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5 20:59

광주 여행 (feat. 나주/담양) └ 여행지 추천

얼마 전에 광주에 다녀왔다.

광주를 거점 삼고 나주와 담양에도 다녀왔는데 쏠쏠하게 즐거운 여행이었다.


사진은 역시나 요새 열일하시는 갤럭시 보급형 A5 2017님께서 해주심.





1) 송정역 시장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로 8번길 13

오래되고 낡은 재래시장이 청년들의 아이디어와 아날로그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했다.

덕분에 요새 많이 핫하다는 송정역 시장은, KTX가 서는 광주 송정역 앞에 위치해 있다.




감성 넘치는 가게 외관. 엄청나게 신경 쓴 간판과 건물 디자인 덕분에 눈 돌아간다.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엄청 탱글탱글했던 국수, 지나칠 수 없었던 삼겹살 쌈, 한끼라면의 정갈한 외국 라면까지. 당시에 살짝 배가 부른 상태였는데 가볍게 먹을만한 가게들이 참 많아서 행복했더랬다.

마지막은 음식 들고 다니는 관광객에게 관심이 많은 동네 개. 뭐 먹고 있으면 자꾸 근처에 와서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 에헤이. 저리가. 내꺼얌. 너희한텐 너무 짜서 안돼.




밤에 불 들어온 모습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결국 못보고 왔다. 야간 촬영 잘 되는 카메라 구해서 또 가야지.





2) 서울 곱창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로 15번길 71

3대 천왕에도 나왔다는 서울 곱창. 송정역 시장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TV에 나온 집은 잘 안가는 주의 (기다리는 게 너무 싫다!) 지만, 최근 들어 곱창이라는 신세계에 빠져서 (예전에는 곱창을 못먹었었는데, 부산 여행 중 무비몬에게 억지로 먹임 당한 이후로 맛있어서 계속 먹게 됐다!) 한번 가봤다. 당연히 기다리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가게에 들어가서도 여기가 그 집이 맞나 기웃기웃거렸더랬다.




1판에 15000원인데, 1판만 시켜도 둘이 나눠 먹을 수 있다. 충분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지만 안주할 정도의 양은 되더라.

곱창치고 둘이 먹기에 가격도 저렴해서, 동네에 있으면 제법 갔겠다 싶었지만, 단지 이 곱창을 위해 멀리서 찾아올 정도의 맛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지나가는 길에 있으면 들릴 정도의 맛이긴 하다. 어라 이 표현... 미슐랭 가이드 별 하나짜리 표현이던가? 하여간.





3) VOYAGERS : 광주광역시 서구 월드컵4강로 181번길 42

광주의 유일한 여행 카페.

나중에 혹시라도 카페를 열게 되면 이런 분위기의 카페를 열고 싶다 생각했던 곳이다. 여행 물품과 가이드북, 기념품 등등이 카페 전체를 꾸미고 있는데다가, 전반적인 브금도 후리후리하다.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지는 곳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당시 약간 우울+음침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카페에 와서 많이 힐링받았다. 쉬고 있는 여행자에게 '여행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카페였다.

메뉴 중에 '여행자의 차'라는 게 있어서 사장님께 뭐냐고 여쭤봤더니, 여행 중에 얻거나 외국인들이 들고 온 차들을 모아 판매하는 거라고 하시더라. 뭐야? 이름 하나 붙였을 뿐인데, 단순히 여행지에서 가져온 굴러다니는 티백이 포션으로 신분 상승한 느낌이다. 나는 네이밍 센스에 넘어가 그 여행자의 차라는 걸 마셨다. 여행력 회복 +170 띠로리.

여행력이 떨어져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께, 혹시라도 VOYAGERS 카페 근처에 볼 일이 있으시다면 한번 정도 들려보시는 걸 추천한다.





4) 국립 아시아 문화 전당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사실 이곳을 제대로 둘러보진 못했고, 잠깐 머물다가 맞은편 충장로 거리 쪽으로 넘어가 쇼핑했더랬다. 충장로 너무 좋더라. 옷도 싸고 신발도 싸고 다 싸! 급작스레 출발한 여행이라 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미니미니랑 나는, 옷 상하의 한 벌씩과 신발 한 켤레씩을 샀다.

아, 충장로 이야기가 아니었지. 하여간 국립 아시아 문화 전당. 이곳에선 매주 토요일에 브릿지 마켓과 하늘 마당이 오픈되어 광주 시민들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준다고 한다. 그걸 구경하려고 갔더니...




