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9 08:47

여수 여행 (6)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 ├ 남부지방

1.

다시 이순신 광장으로 돌아온 나는, 서울행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한시간 반 정도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넉넉잡고 30분 정도? 그럼 약 한 시간 정도가 남는다. 그동안 무얼할까 고민을 하다가, 쇼핑가에서 옷이나 보기로 했다.

그러나 어째 보는 옷들마다 영 마땅찮아 보였다. 이 옷은 무늬가 좀 그렇고... 이 옷은 사이즈가 없고... 이 옷은 막상 사면 안 입을 것 같고... 살만한 옷이 보이질 않았다. 이런 날 쇼핑 계속하다간 이상한 옷들만 여러개 사던데. 관둬야겠다. 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그냥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노닥거리기로 했다.

그렇게 카페를 찾아 느긋하게 걷다가, 왠 표지판을 만났다.




[천사벽화골목]


...벽화골목? 또야?

나는 살짝 코웃음치며 그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이 놈의 벽화골목은 어디 한군데에서 히트치니까 온갖 동네에서 다 따라하는구만. 서울, 인천, 부산, 통영, 수원, 전주, 대구, 광주... 벽화마을이 있는 도시들 중 당장 생각나는 도시들은 이 정도일까. 아마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을거다. 물론 어두컴컴한 골목보단 환하고 밝은 벽화가 그려진 골목이 미관상으로도 정서상으로도 치안상으로도 좋다. 환경이 개인과 집단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니까. 그래서 칙칙한 골목에 페인트질을 하는 것 자체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엄청 특별한 명소인 양 광고해대는 것에는 좀 질리는 참이었다. 이화동 벽화마을이나 감천문화마을이 명소였던 것은 희소가치 때문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어딜가도 엇비슷한 벽화마을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곳을 그 지역의 필수 여행 코스처럼 홍보해버리니 김이 새는 것이었다. 무슨 프랜차이저냐고.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이다가, 아무리 여수가 좋아도 벽화마을의 클리셰(?)를 깰 순 없을 것이다, 적당히 날개 있고 어린왕자 있고 유명한 시 적혀있고 그렇겠지, 안봐도 뻔하다 등등으로 생각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시간도 남으니까, 올라가서 확인한 뒤 그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해줘야지. 그리고 킬링타임용 셀카나 몇 방 찍고 내려와야겠다.

나는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2.

천사벽화골목은 진남관 바로 맞은편 고소동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진남관이 내려다보인다.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 도중 찍은 진남관. 이 각도도 제법 괜춘하군.








이순신과 관련 깊은 동네라서 그런지, 입구쪽엔 제법 많은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테마가 있는 벽화로군. 이런 거 좋지.  






이순신 벽화를 따라가다보면 중턱에서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와 타루비를 만날 수 있다. 

비각이 왜 하필 이런 오르막길의 민가 틈에 세워졌나 했는데,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곳은 포루였으며 이순신 장군님이 이 자리에서 군령을 내리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진남관 쪽에서 이어지는 전라좌수영성은 여기까지 포함되는 걸테다.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주변에 작은 주택들이 들어찼지만, 조선시대 땐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본다. 




비각이 있는 곳에서 내려다본 골목. 

오른쪽 담벼락에 기와지붕처럼 그려놓은 게 귀엽다. 먼 곳에 빼곡히 박혀있는 집들도 재밌고. 




여기까지 구경을 하자 제법 괜찮네 싶어졌다. 골목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고, 날씨도 선선하니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어디보자, 남은 시간이... 뭐... 조금만 더 가볼까?

나는 돌아갈 버스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벤치 위 화살표가 나있는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보기로 했다. 






3.

처음엔 심심풀이로 걷던 거였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나는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세상에" 혹은 "미쳤나봐" 등등의 짧은 감탄사만 내뱉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길 반복했단 소리다.

왜 그랬냐고?


아, 좋으니까!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은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이 아니라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강조를 해야한다면 '벽화'가 아니라 '고소동'의 '골목', 그리고 높은 위치임을 알려주는 '천사'라는 단어라는 것이다.

벽화도 물론 작업하신 분들이 잘 그리셨다. 감각적이고 느낌있는 벽화들이 많았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저 너머의 배경이 워낙 압도적이었는지라 도저히 벽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벽화보다도, 그 너머의 여수가, 진짜 짱이었다! 당시 느꼈던 소녀소녀한 감성을 표현하자니 나 10대 때 많이 썼던 그 따위 옛날 말(캡짱이 아닌게 어디야)이 나오는데 하여간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여수는 진짜 짱짱이었다!

