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21 22:57

남미여행 (5) 멕시코 : 프리다 칼로 박물관 ├ 남미 배낭여행 (2014)


차풀테펙 공원을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프리다 칼로 박물관.

전날 밤 인터넷에서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프리다 칼로 박물관은 코요아칸 Coyoacan 에 가면 된단다. 지하철 노선도를 훑어보니 코요아칸이란 역이 있길래, 무턱대고 그곳으로 향했다.

난 아무 근거도 없이 코요아칸 역에 내리면 당연히 '프리다 칼로 박물관' 표지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왜, 멕시코에 대해 잘 모르는 나라도 '프리다 칼로'는 알고 있잖아. 그런 대단한 사람 박물관이니까, 찾는 관광객도 많을테고, 그럼 그런 관광객들을 위한 무언가가 있겠지 않겠어? 최소한 표지판은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없... 없다.... 프리다 칼로의 '프'짜도 안보여...

자신만만하게 코요아칸 역에서 내렸건만, 뭐... 아무것도 없다. 역 밖에서 바보처럼 멈춰서서 두리번거리다가 가장 가까운 백화점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하지 말자.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근방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을게다.

그래 저기 저쪽에 서 있는... 백화점 내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경비원. 저 사람이라면 알거야!

난 안쓰럽고 가녀리며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고 싶은 소녀 코스프레를 마친 뒤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경비원은 말도 통할 것 같지 않은 동양인이 도움을 요청하는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다가가자 당황한 내색이 역력했다.

나 : 있잖아,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
경비원 : 아! 프리다 칼로!


역시 알고 있다! 경비원은 처음에 내비쳤던 당황함을 내버리곤, 시원스럽게 길을 알려줬다.

경비원 : #^*(&! %*&, *&^%*(&^%$#^!@#!@#. OK?

뭐가 OK야.

내가 못알아듣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잠시 기다리라며 사라졌다가 조금 후 어디선가 종이를 구해온 경비원. 종이에 열심히 약도를 그려가며 길을 알려줬다. 그 약도는 굉장히 조악했지만, 일단 이 백화점의 남쪽 출구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백화점의 남쪽 출구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이번에도 난 그 출구만 나가면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출구를 나서서 내가 본 건 버스 정류장과 고가도로, 무수한 차량 뿐이었다.

어디야, 대체, 프리다 칼로 박물관은 어디에 있는 거야!!! 코요아칸에 가면 된다며!!!!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코요아칸이란 건 단순히 역 이름이나 동네 이름이 아니라, 멕시코 시티의 16개의 자치구 중 한 군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저 위 지도의 뻘건 부분으로 둘러싸인 부분 전부가 코요아칸.

그러니 난... 서울에 비유하자면, 강남구에 무슨 유명한 박물관이 있다는 말만 듣고, 2호선 강남역에서 내려 역 부근만 대충 둘러보며 "대체 그 박물관이 어디 있다는 거야!" 라고 불평을 하고 있는 꼴인 거였다. 우와, 멍청해라.




결국 백화점 경비원 말고 다른 행인들에게도 물어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코요아칸 사람들은 어째 프리다 칼로 박물관을 아는 사람 반, 모르는 사람 반이어서, 조금 긴가민가 하면서 걷긴 했는데...




물어물어 밍그적거리며 가는 도중 길 한복판에서 저 표지판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자신있게 걸었다. 이 방향이 맞는 길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걷는 건 일도 아니지! 걷는 건 내 취미이자 특기니까!

그나저나 코요아칸 메트로 역에도 이런 거 하나만 설치해주면 좋겠다. 그럼 길 찾다가 멘붕오지도 않고... 좋을텐데...




'코요아칸 구청장님에게 부치는 표지판에 관한 편지'를 머릿속에서 구상하며 걷길 15분 정도.

이것보다 더 새파랗게 칠할 순 없을 것 같은 강렬한 코발트 블루가 시선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 여행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로 보아, 아마 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 같다.




그런데, 뭐야 이 줄은!?

다들 프리다 칼로 보러 온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오는 길은 머릿속에서 구청장님께 편지를 쓸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란 말이야!?

궁금증은 줄을 기다리며 자연스레 밝혀졌다. 시티투어버스와 관광버스들, 심지어 택시들이 수시로 사람들을 내려주더라. 으음, 아무래도 메트로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얼마 없... 아니,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구청장님께서 메트로 역에 표지판을 세우지 않은 거구나... 당신이 옳았어요...




아픈 다리를 주물러가며 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선 사람들이 수시로 노점가게에 찾아가 먹을거리를 사오는 게 보였다. 단체로 온 손님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들 최소 2명은 짝을 지어 같이 다니니, 한 사람이 줄을 맡고 한 사람은 음식을 사올 수 있는 거였다. 부, 부러워...

분신술 같은 걸 쓸 줄 모르는 난, 줄이 줄어들면서 노점과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노점 아저씨를 불러 과자와 물 등을 사먹었다. 아저씨가 장사에 의욕이 있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꺼려하지 않는 분이라 다행이었다.




내가 구입한 건 우리나라 뻥튀기랑 비슷한 과자에 핫소스와 라임을 뿌린 거였다.

배가 고파서 그랬나 엄청 맛있게 먹었다. 한봉지 더 사먹고 싶었는데 그 땐 이미... 줄이 너무 줄어들어 노점을 지나친 상태였다...