저녁에 비가 한바탕 쏟아져서 폐장인 분위기였다. 에잉. 왁자지껄한 모습을 기대했는데.

그래도 은은한 조명 아래 촉촉하게 젖은 풍경은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만족했더랬다.





5) 운천 저수지 연꽃 : 광주 서구 쌍촌동

차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된 저수지. 저수지 전역을 수련과 연잎이 덮고 있었다.

연꽃이 피는 시기에는 환상일 듯. 아마 포스팅하는 지금이 딱 적기일 듯 싶다.





참고로 광주에는 운천 저수지 말고도 연꽃을 볼 수 있는 다른 호수들이 많다고 한다. 중외공원 입구의 운암제, 양산동의 양산호수, 전남대 용봉호수 등등.

광주라는 도시가 연꽃에 뭔가 사연이라도 있나? 연꽃 피는 공원들이 군데군데 많구만.





6) 나주 곰탕 거리 : 전남 나주시 금계동

사실 이번 광주 여행은 이 나주 곰탕 때문에 떠나게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여행가기 며칠 전, 친한 오빠랑 프랜차이저 나주곰탕 가게에 가서 밥을 무진장 맛있게 먹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뚱하게 듣던 미니미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럼 자기는 본고장의 곰탕을 사주겠단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바로 나주로 향했던 것이었다. 겸사겸사 광주랑 담양 구경도 하고...




하여간 본론! 나주 곰탕거리에는 몇 개의 유명한 곰탕집이 있는데, 제일 유명한 곳이 '남평할매집'이란 곳이더라. 근처에 다른 유명한 가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더 이상 검색하기 귀찮아서 걍 그곳으로 갔다.

에어컨 빵빵한 가게에 들어가 주문하자마자 국물 뜨끈뜨끈한 곰탕이 나왔는데, 과연 곰탕의 본고장, 부드러운 고기와 깊은 국물맛을 보여줬다. 특히 나는 이가 약한 편이라 질긴 고기는 잘 못씹는데, 여기 곰탕의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유명한 집은 이유가 있구만.

둘 다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흐뭇해하며 가게를 나섰다. 냠냐냠.





7) 남양유업 카페 :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영산로 5785

밥을 먹고 근처에 차 마실 곳 없나 검색하다가, 남양유업 공장에 붙어있는 카페가 유명하다길래 그곳으로 갔다.




카페가 공장 안에 있는 거라 출입증을 따로 발급받아야 하는데, 방법이 특이하다. 남양 제품을 사먹은 영수증이 필요하단다.

공장 바로 옆에 편의점은 없고, 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서 '남양 요쿠르트'나 '맛있는 우유GT' 등을 사서 영수증을 가져가도록 하자. 그럼 경비아저씨가 이름을 쓰게 하고 신분증을 받은 뒤 패스 카드를 넘겨주신다.

길을 따라 공장 옆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가 다시 남양 제품 영수증을 보여주면 메뉴를 시킬 수 있다. 영수증 1장당 커피 2잔을 시킬 수 있으며, 커피 1잔당 1천원의 기부금을 받고 있다. 주문을 마친 뒤 기부금 통에 돈을 쏙 넣고, 몇 분 간 얌전히 기다리면 주문한 음료가 나온다. 맛은 평타 이상이었다. 이래저래 괜찮았음.




예쁘장한 카페 내부.

2층이지만 테라스로 뚫어놓아 천장이 겁나 높아보였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온통 원목 색이라 분위기도 부드러웠고, 2층에 적당히 꽂혀있는 책들도 좋은 인테리어 소재였다. 음음. 분위기 좋구만. 자주는 아니어도, 한번쯤 와볼만한 카페였다.





8) 메타세콰이어길 :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 578-4

나주에서 차를 돌려 담양으로! 참고로 나주는 광주 남서쪽에, 담양은 광주 북동쪽에 위치해있다. 광주를 중심으로 정 반대방향에 위치해 있어서, 찾아가는 동안 자꾸 뭔가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담양에선 메타세쿼이아.. 메타세콰이어.. 메타세콰이아.. 어떤 게 표준어지? 뭐 하여간 표기 참 어려운 그 길에 다녀왔다.




메타세콰이어길은 메타프로방스 마을 (요 마을은 작년에 갔을 때 뭔가 어수선하고 공사중이었는데 그 때랑 똑같더라. 찾아보니 일을 추진한 군청 쪽에 문제가 있어서 현재 대법원에서 사업인가와 토지수용 무효 판결이 났단다. 문제 많은 곳 같던데 없어지려나?) 바로 앞에 있다.