내가 왜 이 벽화골목 표지판을 심드렁하게 바라본 거지? 이곳은 평범한 벽화골목과는 다른데 말야. 벽화보다는, 골목의 위치가. 항구 바로 앞에 있다는 점이, 시내에 아파트 단지가 없다는 점이, 근방엔 뷰를 가로막는 구조물이 없다는 점이 말이다. 

조금 전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이곳이야말로 여수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며 여수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곳인데!

나는 과거의 자신을 한없이 부정하고 반성하며 골목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고소동 벽화골목에서 바라본 여수 낮바다.

이런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내 멋대로 상상회로를 가동시켰다. 여기 어디 옥탑방에 집을 구하고... 아침에 일어나 여수의 바다내음을 맡으며 식사를 하고, 점심엔 빛나는 여수 앞바다를 바라보며 작업(뭔지는 몰라도 그냥 예술활동... 창작활동!)을 하다가, 밤이 되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여수 밤바다를 감상하는 거지...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헤다가 잠들고...

우와, 상상만 했는데도 엄청 낭만적... 낭만적이다! 갑자기 여수에 가서 살고 싶어졌어! 여수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여수에 무슨 일자리가 있나 좀 찾아봐야겠다!





4.

다니다가 본 벽화 중에는 인증샷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재밌는 벽화도 있었다.




뭐 이렇게 그네타는 흉내를 낼 수 있는 벽화라던가...




강아지에게 달린 산책줄을 잡을 수 있는 벽화라던가...




타일로 만든 아기자기한 벽화도 있었는데...




그 벽화 너머의 풍경이...




예술 작품보다 더 예술 같은 여수의 풍경이...


...헉!

이거 보시라!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벽화를 보다가 갑자기 풍경으로 초점이 옮겨간단 말이다!

내가 찍은 사진들을 순서대로 보면, 벽화1-벽화2-벽화2 뒤의 풍경1-풍경1의 확대샷-풍경1 옆의 풍경2-풍경2와 3-풍경 1,2,3의 파노라마... 이렇게 흘러간다. 당시 사진을 찍던 내 의식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순서... 참 알기 쉽죠.





5.

그 의식의 흐름대로 찍어놨던 사진들을 어느 정도 추려서 쭉 올려본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마주쳤을 때 손에 쓸만한 카메라가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내 핸드폰이 애써서 그 역할을 대신 수행했는지라 다행이다 싶다. 전날 배터리 빠방하게 충전해놓길 참 잘했다.




이 때는 3월 중순이었다. 가녀리게 핀 꽃 뒤로 보이는 여수.




오밀조밀한 지붕 아래로 보이는 항구.




낮의 돌산대교와 장군도. 밤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사실 이 세 장을 길게 합쳐놓으려고 했는데 포토샵이 오류나서 꺼지는 바람에 걍 안하기로 함.




여기는 이발손데,




글씨는 잘 안보이겠지만 라면도 끓여주고 냉아이스커피도 타준다고 함.

한문과 영어를 동시 사용하여 강조할 정도면 얼마나 시원한 커피일지!




역시 이순신의 고장 아니랄까봐 연들이 그려져있다.

연 벽화 옆엔 요새 어딜가든 있는 (심지어 동네 음식점엘 가도 있는) 천사 날개가 있었다.




이쪽은 거북선 대교가 보이는 방면. 걷다보니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참고로 귀에는 아침부터 계속 로이킴 음악. 오늘은 하루종일 로이킴으로 달릴 것 같다.




천사카페가 있다고 해서 지역발전을 위해 맛있는 걸 많이 사먹기로 다짐하고 찾아갔는데 보수 공사 중인 듯.

문이 닫혀있었다.




벽화에 적힌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라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요새는 딱히 종교생활도 안하는데 다른 위로보다도 기도해주겠다는 말이 그렇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더라. 어쩐지 '당신의 문제를 나도 함께 고민하고 공유하겠어요'라는 의미 같아서.

이 벽화에 감사해서라도 나중에 다시 이 카페에 찾아와야겠다.




사진을 찍다가 이 비슷한 구도와 느낌을 다른 나라에서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고민했다.

바다... 오르막길... 어... 음... 쿠... 쿠바였나? 지금 옛날 포스팅 보면서 비슷한 사진 찾아보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뭐 어디 있겠지.




