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3 12:13

여수 여행 (2) 빅오쇼 게스트하우스 국내여행

오늘은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만.





1.

언제부터인가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고를 때 평점이나 시설, 위치보다도 남아있는 침대의 갯수에 집착하게 되었다. 남아있는 침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이 적은 쾌적한 환경(!)에서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여수에서 가게 된 빅오쇼 게스트하우스도 그런 맥락에서 선택한 숙소였다. 다른 숙소들이 전부 '오늘의 스마트 특가! 남은 자리 단 1개!' '최고의 위치! 남은 자리 단 1개!' 등으로 광고할 때, 빅오쇼 게스트하우스는 별다른 악평도 호평도 광고문구도 없이 고고하게 많은 자리수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곳에 예약을 걸었고, 곧 여수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

그리고 여수 공항에 내린 뒤, 꼬박 한 시간을 달려 마침내 숙소에 도착한 나.




숙소는 어마무지하게 컸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아기자기한 규모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었다. 큰 규모의 모텔급 건물을 뜯어고쳐 게스트하우스로 만든 느낌이었다. 아니면 체인점 호스텔 같은 느낌.

카운터에 가자 사장님으로 보이는 청년... 아저씨... 청년... 음... 하여간 어떤 사장님이 맞이해주셨다. 사장님은, 어, 약간 오세득 셰프 닮은 상이었다.

나 : 이름은 뭐구요. 예약한 홈페이지는 부킹닷컴이요.
사장님 : 아, 6인실 신청하신 분이네요? 그런데 저희가 오늘 방이 많아서요.
나 : (오, 4인실로 업그레이드 해주려나?)
사장님 : 4인실 드릴테니까 혼자 지내세요. 키는 여기 있고요.


!!!!!!

업그레이드까지만 생각했는데 아예 독방을 줘버렸다! 참고로 여기 6인실 도미토리는 조식 포함 2만 2천원이다!

나 : 우와! 감사합니다! 우와!
사장님 : 하하. 편히 쉬세요.






3.

카드키를 이용해 들어간 4인실 룸은 제법 쾌적했다.






온도 적당. 습도 적당. 냄새 오케이. 조명 오케이.
바닥 깨끗. 화장실 깨끗. 냉난방 완비. 와이파이 빵빵.

모든 조건이 내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방을 썼어도 가격대에 비해 괜찮을 환경인데 나 혼자라니! 난 이 방을 혼자 쓴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 혼자다! 발가벗고 춤을 춰도 아무도 모를 거야! 넘나 좋은 것!

혹시 손님이 아예 없어서 나 혼자 이 방을 쓰는 건가 싶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식당으로 나온 사람들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더라.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묵고 있었다. 그냥 사람에 비해 방이 남으니까 온 사람들끼리 방을 쓰게 해주는 것 같았다. 보통은 청소하기 힘드니까 한 방에 밀어넣지 않나? 사장님이 넉넉한 분이시구만.





4.

여수 1일차 관광은 다음 포스팅에서. 여기선 계속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를 해보겠다.

여수 1일차 관광을 마치고 나서 숙소로 늦게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하고 보일러를 켠 뒤 침대에 누워 딩가딩가 쉬려고 했다. 그런데 방이 생각보다 빨리 따뜻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방이 커서 그런가? 보일러 온도를 더 높혔지만 여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에 당시 감기 끝물인 상태였는지라 점퍼를 껴입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보일러가 고장났나... 이상하다... 등등의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잠에서 깬 나는 방안이 열대야처럼 덥다는 사실에 놀랐다. 입고 있던 옷은 잠결에 벗어서 던져뒀는지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보일러가 고장나기는! 엄청 작동 잘하는구만!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보일러 온도를 낮췄지만, 그 훈훈함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으으, 따시니까 좋구만.





5.

여수 2일차.




전날 엄청 돌아다녀서 오래 잘 줄 알았는데 습관이란 역시 무서운 놈인지라 일찍 일어났다. 훈훈한 온도에서 잤더니 피로도 싹 가신 것 같았다. 창문 밖 하늘에는 해가 낮게 떠 있었다.




8시 쯤에 아침을 먹으려고 6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 식당에는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올라갔나? 허나 난 원래 아침을 7시 쯤에 먹어서 배가 넘나 고픈 것이다. 빨리 뭔가를 먹어야겠다. 나는 조리대를 살펴보았다.




조리대에는 몇 대의 후라이팬과 토스트기, 식빵과 요거트와 야채, 그리고 무려 계란(!!!!) 등이 구비되어 있었고, 다른편에는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있었다. 오오. 식후 커피 예약.

미니미니랑 왔더라면 미니미니가 알아서 요리해줬을텐데 - 미니미니는 어렸을 때부터 요리가 취미여서 레시피의 폭이 넓은 전문가고 난 우리집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일반인이다. 미니미니가 기계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요리사가 됐을 것이다. 뭐 여튼 그런 이유로 그와 다니면 요리는 미니미니 몫, 여행 일정은 내 몫이곤 했다. 덧붙여 이건 자랑인데 내 주위엔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비몬도 요리를 잘해서 어디 놀러가면 걔가 맨날 밥해주고 그랬고, 유럽에 같이 갔던 친구도 요리를 잘해서 학생 때는 걔가 해준 밥을 종종 얻어먹곤 했다. 캐나다 있을 땐 요리사 삼촌들이랑 같이 살았었다. 나는 아무래도 주변에 요리사를 두는 복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 - 지금은 혼자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해먹어야했다. 나는 미니미니의 어깨 너머로 본 광경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무언가를 해먹었다.




내가 해먹은 볼썽사나운 무언가.

...음. 지금 식당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비웃음 당할 뻔 했어. 얼른 먹어서 없애야지.





6.

아침을 다 먹어갈 즈음에 사장님이 올라오셨다. 나이스 타이밍!

나는 내 볼썽사나운 그릇을 팔꿈치로 슬쩍 가리며 지도를 펴고 여수의 새로운 볼거리에 대해 알려달라고 사장님께 여쭤봤다. 사장님은 고민하다가 나보고 어디어디를 가봤냐고 물어봤다.