담양은 예전에 죽녹원 때문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땐 너무 더워서 메타세콰이어길은 휘리릭 보고 말았더랬다. 이번엔 더워도 꼭 제대로 된 사진을 찍자며 하하호호 신나서 들어갔는데, 어디선가 경비 아저씨가 달려와 호통을 치며 나가란다. 물어보니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며 입장권을 내놓으라고 하신다.




입장료를 내라면 얌전히 냈을텐데, 하필 매표소가 있는 곳이랑 반대 방향으로 와서 몰랐다. 몰랐을 뿐인데 뭔가 경비 아저씨의 경멸이 담긴 눈초리와 호통에 빈정이 상해버렸드아. 나와 미니미니는 둘 다 뚱한 표정이 되어 그깟 길 안들어갈거라고 투덜거린 뒤 입구에서만 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탔다.

사진 찍고 돌아가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우리를 지나쳐 메타세콰이어길 쪽으로 들어갔다. 아, 이런, 경비 아저씨가 뭐라 할텐데. 우리는 그 아저씨에게 알려주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경비 아저씨가 뛰쳐나와 어김없이 뭐라뭐라 호통쳤다. 그러나 아저씨는 이미 예상했다는듯, 굉장히 쿨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빳빳한 입장권을 슥 꺼내어 경비의 얼굴 앞에 당당히 보여주고 태연하게 걸어갔다.

크으... 뭐지? 뭔진 모르겠는데 하여간 뭔가 멋있다. 우리는 진정한 복수(?)는 저런 것이라며 뒤에서 조용히 박수쳤다.





9) 담양호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성리 산 3-3

메타세콰이어길에서 금방 떠난 탓에, 뭔가 시간이 어정쩡하게 됐다. 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린 곳이 바로 요 담양호였다.




물이 가득 차있는 시원하고 수려한 풍경을 기대하며 갔지만, 다리가 무색할 정도로 물이 말라있었다.

이 때는 7월 초, 가뭄이 극심했던 때였는지라, 어쩔 수 없는 풍경이었다. 도시에 살아서 가뭄이 심하단 이야기는 티비로만 들었었는데 호수를 보고 나서야 체감했더랬다.




그래도 뭐, 산책로 따라 걷고 다리 위에서 장난치고 드론 날리는 아저씨 구경하고 등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담양호 근처에는 아뜰리에라는 뷰 좋은 카페가 있다고 한다. 직접 가본 것은 아니지만 많이들 추천하더라. 나중에 장마 끝나고 호수에 물이 찬다면, 그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셔보고 싶다.







여태까지 내용을 지도에 정리하면 요로케!

광주와 그 일대가 막 엄청나게 추천할 정도의 여행지인 것은 아니지만, 뭔가 그 주변을 지나는데 들리지 않으면 괜히 아쉬울 여행지인 것 같긴 하다. 나는 여태 요 동네를 모르다가 이제야 알게 되어서 부랴부랴 (몇 년 전 포스팅도 잔뜩 밀려있는 내가 7월초에 다녀온 걸 지금 포스팅 하는거면 부랴부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 포스팅 해본다.


다음엔 또 다른 여행지를 들고 와보겠슴다. 끗!




2017/07/21 20:06

두시간 전에 있었던 일 대나무숲

내 사수는 입만 열면 사람 속을 긁는다.

업무 지시 내리는 건 엉망이고,

자기가 빼먹은 내용에 대해 왜 물어보지 않았냐며 되려 화내는 쪽.

자신의 실패는 얼렁뚱땅 넘기고 남의 실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성격.

컴알못(21세기에 살면서 메일도 못만드는 사람 처음 봤다)에 몸 쓰는 일은 거의 안하는 공주님.

그래서 몸 쓰는 건 누가 함? 내가 함. 문제 생긴 걸 고치는 건 누가 함? 내가 함.

무슨 일만 터지면 내 이름부터 부르는 사람. 이것 좀 어떻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

그래놓고 작은 실수(라벨을 비뚤게 붙인 게 실수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라도 발견되면 일을 엉망으로 한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이 사수, 회사에서 인기인이다.

얼굴이 참 예쁘다.

술도 잘 마신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하이톤의 목소리.

사장님도 많이 아끼고, 거래처 사람들도 좋아 죽는다.


그래서 나는 사수가 날 병신 취급할 때마다 그러려니 해야만 했다.

내 편을 만들래야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이 여자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죽어라고 내 능력을 키워놨는데 얼굴 예쁜거 하나 못이기는구나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이전의 우울한 시기도 반쯤은 얘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음.