마을 이름이 웃겨서 깔깔거린 뒤 글을 읽었다가 이야기 보정받고 예뻐보이게 됨. 참 예쁜 마을 이름이얌.





계속 내려가니 가까워지는 바다와 지붕들.





또다른 주제를 가진 벽화 골목을 지났다. 이번엔 만화 캐릭터들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벽화보다도 반짝거리는 뷰에 눈을 뗄 수 없었더랬다...





6.

벽화골목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며 날 계속 헐떡이게 만들었다. 혼자 어머어머, 세상에 등등의 말을 하며 숨을 거칠게 내쉬는 바람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도 한 것 같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빛나는 광경들을 보게 된 나로썬 불가항력이었다. 여기 안보고 그냥 갔으면 어쩔 뻔 했어. 진짜 큰일날 뻔 했다고.

그렇게 내려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골목은 끝나있었고 바다가 눈앞이었다. 



여기는... 아, 어젯밤에 왔던 종포 해양공원이다. 마술사 아저씨가 공연하던 곳. 

나는 해양공원에서 어젯밤을 떠올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가, 저 천사들의 골목 위에서 새까맣게 잊었던 버스에 대해 간신히 떠올리고, 황급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라?

고작 30분이 흘러있었다. 그렇게 감동하고 그렇게 숨가쁘게 몰아쉬고 그렇게 많은 풍경을 봤는데 겨우 30분이 지났다고? 저 위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나? 나는 잠시 시계의 고장을 의심하며 핸드폰 시계를 다시 한번 체크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허허. 저 위에서 30분이 아니라 3시간은 머물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인데. 다른 세상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뭐, 진지 빨자면,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라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고 길게 기억된다고는 하더라. 맨날 똑같은 걸 보게 되는 학교나 회사에서의 30분과 여행지에서의 30분이 다른 이유다. 이래서 사람은 여행을 다녀야 해. 밀도 있는 시간들로 인생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지. 암암.  

하여간 시간은 넉넉하다. 나는 해양공원 너머로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선 가벼운 운동으로 활성화된 내 위장을 비워주기로 했다. 어디보자, 공중화장실이 여기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마지막 종포 해양공원에서 계속!




2017/04/22 09:20

여수 여행 (5) 소호 동동다리와 웅천 인공해변 ├ 남부지방

1.

여수 2일차.

2일차 계획은 하나도 없어서, 빅오쇼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알려준 곳에 가보기로 했다. 사장님은 내가 왠만한 곳들은 다 둘러봤다는 걸 알고는, 그럼 이쪽으로 한번 가보라며 갈만한 곳들을 알려주셨는데, 그 사장님 왈, 이곳들은 최근에 여수에서 뜨는 곳, 그러니까 한마디로 굉장히 '핫한 곳'이란다. 현지인이 핫하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핫한 것인가. 기대가 되는군.




사장님은 버스로는 그 '핫한 곳'에 가기 힘들 거라며 렌트카를 권했지만, 나는 운전을 할 줄 몰라 버스를 타기로 했다. 대중교통 외길 인생을 살아온 나로썬 한시간 두시간 버스는 기본이다! 하하!

위 사진은 버스 정류장 앞에 걸려있던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입고 있는 옷은 어제 여수 이순신 광장 근처 옷가게에서 9900원 주고 산 맨투맨. 겁나 편하고 폭신해서 좋았는데 집에 와서 빨래하다가 다른 옷이랑 섞이는 바람에 옷에 이상한 물이 들었다. 결국 잠옷이 된 비운의 맨투맨... 여수에서 한 번 입고 버렸네... 흑흑...





2.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추천한 그 '핫한 곳' 첫번째는 소호 동동다리라는 곳이었다.





가는 방법은 요렇게.

혹시 이쪽으로 가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위 지도에 나온 27번 말고도 다양한 버스가 있으니, 네이버로 소호회센터건너 정류장을 찍은 뒤 버스 노선을 확인하시길 바란다. 보통 버스 배차 간격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이니, 여수 실시간 버스 정보 앱을 다운받아 실시간 체크를 한다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참고로 여수 버스는 어마무지하게 달리니까 네이버가 추정한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소호 동동다리는 주거단지 앞의 나무 데크 산책로다. 데크가 바다 위에 동동 떠 있다.





고개를 돌리면 반짝거리는 바다를 볼 수 있다. 반짝거림에 소리가 있다면 끊임없이 효과음이 들려왔겠지.





중간중간 유리 바닥도 있다. 이런 건 질색을 하는 무비몬을 데려오고 싶군.




