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18 12:01

남미여행 (13) 페루 : 세비체 먹고 애꾸가 되다 ├ 남미 배낭여행 (2014)

페루 사흘째, 그러니까 리마를 떠나는 날.

...떠나는 날? 사실 리마는 떠난다는 느낌도 안든다. '리마' 하면 생각나는 건 그 젠장맞을 대머리 뿐이니, 리마와 정이 들었을리도 없고, 머무는 동안 날씨도 계속 꿀꿀했기에 그렇게 좋은 인상도 없다. 리마를 떠나는 날이라니, 그냥 파라카스로 가는 날이라고 하겠다.

여하간 파라카스로 가는 날! 파라카스행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사실 전날 대머리가 또 어처구니 없는 액수를 제시하며 "파라카스로 가는 버스 티켓이 필요하면 말해라, 내가 사다주겠다, 하지만 내가 터미널에 오가는 비용이 있으니 그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나 원래 이렇게 안해주는데 너라서 해주는거다" 라며 꼬셔댔었는데, 단칼에 거절하고 내가 알아서 티켓을 구입하겠다고 했다. 대머리는 그런 내가 안됐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으며 당일날 터미널에 가서는 티켓 구하기 힘들다고 했지만...




터미널 가자마자 구했다.

....그 대머리 자식을 진짜.



리마를 떠나는 와중에도 대머리 이야기라니 우울하다. 내버려두고 버스 이야기나 해보자.

페루는 버스 노선이 잘 발달되어 있는 나라다. 여권 검사를 받은 뒤 검색대를 지나,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를 대비한 승객 사진 촬영 후, 예쁜 승무원 언니에게 담요와 도시락을 받아 넓은 2층 좌석에 앉으면, 내가 버스에 탄 건지, 비행기에 탄 건지 헷갈릴 수도 있다.

이번에 내가 이용한 파라카스행 버스는 크루즈 델 수르 Cruz del Sur 로, 페루의 그 많은 버스 회사들 중에서도 서비스 좋기로 소문난 고급 버스 회사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 버스를 이용한다고 들어서, 처음엔 나도 별 생각없이 이 버스로만 예약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페루에 조금 익숙해진 뒤엔 교통비를 절감한답시고 크루즈 델 수르의 절반 정도의 가격인 저가형 버스를 이용하여 개고생을 하게 되는데... 뭐, 그 이야기는 투 비 컨티뉴.


여하간 리마에서 파라카스까지 가격은 61솔. 전날 크루즈 델 수르 인터넷 사이트에서 봤을 땐 58솔 정도였는데, 당일 현장구매라서 가격이 올랐나보다. 역시 미리 예약해 놓을걸 그랬나. 아니면 어차피 리마에서 파라카스까지 버스로 3, 4시간 밖에 안걸리는거, 크루즈 델 수르 말고 다른 버스 회사를 이용했다면 더 저렴했을 것이었고. 별 수 없는 거지만, 무지했던 지난 날의 자신이 조금 아쉽다.




버스 안에서 예쁜 승무원 언니가 준 간식을 먹은 뒤 조금 졸다가 깼다. 그런데 어... 그러니까... 어...


사막이다. 창문 밖으로 사막이 보인다.


...왜!? 왜 창문 밖으로 사막이 보여!? 이렇게 버스에서 졸다가 깨면 창 밖에 산이나 아파트 단지가 있거나 (한국), 나무들로 뒤덮힌 숲이나 들판이 있어야 (캐나다) 하는 거 아냐!?

갓 잠에서 깬 나에겐 엄청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게다가 사막 바로 옆으로는 바다가 있어!

뭐야 여기! 내 상식을 엄청난 기세로 뒤집어 버리는 풍경들로 가득해! 역시 남미로구나!




비상식적인 광경에 잔뜩 고무된 채 파라카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수화물 받는 곳에서 캐리어를 돌려받은 뒤, 인포메이션 직원들에게 마을에 대한 기본 정보를 얻었다. 정보래봤자 마을 자체가 워낙 작은지라 그닥 특별한 건 없었지만, 직원이 침을 튀겨가며 열성적으로 설명해주는게 마음에 들어 끝까지 다 들어줬다.




