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5 11:52

남미여행 (17) 페루 : 백색의 도시 아레키파 ├ 남미 배낭여행 (2014)

1.

페루 여행 중간 정리.




리마(대머리)에서 파라카스(눈병), 파라카스에서 와카치나(버기), 와카치나에서 나스카(정신을 차리니 하늘).

이제 나스카에서 페루 제 2의 도시, 백색의 도시 아레키파 (The White City Arequipa) 로 간다.




2.

야간 버스를 타고 아레키파로 가는 길.

버스는 만석이었다. 아줌마들의 수다스러운 목소리와 아이의 칭얼거림,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간신히 잠들었어도 버스기사 아저씨의 거친 운전 솜씨 때문에 번번이 깨어나기 일쑤였다. 세 번째 깼을까, 왜 이렇게 거칠게 방향을 틀어가며 운전하나 궁금해져서 창에 어린 김을 닦고 밖을 자세히 내다봤더니, 길 옆은 거의 낭떠러지였다. 거의? 아니 그냥 낭떠러지였다. 아... 이런 길이란 말이지... 이런 길을... 이 어두컴컴한 밤중에... 이 속도로... 으음...

난 고개를 돌려 내가 본 걸 애써 무시해가며 다시 잠을 청했다. 몰라, 난 못봤다, 여긴 그냥 평원이야, 하나도 안무서워.

...그 이후로 낭떠러지에 밀려 떨어지는 꿈을 꾸느라 몇 번이나 진저리치며 일어났다. 헉헉 사실은 무서워...




3.



아레키파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침 8시. 밤 10시 쯤에 버스를 탔으니, 10시간 정도 걸려서 온 거로구나. 정말 끔찍한 10시간이었다. 야간 버스 다신 타기 싫어... 차라리 낮에 버스를 타고 말지...

그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난 나흘 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퀭한 눈으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다가, 터미널 끄트머리에서 인포메이션을 발견했다.

나 : 영어?
남자 : ㅇㅋ.
나 : 숙소 추천 좀 해주라.
남자 : 숙소? 혼자야? 도미토리? 프라이빗?
나 : 상관은 없지만 웬만하면 프라이빗. 가급적 싼 방. 화장실 딸려있는.
남자 : 오, 그렇다면 여긴 어때? 가격은 이 정도.


기억은 잘 안나는데, 하루에 이만 원에서 이만 오천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 : 뭐, 그 정도라면.
남자 : 주소는 이거고. 밖에 나가서 택시 타고 가.
나 : 거기까지 가는데 택시비 보통 얼마 정도 해?
남자 : 이 정도?


역시 기억은 잘 안나지만, 나중에 택시기사와 흥정할 땐 그 가격보다 살짝 아래로 깎았다.




4.



그리하여 도착한 호스텔 산타 카탈리나. 여기까지 가는데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쓸 힘이 없어서 생략.

일단 호스텔 위치는 좋았다. 바로 근처엔 아레키파의 유명 관광지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이 있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아르마스 광장이 있으니, 도시 구경하다가 체력 보충하러 수시로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호스텔의 거대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로 앞이 시끄러운 도로였는데도 불구하고, 호스텔 내부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쩜 이렇게 외부와 차단된 느낌이 들까.

숙소 주인 아저씨가 나와서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하는걸 눈치껏 알아듣고 숙박부를 작성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아무 불평 없이 방을 하나 내주더라. 고맙다고 말한 뒤 객실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하우스키퍼가 객실 나무 바닥을 왁스로 방금 막 닦은 듯, 왁스 냄새가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침대 위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늘려 끼익거리는 나무 창문을 젖혔다.




5.



방에서 혼자 뒹굴거리다보니 좀 출출하다. 뭔가 뱃속에 채워넣고 싶다.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도로를 내다보니, 호스텔 바로 맞은편에 노점상이 보였다. 저기서 뭘 사먹어볼까.




그래서 사온 샌드위치 비슷한 거랑 음료수 비슷한 거.

샌드위치... 라고 해야하나? 버거? 여하간 바게뜨 빵처럼 단단한 빵 사이에 고기, 감자취김, 야채 등을 넣어 팔고 있는... 뭐... 뭐 여튼 그런거에, 뭔가... 미적지근한 물인데... 우리나라 식혜에서 단맛을 쫙 빼면 이런 맛이 나겠다 싶은 음료를 곁들여 먹었다.

설명은 이상하지만 의외로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었다. 내일 아침에도 여길 이용해야겠어.




6.