사장님 : 돌산도 쪽은 가봤어요? 향일암이라고 있는데.
나 : 거기는 두어번 갔었어요. 한번은 일출보러, 한번은 낮에.
사장님 : 돌산대교랑 이순신대교 사이의 해안길도 갔었겠네요? 돌산공원도?
나 : 갔었어요. 오동도도 가봤어요. 레일 바이크도 타봤어요. 산업단지도 가봤어요. 무술목도 가봤어요.


저번 포스팅에도 썼듯이 나는 이번이 여수에 세번째 오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올 때마다 뭔가 다 둘러보지 못한 듯한 부족한 느낌을 받아 그걸 채우고 싶어서 여행 후보 리스트에 항상 여수를 끼워놨었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니 은근 둘러본 곳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흐음.

사장님은 내가 가봤던 곳들을 듣더니, 이미 볼만한 데는 다 봤다는 투로 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어쩔 수 없지, 하고 지도를 접은 뒤 설거지를 하러 갔다. 설거지를 다 하고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겨 내려가려는데 사장님이 급히 나를 불렀다.

사장님 : 아, 거기. 거기 있어요. 지도 펴봐요.

그러더니 지도에서 몇군데를 짚으며 갈만한 곳을 알려주셨다. 요새 뜨는 곳이라나. 오, 이런 거 좋다. 현지인만 아는 고오급 정보! 나는 그곳에 꼭 가보겠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여기는 뭐, 다다음 포스팅에서 써보겠다.





7.

방에서 짐을 챙기고 청소도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해놓은 뒤,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바깥 공기는 외투를 입을 정도가 아니었다. 날이 따뜻하구만.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꼬깃꼬깃하게 접어 가방에 넣었는데, 도통 가방이 잠기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날 공항에서 샀지만 여행 내내 그 존재를 잊었던 질소 빵빵한 과자를 꺼내어 간신히 잠갔다.

다행히 가방을 잠그기는 했는데, 손에는 과자라는 짐이 생겼다. 으음, 손에 뭐 들고다니는 거 안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지금 과자를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으음...

나는 이 과자를 감사의 의미를 담아 사장님께 버리기로... 아니 선물로 주기로 하고 다시 6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아까 사람이 없었던 것에 반해 식당은 바글바글했다. 다들 이제야 아침을 먹으러 나왔나보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디에?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계셨는데, 왜인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출입구쪽에 있나 하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아니 어디로 가신거람? 한번만 더 가보자 하고 6층으로 갔다.

이 1층과 6층의 넘나듦은 엘리베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단이었으면 내려간 그 타이밍에 어쩔 수 없지 하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여간 다시 찾아간 6층에도 사장님은 없었다. 나는 여행자 한 분께 사장님의 행방을 물어봤지만, 그 분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래서 밖에 나가 사진이나 찍으며 기다려보자 생각하고 식당에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 동네 사진을 찍었다.






제법 재밌는 뷰를 가졌더랬다. 참고로 여기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빅오쇼인 이유는 저 멀리 바다쪽에 있는 동그란 원, 저기에서 펼쳐지는 쇼가 빅오쇼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쇼가 열릴 땐 여기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경도 한단다.

사진을 찍고 몸을 돌리는데 사장님이 "저 찾으셨다고요? 무슨 문제 있어요?" 운운의 말을 하며 나타났다. 나는 사장님께 과자를 버리고... 아니 선물했고, 다음에 여행 올 일 있으면 또 오겠다고 전했다. 사장님은 감사하다며 즐거운 여행 되시라고, 그리고 올라가는 길에 광양에 들릴 수 있으면 지금 매화가 엄청나니까 거기 들러서 매화 축제를 구경하라고 하셨다.

음, 내일 출근만 안하면 갈텐데.

하여간 끝까지 정보를 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8.

이번 여수 여행에서 '여수가 마치 보석 같았다', '반짝반짝거렸다' 운운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내가 좋은 숙소를 만났다는 사실도 한 몫 할 것이다. 사장님의 배려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던 게 감사해서 여행 이야기보다 먼저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를 하게 됐다.

뭐, 사실 쭉 써놓고 보면 그곳에서 포스팅 하나를 다 잡아먹을만큼 대단한 스토리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소소하게 편했던 그 감각이 계속 기억에 남아 어떻게든 따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기본에 충실한 객실, 과도하지 않은 친절, 적당한 거리감, 그렇지만 요청할 땐 최선을 다해 베풀어주는 도움 등등이 참 마음에 들었더랬다. 호텔이나 리조트도 아니고 게스트하우스 리뷰 쓰는데 이렇게 열심히 쓸 정도로 ㅋㅋㅋ

하여간!

이름과 건물 외관은 아주 쪼끔 촌스럽지만 건물 곳곳에 세심한 배려와 정성이 엿보이는, 오세득 닮은 사장님네 빅오쇼 게스트하우스로 놀러가세요. 추천 팡!




다음편부터 진짜 여행기 계속!




2017/03/20 21:42

여수 여행 (1) 국내여행

1.

여수는 보석같은 도시였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대뜸 여수 이콜 보석이라 하면 얼마나 설득력이 없을지 나도 잘 알고는 있지만 어제 막 여수 여행을 끝내고 온 나로썬 저 문장을 제일 먼저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런지는 여행기를 통해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고, 일단 한 번 더 언급해야겠다. 여수는 정말 보석같은 도시였다. 반짝반짝거리는.





2.

사실 이번에 여수에 가게 된 이유는 단 한가지 때문이었다. 남은 마일리지 좌석 티켓.

토요일 늦은 아침. 강릉 여행 포스팅을 마친 난, 어딜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남해를 보고싶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해라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경남 쪽이든 전남 쪽이든 너무 멀다. 혹시 KTX가 남아있나 찾아봤지만 남은 표는 없었다. 버스를 타봤자 지금 출발하면 저녁에나 도착할 것이다. 그건 또 싫은 걸. 아, 난 어제 왜 술을 먹어가지고 늦잠을 자버린 거람. 안그랬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 첫차를 타던가 했을텐데.

나는 시간을 되돌려주는 마법같은 도구가 없나 생각하다가,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마법같은 기구를 생각해냈다. 뭐겠어, 비행기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나 싶다.

