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4 12:48

쿠바 배낭여행 (18) 별이 쏟아지던 비냘레스 ├ 쿠바 배낭여행 (2013)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저녁.

밖으로 나왔더니 어느새 그 미칠듯이 타오르던 해는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해가 떨어졌으니 조금 시원해질만도 하지 않나 싶었지만, 후덥지근한 공기는 여전했다.




비냘레스 마을에서 그나마 중심가라 할 수 있는 대로로 걸어가는 중.

한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까사에서 중심가까지 걸어오는데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블럭 이상 걸었는데 아무하고도 인사를 나누지 못하다니! 길거리를 걸어가면, 그냥 걸어가는 거다! 비냘레스 사람들은 '치나'가 궁금하지도 않나? 왜 말을 안걸지?

물론 이런 무관심이 일반적인 것이겠고, 여행오기 전 나도 이런 쓸쓸한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지만, 이미 아바나에 물들어버린 나로썬 이 시골마을의 무심함이 허전하고 슬펐다. 왜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나요. 왜 치나, 올라, 린다, 보니따 따위의 말들을 해주지 않는 건가요.

여행 일수로만 4일째. 처음으로 비냘레스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지지고 볶고 하긴 했지만 아바나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많은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스토리 말이다. 이 조용한 시골마을엔 그게 없다. 비냘레스야, 나 많이 외로워, 진짜 외롭단 말이다!

나중에 이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깨달은 건데, 이건 비냘레스 사람들이 유난히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성격을 가졌다기보단 내 문제였을 게다. 숙취에 의기소침해진 마음에, '행복한 얼굴'이 아닌 누군가 다가오기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그걸 깨닫기엔 당시의 나는 너무 센티멘탈했고, 그저 비냘레스가 날 외롭게 만든다고만 생각했다...

여하간 결론은, 일기장에 써있는 문장을 그대로 베끼자면, 당시 이곳 비냘레스에서 아바나가 지독하게 그리웠다는 거다. 젠장, 내가 아바나를 그리워하다니, 젠장 젠장!




그 빌어먹을 아바나를 한없이 그리워하며 마을 중앙 공원에 앉았다. 공원 한쪽에는 교회가 한 채 서있었다.




이 교회는 아까 낮에 택시투어가 끝난 뒤에도 구경했던 곳이었다. 교회란 곳은 언제든 가서 앉을 수 있고, 언제든 가서 푸념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내부는 요런 모양. 나무로 된 창문과 의자, 소박한 천장이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더라. 

뭐 여하간 낮에도 들어갔던 곳인데 또 들어가기는 귀찮았다. 교회 구경은 됐고, 뭘 할까? 가만히 앉아있었더니 심심하다.




할 일도 없고 외롭고 따분한 밤의 여행자가 할 일은 뭐... 



술이나 한 잔?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게 하나 있었다. 한여름의 산골마을 야외 테이블에서 칵테일을 천천히 마신다는 것은 모기에게 좋은 혈액 공급원이 되어준다는 걸 의미했다. 난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려가며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젠장! 뭐 되는 일이 없네!

결국 자리에서 금방 일어났다. 어딜... 어딜 가지? 거리를 방황하던 어린양은 그나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 중앙의 그 교회로 들어갔다. 안녕 주님. 갈 곳이 여기 밖에 없네요.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신부님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동네 아줌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는데, 한국의 작은 교회에서 열리는 성경공부? 같은 모임과 분위기가 매우 흡사했다. 신부님이 성서를 여기저기 펼치며 이야기를 하면, 아줌마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뒷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동감하는 표정을 짓고 싶었는데, 그 모임의 모든 대화는 스페인어로 이루어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에잉.

교회 안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설교를 듣고 있는데,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개 짖는 소리는 신부님의 목소리를 집어삼켰고, 아줌마들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문 쪽을 계속 돌아봤다. 문 쪽에 제일 가까이 앉아있던건 바로 나... 어... 음... 내가 짖는 거 아니에요. 그만 좀 돌아봐요...

절대 어색해서 그런 건 아니고 다들 방해되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밖으로 나가봤다. 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보이네. 그냥 집에 있는 흰돌이 부르듯 '쪼쪼쪼' 하고 혀를 차자, 어둠 속에서 웬 개 한 마리가 뛰쳐나와 날 덮쳤다.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 했지만 뭐 일단 균형은 잡았다. 개는 날 보더니 꼬리를 흔들며 온갖 아양을 떨었다. 뭐지 이 귀여운 개는? 먹을 게 있었다면 나눠줬겠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조금 미안해져서 그냥 쓰다듬어줬더니 눈을 감고 엄청 느끼더라. 사람 손을 많이 탄 개인가? 하여간 공원에서 둘이 발발거리며 놀았더니 외로움 어쩌구 하는 감정은 금새 잊게 됐다. 아, 즐겁다.

한숨 돌리려고 벤치에 앉았는데, 벤치까지 따라온 개가 내 앞에서 몸을 배배 꼬며 누워서 하늘을 응시했다. 뭐가 있길래? 나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와... 와! 별천지다!

이건 그린 게 아니라 똑딱이로 노출 10초 이상 준 뒤 땅바닥에 내려놓고 찍은 사진을 포토샵으로 곡선 대비 조절 겁나 크게 해서 만든 사진이다! 사진보다 더 별천지! 어둠에 익숙해진 뒤엔 은하수까지 봤다니까!




그 뒤론 사진찍기 삼매경이었다! 개와 이곳저곳 어두운 곳을 돌아다니며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별 사진을 찍었다. 물론 업로드한 사진은 후보정 겁나 해댄 사진임다. 검은 부분만 찍어서 대비 미친듯 올리고 깨진 픽셀 스무스하게 잡아준 사진임.




