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6 20:26

미술치료 일상

저번 달이었나, 시간 많은 어느 주말, 집단 미술치료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받기 위해 받은 건 아니고 취미 모임에서 이런 것도 있는데 해보자 하길래 재미삼아 받은 거였다. 생각보다 즐거웠고 유쾌했으며 도움이 됐다.

그림을 그렸다. 미술상담이라길래 처음엔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해석하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그린 그림은 그냥 상담의 도구, 매개체로 쓰이는 거였다. 그림을 그리고 난 뒤 나누는 이야기가 훨씬 더 중요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말을 신중하게 하시는 분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평범한 대화를 나눌 땐 느낄 수 없는 그 조심스러움이 좋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주의깊게 다가와준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걸 할 수 있으니까 상담사 선생님이겠고 상담사 선생님 자격으로 있는 거니까 그렇게 해준 거겠지만.

상담사 선생님은 날 보고 지쳐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알아주니 기뻤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껴안고 계속 가던 길을 가고 있으니 당연히 지치는 것이라 했다.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바꿔보라고 했다. 어떻게 바꾼담. 지금 당장은 지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바꿔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건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당장 뭘 어떻게 바꿔보고 당장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라고 했다면 난 그 자리에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쉬고 싶단 말이다.

다른 얘기를 하다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조금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했다. 조금 이기적. 조금 이기적.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내가 불편해도 상대가 편하다면 감수하는 그런... 그렇다고 완벽하게 허허거리며 넘어가지도 못하는 속 좁은 그런... 그런 사람이다 나는. 머리 좋게 조금 이기적인 삶을 사는게 잘 안된다.

그러고보니 미니미니랑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냥 바보처럼 지내면서 사는 게 속 편하다고.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양보해주고도 둔하다고 욕 먹는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 고구마 같을 테니 우리끼리 고구마 라떼 고구마 케이크 고구마 쿠키 같은 거 잔뜩 만들어서 먹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 바보 같은 미니미니랑.

여기까지 쓴 다음에 졸려서 임시저장 해놓고 홀라당 까먹은 포스팅이었는데 오늘 여행기 임시저장글 불러오려다가 눈에 띄어서 올려본다. 하여간 미술치료는 재밌었다.




미술치료 때 그린 거. 원 안에 자유롭게 그림 그리라고 해서 빨간머리 앤에 나오는 숲속 같은 걸 떠올리며 그렸다. 하늘이 어두컴컴해서 아쉽군. 시리게 푸른 하늘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어제 하늘 같은.



2018/09/25 15:56

겨울 유럽여행 (32) 바티칸 : 일요일의 교황 축사 ├ 겨울 유럽여행

1.

바티칸 산 피에트로 광장에서는 매주 일요일 정오, 교황 공개 축사가 진행된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세계적인 거대 종교의 수장을 실제로 볼 수 있는 행사는 드물지 않은가. 특히나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는 권좌에서 일어나 낮은 곳을 찾는 파격적인 행보로 유명한 분이고, 그러한 분을 실제로 뵐 수 있다는 건 몹시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나는 팔라티움에서 열일한 카메라를 잘 갈무리한 뒤, 콜로세오 역으로 달려갔다.




1.5유로짜리 지하철 1회권을 샀다.

Colosseo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Termini에서 A선으로 갈아타 Ottaviano역으로 이동했다.




Ottaviano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다.

광장엔 아직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었다. 어제의 나보나 광장도 그렇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여운을 꽤 오랫동안 느끼는 편인가 보다.




위 사진은 줌해서 찍은 거고, 사진을 찍은 실제 거리는 요 정도.

축사를 보기 위해선 광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과 짐수색을 해야만 했다.