그러다가 최근에 회사가 다른 회사와 병합하면서,

다른 회사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됐다.


그 회사 사람들 중에 나랑 동갑인 직원이 있었다.

해외 생활도 길게 했단다.

통하는 게 많았다.

안지 얼마 안됐지만 퇴근하고 맥주나 마시면서 옛날 얘기 하고 그랬다.


그 직원이 오늘 업무적인 일로 내 사수와 엮였다.

내 사수를 겪은 그 직원이, 퇴근하면서 내게 말했다.


"저 여자 말을 왜 저렇게 경우없이 해요? 같이 일하는데 저렇게 일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대체 저걸 어떻게 참고 살아요? 성격이 좋아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 같은데 그러다가 노이로제 걸려요. 나는 그 쪽 회사 사람들이 다들 치켜세우길래 엄청 베테랑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하여간 성격 하난 진짜 이상한 것 같아."


이 때 느꼈던 기분을 거창하게 말하고 싶다.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이게 바로 두 시간 전에 있었던 일.

그래서 뭐 어쨌냐는 거냐면 그냥 그랬다고 어딘가에 쓰고 싶었다.

나는 내 사수가 말하는 걸 듣고 죽일만큼 싫어질 때면

가끔씩 내가 엄청 성격이 예민한 사람이거나 내 사수를 질투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떨었었다.

그야 그 사수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사 내부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우리 회사가 남초회사긴 하지만, 그래도.


근데 누가 "그거 진짜 이상해!"라고 해주니까

엄청 위로가 됐다.




...이 따위 회사 때려치고 사업에 전념이나 할까 하는 이 밤.

그래도 휴가 떡값은 받아야하니 여름 지나기 전까진 일해야겠다.

여름휴가 계획이나 세워야지.



2017/07/20 22:54

황금연휴 부산여행 (2) 남포동 일대 ├ 남부지방

1.

남포동에 내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국제시장이었다.

무비몬 : 그러니까 여기가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그 국제시장이란 말이지!
나 : 응. 나 영화는 안봤지만. 거기가 여기야.

영화까지 나왔으니 이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예의상 설명한다. 국제시장은 원래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물건을 사고 팔던 도떼기 시장이었다. 그 도떼기 시장은 전시 물자와 함께 부산항으로 밀수입된 오만가지 물품들로 인해 팽창하게 되었고, 당시만해도 신기한 외국의 물건들이 주로 거래되는 통에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외제 물품이 범람하는 현 시대에서도, 국제시장은 당시의 분위기를 맛보고 싶은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다.




그 여행자들 중엔 우리 둘도 있었다. 무비몬은 신이 나서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구경했고, 나는 그 무비몬을 뒤에서 따라다니며 천천히 구경했다. 그러고보니 여태까지 이 블로그에서 무비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한가지 빼먹은 게 있는데, 그건 바로 '무비몬은 쇼핑을 매우 좋아한다'라는 거다. 얘는 체력도 약한 편인데, 쇼핑만 하면 숨겨진 기운이 솟아난다.

무비몬 : 이거 봐! 나막신이야! 이거 어때?
무비몬 : 우와, 이건 캐나다에서 봤던 인형이야!
무비몬 : 이 화장품 완전 싸게 파는데? 이거 살까?
무비몬 : 저 옷 편해보여! 너 저거 사줄까?


반면 나는 쇼핑에 약한 편이다. 어느 정도는 쇼핑을 즐기지만 그 시간이 30분을 넘어가면 지치기 시작한다.

나 : 우와, 이쁘다.
나 : 와, 괜찮네
나 : 허허.
나 : ...


무비몬의 쇼핑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대답은 반비례하여 짧아진다. 무비몬과 내가 함께 쇼핑을 가면 늘 있는 일이다.

나는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가끔씩 지갑을 열려는 무비몬을 말리기도 하며) 무비몬이 지치길 기다렸다.





2.

무비몬 : 배고프다! 이 근처에 먹을 게 뭐 있지?

무비몬이 그 말을 한 순간, 나는 준비해둔 네이버 지도 앱을 켜서 미리 찾아뒀던 음식점 위치를 확인했다. 지금이 여기니까... 이쪽으로 가서 저쪽에서 꺾으면 되겠군.

나 : 유부주머니 먹어봤어?
무비몬 : 그게 뭐야?
나 : 어머, 유부주머니도 못 먹어봤어?