쿠바 깡시골의 별들에 취해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오래 서있었더니 목근육이 엄청 땡겼다. 목운동 좀 해주고, 개와 조금 놀다가 다시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목 운동 좀 해주고... 그렇게 몇십분이나 흘렀을까. 슬슬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그 때까지 나와 놀아주던 개와 작별인사를 했다. 다행히도 개는 내가 가려는 모션을 취하자 다른 건물로 깡총깡총 뛰어서 들어가더라. 거기가 집이었나? 흠, 여튼 별탈없이 까사로 돌아왔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쏟아지던 별빛의 감동을 잊지 못한 채 일기를 쓰다보니 출출해졌다. 밤중에 주전부리 할 거 없나 가방을 뒤지는데 초코바가 나왔다. 쿠바 오기 전, 토론토에서 무비몬이 싸줬던 초코바였는데, 쿠바 더위에 이기질 못하고 녹아버려 그 형체가 심히 괴이했다. 그래도 이 시간 이 장소에선 심적으로나 식적(?)으로나 정말 소중한 초코바였다. 대충 북쪽 방향을 향해 "무비몬 땡큐"를 외친 뒤 초코바를 한입씩 베어물며 음미했다.

입도 달달하니 행복해졌고, 일기장도 가득찼고, 이제 다음 스케줄을 정리해볼까.

엎드린 자세로 론리플래닛을 넘겨보다가 잠들었다.


비냘레스 둘째날에서 계속!






덧글

  • 키르난 2014/02/14 14:35 # 답글

    이번 편은 고요하고 거룩한...(....)
    저도 별 보는 것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지금껏 별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어요. 나이 들어서는 도시에서만 지내다보니 별이 안 보이더라고요. 크흑.;ㅂ;
  • enat 2014/02/25 06:21 #

    저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보니 별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ㅅ;
    그런 저에게 비냘레스는 신세계였죠. 은하수가 보이다니... 은하수가!!!!
  • ㅎㅅㅎ 2014/02/14 20:31 # 삭제 답글

    와 별천지..
    똑딱이로 저정도 보인다면
    실제 눈으로봤을땐 굉장했을것 같네요..
    고향인 대전은 도시라 잘 보이지않는게 안타까워요ㅇㅇ

    개그림 개귀엽
  • enat 2014/02/25 06:23 #

    은하수 봤다니까 은하수!!!! 대박 시골 비냘레스 ㅠㅠ 가로등 불빛이 있는데도 저정도로 찍히는걸 보면 대박이지
  • 라비안로즈 2014/02/14 20:31 # 답글

    고요한 여행지였네요.. 아바나가 그만큼 소란스러웠다는 증거 아닐까 하네요 ㅎㅎ
    오랫만에 조용한 여행을 즐기셨다니 그땐 외로우셨겠네요
  • enat 2014/02/25 06:25 #

    아바나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한 마을이었어요. 으으 아바나는 너무 절 귀찮게 했어...
    근데 그 귀찮은 참견이 없으니까 외롭고 쓸쓸하고 그렇더라구요. 쿠바라는 나쁜 남자가 절 꼬시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옆에서 막 잘해주다가 모른척 하고 그런!!!
  • 찬영 2014/02/15 15:01 # 답글

    별이빛나는 비냘레스의 밤이네요 !! ㅋㅋ 멋진사진 좋습니다.
  • enat 2014/02/25 06:26 #

    직접 눈으로 본 별은 저거보다 더 많았는데! 그래도 똑딱이로 그 분위기라도 대충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ㅋㅋㅋ
  • 민물 2014/02/23 19:16 # 답글

    올해는 꼭 쿠바를 가려고 준비중인 상황에서...정주행하면서 몰입해서 읽었네요
    다음 편 기다리고 있습니다^^
  • enat 2014/02/25 06:28 #

    몰입정주행!!! 이런 잡문을... 감사합니다.
    여행 가시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포스팅에 담아보도록 하죠... 음... 어... 사실 빨리 포스팅할 자신이 없군요ㅋㅋㅋ 뭔가 궁금한 거 있으시면 덧글로 달아주세요. 아는만큼 알려드릴게요!
  • 엘에스디 2014/04/05 12:53 # 답글

    으와와와아 별!!! 별 별+ㅁ+!!///// 보정사진이라 해도 저렇게 반짝반짝 무수하고 이쁜데 실제의 하늘은 어땠을까 상상하면 정말 감탄사만 연발하게 될 것 같아요ㅠㅠ!!! 별 보는 거 정말 좋아하는데 으으으 은하수까지 보셨다니 제 로망인ㅠㅠ!!!!///////// (<-) 함께 하신 강아지도 귀여운 것 같고..>_<)/// 아 저도 별 보러 가고 싶네요..... 은하수.......ㅠ////ㅠ
  • enat 2014/04/08 18:00 #

    은!하!수! 진짜 눈을 어둠에 익숙하게 만든 다음에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아, 저게 은하수구나' 싶은게 빤히 보이더라구요. 내가! 내가 은하수를 보다니! 사진으로만 보던 은하수를 보다니! 헝헝 믿기지 않아서 계속 쳐다보다가 목 아파서 결국은 끙끙댔지만, 여튼 감동이었어요 ㅋㅋㅋㅋㅋ
    근데 아무리 멋진 밤하늘이라도 혼자 봤으면 되게 외로웠을것 같아요. 애교많은 강아지 덕분에 외로울 새 없이 잘 구경 했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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