줄을 따라가다보니 한참 뒤로 가야만 했다. 바티칸 일대는 이미 교황 성하를 뵈러 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사실 안도했다. 혹시라도 테러범이나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어쩌나 했는데, 요렇게 수색을 꼼꼼하게 한다면 나쁜 놈들을 걸러낼 수 있겠다 싶어서. 가방에 챙겨놓은 프링글스와 초콜릿을 와작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프링글스와 초콜릿은 비상식량으로 챙겨온 것들이었다. 나처럼 준비성 없는 사람이 비상식량이라니! 그동안 혼자 다니면서 음식을 챙기지 않고 쫄쫄 굶는 여행만을 반복해왔던 나 자신, 많은 발전을 이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프링글스를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을 때마다 날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하하! 마치 과거의 내 모습 같군, 당신! 다음번엔 당신도 비상식량을 챙기라고! 하하하!

아니 진짜, 당시엔 비상식량을 챙긴 내 자신이 넘나 사랑스러워서 셀프 머리 쓰담쓰담과 셀프 포옹을 할 정도였다. 난 여태까지 준비란 걸 모르는 똥멍청이었다고! 그런 내가 비상식량이라니, 나도 성장하고 있다고! 햐햐!

그렇게 단짠거리는 간식거리를 냠냠거리다 보니, 줄은 금새 줄어들었다. 나는 어떤 위험물품도 지니지 않은 선량한 시민1이었기에 수색대를 아무 문제없이 통과하고 산 피에트로 광장에 들어섰다.




이미 좋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난 한참 밀려난 자리에 서서 축사를 기다렸다. 어디서 교황님이 나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과 카메라의 시선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설마 저긴가? 저 창문이 열린 곳인가? 하나도 안보이겠는데...

발돋움을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곧 축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광장은 순식간에 거룩해졌다.







아앗...! 진짜 하나도 안 보이잖아!


그리고 이탈리아어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광장 이곳저곳엔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교황 성하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사람이란 동물은 화면보다도 실물 쪽에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나는 혹시 마네킹을 세워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불손한 상상 속에서 교황님께서 계시다는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1.5짜리 시력 가지고는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몽골인이었다면 교황 성하의 실루엣 정도는 볼 수 있었을 텐데. 흑흑.




실제 내 시야. 키 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음.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정말 좋은 말씀이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두 눈을 꼭 감고 있거나 하고 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참으로 그러하군 하는 표정을 짓곤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밍에 맞춰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참으로 좋은 말씀이야.




축사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교황 성하도 말씀을 마치고 들어가셨다.




신도들은 다들 익숙한 듯, 산 피에트로 광장에서 꾸역꾸역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어벙하게 있다가, 기둥 근처에서 사람들을 내보내고 있던 경찰에게 지금 나가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경찰은 축사가 끝났으니 광장에서 나가야 한다고, 광장 정리를 마친 뒤 이따 1시에 다시 오면 입장할 수 있다고 했다.

헤엥. 그렇구만.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사람들처럼 밖으로 나갔다. 뭔가, 뭔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먼 거리여서 아쉽긴 했지만, 사람들의 진지한 눈빛과 태도, 교황 성하의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말씀이겠거니 하는 말씀, 일시에 거룩해진 산 피에트로 광장의 분위기 등등이 기억에 남았다.





2.

1시까지 뭘 할까 고민했지만 역시 할 일은 점심 식사밖에 없다. 교황 성하께서도 신도들 밥 먹으라고 이 시간에 축사를 끝내주셨나보다.

구글로 근처에 문을 연 음식점을 찾다가, Restaurant "La Vittoria" (Via delle Fornaci, 15-17, 00165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 q45iz4Ec9px)에 가기로 했다.




거리에 야외 테이블을 내놓은 라 비토리아 레스토랑. 안쪽엔 자리가 꽉 찼길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1919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1919년이 왜 이렇게 눈에 익은가 했는데 3.1 운동 시작했던 해군.




우선 와인을 시켰다. 이탈리아 와인은 뭘 시켜도 평타는 쳐서 좋다. 진짜 술맛이 평타를 치는 건지, 맛 상관없이 분위기 좋아서 헬렐레하고 마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실망한 적은 없다.

