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9 03:27

쿠바 배낭여행 (33) 카마과이에서 만난 사람들 ├ 쿠바 배낭여행 (2013)



쿠바 제일 재래시장을 탐방하고 다시 타운으로 돌아가는 길.

쪄죽을 것 같은 더위에 잠시 아무 마켓에나 들어왔다. 이런 저런 생필품을 파는 대형 마켓이었는데, 쿠바에 와서 제대로 물건이 채워진 대형 마켓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마과이는 그럭저럭 잘 사는 동네인가 본데.




큰길을 따라 돌아가다가 엄청 큰 건물을 만났다. 창문으로 내부를 살펴보니 학교 같았다.




역시 쿠바에 와서 이렇게 웅장한 규모의 학교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에,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며 지나쳤더니, 학생 한 명이 나보다 더 신기한 얼굴로 쫓아와서 내 앞을 가로막곤 말을 걸었다.

나 : ????
학생 : 포토! 포토!


아바나에서 교복 입은 꼬마애 한 번 찍어줬다가 1쿡 달라는 소리 듣고 좌절했던 경험이 있기에,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여태까지 만난 카마과이 사람들은... 어제 만났던 헤럴드나 시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그 쾌활함과 밝음이... 친절함을 담보로 돈을 요구할 것 같지는 않은... 하아, 좋아, 한 번 믿어볼까.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줬더니, 그 학생, 걱정이 무색하게도 경쾌하게 고맙다고 외치곤 다시 자기 친구들한테 돌아갔다. 학교 내에서 말썽쟁이, 혹은 기인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건지, 다른 학생들은 그 학생을 둘러싸고 배꼽을 잡아가며 웃었다. 아, 그냥 저러고 노는 거였구나. 희한하게 생긴 동양인이 지나가니까 신기해서 말 걸어보고 카메라 들고 있으니까 사진 찍어달라고 한 거였어. 으음, 다행이다.

아바나에서의 일들이 트라우마가 된 건가. 자꾸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는게 미안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그랬다.




아티보니코 강을 건너 타운으로 돌아가기 직전, 엄청 큰 공원을 발견했다. 이름은 카지노 캄페스트레 Casino Campestre.

처음 론리에서 저 이름을 발견했을 때는, 무슨 카지노가 있나, 쿠바 사람들 빼먹을 돈이 어딨다고 카지노를 지었나 등등을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공원 이름이 카지노 캄페스트레였다. 쿠바에서 제일 큰 공원(물론 도시 내에 있는 공원 중)으로 유명하다나.

어쩐지 카마과이는 '쿠바 제일' 이란 단어가 붙는 곳이 많은 것 같다. 쿠바 제일 재래시장이라던가, 쿠바 제일 도심 공원이라던가...




공원 규모는 론리 플래닛에서 말한 대로 엄청났다. 걸어도 걸어도 반대편 공원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고, 밋밋하게 잔디밭만 있는 게 아니라 각종 조형물과 식물들이 공원 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공원의 나라 캐나다로 돌아온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벤치에 앉아서 이 한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앉지는 못하고 그냥 공원 내를 서성였다. 왜 앉지 못했는지는 다음 도시에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겠지...




계속 걷다보니 마세오 광장과 마세오 길이 나왔다. 이 근처에 어제 헤럴드와 갔던 레스토랑이 있을텐데...




찾았다! 1514 레스토랑!

하지만 지금은 밥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뭔가 마시고 싶은데... 살짝 고민되는 표정으로 레스토랑을 바라보고 있자, 입구에서 손님들을 안내하는 웨이터가 나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만 스페인어라 못알아들었고, 난 그냥 무언가를 홀짝홀짝 마시는 포즈를 취했다. 웨이터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며 레스토랑의 맞은편 입구로 날 이끌었다.




그곳은 에어컨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였다. 아아, 시원해! 살 것 같다!

바텐더로는 듬직한 아저씨와 예쁜 언니가 일하고 있었다. 술값을 물었더니 페소를 받는단다. 그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을 500원, 1000원 내고 마실 수 있는 거야!? 좋았어! 오늘 여기서 한 번 취해보는 거야!




시작은 당연히 모히또.