줄이 그렇게 긴 것 같진 않아보였는데 한참을 기다렸다. 줄 줄어드는 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인원 통제를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단지 표 파는 창구가 하나 뿐이라서 그런 거였다. 창구 직원도 영어를 잘 못하고... 쩝.

요금은 성인 80페소, 학생 35페소. 국제학생증을 보여주고 학생요금으로 들어갔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은 프리다 칼로의 생가를 개조하여 만든 박물관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죽었다. 사실 프리다 칼로의 일생은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영화 등의 매체로 잘 알려져있기 때문에 대략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의 난, 그녀가 당한 두 개의 사고(하나는 물론 어린 시절 당한 전차 사고고, 하나는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버린 것 - 프리다 칼로 본인의 말)와 그 사고들이 불러일으킨 불행에 대해 깊은 유감과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로써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단 하나도 누리지 못한, 가여운 여류화가라고.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들여다본 작품 속의 그녀는 울거나 비통해하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만 가지고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나를 향해 '무슨 일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한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몸과 마음 어느 쪽이든 아프고 괴로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이 그림 속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림 속의 프리다 칼로는 고고하며 기품마저 넘친다. 어려서 당한 사고 때문에 평생 반불구로 살았고 바람둥이 남편은 동생한테까지 손을 대고 아이는 가질 때마다 유산했다. 동정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내 동정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박물관에 있던 방 중 하나. 주방으로 쓰인 듯. 프리다와 디에고라고 박혀있는 귀여운 벽장식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여긴 작업실인듯. 이젤 앞에 놓인 휠체어식 작업용 의자가 눈에 띈다.




프리다 칼로의 일생의 육체적 고통이 어릴 적 전차사고로부터 왔다면, 일생의 정신적 고통은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그런 그를 저주했을까? 프리다 칼로 박물관에 전시된 그녀의 침대 옆에는,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와 잠시 떨어져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을 때에, 디에고의 생일을 기억하며 일기에 적은 글귀가 박혀있다.


Jamás en toda la vida, olvidaré tu presencia. Me acogiste destrozada y me devolviste íntegra, entera.

'내 일생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을 거야. 당신은 조각난 나를 찾아냈고 나를 다시 가득차고 온전하게 해주었어.'


그녀는 평생에 걸쳐 그를 원망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했다. 프리다 칼로가 몹쓸 남편을 끝까지 사랑한 성인 군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말년에는 디에고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쭉 함께여서 다행이었다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저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간에 내가 감히 끼어들어 한쪽 편을 들며 불쌍히 여기고 상대를 욕하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는 말인 거다. 프리다든 디에고든 그렇게들 많은 이성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결국 그 둘의 마음 속 중심인물은 서로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었던 둘뿐이었으니.

함부로 동정할 수 없는 그녀의 삶,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 그런 고통과 애증을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는 척 밖에 할 수 없었던 난, 그냥 머리를 긁적이고 셀카로 기념샷을 박은 뒤 박물관을 나섰다. 나 같은 무지하고 행복한 범인은 배가 고프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천원짜리 타코 집에서 계속





덧글

  • 미자씨 2014/11/22 06:44 # 답글

    그런 고통과 애증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좋습니다!
  • enat 2014/11/28 23:14 #

    그쵸 역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생각해야겠죠!
  • 키르난 2014/11/22 13:47 # 답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삶을 이해하기에는 전 너무 평범하게 살았던 터라.. 음... 아니, 경험하지 않은 삶을 동경하거나 동정할 수도 있겠지만 프리다 칼로는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요. 동경도 동정도 필요 없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그림만으로 보아야할 것 같은... 하여간 묘한 감상을 가지게 되네요. 허허허.;
  • enat 2014/11/28 23:19 #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저도 평범하게 살아와서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작품에만 매달리는 모습이 저 생가에서 자꾸만 그려져서,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작품 속 그녀는 담담하지만, 영화 같은 매체 탓인지, 자꾸 그림에만 몰두하는 그 모습이 고독하고 외롭게만 그려져서... 쩝.
  • 징숙이 2014/11/22 18:44 # 답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 없지만 프리다 칼로의 삶과 작품이 요새 여러모로 저에게 영감을 주고 있어서 관심이 많은데! 이렇게 다른 분이 갔다오신 걸 보니, 더욱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네요~
  • enat 2014/11/28 23:23 #

    저도 관심이 많은 것까진 아니지만 중학교 때 봤던 영화의 기억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인물인지라, 멕시코 시티에 들린 참에 다녀와봤습니다. 멕시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 그나마 한국에서 가까운 곳이니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여행해보세요~
  • 아라레 2014/11/27 11:02 # 삭제 답글

    프리다 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인데
    정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 enat 2014/11/28 23:24 #

    멕시코 시티는 정말 가볼만 합니다! 프리다 칼로의 자취를 찾아 한번 여행해보세요.
  • DIANA 2015/01/20 02:12 # 삭제 답글

    드신 과자는 돼지껍데기로 만든 튀김 같은데요??ㅎ
  • DIANA 2015/01/20 02:13 # 삭제 답글

    드신 과자는 돼지껍데기로 만든 튀김 같은데요??ㅎ
  • enat 2015/01/22 13:37 #

    저도 그렇게 보여서 사먹었는데 그냥 밀가루였습니다 ㅠㅠ
    완벽한 밀가루 튀김맛...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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