나는 이 틈을 타서 에그타르트(*리스본 여행기 참고)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무비몬은 별로 개의치 않고 먹어본 적 없는데 그게 뭐냐고 다시 되물었다. 재미없군. 좀 더 분해하란 말이지. 나는 다시 한 번 어떻게 유부주머니도 한번 못먹어봤냐고 태클을 걸었지만, 무비몬은 하품을 하며 태연히 대답했다.

무비몬 : 아, 뭐든 배를 채울 수 있으면 돼. 뭐든 먹자고. 그 가게는 어딨어?

결국 무비몬을 제대로 놀리지도 못하고 찾아간 유부주머니 가게...




이 가게는 예전에 여행지 추천 어쩌구 포스팅을 할 때도 올린 적이 있는, '깡통골목할매 유부주머니'였다.

뭐, 정작 건물의 간판에는 [우진도기]라는, 유부주머니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호명이 달려있다. 원래 도기류를 팔았는데 부업으로 유부주머니를 팔다가 잘 된 케이스인가? 이전 임대 가게가 우진도기였는데 귀찮아서 간판 안떼고 그냥 장사하시는 건가? 잘 모르겠군.




무비몬이 1개씩 사먹어야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렇게 먹으면 앞으로의 야시장을 어떻게 정복할 것이냐며 무비몬을 타박했다. 그리고 1개만 사서 둘이 나눠먹었다.

유부주머니의 맛은 이전 기억 그대로의 맛이었다. 당면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음식... 유부주머니뿐만이 아니라 국물도 시원하고 어묵도 맛있어서 둘이 쩝쩝거리며 신나게 먹었다. 재밌는 건 국물 리필이 된다는 거였는데, 국물을 퍼주실 때 국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어묵도 함께 왕창 퍼주시더라. 이런 후한 인심으로 장사해서 남는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무비몬은 리필은커녕, 자신에게 할당된 양도 다 먹지 못한 채 "배부르다아..." 어쩌구거려서 날 당황하게 했다. 이런 똥멍청이가. 부산의 저녁은 아직이라고!




결국 내가 다 비움.

공동 작품이 될 수 있었는데 무비몬이 중도 포기하는 바람에 이 작품은 내 것인걸로.





3.

무비몬 : 그러고보니 부산은 어묵이 유명하잖아. 여기 어묵 골목은 어디야?

!?

어묵이 유명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국제시장에 어묵 골목까지 존재할 줄이야... 난 머리를 긁적이며 검색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놀랍게도 타이밍 좋게 어묵 골목에 접어들었다.

무비몬 : 오홍. 이미 이 쪽으로 가고 있던 거였군.

난 머리를 긁적이려던 손을 가볍게 머리쪽에 받친 뒤 다 예상했던 거라는 표정을 짓고 태연히 어묵을 구경했다.




무비몬은 역시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이 어묵, 저 어묵의 특징을 물어보고 시식하며 행복해했다. 난 뒷짐을 지고 무비몬의 뒤에서 멍을 때리다가 무비몬이 주는 시식용 어묵을 받아먹고 그랬다.




그러다가 무비몬이 이런 스프도 있다며 신기해했다. 나는 조미료에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미원과 다시다를 사랑함) 그 스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기로 했다. 무비몬도 같이 샀다.

나중에 집에서 이 스프를 조금 넣고 뜨거운 물을 콸콸 부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오뎅 국물이 되더라. 국물 맛을 내고 싶은데 2% 부족할 때 등의 상황에서 이 스프가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조미료야 고마워!





4.

국제시장에서 어묵을 보다가 갑자기 생뚱맞은 가게가 나타났다.




뭐라고 해야하나... 미숫가루 가게? 방앗간? 선식집? 하여간 어묵가게 바로 옆에 있는 가게였는데, 각종 선식들을 빻아서 바로 파는 곳이라 고소한 냄새가 마구마구 풍겨왔다. 무비몬은 마침 자기가 선식이 필요했다며 그 선식집 주인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난 뒤에서 고소한 냄새를 음미하며 흐뭇한 미소로 대기했다.

관광객들이 다들 어묵거리에 몰려 있는지라 비교적 한가했던 주인 아저씨는, 관심어린 눈으로 꼬치꼬치 물어보는 무비몬이 마음에 드셨는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서 시음을 해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안쪽에 시음하는 공간도 있냐며 신기해하며 들어갔다.




