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5 14:14

쿠바 배낭여행 (30) 가이드북이 길을 잃으라고 하는 도시 ├ 쿠바 배낭여행 (2013)



쿠바의 수도 아바나 Havana 와 제 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 Santiago de Cuba 를 하나의 선상에 둔다면, 카마과이 Camaguey 는 그 2/3 지점에 위치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뭐, 서울과 부산 사이에 있는 대구 정도라고 보면 되나.

내가 다음으로 가려고 하는 곳이 바로 이 위치적으로 설명하기 어정쩡한 곳, 카마과이라는 도시다. 사실 산티아고 이후의 일정을 짤 당시 다음 도시에 대해 엄청 고민했는데, 론리플래닛에서 카마과이를 수식하는 이 문장들을 발견하자마자 카마과이를 제외한 모든 후보 도시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Welcome to the maze'

'Get lost!'

'A labyrinth of narrow streets'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이길래 '미로에 온 걸 환영해' 라던가, '길을 잃어버려!' 라던가, '좁다란 골목길의 미궁' 따위의 추천사를 마구 써놓은걸까! 궁금해! 궁금하잖아!

그리고 도시에 도착해서 좀 걷게 되자 카마과이를 묘사하는 그 모든 문장들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일단 이야기는 산티아고로 돌아간다.




산티아고에 도착한지 넷째날이 되던 아침, 카마과이로 향하는 비아술 버스에 탔다.

그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에어컨 바람은 여전했지만, 지난 날의 어리석었던 나와는 결별한지 오래다! 난 바람막이 내피와 외피를 장착하고 긴바지 플러스 양말과 운동화로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반팔을 입고 오들오들 떨거나 쪼리를 신은 채 배낭을 끌어안고 있는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 승리감을 만끽했다.




한두시간 정도 달리던 버스는, 탑승객들에게 30분간 끼니라도 때우고 오라는 운전사 아저씨의 말과 함께 멈춰섰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 그렇지, 끼니 때엔 끼니를 해결해야지. 나가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홀긴 Holguin 이란 도시란다.




일단 버스에서 내리긴 했는데... 끼니를 때우려 해도 여기가 뭐 어딘지 알고 돌아다니나.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내 식탐 본능을 믿고 무작정 걷기로 했다.




본능은 대단했다. 난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페소를 받는 야외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대 상인들의 지대한 관심 - 동양인이다! 쓰읍, 치나! 여기 봐! - 을 받다가, 날 보고 싱긋 웃기만 하는 아저씨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때로는 적절한 무관심이 여행자들에겐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메뉴 중 제일 비싼 걸 시키니 고기와 야채, 밥, 과일 등등이 엄청 푸짐하게 나왔다. 뭐, 비싸봤자... 다 합쳐서 얼마였더라... 10페소? 20페소? 페소로 사용하는 건 경비에 포함을 안시켜서 (환산해봤자 한화 1000원 남짓하는 가격이니) 기억이 잘 안난다. 파리가 쉴 새 없이 달려들었던 것, 근처에 있는 개가 내 주위를 빙빙 맴돌았던 것 등등을 뺀다면 괜찮았다.




그릇을 깨끗하게 싹 비운 뒤,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속이 든든해서 그런지 에어컨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버스 아저씨의 선곡에 맞춰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다가, 창문에 기대어 잠들었다.




까마과이! 까마과이! 하는 소리에 깨어나 얼른 내렸다. 여기가 종점이 아닌지라, 내리 쳐잤다면 다른 도시에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얼떨떨한 정신으로 간신히 내리고보니 터미널 외관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어라 여기... 그렇지, 아바나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야간 버스에서 잠깐 내렸었던 그 버스터미널이잖아! 그 때 거기가 여기였었어, 여기.

괜히 반가워져 실실 웃으며 터미널 출구를 찾았다. 캐리어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경찰이 지키고 있는 터미널 출구를 발견했다. 웬 경찰? 무슨 일이 있나? 경찰만 보면 잘못한게 없어도 혼자 쫄게 되는 평범한 시민인지라, 경찰의 눈길을 피해가며 조금 쭈뼛쭈뼛한 채 터미널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자마자... 왜 경찰들이 하릴없이 터미널 문앞이나 지키고 서있는지 알게 되었다.

문 밖은 그야말로 삐끼들의 천국이었다!

온갖 전단지와 광고지를 여행자 얼굴에 들이밀며 "여기서 자! 여기 좋아!" , "투어 시켜줄게! 이거 봐봐!" 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수 없었다. 경찰들은 삐끼들이 터미널에 들어오지 못하게 제지했고, 내가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더 이상의 통제는 불가능해보였는지 아예 뒤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 앙대... 다시 들어가게 해주세요... 어쩐지 이 동네 숙소란 숙소, 식당이란 식당, 투어란 투어는 다 돌아보게 될 것만 같다...

