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4 12:09

쿠바 배낭여행 (34) 뭘 해도 지치는 하루 ├ 쿠바 배낭여행 (2013)

일기장에 단 한마디 '지친다' 라고 써져있었던 트리니다드 1일째 이야기.




새벽 2시 카마과이. 야간 버스를 타고 다음 도시인 트리니다드 Trinidad 로 가기 위해 버스 터미널에 왔다. 쿠바의 밤답게 공기는 후덥지근했지만, 내 손엔 두툼한 바람막이가 있었다. 이미 산티아고 데 쿠바행 야간 버스를 겪은 나, 그 극악하고 지독한 버스 에어컨 강풍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였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새벽 버스를 기다리긴 하는데,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시간이 문제였다. 불볕 더위 속에서 카마과이를 돌아다니고, 낮술은 만땅으로 마셨으니 밤에는 좀 쉬어야 하는게 맞지 않겠어. 하지만 트리니다드행 비아술 버스는 하루 단 한 번, 그것도 이 새벽에만 있었고, 여행사도 택시도 이용할 수 없는 가난한 여행자(나)는 그 버스 밖엔 답이 없었다.

뻐근한 뒷목을 붙잡고 대합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생각했다. 대체 트리니다드에 뭐가 있길래 밤을 지새워가며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거람.




사실 쿠바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아바나와 바라데로로 간다. 거기서 조금 더 일정에 여유를 둔다면 비냘레스와 산타클라라, 트리니다드를 당일치기나 1박으로 둘러보는 정도? 그러니까 트리니다드는 쿠바 3, 4 순위 정도에 드는 관광타운인 셈이다.

무엇이 트리니다드를 그 정도 순위권에 진입하게 만들었을까? 음, 우선 아바나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이 가장 크겠다. 거기에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는 올드 타운은 찍사들을 유혹할테고, 타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양콘 해변 역시 그 인기에 한 몫 할테다.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동선 상에 있으면서도 이 마을에 내리지 않는 건 바보겠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있는 곳이다.

그래, 새벽 버스까지 타는데, 분명 그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해줄 마을이지 않겠어! 애써 날아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10분 연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다보니 어느새 트리니다드 버스 터미널.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버스 터미널 앞은 벌떼처럼 몰린 호객꾼들로 가득했다. 이제는 익숙하다. 도인을 피하듯 걸음은 빨리 시선은 멀리. 요리조리 호객꾼들을 피해가며, 미리 예약한 까사를 찾아갔다.




캄캄한 트리니다드 거리. 빨리 까사로 들어가 쉬고 싶다.




예약해놓은 까사는 버스 터미널에서 생각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다. 분명 터미널에 내릴 땐 캄캄했는데, 까사에 들어갈 땐 해가 뜬 지 오래였고, 사람들도 거리로 나와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인력거나 택시를 탈 걸.

여하간 까사에 도착했으니 불평은 나중에 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에어컨이 조금 약했지만 그래도 할렐루야를 외치며 침대에 쓰러졌다.




한 시간 정도 잤을까. 잠이 깨서 침대 위에서 밍그적거리다가 론리플래닛을 펼쳤다.

음음, 트리니다드. 이런 곳이 있고 저런 곳이 있군.




타운 쪽 지도를 보다가, 아무 생각없이 두어장 넘겼다. 트리니다드 근교의 갈만한 곳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그러다가 펼치게 된 양콘 해변 파트. 따사로운 햇살과 인적이 드문 해변, 새하얀 모래사장, 맑고 투명한 바닷물 등등이 묘사되어 있었는데, 피로에 쩐 나로썬 그 설명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으음, 바다. 그러고보니 쿠바까지 와서 바닷물에 발 담근 거라곤 아바나 근교의 과나보 정도 밖에 없잖아. 그래, 해변으로 가자!

알면서도 언제나 저지르게 되는 실수지만, 계획을 짤 땐 제정신으로 짜야한다. 제정신이 아닌, 그러니까 새벽 2시에 야간 버스를 타고 와서 캐리어를 끌고 몇십분 걸리는 거리를 걸은 뒤 에어컨 약한 방에서 한 시간 정도 잔 다음 피로가 다 풀렸다고 믿는 그런 정신으로 계획을 세워선 나중에 후회한다.

