 그랩 미리 다운받고 인증 받으시길 바람. 





3.

총평.

즐거웠으나 아쉬움이 남는.

숙소가 카오산 로드 근방에 있어서 그 주변 위주로 구경했는데, 밤낮할 것 없이 적당히 안전하고 무난한 분위기였다. 영어 잘 쓰고, 여행자들 많고, 먹을 거 많고, 시끄럽고... 과연 배낭 여행자들의 성지라는 별명이 붙은 도시였다. 하지만 그 점이 좀 아쉬웠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태국인들'의 방콕이었는데, 보고 온 건 '여행 중인 서양인들'의 방콕이었다. 방콕은 현지인보다도 여행자들, 특히 백인 여행자들 천지였다.

생각해보면 서양인들이 방콕을 좋아할만한 이유는 산처럼 많다. 독특한 건축양식의 왕궁과 사원, 저렴한 물가와 맛있는 음식, 태국의 자랑인 타이 마사지, 이국적인 향취와 신비로운 동양적 분위기까지. 서방의 여행자들이 방콕이란 도시를 아시아 여행의 거점으로 삼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 같아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물가 + 이국적 풍경 + 맛난 음식 + 좋은 숙소 조합이라면 비행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휴가철마다 거길 갈테니 말이다.

그러다보면 도시는 관광도시화 되고, 주로 오는 여행자들의 국적과 문화 위주로 개발될 것이다. 그 문화의 침식과 개방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잘 된 일이나, 개취로 나는 원주민보다 여행자가 휩쓰는 분위기를 좋아하진 않는다. 

뭐, 방콕에 이미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를 일개 여행자인 내가 뭐 어쩔 순 없는 거고, 그냥 좀 아쉬울 뿐이었다.


Q. 다시 태국에 간다면?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카오산 로드 쪽을 또 갈 것 같진 않다. 방콕을 거점으로 삼고 근교를 돌거나 다른 도시에 갈 것 같다.





4.

1일차 일정에 들어가기 전,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짜증나는 경험을 했다. 이번 포스팅은 그것만 간단히 써보고 끝내야겠다.


우선 택시.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서 시내까지.

고속도로 Toll 비 : 25+50바트
미터기 : 320바트
팁 : 50바트


총 445바트 들었다.

나중에 검색하니 공항에서 시내까지 300~400바트 사이면 된다고 한다. 그것보단 조금 비싸게 냈다. 하지만 나는 한푼 두푼으로 쉽게 짜증내지 않는다.

짜증났던 포인트는 택시기사가 날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는 거다. 택시는 나를 숙소 근처의 큰길가에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도착한 줄 알고 값을 치르고 내렸는데 거기가 아니었다. 길가에 덩그러니 버려진 여행자 enat... 시간은 새벽 2시, 컴컴하고 으슥한 방콕의 밤.




사진으로부터 다급함이 느껴지시는가!

처음 잡은 숙소는 또 하필 긴 골목의 끝에 위치해서 거기까지 가는데 몹시 무서웠다. 긴장한 상태로 도도도도 걸어가고 있는데 발정난 고양이가 바로 옆에서 울부짖었을 땐 숨 멎는 줄 알았다. 놀란 마음 추스릴 겨를도 없이 더 빨리 달려갔다.

빌어먹을 택시기사... 차문에 손가락이나 찧어버려라...





5.

Bedspread Hostel (3 Thanon Phra Sumen Trok Kai Chae Chana Songkarm, Phra Nakorn, 방콕 타이)

도착한 숙소는 Bedspread라는 호스텔이었다. 부킹닷컴이나 트립어드바이저 평이 높은 편이었고, 웬만한 호텔보다 괜찮다는 평들을 보고 예약한 거였다.




요건 낮에 찍은 호스텔 외관. 이쁘장하고 깔끔하다.

분명 24시간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해서 도착 시간을 미리 알리고 찾아갔는데, 도착하니 로비의 전등은 꺼져있었고 리셉션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해서 로비를 한바퀴 돌았는데 출입구에 작은 쪽지로 "Dear enat..." 어쩌구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번호 하나가 쓰여 있었다. 도착하면 이쪽으로 전화하라는 거였다.

나는 데이터만 되는 유심인데. 어쩐담.

