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7 18:53

남미여행 (15) 페루 : 와카치나 사막에서 버기카를 타다 ├ 남미 배낭여행



넓다.

모래가 많다.

더울 줄 알았는데 서늘하다.



남미여행 2주차,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사막의 첫인상이었다.




인생 최초로 보게 된 사막은,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밭과 그 속의 오아시스라는, 책에서만 봐왔던 사막의 전형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와카치나' 라고 했다.




1.


시간을 돌려 전 포스팅이 끝난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파라카스에서 이카로 가는 버스, 크루즈 델 수르 안. 손님이 얼마 없어 쾌적했다. 내 자리는 2층의 맨 앞좌석이어서 전망이 무지 좋았다. 시원하게 펼쳐진 도로를 보며 좌석 배정을 좋게 받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승무원이 다가와, 사고라도 나면 유리창을 뚫고 튀어나갈 수도 있으니 좌석에 있는 동안은 반드시 안전벨트를 하라고 말했다.

으음, 상상했더니 조금 끔찍하다. 이 자리 별로 안좋아...

안전벨트를 꽉 조인 채, 채 마르지 않아 곤란한 빨래들을 에어컨 입구에 번갈아 가져다대며 무사히 이카에 가길 기도했다.




2.


왜 기도까지 해가면서 이카에 가느냐, 목적은 단 하나다. 이카 근방의 와카치나 사막을 보기 위해서다.




여행자들은 보통 이카에 머물면서 와카치나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와카치나 오아시스까지 들어가 하룻밤 머물고 온단다. 나는 이카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아직 이카에 머물지, 와카치나에 머물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미리 정하지 못했어도 상관은 없다. 이런 건 그... 그래, 카페에서 무얼 마실까 정도의 고민과 비슷한 수준이거든. 비수기 시즌이니까, 그 때 가서 흘러가는대로 느긋하게 정해보자고.




3.


버스 유리창의 강도와 내 머리통의 강도를 비교해보는 불상사 없이, 이카에 도착했다.




이카는 밝고 명랑한 도시였다. 따갑지만 상쾌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반가웠다.




버스 터미널 안에는 택시요금표가 붙여져 있었다.

살짝 비싼감이 없진 않지만, 차라리 이런 정가제가 마음 편하다. 스페인어 모르는 여행자로썬 네고가 너무 힘들다.


어디보자, 와카치나까진 7솔이고... 환전도 해야 하니 아르마스 광장까지 가야하는데, 그럼 도합 12솔인가?

정가가 저러하니, 사설 택시 기사랑 네고하면 더 싸게 갈 수 있겠다.


터미널 밖으로 나오자 역시나 사설 택시 기사가 '와카치나, 와카치나!' 하며 달라붙었다.

나 : 와카치나? 글쎄... 나 환전도 해야하는데.
택시기사 : 그럼 내가 환전소도 데려다주고, 그 다음에 와카치나 데려다주면 돼!
나 : 우움, 글쎄에...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딴청을 피웠더니.

택시기사 : 이 모든 것이 7솔! 내 택시 타, 응?

오, 좋은 딜이다.

나 : 흐, 흐흥... 뭐, 그럼 타볼까.

택시기사는 날 이카 아르마스 광장의 환전남(*환전남이 뭔지 모르신다면 리마 택시투어 포스팅 참고)에게 데려가서 환전을 시켜줬다. 이카에도 있는 걸로 보아, 이 환전남들은 페루에서 제법 흔한 직업인가 보다.




4.



택시 창문을 통해 무사히 환전을 마치고, 와카치나로 향했다. 점점 사구가 가까워지는데 그 느낌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두근두근했다. 저 모래 언덕 너머로는 뭐가 있으려나! 고개를 빼꼼빼꼼 돌리며 오오 거리다가 아예 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사진을 찍어댔다. 택시기사는 전형적인 여행자의 행태를 보이는 날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택시기사 : 와카치나 어디로 데려다줘? 호텔 어디야?
나 : 나 예약 안했어. 싸고 좋은데 있어?
택시기사 : 오, 나만 믿어.


이윽고 와카치나 마을로 들어선 택시. 택시기사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기가 아는 몇 군데 호텔과 호스텔을 나에게 소개시켜줬다. 두세군데 살펴보다가 가격대비 괜찮은 호스텔에 꽂혀서, 그 곳에 머물기로 했다.

택시기사 : 나중에 또 택시 탈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나 : 응. 땡큐!





