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3 22:29

남미여행 (1) 멕시코 : 멕시코 시티에 도착하다 ├ 남미 배낭여행 (2014)

1.

아직도 생생하다. 2014년 8월 초,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멕시코 시티로 향했던 날은 말이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버린 캐나다에서의 생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별,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내리는 눈물.... 따위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난 그런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럼 뭐가 그렇게 생생하냐고?

출발하던 날의 그 '생생한 기억'이란 놈을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볼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결항".


아, 길고 긴 하루였지.




2.

내가 끊은 항공권은 아메리칸 에어라인 American Airlines 의, 밴쿠버에서 아침에 출발한 후 점심에 달러스를 경유하여 늦은 밤 멕시코 시티로 들어가는 티켓이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에 와야만 했고, 미국을 경유하는 비행기라 수속 밟을 것도 많아 귀찮기 짝이 없었다.

오랜 인내 끝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제 드디어 라틴 아메리카를 가는 것이로구나, 잠시 이별이다 캐나다, 내 안전을 빌어다오, 씨유어게인 등등의 내용이 담긴 일기를 쓴 뒤, 삽화랍시고 끄적이던 것이 무의미한 낙서로 퇴보할 때 쯤에서야 무언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탑승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비행기가 뜨질 않는다. 대체 뭐가 문제야? 기내는 더워지고, 손님들은 웅성거리고, 어... 좀 심각한데.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정확히 1시간 15분만에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그게... 비행기 문이 안닫히네? 기술자 불러서 고치려고 노력은 해볼건데, 뭐, 역시 안될 것 같기도 하고... 급한 사람들은 표 바꿔달라고 하면 바꿔줄거고... 일단 밖으로 나가봐."

.....................


뭐..... 뭐야!?!?!?!?


엄청 황당했지만 주변의 침착한 캐나다인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으음, 그래, 일단 지시를 따르자고.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길 또 한 시간. 역시 오늘은 못 뜰 것 같으니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 티켓을 바꿔주기로 하겠단다. 오늘 밤이나, 내일이나, 뭐 그렇게 말이다. 곧 엄청난 줄이 형성되었고, 처음에 승무원 이야기를 제대로 못들은 난 사람들에게 이리 묻고 저리 묻고 어리버리하다가 결국 줄의 맨 뒤에서 눈만 끔뻑거리게 되었다. 어... 기, 기다리면 되는건가?

어벙한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건 건 내 바로 앞에서 줄을 기다리던 할머니였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값싼 이유가 바로 이거야. 문제가 많다고."
"하하... 그러네..."
"사실 나 저번에도 아메리칸 에어라인 탔었는데, 그 땐 내 짐을 분실했지 뭐야. 호호!"


뭐야, 진짜 문제 많잖아!? 이거 상습범이잖아!?

"찾, 찾긴 찾았어?"
"응. 이틀 뒤에. 근데 새벽에 집으로 배송해주더라고. 새벽 세 시에 벨을 누르더라니까. 깔깔깔!"


그런 일을 겪고도 또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이용하는 건가... 뭐야 이 충성심은...

내가 침통한 얼굴로 길다란 줄을 바라만 보고 있자, 할머니는 한 전화번호를 보여줬다. 아까 승무원들이 알려준 아메리칸 에어라인 고객센터 전화번호라는데, 여기에 전화해도 티켓을 바꿀 수 있다고 하더라. 오! 그런 빠른 방법이 있다니! 당연히 전화해봐야지!

긴 신호음 끝에 상담사가 전화를 받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 내가... 그... 비행기가..."
"응? 뭐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해주세요."


전화 영어는 너무너무 어렵다. 앞에 있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할머니, 나 좀 도와줘. 나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어."
"응? 줘 봐."


할머니는 흔쾌히 내 핸드폰을 받더니 쏼라쏼라거리며 우리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돌아온 핸드폰. 할머니가 이래저래 자세히 설명해준 덕에, 스케줄 변경과 달라스에서 환승해야 할 항공편 변경까지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항공편은 다음날의 같은 시간대로 바꿨다.

"근데 있잖아, 결항 때문에 밴쿠버에 발이 묶인건데, 너희가 호텔도 제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이미 마련해놨으니 기다렸다가 승무원의 안내를 따르세요."