내 옆자리엔 짧지만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이탈리아 가족들이 앉아 있었는데, 동양인 소녀 (예전엔 이 단어를 써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는데, 엊그제 약국에서 아줌마란 소리를 들은 이후로 죄책감과 무게감 속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혼자 와인을 홀짝거리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빤히 쳐다보더라. 술이 들어가서 기분이 좋아진 타이밍이었기에 웃으며 인사했더니, 신이 난 가족들이 내게 말을 걸어댔다. 허허허. 그래그래. 얼마든지 말 들어줄게. 맛있는 와인 덕분에 기분이 좋으니까!




안주로 시킨 까르보나라와 가지를 올린 브루스케타.

이탈리아에서 처음 먹어본 까르보나라는 내가 알고 있는 까르보나라랑 전혀 달랐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까르보나라라고 부르는 스파게티는 미국에서 변형시킨 것으로, 크림소스가 베이스인 반면, 본고장인 이탈리아식 까르보나라는 달걀 노른자와 치즈로만 만든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까르보나라는 물론 전자였고, 그래서 처음 음식이 나왔을 때 살짝 당황했다. 이토록 샛노란 면이라니.

이탈리아 가족들에게 이게 까르보나라가 맞다는 걸 확인받은 뒤 면을 후루룩 먹었다. 이탈리아 가족들은 나보고 맛있냐고, 괜찮냐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봤다. 맛없다고 할까봐 걱정하는 건가? 나는 면을 우적우적 씹으며 이 까르보나라는 맛있기 그지없고 이탈리아의 음식은 세계 최고라는 표정으로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올렸고, 이탈리아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그럴 줄 알았다고 했다. 하하. 유쾌한 가족들이야. 실제로 맛있기도 했다.

브루스케타, 까르보나라, 와인, 전부 다 합쳐서 14.5유로 정도 나왔다.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고 서빙하는 웨이터도 마음에 들고 옆에 앉은 가족들도 유쾌해서, 팁을 좀 많이 두고 나왔다. 술김에 좀 많이 둔 감이 있긴 했는데, 나중에 현금이 부족해 젤라또를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여기서 냈던 팁을 아주 조금 아쉬워했더랬다. 정말인지 현금은 충분히 뽑아다녀야 한다...





3.

까르보나라와 함께 와인은 참 쉽게도 목구멍을 넘어갔고, 그러다보니 알딸딸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됐다. 아까아 바티이칸에서어 겨엉찰 아저어씨가 이따아 구경을 오랬누운데에. 가아야지이!

나는 취한 채로 그 거룩한 산 피에트로 광장에 들어섰다.





어롸아? 무울이 시워언해애!

괜히 분수 앞에서 깝죽대며 콩콩 뛰어다녔다. 낮술은 무서운 거다.




브아티이카안에 와써여어!

혼자 또 이렇게 사진을 찍고 놀고 있는데, 어떤 한국인 어르신 두 분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봤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얼굴을 쑥 내밀고 왜 그러시냐고 물었고, 어르신 두 분은 엄머 깜짝이야 하고 놀랬다가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는 단체로 왔는데, 사람들을 놓쳤다, 줄서서 성당 안쪽에 들어갔었는데, 어쩌다보니 다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냐. 줄을 다시 서야 하는 것이냐...

어... 그건... 방법 없는데. 다시 들어가시려면 다시 줄을 서셔야 하는데. 내가 그걸 알려주자, 두 분들은 저 긴 줄을 다시 어떻게 서냐고, 그럴 리 없다며 가이드를 찾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아마 성당 안쪽에서 다른 관광객들을 데리고 다니고 있을 거여요. 얼른 다시 줄 서셔서 성당 안쪽으로 들어가시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두 분들은 안전바에 기대어 대성당만 바라보며 어떡해, 어떡해, 누구야, 쟤 누구 아니야? 여기 좀 봐봐, 어쩌구 하는 말만 반복하셨다. 음, 내가 더 도와드릴 것은 없는 것 같군. 힘내시라고 말하고 빠졌다. 허허. 결국 대성당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셨을까? 궁금하지만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나도 대성당 안쪽으로 들어갈까 했지만, 왠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쿠폴라 뷰는 로마 마지막 날 둘러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다른 날 오기로 했다. 그보다도 일단, 3시 반까지 입장 가능한 콜로세움부터 가야겠다. 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

역으로 돌아가는 길.