5.



내가 머문 곳은 Sunset 호스텔이란 곳으로, 도미토리 20솔, 그러니까 대략 8천원짜리 침대를 제공하는 착한 숙박업체였다. 사실 도미토리긴 했는데, 아무도 묵는 사람이 없어 편하게 내 방처럼 썼다. 비수기 만세다.

진작 이렇게 도미토리로 올 것을, 왜 난 에어비앤비니 민박이니 새로운 시도를 했던 걸까... 후후...

나중에 꽃청춘 보니까 유희열 일행이 내가 머문 호스텔의 바로 옆 호스텔에서 머물고 있더라. 괜히 반가웠다.




호스텔 창 밖으론 이렇게 오아시스도 보이고.




오아시스 주변으로 조성된 작은 마켓들도 보인다.

오늘 아침만 해도 찬 바람 쐬면서 새똥 구경이나 했는데, 불과 몇 시간만에 이런 생동감 넘치는 마을에 와있다니... 이게 바로 방랑하는 자의 특권인 거야! 갑자기 몸에 기운이 차기 시작했다. 으아 씽난다! 빨리 오아시스 보러 나가자! 여행력이 가득찬 채 옷을 얇은 걸로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뛰쳐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파라카스에서 빨래 맡겼다가 버스 시간 때문에 되돌려 받은, 채 마르지 않은 옷가지들을 꺼내 창가에 널어놓고 하늘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린 후 다시 나갔다.




6.



슬리퍼 차림으로 경쾌하게 걸었다. 마을이 작기 때문에 금방 오아시스까지 갈 수 있었다.

우와, 따가운 햇살 아래,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오아시스라니. 영화도, 만화도 아니다. 실제로 내가 보고 있는 거다.




와카치나 사막 안의 와카치나 마을 중앙에 위치한 와카치나 오아시스.

와카치나라... 묘하게 일본어 같기도 한데, 와카치나는 무슨 뜻일까?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와이파이 연결해서 알아보니, '와카' 는 우는, '치나'는 어린 여자라는 뜻. 즉, 와카치나 마을은 '울고 있는 어린 여자' 라는 뜻이란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잉카의 어린 공주에 관한 전설 때문이라는데.

전설이다보니 여러가지 버젼이 많은데, 줄기만 놓고 보자면 '공주는 왕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왕자가 갑자기 죽었다, 공주는 슬피 울었다, 너무 울었다, 어라 오아시스 생겼네' 라는 흐름이란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마른 사막에 오아시스가 생길 정도로 울었을까. 전설일 뿐이지만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조금 슬퍼졌다.




7.



오아시스 주변에 조성된 거리.

건물 벽이 모래 범벅인 건 어쩔 수 없겠지.




길을 좀 걷다보니 여행사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내일 이동할 버스와 오늘 체험할 투어를 구해야 하는데.

어떤 여행사 벽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크루즈 델 수르 버스 가격을 보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아저씨 : 버스 타고 어디 가려고?
나 : 나? 나스카.
아저씨 : 크루즈 델 수르 비싸잖아. 더 싼 버스도 있는데.
나 : 엥? 진짜?


더 싼 버스라는 말에 혹해서 그 아저씨를 쫓아갔다. 그렇게해서 들어온 사무실이 위 사진의 사무실이다.

여하간 그 아저씨 왈, 크루즈 델 수르의 서비스만큼 좋진 않지만, 현지 버스를 타면 훨씬 싸게 나스카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살짝 불편할 거라는 말도 했는데...

나 : 엥? 불편? 상관없어! 난 싼 게 좋아!




그렇게 이카에서 나스카까지 가는 버스를 단돈 12솔에 끊은 나. 회사는 페루 버스로, 이카에 있는 크루즈 델 수르 버스 터미널이 아닌, 그 맞은편에 있는 터미널에서 탑승한다고 했다.

굉장히 흡족한 표정으로 계산을 하고 표를 받자, 그 아저씨, 이번엔 버기 투어 상품을 소개했다.

아저씨 : 버기카 탈래? 우리는 25솔이면 버기에 샌드보딩까지 할 수 있는데.
나 : 푸우우웁... 진짜? 25솔!?


보통 네고를 해도 30~40솔 사이라고 들었었는데! 버스부터 시작해서 가격대가 왜 이래? 땅 파먹고 사는 여행사인가!?