뭐 이렇게, 소호 동동다리는... 음... 햇살은 기분 좋고, 바다는 고요한, 그런 한적하고 조용한 산책로였다.

산책하기 좋긴 한데... 음, 저기 사장님...

...

...왜 핫하다는...?


그러고보니 사장님 왈, 이곳은 밤에 와야 볼만하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밤까지 있을 수 없다니까 음 뭐 낮에도 괜찮다... 괜찮을 거다... 괜찮지 않으려나? 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더랬다. 어쩐지 추천할 때 살짝 긴가민가 하시더라. 쩝.

그런데... 그런데... 어쩌죠, 사장님! 낮에는 별로... 그냥... 아니 괜찮긴 한데, 굳이 버스 타고 먼 길 달려서 올 정도는 아닌 듯한... 물론 괜찮은데... 한적하고 걷기 좋긴 한데...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산책로라니 꽤 멋지구나 싶은데... 근데 그거밖에 없잖아요! 밤에는 뭐 어떻길래요! 레이저라도 뿅뿅 나오나요!? 궁금하구만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소호 동동다리'로 구글링해봤더니 멋지구리한 밤의 사진들이 나왔다. 아, 밤에 와야하는 곳이구만. 내가 낮에 와서 심심했던 거였구만. 밤에는 제법 핫하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하겠다. 혹시라도 궁금하신 분들은 구글링해서 찾아보시길... 





3.

낮의 소호 동동다리에 심심한 감상을 남긴 나는, 미련없이 다른 스팟으로 이동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버스는 환승이 됐다. 럭키다 럭키.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핫하다는 곳, 그 두번째 지역으로 가려면 버스를 환승해야 했다. 나는 네이버 지도가 알려주는대로 버스를 갈아탔다. 사진은 환승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찍은 사거리. 그냥 언젠가 꿈에서 본 것 같은 광경이라서 (워낙 흔한 풍경이라서 그렇게 느꼈을까?) 찍어봤다.




사거리에서 환승 버스 정류장으로 가다가 곰이 그려진 값싼 음료수점을 발견했다. 요새 여기저기 생겨나는 천원대 음료수 가게 중 하나인가보다. 소규모 점포 자영업자를 응원하는 나로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은 동전을 탈탈 털어 음료수를 하나 사먹었다.

사먹은 음료수는 키위 쥬스. 원래 과일 잘 안먹는데 요새 들어선 건강과 피로 때문에 챙겨먹는다. 비타민 C가 피로회복엔 짱이란 말이지. 신 거 진짜 안좋아하는데 비타민 C 섭취하려고 참고 마신다. 





4.

키위 쥬스를 쪽쪽 빨며 버스에 탑승한 나는, 창문으로 떨어지는 기분 좋은 햇살에 신이 나 이어폰을 꽂았다. 어디보자, 뭘 들을까. 버스커버스커는 어제 신나게 들었으니 다른 걸 들어보자. 이 따뜻한 햇살에 어울리는 목소리... 음... 그래, 로이킴으로!

나는 로이킴 앨범을 플레이리스트에 쫘르륵 추가해놓고 흥얼거렸다. 차창 너머로는 어느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선을 체크해보니 슬슬 내릴 곳인 것 같다. 나는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곡이 바뀌며 무진장 활기차고 명랑한 인트로가 튀어나왔다. 오오, 뭐야, 이 곡은!





곡 제목을 살펴보니 '이 노랠 들어요'란 곡이었는데, 전주 부분이 맑은 하늘과 눈부신 햇빛, 따뜻한 공기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엄청난 상승효과를 냈다. 와, 지금 이 상황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음악이 있을까! 나이스 타이밍이야, 랜덤 플레이리스트!

나는 기분이 좋을 때 발사되는 함박 미소를 짓고 음악에 맞춰 깡총거리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바다다, 바다가 보인다!





제일 먼제 눈에 들어온 건 물 아래 해초가 보이는 맑은 바다였다. 바로 앞엔 선착장이 있었는데, 막 수상 오토바이를 타려고 준비중인 사람이나 보트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저런 해양 스포츠를 즐기려면 돈 좀 있어야 되지 않나? 어쩐지 부자들 놀이 같은 느낌이... 여튼 부럽다! 

뭐, 사장님이 추천해준 '핫하다'는 두번째 스팟은 이쪽이 아니라 다른쪽. 여기서 우측으로 빙 돌아가야 했다. 나는 방향을 가늠하고 그 스팟을 향해 걸어갔다.