...이 날 양콘 해변에 가는 게 아니었다.




양콘 해변은 트리니다드 중심가에서 1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절대 걸어선 못 갈 거리다. 아니 뭐, 걸어가라면 몇 시간에 걸쳐 걸어갈 수도 있겠지만 굳이 쿠바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셔가며 걸을 필요는 없잖은가. 그래서 많은 여행객들이 택시를 이용한다더라.

나도 많은 이들처럼 양콘 해변 방향의 대로로 나와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가격에 택시 잡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똑같은 가격만 고집하는지. 이거 담합이지, 담합!

결국 포기하고 그냥 비싼 가격에 택시를 타려는데, 어디선가 솔깃한 가격이 들려왔다.

택시기사 : 내 택시 탈래? 가격은 이 정도면 되는데.

택시기사가 말한 가격은 정상가(?)에서 1CUC 정도 더 저렴한 가격이었다.

나 : 오, 싼데? 좋아.
택시기사 : 너 진짜 타기로 한거다.
나 : 응? 응. 어디 있는데, 네 차는?
택시기사 : 따라와.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었는데...

잠과 숙취에서 덜 깨어난 멍청한 여행자는 보통보다 싼 택시를 구해서 좋아할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난... 낡고 삐걱거리는 이상한 마차에 올라타있었다.

나 : ....
택시기사 : 자, 갈까!
나 : ......잠깐, 분명 택시라고.....


택시기사... 아니, 마부는 싱글거리며 말을 출발시켰다.

택시기사 : 이게 바로 택시야.
나 : 이게 무슨 택시야! 마차잖아!
택시기사 : 양콘 해변까지 간다고. 아까 진짜 탄다며? 엉? 오케이?


거의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말하는 택시기사, 아니 마부. 아, 알았어... 가만히 있겠다고.

...난 이 때 소리를 더 크게 빽빽 질러서라도 마차에서 내렸어야 했다.




마차는 양콘 해변으로 가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사람들을 실었다.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내가 지금 타고 있는 마차는 트리니다드 타운과 양콘해변 근처의 작은 마을을 잇는 다인 택시... 아니 다인 마차인 것 같았다. 돈도 현지인들에겐 페소를 받고, 그나마도 지금 내가 탄 마차는 내가 이미 CUC으로 큰 돈을 냈기 때문에, 면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짜로 탑승시켜주는 경우가 많았다. 와 씨, 열받네.

그렇게 땀내나는 현지인들 사이에 꽉 끼어 양콘 해변으로 향하게 된 나. 하지만 이게 최악은 아니었다.




현지인들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모조리 내렸다. 그 마을을 지나자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산티아고에선 사람을 짐짝처럼 싣고 가던 트럭도 탔었고, 용량을 잊은 채 사람들을 마구 태우던 미니 사이즈 버스도 탔었지. 존과 자전거 택시도 탔었고, 여기에선 마차까지... 쿠바의 대중교통이란 대중교통은 다 타보는구나.




흔들거리고 삐걱거리는 좌석 덕에 허리는 무척이나 아팠지만, 그래도 바람에 딸려오는 바닷내음은 좋았다. 애써 기분 좋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 택시기사,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택시기사 : 너 있잖아, 예쁘다.

보통 같으면 생글거리며 그라시아스! 하고 마는데, 이 땐 좀 뜬금 없어서 그냥 떨떠름하게 '어..' 하고 말았다.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더 적극적으로 내 칭찬을 하는 택시기사. 잠깐, 이 아저씨가 왜 이래.

택시기사 : 너랑 나,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어때, 오늘 밤...
나 : 싫은데.


어쩐지 이런 흐름이 될 것 같아서 '노' 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너무 빨리 말한 것 같았다. 택시기사는 꽤나 기분이 나빴는지 말을 거칠게 몰기 시작했다. 아, 젠장. 여기서 더 거칠게 몰면 허리 나간다고!




5분 정도 지났을까, 또다른 시도를 하는 택시기사.