이렇게 빻는 기계(이름이 뭔지 모른다)와 곡물들이 양 옆으로 놓인 공간을 지나면,




뭔가 주인 아저씨의 휴식 공간 같은, 소파+TV가 놓인 작은 방이 나오는데,




그 방 TV 아래에, 시음할 수 있는 다양한 선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

나와 무비몬은 당연히 안쪽에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선식을 타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백화점 시식 코너처럼, 뭐 대충 기계에서 소주잔 크기의 종이컵에 설탕맛 강한 선식을 부어주는 걸 상상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셀프바는 뭐야!? 아무도 안지키고 있어도 괜찮아? 막 먹어도 괜찮은 거야!?

나 : 야, 내가 시장에 자주 안가서 이게 신기한 거냐?
무비몬 : 적어도 우리 동네에 있는 시장에선 이런 시스템이 없었어.
나 : 와, 선식을 이렇게 셀프바로도 운영을 하다니... ㅋㅋㅋㅋㅋ
무비몬 : 세상은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차있어... ㅋㅋㅋㅋㅋ


우리 둘 다 뭔가 당황스러운 일이 있거나 처음 겪는 상황을 마주치면 마구 웃는 성격인지라, 일단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야 이건 진짜 흥미롭다, 이건 예상 못했다 어쩌구하는 이야기를 하며, 각자 취향껏 선식을 타먹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선식은 맛있었다. 한없이 건강해질 것만 같은 깊은 곡물맛과 그 사이사이 느껴지는 고소함...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아침한끼 대용으로 손색이 없을 든든함... 그야말로 제대로 된 정통 선식이었다.

맛있게 먹어서 한봉다리 사갈까 고민했지만, 왠지 선식가루를 안터지게 들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잘못해서 비닐에 구멍이라도 뚫리면 가방 안에서 대참사가 일어날텐데... 그래서 사는 건 포기하고 연락처만 알아가기로 했다.




근데 이거 왠지 가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서 시음까지 했는데, 빈 손으로 갈려니까 좀 눈치가 보인다. 우리는 쭈뼛거리며 명함 하나 가져가겠다고 얘기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러나 아저씨는 우리 선식 맛있죠? 즐거운 여행하세요 등등의 이야기를 하시며 쿨하게 손을 흔드셨다. 훔냐... 사고 가란 말도 안하시네. 괜히 걱정했다. 우리는 역시 부산 사람들 쿨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를 떠났다.





5.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슬슬 깡통 야시장이 들어설 때가 됐다. 나는 무비몬을 끌고 깡통 야시장 쪽으로 이동했다.




깡통 야시장은 대한민국에 야시장 열풍을 일으킨 국내 상설 1호 야시장이다. 좁다란 시장 골목길 가운데에 저녁만 되면 간이 매대가 쭉 들어서게 되는데, 그 비좁은 공간에 그렇게나 많고 다양한 음식들이 팔린다.

우리는 간이 매대가 들어서기 전에 야시장에 도착했는데, 덕분에 제법 여유있게 (어디까지나 간이 시장이 들어서기 전과 비교하여. 평범한 시장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붐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음식을 먹으러 다닐 수 있었다. 꼬치, 맥주, 닭튀김, 곱창볶음 등등...

대충 배가 불러갈 때 즈음 우렁찬 소리(잠시 비켜주세요, 조심하세요 운운하는 말이었다)와 함께 간이 매대가 밀려 들어왔다. 간이 매대는 순식간에 들어와 순식간에 설치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간이 매대와 음식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로 야시장의 길은 순식간에 좁아졌고, 우리는 들고 있는 음식을 어쩌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곧 인파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쓸려 나갔다.

나 : 우리 많이 먹었어.
무비몬 : 응. 나도 배불러.


야시장에서 튕겨져나가듯 빠져나온 우리는, 다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 든 곱창볶음을 냠냠 씹으며.





6.

야시장을 나온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수동 책방 골목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었는지, 많은 점포가 닫혀있었다.




나 : 아! 나 여기서 책 한 권 살려고 했는데! 아쉽당.
무비몬 : 그래? 지금 열린 가게만이라도 둘러볼까?


우리는 열려있는, 그나마도 이제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 서너군데의 책방을 돌았지만, 딱히 살만한 책은 보이지 않았다. 에잉. 어쩔 수 없지.

나 : 하여간 요런 책방골목도 있단 말야. 나중에 밝을 때 와봐.
무비몬 : 좋아. 다음에 부산을 여행하게 되면 이곳을 코스에 넣겠어.






7.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했던 우리는, 잠시 숙소로 돌아가 재정비를 했다. 그리고 다시 남포동으로 나왔다. 사실 무비몬이 피곤하다며 그냥 잘까 어쩔까 하는 걸 억지로 끌고 나온 거다.