난 스카이스캐너를 열고 항공권을 찾아봤다. 그런데 주말이라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표가 비쌌다. 뭐야, 고작 국내선, 그것도 제주도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비싸게 내고 가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돼지 저금통에 동전 모으듯 모아뒀던 마일리지를 써야겠다. 나는 다른 포인트나 마일리지 적립같은 걸 잘 못하는 편이지만 아시아나 마일리지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모으곤 했다. 겁나 유용하거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마일리지 항공권을 찾아보니 제주나 부산 같은 이용객 많은 노선들은 다 팔려있었다. 그런데 여수행은 좌석이 5자리 정도 남아있었다. 당일 찾은 마일리지 항공권 좌석치고 많이 남은 거다.

그나저나 흠... 여수? 여수에 공항이 있었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남은 시간을 봤다. 탑승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여기서 김포공항까지 2시간이면 충분하겠군. 나는 마일리지로 표를 구입하고, 적당히 짐을 꾸린 뒤 옷을 대충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가자! 여수로! 이번 목적지는 여수다!

여기서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적당히 꾸린 짐에는 칫솔과 머리끈과 고데기가 빠져있었고, 대충 껴입은 옷은 여수의 날씨와 맞지 않았더랬다... 후후...





3.




야수도 애수도 아닌 여수로 가기 위해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지하철을 이용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

아침을 늦게 먹어서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왠지 공항 편의점을 보니 무언가 먹고 싶어졌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나는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코너에서 이걸 집었다가 저걸 집었다가 하다가, 결국 카레맛밥에 닭다리살이 올라간 밥바Rice Bar라는 희한한 음식을 샀다.

구입한 밥바를 전자렌지에 돌려 따끈따끈하게 만든 뒤 입에 물었다. 오, 제법 맛있다. 역시 우리나라 편의점 음식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대한민국 가공식품 산업의 희망찬 미래를 소망하며 티켓을 출력하러 갔다. 카운터에는 사람들이 줄 서 있길래 그냥 기계에서 체크인 했다.




늘 생각하지만 국내선 티켓은 왜 이렇게 영수증 같은지 모르겠다. 비행기 티켓 같지가 않아서 몇 번 쓰레기통에 버릴 뻔 했다. 지금 내 노트북 옆에 꼬깃꼬깃하게 종이접기 된 채 놓여져있는데 누가 저걸 보고 비행기 티켓이라 생각할까. 흐응.

티켓을 들고 보안 검색대로 바로 가려다가, 검색대에 무언가 먹으면서 들어가도 괜찮았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급한 것도 아니고 일단 근처 벤치에 앉아 다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밥바는 생각보다 밥알이 자유로웠다. 바Bar로 만들거면 삼각김밥 정도로 딱딱하게 뭉쳐놔야 하는 거 아냐? 왤케 밥알들이 돌아다녀... 하지만 카레양념이 된 그 밥알들은 정말 맛있었고, 난 밥풀이 어디로 튀던간에 신경쓰지 않고 닭다리살과 함께 정신없이 씹어먹었다.

밥바를 다 먹어치운 뒤, 밥바 포장껍데기와 떨어진 밥풀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섰다. 그런데 검색대 앞에서 공항 직원이 신분증과 티켓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 맞다, 여기선 그런 것들을 보여줬어야했지. 공항에선 모든 일들이 매번 새롭다. 이번엔 특히 밥바에 정신이 팔려서 더 새로웠다.

나는 허겁지겁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 주민등록증과 비행기 티켓을 꺼냈다. 그리고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공항 직원에게 쭈뼛거리며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보여주고 나서 발견했다. 영수증 같이 얇은 내 비행기 티켓에 아까 그 밥바의 밥풀들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것이었다. 너네가 왜 거기에 붙어있어! 나는 밥풀을 손가락으로 재빨리 제거했지만 카레양념이 되어있던 그것은 자신의 노오란 흔적을 티켓에 남겼다. 뭐야! 사라져! 사라지라고!

티켓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나를, 공항 직원은 약간 한심한 혹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으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4.

난 밥바의 흔적이 가득한 티켓을 들고 무사히 검색대를 지나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근처에 편의점이 또 있길래, 비행기에서 출출하면 먹으려고 쥬스와 과자를 사서 가방 안에 넣었다. 뭐, 결국은 비행기에서 안먹었지만. 아마 당시의 나는 편의점에서 무언가 산다는 행위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난 왜 이렇게 편의점이 좋은 것일까.




곧 탑승한 좌석은 창가자리였다.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이것저것 하고나니 비행기가 이륙했다.

옛날엔 안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선 비행기가 이륙할 때 무진장 긴장된다. 비행기 관련 사고 다큐멘터리를 하도 찾아봐서 그런가? 물론 다른 사람이랑 타면 쎈 척 하느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혼자 탈 땐 두 손 모아 집중해서 기도한다. 으으, 살려주세요, 비행기는 이착륙할 때 사고율이 제일 높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이 비행기는 안그러기를, 무사히 뜨기를, 기체결함이 없기를, 있다면 기장님이 빨리 파악하고 무사히 재착륙하기를, 으으...

기체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자, 안전벨트 등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으으... 양력 만세! 이따 착륙할 때까지 한숨 놓겠군. 난 실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세먼지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김포가 내려다보였다. 이래선 풍경보는 재미도 없군.

버스로 빨라야 네다섯시간 걸리는 여수는, 비행기로는 5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스튜어디스가 준 알로에 쥬스를 마시며 비행모드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었다.

읽고 있던 소설에 빠져들게 될 즈음,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래서 밖을 바라보았는데, 아까보다 훨씬 고도가 낮아져있었다. 음... 여수는 해안가에 있는 도시 아닌가? 아직 바다가 안보이는데 벌써 이만큼 낮아졌네... 뭐지...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계속해서 요동쳤고, 나는 가끔씩 자이로드롭 탈 때 느끼는 그 무중력 상태를 느끼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뭐, 뭔데... 뭐 이상있어? 왜그래... 아직 바다도 안보이는데 왜 그러는 거야...

내가 한가지 착각한 게 있다면 여수 공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도해 쪽이 아니라 광양만 쪽에 붙어있는 거라, 일직선 상으로 내려간다면 당연히 육지가 계속 보이다가 착륙직전 잠깐 광양만을 거쳤다가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여수-해안도시-보통 해안도시의 공항은 바다에 있지! 라고 생각해버려서, 육지쪽에서 계속 고도가 낮아질수록 아직 여수 근처 아닌 거 같은데 왜 이러지 잉잉거렸다. 덕분에 착륙하기 전까지 바짝 긴장해서 또 기도를 했다. 으으, 살려주세요, 제대로 여수에만 도착하게 해주세요, 여태까지 잘못한거 다 용서해주세요, 일단 살려만 주시라... 뭐, 내 긴장과는 무관하게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지만.