에엥, 호텔 때문에 어찌됐건 이 긴 줄을 기다려야 하는 거잖아. 뭐, 일단 다음 항공편이 해결됐으니 한시름 놓았다. 조금 밝은 얼굴로 할머니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

2시간...

3시간...


....


얘네 일처리 왜 이렇게 느린거야!!!!!!!!


결국 내가 호텔 바우처와 식사 2끼 쿠폰을 받은 건 오후 4시였다. 아침 일찍 공항 와서 오후 4시까지 뭐한거야 나...




3.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바우처와 변경된 항공 티켓을 가방안에 잘 갈무리하자, 승무원이 게이트를 열어줬다. 길 따라 쭉 가면 공항에서 나갈 수 있다는 말에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그렇게 길 따라 쭉 가다보니....

아아, 아직도 그 장면은 꿈에 나올까 두렵다. 거대한 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글거리는 무수한 인파, 온갖 국적의 여행자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말소리, 곳곳에 형성된 대기줄...

밴쿠버 공항 입국심사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뭐, 뭣이여 이거!? 바로 공항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근처 직원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며 물어보자 무슨 상황이건간에 공항 밖으로 나가려면 캐나다 입국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단다. 아, 그래 맞다. 나 이미 출국한 상태였지. 비행기만 못 탄 것 뿐이지 이미 캐나다 국외로 나간 상태였던 거지.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하루종일 게이트 앞에서 줄서서 기다린 사람에게 저 입국심사 줄을 또 기다리라는 건... 으아아아아!

성난 얼굴로 또 한참을 기다렸다가 입국 심사를 받았다. 심사관은 살의에 가득찬 내 얼굴을 흘낏 보더니, 캐나다 왜 왔냐 따위의 상투적인 질문을 물었다. 난 그 앞에서 악에 받힌 목소리로 신세한탄을 했고, 심사관은 뭔가 이상한 동양인이 왔구나 하는 눈빛으로 흘겨보다가, 내 비자 (워홀 비자가 만료되기 직전 방문 비자로 바꿨다) 를 확인하곤 도장을 찍어줬다. 하하하! 캐나다 도장이 여권에 쌓여만 가는구나!




4.

기력이고 뭐고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 갔다.

호텔은...



오, 오, 오! 이건 또 의외다. 꽤 놀라웠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쏘리쏘리거리며 잡아준 호텔은 고급 체인 호텔로 유명한 힐튼이었다! (사진은 찍어둔 게 없어서 힐튼 홈페이지에서 캡쳐)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숙박한 방은 1박에 200불이 훨씬 넘는, 내가 계산한 여행 경비로는 꿈도 못 꿀 방이었다. 와! 아메리칸 에어라인 통 크네! 드럽게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침대의 푹신함이 다르다고! 화장실 좀 보소! 호텔이 힐튼이라면 오늘 고생한 거 뭐, 그냥 일일알바해서 여기에 썼다고 생각하자고! 와, 씨, 너무 좋아!

그렇게 이번 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밤을 보낸 나....는, 고급 호텔 숙박이라는 꿀맛을 알아버린 덕택에 남미에서 개인실만 고집하게 되는데... 덕분에 경비는...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




5.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눈 뜨면 멕시코일줄 알았는데 아직 캐나다구나.

오늘은 기필코 멕시코 시티에 가고 말 것이라는 강한 기원을 천장을 향해 올린 뒤, 공항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니 항공편 지연됐어. 천천히 와."


또.... 또냐!!!! 아메리칸 에어라인!!!!!




6.

비행기가 지연됐다는 연락이 오더라도 원래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있는게 안전하다는 말(항공사 측에선 최대한 지연된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한다, 낮은 확률로 진짜 앞당겨질 때도 있다, 자기도 한 번은 비행기 지연됐다는 말만 믿고 늦게 갔다가 비행기 거의 놓칠 뻔한 적이 있다 어쩌구)을 아이큐... 아, 이 수식어도 이제 쓰기 귀찮지만 남미에서 삼촌 이야기가 나올리 없으니 마지막으로 써준다, 아이큐 150의 전 천재 가이드 그리즐리 삼촌에게 들은 적이 있던 난, 그 말을 그대로 지켜 원래 시간에 맞춰서 공항에 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항공편은 항공사에서 전화로 지연됐다고 통보한 시간보다 더 지연된 시간에 출발 - 이런 바보 멍청이 삼촌! 왜 그딴 정보를 나에게 알려줘서!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좀 더 힐튼에서 쉬는 건데! 정도의 말을 그랜드 프레리 방향 하늘을 향해 날린 건 비밀이다 - 했다.