나 : 나! 나요, 나! 나 예약할래!
아저씨 : 그래. 오늘 오후 X시까지 여기로 와.
나 : 좋아! 와, 니네 진짜 싸다.
아저씨 : 우린 저렴한 상품만 만들거든.
나 : 마음에 들어!





8.

내일 탈 버스와 오늘 할 투어를 저렴한 가격에 마련했다. 좋아! 잘했어 나 자신!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이 기세를 몰아 밥을 먹기 위해 오아시스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레스토랑의 웨이터는 굉장히 느끼한 청년이었다. 음악에 맞춰 우아한 춤을 추며 메뉴판을 가져다주곤, 주문을 다 받은 다음엔 나보고 손을 달라고 한 뒤 손등에 키스하며 윙크를 하곤 주방으로 사라져갔다.

.....

으아아아아아! 느끼해! 소름 돋아! 뭐야, 뭐니 쟤!

사막 한가운데에서 한기를 느꼈다.




그 느끼한 웨이터, 또다시 뭔가 퍼포먼스를 펼치며 쥬스를 가져다줬다. 하지마, 이상한 춤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마.

안구 테러를 견디며 쥬스를 받은 나. 근데 이거 쥬스가 이상하다. 분명 딸기 쥬스를 시켰는데, 사이다에 붉은 색소를 탄 음료수를 가져왔다. 의아한 표정으로 웨이터에게 '이거 딸기 쥬스 맞아?' 라고 물으니, 그 웨이터, 윙크하며 맞다고 응수했다.


...젠장, 이게 뭐야. 당한 느낌이야.




하지만 메인 요리로 주문한 건 믿음과 신뢰의 로모 살타도니까, 괜찮아!

소고기 야채덮밥이라니, 솔직히 어떻게 요리해도 맛있을 요리잖아!


예상대로 평타는 쳤다. 소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이 정도의 맛이라도 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9.



식사를 마친 뒤, 배도 꺼트릴 겸 오아시스 주변을 좀 돌았다.




배 빌리는 곳도 있네. 여럿이 왔었다면 시도해볼텐데. 이럴 땐 혼자인게 아쉽다.




오아시스 근처에서 햇빛 쬐며 앉아있는데, 저쪽 높은 사구에 점이 돌아다니길래 확대해서 찍어봤다.

샌드보딩 하려고 낑낑대며 모래언덕을 올라가는 사람이 보였다.

어이쿠, 이 더운 태양 아래에서... 힘들겠다.




딱히 할 일이 없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투어 예약한 시간까진 두 시간 남짓 남았다.

두 시간 동안 뭐하지... 사진은 혼자여서 심심한 청춘의 등짝.




10.


두 시간 동안 호스텔에서 빈둥거리다가, 시간에 맞춰 버기카 투어를 예약한 여행사로 갔다.




이 녀석이 바로 오늘 내가 탈 버기카!

여행사 앞에서 다른 투어 참가자들을 기다리다가, 심심해져서 정차한 버기카 근처를 기웃거렸다. 버기카 운전 아저씨는 특이하게 생긴 동양인을 보고 신기했는지 계속 말을 붙이다가, 거기 서보라며 사진도 찍어줬다.




드디어 탑! 승!

어째서인지 나를 뺀 다른 투어 참가자들은 다들 커플이었다. 난 운전자 아저씨 옆의 하나짜리 좌석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택시들로 가득한 와카치나 마을 빠져나가기.




택시들을 제친 버기카는 내가 머무는 숙소 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턴 와카치나 사막에 들어가는 입장료? 따위를 내야한다. 투어비와는 별도. 3.8솔.

운전 아저씨가 탑승자들의 돈을 걷어 입장료? 따위를 지불하고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으으, 이제 진짜 사막으로 들어간다, 버기카!








크으으으으으으! 달려! 달려 오ㅃ....아니 아저씨!


꽃청춘에서는 버기카 장면에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를 브금으로 깔았었는데, 진짜 음악 선곡 최고였다! 사실 나도 버기카 달리는 내내 뇌 속에서 그 노래가 자동 재생 됐다고! 와, 진짜 그 속도감이란! 짜릿함이란!

헉헉, 너무 흥분했다. 느낌표 빼고 차분하게 설명해보자. 일단 바람을 막아주는 유리창 따위가 없으니까 체감 속도감은 장난이 아니다. 모래언덕을 질주하다가 꼭대기에서 잠시 붕 떴다가 내려가는 느낌은 거의 롤러코스터 수준. 아니, 롤러코스터 이상이다! 하강하기 전 차체의 속도가 0이 될 때 가슴 철렁하는 그 느낌이란! 으아아아, 어떻게 느낌표를 안 쓰고 설명할 수가 있겠어!