걷다보니 띠용. 매우 잔잔한 해변이 하나 나왔다.

이곳이 사장님이 추천해준 핫하다는 두번째 스팟, 웅천 인공해변이다.




인공해변답게 규모도 작고 모래도 적었다. 아마 여름철엔 놀러오는 사람들을 위해 모래를 쌓아놓겠지만, 성수기가 지나면 관리를 하지 않을테니 그 모래는 다 쓸려나갈거다. 지금이 봄이니까, 딱 그 상태인 것 같았다.

음, 지금 상황으론 그렇게 막 공들여 찾아올만한 해변은 아닌걸. 한적해서 좋긴 하지만.




아까 소호 동동다리에서 느꼈던 그 심심한 감정을 다시금 느끼며 해변을 걷다가, 그 끝에서 희한한 길을 보았다. 뭐지? 저 바다를 가로지르는 돌길은?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는 돌다리라니. 뭔가 재밌는 풍경이다. 뭔지는 몰라도 이런 곳은 건너줘야지.




그래서 건너왔다.

이쪽엔 카메라를 올려둘 구조물이 있어서,




폼잡고 인증샷 찍었다. 그러고보니 여수와서 내 사진 많이 못찍었는데 여기서라도 인증샷 찍으니까 좋군. 에헤헤.

장도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섬 안쪽까지 들어가서 좀 쉴까 하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그냥 나왔다. 다시 건너오는데 어째 수위가 더 올라온 느낌이었다. 밀물 때라 물이 높아졌나보다, 하고 그냥 지나가려다가 왠 표지판을 발견했다.




엥? 밀물 때는 아예 석축 위로 물이 차버린다네?

만약 장도 구경을 하다가 물 때를 놓쳐 건너오지 못했다면... 빨리 올라가는 버스 타야하는데 내일 출근은 어떡하나 등등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스릴이 있었겠군... 후후 다행이다...

나는 안도하며 몸을 돌렸다.




해변 뒤 어린 소나무 숲엔 캠핑장이 있었다.

캠핑장에는 놀러온 사람들의 텐트가 쳐져 있었는데, 다들 엄청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슬쩍 보기론 캠핑장 시설도 괜찮아보였고, 사이트 빌리는 가격도 저렴한 것 같았다. 이쪽 동네 사는 사람들은 짱 좋겠구만. 여름엔 진짜 핫스팟이겠다.




캠핑장 근처에는 문화 시민들의 쓰레기 집결지도 있고.




커피를 팔던 트럭도 있었다.

이래저래 참 여유있고 좋은 곳이었다. 왠지 걷기만 했는데도 힐링이 되는군.


그런데, 사장님이 여태까지 핫하다고 소개해준 곳은... 죄송하게도 별로 핫하진 않았다! 1번 소호 동동다리도 그렇고, 2번 웅천 해변도 그렇고. 한밤중에 오거나 한여름에 온다면 핫한 곳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질 않았으니!

굳이 말하자면... 음... No Hot...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따뜻한 온기도 느낄 수 있었고... 그러니까 Warm... 그래, 핫한게 아니라 웜했다. 사장님의 추천 문구가 잘못됐구만. 이곳들은 핫한 곳이 아니라 웜한 곳이었다!

뭐, 나처럼 아무곳이나 쏘다녀도 다닌다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괜찮겠지만, 혹은 현지인들이라면 색다른 쉼터가 될 것 같은 곳이겠지만, 음 뭐랄까, 여수가 처음인 다른 여행자들에겐 굳이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여수에 하도 많이 와서 이젠 좀 다른 곳엘 가보고 싶다 하다면 이쪽도 괜찮겠지만!





5.

슬슬 점심 때라, 웅천 해변 근처에 있는 상가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다양한 음식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고른 곳은...




바로 요기! 달곰 함박이라는 음식점이었다. 입구의 곰이 너무 귀여워!




메뉴판도 귀엽고,




내부도 귀여웠으며,




음식도 귀여웠다. 이래저래 귀여웠던 음식점!

나는 불곰함박이라는 로제소스 +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는데, 간도 적절하고 곁들여 먹는 야채들도 괜찮아서 맛있게 먹었다. 근데 양이 생각보다 많아 결국 고기를 몇 점 남기고 말았다. 나는 절대 맛없어서 남긴 게 아니라 양이 많아서 남긴 거라고 사장님께 몇차례나 강조하고 난 뒤 계산을 하고 나섰다.