일단 비행기가 무사히 떠서 다행이긴 한데, 달라스에 도착하는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도착하는 시간과 환승하는 시간은 고작 몇 십분 차이. 환승하는 게이트가 멀면 어떡하지, 제 때 환승 못 하면 어떡하나 기타 등등의 걱정을 하다가 캐나다와 작별 인사(?) 하는 것도 잊었다. 음, 내 여정은 도통 나에게 센티멘탈하게 될 시간을 주질 않는군.

살짝 안달이 나있는 상태로 달라스에 도착했다. 착륙해서 게이트가 연결되자마자 비행기를 빠져나갔고, 눈알을 굴리며 다음 환승 게이트를 찾아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다. 그 땐 하필 캐리어도 갖고 탔는지라 (내가 이 날 이후로 무슨 일이 있건 캐리어는 무조건 수화물로 부쳐버렸다. 항공사 직원이 '너 그 정도 크기면 기내에 갖고 탈 수 있어^^' 라고 상냥하게 조언해도 무조건 수화물 행이었다.) 달리는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멕시코 시티행 항공편 게이트에 도착했다! 우와, 너무 기뻐!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게이트 앞 직원에게 물었다.

"이거... 멕시코 시티 가는 거지? 편명 0000 맞지?"
"응, 맞아. 근데 지연 됐으니까 거기 앉아서 기다려."



또......................... 또냐!!!!!!!!!!!! 아메리칸 에어라인!!!!!!!!!!!!!!!!!


인구 2천만의 메갈로폴리스 멕시코 시티! 이렇게 가기 힘든 도시였다니! 들어가기 전부터 너무 비싸게 굴잖아! 내가 잘못했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다 잘못했어! 용서해다오!

멍한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 (대기 좌석이 꽉 차서 많은 여행자들이 카펫 바닥에 앉아 있었다) 캐리어에 머리를 딱따구리처럼 부딪히고 있다보니 탑승 준비 방송이 들려왔다. 아, 드디어 가는구나, 멕시코 시티. 드디어, 드디어.




7.

달라스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운행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편은 상당히... 상당히 구렸다. 기내는 좁아 터졌지, 좌석 시트는 낡았지, 오락거리는 커녕 안전방송이 나오는 화면도 없지, 승무원들은 무섭지. 괴랄한 기분으로 조금 늦었지만 할 일도 없으니 캐나다와의 이별에 슬퍼할 시간이라도 가져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남자가 싱글대며 말을 걸어왔다. 브라질 사람이라고 했다.

"오, 정말? 나 이번에 브라질도 가는데. 리우 갈 거야."
"리우! 리우 정말 좋지. 난 상파울루에 사는데, 운운..."


그즈음 승무원들이 출입국 신고서를 나눠줬다. 그런데, 신고서가 모조리 스페인어다. 영어 버젼으로 달라니까 '불행하게도 영어로 된 출입국 신고서는 없다' 란다. 뭐가 불행하게도야? 너희가 준비를 안한거잖아! 

무섭게 생긴 뚱뚱한 승무원 왈, 알아서 적당히 쓰란다. 아, 아니 내가 뭘 알고 쓰냐... 뭐... 일단 놈브레는 네임이겠고... 어 또...

"내가 도와줄까? 내가 아는 건 포르투갈어긴 한데, 스페인어랑 비슷하거든."

오, 옆자리에 오지랖 넓은 브라질 사람이 앉아서 다행이다. 브라질 청년은 마지막 서명 란에 다다를 때까지 각 칸에 무엇을 쓰면 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고, 덕분에 스페인어 까막눈인 나도 출입국 신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고맙다, 브라질 청년! 역시 브라질은 짱이야!