이러다가 언젠가는 비행기를 못타게 될 것 같다. 나 왜 이렇게 겁이 많아졌지?





5.

여수의 공기는 따뜻했다.

급격하게 더워진 나는 입고있던 점퍼를 벗어 팔에 걸쳤는데, 그러고 있으니 또 점퍼 안에 입은 티셔츠는 너무 얇은지라 추워져버렸다. 나는 무슨 의식처럼 점퍼를 걸쳤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 점퍼를 팔만 빼놓은 채 어깨에 걸치는 식으로 추움과 더움의 합의점을 도출했다.




3월의 여수에는 동백꽃이 완연하게 피어있었다. 신기한 건 여수 대부분의 길가에서 동백나무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로수로 심겨있는 나무들엔 새빨간 꽃들이 걸려있었고, 그런 광경을 - 이번이 여수에 오는 걸로는 3번째지만 - 처음 본 나는 조금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왜 동백꽃을 보며 섬뜩한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랬더랬다. 꽃이 너무 빨갛고 큼직해서 그렇게 느껴졌던건지...

뭐, 여수를 여행하며 계속 동백꽃들을 마주쳤더니 점점 익숙해져서 나중엔 같이 셀카도 찍고 그랬지만 말이다.

공항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시내로 가는 버스가 왔다. 노선은 정확히 모르지만 뭐 대충 숙소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것 같더라. 나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할 때까지 꾸벅꾸벅 졸았다. 봄기운 때문에 잠이 솔솔... Zzzzz





6.

화장실에 무진장 가고 싶다.

버스에서 눈을 뜨자마자 생각한 내용이다.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여수 실시간 버스 앱을 다운받아 정류장이 얼마나 남았는지 파악했고, 대충 세어본 뒤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여수 버스는 또 왜 이리도 운전이 거친지 뒷자리에 앉은 날 미치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버스에서 내리게 된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여기서부터 숙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내 이십몇년을 컨트롤 해온 대뇌가 지금 숙소를 찾기보다는 어딘가에 들어가 해결을 하는 쪽이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고, 나는 내 인생 내내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좌수영 바게트 버거"가게가 있었다. 아니, 이곳은!? 지난 여름 여수에 들렀을 때 방문하여 바게트 버거를 사먹었던 곳이었다! 그래, 그 짭짜롬하면서도 매콤한 버거는 정말 맛있었더랬지...

나는 고향집에 방문한 사람처럼 그 가게로 들어갔고, 버거를 하나 주문해놓은 뒤 태연한 척 화장실 좀 쓰겠다고 했다...

...마침내 새 사람이 되어 나온 내 앞에 축하 선물처럼 좌수영 바게트 버거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단 인사를 전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하, 이것 참 새 삶을 얻은 기분이군. 이제 슬슬 숙소로 가볼까!





7.

숙소는 아까 비행기에 타기 전 김포에서 예약해놓은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네이버 지도에 주소를 친 뒤 방향을 파악하고 걷기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 5분, 6분 정도? 하여간 제법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에 룰루랄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길을 따라 뭔가 소박하고 귀여운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동네에 안어울리게 갑자기 거대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 눈앞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뭐 이렇게 생뚱맞은 건물이 다 있나 생각했지만, 네이버 지도가 일러주길 그곳이 바로 내가 오늘 묵을 숙소란다. 허허. 게스트하우스... 치곤 정말 거대하군. 조금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은 "빅오쇼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잠만 자면 된다는 주의라 왠만하면 숙소 이야기를 잘 안쓰는데, 아마 지금 내가 이렇게 숙소에 대해 묘사하는 이유는 할만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근데 이제 슬슬 졸리니까 여기서 끊고 다음편에 계속 찬스를 쓸 생각이다. 여수 여행기라고 제목을 붙인 것치곤 이제 막 여수에 도착했지만...




다음편에 계속!



2017/03/18 10:17

강릉 여행 (5) 사천진 해변까지 국내여행

1.

강릉여행 이틀째.

전날 오후부터 워낙 흐렸기에 당연히도 해가 뜨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세수도 하지 않은 눈꼽 낀 얼굴로 해변을 향해 가는 마음은 대체 무슨 마음일까.

나 : 혹시나 하는 마음이지.
미니미니 : 무슨 말이야?
나 : 그냥. 해가 안 뜰거라는 걸 아는데 그걸 굳이 확인하겠다고 나가는 꼴이 웃겨서.


우리는 세븐일레븐에 들려 커피를 한잔씩 뽑았다. 그리고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혀있었고, 우리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해가 뜰 것 같지 않은 하늘인데. 그래도. 그렇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머뭇거리기를 십여 분.




나 : 어?
미니미니 : 어!







해가 뜨고 있었다! 수평선은 아니어도 구름 위로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기대도 안하고 있던 일출에 감동했고, 너무 신이 나서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뒤를 보니 미니미니도 짐을 챙긴 뒤 허겁지겁 달리고 있었다. 우와! 해다! 절대 뜰 것 같지 않은 하늘에 해가 떴다! 고맙게도 말이야!




그러고보니 어렸을 땐 새해가 되면 가족들끼리 늘 일출을 보러가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맨날 뜨는 해 뭐 중요하냐고 집에만 있게 되더라. 아니면 전날 망년회라고 술마신 뒤 쿨쿨 자던가. 그래서 올해도 새해 일출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3개월이나 지난 이제서야 2017년의 해를 처음으로 봤다. 오늘 보지 못했다면 내 2017년의 첫 해는 더 늦어졌을 것 아냐. 구름 사이로라도 떠준 해에게 감사했다.


덧붙이는 인증용 일출 사진.



일출 앞에서 포즈를 잡았는데 마치 핸드폰 광고하는 사람처럼 나왔다. 혁신이라는 건?




아이 좋다! 오랜만에 안뚱뚱하게 나왔네! 검은 옷 만세다.





2.

일출을 보고, 출출했던 우리는 아침밥을 먹기로 했다.

