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24 00:41

남미여행 (9) 멕시코 시티 한인 음식점 ├ 남미 배낭여행 (2014)

* 날짜로 따지면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이딴 포스팅을 해서 죄송.



멕시코 시티에서의... 음, 며칠째냐... 여하간 마지막 날에서 하루 뺀 날.

그 날 아침은 컨디션이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고, 열도 살짝 올라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이 날은 소치밀코에 다녀오는 거였는데, 머리가 지끈지끈하는 통에 다 포기하고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계속 누워만 있다가 아침을 챙겨먹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한식집에 찾아갔다. 다행히도 숙소 근처엔 영빈관이라는 한식집 한 곳이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가격대는 김치찌개가 만 원 정도. 어디 먼 곳까지 나가기 힘들어서, 그냥 이 음식점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음식점에 들어가서 힘없는 목소리로 김치찌개를 시켰다. 음식을 시키고 멍하게 앉아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나와 한국인이냐며 반겨주셨다. 어서 와, 유학생이냐, 어디 사냐, 멕시코엔 어쩐 일이냐, 기타 등등. 동향 사람이라 반가우셨던건지, 아주머니는 아예 내 반대편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난 진짜 말할 힘도 없는데... 김치찌개만 조용히 먹고 싶은데... 그래도 신나서 말 붙이시는 걸 무시할 수 없었기에 별 수 없이 '당신과 대화하기 싫은 게 아니라 원래 소극적이고 조용한 아이'인 척 하며 몇 마디씩 대꾸해드렸다.

이윽고 김치찌개 정식이 나왔다. 음식은 그럭저럭한 맛이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날 내버려두지 않고 자꾸 말을 거신다. 물론 타지에서 홀로 음식만 퍼먹는 것보단 말벗이 있는 쪽이 당연히 좋기야 하다... 만, 아주머니께선 서로 기분 좋을 대화를 이끌어 가는 데엔 영 소질이 없으신 것 같다.

아줌마 : 어디서 왔어?
나 : 캐나다요.
아줌마 : 영어 배우려고 왔나?
나 : 뭐 그렇죠.
아줌마 : 하여간에 요즘 젊은이들은, 뭐가 중요한지를 몰라. 영어 말고 스페인어를 배워야지.


......어......응? 나한테 하는 말이지?

나 : 그래요?
아줌마 : 그래, 겉멋만 들어서 캐나다, 미국 이런데나 가지, 스페인어 배워서 멕시코에 오는게 훨씬 살기 좋아.


......어......뭐......아마 멕시코에서 잘 살고 계신 것 같다. 자신의 경험에만 기대어 가치판단을 해버리는 경우는 나도 가끔씩 있으니,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빨리 먹고 나가자.

아줌마 : 근데 혼자 유학하러 캐나다 간거야?
나 : 거의 혼자 지냈죠.
아줌마 : 나도 여기서 여자 혼자 유학 온 애들을 몇 번 봤는데.
나 : 용감하네요. 혼자서 멕시코라니 대단하기도 하고.
아줌마 : 대단하기는 무슨, 그렇게 외국에 혼자 나온 여자애들은 열이면 열 남자 만나서 문란하게 지내.


......저기, 저도 방금 혼자 왔다고 했는데.

거의 모든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별로 깊게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아져서, 그냥 그렇군요, 저렇군요, 등등으로 대충 넘겼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멕시코에 와서 가게 차리고 돈 많이 번 나는 정말 잘 된 케이스. 난 빌딩도 몇 채 있다. 한국에서 취업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징징대지 말고 나처럼 멕시코에 와라. 그게 성공하는 길이다.' 정도의 말이었다.

그 때 강아지 한마리가 가게에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기르고 있는 강아지인듯 했다. 밥 먹고 있는 내 앞에서 털을 날리며 몸을 파르르 떨길래, 살짝 뜨악한 얼굴로 쳐다봤더니, 아주머니는 넉살맞게도 '어머, 언니 식사하는데 그러면 안되는거야' 라며 그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드디어 자리를 떠나시나 했더니 강아지를 안은 상태로 내 맞은편에 앉아 '언니한테 인사해야지' 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내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강아지와 함께 나에게 들려줬다.