신고서를 여권 사이에 아무렇게나 끼워둔 뒤, 좌석에 얌전히 앉아 졸다가 난기류 때문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옆을 보니 브라질 청년이 맥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다.

"어, 맥주다. 여기 맥주도 줘? 무료야?"
"응... 네고만 한다면..."


....네고? 뭔 소리야?

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일단 승무원을 불렀다. 맥주를 하나 달라고 했더니.

"아, XX달러야."

엥? 유료였네?

"어? 아냐, 그럼 됐어. 내 옆에 애가 공짜로 마셨다길래. 잘못 들었나봐. 됐어, 됐어."

그냥 손사래치고 말았더니 스르르 사라지는 승무원. 브라질 청년에게 에이, 유료였잖아 라고 말하려는 찰나, 승무원이 다시 나타나서 내 테이블 위에 맥주 한 캔을 두고 사라졌다.

"어? 나 안마신다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하고 저 멀리 떠나버린 승무원. 그러자 옆에 있던 브라질 청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 잘하는데?"

뭘!?

브라질 청년의 말로는, 원래는 유료인데 말만 잘하면 무료로 주는거란다. 오, 모든 일을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려는 선량한 브라질 청년이여. 글쎄 말이다, 내 생각엔 원래는 무료인데 승무원이 중간에서 돈 받으려고 한 번 떠보는 것 같다만. 이 쪽이 훨씬 설득력 있지 않나.

어찌됐건 받은 거니까. 더 이상의 토를 달지 않고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8.

브라질 청년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다보니 어느새 멕시코 시티였다. 시간은 밤 12시. 오, 이 무서운 도시에 도착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야. 빨리 입국심사 받고, 짐 찾고, 예약한 숙소에 가야겠다.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느긋한 라틴계 사람들 중 그 누가 급한 한국인의 걸음을 쫓아오랴! 입국심사를 제일 먼저 받은 건 나였다.

"어서 와~ 여권~"

심사관도 느긋하다.

"한국인이네? 여행 왔어?"
"응."
"여행 잘 해~"


도장 팍.

......입국 심사 엄청 쉬워! 뭐야! 한국인 여권 완전 슈퍼 패스잖아! 엄청 좋다!




9.

시간대는 한밤중, 아니 새벽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 아무리 나라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용기는 없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동네(오로지 스페인어!)라서 좀 힘들었지만, 공항 내에 있던 택시 가판대 앞에서 어떻게든 손짓발짓을 이용해 택시를 잡았다. 가판대에서 미리 택시비를 지불한 뒤, 영수증을 들고 공항 밖 택시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기다렸더니 곧 택시가 한 대 멈춰섰다.

택시기사에게 숙소 주소를 보여주자 곧장 오케이하고 출발하더라. 그런데 길가에 중간중간 멈춰서서 여행자용 지도를 들여다보기 일쑤... 뭐야, 설마 이 택시기사, 길치야?

택시기사가 꽤 오랜 시간동안 지도만 들고 낑낑대고 있자, 어쩔 수 없이 뒷자리에 있던 내가 몸을 빼서 지도 읽는 법을 가르쳐줬다. 무슨 길을 찾으려는 건데, 여기 그 길이 있지 않냐, 그럼 우회전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등등. 물론 바디랭귀지로. 

택시기사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출발시켰다. 으음, 손이 많이 가는 택시기사야... 




10.

마침내 도착한 멕시코 시티 숙소.



숙소는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한, 레포르마 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인실(Adriana, Mexico city)이었다. 거리와 가격대, 이용후기를 보고 방을 잡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숙소는 실패였다. 내가 멕시코 시티에서 얻은 모든 스트레스는 이 숙소 때문에 생겨난거나 다름 없었다고.

그 이야기는 차차 다루도록 하고, 일단 다시 도착한 직후로 돌아가서.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긴 했는데 택시기사가 내 곁을 떠나질 않는다. 자꾸 나한테 뭐라고 지껄이긴 하는데 스페인어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영어로 말하라고! 나한테 할 말 있으면!"
"팁! 팁!"


음, 참으로 정확한 발음이로군.