모히또를 주문하자 바텐더 아저씨는 이가 드러나게 씨익 웃었다. 움찔하는 내 앞에서 민트를 꺼내더니 컵 속에 뿌린 뒤 마구 빻기 시작했다. 으으, 그래, 모히또의 생명은 민트지. 더 빻아, 더 빻아!




칵테일을 다 만들고 난 뒤 민트 하나를 더 꺼내더니 컵에 쏙 꽂아주는 아저씨. 맞아, 이게 모히또지, 이게 모히또야!

사실 바를 열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손님은 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바텐더들은 나만을 위해 움직였다. 뭔가 특별 대접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히또가 쭉쭉 들어갔다.




모히또를 한 잔 더 시켜서 마시고 있는데, 손님 둘이 들어왔다. 둘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시켰고, 이번엔 바텐더 언니가 그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궁금해서 남은 모히또를 원샷한 뒤 똑같은 걸 달라고 부탁했다.




바텐더 언니가 아저씨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내놓은 그것, 바로 쿠바 리브레였다.

좋아 좋아, 페소 덕분에 오늘 쿠바 칵테일의 양대 산맥을 실컷 마실 수 있겠구나!




이른 시간대에 젊은 치나가 와서 계속 술만 마셔대니까, 바텐더 아저씨와 언니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손을 내젓는데, 어엉, 진짜 머리가 띵하다. 빈 속에 마시니까 훅가네 이거.

두 바텐더는 나에게 뱃속에 술이 아닌 음식을 넣으라고 권유했고, 이 바 옆에 훌륭한 페소 레스토랑이 있단 걸 기억해낸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더 아저씨가 불러온 잘생긴 레스토랑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1514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으윽, 여긴 에어컨이 안나와... 덥다...




어떻게든 메뉴를 보려고 안잡히는 초점을 잡아가며 간신히 시킨 음식들. 꾸역꾸역 뱃속에 밀어넣다보니 술이 깼다.

아, 잘 먹고 잘 마셨다. 난 친절했던 바텐더와 웨이터에게 인사를 건넨 뒤 가게를 나섰다. 카마과이의 1514 레스토랑은 레알이야, 레알.




배도 부르고, 취기도 적당히 오르고, 기분이 좋아진 채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 먼 데 안가고, 어제 가봤던 곳을 가보기로 했다.




기억을 더듬어 걷다보니, 카마과이 명물(?), 뜬금없는 골목 오거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길들이 어떻게 통하는지 대충 아니까 괜찮다!




오거리에서 가운데 길을 골라 걸었더니 한낮의 카르멘 광장 도착!

사실 날씨는 푹푹 찌고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술기운으로 걸어다녔다. 땡큐 모히또, 땡큐 쿠바 리브레.




어제는 저녁나절에 간 거라 광장만 구경했는데, 오늘은 요 성당 안에도 들어가 볼거다. 성당의 이름은 카르멘 성모 성당 Iglesia de Nuestra Senora del Carmen.




아담한 성당 내부.

보통 성당 같은 건물에 들어가면 싸-해지는 듯한 시원함이 있는데, 이곳은 시원하지 않았다... 덜덜거리는 선풍기를 보며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엘 코브레에서 봤던 라 카리다드, 은총의 성모 성상이 여기 카마과이에도 있었다. 쿠바의 수호성인이니 쿠바 어딜가도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원판(?)을 보고 난 뒤 처음으로 보는 거라 감회가 남달랐다.




적당히 카르멘 성모 성당과 카르멘 광장을 둘러본 뒤, 어제 국기 게양식을 봤던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 공원 쪽으로 이동했다. 공원 주변을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데, 뭔가 익숙한 풍경이 눈에 밟혔다. 책과 책상과 사람... 오, 도서관이다!




들어가도 되나? 외국인인데? 원래 도서관은 모두를 위한 공간이니까 괜찮겠지! ...쿠바도 그렇겠지?

좀 어색하게 밍그적거리며 들어갔지만 다들 흘낏 쳐다보기만 할 뿐, 제지하거나 출입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흠, 역시 도서관은 만국 공통 모두를 위한 공간이군. 안도하며 1층 도서실을 구경하는데, 섹션이 쿠바 혁명을 이끈 영웅들 이름으로 나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 참 희한한 구분법이네.