지도를 보다가, Ottaviano 역 근처에 에스프레소로 유명한 샤샤 카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요 근처인데, 술도 깰 겸 한 잔 마시고 가기로 했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Sciascia Caffè 1919 (80/a, Via Fabio Massimo, 00192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 EhvbdJMxN2Q2)





샤샤 카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카페랑은 다른 분위기의, 굉장히 바쁘고 분주한 에스프레소 바였다. 단골인 사람들만 쓰윽 와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쓰윽 받아 호로록 한 잔을 마신 뒤 빠르게 계산을 쓰윽 하고 가게에서 쓰윽 나가는, 그러고 그런 쓰윽거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내가 이 동네 사람이라면 샤샤 카페가 아니라 쓰윽 카페라고 부를 거야.

이 동네에선 완벽한 이방인인 나는, 그 쓰윽거리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했다. 그러나 가게 입구에 있는 언니와 바리스타 오빠는 그 바쁜 와중에도 동방의 한 소녀(!)의 우물쭈물함을 놓치지 않았고, 나는 친절한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할 수 있었다.




짠! 샤샤 카페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초콜렛이 발라져있는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

나는 초콜렛을 묻혀서 마시기 위해 에스프레소 잔을 사방으로 잡고 홀짝였다. 좀 정신 사납나? 옆으로 눈을 굴리며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자, 바리스타 오빠는 그렇게 먹는 게 맞다며 고개를 끄덕여줬고, 나는 그 끄덕임에 고무되어 열심히 에스프레소를 나눠 마셨다.

사실 음주 후 카페인은 몸에 좋지 않지만, 맛있는데 뭐 어때! 나는 에스프레소 잔을 금방 비우고, 밖으로 나와 계산을 했다. 문을 나서다 말고 뒤를 돌아봤는데, 계산대 앞의 가게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머쓱해서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자 가게 언니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시계를 보니 콜로세움 입장 시간인 3시 반까지 조금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으햐, 포로 로마노도 못봤는데, 이러다가 콜로세움도 못보겠어. 얼른 지하철 타고 콜로세오 역으로 돌아가자!




콜로세움에서 계속!





2018/09/24 21:17

겨울 유럽여행 (31) 로마 : 첫째주 일요일의 팔라티움 ├ 겨울 유럽여행

1.

로마 이틀차.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이 날은 2018년의 첫번째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특히 첫번째 일요일이라는 날은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매달 첫째주 일요일, 로마에서는 주요 박물관, 유적지, 미술관 등지에서 무료 입장 행사를 연다.

2) 매주 일요일, 바티칸에서는 교황 축사 행사를 연다.



내가 만약 로마에 2주 이상 머문다면 별다른 고민이 없었겠으나, 내게 주어진 시간은 1주 남짓한 시간 뿐이었고, 그래서 일요일은 이 날 하루뿐이었다. 덕분에 상당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바티칸에서 12시에 열린다는 교황 성하 축사 행사는 가야겠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모형으로만 봤던 그 분을 한번 정도는 실물로 뵙고 싶으니. 그리고 무료 입장 행사라면, 어디보자, 콜로세움-포로 로마노-팔라티움을 오늘 다녀오는 쪽이 절약되겠지? 그럼...

오전 (포로 로마노, 팔라티움) - 바티칸 (12시) - 오후 (콜로세움, 겨울엔 입장 3시 30분 마감)

좋았어, 이렇게 둘러보자!





