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19 23:21

레이크 루이스에서 눈사태를 보다 ├ 로키 (2014)

부제 : 공포의 티하우스 가는 길

캐나다 로키 산맥을 관광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찍고 간다고들 하는 곳, 세계 10대 절경(나머지 9개는 뭔지 모르겠다)안에 늘 뽑혀서 나온다는 곳,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몰라도 이름을 말하면 '아 그거 들어봤는데?' 라는 반응이 나오는 곳.

바로 레이크 루이스다.


이름에서부터 풍겨오는 느낌이 다른 호수들과는 좀 다르다. '루이스 호수' 라고 부분 번역하면 그냥 그런데, '레이크 루이스' 라고 하면... 좀 더 품격이 느껴진달까... 혀를 마음껏 굴리고 싶달까... 이름이 갖고 있는 우아함 때문에 괜히 더 발음하고 싶은... 그런 느낌.

사실 호수 이름인 '루이스' 는 빅토리아 시절 영국의 공주였던 루이스 캐롤라인 알버타의 이름에서 따왔단다. 어쩐지 어감부터 고풍스럽다 했어. 어쩐지 호수에 왕실 별장이 있을 것만 같았다고.





그러고보니 작년에 이미 이런 포스팅을 했었더랬다.

아침의 레이크 루이스 : http://enatubosi.egloos.com/1825866
레이크 루이스 산책길 : http://enatubosi.egloos.com/1826232


하지만 난 아직 [레이크 루이스 산책길] 에서 예고했었던, 이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공포의 티하우스 가는 길 포스팅을...




레이크 루이스 산책길 끄트머리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티 하우스 Plain of six glaciers tea house 란 곳을 갈 수 있다.

옛날에 로키산맥 가이드로 먹고 살았던 그리즐리 삼촌은, 이곳에서 차를 마실 필요는 없고 그냥 거기서 보는 뷰가 괜찮으니 가볍게 올라갔다 오라고 했었다. 삼촌은 8월, 그러니까 한여름에 쪼리를 신고 터덜터덜 다녀왔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마실 나가는 차림으로 티 하우스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6월 초였다.

우리나라의 6월 초는 불볕 더위가 시작될 때일 것이다. 눈? 눈은 무슨, 여자가 암만 한을 품고 낑낑대도 서리 정도로 끝난다고.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괴롭기 시작할 때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곳은 캐나다, 거기서도 첩첩산맥 로키의 한복판. 아직 얼어붙어 있는 호수들도 꽤 있고, 길이 막혀있는 곳도 꽤 있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 때에 헤헤거리며 티 하우스 트래킹에 나섰으니,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Q. 어... 이건 뭐지?

A. 뭐긴, 눈사태야.



넌 이제 이 눈사태가 일어난 길을 뚫고 티하우스에 올라야해.




그러니까, 조금만 삐끗하면 씽나게 눈썰매를 타며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그런 길을 말이다.

사실 초입 부분은 가벼운 마실 수준이긴 했다. 동네 뒷산 올라가듯 쉬운 코스였다고. 한 30분? 40분 쯤 올랐을까? 처음으로 눈사태 일어난 지점을 만났다. 눈사태로 뒤덮힌 길을 살펴보니, 앞서간 사람들이 눈길을 만든게 희미하게 보이길래 그 길을 더듬어 낑낑대며 넘었다. 우린 역시 로키라며, 눈사태 일어난 것도 보다니 행운! 버라이어티해! 따위의 헛소리를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첫번째 눈사태 지역을 지나쳐 15분 정도 더 걷자 두번째 눈사태 지역을 마주치게 되었다. 어... 어라? 생각보다 눈사태가 자주 일어나는구나?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것만 지나면 되겠지 싶은 마음에, 눈으로 덮힌 길을 부들거리며 넘은 뒤 계속 진행했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길을 와버렸단 걸 알게 된 건, 다섯번째 눈사태 지점을 발견했을 때였다....




오르막길, 거기에 꽁꽁 얼어붙은 눈길.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최악의 등산로를 만든다는 걸 몸으로 체험했다.

무엇보다도 신발이 미끄러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내 신발은 등산화도 아니고 트래킹화도 아니고 방수도 안되는 아주아주 평범한 운동화다. 평지라도 빗길에는 매우 취약한, 재작년 블랙 프라이데이 때 반값 주고 산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화란 말이다! 이런 신발로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야 한다는 현실은... 자꾸 내 입에서 신발을 외치게 만들었다. 이런 신발!




뭐... 나만 고생하는 건 아니니까...

조언은 그리즐리 삼촌한테 들었다 해도 최종적인 계획은 내가 세웠으니, 저 두 오빠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주 쪼끔 들긴 했다.




걷다보니...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중생아, 네 어디를 방황하고 있느냐...