택시기사 : 나 딸이 있어. 5살이야.

딸 있는 새끼가 아까 잘도 그런 소리를... 아니 뭐, 일단 됐다.

나 : 귀엽겠다.
택시기사 : 응. 너 걔한테 선물 줘도 돼.
나 : 뭐?
택시기사 : 선물. 프레젠트. 돈으로 줘도 돼.
나 : 내가 왜 젠장맞을 선물을 네 딸한테 줘야 하는데?


내가 본 적이나 있으면 몰라, 처음 보는 사기꾼 택시기사... 아니 마부의 딸에게 왜 선물을 줘야 하는건데?

하지만 이 택시기사는 자기 딸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 나처럼 뻔뻔한 손님은 처음이라는 듯 어이없는 눈빛을 보냈고, 난 그 눈빛에 더 복창이 터졌다.

나 : 야! 양콘 해변 언제 나와!




택시기사 : 여기가 양콘 해변이야.

기다렸다는 듯 말을 멈추고 날 내리게 하는 택시기사. 내가 내리자마자 자신이 더 기분 상했다는 듯 흥흥대며 뒤도 안돌아보고 말을 돌려 길 너머로 사라져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1CUC 더 비싼, 제대로 된 승용차 택시를 타는 건데. 심지어 아바나에도 저런 택시기사는 없을거라고.

고개를 휘휘 젓고, 일단 그 물 맑고 아름답다는 양콘 해변을 보기 위해 바다쪽으로 나가봤다.




바다... 바다는 정말 예뻤고...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오, 마치 프라이빗 해변 같아.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인데 왜 아무도 없는거지.

사람이 오지 않는 곳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곳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했다.

한적한 분위기에 들떠서 물에 발이라도 담그려고 신발을 벗었는데, 따가운 돌조각과 조개조각을 밟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 젠장. 여기 모래사장은 지뢰 투성이야! 그래서 사람이 없는 거였어!




저 멀리 개 한마리가 보였다.




부르르 떨더니...




개조차도 떠나는 이곳은 양콘해변...

으... 내... 내 양콘해변이 이럴리가 없어!

난 좌절하며 지도를 펼쳤고, 지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양콘해변은 굉장히 길었고, 내가 있는 곳은 양콘 해변의 초입 부근이었다. 그래, 아까 그 택시기사... 아니 마부가 나 엿먹으라고 아무도 가지 않는 부근에 날 내려준 게 틀림 없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파라다이스가 펼쳐질지도 몰라!

그렇게 걷기 시작한 enat...




아... 더워 죽을 것 같다...

양콘 해변은 전부 모래사장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곳곳이 절벽으로 막혀있어 옆 백사장으로 가기 위해선 아스팔트 길로 빙 돌아가야만 했다. 빌어먹을 절벽...

생각해보면 이 날이 쿠바에서 걸었던 날 중 가장 덥고 막막하고 끔찍했던 날이었다.




저 옆의 캐리비안 해는 저렇게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데... 나는 지금 뭘하고 있냐...




걷다보니 그 다음 해변에 도착. 얘는 그래도 비교적 양콘 해변의 중간에 위치한 비치였다.

이번엔 비치된 파라솔도 많고,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도 두 세명 보였다.




여기 백사장은 제법 부드러운 편. 여기라면 신발을 벗어도 괜찮겠다.




바닷물에 발을 담구자마자, 무언가가 발을 스쳐지나갔다. 와, 와, 뭐야!




가만보자... 이건...




열대어다! 와! 레알 열대어다!




그렇지, 여긴 캐리비안 해였어! 아쿠아리움에서나 보던 물고기들이 진짜 있잖아!

물고기들이 신기해서 한군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걔네들도 내가 신기했던지 자꾸 와서 찔러보고 가더라.




열대어들과 얼마 되지 않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근방에서 놀던 사람들 말로는, 여기서 더 안쪽으로 가면 리조트가 나오는데 거기서 택시나 셔틀 버스를 타고 트리니다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

아예 처음부터 택시 하나 고용해서 왕복비 계산했으면 이런 고행의 길도 걷지 않을텐데... 으음...