2.

침대에서 대강의 계획을 세운 뒤, 벌떡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러 갔다. 숙소 조식은 훌륭한 편이었고, 커피 역시 훌륭했다. 뭐, 내가 캡슐 커피 기계에 익숙치 못해서 "내가 고장냈나봐" 어쩌구 발 동동거리며 호들갑 떠는 일이 있었지만, 예의 그 무뚝뚝한 호텔 직원이 성실하게 대처해줘서 잘 넘어갔다. 쩝.

조식으로 배도 빵빵해졌겠다, 계획대로 포로 로마노를 향해 슬슬 걸어갔다.

무료 입장이지만 티켓은 끊어야 한다. 사람이 얼마 없는 매표소에 얌전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앞에서 한 외국인과 직원이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의 실랑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왜, 왜 돈을 받지 않는 거야? 나는 통합권을 사고 싶다구!" / "아 글쎄 그거라고. 빨리 표 가지고 가라고!"

무료 입장의 날이라는 걸 모르고 깨끗하게 돈을 지불하고 싶어하는 관광객과, 다음 손님을 받기 위해 이상한 손님을 빨리 내쫓으려 용쓰는 직원의 싸움이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선 제법 웃긴 모양이라 계속 구경하고 싶었지만, 내 앞의 사람이 빠져야 내가 빨리 표를 받을 수 있기에 슬쩍 가서 상황을 정리해줬다. 관광객과 직원 모두 내게 고마워했다. 기쁘군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짜잔. 이게 첫번째 일요일 버프를 받은 0유로짜리 콜로세움-포로 로마노-팔라티움 통합 티켓이다!

많이들 알고 있는 팁이지만, 통합 티켓은 콜로세움보다 포로 로마노 쪽에서 사는게 빠르다. 아무래도 콜로세움이 더 인기가 있다보니 사람들이 콜로세움 매표소로 더 몰리더라.




자, 그럼 티투스 개선문으로 입장해볼까!





3.

포로 로마노 입구에 위치한 티투스 개선문. 그 왼편이 팔라티노 언덕 방면이다.




황궁 팔라티움의 입구에 티투스 개선문을 세운 황제가 도미티아누스였던가? 그의 의도대로 티투스 개선문에서 한번 감탄한 뒤, 팔라티움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팔라티노 언덕.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콜로세움이나 포로 로마노를 선호하는 까닭에, 팔라티움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연간 관광객 700만명의 관광도시 로마의 한가운데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만이 내가 느낄 수 있는 소리의 전부였다.





언덕을 올라 적색의 거대한 돌무더기 속을 거닐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한 때 가장 위대했던 제국의 말라버린 심장부에 들어와있다고. 이 분위기라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지금 신화 속에 들어와있다."

그 옛날 로마 시민들은 웅장한 팔라티움 황궁을 바라보며 '신들이 거주하는 궁전'이라고 표현했었단다. 당시에도 신화 속의 궁전이었던 팔라티움은, 그리고 로마 제국은, 아득한 시간의 거리 때문인지 내겐 역사보다도 신화처럼 느껴진다.







느린 발걸음으로 궁을 산책했다. 도무스 플라비아,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스타디움...

보통의 고대 유적들은 '자연이 잠식했다'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팔라티움은 도저히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었다. 자연이 잠식했다기보단 멋진 유적지에 정원이 갖춰진 모양새였다. 몇십 그루의 다듬어진 나무와 반듯하게 정돈된 풀이, 무너져가는 팔라티움 주변에 알맞게 갖춰져 있었다.

아마도 고고학자와 정원사가 합심하여 열일하는 모양이지. 로마를 먹여살리는 많은 유적들 중 손가락 안에 꼽는 녀석이니까, 관리를 잘해놓는 게 당연하다. 그 때문에 유적지 느낌보다도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당시의 내겐 가이드도 가이드북도 없었다. 그러나 아마 가이드가 있었다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며, 가이드북이 있었다해도 그 책을 읽지 않았을 거다. 간간히 놓인 유적의 표지판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이런 생각을 했다.