그건 그렇고 가뜩이나 비싸게 주고 탄 공항 택시, 길도 헤맨 주제에 팁까지 달라니... 짜증이 나긴 해도 새벽에 남자가 씩씩대며 돈을 달라니 줄 수 밖에 없겠다. 난 연약한 소녀라고. 그런데 이제 막 멕시코에 도착한거라 환전소에서 돈을 바꾼 것도 아니고, 현금이 아예 없는데 어쩐담. 아, 그렇지. 아까 가판대에서 미국 달러로 계산하고 남은 거스름돈을 멕시코 돈으로 줬었는데, 그걸 주면 되겠다. 커피값은 되겠지. 피곤한데 가면서 다방 커피 한 잔이라도 사먹으라고!

"야, 여기."
".....코인? 하!"


택시기사는 날 경멸에 찬 눈으로 쏘아보더니 어떻게 자기에게 팁으로 동전을 줄 수 있냐고 쏘아붙였다. 아, 물론 스페인어라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그런 의미 같았다. 음, 이거 한화로 따져도 1000원은 넘는 돈인데... 뭐, 팁으로 만원이라도 줘야하는 거야?

"야! 이거면 됐지, 또 뭘 바래!"
"더 많은 팁! 늦은 밤!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아, 피곤하다.

결국 난 크레딧 카드를 꺼내서 내가 가진 건 이 카드 밖에 없다, 현금 없으니 털어가려면 털어가봐라 정도의 의미를 전달했다. 택시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가 준 동전들을 주머니에 챙겨넣고 차문을 쾅 닫았다. 저... 저 새끼가! 그 따위로 반응할거면 내 동전님들 내놓으라고! 너한테 같잖은 취급 받으려고 그 동안 캐나다에서 벌어온 동전님들이 아니란 말이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택시를 쫓아가 뒷범퍼를 발로 걷어차고 싶었지만, 역시 밤의 멕시코 시티는 무서웠기에 참았다.




11.

뭐가 됐든 이젠 좀 씻고 싶다. 숙소로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도통 아무도 나오질 않는다. 아, 또 왜....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니 벽 한 쪽에 메모가 붙여져 있었다. 메모 왈, 자기네들은 다른데에 있으니까 오면 전화하라는 소리였다. 전화? 내 요금제는 온니 캐나단데.... 멕시코 번호로 걸면 돈이 얼마나 나가려나....

별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눈물을 머금었던 건 오버가 아니었다. 나중에 남미 여행 끝나고 캐나다 가서 계좌 확인하는데, 그 한 통의 전화 때문에 평소보다 7불 정도 많은 돈이 빠져나가 있었다. 뭐야 이 깡패 같은 요금....)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고, 곧 찾아간다며 조금만 기다리란 말을 한 뒤 끊었다. 아아, 그 놈의 기다리란 소리는 대체 몇 번을 듣는 거야. 

10분, 아니 15분 정도 기다렸을까. 한 승용차가 골목길에 섰고, 숙소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숙소 현관을 열어주고 와이파이나 콘센트, 전등 스위치 사용법 같은 간단한 것들만 설명해준 뒤 빠이 하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내가 그 여자를 본 일은 없었다만... 여튼.

숙소 주인이 설명을 마치고 떠난 뒤, 난 그제서야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 나 혼자 뿐이란 걸 깨달았다. 낯선 곳, 늦은 밤, 텅 빈 공간, 유난히 크게 울려퍼지는 내 발자국 소리... 아, 아니 난 개인실을 빌린 거지, 건물 전체를 빌린 건 아닌데... 게다가 거대한 유리창이 나있는 1층 로비는 외부 침입에 엄청 취약할 것 같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거지? 우와, 꽤 무섭다, 이거.

'왜 2층에만 방이 있을까?' 라던가 '1층과 3층에 있는 알 수 없는 공간은 무엇일까?' 라던가 '왜 리셉션이 24시간이 아닐까?' 라던가 '왜 이상한 옷들이 로비에 널려 있는 것일까?' 따위의 미스테리한 점들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씻자고, 일단.

뭐, 이 숙소에 관해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그래서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올테니까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공포라는 감정은 피로를 이길 수 없다. 샤워를 하고 내 방 침대에 눕자 피곤함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난 의심쩍었던 것과 무서웠던 것도 잊은 채 미소 띤 얼굴로 중얼거리며 잠들었다. 음, 드디어 멕시코 시티에 도착했어. 드디어 멕시코 시티에...