나 : 씨앗 호떡은 꼭 먹어야한단 말이야!
무비몬 : 요새 여기저기서 씨앗 호떡 팔던데...
나 : 원조는 다르다고!


그러면서 나는 씨앗 호떡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부산에 놀러왔을 때 애들끼리 겁나 먹방 찍다가, 더 이상 들어갈 배가 없어서 리타이어 했을 때, 내 입에 어거지로 씨앗 호떡을 쑤셔넣어준 사람이 있었다, 그 배부른 와중에도 씨앗 호떡은 진짜 맛있었고, 그 씨앗 호떡 때문에 부산에 계속 찾아가게 됐다, 그리고 그 씨앗 호떡을 넣어준 사람은 미니미니였다, 어쩌구 저쩌구.

나 : 알겠어? 여튼 씨앗호떡은 꼭 먹어야한단 말야.
무비몬 : 남친 자랑만 한 것 같지만 알겠어. 먹으러 가자.





비프 광장으로 찾아가자 곧 씨앗호떡 가게가 나왔다. 두어군데의 씨앗호떡 가게가 열려있었는데, 전부 대기줄이 짱 길었다.

무비몬 : 어... 어디에 줄을 서야하는 거야!? 어디가 원조야!?
나 : 아무데나 서면 돼. 돌아가면서 간판을 바꾼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소문도 있어.
무비몬 : ㅋㅋㅋㅋㅋㅋㅋㅋ


호떡이 오래걸리는 음식은 아닌지라, 줄은 금방 빠졌다. 우리는 행복해하며 씨앗호떡을 받아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해하던 건 나뿐이었고 무비몬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흥, 그 표정이 곧 황홀한 표정으로 변할 것이다!

무비몬 : 냠냠냠냠냠
나 : ......
무비몬 : 흥. 맛있군.


무비몬은 놀랍게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맛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맛있는 호떡을 먹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 : 벼... 별로냐?
무비몬 : 아니? 진짜 맛있는데?


근데 별로 맛있어하는 표정이 아니다!

하지만 무비몬은 연신 무표정으로 흥미롭군, 맛있군, 흥미로운 맛이야 어쩌구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호떡을 금새 해치워버렸다. 저러는 거 보면 진짜 맛있어하는 거 같기도 하고...

무비몬 : 뭘 쳐다봐?
나 : 아, 아냐... 가자...


20년을 알고 지냈어도 알 수 없는 친구로다. 그런 생각을 했다.





8.

비프 광장에는 만원대 썬글라스를 파는 매대가 있었는데, 무비몬이 매우 큰 관심을 보이며 썬글라스를 구경했다. 나 역시 썬글라스들은 모두 박살나거나 잃어버렸기에, 내일 당장이라도 쓸만한 게 있나 싶어서 설렁설렁 구경했다.




무비몬 : 자, 이낫. 너는 이걸 쓰는 거야.
나 : 그게 뭐야! 이상해! 난 이런 게 좋아.
무비몬 : 너는 너무 평범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어. 가끔은 이런 것도 좋다고.


그러자 옆에서 썬글라스 주인 아주머니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 썬글라스가 예쁘다, 저건 너무 평범하다, 이걸 써라, 이 분홍분홍한 걸, 이 특이특이한 걸 써봐라!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내겐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밀고나갈 힘이 있었다. 나는 꿋꿋하게 처음에 골랐던 썬글라스를 지켜냈고, 그걸 샀다. 평소 스타일이랑 너무 다른 걸 사봤자 한번 쓰고 못쓴단 말이지. 무비몬은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주인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좋으니 사줘서 고맙다는 눈치였다.

무비몬은 제법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겁나 잠자리 눈알 같은 연분홍색 썬글라스를 샀다. 뭐야 저 촌스러운 썬글라스는. 나는 그녀를 말릴까 하다가, 말렸다간 쇼핑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어울린다고 대충 말해주고 말았다. 무비몬은 흡족해했다. 자기가 흡족해하면 됐지 뭐.





9.

썬글라스를 사고 남포동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주전부리를 주워먹던 우리는, 다시 썬글라스 가게가 있는 쪽으로 왔다가 한 노점상을 발견했다. 주인 아저씨께선 은행과 밤을 팔고 있었는데, 무비몬은 나보고 은행을 먹고 싶지 않냐며 장화신은 고양이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물어봤으면 먹었겠지만 장화신은 고양이를 따라하다니 용서할 수가 없군. 난 은행 따위 먹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무비몬은 슬퍼하며 은행을 바라만 봤다. 사려니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고, 안사려니 아쉬운 눈치였다. 그 때 어디선가 썬글라스 매대 아주머니께서 바람처럼 나타나 은행을 한움큼 집어 우리의 손에 쥐어주셨다.