쫄딱 젖은 채로 흐느적대며 걷다보니, 작은 리조트가 하나 나왔다. 숙소가 여기라면 좋으련만...

셔틀 버스는 이따 저녁에나 있다고 하길래, 그냥 택시를 하나 불러 트리니다드로 돌아갔다. 이번엔 세간에서 '택시' 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제대로 된 택시였다.




제값을 주고 타는데, 이번에도 합승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합승한 사람들은 캐나다 노부부로,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캐나다에서 왔다니까 반가워하며 연거푸 '브레이브 걸' 이란 소리를 하시더라. 노부부와 나 셋이서 영어로 떠들어대자, 영어를 못하는 택시기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하하! 너희 쿠바인들이 나 빼고 스페인어로 얘기할 때 나도 그런 기분이었다고! 어떠냐!

두 부부는 양콘 해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내리고, 난 트리니다드 올드 타운까지 이동했다. 값싸고 맛있는 랍스터 요리로 소문난 식당에 갈 계획이었다. 그 식당 주소를 택시 기사에게 보여줬는데, 자꾸 갸우뚱 하더라.

택시기사 : 어... 여기란 말이지...
나 : 너 트리니다드 주소 잘 몰라?
택시기사 : 음... 여기가 음...


한참을 헤매다가 갑자기 멈춰서는 택시. 영문을 모른채 내리라는 손짓에 "여기야?" 하고 내렸더니,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된다며 인사를 건넨 뒤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아, 아니... 잠... 잠깐... 잠깐!!!!!!!

목적지까지 데려다줘야 택시 아니냐고! 내가 왜 그 돈을 내고 네 택시를 탔는데! 기다려! 기다리라고!

하지만 사람의 발이 자동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건 아바나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걔네는 돈은 비싸게 쳐받아도 목적지까진 데려다준다고! 으아, 이 프로의식 없는 놈들! 빌어먹을 트리니다드! 어정쩡한 관광타운 같으니라고!




결국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랍스터 음식점.

전메뉴 5CUC, 한화로 5천원 남짓한 가격으로 랍스터 풀코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웬 청년이 하나 다가와서 오늘 하루 어떻냐고 묻는다. 보통 같으면 Good! 하고 넘어갈텐데...

나 : 피곤하고... 지친다. 힘들어.

내 대답에 흠칫하고 놀라는 청년, 하지만 지지 않을 거라는 듯 어디선가 바이올린을 꺼내더니 한다는 말이,

청년 : 그 피곤한 마음, 음악으로 달래줄게!

라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하는데... 하, 됐어, 팁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나 : 나 돈 없어.
청년 : ....


그러자마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테이블로 가서 연주를 시작하는 청년. 그것 봐, 돈 때문이잖아. 아, 밥 먹기 직전까지도 날 지치게 하는구나, 트리니다드.

몸도 마음도 늘어진 채 몇 분 기다렸더니, 5CUC 짜리 랍스터 풀코스가 눈 앞에 펼쳐졌다.




우선 마른 과자.




랑 같이 먹으면 맛있는 치즈.




내가 캐나다에서 제일 그리워하는, 별 거 없는데 진짜 맛있는 쿠바의 가정식 샐러드.




그리고 본메뉴. 랍스터.

산티아고에서 먹었던 것처럼 형태가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아예 손질까지 다 해서 묘한 양념에 버무려 나오더라. 5쿡짜리 치곤 훌륭했다.




정신없이 먹다가 찍은 테이블 사진. 으음, 정말 얼마 안남았을 때 찍었군.




후식으론 과일.

맛있게 먹긴 했는데, 지치고 허기질 때 먹어서 그런지 뱃속이 채워지자마자 피곤이 몰려왔다. 아아, 먹어도 지치는 마을이라니. 너무 하잖아.





올드타운에서 숙소까진 걸어서 20분.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걸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숙소까지 어떻게든 걸어가긴 했다. 가자마자 좀비처럼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졌다. 아아, 오늘은 정말 아니었던 것 같아... 몸을 똑바로 누울 새도 없이 정신없이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저녁.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쉬어도 부족하겠건만, 또 쪼리를 신고 걷기 시작했다.