도착하는데만 포스팅 하나를 소비해버렸지만 이건 결코 내 잘못이 아니라 아메리칸 에어라인 잘못이다!
책임회피를 시전하는 enat의 멕시코 시티 탐방기는 다음에 계속!





덧글

  • 도밍고 2014/11/03 22:52 # 답글

    이분 여행기로 여행예능 포맷 해도 되겠다
  • enat 2014/11/10 21:42 #

    핳하하! 고생하는 이야기만큼은 제 분야라고 말할 수 있죠!

    ㅠㅠ...
  • 찬별 2014/11/04 06:17 # 답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학생 시절에 밴쿠버 공항에서 비슷한 추억이 하나 있는데요,

    밴쿠버에서 캘거리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어마어마어마어마한 줄 때문에.... 비행기 시간을 놓쳐버렸는데

    완전히 썩어서 죽어가는 표정으로 에어캐나다 카운터에 나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카운터 직원이 이것저것 열심히 알아보더니

    니가 타고왔던 비행기가 5분 늦게 도착했으니 숙소를 찾아주겠다고... (실제로 환승 때문에 늦어진 시간은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그래서 하루 무료 숙박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제 돈을 내고 그런 숙소에 가본 적이 없는 레벨의 숙소였지요.

    덕택에 옛날 기억을 하나 떠올려봤네요~~
  • enat 2014/11/10 21:47 #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어마어마어마어마한 줄 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압니다
    진짜 저도 그 어마어마어마어마한 줄 때문에 거의 울 뻔 했어요. 출국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입국심사를 받아야한다니 어찌나 복창이 터지던지...

    하지만 덕분에! 좋은 호텔에서 잘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 새옹지마 이란 말은 정말 이럴 때 쓰는게 아닌가 싶죠 하하하!
  • 2014/11/04 08:4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10 21: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PennyLane 2014/11/04 09:06 # 답글

    킬킬거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이제 멕시코시티 도착이라뇨 ㅋㅋㅋㅋㅋㅋㅋ얼마나 더 버라이어티해지시려고 벌써부터 이리 스펙터클인가요
  • enat 2014/11/10 21:56 #

    더 버라이어티하고 스펙타클한 이야기는 엄써요...
    그냥 바보거지 여행자의 고행기만 잔뜩... 흐흐흑...

    아, 덧글 감사합니다!
  • 타누키 2014/11/04 10:37 # 답글

    코난처럼(?)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enat님 ㅎㄷ
  • enat 2014/11/10 21:58 #

    그래도 전 사람은 안죽여요! 그냥 제가 고생하고 말죠! ㅋㅋㅋㅋㅋ
  • 소원 2014/11/04 11:42 # 답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냐 아메리칸 에어라인!!! 그 말 나올때마다 빵빵 터졌어요ㅜ.ㅜ
  • enat 2014/11/10 22:00 #

    다음에 미국갈 일이 있다면 절대 아메리칸 에어라인은 이용하지 않을거라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굳게 하였답니다... 허헝ㅜㅠ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스트로보 2014/11/04 17:14 # 삭제 답글

    enat님 여행기의 숨은 애독자입니다!! 글솜씨가 너무 좋으셔서 매번 읽으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고생담(.....?) 너무 기대되요ㅋㅋㅋ 한국에 오셨지만 부지런히 집필해주시면 캄사!!
  • enat 2014/11/10 22:04 #

    취미로 쓰는 바보의 고행기를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쓰고는 싶은데 포스팅창만 보면 자꾸 잠이 와서 문제에요! 그것만 아니면 빨리빨리 쓸텐뎈ㅋㅋㅋㅋ
  • hymom 2014/11/06 00:10 # 삭제 답글

    빨리 다음이야기 올려주세요 궁금해요
  • enat 2014/11/10 22:04 #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이야기를 들엌ㅋㅋㅋ!
  • Mr 스노우 2014/11/06 05:21 # 답글

    항공편 결항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어봤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듣긴 처음이네요;;; 고생하셨습니다ㅠㅠ 그래도 그쪽 동네에 친절한 할머니들이 많으시죠ㅎㅎㅎ 참 저도 지금 다시 해외에 나와있답니다ㅋㅋ 영국이에요ㅎㅎ
  • enat 2014/11/11 05:06 #

    뭔가 악에 받쳐서 쓴 것도 없잖아 있어서 생생하게 느껴지셨을 수 있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지금 생각났는데 그 할머니 왈,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신적이 있다고 하셨더랬었죠.... 지금 갑자기 생각 나서... 포스팅 할 때 생각났으면 좋았을것을!