여행가서 밥은 꼭 든든하게 챙겨먹어야 하는 주의인 미니미니 - 그래서 그와 함께 다니면 그 지방의 별미, 정식 등을 챙겨먹을 수 있다, 맛집도 잘 찾고 메뉴도 잘 고른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7킬로나 찐 원인이다 - 는 곧바로 음식점을 수배하기 시작했지만, 여행가서 밥은 굶주리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 된다는 주의인 나는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닭볶음이 있는 걸 떠올리고는 햇반 사서 그걸 비벼먹자고 했다. 미니미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실망했지만, 일단 이 여행은 '우리의 여행'이 아니라 '내 여행'에 그가 따라다니는 것인지라 내가 하자는대로 하기로 했다.

아까 커피를 산 세븐일레븐으로 가서 햇반을 사려고 했는데, 일하는 분이 피곤한 얼굴로 밖에 나와 담배를 피고 있길래 쉬게 내버려두고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세븐일레븐으로 갔다. 카운터에 아무도 안보이길래 여기 일하는 분도 담배를 피러 갔나 싶었는데, 카운터 뒤에 엎드려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연배나 복장을 보아하니 알바생으론 안보이고 가게 사장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렴 어때. 우리는 햇반을 고른 뒤 계산을 하러 갔다. 그는 게임하는 것에 방해가 됐는지 인상을 찡그렸다가 계산을 해줬는데, 난 혹시 플라스틱 수저나 나무젓가락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것이었다.

나 : 저기, 죄송하지만 수저나 젓가락 얻을 수 있나요?
세븐일레븐 사장 : 뭐요? 햇반 하나 사는데, 누가 수저를 줘요?


...어... 그...런가?

나 : 아, 아니면 됐...
세븐일레븐 사장 : 아니 어떤 편의점에서 그러냐고요. 저기서 묶음으로 파는 거 안보여요?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시비조야. 내가 그렇게 부당한 질문을 한 건가? 못주겠으면 그냥 드릴 수 없다고 하면 되잖아. 미니미니는 라면 코너에서 라면을 고를까말까 고민하다가 그 사장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카운터로 왔다. 미니미니를 보자 그 사장이 말했다.

세븐일레븐 사장 :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이미 서운하게 만들었잖아! 아니 서운한 게 아니라 부글거리게 만든 거잖아!





3.

미니미니 : 아까 그 사장 뭐야? 말투가 왜 그래? 아 열받네. 저거 어떻게 엿을 먹이지?

계산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왜인지 나보다 미니미니가 더 화내고 있었다. 내가 장사가 안되니까 그러는 것 같다고 달랬지만 진짜 열받아 있는 표정이라 어떻게 식혀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미니미니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물어봤고, 미니미니는 그 사장이 마치 자기가 그거 살 돈도 없는 것처럼 굴어서 화가 난다고 했다.

나 : 근데 그거 살 돈 있잖아. 그런 사람 말에 너무 마음에 두지 마.
미니미니 : 아냐! 없었던 시절도 있었단 말야.


미니미니는 자기가 취준생이었을 시절 서울에 올라와 공부할 때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 사서 밥으로 때우곤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며 부들부들거렸다. 나는 그런 미니미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좋은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

나 : 내가 뽁큐 아줌마 얘기 안해줬나?
미니미니 : 응? 그게 뭐야?


그러니까 그 뽁큐 아줌마는... 블로그에서도 쓴 적이 없던 것 같다. 요약해서 써보겠다.

캐나다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랜드 프레리에서 에드먼턴까지 삼촌들과 놀러갔던 나는, 돌아다니다가 밤에 마실 술을 사기 위해 한 리큐르 스토어Liquor Store(캐나다에선 술을 일반 마트에서 팔지 않고 리큐르 스토어에서 따로 판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술을 고르는데, 한 삼촌이 어떤 와인을 주인 아줌마에게 보여주며 이 브랜드로 화이트 말고 레드가 있냐고 물었다. 그 주인 아줌마는 삼촌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주인 아줌마 : NO!!!!

....!?

삼촌과 그 옆에 있던 나와 다른 곳에서 맥주를 고르던 다른 삼촌들까지. 네 명이서 얼음이 된 채 그 주인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아줌마는 감히 우리 가게에 없는 술을 물어보다니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상대했고, 우리는 서로 몇 번 표정을 교환한 뒤 들고 있던 술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주인 아줌마 : 기껏 들어와서 안사고 나간다고? 뽁큐!!!! 뽁큐!!!!!

주인 아줌마가 소리를 지르며 우리 뒤를 쫓아오며 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 주인 아줌마는 보통의 캐나다 사람처럼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닌, 왜소한 몸을 가진 이민계 중년 여성이었고, 그에 비해 우리는,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삼촌들이 큼직큼직한 편이었다. 그런데 겁도 없이 눈을 뒤집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 저 아줌마가 총이나 칼을 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손을 살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내가 무기를 걱정할 만큼 그 아줌마는 광기가 넘치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우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무서워서 뒤로 숨었지만, 삼촌들은 무섭기는커녕 황당하단 표정으로 그 아줌마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한 삼촌이 그냥 가자고 해서 그 가게 부지를 떠났다.

그냥 가자고 한 그 삼촌은 내가 일하던 가게의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은 나와 다른 삼촌들이 '뽁큐'라는 발음을 비웃으며 키득거리는 동안, 잠깐 한숨을 쉬시더니 얼마나 속이 타면 미쳐서 저랬겠냐고 하시더라. 가게 딱 보니까 장사도 안되고, 위치도 안좋고, 가진 돈 다 쏟아부었다가 망한 것 같다며.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 공감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하여간 여기까지가 그 뽁큐 아줌마 이야기다. 난 미니미니에게 최대한 그 아줌마의 목소리를 따라하며 연기했고, 마지막 사장님의 멘트까지 찰지게 넣어줬다. 미니미니는 닭볶음과 햇반을 비비며 화내던 것도 잊은 채 내 이야기를 청취했다. 내가 아까 그 편의점은 장사가 정말 안되던 편의점이었나보다, 바로 옆에 같은 브랜드 편의점이 훨씬 더 크게 생겨났으니 속이 탔을 것이다 등등으로 말하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엔 맛있게 아침밥을 먹었다.