썬글라스 주인 : 이거 먹어, 괜찮아. 아는 사람이야.
은행 주인 : 아니 뭐야! 왜 남의 가게 물건에 손을 대!
썬글라스 주인 : 쟤들이 아까 썬글라스 사갔어. 괜찮지?
은행 주인 : 쯧. 이러니까 내가 항상 마이너스야, 마이너스.


우리는 당황해서 돈을 지불하려 했지만, 은행 주인은 쿨하게 손을 내저었다.

나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는 못받는데. 값을 지불을...
은행 주인 : 아이, 됐어 됐어. 그냥 먹으라니까?


은행 주인 아저씨는 웃으면서 밤도 쥐어주셨다. 옆에서 썬글라스 주인 아주머니는 배시시 웃고 계셨다. 원래 그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먹으란다.

우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맛있게 먹으라는 어른들의 보챔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따라 배시시 웃으며 은행을 입에 넣었다.

원래 그런거라고...

그분들에겐 지나가는 여행자 청년들에게 마음을 써주고, 주전부리 한움큼을 쥐어줄 수 있는 세상이 당연한 세상인가 보다. 나 역시 원래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구만, 생각했다.





10.

남포동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이런 장사를 1도 안해본 것 같은 부끄러운 얼굴 + 작은 목소리를 장착한 청년들을 보았다. 종목은 요새 여기저기서 많이 구경한 생딸기 우유였다.




나 : 야, 딸기 우유 먹고 싶지 않냐.
무비몬 : 엥? 왠 딸기 우유? 난 관심없어.


은행의 복수인가? 나는 무비몬을 흘겨보며 딸기 우유 매대로 가서 딸기 우유 하나만 달라고 했다. 설마 주문이 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눈을 끔뻑이던 청년은 허겁지겁 딸기를 쥐고 마구 으깼다. 그리고 통에 시럽과 으깨진 딸기를 함께 넣고 우유를 부었다. 나는 곧바로 마시려고 했지만, 매대에 있던 모든 청년들이 허둥지둥거리며 한 목소리로 내일 아침에 먹는 게 더 맛있을 거라고 했다.

딸기 우유 청년 : 하룻밤 지나면 우유에 딸기즙이 우러나서... 그게 더 맛있어요!

나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고, 가방에 딸기 우유를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과 함께 딸기 우유를 마셨다. 무비몬은 딸기 우유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것치곤 겁나 홀짝홀짝 마셔대서 날 거슬리게 했지만 뭐 하여간 맛은 있었다.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





11.

그 외에도 일상생활에선 못입을 것 같은 할머니 쫄바지를 사서 입거나, 망고 트럭 앞에서 홀린 듯이 망고를 샀는데 칼이 없어서 망고를 못먹게 됐다거나, 칼을 사려고 다이소를 찾아갔다가 셔터가 내려가고 불이 꺼지는 걸 실시간으로 봤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배도 엄청 부르고, 시간은 느즈막한 밤이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아까 산복도로 쪽으로 올라가 야경을 봤을거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였다면 어디 포장마차에 들어가 술잔을 기울였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쇼핑왕 무비몬과 함께였다.

그래서 우리는 남포동 옆 광복동 패션거리라고 불리는 쪽으로 넘어가 겁나 쇼핑을 했다. 무비몬은 대체 어디서 그 체력이 솟아나는 건지 이 가게 저 가게에 들어가 옷을 고르고, 또 피팅룸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하염없이 반복했고, 결국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 몇 벌을 건져냈다. 나는 이미 중간에 지쳐 길바닥에 뻗어있었는데, 무비몬이 모든 옷을 사고 가게를 나서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왈칵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농담이다. 감동은 무슨. 하품을 다섯번 정도 연달아 하니까 눈물이 흐르더라.

쇼핑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했는지, 시계를 보니 자정에 가까웠다. 시간이 늦어 숙소까지 가는 버스가 없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심야버스가 다녀서 그걸 타고 갈 수 있었다. 술도 아니고 쇼핑 때문에 이 시간까지 밖에 있다니. 하하. 하하하하.

다신 무비몬이랑 쇼핑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뭐, 언제나 그렇듯 나는 또 까먹고 무비몬과 쇼핑을 하러 갈테지만. 흑흑.




막짤은 쇼핑하는 무비몬. 얘는 왜 이렇게 집시스러운 옷을 좋아하는 건지.




둘째날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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