점심을 먹고 다시 이순신 광장 쪽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네이버가 알려주는대로 근처에 있는 버스를 탔는데, 마침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61번으로 기억한다)를 타서 바다 구경을 하며 돌아갈 수 있었다.




버스에서 스치듯 본 바다와 항구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스치듯 봐서 더 아름다웠을까?

귀에는 여전히 로이킴 음악. 아침부터 지금까지 로이킴 목소리와 어울리는 따뜻한 풍경들을 계속해서 마주했더니 녹는 기분이었다. 이 때는 3월이었고, 중부지방은 아직 밤낮으론 겨울 날씨였기에 남부지방에서 느낀 이 따뜻함이 몹시 낯설고도 기뻤더랬다. 계속 핫한 곳 아니잖아 어쩌구 하며 말은 했어도, 그냥 그곳이 북적북적한 곳이 아닐 뿐이었지 스스로는 굉장히 만족한 한나절을 보냈다. 해안가를 유유자적하게 거닐며 봄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런데 뭐랄까, 마음이 뭔가 재채기 나오기 직전 코 간지러운 것처럼 간질거렸다. 뭔가 센 게 하나 터졌으면 싶은 이 간질거리는 마음은 뭐지. 물론 지금도 기분 참 좋은데. 그래도 뭔가 더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는 이 기분은...




그 결정적인 건 다음편에 계속!





2017/04/21 10:04

고라니 이야기 대나무숲

1.

인천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천을 떠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랑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는데, 뭐가 계기가 됐는지는 기억도 안나지만 급 친해져서 수능 볼 때까지 붙어다녔다.

하도 붙어다녀서 주변에선 사귀냐는 소리도 들었었고, 그 친구와 내 사이를 질투한 그 친구의 친구가 내 뒷담화를 까거나 자신의 친구들을 이용해 날 성가시게 만들기도 했다. 뭐, 당시 우리는 수능을 앞둔 센치하고 예민한 10대 후반의 소녀들이었으니. 지금이야 걔도 참 무슨 질투를 한 건지, 그냥 같이 껴서 놀면 됐는데 싶지만 말이다.

그런데 자꾸 친구, 친구의 친구 어쩌구 하니까 헷갈린다. 편의상 내 친구를 고라니라고 하겠다. 친구가 자취하는 집 근처에 고라니가 출몰했던 사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지라.





2.

고등학생 때의 고라니는 공부를 참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 애는 1등이니 2등이니 따지는 걸로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할 줄 아는 애였다. 나도 학생 때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고, 못하냐 잘하냐로 선택하라면 잘하는 편에 속했지만, 내가 시험문제를 위해 얕은 공부를 하는 요령쟁이였던 반면, 고라니는 지적 호기심을 위해 자기 안에 원리와 체계를 쌓는 학생이었다.

그녀의 노트는 늘 빼곡하며 완벽했고, 그래서 다른 학생들에게 절찬리에 베낌 당하곤 했다. 바보들. 그건 베낀다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란 말이지. 오히려 너네들 수준의 공부하는데엔 방해만 될 걸. 나는 공부시간엔 열심히 졸아놓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고라니의 노트를 빌려가는 애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곤 했다.

고라니 : 근데, 애들이 노트 빌려가는거 너무 불편해.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 휴.

고라니의 고민을 얼핏 들은 이후, 나는 속으로 비웃던 걸 말로 꺼내기 시작했다. 야, 네가 그거 베낀다고 한문제 더 맞을 거 같아? 야, 그냥 문제집을 한 권 더 사. 팔 아프잖아. 매점 안가?

사실 쉬는 시간에 노트를 베끼는 애들 중 대부분은, 어느 한 명이 베끼는 걸 보고 "나도 베낄래~ 나도 나도~"하는 경우가 많아서, 옆에서 그 의욕을 살짝 꺾어주면 그런가 하고 관둔다. 이런 것도 군중심리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내 의도적인 한소리 두소리에 고라니 노트를 찾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언젠가부터 다시 제 주인 서랍에 남아있게 되었다.

뭐, 고라니는 왜 그런줄 몰랐겠지만 말이다. 주변 사람 심리에 조금 둔한 (그리고 자기가 둔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고라니는, 왜 요새는 애들이 노트를 안빌려달라고 할까, 뭐 잘됐지, 정도의 느낌으로 꾸준히 공부를 했더랬다.