저녁의 트리니다드. 비가 살짝 내렸던건지, 바닥이 살짝 젖어 있었다. 날씨도 시원하고... 기분 좋다. 나오길 잘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하늘이 아름다웠다. 지금 찍은 사진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게, 실제 눈으로 봤을 당시엔 진짜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덕분에 정신줄 놓고 하늘만 바라보며 걸었었다.




그렇게 멋진 하늘에 감동하며 까사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했으면 그럭저럭 좋은 하루의 마무리가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한 아저씨 : 치나! 치나!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 : 응?
이상한 아저씨 : 치나! 린다! 린다!


나보고 귀엽단다. 보통 같으면 고맙다고 하고 헤어지는데, 이 아저씨, 자꾸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 뭐야?

나 : 왜?
이상한 아저씨 : 너랑 나, 여자친구 남자친구.
나 : 뭐?
이상한 아저씨 : 오늘 밤 좋잖아.


짦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쓰며 나에게 풀어놓는 이야기는 아까 택시기사, 아니 마부가 했던 이야기랑 똑같은 내용이었다.

아니 대체 이 놈의 도시엔 동양인 여자한테 발정난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 동안 치나들이 트리니다드에서 무슨 짓을 하기라도 했냐?

능글맞게 헤헤 거리며 쫓아오는 이 이상한 아저씨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유인했다. 저 쪽 건물엔 경관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음. 좋아.

나 : 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는 이상한 아저씨. 좋아, 기선제압 됐어.

그 뒤로는 한국어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은 이상한 언어를 쓰며, 온갖 손짓과 발짓을 이용해 욕설을 날렸다. 정말 오늘 하루동안 겪었던 모든 스트레스를 이 아저씨에게 풀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게 되겠지만, 그렇게 안하고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것 같았다. 아직 20대인데! 여기서 더 새치 생기면 안되잖아! 꺼져! 이 빌어먹을 트리니다드 새끼야!

이 아저씨가 화를 내면 저 쪽에서 농구하는 건장한 청년들과 저 건물에 있는 경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 싶었는데, 생각 외로 이 아저씨, 벙찐 얼굴을 하며 미안하다고 울먹거리며 사라졌다. 어... 뭐 또 울먹거릴 것까진... 미안하잖아...




엄청 찝찝한 기분이 되어 까사로 돌아갔다. 젠장, 이게 아닌데.




한숨을 쉬며 까사 거실에 앉아 있는데, 옆 방에서 머무는 청년이 나와 똑같은 한숨을 내쉬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 저 청년도 뭔가 이곳에서 안좋은 일을 겪었구나. 급 동질감이 생겨 말을 걸었다.

나 : 무슨 일이야.
청년 : 아. 별 거 아냐. 그냥... 음? 너 배낭 여행자야?
나 : 응. 미쳤지? 이 지랄맞은 쿠바를 배낭여행하고 있어.
청년 : 하하하! 그럼 너도 내 마음을 알겠구나.
나 : 리.
청년 : 블루벨. 사실 원래 이름은 블라블라인데, 다들 블루벨이라고 불러. 너도 그렇게 불러.


원래 이름은 까먹고 블루벨이란 별명만 머릿속에 남았다.

하여간 얘도 당해왔던 일이 많았던건지, 썰을 하나둘씩 풀기 시작했다. 블루벨은 폴란드 여행자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2, 3주 정도 여행을 하는 게 취미라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쿠바를 선택한 거였는데...

블루벨 : 내 여권이 좀 낡았거든? 옛날 거야.
나 : 낡긴 했네. 그래도 겉표지만 낡은 거잖아?
블루벨 : 그래! 근데 입국할 때 다른 사람들은 막 통과하는데, 난 붙잡고 놔주질 않는거야. 어떻게든 입국심사를 통과하긴 했는데, 문제는 바로 오늘 일어났어.


트리니다드의 술집에서 여러 사람들과 합석해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합석한 사람 중 한 명이 무심코 '너 아바나에서도 그랬잖아 운운' 하는 소리를 했단다. 블루벨은 어떻게 자신이 아바나에서 뭘 했는지 상세하게 알고 있냐며 따졌고, 그 사람은 당황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단다.