책만 좀 둘러보다가 나가려는데, 어떤 한 아저씨가 날 붙잡았다.

아저씨 : 헤이, 치나. 도서관엔 어쩐 일이야!
나 : 코리아나야. 그냥 구경왔어.
아저씨 : 난 여기 직원이야.
나 : 그렇구나.
아저씨 : 난 지금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야. 영어 연습하고 싶은데 여긴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근데 넌 영어 쓸 줄 알잖아. 혹시 내가 영어 쓰면서 도서관 구경 시켜줘도 될까?


어라, 이 패턴...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인데. 영어를 연습하겠다며 다가와 돈이고 술값이고 뜯어간 아바나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 : 아, 아니... 뭐...

하지만 이곳은 카마과이잖아. 조금 다르지 않을까? 여태까지 만난 카마과이 사람들을 떠올리며, 긍정의 대답을 외쳤다.

나 : 좋... 좋아.
아저씨 : 그래! 들어와, 이쪽으로.





그렇게 아저씨를 따라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된 도서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정원이 나왔다.

나 : 생각보다 멋진데.
아저씨 : 그렇지?





아저씨 : 여긴 전산 일을 보는 곳이야. 컴퓨터는 여기서 쓸 수 있어.
나 : 컴퓨터가 어디 있는데?
아저씨 : 저기 있잖아.


책상 한쪽에 CRT 모니터가 보였다. 사진 상으론 파란색 옷을 입은 아저씨 옆.

나 : 어... 저거 한 대만 있는 거야?
아저씨 : 응. 한 대면 충분하지!
나 : 그렇구나...


본인들이 충분하다니 됐지.

아저씨 : 자, 이제 2층으로 올라가보자.




도서실이 1층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2층까지 있었다. 너무 얕봤나.




나 : 오, 쾌적하고 좋네.
아저씨 : 그치? 자, 저기 베란다로 나가봐. 뷰가 좋아.


아저씨의 권유에 따라 베란다로도 나가봤는데, 뷰는 그냥 그랬다. 그래서 사진도 안찍었다.

아저씨 : 멋지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야.
나 : ....머... 멋지네!


어딜 보고 멋지다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멋지다고는 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안가본 방으로 갔다.

아저씨 : 자, 이건 방명록이야. 싸인할래?
나 : 방명록?


도서관에 무슨 방명록이 있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저씨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아저씨 : 이건 도서관 부속 미술관 방명록이야. 이 방은 미술관이고. 여기 벽에 뭐 걸려있지?. 이거 전시 작품이야.

과연 벽에 무언가가 걸려있긴 했다. 예의상 대충 구경은 했는데, 미술엔 영 조예가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지나갔다.




아저씨 : 자, 끝! 우리 도서관 어땠어?
나 : 내가 예상하던 거랑 조금 달랐어. 생각보다 깨끗하고 세련됐는데?
아저씨 : 그치! 멋지지! 어쨌든 여태까지 내 못난 영어 들어줘서 고마워.
나 : 아, 아니야! 도서관 소개시켜줬는데 내가 더 고맙지. 어, 근데, 나 이제 가봐야되는데...


이제 헤어져야 하는데... 사실 여기서 조금 조마조마했다. 혹시, 혹시...

아저씨 : 아이쿠, 내가 붙잡았구나. 그럼 남은 여행도 잘해! 챠오!
나 : 아, 응, 챠오!


살짝 긴장한 채로 있다가 꾸밈없는 작별인사를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또 의심하고 또 경계해버렸다. 아이 참,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있어도 되는 거였는데.

머리를 벅벅 긁다가 도서관에서 나와 마저 길을 갔다.




거리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작열하는 태양에 치를 떨며 도서관 바로 근처, 그러니까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 공원 바로 옆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이름은 칸델라리아 성모 성당 Iglesia Catedral de Nuestra Senora de la Candelaria 이었다.




칸델라리아 성모 성당은 천장이 높고 창문이 길어 바람은 잘 통하지만 햇볕은 잘 안들어오는, 수고하고 짐진 내가 찾던 시원한 성당이었다.




적절한 현지화가 이루어진 천장. 으음, 나무 천장, 보기만 해도 시원해...