그 때, 패닉에 빠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냐, 어디냐고!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삐끼들 무리 뒤에서 내 영문 이름이 적힌 종이가 팔락이는 게 보였다. 저기다! 뭔가 저기에 가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 이름의 주인공이란 강렬한 의사 표시를 하며 그 쪽 방향으로 걸어가자,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던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내 주변 삐끼들을 물리게 했다. 사, 살았어!

내 이름을 들고 있던 아저씨 : 리! 리!
나 : 내가 리야!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내 이름을 들고 있던 아저씨 : 까사! 전화! 택시!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까사 주인이 내가 올 시간을 예상하고 택시를 불러 보낸 것 같았다. 음... 과한 배려인걸... 하지만 덕분에 살았으니 복잡하게 여기지 말고 그냥 감사히 여길까.

택시기사 : 가자, 너네 까사로!
나 : 렛츠 고! 나 씻고 싶다 빨리!


가는 동안 택시기사는 쉴 새 없이 카마과이의 명소, 명물에 대해 설명했지만, 스페인어라 뭔 소린지 하나도 못알아들었다.

택시를 타고 얼마 걸리지 않아 까사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4쿡(=한화 4000원)이라며 손을 내미는 택시기사. 하아, 뭔 택시비가 한국보다 더 비싸냐. 내가 잡은 택시였다면 곧바로 네고에 들어갔겠지만, 까사 주인이 불러준 거라 그렇게는 못하겠고... 젠장, 그냥 냈다.




까사에선 노부부가 나와 날 반겨줬다. 돈을 모아 늘그막에 펜션 사업을 하는 부부 같았다.

할아버지 : 리! 올라! 잘왔어!
나 : 아, 오, 올라!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영어를 쓸 줄 아는 분이었다. 집을 좀 구경했는데, 이곳저곳에 책도 많이 꽂혀있는게 학식이 있는 분 같았다.

할아버지 : 저기 밖에 정원이 있어! 나가봐!
나 : 어, 어? 정원?





짐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반강제로 끌려나간 정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참 훌륭한 정원이 아니냐며 흐뭇하게 웃었고, 나도 그 웃음에 맞춰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 : 이 정원은 너를 위한 거야! 언제든 여기서 쉬어!
나 : 어? 어... 고마워요...


이상했다. 할아버지는 말이 통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상냥한 분이었는데... 묘하게 피곤했다. 어,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만약 결혼을 해서 남편의 할아버지 댁에 방문한다면 이런 기분이 들겠구나... 하는... 느낌? 아아, 결혼을 안해서 느낌에 확신이 없다. 여하간 자꾸 이상하게 피곤한 느낌이 들어, 대충 짐을 푼 뒤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 : 어디가! 우리 밥도 해줄 수 있고, 정원도 좋고...
나 : 도, 도시 구경 갈 거에요!
할아버지 : 그렇구먼! 그럼 잘 다녀와!
할머니 : 열쇠 줘야 우리 없어도 들어올 수 있잖아요. 자, 그리고 여기 널 위한 쥬스가 있어.
할아버지 : 아이쿠, 그렇지. 열쇠 줄게. 쥬스 마시고 있어봐. 찾아갖고 올게.
나 : 어... 네....


뭐지? 뭔가 자꾸 피곤한 느낌이다.




쥬스를 한 컵 원샷한 뒤, 열쇠도 받고, 마침내 미로 같다는 카마과이의 거리로 나왔다. 처음엔 뭐가 미로 같다는 건지, 론리플래닛을 쓴 사람들은 방향감각이 떨어지는 건가, 미로라는 말을 붙이려면 베네치아 수준은 되야하는 거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길이 자꾸 휜다. 휘어진 길을 걷다가 양갈래 길이 나와서 한 곳을 선택해서 걷다보니 방향에 자신이 없어진다. 음, 나 그래도 방향감각에 자신있는 편인데... 길이 자꾸 이상해지네.




결국 나 같은 여행자들을 위해 붙여놓은 안내판이 아니면 걸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초행길, 초행길이라 그래. 딱 한 번만 걸어놓으면 다 기억하니까... 으음...




뭔가 특색있는 건물이라도 있다면 길 찾기 쉬우련만, 왜 저렇게 비슷한 집들만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람. 길을 빙글빙글 도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들이 비슷했다. 이쯤에서 슬슬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얼씨구? 이번엔 다섯 갈래 길이란다.




요렇게 세갈래가 있고,




요렇게 두갈래가 있네.