아, 그렇지, 편의점에서 구하지 못한 플라스틱 수저는 결국 호텔 로비에서 얻었다. 젓가락과 수저 등을 뭉텅이로 주며 마음껏 쓰라고 하더라. 이 호텔은 장사가 정말 잘되는 호텔인가보군.





4.

아침밥을 다 먹은 우리는 네이버 지도를 보며 어딜 갈지 고민했다. 서로 자신의 핸드폰만 바라보며 목소리로만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2년 전,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퇴근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는 그냥 알고 지내는 오빠 동생이었는지라, 그냥 부산으로 여행 많이 와서 질렸는데 혹시 현지인만 아는 곳 있냐 어쩌구 하면서 좀 알려달라고 수작질해서 만나고 그랬다. 그 후엔 찜질방 가서 목에 수건 두르고 편하게 누워 네이버 지도를 보며 "여기는 가봤어?" / "안가봤을리가." / "이렇게 구경하는 것도 좋아." / "오, 그건 몰랐어." 따위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있으면 그 때 생각이 나서 좋다. 진짜로 좋다.

...어... 저 지금 추억애기 하는 것처럼 하다가 은근슬쩍 염장질 한 건가? 은근이 아닌가? 어쩔 수가 없다. 아시다시피 제 포스팅이 원래 의식의 흐름대로 솔직하게 써지잖아요. 여행기 보러 왔다가 죽창을 갈고 계신 분들껜 죄송함다. 긁적긁적.

하여간 그렇게 서로 정보를 찾다보니 근처에 무진장 이쁘고 커피가 맛있다는 테라로사 사천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근처는 아니고 3킬로미터 정도 바다를 따라 걸어가면 되겠더라. 미니미니와 나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제 5킬로도 걸었는데 3킬로는 껌이지, 하고 걸어가보기로 했다.

가보자! 테라로사 사천점으로!





5.

경포대에서 테라로사 사천점까지 가는 길엔 아기자기한 해변이 많았다. 사근진 해변, 순긋해변, 순포해변... 그리고 해변을 따라 길 왼쪽엔 깔쌈한 펜션이, 길 오른쪽엔 느낌있는 민박집이 세워져 있었고, 더 너머엔 새파란 바다가 있었다.

도중에 바다쪽으로 나있는 전망대가 있길래, 구경도 할 겸 그쪽으로 가봤다. 적적하길래 브금은 드라마의 제왕 OST에 나온 Tuesday Song (Big Baby Driver) 으로 깔아봤다.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은 미니미니에게 마구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 : 이거 드라마의 제왕에 나왔던 OST야. 안봤지? 재밌는데 많이들 안봤더라.
미니미니 : 아, 김명민 나왔던 드라마?
나 : 오, 아네? 여주는 정려원이었는데, 이런 바다를 앞에 두고 휴식을 취한단 말이지. 요 브금 깔리면서.
미니미니 : 저번에 바다 갔을 때도 이거 틀던데. 정려원 따라잡기였군.


오? 그런 걸 다 기억하네.

하여간 Tuesday Song은 바다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때 자주 듣는 곡이다. 이거 말고도 드라마의 제왕 OST는 다 좋아서 늘 돌려듣는다. 드라마의 제왕은 내가 캐나다에 가기 전, 대학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사람들과 행복하게 추억을 쌓던 시절에 방영했던 드라마라, OST를 들으면 드라마보다도 그 때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뭐 그래서 좋다. 그 관계들을 결국 내가 다 깨트렸는지라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한 추억이긴 하지만.

근데 강릉에서 필 꽂히는 바람에 하도 드제 OST를 돌려들었더니, 이제 이 음악들을 들으면 강릉이 더 먼저 생각나게 되었다. 후회와 아쉬움이 느껴지는 추억보다도 미니미니와 느긋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니 좋더라. 나는 그런 평온한 기억을 얻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은 그 전망대에서 본 풍경들. 반짝반짝한 바다가 아름다웠다.

나 : 딱 이런 곳이었는데 말야. 정려원이 눈 감고 두 팔 벌려서 흥얼거렸던 곳이.
미니미니 : 어? 저거 봐봐.





...!!!!

전망대 근처가 어쩐지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진짜 드라마의 제왕에 나왔던 곳이었다. 드라마 방영 당시에 전망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저 전망대 때문에 진짜 그곳일줄은 몰랐다!





드제에 나온 민박집 말고도 그 일대엔 뭔가 후리한 느낌의 민박집들이 많았다. 나는 다음에 오면 이런 분위기의 민박집에서 한번 묵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뒀다.





6.

계속 길을 따라 걷다보니 소나무들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으리으리한 카페가 나왔다. 드디어인가. 드디어 목적지 도착인가. 음, 경포대에서 걸어서 한 40분? 50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대한민국 커피의 성지, 강릉을 커피의 도시로 만들어줬다는 로스터리 카페 테라로사다.

테라로사 본점은 강릉 어딘가에 있다는데, 우리는 사천진 해변으로 가는 김에 근방에 있다는 사천점으로 왔다. 어차피 사천점이나 본점이나 똑같이 로스팅한 콩 쓰는 거 아닌감?






테라로사 사천점은 커피맛보다도 우선 카페 건물에서 눈이 돌아가더라. 1층은 건물 천장까지 뻥 뚫려있어서 시원시원했고, 내부테라스와 외부테라스로 이뤄진 2층에선 내려다보는 맛이 있었다. 유리창도 큼직하고 거대해! 건물 짓는데 돈 많이 들었겠다 생각했다.

사람이 많을거라 생각했는데 줄은 대여섯명 정도. 기다릴만 하겠다 싶어서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주문받는데만 10분, 커피 나오는데만 20분 정도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기다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건물이 예뻐서 그냥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으니 30분은 훌쩍 지나더라.




미니미니는 아메리카노를, 나는 코스타리카의... 뭐냐... 아닌가 파나마였나... 하여간 어쩌구를 시켰는데, 둘 다 맛이 괜찮았다. 사실 내 기준에선 커피가 이상하게 시큼하거나 텁텁하지만 않으면 다 맛있게 느끼는지라, 뭘 시켰어도 맛있게 마셨을 거다. 엄청 건강해보이는 빵도 먹었는데 맛 역시 건강해지는 맛이었다.