...그렇게 눈사태 몇 개를 넘어오다가 결국 중간에 뻗었다.


셋이 정신줄 놓은 채 입 벌리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굉음이 들려왔다. 처음엔 이 마른 하늘에 천둥이 치나 했다.




어....

어......?




어...

....어.....어.......


이젠 실시간으로 눈사태가 보인다...



영상 추가.





아, 참고로 동영상 올리려는데 제가 욕을 너무 해대서 이걸 어쩔까 궁리하다가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유아용 음악을 깔았슴다.

사실 실제 눈으로 봤던 규모는 산 중턱이 눈가루로 확 가려질 만큼 컸는데, 넋 놓고 바라보다가 셔터 누를 기회를 놓쳐서 눈사태 다 끝나고 가루 날리는 거 밖에 못찍었다. 근데 마지막 가루 날리는 규모가 저정도니... ㅋㅋㅋㅋㅋ 나머지는 상상에 맡길게요.




어쨌든.

눈사태가 일어나는 걸 실제로 보자 후덜덜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거에 휩쓸리면 보호 장비도 뭣도 없는 우린 가랑잎처럼 쓸려가서 조각나겠지...

웨하스 쿠크다스 누네띠네 부서지듯 부서지겠지...



...이젠 로키 최고의 절경이니 뭐니 다 상관없다.

그저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 티하우스라는 곳을 빨리 찍고 숙소로 돌아가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쉬고 싶다.




눈사태를 본 세 젊은이들은 고요하고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




오, 좀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오호라, 레이크 루이스가 손톱만하다.


믿겨져?

저게 레이크 루이스래... 그 커다란... 오늘 아침에 봤었던... 아까 낮에도 봤었던... 그 거대한 레이크 루이스래...




절벽 가장자리로 난 좁은 길을 걸어야할 때도 있었다. 우왕 쪼끔 무섭다.

하지만 눈길이 아닌게 어디야. 저런 길에 눈사태라도 일어났어봐. 어휴.




평범한 흙길은 아버지께 어릴 적부터 단련받아 자신 있다. 덕분에 눈 없는 곳만큼은 힘차게 날라다녔지만...




신발이 쥐약이라 눈이 조금이라도 쌓인 곳에선 다리 하나 제대로 못가누고 오빠들한테 질질 끌려다녔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훈훈한 졸업식 풍경을 재연함.




가끔씩 티하우스까지 찍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 사람들은 꾸준히 "얼모스트 데어!, 얼모스트 데어!" 라더라.

닥쳐. 그 말 30분 전에도 들었어. 너희들의 얼모스트 데어 때문에 힘들어도 포기하잔 말도 못한 채, 여기까지 와버렸다고!




한겨울에도 살아있는 다람쥐 녀석이 대견해서 찍었다.

아 맞다, 여기 한겨울 아니지. 6월이지. 초여름이지. 헷갈렸다.




그 이후론 카메라 꺼내기가 무서운 가파르고 험난한 눈길이었기에 사진이 없다.

카메라고 뭐고 여기서 발 헛딛으면 난 끝장이다란 생각이 들어서 사진은 커녕 묵묵히 바닥만 보고 손 짚어가며 걸었다.


이 사진은 티하우스가 위치한 산등성이에서 찍은 거. 난 포즈 잡을 힘도 남아있지 않아 같이 간 오빠보고 서라고 한 뒤 찍었다.




사진 찍은 곳에서 눈을 파헤치며 걸어갔더니 웬 오두막집 하나가 보였다.

와, 왔다. 드디어 왔다.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티하우스인가 보다. 와... 기뻐...




그리즐리 삼촌은 티하우스에서 아무것도 먹을 필요 없다고, 거기 괜히 비싸기만 하니까 풍경만 보고 그냥 내려오라고 했었는데.

하하하...


미쳤어!? 여기서 열량을 보충하지 않으면 내려갈 때 죽을지도 몰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을 것 같다.


앉자마자 메뉴를 뚫어져라 봤다. 기대하던 고열량 음식은 애석하게도 없다. 초콜릿은 없어? 스니커즈? 자유시간? 코코아 없나? 스테이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치킨 윙 같은 것도 안바란다고. 그냥... 저... 하다못해 푸틴은? 푸틴이라도 있었더라면...

열량이 필요해... 열량이...


하아... 하긴 이 산속에서 뭘 바래... 젠장.

그나마 좀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시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나온 차. 티하우스 답게 차만 있었다. 아 왜, 코코아.. 커피.. 왜 그런거 없는데...

가격대비 식겁한 스프랑 샌드위치도 먹었는데, 뭐, 이 산골에서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생각하며 울면서 먹었다.