인포 사람들과 빠이빠이한 뒤, 버스 터미널을 나와 전날 리마에서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캐리어를 질질 끌며 생각했다. 예약 괜히 했다고. 그냥 도착해서 알아보고 다닐걸. 터미널에서 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제법 괜찮아 보이는 숙소들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으음... 뭐, 지금 내가 가는 곳도 저 정도 수준이겠지... 걱정말자...




후회와 기대가 반반씩 섞인 채로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에서 두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앱을 아예 삭제해버리고, 파라카스부터는 곧잘 써오던 부킹 닷컴을 이용했다. 사진에 나온 하얀색 외벽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예약해버린 이번 숙소. 호스텔이나 호텔 같은 거겠지 싶었는데, 이번에도 가정집이다. 영어를 떠듬떠듬 할 줄 아는 멜리사(딸)가 손님을 받고, 나머지 가족들은 음식이나 방정리를 하는 등, 한 가족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멜리사 : 어서와! 어, 이름이...
나 : 리.
멜리사 : 리! 반가워! 어디보자, 여기 예약내역이...


제법 평범하게 진행되는 체크인. 다행이다. 이번엔 댄스 교실도 없는 것 같고, 택시를 권하는 것 같지도 않다.

멜리사 : 혹시 바예스타스 섬 투어 하고 싶으면 말해! 우리 숙소에서도 예약할 수 있으니까. 가격은 XX야.

투어를 하나 권했지만 그냥 정보 전달 수준. 난 좀 더 둘러본 뒤 정하겠다고 했고, 멜리사도 마음대로 하라며 보채진 않았다.

이번엔 뭔가 느낌이 좋다. 드디어 남미여행 2주만에 좀 제대로 된 곳에서 묵게 된 것 같다. 난 생글거리는 얼굴로 멜리사에게 키를 받고 내 방 번호를 찾아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시멘트 바닥에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당황해서 뒤를 돌아본 나에게, 멜리사는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방 아니냐는 미소로 화답했다. 아, 아니... 그치만... 벽은 컨테이너 박스의 그것이고, 바닥은 시멘트 맨바닥, 있는 거라곤 허접한 침대와 작은 서랍장...

멜리사 : 콘센트는 여기 있어.

아, 다행이다. 콘센트는 있다.

멜리사 : 아, 저기 다른 손님이 부르네? 좋은 시간 보내!

아... 어...

......

이번 여행은 정말 숙소복 없구나...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회색빛깔 방에 홀로 남겨진 채 중얼거렸다.




뭐, 그래봤자 하루만 숙박할 거니까!

곧 정신을 추스리고 파라카스 앞바다로 나왔다.

리마에서도, 멕시코시티에서도, 날씨가 그렇게 흐리더만, 여긴 참 맑다. 간만에 쬐는 따사로운 햇빛에 정신 못차리고 행복해했다.




바다에 띄워진 수 척의 어선들을 바라보며 파라카스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그래, 어선은 아니지만 여하간 이곳엔 배를 타러 온 거였지.

파라카스, 페루 수도인 리마에서 남쪽으로 3, 4시간 정도 떨어진 이 작은 마을을 여행자들이 찾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 바예스타스 섬으로 갈 수 있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평선이 있어야할 곳에 갈색의 뭉툭한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일텐데, 그게 바로 바예스타스 섬이다. 바예스타스 섬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곳에선...




요러요러한 녀석들을 볼 수 있다. 뭐, 이것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마을 곳곳에서 바예스타스 국립공원 투어를 예약할 수 있으니, 여러군데 들어가서 흥정도 해보고, 홍보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잘 듣고, 팜플랫도 잘 보고 고르면 된다. 된다... 후후... 고르면... 된다?

그래, 원래는 자신이 고르는 거다. 절대 아래의 나처럼 한 여자의 눈물에 홀랑 넘어가 아무 투어나 예약하지 말자.

멜리사 : 어, 리! 바예스타스 투어 예약은 했어?
나 : 아직 안했어. 여러군데 돌아다니다 왔는데, 고민 중이야. 잠깐 쉬러 들어온거고.
멜리사 : 그럼 우리 투어로 하는 건 어때!?
나 : 너희 투어? 가격이 얼마랬지?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래봤자 한화로 1만원~2만원 선이었던걸로 기억), 내가 마을에서 흥정해서 내린 최저가보다 5솔 정도 더 많은 가격이었다.