칸델라리아 성모 성당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조각품.

길다란 벽에 딱 저 두 조각만 걸려있었는데,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제외하고서라도, 성모의 가슴에 칼이 박힌 모습이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의 슬픔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으음, 감수성 충만한 이곳은 카마과이의 성당.




물론 이곳에도 라 카리다드 성상이 있었다. 과연 쿠바의 수호성인.




땀도 대충 식혔겠다, 다시 성당을 나와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 공원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데, 공원 근처의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이 보였다. 아, 진짜 맛있겠다. 나도 맥주 한 잔 마실까.

카페에 들어가 메뉴를 봤는데, 쿡을 쓰는 카페여서 생각보다 비쌌다. 물론 그래봤자 한화로 3, 4천원 내외였지만, 여행 자금이 거의 다 거덜난 상태여서 최대한 돈을 아껴야만 했다. 결국 한숨 한 번 쉬고 그 카페를 나섰다.

공원으로 돌아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있으려고 하는데,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헤이, 치나!
???? : 여기야, 여기!


치나라고 불릴 사람은... 음, 아무래도 이 주변엔 나 밖에 없지?

나 : 응? 나 말이야?
맥주 마시던 아저씨1 : 너 목말라 보여서! 맥주 마셔! (정도의 스페인어)
맥주 마시던 아줌마1 : 자 여기! 내가 따라줄게! (라고 믿고 싶은 스페인어)
맥주 마시던 아줌마2 : 의자 필요하지? 자, 여기로 와! (일 것 같은 스페인어)


....!?!?!?!?

한 사람은 맥주를 따르고 한 사람은 의자를 가져다주고, 뭔가 5초만에 그 테이블에 합석하여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그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스페인어를 썼다. 나... 난 스페인어라고는 올라 그라시아스 챠오 밖에 몰라...

말이 안통해서 어버버한채로 맥주를 마시던 나에게 다가온 건 한 꼬마아이였다.




꼬마아이 : 올라!
나 : 오, 올라!
맥주 마시던 아저씨2 : 오, 이 아이는 클라우디우스야. 내 딸이지.


클라우디우스는 미소가 예쁜 아이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싱글싱글댔고, 조금 웃긴 소리를 하면 꺄아거리며 웃어줬다.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꼬마였다. 어떻게든 저 웃음을 담아가고 싶어서, 아저씨에게 아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며, 빨리 찍으라고 보챘다. 음, 역시 이 아저씨도 까마과이 사람이군.




스페인어는 뭔 소린지 하나도 몰랐지만, 다들 바디 랭귀지와 마임의 천재였던 건지, 몸짓만으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맥주 마시던 아저씨1 : 클라우디우스 옆의 아이는 내 딸이야.
맥주 마시던 아저씨2 : 우린 옛날부터 친구였는데, 이제는 다들 엄마 아빠가 됐어.


어려서부터 친구였고,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된 이후로도 종종 만나 맥주 한 잔씩 마실 수 있는 사이라. 서로에게 평생 친구인거네. 부럽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생판 모르는 남인 나에게 맥주를 권한 건 인간 관계의 풍요와 행복에서 오는 여유였겠지? 마음이 행복한 사람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거니까.

아마 클라우디우스와 그 친구도 그렇게 자랄테지. 여기 카마과이에서 만났던 따뜻함과 상냥함이 세대를 거쳐 계속 이어져가길 바라게 됐다.




슬슬 까사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 작별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골목 반대편까지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2 : 리! 잠깐만!

뒤를 돌아보자 땀 범벅이 되어 헐떡이는 아저씨2, 클라우디아스의 아빠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저씨2 : 너 이거 두고 갔어.

아저씨가 땀을 닦으며 나에게 건넨 건 모나미 볼펜이었다. 평소에 펜을 잘 잃어버리는 편이라 값싼 펜만 잔뜩 들고 다니는데, 그 테이블에도 두고 왔나 보다. 그런데 지금,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뛰어온거란 말이야? 이 몇 백원짜리 볼펜 때문에?

나 : 아, 어쩌지? 너무 고마워.
아저씨2 : 에이, 별 거 아냐. 챠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돌아가는 모습에 살짝 찡해졌다. 아바나였어봐, 이미 내 볼펜은 현지인들의 전리품이 되어 있었겠지. 물론 난 모나미 볼펜을 잃어버린 사실조차 몰랐을테지만.