다섯 갈래 길에서 완전히 멈춰버린 나. 초행인 길은 보통 머릿 속에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며 걷는데, 카마과이를 걸으면서 그 능력을 완전 상실했다. 아니 뭐, 론리가 Get lost 라고 하긴 하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가늠할 수 있어야 하잖아.

삼십분 남짓한 산책으로 알게 된 카마과이. 왜 미로라 불리는지 알겠다.

그 다섯 갈래 길에서 일기장을 꺼내 미친 듯 펜을 굴렸다.



<카마과이가 미로인 이유>

1. 골목이 좁다.
2. 근데 벽은 높다.
3. 집구조가 엇비슷하다.
4. 철창문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마저 엇비슷하다.
5. 개똥 트랩이 길거리에 산재해있어서 그 쪽에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6. 좁은 골목인데도 차가 많이 다녀 자꾸 멈춰야 한다.
7.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는 예삿일이다.
8. 특색있는 건물이 적다.
9. 게다가 언덕도 없다. 완전 평지.
10. 길 방향이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게 아니라 북북동, 남서서, 막 요딴 식이다.
11. 게다가 잔뜩 휘어져있다.
12. 지도? 물론 나에겐 론리플래닛 지도가 있다. 하지만... 지도가 너무 작아...
13. 나는 지도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다...
14. 그래서 여긴 어디 난 누구?






다시 일기장을 집어넣은 뒤, 다섯 갈래 길 중에서 제일 그럴 듯해 보이는 갈랫길로 걸어갔다. 나중에 까사로 돌아가 자기 전에 읽은 론리플래닛에 의하면, 앞에 보이는 성당은 카마과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급 성당이며, 저 일대는 전부 역사지구라나.




성당 앞 광장, 카르멘 광장에는 뭔가 동상들이 잔뜩 세워져있었다. 뭐지? 예전에 인천 수도국산 박물관 가는 길이 요랬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동상들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사진만 찍었다.




그리고 랜드마크급이라는 카르멘 광장의 성당.




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다행인건지 아이들은 낯선 동양인보다 공놀이에 더 관심이 있어보였다.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이유도 없이 사진만 찰칵거리러 여기 왔나? 산티아고에서 가이드 존에게 너무 길들여졌나? 여기가 어딘지마저 파악을 못하다니, 대체 뭐하는 거야, 여행자 리!

혼자 광장에 멍하니 서서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내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너 아까 보니까 저 동상 사진 찍고 있던데, 여행자야?
나 : 응?


고개를 돌리자 피부가 까무잡잡한 레게 머리의 청년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 : 혹시 저 동상들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아? 저 동상들은 카마과이 사람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건데...
나 : 모르겠어! 알려줘! 그리고 여긴 어디야? 이 도시 너무 어려워!


너무 절박하게 말했나? 하지만 이 청년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정말 카마과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갈 것 같았다.

??? : 하하하! 진정해, 진정해. 일단 헤럴드라고 불러.
나 : 난 리.


헤럴드는 카마과이에 대해 자기가 알고있는 대로 설명해주겠다며 나보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좋아, 일단 저 의미를 모르겠는 동상부터 가보자고!



헤럴드의 카마과이 속성 공략 가이드는 다음에 계속!





덧글

  • 키르난 2014/06/05 15:25 # 답글

    Quest. 카마과이의 주요 랜드마크를 모두 찍고 까사로 돌아가시오.
    머리 위에 창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 않을지...; 저도 길 잘 찾아 다니는 편인데 저러면 못 찾습니다. 이정표가 될만한 것이 하나도 없네요. 게다가 랜드마크가 저렇게 작게 보이면 기준을 잡을 것도 없고..ㄱ-; 헷갈린다는 북촌 한옥길도 내리막/오르막의 기준이 있는데다가 멀리 종로의 건물들이 있으니 그나마 다니기 쉬운데 말입니다.;;;
  • enat 2014/06/14 03:56 #

    랜드마크는 커녕 까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가 문제였는데 다행히도 공략본_헤럴드.txt를 찾았습니다.
    북촌 한옥길은 이에 비하면 이지 모드 ㅠㅠ 보통 높게 짓는 성당도 왜 이 도시에선 이렇게 낮게 지어진건지, 주택가에 가려져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난 랜드마크ㅋ' 라고 하니 조금 황당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카마과이 이콜 공략본 없인 절대 공략 못할 도시ㅠㅠ
  • kate 2014/06/19 16:35 # 답글

    가끔 헤매는 여행기도 보는 사람은 재미있어요..
    공략본 발견하셨다니..
    역시 베테랑여행자 ㅎㅎ
  • enat 2014/06/20 13:43 #

    그 타이밍에 공략본(?)이 걸어나올줄은!
    아, 진짜 헤럴드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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