나 : 에이, 비싸다. 나 더 싼데도 발견했는데?
멜리사 : 아, 아냐! 그건 배가 다른거야!
나 : 배가 다르다고?


멜리사는 내 질문에 팜플랫을 들이대며 외쳤다.

멜리사 : 이거봐. 우리 배는 최신식이라구! 다른 투어랑은... 달라...

울망울망한 얼굴로 자기네 투어를 소개하는 멜리사. 아니, 왜 울먹거려...

나 : 아, 그, 그렇네. 너희 투어 좋아.

그러니까 울지마.

멜리사 : 그치? 우리 투어 좋지? 히히. 그래서 가격이 더 비싼거야.
나 : 으... 음, 그, 그렇구나.
멜리사 : 우리 배 안전해. 다른 배 위험해. 우리 투어 할래?
나 : 어... 어... 그래. 너희 투어로 할게.


그렇게 마을에서 정보수집한 것도 무색하게, 숙소에서 연계하는 투어를 잡아버린 나.

덕분에 난 다음날 그 대단하신 멜리사네 투어를 체험하게 되는데.... 뭐, 이것도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그렇게 내일 아침 (참고로 바예스타스 국립공원 투어는 오전 투어 밖에 없다. 모든 일정이 오전 중에 끝남!) 투어를 예약한 뒤, 내일 오후에 이카로 떠날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또 터미널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나저나, 터미널이 있는 도로 쪽, 그러니까 마을 바깥 쪽은 정말 황량하다. 바로 옆은 바다인데, 어떻게 이런 사막이 펼쳐질 수 있는거람. 안데스에서 불어오는 높새바람 같은 것 때문인가? 뭐 때문일까? 여하간 이런 황량한 풍경은 처음이라, 보고 있으면 속이 뻥 뚫리기도, 허하기도 해서 신기하다.




이카행 버스티켓을 끊은 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때에, 나는 간신히 내일 할 투어와 내일 탈 버스 예약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으아, 신난다! 다음날 할 것, 탈 것, 잘 곳 등등의 일정을 다 준비한 뒤, 계속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땀 닦는 이 순간. 여행 중엔 이 순간이 제일 신나는 것 같다.

이 최상의 기분을 어떻게 이어나갈까 하다가 자축기념 세비체를 먹기로 했다. 어떤 식당을 갈까 하다가 얼빠답게 훈훈한 남자애가 호객 행위를 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싹 빠진 타이밍이었는지, 그 식당은 다른 가게들에 비해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페루 식당 어디든 가기만 하면 기본 안주(?)로 나오는, 아마도 페루의 국민간식이 아닐까 싶은 녀석이 나왔다. 페루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모르겠고, 대충 콩을 소금에 볶은 건데, 고소해서 심심풀이로 딱인 듯.

근데 계속 먹으면 입안이 텁텁해져서 음료수가 땡긴다. 나도 콩만 계속 주워먹다가 결국 잉카콜라를 주문했다.




세비체는 시키자마자 등장했다. 무지 빠르네. 뭐, 회무침이니까 별로 조리할 것도 없겠다만.

여하간 페루에 와서 두번째로 먹는 세비체다! 리마에서 먹은 세비체 녀석은 날 밤새 복통에 시달리게 했지만, 여긴 항구마을이니까 좀 더 신선하지 않을까! 괜찮을거야!

두려움 없이 세비체로 돌진했다.




세비체로 배를 채운 뒤, 또 바다로 나갔다. 역시 바닷바람은 기분이 좋다. 으음, 인천이 그리워지는데...

혼자 해변에서 깡총거리며 놀고 있는데, 웬 남자애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통성명을 하긴 했는데 이름은 까먹었다. 심심해서 몇 번 대꾸해줬더니, 엄청 친한 척 하면서 밤에 파티가 있으니 어디어디로 놀러오란 소리를 했다.

나 : 어... 나 밤에는 바쁜데.
남자애 : 왜!? 다른 파티에 가는거야!?
나 : 아니, 밤에는 자야해서.
남자애 : 그게 뭐야! 야, 밤에는 노는거야! 너 놀러 온 거잖아!
나 : 아니 근데 나, 술은 친한 사람들끼리만 마시고, 춤추는 건 별로 안좋아하고.
남자애 : 그게 말이 되냐! 너 혼자 온 거 맞지?


우잉. 귀찮다.