외부 테이블은 아직 추우려나 했지만 계속 걸어온 덕분에 몸이 데워져서 그랬는지 의외로 추운 건 하나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처음엔 2층 외부 테이블에 앉았는데 꼭 숲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 몇십분 후엔 아무것도 안하고 그리 앉아있으니 점점 추워져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지만.

창가쪽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창밖으로 어떤 트럭이 덜덜거리며 주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트럭 문에서 작업용 점퍼를 입은 트럭기사 아저씨가 내렸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테라로사로 들어온 아저씨는, 카운터 앞의 줄을 보더니 마치 '흥, 도시 뜨내기 것들이 커피 좋은 줄은 알고 마시러들 왔군' 정도의 느낌으로 피식 웃더니,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렸다가 받아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트럭으로 돌아가 덜덜거리며 차를 빼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뭔가 엄청 거친 황야의 남자의 세심한 일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나 : 봤어?
미니미니 : 봤어. 진정한 커피의 맛을 아는 트럭 드라이버...
나 : 뭔가 멋있다...






7.

테라로사 사천점에서 한참동안 앉아 여유를 부리는데, 미니미니가 왠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내일 출근을 할 수 있지 않냐고 대답했다. 아니 뭐야, 이 좋은 시간에 왜 출근 걱정을 해. 나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이따 적당한 시간에 터미널 돌아가서 버스 타면 된다고 했으나, 미니미니는 계속 버스 시간을 알아보며 예약을 하려면 어느 시간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예약했다가 시간에 못맞추면 어떡하냐고, 괜히 조급해지니까 하지 말자고 했으나, 미니미니는 돌아갈 버스를 예약해야 자기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뭐, 그 마음을 이해못할 건 아닌데, 그래도 의견이 자꾸 갈리다보니 결국 티격태격 싸우면서 카페를 나서게 됐다.

나 : 아니 그냥 나중에 터미널 가서 적당한 걸로 표 끊고 돌아가자니까!
미니미니 : 적당한 버스가 안남아있으면 어떡해?
나 : 아오 진짜, 설마 두 자리가 안남아있겠어? 어떻게든 서울은 갈 수 있다고!
미니미니 : 그래도... 두 자리가 나란히 남지는 않을 거 아냐.
나 : 응? 뭐 보통은 그렇겠지?
미니미니: 그러면 우리 같이 못앉잖아. 갈 때는 같이 앉아가고 싶은데...


뭘 먹고 자랐길래 생긴 건 마동석처럼 생겨가지고 어쩜 이렇게 귀엽지?

나 : 그,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예약해, 예약해.

미니미니는 만족해하며 버스를 예약했다.

예약한 버스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기왕에 온 거 어제부터 가고 싶었던 사천진 해변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버스라도 타볼까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저쪽 정류장에 버스 한대가 와서 멈춰서더니 떠났다. 저게 바로 그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있다는 사천진 가는 버스였나보다. 하하. 정말인지...

미니미니 : 어, 우리 저 버스 탔어야 하는 거 아냐?
나 : 에이씨, 몰라. 걷자! 걸어!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8.

테라로사 사천점에서 사천해변까지 가는 길은 정말 예뻤다.





여기가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던 별 네개 반짜리 길이었다. 어제 안목해변 ~ 경포대 구간의 해송길만큼 길고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한 게 중간중간 나무 데크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울타리도 있고, 하여간 예쁘게 다듬어져있어서 훨씬 내 취향이었다. 버스가 떠나서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그 버스를 탔더라면 모르고 갈 뻔 했네.




걷다보니 어느 정도 규모의 해변인 사천해변이 나왔다. 찍어둔 사진이 없어 지도라도 첨부한다.

미니미니 : 여기가 그 카페가 있다는 해변이야?
나 : 아냐아냐. 여긴 사천해변이고, 거긴 사천진해변이야.
미니미니 : 이름이 헷갈리네.







미니미니 : 여긴 항구네? 이 쪽 길이 맞는 거야?
나 : 응 여기가 사천진 항이래. 여길 지나면 사천진 해변이 나와.


참고로 미니미니와 나 둘 중 지리에는 내가 훨씬 밝기 때문에 보통 같이 다닐 때면 길은 내가 찾는다. 미니미니도 내 길 찾는 능력은 믿는 것인지 차 타고 가다가 내비게이션이 고장나거나 길을 잘못 알려주면 기계를 꺼버리고 내게 지도를 주는 편이다. 내비게이션보다 더 빠른 길이라도 찾아내면 마치 알파고를 이긴 이세돌 기사의 4번째 대국을 보는 것 같다 하더라. 하하!

그런 내가 단 한가지 못하는 게 있다면 맛집을 찾는 일인데 (음식점을 골라 들어가도 항상 맛없는 곳을 들어가거나 혹여 맛있는 음식점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맛없는 메뉴를 시키는 절망적인 특기를 갖고 있다) 다행히도 미니미니는 먹을 복은 있는 건지 선택하는 음식점마다 높은 수준의 맛을 보장한다. 밥부터 간식까지 메뉴도 엄청 잘 고르는 편이라 밥 먹는 일은 모두 그에게 일임한다. 오, 이렇게 써놓고보니 엄청 공생관계잖아? 마치 악어와 악어새, 개미와 진딧물 같은 느낌이다.

미니미니 : 비유를 해도 왜 그런 비유를...





9.




사천해변을 지나 다시 사천진 항을 거쳐, 마침내 우리는 사천진 해변에 도착했다.






사천진 해변은 여태까지 안목해변에서 경포대를 거쳐 지나친 많은 해변들 중 가장 예뻤다! 가장 예쁘다는 건 사실 주관적인 평가인지라 뭔가 드디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뿌듯함이 작용해서 가장 예뻐보였을 수도 있다! 혹은 날씨가 어제와 달리 맑았기 때문에, 혹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가 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내 기준 제일 예뻤다고!