리셉션에 가보니 무선전화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화 한 통 정도는 빌려써도 될 것 같다. 그래서 리셉션 전화기로 전화했다. 쓰여진 전화번호의 어디까지가 국가번호인지, 어디에 0을 붙여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3번 정도 잘못 걸었다가 마침내 제대로 걸었다.

전화를 걸고 내 상황을 알리자, 잠에서 덜 깬 직원이 위층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더니 대뜸 메일은 읽어봤냐고 물었다.

나 : 무슨 메일?
직원 : 쪽지에 써있잖아?


아까 그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쪽지를 다시 보자, 메일을 읽어보라는 글도 적혀있었다. 내가 무슨 메일이냐고 묻자, 말하기도 귀찮았는지 그냥 확인하랜다. 잠에서 덜 깨서 그러려니 하고 메일을 확인했다. 당일 오후에 온 메일이었다.

"네가 예약한 방(킹 룸)의 에어컨이 고장나서 못 들어가게 됐어. 그러니까 첫날밤만 스탠다드 룸을 쓸래? 스탠다드 룸은 원래 얼마얼만데 그걸 깎아줄게. 그럼 고마워!"

나 : 뭐? 에어컨이 고장났다고?
직원 : 응. 그러니까 스탠다드 룸을 저렴하게 해줄 거야.
나 : 난 킹 룸을 쓰고 싶었는데.
직원 : 오늘 밤만이야. 내일부턴 괜찮아.


직원은 내 말을 끊곤 결제를 뭐로 할 거냐고 물었다. 내 말에 대꾸하기도 귀찮은 것 같았다.

...그래, 이 새벽에 어딜 가겠어. 에어컨이 고장났다잖아.

나는 카드를 내밀었고, 직원은 원래 내기로 한 가격보다 몇 천원 정도 싼 가격을 결제한 뒤 카드를 돌려줬다.





6.

결제하고 들어간 스탠다드 룸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탠다드 룸을 쓸 거였으면 다른 호텔을 예약했지, 이 호스텔을 잡지 않았을 거다.

침대는 삐걱이는 철제 프레임에, 이불엔 뭔가가 묻어있었으며, 바닥에 먼지는 많았고, 세면대 배수는 느렸다. 도대체 여기 평점이 왜 높은지 모르겠다.




불쾌함을 애써 누르며 짐도 제대로 풀지 않고 잠들었다. 원래 어디 도착하면 옷장에 입을 옷들을 쫘라락 걸고 흐뭇해하는 편인데, 이곳은 옷장도 없었을 뿐더러 있었더라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늦은 새벽에 도착했으니, 금새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정신을 차리려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군.


한나절만에 고쳐지는 걸 확신하고 있잖아?



눈이 번쩍 떠졌다.

예전에 멕시코에 갔을 때, 숙소의 온수기가 고장나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숙소 주인은 "수리기사가 주말이라 잘 안잡혀... 언제 고쳐질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고쳐볼게. 미안해!"라는 사람 환장하게 하는 말을 했었다. 그 땐 환장했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나? 우리나라처럼 성격 급하고 인프라 갖춰진 나라가 아니고선 말이다. 보통은 뭐가 언제 고쳐질지 모른다고. 아무리 수리기사가 방문하기로 했어도 '만약'이라는 것 때문에 얼버무려 말하는 게 사람 심리인데.

근데 분명 그 메일도, 직원도, 오늘 밤만 그렇고 다음 날부턴 킹 룸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에어컨이 만약 안고쳐지면 어떡하려고 그런 확신에 찬 말을 하는 거람?





7.

자리에서 일어나 리셉션으로 가니 어제와는 다른 직원이 있었다. 나는 생긋생긋 웃으며 직원에게 인사했고, 직원도 화답했다. 나는 직원에게 언제쯤 내가 킹 룸으로 갈 수 있냐고, 짐을 옮겨놔도 괜찮냐고 물었고, 직원은 내 사정을 듣더니 차분하게 대답했다.

직원 : 킹 룸은 지금 손님이 꽉 차서 안돼.
나 : 손님이 꽉 찼다고?
직원 : 손님이 체크아웃을 해야 들어갈 수 있지.


그러면서 직원이 쪽지를 하나 보여줬다. 내 이름과 모르는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스탠다드에서 킹 룸으로, 내 이름은 킹 룸에서 스탠다드로 바뀌어 표시되어 있었다. 으음? 이게 뭘까?