나 : 아니, 남편이랑 왔어. 몸 안좋다고 숙소에서 자고 있어.
남자애 : 뭐!!!!!!! 결혼했단 말야!?


남자애는 결혼한 주제에 왜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냐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이번에 한국에 돌아가면 위장 반지를 하나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남자애에게 거짓말을 해서 조금 켕기는 기분으로 배실배실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네고, 숙소로 돌아왔다. 밀린 빨래도 맡기고, 흔들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쉬다가, 감옥 같지만 이제는 슬슬 적응이 된 내 방으로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


......


간만에 기분 좋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어라? 천장이 이상하게 보인다. 뭐지?

한쪽 눈에 이물감이 들어서 잠시 비볐더니 아예 떠지질 않는다. 엥? 지, 진짜 뭐여 이거!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 한쪽이 퉁퉁 부은 낯선 얼굴의 동양인 여자애가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당황한 난 밖으로 뛰쳐나가 대문 옆 카운터에 앉아있던 멜리사네 아줌마에게 찾아갔다.

나 : 눈이 이상해!
멜리사네 아줌마 : Oh! @#%^?? #$&^$?


멜리사네 아줌마는 스페인어로 뭐라고 외치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줌마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그저 끙끙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는데, 어느새 멜리사가 나타나 내 곁에 바짝 붙어 등을 쓸어주며 아줌마의 스페인어를 통역해주기 시작했다.




멜리사 : 아니, 리! 이게 어떻게 된...
멜리사네 아줌마 : #$&^%!! $&*%*? %^&??
멜리사 : 리, 우리 엄마가, 혹시 오늘... 생선 같은 거 먹었냐는데?


생선? 생선이라면 오늘 낮에 세비체를 먹었는데.

나 : 세비체. 세비체 먹었어.
멜리사네 아줌마 : Oh... 세비체... 알레르기...
멜리사 : 이런, 리. 알러지야! 신선하지 않은 걸 먹었나?


그 때 낮에 다녀온 식당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식당은 다른 가게들에 비해 유난히 사람이 없었고, 세비체를 시킨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음식이 나왔었지. 마치 미리 만들어 놓은 것처럼... 미리... 만들어 놓은 것처럼?

나 : 아... 아마도...?
멜리사 : 세비체는 쉽게 상한단 말야! ㅠㅠ 조심해야지!
멜리사네 아줌마 : $%&%*&&*!! %&%*&*!
멜리사 : 엄마가 너 병원에 갈꺼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같이 가줄게!
나 : 웅... 병원 갈래...


두 모녀가 내 주변을 맴돌며 호들갑을 떨자, 다른 방에 있던 여행자들도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나와서 구경했다.

여행자1 : 헐, 세비체를 먹고 이렇게 됐다고?ㅋㅋㅋㅋㅋㅋㅋ
여행자2 : 나 내일 세비체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도전 포기ㅋㅋㅋㅋ
여행자1 : 나도. 애꾸가 되는 것보다야ㅋㅋㅋㅋㅋㅋㅋㅋ
여행자3 : 무슨 소란이야? 어머, 너 눈! 눈!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 웃지마. 웃지말라고...


뭐가 그렇게 웃겨! 난 심각해 죽겠는데 웃지 말고 걱정을 하란 말이지!




그런 웃음바다 가운데에서도 한 이탈리아 중년 커플은 나만한 딸 혹은 조카가 있는 건지, 날 안쓰럽게 쳐다보며 걱정과 위로의 말을 꽤 오랫동안 건넨 뒤 들어갔다. 크윽, 내가 그래서 이탈리아를 좋아해...

그렇게 다른 여행자들과 수다를 떨다보니, 저쪽 건물에서 멜리사가 풀메이크업을 하고 나오는 게 보였다.

멜리사 : 난 준비 다 됐어. 이제 병원 가자.

병원에 가려고 꾸민 건가? 병원이 어디 먼 읍내에 있는 건가?

그래서 조금 긴장한 채로 멜리사의 손을 꼭 붙들고 따라나섰더니, 병원은 숙소 앞 5분 거리였다.

...그러고보니 있지, 우리나라에도. 과자 사려고 집 앞 슈퍼마켓 가는데도 꽃단장을 해야하는 사람.