이쁘장한 벤치도 있어서 사진 찍었다. 경포대에선 이런 조형물에 사람들이 줄 서 있었는데 여긴 오래 앉아있어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어 맘 편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사천진 해변엔 희한하게 생긴 돌산이 있었다. 저런 곳은 또 놓칠 수가 없어서 올라갔다 왔는데 내려오는 도중 발을 헛디뎌서 삐끗했다. 아파서 절뚝거리며 다니니까 미니미니는 이 약골을 어떡하면 좋냐며 파스를 사서 붙여줬다. 보모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사천진 해변의 아름다움 때문에 다리 다친 닭처럼 절뚝거리면서도 푸드덕거리며 날라다녔고, 미니미니는 그 닭이 모래사장에서 고꾸라지는 것을 쫓아다니면서 막으려 애썼다. 좋은 걸 보면 아픈 것 상관없이 약간 조증처럼 들떠서 난리치는 건 엄마와 아빠 둘 중 누굴 닮아서 그런 걸까.




아, 그리고 마침내 Tabipero님 블로그에서 본 그 카페 사천과 쉘리스 커피집을 발견했다! 나는 안에 들어가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포스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노트북도 없고, 사천진 해변에서 터미널로 떠나는 한시간 간격의 버스 시간도 거의 다 됐는지라, 그냥 외관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미니미니는 여기까지 와서 카페에도 못 앉아보냐고, 너 여기서 커피 마시려고 온 건데 버스 예약한 거 취소하고 커피 마시고 가자고 말했지만, 난 그저 사천진 해변을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됐다고 했다. 나중에 강릉에 다시 오면 다른 곳보다도 이쪽으로 먼저 와서 방을 잡은 뒤, 이 동네에서 하루 이틀 가만히 머물다만 가야겠다고 이미 다짐한 뒤라 괜찮다 싶었다.





10.

강릉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인 312, 313은 사천진 해변 초입부분에 있었다.




그곳이 그 버스들의 종점이었는데, 두 버스가 번갈아 두 시간 간격으로 다니기 때문에, 합치면 한 시간 간격으로 강릉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312번은 바로 터미널로 갈 수 있고, 313번은 내가 모자를 샀던 구제집이 있는 용강동 서부시장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터미널로 갈 수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313번이었고, 우리는 버스 안에서 용강동 서부시장 정거장이 언제 나오나 귀를 쫑긋 세우다가 금새 곯아떨어져버렸다.




하긴, 운동량 없는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급 이만큼이나 걸었으니, 졸릴만도 하다. 우리는 고개를 꾸벅꾸벅거리며 거의 정신을 잃은 듯 잠을 잤지만, 대단한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용강동 서부시장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깨어나 여전히 쿨쿨대며 자고 있는 미니미니의 뺨을 때리며 깨웠고, 간신히 정류장에 내려 버스를 갈아탈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사실 나보다 길을 잘 찾는 편도 아니고, 또 한번 자면 못 일어나는 미니미니가 더 걱정인데. 미니미니가 혹시라도 혼자 여행을 떠나겠다 뭐 이딴 소리를 하고 떠나기라도 하면 내가 잡으러 가야할 판이다.

터미널에 도착한 미니미니는 내게 밥을 먹을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까 테라로사에서 먹은 빵도 있고 해서 배가 부르다고, 뭐 먹을 생각 없다고 얘기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미니미니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터미널 분식집으로 들어가 김밥과 라면을 시켰다. 나는 미니미니의 맛집 찾는 능력도 별 거 없구나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하곤 앞에 앉아 김밥을 하나 뺏어먹었는데, 김밥이 진짜 맛있어서 결국 내가 다 먹었다. 라면도 국물 한입 뺏어먹었다가 너무 맛있어서 결국 내가 다 먹었다. 씨... 정말 맛있는 집만 고르는 기특한 사람이다.

미니미니는 자신이 시킨 김밥과 라면이 텅텅 빈 걸 보고 잠시 슬픈 눈을 하다가, 그 정도 걸었으면 사람이 허기지는게 당연한데 뭘 안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네가 부담없이 주워먹을만한 걸 시켰는데 그게 정답이었고 또 그게 너무 정답이었는지라 하나를 더 시킬 걸 그랬다 등등의 소리를 했다. 아니 뭐 그것까지 생각해!? 정말 기특한 사람이다.

기분 좋게 부른 배를 잡고 돌아가는 버스에 탔다. 영동 고속도로에서 많이 막히겠다 생각했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가 영동 - 국도 - 영동 - 국도를 오가며 막히는 구간을 지나쳐 하나도 안밀리고 금방 도착했다. 뭐 이런... 강릉이 배출한 드라이버 아저씨들은 다 이렇게 멋진가? 아까 테라로사에서 본 트럭 드라이버도 그렇고, 여기 이 버스 드라이버도 그렇고... 하여간 덕분에 편하게 집에 왔다.





11.

혼자 떠난 여행이었는데 잡으러 온 사람 덕분에 혼자가 아니었다. 강릉에서 유유적적하게 가끔씩은 쓸쓸하게 걷고 싶었는데 결국은 왁자지껄한 여행이 되어버렸다. 혼자 하는 여행과 둘이 하는 여행은 확실히 무진장 다르구만.

이번 주말에 미니미니는 가족 모임이 있어서 고향에 내려갔다. 덕분에 이번엔 진짜 프리하다. 나는 어디로 여행을 갈까 무진장 고민을 했지만 어젯밤 무비몬이 갑자기 술 먹자고 불러서 - 성 패트릭 데이니까 초록색 옷을 입고 만나야한다 어쩌구 하길래 진짜 초록색 옷을 입고 나갔는데 지는 황토색 옷을 입고 나왔다. 뭐야 이 새끼는! 그래 사실 성 패트릭 데이가 우리나라에서 뭔 상관이야! - 나갔다가 술 마시고 지금 일어났다. 이 포스팅은 어제 무비몬 만나기 전에 카페에서 써놨던 글이다.

음, 어떡하지? 어딜 가지? 이번엔 진짜 혼자다. 이렇게 포스팅 마무리 할 때가 아니라 아침밥 먹고 씻고 짐 챙기고 나가야 하는데 노트북 앞에서 이렇게 포스팅이나 하고 있다. 일단 지금 당장은 엄마가 얼렁 나와서 밥 먹으라고 하시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원래 포스팅 써두면 한 다섯 번 정도 돌려본 다음에 올리는데, 이번엔 그렇게 못하겠다. 잘라내거나 다듬을 부분이 엄청 많은 걸로 아는데 뭐... 뭐... 에이, 몰라! 밥부터 먹어야지. 어딜 갈지 안갈지는 그 뒤에 정해야겠다.





그럼 다음 여행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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