수능이 끝나고 고라니는 나름 대한민국에서 명문대라고 알아주는 대학엘 갔다.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대였지만 뭔가 아쉬웠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겨우 그 정도의 학교에 가려고 그 공부를 한거라니. 차라리 유학을 가는 게 좋을텐데. 왜 이딴 입시제도가 있는 나라에 태어난 거람. 하지만 괜히 그런 이야길 꺼냈다가 진짜 유학이라도 가면 만나지 못할테니까 굳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만 아쉬워했다.





3.

그렇게 고라니를 보며 대한민국 입시제도에 대한 한탄만 늘어놓던 나는, 정작 내가 갈 대학은 신경도 쓰지 않고 게임만 줄창 했더랬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당시의 난 대학에 크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소심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르고, 고작 이딴 성적표 쪼가리를 받기 위해 그 공부를 했나 허탈감에 빠졌던 걸지도 모르고, 단순히 귀찮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정시 원서 기간에 담임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준 리스트 - 담임쌤은 첫 상담에서 내가 "저 어디어디 갈 수 있어요? 안전빵으로 골라주세요. 코카콜라로 고를래요."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아 밤을 새서 내가 갈만한 대학들을 미친듯이 골라줬다. 상담 중에 담임쌤이 자기 눈 충혈된 거 보이냐며 미래를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안그러면 자기 꼴 난다고 내게 말해줬던 게 기억난다. 근데 쌤은 선생님이잖아. 자기 꼴 나면 대박난 거지 뭘! - 에서 몇 군데를 골라 지원했다. 그 몇 군데는 이 정도면 이미 대학이 결정된 고라니랑 자주 만나겠다 싶은 거리의 대학이었고, 나는 실제로 그런 거리에 있는 학교엘 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대학을 가서도 우리는 곧잘 만났다. 나는 동아리 활동 때문에 늦게 끝나는지라 보통 고라니가 나를 보러 왔다.

고라니와 만나는 날은 내가 유일하게 여성스러운 수다를 떨 수 있는 날이었다. 내 주위엔 남자나 아저씨 같은 여자애(대표적 예 : 무비몬)들만 있어서 평소엔 공부나 게임, 여행 이야기 정도나 하곤 했었는데, 고라니랑 만나기만 하면 이상하게 꺄아꺄아거리며 디저트, 패션, 악세사리, 네일, 화장품 등등의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 내가 평소에 그런 쪽의 화제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 갔을 때 제일 그리웠던 한국의 모습은 '볕 들어오는 홍대 뒷골목 예쁜 카페에서 무진장 달콤한 디저트를 시켜놓고 고라니와 여자여자한 이야기하기'였다. 내 방의 컴퓨터 앞이나 엄마가 차려준 된장국, 당시 사귀었던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보다도 그게 제일 그립더라.





4.

그 고라니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내가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고라니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신입사원증을 들고 있었다. 축하해야할 일이었지만, 축하보다도 먼저 울컥하는 게 올라왔다. 분명 고라니는 대학원에 가려고 준비중이었단 말이다.

고라니에게서 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내가 한국에 없는 사이, 절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여러가지 일들을 겪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녀의 동의 없이는 쓸 수 없는 일들이라 기술할 수 없지만, 그녀가 몇 년간 겪어야했던 일들은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지지리도 괴롭고 힘든 일들이었다.

고라니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장하게도 부랴부랴 남은 공채를 준비해 대기업에 입사했고,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그 정도면 한숨 돌릴법도 한데, 그게 끝이 아니라 또다시 어려운 상황이 닥쳐왔다. 그래도 이 악물고 버텨내며 그 상황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그랬다고 한다.

캐나다에서 '볕 들어오는 홍대 뒷골목 예쁜 카페에서 무진장 달콤한 디저트를 시켜놓고 고라니와 여자여자한 이야기하기' 따위나 생각하고 있던 내게, 고라니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너는 지구 반대편에서 혼자 힘들었구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이. 내 철없는 카톡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여전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내가 끼어들 수 있을만한 문제가 아니었고, 내가 나선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 앞가림하기도 힘들었던 나로썬 그저 조용히 고생했다고 말하는 게 다였다. 나도 참 못났구만.





5.

이것도 다 몇 년 전 이야기다. 현재 고라니는 여전히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힘든 상황을 많이 극복해냈지만 여전히 힘들다. 개인적으론 그녀가 어떻게든 공부를 이어서 했으면 좋겠는 마음이지만 내가 학비를 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혼자 속으로만 아쉬워하고 있다.

내가 직업이 없을 때, 고라니는 자기가 돈을 버니까 그냥 얻어먹으라며 만날 때마다 밥을 사주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미안했다. 너한테는 이게 그냥 써지는 돈이 아닐텐데. 나는 속도 없이 밥이나 얻어먹고 있구나 싶어서.