나 : 잠깐, 그럼 걔가 널 미행했던 거야!?
블루벨 : 그래! 사복 경찰이었던 거야! 내 여권이 낡아서 그런건지, 날 의심해서 미행을 하나 붙인 거라고!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블루벨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네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오해일 수도 있다, 어쩌구 말을 하고 싶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쿠바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란 생각이 피어올랐다. 딱히 쿠바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그냥 둘까.

블루벨 : 그리고! 버스 터미널만 가면 우리는 슈퍼스타가 된다고!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된 건지는 몰라도 엄청 공감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슈퍼스타! 맞아! 왜 내버려두질 않는건데! 나 니네 집에 관심 없다고!
블루벨 : 어! 나 예약한 집 있다 그래도 거기 다 팔렸대! 자기네들이 안다고 구라치잖아!


그렇게 누가 더 쿠바에서 고생했나 경연대회가 시작되었다.

나 : 그래도 넌 치나란 소리는 안듣잖아!
블루벨 : 블랙마켓 중거래하는 애들이 얼마나 달라붙는지는 알아!?
나 : 아저씨들한테 능글맞은 성희롱은 당해봤어!?
블루벨 : 넌 사복 경찰한테 미행당해 봤냐고!


한참 동안 쿠바에 대해 욕하다가, 잠시 소강상태가 왔다. 아, 그래도 나랑 비슷한 처지의 애랑 이야기를 하니까 조금 위로가 되는구나. 오늘 하루종일 있었던 불쾌한 일들이 단순한 화제거리가 되어 사라져버리니 마음이 후련했다.

의자에 기대어 피식거리다가, 나 자신에게 속으로 곧잘 해오던 질문을 하나 던져봤다. 블루벨은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나 : 너 만약에 또 쿠바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할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하는 블루벨.

블루벨 : 미쳤어? 너 알잖아? 너도 쿠바를 여행하고 있잖아!?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응, 알아.
블루벨 : 솔직히 지금은 없다.
나 : 나도 없다.


그렇게 쿠바를 다시는 여행하지 않을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한지 1년... 아니 10개월정도 지났나.

...이번에 또 쿠바에 가게 될 것 같은데...


여행준비 하느라 포스팅을 제 때 못하고 있는 enat의 여행기는 다음편에서 계속! 쿠바 여행기도 3편 정도 남았음!




덧글

  • 키르난 2014/07/24 12:17 # 답글

    엉? 이번에 또 쿠바 가시나요? +ㅁ+
    근데 앞부분.. 읽자마자 뭔가 고행길이 촤르륵 펼쳐지는 것이.. 으아아; 아마도 전체 여행기에서 두 번, 세 번째쯤 각박한 느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앞서의 기억이 휘발되었지만 분명 앞의 33편 중에서 순위를 매기자면 그 정도..ㄱ-;
  • enat 2014/07/24 12:50 #

    ㅋㅋㅋㅋㅋㅋㅋ맞아요. 고행길... 여행기 쓸 때 최대한 감정이입해서 쓰는데, 그래서 이 편 쓰는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ㅇ<-<

    이번에... 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도 이번엔 배낭 아니에요! 휴양지로 즐기러 갈 거에요! 하하하! 두고보자 쿠바!
  • jugichan 2014/07/24 14:46 # 삭제 답글

    드디어 올라왔어요~~ 기다렸습니다 ㅋㅋㅋ 저도 쿠바 너무 가고싶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
  • enat 2014/07/27 03:35 #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전 포스팅을 보니 진짜 한참 되긴 했네요 ㅠㅠ
  • 동굴아저씨 2014/07/24 19:29 # 답글

    본격 암걸릴 것 같은 여행기(...)
  • enat 2014/07/27 03:38 #

    암유발 여행기 인정 ㅠㅠ 그런데 제가 저길 또 가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 엔츠키 2014/07/24 19:56 # 답글