한쪽 눈만 뜬 채로 걸으려니까 조금 정신이 없다. 머리도 어지럽고. 하지만 옆에서 떠듬거리는 영어로 어르고 달래주는 멜리사 덕분에 그렇게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 인적 드문 도로에서 유일하게 밝게 빛나던 파라카스의 병원. 사실 말이 병원이지, 외관은 나 어릴 적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구멍가게와 거의 흡사했고, 굳이 다른 점을 찾아본다면 슈퍼마켓에서 담배 파는 선반은 약품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 어설픈 가림막 뒤에 침대가 하나 놓여있다는 점 뿐이었다.

병원이 이 모양이니 의사도 어쩐지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멜리사가 '이보다 더 뛰어난 명의는 페루에 없다' 는 신뢰의 눈빛을 의사에게 팍팍 보내길래, 간신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의사, 영어를 모른다. 간신히 붙잡아놓은 안심이 저 멀리 날라갔다. 불안해서 눈만 굴리고 있는 나를 내버려두고, 멜리사와 의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 하는거야... 환자인 나도 끼워줘...

정신을 차리자 침대에 엎드려 주사를 맞고 있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뭐, 뭐야. 내가 언제 여기 엎드렸지? 원래 눈 한쪽이 안보이면 정신줄도 잘 날라가나? 당황해서 몸을 뒤틀려고 하는데, 헝클어진 내 머리를 멜리사가 쓰다듬었다. 괜찮다, 괜찮다, 하고.

뭐, 뭐야. 쓰다듬는다고... 뭐... 그깟... 머리... 쓰다듬... 헤... 헤헤. 기분 좋다...

히죽거리며 주사를 맞고, 약까지 지어받았다. 명의 가라사대, 이제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며, 눈 부은 건 하룻밤 자면 가라앉을 거니까, 약 먹고 자란다. 가격은 한화로 대강 7천원? 8천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고맙다고 꾸벅 인사한 뒤 병원을 나왔다.

여전히 한 쪽 눈은 탱탱 부은 채였지만, 그래도 좋아질거란 말에 순한 한마리의 양이 되어 멜리사의 손을 꼭 붙잡고 숙소로 향했다. 말 그대로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를 아장아장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시는 세비체 안먹을거야.



바예스타스 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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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레키 2015/01/18 13:07 # 답글

    세비체 나쁜 놈 ㅠㅠ...이라기보다 역시 손님 없는 곳은 없는 이유가 있는 거 같네요...
    어휴ㅠㅠㅠ.....근데 알레르기 무섭네요 -_-; 사람 애꾸만들 정도라니... 어쨋든간 다음 날 낫게 된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라지만 아직 다음 여행기가 안올라왔으니 방심할 수가 없어!
  • enat 2015/01/19 23:24 #

    세비체 나쁜자식 ㅠㅠㅠ 으어어어엉
    손님이 싹 빠져서 만들어놓은 음식이 남았던건지, 그걸 내놨던건지, 여하간 운이 없었어요.
    사람들 많은 몇십솔 비싼 곳에 가서 먹을것을... 후후...

    다음날... 다음날은... 후후... 흐... 다음 여행기에서 계속이요! ㅋㅋㅋㅋㅋㅋ
  • 타누키 2015/01/18 13:24 # 답글

    꽃보다 시리즈에서 보고 무슨 맛일지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ㅎㄷ
  • enat 2015/01/19 23:25 #

    레몬을 뿌려서 시큼하고, 생선이야 평범한 식감이에요.
    그리고 가끔씩 복통이나 눈병을 일으키죠... 후후후...
  • 키르난 2015/01/18 13:54 # 답글

    하하하하하............... 페루 여행 앞부분은 고난과 후회의 연속이군요. 하지만 저 바다는 정말 예쁩니다...... 세비체는 아름답지 않지만 뭐든 새용지마.ㅠ_ㅠ; 완벽한 여행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하하하하하..;ㅂ;
  • enat 2015/01/19 23:27 #

    페루 여행 앞부분... 고난과 후회의 연속... 저도 그렇게 쓰고 싶습니다만...