잠시 정차 후 휴식.

가슴을 쓸어내리며 쉬고 있는데 저기 저 언덕 너머에서 샌드 보딩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운전 아저씨 : 자, 이제 저거하러 가자!




아저씨의 외침과 함께 단번에 모래 언덕까지 올라왔다.

와, 뭐야 뭐야, 진짜 뭐야 이 풍경! 사막이다! 진짜 사막이다!




다들 커플이니까 둘 씩 짝지어서 사막을 배경으로 인증샷 찍는데... 나 혼자만 짝이 없다.

운전 아저씨가 그런 날 측은하게 여겼는지 버기카 앞에 서보란다.




뭔가 그걸로는 성에 안찼는지, 버기카에서 보드를 꺼내더니 나보고 누워보란다.

원하는대로 포즈를 잡았더니 그걸 찍어주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 챙겨줘서 고마워요 아저씨.




사실 난 혼자서도 이런 거 찍을 수 있지만요.

버기카에 고릴라포드 감아서 혼자 찍은 거.




텅 빈 버기카. 다들 어디로 갔나!




샌드 보딩하러 왔음!

어쩐지 그 무리에서 내가 제일 어린 (동양인의 동은 동안의 동이라는 말이 있음) 포스라, 양보와 사양을 거쳐 가운데 멀뚱멀뚱 서있던 내가 제일 먼저 타게 되었다.

감상은... 아, 뭐 다 필요없고, 이 한마디면 된다. 이거 진짜 재밌다!!!!!

보드를 운전 아저씨한테 주면 잘 미끄러지라고 바닥에 양초칠을 해주고, 안전한 포즈를 알려준다. 안전한 포즈란 당연히 엎드려서 내려가는 포즈! 아저씨의 구령에 따라 그 긴 언덕을 씽나게 내려가는데, 와,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찢어지는 비명 속 쾌감! 여태까지 대머리와 세비체와 멜리사에게 받은 페루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




헥헥거리며 그 언덕을 다시 기어올라가 보딩하고, 또 다시 올라가 보딩하고.

아, 모래 언덕 오르는 거 진짜 지친다. 체력이 바닥이 될 때까지 보딩하다가 다시 버기카에 탑승했다.




버기카 타고 또 신나게 비명 지르다가 와카치나 오아시스로 돌아왔다. 우우, 아쉽다! 아쉬워!

날 계속 챙겨준 운전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팁을 건네고 내렸다. 아저씨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11.


버기카 한 번 타고 왔더니 오아시스 마을은 어느새 저녁.

기지개를 켜며 마을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정확한 한국어로 '택시?' '어디 가세요?' 라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다는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봤더니...




꽃청춘에서 봤던, 한국어 구사하는 페루 택시 아저씨가 서있었다!


아니 뭐, 페루 현지인이 티비에 나온 거니까, 그 현지인을 페루에서 볼 수 있는 게 당연한 거긴 한데... 그래도 어젯밤에 화면에서 본 아저씨가 눈앞에 멀뚱거리며 서있어서 놀랐다. 싸다 비싸다 등의 어설픈 한국어 개그 보고 빵 터졌었단 말야.

나 : 으앜ㅋㅋㅋㅋ!!
택시 아저씨 : 하하! 한국인.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나 : 너, 너 티비 나온거 알아? 티비 나왔다고 너!
택시 아저씨 : 웅?


난 핸드폰을 꺼내 꽃보다 청춘 2화를 틀어줬다.

나 : 여기! 여기! 너 나온다곸ㅋㅋㅋㅋ!!!

택시 아저씨는 내 핸드폰을 들고 몇 분간 자신이 나오는 장면을 깔깔거리며 봤다. 택시 아저씨의 친구들은 무슨 일이냐며 모여들었고, 난 그 친구들에게도 꽃청춘 2화의 그 장면을 보여줬다. 다들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 작은 화면을 정신없이 바라보는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작은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깔깔거리다가, 주인공인 택시 아저씨와 사진 한 방 찍고 헤어졌다.

나중에 친구한테 이 아저씨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더니, 누구냐는 핀잔만 들었다. 심지어 꽃청춘을 본 아해였는데도 불구하고... 후후... 그래, 넌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지... 따뜻한 집안 거실에서 버튼 하나 눌러 티비를 켜고 귤 까먹으며 대충 본 거랑 외로운 여행길에서 약한 와이파이로 밤새 받아 부들부들 떨면서 위로받으며 본 거랑 각인 수준이 다를테니... 후후후...




