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5 14:36

남미여행 (3) 멕시코 : 레지나 문화거리에서 밥을 먹다 ├ 남미 배낭여행 (2014)

* 전편(센트로 이스토리코 역사지구)에서 이어짐

* 익숙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레지나 문화거리' 가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음. 스페인어 아시는 분 Corredor cultural Regina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알려주시면 감사.

* 이번편은 짧아요





중앙 우체국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Bellas Artes (2, 8호선) 역에서 골똘히 생각했다. 일단 역 안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어딜 가는게 좋을까? 전편을 보신 분이라면 아시다시피 당시의 난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가이드 북도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인포메이션에서 받은 멕시코 시티 관광지도가 있다! 비록 모든 정보가 스페인어긴 하지만!




관광지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무정보상태 + 스페인어 까막눈인 나도 눈치로 대강 파악할 수 있다고! 하하하하!

일단 점심을 먹기 위해 저 지도의 하단부에 위치한, 알록달록한 상점들이 즐비해보이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쩐지 예뻐보여서.




Corredor cultural Regina... 스페인어니까 '꼬레도르 꿀트랄 레지나' 라고 읽어야 하나? 번역하면 레지나 문화의 거리? 여왕 문화 회랑? 아 어렵다, 여하간 대충 그런 식으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레지나 문화거리와 제일 가까운 역인 I. la Catolica 역에서 내려 북쪽으로 올라갔다.

Corredor cultural Regina 거리의 분위기는 약간 상수동 까페거리 같은 느낌. 많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고, 거리는 각 음식점에서 꺼내놓은 파라솔 테이블 때문에 부산스럽고 활기차보였다.

사진을 많이 찍어뒀으면 좋았을 것을, 점심식사가 생각보다 많이 늦어져서 - 3시였던걸로 기억한다! - 허기가 졌는지라 그러질 못했다. 사실 소칼로 광장 주변을 다 둘러본 이후엔 '오늘의 할당량 끝! 이제 자유 - 대체 뭐로부터? - 시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평범하게 밥 먹는 현지인들로 가득찬 거리에서 혼자 카메라 내놓고 여행자 티내기도 좀 뭣하긴 했다.

이번 여행에선 일기도 안썼고, 기록도 소홀히 해서 오로지 찍어둔 사진에만 기대어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아쉽게도 이 날 내가 밥을 먹었던 레스토랑의 사진이 없는지라, 대체 내가 그 많은 레스토랑 중 어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는질 모르겠다. 사진 없이는 기억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점심 한 끼를 먹기 위해 엄청 많은 레스토랑을 돌아다녔으니까. 맛집을 찾느라 돌아다녔냐고? 아니, 아니다. 난 무엇이든 잘먹기 때문에 굳이 맛집을 찾으러 돌아다니거나 하진 않는다. 내가 돌아다닌 까닭은 언어 때문이었다.

나 : 어... 메뉴? 너희 영어 메뉴 있어?
종업원 : #^%*%^*%. #&%^*!!
나 : ......?
종업원 : ......?
나 : ......
종업원 : ......(어색하게 메뉴를 보여준다)
나 : ......(뭐라고 써 있는거야)


말이 안통해... 너희가 얼마에 뭘 파는지 알고 싶어... 메뉴를 봐도 모르겠어....

쿠바에서처럼 끈질기게 매달리는 호객꾼도 없고 - 스페인어권 사람들은 붙잡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영어밖에 모르는 나의 지갑에 매달려 준 건 너희 쿠바 애들 뿐이었어... 멕시코 사람들 쿨하네... 그리운 쿠바... - 옆 테이블을 참고하려고 해도 점심시간이 이미 끝난 무렵이라 다들 간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물가가 저렴한 나라라면 제일 괜찮아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페셜 메뉴를 시키면 될 테지만 멕시코는 결코 물가가 싼 나라가 아니다. 메뉴를 보고 좀 생각해봐야하는 곳이라구!

덕분에 꽤 많은 음식점 앞에서 서성이다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아, 메뉴를 눈 감고도 알 수 있는 한국에서도 점심으로 뭘 먹을지 그렇게 고민하는데 여기선 오죽하겠어... 차라리 소칼로 광장 근처의 다국적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이나 갈 걸.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들린... 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레스토랑의 종업원과도 말이 안통해 좌절하는 날 붙잡은 건, 그 가게의 주방에서 뛰쳐나온 어떤 아저씨였다.

아저씨 : 소파?
나 : ?


그 아저씨는 당황해하는 종업원에게 자신에게 맡기라는 식으로 눈을 찡긋했고, 종업원은 다른 손님을 받으러 가버렸다. 매니저급 아저씨인 것 같은데. 말단 종업원과 얼마나 다른지 한 번 볼까. 

아저씨 : 소파! 뽀요! 아로스! XX페소!
나 : ....그, 그게 뭔데.


아저씨는 날 가게 밖으로 끌고 가더니 가게 문에 붙여져있는 사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국물 그려져 있는 건 소파, 닭이 그려져 있는건 뽀요, 밥이 그려져 있는건 아로스. 대충 수프랑 닭고기랑 밥을 준다는 것 같다. 그 아저씨는 내가 어물어물하자 이번엔 마임을 도입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후루룩 마시는 건 소파고, 나이프로 써는 건 뽀요고... 마임까지 마다하지 않고 보여주는 그 아저씨의 기백에 눌려 식당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매니저 아저씨가 엄청 열혈이야!