나 : 잠깐만!

나도 모르게 아저씨2를 불러세웠다. 어, 그러니까... 저... 그치.

나 : 이거 네 딸 줘. 네 딸, 클라우디우스, 그러니까... 선물.
아저씨2 : 그래도 돼?
나 : 나 다른 펜 있어. 괜찮아. 클라우디우스한테 선물!
아저씨2 : 와... 고마워! 리!


감동 받은 눈빛으로 내 손을 꽉 잡더니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는 아저씨. 그런 눈빛은 그만 둬. 감동은 내가 더 받았으니까.




중간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고 까사로 돌아왔다. 이따가 야간 버스를 타야 해서 저녁에 조금 자둬야 했다.

샤워한 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위에 까마과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나오는 친절과 꾸밈없는 웃음을 지닌, 눈만 마주쳐도 미소를 짓는 카마과이 사람들,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유쾌한 사람들, 낯선 여행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무언가를 바라기보단 베풀길 좋아하는 사람들. 거기에 물들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나... 다른 멋진 해변이나 도시를 제치고, 카마과이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종이를 만지작거리며 행복하게 잠들었다.


다음 도시 트리니다드에서 계속!





덧글

  • 2014/07/09 07:2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7/14 07: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찬영 2014/07/09 08:41 # 답글

    조용하고 친절한 도시 카마콰이네요 ㅎㅎ 아직 관광객이 많이 없어서 그런건가봐요~?
  • enat 2014/07/14 07:09 #

    진짜 이건 관광객들이 많이 안찾는 도시라 그럴거에요. 해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덕분에 쿠바인들의 순수함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ㅠㅠ
  • 춤추는곰♪ 2014/07/09 09:44 # 답글

    으아..쿠바 너무너무 가고 싶어요 ㅠ_ㅠ
  • enat 2014/07/14 07:11 #

    한번쯤은 가볼만 합니다! 가보세요!
  • 키르난 2014/07/09 12:46 # 답글

    아..... 읽는 것만으로도 뭉쿨..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래도 덥진 않으니 다행이야.-ㅁ-; 지금 서울은 폭염..;...)
    제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당이랑 도서관이네요. 사람도 좋지만, 의외로 잘 정리된 도서관과 많은 책을 보니 쿠바.. 아니, 카마과이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바나는 관광객들이 맨 처음 들어가는 도시라 그런 걸까요. 분위기가 딴판입니다.
  • enat 2014/07/14 07:15 #

    ㅋㅋㅋㅋㅋㅋ 따뜻한 정도로만 끝나서 다행이군요. 제가 사는 도시도 더워져서 선풍기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북위 한참 높은 도시도 이런데 서울은 어떨지 상상만해도 ㄷㄷㄷㄷ
    도서관 레알요! 시설도 괜찮고, 깨끗하고 밝은 분위기에, 사람들도 적당히 오가고, '진짜' 영어공부를 하는 아저씨도 있는 도서관 ㅠㅠ 레알 카마과이는 여행객 돈 받아먹으려고 수작질 부리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한 도시에요. 마음을 치유했더랬죠 여기서 ㅠㅠ
  • 2014/07/09 17:1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7/14 07:2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Glinda 2014/07/09 20:41 # 답글

    우와~ 멋있어요!
  • enat 2014/07/14 07:26 #

    감사합니다! :)
  • 타누키 2014/07/09 22:57 # 답글

    좋은동네네요. 아바나와 달리 완행열차 느낌입니다.
    저 학생(?)은 혼자 교복을 안입은 것 같은데 나름 학교 멋쟁이려나요. ㅎㅎ
  • enat 2014/07/14 07:28 #

    카마과이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어요. 아바나랑은 정말 다르더라구요.
    그쵸! 혼자 뭔가... 체육복 같은 뭔가를 입고 있어! 반에 한명씩은 있는 41번 괴짜 전학생 포지션인가...
  • 사노 2014/07/10 08:07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까지 치유되는 느낌이네요.
  • enat 2014/07/14 07:29 #