12.



택시 아저씨들과 헤어진 뒤, 저녁의 오아시스 마을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어져서 마을 근처 사구로 올라갔다.

모래 언덕을 올라가는 건 보통 언덕을 올라가는 것의 배 이상으로 힘들다. 올라간 만큼의 1/3은 다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되고, 누가 자꾸 발목을 잡아채는 것 같아 걸을수록 힘도 빠진다.

올라가면서 정신 못차리고 숨을 가쁘게 헐떡이자, 미리 올라와서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 힘내라며 박수도 쳐줬다. 젠장, 박수 받을 높이는 아닌데...




박수 받을 높이는 바로 저기지.

어후 세상에, 대체 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정상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고행 전문가?


난 포기야. 저기까진 못 가. 절대 못 가.




이 정도 높이로 만족 인증샷.




저 편에선 해가 지고 있겠군.

저기 앉아있는 사람은 고생한 만큼 좋은 풍경을 보고 있겠지?




난 이 정도 풍경으로 만족할래. 이 정도 높이가 내 노력과 만족의 절충 지점이야.




그나저나, 해가 떨어지자마자 급격하게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듣던대로 사막의 밤은 춥구나.

사실 얇은 옷 입고 밖에서 오들오들 떨 바에야 숙소로 돌아가는 게 백 번 나을거다. 하지만 난 꽤 오랜시간 동안 덜덜 떨면서도 그 자리를 고수했다. 급기야 낮 동안 햇빛에 달궈졌던 모래가 따뜻하게 느껴져, 모래 속에 맨 다리를 집어넣는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사막 한복판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거야.

내가 추위를 무릅쓰고 오밤중에 밖에 나가있는 거라면 대체 뭐 때문이겠어. 하나 밖에 없다. 밤하늘 때문이었다.


정말 많은 별들이 오아시스 위 밤하늘에 박혀 있었다. 남반구의 밤하늘이라, 내가 알고 있는 별자리와는 다른, 낯설고 생소한 녀석들이 밤하늘을 차지하고 있었고, 가끔씩 길게 떨어지는 유성도 볼 수 있었다.

와, 신기하다. 그리고 진짜 아름답다.

입을 헤 벌린 상태로 체온 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혼자 감탄사만 연발하기를 수십 분. 아니 수 시간.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딱딱하게 굳은 몸을 일으켜 간신히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이건 주인님 얼어 죽지 마시고 제발 숙소로 돌아가시라는 뇌의 긴급 피난 명령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맥주 생각 때문에 살아났다면 농담 같은데, 내 뇌는 나 자신을 술로 홀리지 않으면 얼어 죽는 것도 가능할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뭔 소리야? 어쨌든 본능이 이끄는대로 쿠스케냐와 레이칩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도미토리 룸에서 나홀로 파티라도 벌여야지.


아아, 근래 들어서 드물게 반전 없이 즐거운 하루였다 ~:)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는다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 깨닫게 된 나스카에서 계속





덧글

  • 레아 2015/01/27 22:55 # 삭제 답글

    책에서만 보던 사막과 오아시스!!! 경치도 예쁘고 정말 가보고 싶어요 ㅠ.ㅠ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런 사고도 없고, 배신도 없고, 바가지도 없던 하루였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
  • enat 2015/01/28 18:46 #

    사막과 오아시스!!!! 뭔가 몽환적인 이야기속에서나 보던 건데 실제로 보니 마음이 쿵쾅쿵쾅 ㅠㅠ
    정말정말 아름답더라구요. 저 때 사막에 완전 반해서 나중에 다른 곳으로 사막만 보러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사고도, 배신도, 바가지도 없던 하루! 정말 완벽하게 삼박자가 이뤄진 하루였죠.
    이번 여행에서 정말.. 드물게도... 후후...
  • 늦어도11월 2015/01/27 23:06 # 답글

    기대했던(?) 반전이 없군요!
    늘 재미있게 여행기 읽고 있습니다 ^^ 그나저나 사막 정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인데 말이에요. 글로 재미있게 보고 가는군요.
  • enat 2015/01/28 18:48 #

    그, 그런 반전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ㅋㅋㅋㅋㅋㅋ
    조만간 고생할 이야기가 또 나올테지만... 후후후....