    쿠바에 또 가신다구요?!ㅋㅋㅋㅋ
    제대로 된 휴양지, 바다는 정말 좋다고 하더라구요 이번엔 리플레쉬할 수 있는 곳에 다녀오시길!!
  • enat 2014/07/27 03:39 #

    네 ㅋㅋㅋㅋㅋㅋㅋ 또 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바라데로 가서 한 손에 시가 한 손에 피냐 콜라다 쥐고 늘어져 있으려구요. 근데 같이 가는 동생이 아바나에 대한 이상한 환상이 있어서 이걸 깨트려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입니다.
  • TvolT 2014/07/25 05:04 # 답글

    미행을 붙이다니...... 애딸린 아저씨들이 왜 자꾸 들이대나요. 아오. 근데 바다색이나 하늘은 참 이쁘네요.
  • enat 2014/07/27 03:39 #

    하여간 요상한 나라에요 ㅋㅋㅋ 사람 보고 스트레스 받았다가 자연 보고 마음 풀고 ㅋㅋㅋ
  • 몬토야 2015/01/30 18:01 # 삭제 답글

    숙소도 그렇고 갔던 식당도 제가 갔던 곳과 같은 곳인듯
    앙꼰해변 가서 앙꼰호텔에 갔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전 쿠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저곳입니다
  • enat 2015/01/30 20:55 #

    양꼰 평 보면 진짜 좋은 평들만 있던걸로 기억해요. 론리플래닛에서도 바라데로의 북적임과는 다른 진짜 조용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었고... 허나 100명중에 한 명꼴로 저 같은 경우도 있는 거겠죠 ㅋㅋㅋㅋ
    식당은 예전에 코히마르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분께서 알려주신 식당이에요. 그 분이 적어준 주소 보고 찾아갔었죠. 그 분은 아바나 까사에서 머무는 한국인에게 그 정보를 얻었다고 하니, 한국인 여행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식당인가봐요.
  • ㅎㄹ 2015/01/30 18:28 # 삭제 답글

    자연은너무 이쁜데 사람들이.. ㅠㅠ
  • enat 2015/01/30 20:56 #

    왜 그렇게 선물? 하룻밤? 어쩌구 하면서 쫓아다니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 니츠 2015/01/30 18:3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네이버에 소개되었더라구요 ㅎㅎ
    북마크도 해놨어요!
  • enat 2015/01/30 20:58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이버에 드디어 떴군요. 그렇게 오픈캐스트 보내도 메인 안보내주더만... 쩝쩝.
    오! 북마크까지 ㅋㅋㅋ 더 좋은 포스팅으로 보답할게용. 감사합니당.
  • 네이버? 2015/01/31 09:55 # 삭제 답글

    네이버 메인?
    사진을 보고 왔는데..
    아차 싶네요
    정말 댓글 적을려구 이것저젓 적어봅니다
    난 쿠바까지 여행 다녀온 사람이다!!!
    라고 홍보 하는건지 뭐참.. 정말 아쉽네요
    잠시 보아도 사진에서 보이는 저 하늘색을 가볍게 넘겨 버리는 글투
    진짜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인지...
  • enat 2015/02/07 15:19 #

    여행기는 무조건 밝고 명랑해야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인가 보네요.
    자기 생각에 쿠바에 다녀온 사람의 여행기는 이러이러해야하는데 그러질 않으니 짜증 내시는 듯. 혹시 주변에서 독불장군이나 사고방식이 유연하지 못하다 등등의 소리를 들으시진 않는지...
  • hola 2015/09/21 18:16 # 삭제 답글

    hola? ㅋㅋ 안녕하세요 담달에 쿠바 들어가는 여행자에요. 진짜 배가 너무 아팠어요 웃느라고 ㅋㅋ 사실 글 읽으면서 이상한 미친놈들땜에 짜증도 났지만... 캐리비안해의 열대어 사진을 보는 순간 열이 확 식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enat 2015/09/26 19:11 #

    담달에 쿠바 가시나요!!!!! 으으 쿠바 또 가고 싶다!!!!!! 재밌게 다녀오세요!!!!!!!!!!
    이상한 미친놈들만 안만나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즐거운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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