사실 신라면 먹고 싶었어. 진짜 신라면 먹고 싶었어.




티하우스에서 푹 쉬다가, 늦어지기 전에 빨리 하산하기로 했다.

어... 근데... 어, 대체 언제 다시 돌아가지.

미쳐버리겠다.


근데 뭐,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은 언제나 쉽다 이런 말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려가는 것엔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고 무사히 내려갈 수 있었긴 개뿔, 눈길은 내려가는게 정말 힘들다. 조금만 발을 옮겨도 넘어지거나 미끄러지기 일쑤. 거기에다 이미 체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라 다리가 제멋대로 풀리고 있는 상황. 으어어... 워프... 나에게 워프의 날개를 다오...

나중엔 포기하고 아예 눈사태 일어난 지점에서 쪼그려앉아 썰매타듯 '아아아아아' 하며 내려가기도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지.



...그리고 몇 시간 후.


텅 빈 머릿속에 갑자기 옛날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 어렸을 적, 한국에 있는 집에서였나... 설거지를 해야하는데 그릇이 너무 많이 쌓여있었을 때였지...

나 : 엄마! 쌓인 그릇이 너무 많아요!
엄마 : 그래, 하지만 하나씩 하다보면 다 끝난단다.


물론 우리 엄마는 저렇게 자상한 투로 이야기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어쩐지 당시 내 기억 속 미화된 어머니께선 저렇게 말씀하셨다.

왜 이 이야기가 떠올랐냐면...




영원히 고통받을 것만 같던 이 티하우스 트레킹 코스가 끝나고...


레이크 루이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





하... 물 색깔 고운 것 좀 보소.

오늘만 벌써 세번째 보는 레이크 루이스의 물색... 여태까지 봐온 것 중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후후후....





레이크 루이스 호숫가에 떠내려온 얼음 조각들이 부딪혀 내는 소리들을 들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후후... 험난한 여정이었어...



로키에서 있었던 일은 또 할 만한 포스팅이 있으면 계속!





핑백

  • Everyday we pray for you : 여행사진 파노라마 2018-03-03 22:09:12 #

    ... 아직도 연락하는 오빤데 와 구글이 파노라마로 인생샷을 만들어줬네. 카톡으로 보내줬더니 일하느라 죽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슬퍼라... (http://enatubosi.egloos.com/1851030) 앗 갑자기 몹시 지친다... 구글님이 하사하신 파노라마 사진들 다음번에 계속... ... more

덧글

  • 김물개 2015/01/20 02:47 # 답글

    세상에나..얼음조각 소리에 순간 소름돋았어요!! 풍경소리 같기도 해요
  • enat 2015/01/22 13:38 #

    저도 저 소리가 좋아서 호숫가에 가만히 서있었어요. 오죽하면 별 볼거리 없는 곳에서 소리 녹음하려고 녹화하고 있었을까요! ㅋㅋ
  • 키르난 2015/01/20 17:40 # 답글

    험난한 여정을 넘어서 돌아갔기 때문에 더 물색이 아름다워 보입니다.(아련...) 저기는 축구화가 필요하군요. 스파이크가 박혀서 미끄러지지 않을 그런 신발.. 등산화로도 부족합니다. 등산화 아래에도 별도의 브레이크(...)를 달아야 해요.. 하하하하하;ㅂ; 하지만 진짜 멋집니다..
  • enat 2015/01/22 13:40 #

    맞아요 ㅠㅠ 등산화로는 부족했어요!!!! 걸으면서 양말 신발 할 것 없이 다 젖자 나중엔 전신에 잔뜩 징 박고 굴러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후후후후....
    숙소 돌아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셋 다 침대에 뻗는데 ㅋㅋㅋㅋㅋㅋ 그 모습이 웃겨서 혼자 킥킥댔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가벼운 트레킹 코스랬는데 왜 이 모양이 되어서 돌아온건지 ㅋㅋㅋㅋㅋㅋㅋㅋ
  • 레아 2015/01/23 00:43 # 삭제 답글

    오랜만에 들어오니 이제는 영상까지 올려주시네요 ㅋㅋㅋㅋ 점점 업글되어가는 enat님의 포스팅 ㅋㅋㅋ 그나저나 ㅋㅋ 진짜 글만 읽어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느껴짐 ㅋㅋㅋㅋ
  • enat 2015/01/24 20:15 #

    원래 영상을 가끔씩 올리기도 했었는데 이글루스 동영상 기능이 맛탱이가 가서 ㅠㅜ
    유튜브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ㅋㅋㅋㅋ

    으으 저 땐 정말 힘들었어요ㅡㅜ
  • hy 2015/02/18 00:07 # 삭제 답글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져
  • enat 2015/02/22 17:30 #

    나중에 같이 가자 ㅋㅋㅋ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