......그냥 이젠 다 모르겠고 피곤하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도 당시 나로서는, 당신 딴에는 한국인 학생이 왔으니 잘해주시려고 나름 노력한 것일게다, 그저 관점이 나랑 맞지 않았던 것이겠거니... 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뭐 도울 건 없지만 팁이라도 넉넉하게 두고 나가야겠다, 그게 동향인들끼리의 인정이지 않겠나 싶어서 음식 가격의 20% 정도를 팁으로 더 냈다.

사실 이 생각은, 그랜드 프레리에서 우리 사장님이 우연히 찾아온 한국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모습을 하도 많이 봐서 생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캐나다 촌구석에서 헤헤거리며 살던 애가 멕시코 대도시에 와서 적응 못하고 뻘짓한 거라는게 곧이어 밝혀졌다.

인사를 하고 돈을 내고 나가려는데, 아주머니께서 내가 드린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이런 말을 하셨다.

아줌마 : 어머, 네가 한국에서 와서 모르는구나. 너 서빙한 애한테 팁 주고 가야돼.
나 : 네? 아, 방금 드린 거에...
아줌마 : 응? 이거? 아, 이건 물값이야. 어떻게 또 알고 냈네.


......물값?

난 물을 시킨 기억이 없는데.

나 : 아니, 무슨...
아줌마 : 동전 있어? 동전 하나(1불 정도)만 쟤 주면 돼. 얘, XX야, 이리 와봐!


아주머니는 벙쪄서 입을 달싹거리는 날 무시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은 멕시코 사람이었는데, 내 앞에서 팁을 기다리며 순박하게 웃었다.

......어......이걸 어쩌지.


쿠바 여행기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미 쿠바에서 당했던 사건들을 통해 거듭난 모습을 보여드렸기에, 쟤가 여기서부터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다. 만약 저 가게의 주인이 멕시코인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한국인. 같은 나라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과 고작해야 천원, 이천원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던 종업원에게 팁을 주고 나왔다.


몸보신이라도 할까 싶어 한식집에 갔는데 오히려 남아있던 기력마저 빼앗겼다.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식사하면서 그 아주머니가 '내가 빌딩이 몇 채야', '주위에서 나보고 성공시대에 나가보래' 라는 이야기를 계속 하셨었는데, 그 아주머니께서 타지에서 어떻게 돈을 벌고 또 어떤 식으로 부자가 되셨던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음침하게 잔뜩 찌푸린 멕시코 시티의 하늘을 보며, 숙소로 들어가 잠이라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건진 게 없는 무익한 외출이었다. 차라리 길거리에서 떡을 사먹을걸.



원래 한인식당하고 숙소에서 겪은 일을 붙여서 포스팅할 예정이었는데,
여기서 숙소 이야기까지 하면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한 포스팅이 될 것 같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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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눈아찌 2014/12/24 07:40 # 삭제 답글

    꼭 타지에서만 그런 건 아니고 돈 많이 번 사람 중엔 그런 사람 많아요.
    지금 일하는 곳 보스도 부동산이 3개라고 은근 자랑하는데 우리한테 캔커피 하나 돌린 적 없고 오히려 얻어먹어요.
    저번엔 치킨 시켰더니 여기 맛도 없고 튀긴 건 몸에도 안 좋다면서 닭다리 두 개 다 처먹고 아 그러고 보니 건강에 안 좋은 거라 먹어없앨려고 한 거긴 염병 어쨌든 백세장수는 이미 예약이고 어쩌면 무덤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저렇게 인정머리없이 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네요.
    영빈관 홍보할게요.
    가지 말라고. ㅎㅎㅎ
  • enat 2014/12/24 12:24 #

    와나 튀긴건 몸에도 안좋다며 닭다리 두개를...
    그런 사람들 보면 별다른 재주도 없이 대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저라도 저렇게 살기는 싫어요 ㅜㅠ 저 땐 캐나다 시골 속 훈훈함을 아직 못벗어났던터라 뭔가 오해가 있었나 아주머니가 돈을 잘 못 세시나 등등의 생각도 했었네요.... 돈을 잘 못 세긴 개뿔 저런 생각을 잠시나마 했던 내 자신이 바보같다 으으으아아
  • 키르난 2014/12/24 08:38 # 답글

    아아아.... 왠지 우울우울우울. 게다가 노트북이 사경을 헤멜뻔 하다가 살아나서 쓰는 이야기가 아...;ㅂ; 타지에서 이상한 한국인 만나 돈 뜯긴 이야기로 밖에 안 보이니 말입니다. 아....;ㅂ;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ㅠ_ㅠ;;
  • enat 2014/12/24 12:26 #