    저도 사막, 사막하고 말만 하고 다녔는데, 저 때 처음으로 가본 뒤 ㅠㅠ 완전 반했어요. 11월님께서도 나중에 꼭 가보시길!!
  • 키르난 2015/01/28 09:01 # 답글

    반전이 없어 아쉽습니다. 오히려 그 다음날의 나스카 투어가 걱정되는데... 버기 투어도 괜찮은 걸 보니 그것도 조금 안심이.. .. 아니,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죠. 흠흠.
    남미 여행은 항상 반전이 있고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이날은 그냥 행복 그 자체입니다. 아.. 사막, 모래 미끄럼틀과 오아시스의 풍경과...;ㅂ;
  • enat 2015/01/28 18:52 #

    아쉬워하지 마세욬ㅋㅋㅋㅋ!!! 아니 안심하세욬ㅋㅋㅋㅋ!!!!!
    나스카 투어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죠. 제가 기대를 저버렸군요!

    참고로 남미에서 자유로운 영혼임을 만끽했던 나날은 바로 이 이틀, 이카-나스카 까지랍니다. 얼마... 얼마 안되는 행복한 나날 중 하루일 뿐... 후후후...
  • 감기조심 2015/01/28 22:55 # 삭제 답글

    오랜만에 너무 여행기가 정상적이여서 비정상적인(?) 포스팅이 나왔군요ㅋㅋㅋ

    그런데 이낫님 여태껏 몰랐다가 이 포스팅을 보고 깨달은건데...바스트가 상당히 자신있는분이셨군요?(수줍)

    묘한 질투를 느끼며 딸기우유 마시러갑니다ㅠㅠㅠㅠ
  • 레아 2015/01/29 01:09 # 삭제

    동감!! ㅋㅋㅋㅋㅋ 저도 딸기우유 마시러 ㅋㅋ
  • enat 2015/01/30 20:51 #

    정상적이어서 비정상적인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음, 원래 여행기는 이렇게 희망차고 밝고 즐거운 글인거죠. 음음, 원래 이 쪽이 정상인데 왜 난... 후후훟....

    바.. 바스트?
    아니에요 저 한국인 표준... 저 옷이 좀 달라붙는 옷이라 커보이는 것 뿐입니다....

    딸기우유는 저도 마셔야...
  • 레키 2015/02/02 16:39 # 답글

    - 으헝... 위의 포스팅 보고 연달아 이걸 봤더니 평화와 행복이 그득그득...
    이낫님의 여행은 이렇지 않아! <<<
    후후 역시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
    사막... 사막... 안전함을 전제로 한 사막 여행은 한 번 해보고 싶긴 하네요. 모래 간지라니...
    버기카라니... 샌드보드라니... 궁금하군요 ㅎ
  • enat 2015/02/07 15:11 #

    전 평화주의자라구요! 행복한 이낫의 여행기에요! 늘 그랬으면 해요! 그랬으면 하지만... 훟....후후후.....
    아레키파부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후후후후....

    사막 여행 완전 낭만 가득하지 않나요! 저런 사막 한 번 다녀와보니까, 나중에 그 하늘거리는 천 둘둘 말고 사막 횡단하는거 해보고 싶더라구요. 막 밤하늘 보면서 모닥불 둘러 앉아 기타치고 노래부르고 ㅋㅋㅋㅋㅋ
  • Duvu 2015/11/04 06:1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현재 페루에서 여행중인 Duvu 입니다.
    Enat님의 재미있는 여행기 덕분에 여행이 더 꽉 찰 것 같습니다.
    감사드려요!
  • enat 2015/11/04 22:10 #

    페루여행 중이십니까아아ㅏ아ㅏ아!!! 으아아 즐겁게 여행하세요오오!!!!
    포스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아아아!!!!!

    흠흠, 남미가 몹시 그리워서 흥분했네요. 행복한 여행 되세요!
  • abgjc 2017/05/18 22:4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사진들이 참 예쁘네요 :)
    실례지만, 제가 이번에 대학 교양 과목 발표에 첫번째에 있는 사막사진을 사용하고 싶은데... 혹시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
  • gsurgeon 2017/05/29 19:09 # 삭제 답글

    ㅎㅎㅎㅎㅎㅎ페루여행이 얼마 안남아서 검색하다 우연히 얻어걸렸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정주행하고 있네요 ㅎㅎㅎ 글 너무 재미있어요~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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