- 나는 지금 신화 속에 들어와있다.

- 이른 아침, 그 신화 속에는 나밖에 없다.

- 마침 훌륭한 고고학자와 정원수가 이 유적을 정리해준 모양새다.

- 이곳은 테마파크인가? 영화 세트장인가?

- 사진, 사진을 찍어야겠다!



팔라티움 유적은 당시의 내게 있어서 잘 다듬어진 테마파크, 혹은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enat,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세요. 당신을 위해 이렇게 준비를 해놨다고요! 후후후..."

...그래, 사진이다, 사진! 대체 이곳에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 때부터 타이머를 맞춰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먼 옛날의 위대한 로마 제국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동화시키는 작업이었다. 나는 몹시 진지했다!



▼ 아래부터는 포토그래퍼 enat, 모델 enat의 사진들임.







보세요 여러분... 21세기에 사는 enat이 1세기의 팔라티움 궁전과 교감하는 모습을...!





4.

꽤 이른 아침에 들어왔건만, 타이머를 맞춰놓고 내면의 세계에 푹 빠져 작품활동에 몰입해버린 바람에,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원래는 팔라티움을 쭉 보고 내려와 포로 로마노까지 둘러보려고 했으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바티칸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었다.

사실 당시의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는지 알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했다. 내가 대체 뭘 했길래 시간이 이렇게 부족한 거지?, 라고. (그리곤 나중에 집에 와서 무수한 사진들을 보며 시간이 부족할만 했단 걸 깨달았다고 한다)

하여간 포로 로마노는... 뭐... 이번엔 못보려나...

위대한 돌덩이들이 가득한 그 곳. 팔라티노 언덕에서라도 쭉 둘러보고 가야겠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곤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보이는 파르네세 정원의 전망대로 향했다.




정원에서 끄트머리 쪽(포로 로마노 방향)으로 가면,





고대 로마의 정치적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번엔 좀 차근차근 둘러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누구누구가 카메라 들고 뻘짓하느라 여유 시간이 사라졌다. 그래도 이번엔 공부하고 온 게 아니라서 별로 아쉽지 않다. 다음에 책 많이 읽고 다시 보자. 안녕!





5.

지하철 역으로 가기 위해, 다시 티투스 개선문 쪽으로 돌아나왔다.

사진 모드 ON인 상태여서였을까? 출구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문득 출구보다 위쪽으로 올라가 콜로세움이 보이는 방면으로 빠지면 멋진 뷰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쪽으로 슬금슬금 올라가봤다.




오! 콜로세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공간에 몇 개의 단과 계단이 있어, 카메라 타이머 맞춰놓고 설치하기도 편했다. 심지어 그 많은 관광객들도 이쪽 공간은 잘 모르는지, 인원수가 적었다. 우와, 이곳은 나 같은 나홀로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인 것이 틀림없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카메라 타이머를 설치했고, 아까 팔라티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행자 enat의 모습을 마음껏 카메라에 담았다. 이번에도 포토그래퍼 enat, 모델 enat이로다!




세상을 다 가져라, 긍정으로 가득 찬 후리한 여행자의 앞모습!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모세 연출 가능한, 분위기 있는 선지자의 뒷모습!




한 컷 찍기까지 많은 무릎을 갈아 넣어야하는 발랄한 점프샷까지!


...


됐다.


오늘 할 거 다했다!


로마에 이거 찍으려고 온 것 같다!!


이제 숙소에 가서 쿨쿨 자도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진들이었다.





6.

...그렇다고 진짜 자러 가면 안된다. 오늘은 해야할 일이 매우 많다!

빨리 바티칸으로 가야하는데, 콜로세움이랑 사진 찍는다고 또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얼렁 지하철 타고 교황님 뵈러 가자고!





교황님을 만나러 간 바티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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