    아닛 영국이십니까!? 먼 곳에 계시는군요!! 여행인지 출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Mr 스노우 2014/11/11 05:59 #

    오오오 할머님 대단하신 분이네요ㅎㅎㅎㅎㅎ 영국은 여행이면 참 좋을텐데ㅠ 이번엔 공부하러 나왔어요ㅋㅋㅋ
  • 레아 2014/11/07 23:14 # 삭제 답글

    저도 아메리칸 에어라인 탔었는데 그 때 3시간 딜레이 ㅋㅋㅋㅋ 근데 그건 장난이었군요 ㅋㅋ 그 때도 뭔가 고장나서 고친다고 ㅋㅋ 그나저나 도대체 그 집에는 무슨 비밀이 있는거예요 ?.? 궁금 궁금
  • enat 2014/11/11 05:06 #

    아메리칸 에어라인 완전 상습범!!!!!! 뭐 그렇게 기체고장이 잦을까요... 다음부턴 절대 타지 말아야징...

    숙소는 그냥.... 투 비 컨티뉴.....
  • 벽속의요정 2014/11/08 11:12 # 답글

    아 아메리칸 에어라인 ㅋㅋㅋㅋ너무 재밌어요ㅋㅋ
  • enat 2014/11/11 05:06 #

    다신 타지 않을 AA!!!!! 으으으으 ><
  • 다이애나 2014/11/09 08:47 # 삭제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악ㅋ이거 뭐예요 너무 재밌어
    무슨 명랑소설보는느낌
  • enat 2014/11/11 05:06 #

    으악 명랑소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제가 사실 한명랑 합죠 ㅋㅋㅋ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ㅂ니다 와 답글 다썼다 이제 자야징...
  • Tabipero 2014/11/10 22:39 # 답글

    미국항공사가 좀...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미국항공사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면 항공사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기 때문에 어떤 비행기도 만족하며 탈 수 있습니다. UA 타봤습니다만, 그쵸...확실히 싸긴 쌌죠. 그렇게 따지면 올초에 에미레이트 타가지고 눈만 높아진 셈이네요(...)

    가만...비슷한 이야기를 포스팅에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 enat 2014/11/15 14:57 #

    오! 그렇다! 발상의 전환이네요. 저도 AA 탄 다음에 멕시코 시티에서 페루 넘어갈 때 란 항공을 탔었는데, 서비스에 눈물 흘리며 탔습니다. 뭐 이런 멋진... 멋진 서비스가... ㅠㅠ

    그러고보니 Tabipero님 여행기 업데이트 된 걸 하나도 못봤네요. 저녁에 컴퓨터 켰다가 포스팅만 하고 잠에 빠져들어서... 지금도 낮잠이 몰려와서... 앞으론 에스프레소 몇 잔 쌓아두고 글을 쓸까봐요... 후...
  • 2014/11/12 10:3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enat 2014/11/15 14:59 #

    경유시간이 한시간 뿐이면 보통은 짐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어요. 비행기에서 내리고 게이트에서 나와 다른 게이트 찾아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혹시 걱정되신다면 체크인 할 때 승무원에게 물어보세용.

    다만 문제는 딜레이 뿐인데요. 딜레이 되서 비행기 못타도 항공사에서 숙소랑 식권 다 제공하니까 챙겨가시는거 잊지 마시구요 ㅋㅋ
  • kate 2015/08/13 11:31 # 답글

    간만에 방문했는데 이번엔 남미로 날라가셨군요...
    즐거운 여행기 기대중입니다.
  • enat 2015/08/22 21:19 #

    음... 즐거움보다 짜증이랑 불평투성이인 여행기지만 정주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