    사실 남미 여행 전부가 고난과 후회의 연속입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래서 남미 여행 진도가 이렇게 안나가나봐요.
    오죽하면 중간에 친구한테 '나, 나 딴거 다 필요없어. 그냥 남미를 살아서 나갈거야' 라는 카톡을 보냈을까요... 후후후...
  • 으오앙 2015/01/18 14:08 # 삭제 답글

    글을 맛깔나게 잘쓰시는거같아요! 남미는 혼자가기에 겁나서 망설이는중이었는데 대리만족이 되기도 하고 저도 역시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ㅋㅋ 글 잘봤어요~♥
  • enat 2015/01/19 23:28 #

    오오 덧글 감사합니다!
    남미는 혼자가기에 겁나시는거 당연하시겠지만! 밤에 안나가고 관광지 벗어나지 않고 빈민촌 함부로 가지 않고 합석 함부로 하지 않고 사람말 쉽게 믿지 않으신다면 혼자 가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어차피 사람 사는거 다 거기서 거기에요! 벌집만 안건드리면 된답니당!
  • 제트 리 2015/01/18 16:58 # 답글

    전 세비체 보단 로모 살타도를 먹고 싶군요
  • enat 2015/01/19 23:29 #

    여행지에선 익힌 음식을 먹어야겠구나 교훈을 얻은 경험이었습니다.
    세비체로 당한 이후로 로모 살타도만 노냥 시켜 먹은 기억이 있네요... 후후...
  • 사평 2015/01/18 18:58 # 답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 다음화도 기다릴게요
  • enat 2015/01/19 23:30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는 사진이 영 구려서 보정을 할까말까 고민만 하고 있네요 ㅋㅋ
  • everysingleday 2015/01/18 23:03 # 답글

    아..우연히 밸리서 보고 재밌게 읽다 가네요 저도 남미서 2년남짓 파견근무를 했었거든요. 현지에있을땐 갈라파고스섬을 꼭 여행하고싶었는데 끝내 못갔거든요 다음 여행기도 기대되요!
  • enat 2015/01/19 23:32 #

    오오 남미에서 2년이나! 대단하시네요. 여행중에 페루에서 2년간 봉사하셨다는 분을 만나서 즐겁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어요.
    갈라파고스 ㅠㅠ 저도 갈라파고스 진짜 가고 싶었는데 별 수 없이 뺐어요. 아, 스페인 갈 돈으로 갈라파고스랑 모아이섬 이런델 갈걸 하는 후회도 아주 살짝 들곤 합니다. 후...ㅋㅋㅋㅋ 다음에 또 가봐야죠.
  • 쩩피 2015/01/19 01:24 # 답글

    늘 여행기 잘 읽고 있어요 !! ㅠㅠ 페루의 여자 직원(?) 들은 뭔가 .. 팔리지 않을것같은 느낌이 들면 울먹거리는게 스킬중 하나인걸까요.. 꽃보다청춘 페루편에서도 라마인형팔던 소녀가 가격 깎으려는 유희열씨에게 울먹이며 설명하던게 생각나네요 ..다음 여행기도 기대하겠습니다 ㅠ
  • enat 2015/01/19 23:34 #

    오오 이런 잡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맞아...
    멜리사에 대한 내용을 쓰면서 누군가랑 닮았다 싶었는데 꽃청춘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었죠. 마마가 만들었다고... 수공예라 깎을 수 없다고... 그냥 그 가격에 가져가라고... 그... 그.... 그!!!!

    다.... 당했다1!!!!!!!!!!!!!!!!!
  • 눈아찌 2015/01/19 10:32 # 삭제 답글

    눈 안 떠지는 거 사진 찍어놨으면 저한테 파세요
    슬프고 외로울 때 보고싶어요 ㅋㅋㅋ
    죄송죄송
    놀리는 건 아니고 다른 여행객들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긴 하네요
    귀여운 동양 여자아이가 한쪽눈이 부어서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놀리고 싶은 기분이 되지 않을까요
  • enat 2015/01/20 00:35 #

    후 사실 제 모습이 신기해서 찍어둔 사진이 한두장 있긴 하지만 현재 이 사진의 존재를 아는 건 저 뿐입니다.
    이게 나인가 싶기도 한 흉측한 모습이기에...
    무덤까지 가져갈겁니다!!!!!

    어... 근데 다른 여행객들이 그런 느낌으로 놀린 거라면 쪼끔 좋을지도요.
    하지만 실상은 그냥 자기네들끼리 신기한 거 발견했다고 좋아서 깔깔거리고 웃는 느낌이었죠... 후... 건방진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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