    덧글 감사합니다! 저도 저 당시에 굉장히 치유받는 느낌이었는데, 뭔가 전달이 잘 된 것 같아 기쁘네요 ㅠㅠ
  • 라비안로즈 2014/07/10 12:54 # 답글

    아바나가 너무 어둠으로 물들은 곳이네요 ㅠㅠ
    좋은 곳으로 가셨네요.. ㅎㅎ
  • enat 2014/07/14 07:30 #

    아바나 사람들은 너무 가난하니... ㅠㅠ 돈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카마과이행 버스를 탄 건 진짜 잘한 선택이었어요.
  • 2014/07/11 18:0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enat 2014/07/14 07:31 #

    이틀만에 ㅠㅠ 힘들진 않으셨나요 여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캐나다로 워킹 오시나요! 여러가지 할 것도 많고 얻을 것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즐거운 경험들 많이 쌓으시길 바래요! 응원해요!
  • 2014/07/15 21:27 # 삭제 답글

    잉..앉은 자리에서 1편부터 다 읽었어요 ㅎㅎ
    독자들이 글에 몰입되게 잘 쓰시네요
    다른 여행기도 마저 읽으러 갑니다 +_+
  • enat 2014/07/18 04:52 #

    우와 꽤 길텐데 그걸 어떻게 다 읽으셨나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ㅅ;
    쓴 저도 한두편 보면 잠드는데 ㅋㅋㅋㅋ
    덧글 감사해요!
  • 다니엘 2014/07/20 23:3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토론토에 사는 다니엘입니다.
    제가 다음주 월요일부터 휴가 이용하여 2주간 쿠바여행계획하고 있습니다.
    정보 찾아 이곳 저곳 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그리고 쓰고 계신 쿠바 여행기 3일에 걸쳐 재밌게 읽고 유용한 팁도 많이 얻었습니다.
    감사드리구요, 몇가지 질문드려도 될런지요?
    Viazul bus 티켓 끊을 때 현지에서 끊는 것과 인터넷으로 USD 로 끊는 것과 비용차이가 있나요? 차이 없으면 큰 구간은 미리 끊어갈려구요.
    Santiago de Cuba 에서 머무신 카사 정보 와 가격좀 알 수 있을까요? 카사 검색을 다 해봤는데 Parque Cespedes 바로 옆에는 Casa 가 없더라구요. View 가 좋은 듯 하여 거기서 머물고 싶네요.
  • enat 2014/07/21 09:06 #

    아이고 내일 가시네 빨리 답변 드릴게요!

    - 비아술 버스는 별 차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바나-산티아고 데 쿠바 구간은 거의 꽉 차더라구요. 아바나-비냘레스 구간도 인기있는 구간이라고들 하니 (but 시간이 어정쩡하다면 현지여행사 버스 타는 걸 추천드려요) 그 두 구간을 이용하실 계획이라면 미리 예매하는게 마음 편하실 것 같네요!

    - 까사는 Casa 3 Ana 라는 곳으로, 구글링하면 나옵니다. 가격은 제가 갔을때만 해도 1박당 25CUC이었어요. 세스페데스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니라 한두골목 떨어져 있어요. 그 까사 근처에도 여러 까사들이 있으니 뷰 때문이시라면 다른 까사들도 잘 찾아보세요! Casa 3 Ana는 특히나 비탈길에 있는 집이라 캐리어 끌 때 힘듭니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덧글 달아주세요. 별로 아는 건 없지만 아는대로 알려드릴게요!

    즐거운 여행되세요!
  • 다니엘 2014/07/21 09:26 # 삭제 답글

    답변감사^^
    내일 아니구요, 일주일 후예요. ㅎㅎ
    확실한 구간은 비이술 미리 예약해놯야겠네요.
  • Sam 2014/07/23 03:10 # 삭제 답글

    쿠바 여행기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멕시코에 있지만 다음달에 쿠바에 여행을 가려고 해서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여행기들을 탐독하고 있는 중인데 enat님 여행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여행하실 때 감정이 진솔하게 잘 묻어나서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 enat 2014/07/24 12:15 #

    멕시코에 계신가요! 사실 제가 2주뒤면 멕시코로 떠납니다!!!!!
    여하간 여행기 재밌게 읽어주시고 덧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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