    노트북은 간신히 깨어났는데 추억속 제가 저러고 있군요.... 그 노트북에 그 주인.... ㅠㅜ
    타지에서 이상한 한국인 만나 돈 뜯긴 이야기
    가 맞습니다... 맞네요... 저걸로 포스팅 제목을 할 걸 그랬어!
  • Jose Park 2014/12/24 13:13 # 답글

    참...식당 주인 아주머니를 보면서, 타지에서 같은 한국인한테 저러고 싶을까 싶으면서도 저것도 먹고 살려는 방법이려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씁쓸한 포스팅입니다 :(
  • enat 2014/12/26 00:56 #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안그런 한국인들도 있는데 ㅜㅠ 여태까지 안그런 한국인들과 같이 살았었는데 ㅠㅠ 뭔가 쇼크였어요.
  • 찬별 2014/12/25 02:05 # 답글

    그 아주머니가 현지에서 성공하기까지는 아마도 한국인 관광객에게 씌운 바가지가 적지 않은 몫을 차지했을 것 같군요. 쩝.
  • enat 2014/12/26 00:57 #

    그랬...으려나요. 그러고보니 자신보고 성공시대에 나가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나... 안돼 그런 스토리론 나갈 수 없어...
  • 타누키 2014/12/25 16:44 # 답글

    헐 ㅠㅠ;;;
  • enat 2014/12/26 00:57 #

    헐 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음식점 ㅠㅠ...
  • 하율이 2014/12/25 22:31 # 삭제 답글

    한국사람 얄미워
  • enat 2014/12/26 00:58 #

    그냥 저 아주머니가 좀 얄미우셨던거징. 안그런 한국인들도 많아.
  • sayoo7 2015/02/10 02:07 # 삭제 답글

    그런사람들은 단호하게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그정도 당하신건 새발의 피입니다~
    저희가족도 그분들에게 몇개월간 말도 안되는 가입류 협박에 고통까지
    겪어 풍지박살이 날뻔햇는걸요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믿음을 이용해. 당한게 저희가 처음도 아니였더군요
    나중에 변호사를 선임해 단호히 나가니 꼬리를 내리더군요.
    작은 욕심 때문에 친구도 돈도 잃었죠
    그 손님한테 하는 걸 보니...엮이길 않은게 천만 다행이네요
    그때 생각함 공포태러입니다~!!
    어떤상황이든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땐 화를 내서라도 단호히
    잘라야 그런짓못합니다.
  • enat 2015/02/15 12:04 #

    에ㅔ에에ㅔ엥 완전 나쁜 사람들이잖아요 이거!?
    안그래도 타지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인데 불쾌했지만 그냥 넘어가자 이런 맘이었는데에엥
    어디 교민 커뮤니티에 글이라도 올려야하나...
  • 교민 2015/02/25 11:50 # 삭제 답글

    멕시코시티 영빈관 아주 유명하죠. 그런 일들로.계산서 속이기로
  • 류슬기 2015/07/29 17:10 # 삭제 답글

    남미 여행 계획중이라 들어와봤는데 '영빈관'흠.. 알겠습니다.
  • bonbon 2015/11/03 15:07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저도 이주일 뒤면 멕시코로 혼자 떠나게 될 여자입니다...
    블로그 글 너무 재미있게 잘읽었어요!
    사람들이 멕시코를 여자 혼자 어떻게 가냐..제정신이냐..등등 .. 걱정(?)을 많이 해서 아무 생각 없던 저도 무서워졌는데
    이런 글 읽고 나니 너무 재밌어 보이고 정말 가고싶어졌어요!
  • enat 2015/11/04 22:13 #

    멕시코 가십니까아아아 ㅠㅠ 크으 중남미 너무 다시 가고 싶은데 부럽습니다아 ㅠㅠ
    혼자서 여행 가시는 건가요? 아니면 생활하러?
    저야 멕시코 시티만 가서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멕시코 시티만 놓고 보면 살만한 도시입니다. 꽤 화려해요!
    멕시코는 한국보다 쪼끔만 더 조심하면 됩니다. 솔직히 한국도 어두울 때 으슥한 곳 가면 위험하잖아요! 쪼끔만 더 안어두울때 돌아다니고, 쪼끔만 더 안으슥한데만 다니고... 그리고 항상 말똥말똥하게 다니시면 위험한 일 없으실거에요!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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