직원 : 여기, 이 손님이 나가야...
나 : 어, 있잖아, 킹 룸 에어컨은 괜찮아?
직원 : 에어컨은 아주 잘 돌아가. 걱정하지 마.



...

......


고장났대매!


나 : 잠깐만, 나는 에어컨이 고장났다고 들었어.
직원 : 에어컨은 고장나지 않았어. 우리 에어컨은 빵빵해.
나 : 아니 그러니까, 에어컨이 고장나서 내가 킹 룸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들었다고.
직원 : 어?


직원은 그제야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직원 : 아니... 어... 잠깐만!

그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태국어로 뭐라뭐라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8.

직원 : 있잖아. 내가 잘 몰랐어. 에어컨이 고장난 게 맞대.
나 : ......
직원 : 근데 에어컨 수리기사가 오후에 온대. 그래서 오후 3시 이후에 들어갈 수 있어.
나 : ......
직원 : 문제 없지?


직원은 매니저와 통화를 한 뒤 말을 맞추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바보인가? 아니면 바보로 아는 건가?

나는 맹한 눈으로 물어봤다.

나 : 아, 그래? 그럼 나 지금 방 좀 봐도 될까?
직원 : 응?
나 : 문 열어봐. 우리 같이 문 열러 가자.
직원 : 아, 안돼.
나 : 왜 안돼? 거기엔 손님이 있으니까?
직원 : 응...


아이고 머리야.

나 :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건 거짓말이지? 오버부킹 한거잖아. 이 거짓말쟁이야!
직원 : ...미안.






9.

직원은 오버부킹과 뻔뻔한 거짓말에 대해 실토한 뒤 얼버무리듯 사과했고, 나는 환불을 요구했다. 어젯밤 잤던 스탠다드 룸은 어쨌든 내가 숙박한 건 맞으니까 내는 걸로 하고, 나머지 요금을 현금으로 돌려받았다.

나중에 매니저에게 "너희는 거짓말을 했어. 너희 직원도 오버부킹이 맞다고 실토했어. 누군가는 그 방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기분이 나빠. 좋은 리뷰를 쓸 수는 없을거야." 등등의 내용이 담긴 글을 메일로 보냈다. 매니저는 한참 뒤에야 답변을 보내줬는데, 자신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고, 에어컨은 고장났고 그 남자 직원이 잘 몰라서 그런 거다, 걔는 어제부로 일을 그만둬서 그렇게 말한 거다, 누가 자고 있었던 건 맞는데 그건 직원이었다, 에어컨 기사는 점심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라는 답변을 줬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꾸할 기력도 잃었다.


첫째로, 날 상대했던 직원은 전부 여자였다. 어디서 남자 직원이 나왔는지, 그리고 걔가 왜 잘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메일에다가 쓸 때 You guys... 어쩌구라고 써서 그런 것 같은데. 상황파악도 안하고 대충 썼다는 증거겠다.

두번째로, 내가 저 말을 믿으려면 '그 더운 방콕에서 굳이 에어컨이 고장난 방에 들어가서 자고 싶어하는 직원'과 '사업장에서 제일 좋은 방의 침대를 땀범벅이 될 걸 알면서 내주는 사장'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우선 믿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직원과 사장이 이 지구상에 존재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번째로, 쪽지 하나로 고객이 미리 예약했던 방을 바꿔놓은 주제에, 미안한 태도를 보이는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 전날밤의 직원이나 아침의 직원이 조금이라도 그런 태도였다면 아하하 웃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노이에서도, 테를지에서도 숙소 때문에 곤란을 겪었었지만 직원들의 태도 덕분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차라리 이중으로 예약을 받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제대로 사과를 했다면 그러려니 하고 잤을 것이다.

그런데 이 Bedspread 놈들은 직원도 매니저도 숙박업체에서 일한다고 하기엔 너무나 예의가 없다!





10.

숙박시설은 직원과 게스트의 신뢰가 중요한 법인데, 여기서 전부 끝났다.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짐은 가방 하나 뿐이라서 그다지 번거롭지도 않고, 사실 룸 컨디션도 위치도 마음에 안들었었는데,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대로 숙소를 예약하곤, 그 기분 나쁜 호스텔을 뒤로 하고 나왔다.






다음 숙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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