장난 아니잖아! 역시 매니저급이야! 말단 종업원과는 차원이 다르잖아!

샐러드 소스 달라고 했을 땐 진짜 깜짝 놀랐다! 온갖 소스를 통째로 - 어디 덜어서 가져온 것도 아니다, 상표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병들을 통째로!- 가져온 뒤 윙크를 하더라! 맥주를 달라고 했을 땐 가게에 있는 모든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온 뒤 "골라!' 라고 했을 정도! 내가 한 메뉴를 짚자 주방으로 달려갔다가 면과 쌀을 쥐고 돌아와 내 눈 앞에 들이밀 땐 이 사람이 장난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은 스페인어를 모르는 손님 -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뭐, 그렇게 장대한 서사시를 써가며 음식을 시킨 것 치곤... 맛은 평범했다.

그래도 매니저 아저씨 덕분에 끼니는 해결했다. 말이 한마디도 안통하는 사람에게 열정만으로 밥을 먹게 할 수 있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라고. 음식은 그냥 그랬지만 아저씨의 열정에 감동 받아 팁을 엄청 많이 두고 나왔다.




음식점 아저씨의 박력 넘치던 모습을 떠올리며 킥킥거리던 중, 거리에서 노점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여기 써있는 글씨들은 뭔지 알겠다. 다행이야, 이런 거라도 알아볼 수 있어서.




그래서 사먹은 프라페. 처음에 체리 올려주는 것 보고 오오오! 거리면서 엄청 흥분했었는데, 생긴 것에 비해 맛은 평범했다.




프라페를 마시며 걷다보니 어느새 레지나 문화거리에서 몇 블록이나 지나있었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하니 Instromentos Musicales 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악기 파는 건 많이 못보고 전자기기 파는 건 많이 봤다. 어쩐지 용산 전자상가의 느낌이 물씬 풍김.




이 가게 저 가게 들어가서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졌다. 퇴근길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끔찍하게 많았다. 여기서 더 돌아다닐까? 아니면...

아냐,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체력 조절 해야지. 그리고 사실... 도저히 저 인파를 뚫고 돌아다닐 용기가 나질 않는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은... 저녁은... 이 날 저녁으로 뭘 먹었지? 뭔가 먹은 것 같은데 사진을 안찍어서 기억이 안나네.

...그냥 다음날로 넘어가야겠다.



기억력이 점점 감퇴하고 있는 가여운 enat의 멕시코 시티 여행기는 다음에 계속!






덧글

  • 키르난 2014/11/15 15:22 # 답글

    기억의 휘발... 무엇보다 충격적이거나 아주 맛있는 무언가 없이 적당히 그럭저럭한 음식이어 그런가 봅니다. 열정만큼 맛에도 함을 쏟아 주사자... 크흑,,. 그나저나 이 때 멕시코는 괜찮았나 보네요. 하기야 그, 대규모 시위랑 살종사건아 10월 말이었으나 말압니다.;;
  • enat 2014/11/15 15:50 #

    아아아아아아, 맞아. 멕시코에 대학생들 실종사건이 있었죠! 스페인에 있을 때 뉴스 헤드라인으로 봤었는데,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저 때만 해도 굉장히 평화로웠어요. 레포르마 거리에서 자전거 대회를 열질 않나, 길가에서 에어로빅을 하질 않나...

    시위도 상당했군요. 지금 인터넷 찾아보다가 소칼로 광장에서 시위하러 모인 사람들 사진 보고 놀랐어요. 저 때나 지금이나 전 멕시코에 대해 아는 게 없군요. 으음... 부끄러워라.
  • qwer 2014/11/16 06:50 # 삭제 답글

    우연히 들른걸 계기로 여행기랑 캐나다 생활기 등등 재밌게 읽고 갑니다 ^^
    멕시코 정도면 북미에서 오는 관광객이 많을테니 간단한 영어를 할만도 한데 못하는군요..
    전 예전에 코스타리카에 간적이 있는데 서버들이 대부분 간단한 영어는 할줄 알아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요.ㅎ
  • enat 2014/11/17 23:29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영어 못하는 사람들만 만났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간 뭐 의외로 영어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오히려 멕시코보다 먼 칠레 사람들이 쪼끔 영어를 할 줄 알더군요 ㅋㅋㅋ
    코스타리카!!!!!! 아 진짜 가고 싶은 나라인데 서버들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건 희소식이군요!
  • hymom 2014/11/17 23:44 # 삭제 답글

    너무나 재밌게 보고갑니다
  • enat 2014/11/21 23:14 #

    땡큐베리감사
  • 소원 2014/11/21 23:32 # 답글

    아, 열정으로 밥을 파는 매니저 아저씨 이야기에 엄청 쿡쿡거리면서 웃었어요!!!!!
    뭔가 벙찌긴 한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ㅋㅋㅋㅋㅋㅋ
  • enat 2014/11/28 23:36 #

    그야말로 서빙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집합체!!!! 고객을 위한 정열적인 뜀박질!!!!!
    그 아저씨가 얼마나 주방과 홀을 오갔는지 모르겠어요 ㅋㅋㅋㅋㅋㅋ 음식은 별로였지만 아저씨 덕분에 이야기거리가 생겨서 기분은 좋았어요 ㅋㅋㅋㅋ
  • 2014/11/22 09:4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1/28 23: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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