그러다가 작년에 내가 적당한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내가 뭔가 그녀에게 한 턱을 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뭘 대접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계속 고생만 했을 고라니에게 휴식을 선물하기로 했다.

뭐, 멋지게 동남아 풀빌라 딱! 럭셔리 리조트 딱! 하면 좋았겠지만 난 아직 그 정도는 불가능한 햇병아리인지라, 그냥 국내에 있는 호텔 예약 홈페이지를 뒤져가며 몇 군데 골라봤다. 그 중 하나는 송도에 있는 호텔이었다.

나 : 송도는 어때?
고라니 : 송도? 거기 유원지 있고... 바다있고 뭐... 괜찮겠다.
나 :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거야!?!?!?


송도가 왠만한 대도시 다운타운 뺨치는 송도특별시(?)가 된 지 얼마나 지났는데! 하지만 친구는 송도에 대한 기억이 개발 이전의 기억에 멈춰있었다. 대학생 때부터 인천을 떠나 산 탓일 거다. 나는 송도를 구경시켜주겠다며 고민없이 송도에 있는 호텔을 잡고 이쪽으로 놀러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 호텔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주절주절 포스팅을 하게 된 계기다.

사실 난 "친구랑 송도에 있는 호텔에 다녀왔음!" / "시설이랑 서비스 굳굳!" / "이런 부분은 좋고 이런 부분은 안좋음!" 등등을 가볍게 포스팅하려고 했었다.

근데 이게 어쩌다보니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서 또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아아... 뭔가 여기까지 쓰고 나서 급 호텔 이야기를 하면 진짜 이상할 것 같은데. 호텔 리뷰는 포기... 나중에 다른 포스팅에서 해보겠다아...





6.

하여간 고라니는 새롭게 바뀐 송도에 놀랐고, 아이처럼 좋다고 뛰어다녔다. 호텔에 들어설 땐 자기가 언제 이런데서 자보겠냐고 말하며 갓 상경한 시골 처녀의 표정을 보여줬고, 객실 침대에서 넓다고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여 날 흐뭇하게 만들었다.

음음, 사실 그 정도의 반응이 나올 정도로 무진장 고급진 호텔은 아니었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니 좋구만.

그 이후로 사진도 찍었고 산책도 - 나는 산책이라고 생각하고 다닌 건데 고라니가 왜 이렇게 많이 걷는 거냐며 나중엔 눈과 다리가 풀려 정신을 못차리더라. 그래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요새 나보다 두세배 잘 걷는 미니미니랑 같이 다니는 통에 나 자신이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 다녔고 쇼핑도 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선 목욕도 했고 맥주도 마셨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다. 다음날엔 늦잠을 자다 일어나 동물농장을 보며 울고 서프라이즈를 보며 '그런데' 타이밍을 예측하고 그러다가 또 쇼핑하러 나가고 그랬다. 게으르고 즐거운 주말이었다.

급작스럽지만 고라니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왜냐면 그 일이 저번주였기 때문이다.





7.

주말이 지나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고, 고라니에게 안부 카톡이나 날릴까 생각하며 다시 주말을 기다리고 있는 금요일. 업무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고라니와의 일들을 쭉 떠올려봤다.

무비몬과의 이야기처럼 스펙타클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고라니와 쌓아올린 이야기도 이래저래 많더라. 그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나는 항상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왜 그렇게까지 느끼는 건진 모르겠는데, 고라니는 그냥, 뭐랄까, 얘가 전생에 날 구해주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한없이 미안하고 한없이 잘해주고 싶고 그렇다.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몇 없는데. 아니 거의 없는데. 참 이상하게도 말이다.

힘들었던 20대의 고라니에게 나는 아무것도 해주질 못했다. 그래서 30대엔 많은 일들을 해주고 싶다. 같이 휴양지 놀러가서 썬글라스 끼고 해변에 누워서 칵테일 쪽쪽 빨며 시가 한 대 태워준다던가, 오픈카 렌트해서 음악 쿵짝쿵짝 틀어놓고 해안도로 달리며 소리를 지른다던가, 하여간 그런 일들을 같이 하고 싶다. 같이 놀고 싶다는 말이다.

그녀의 일상의 장르가 빨리 아침드라마에서 가벼운 시트콤으로 전환되길, 그리고 내가 그런 장르변화에 도움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포스팅을 끝낸다. 제발 그렇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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