아침을 해결한 뒤, 기세를 몰아 도시 탐방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아레키파를 '백색의 도시' 라고 소개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근처에서 많이 나는 화산암으로 건물들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글과 함께 소개된 사진 속 아레키파의 모습은 너무나 따뜻하고 아름다워보였다.

솔직히 여행 전, 페루에서 제일 기대하고 있던 곳은 와카치나 사막이나 나스카도 아니요, 대도시 리마나 쿠스코도 아니며, 심지어 많은 여행자들의 로망인 마추픽추도 아닌, 바로 여기, 아레키파였다. 그 '백색의 도시' 란 별명과 아름다운 사진 한 장만 보고, 도시의 이미지를 멋대로 그린 뒤, 그 안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써는 그럴듯한 여행자(나!)의 모습을 멋대로 상상한 것이었다. 

뭐... 지금에 와선 그 때의 내 고상했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 도시를 추억하게 되긴 했지만... 그건 천천히 써보도록 하고.




일단 아레키파 첫인상.

자연스러운 빛깔의 돌, 회백색 화강암들로 이루어진 도시가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사실 백색의 도시라는 별명 때문에, 갓 빤 와이셔츠처럼, 혹은 방금 막 삶은 아기 속옷처럼 새하얀 도시를 살짝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 갓 빤 와이셔츠는 아니다. 방금 막 삶은 아기 속옷도 아니고. 음, 섬유 비유를 고집하자면...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때가 탄... 행주? 그래, 이거다, 때가 탄 행주 색깔.

그래서 실망했냐고? 아니아니, 이런 때가 탄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룩덜룩함이 자연스러워서 보기 좋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하는 유래 깊은 느낌도 받을 수 있었고.

건물들의 높이가 고만고만해서 여러 건물들이 하나로 이어진 건물처럼 보이는 효과도 있었는데, 덕분에 구시가지에서 길을 잃으면 조금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으니... 뭐, 그냥 생각은 그랬는데, 도시 다니면서 실제로 길을 잃은 적은 없었다. 이 도시는 길을 잃기엔 이정표가 되는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참 많으니.




7.

처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아르마스 광장 Plaza de Armsas. 이 놈의 광장 이름은 또 아르마스다. 페루에서 어지간히도 많이 봤다.

사실 페루 뿐만이 아니라, 남미의 여러 도시에서 이 이름을 볼 수 있다. 마을 중심, 도시 중심에 있는 광장이라면 다 '아르마스' 라고 한다. 어디 중심가에서 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기라도 하면, 택시를 잡아 '플라자 데 아르마스' 를 외치면 된다. 심지어 아르마스란 이름을 가진 광장이 없는 도시에서도, '아르마스 광장' 이라고 하면 다들 대충 중앙 광장이라고 이해하더라.




좌우지간 이 비둘기떼로 가득한 넓은 광장이 아레키파 구시가지의 중앙 광장, 아르마스 광장이다.




광장 주변은 온통 하얀 건물 투성이다. 아레키파 대성당을 비롯하여 호텔, 레스토랑, 박물관, 강당 등의 회백색 화강암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백색의 광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이렇게 큰 분수가 딸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뭐, 분수 자체는 시민들의 쉼터가 아닌 비둘기들의 쉼터가 되어버린 것 같긴 하지만.




이 광장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빗 사기.

여행 도중 아끼는 빗을 잃어버려서, 가뜩이나 지저분한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채였다. 이런 머리론 상체 혹은 전신이 나오는 인증샷을 찍을 수 없어... 머리털이 안나오는 얼굴 클로즈업 셀카 밖에 못찍어...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여성성을 위해 광장 주변의 기념품점을 좀 돌아다녔는데, 다들 빗으로 된 기념품은 없다고 하더라. 우리나라는 설악산 지리산 이런 곳만 가도 그럴듯한 나무빗을 그렇게 많이 파는데. 잉카 여인네들은 빗질을 잘 안했나. 쩝.

결국은 약국에 들어가 세상 어딜가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참 흔하게 생긴 약국표 comb을 샀다. 이렇게 애정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일상품은 이상하게도 잘 안잃어버린다. 그걸 증명하듯 저 빗, 여행이 끝난 지금 한국에서도 잘 들고 다닌다.




8.

빗도 사고 머리도 정리했겠다,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광장 주변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백색의 도시를 맛보시라.




백색의 대학교.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길래 뭘까하고 들어갔더니 대학교였다. 강의실까지 들어가긴 좀 그래서 그냥 뜰 정도만 구경하고 나왔다.




백색의 은행.

입구가 멋들어져서 박물관인줄 알고 들어갔더니 은행이었다. 내부 신식 건물도 백색으로 깔맞춤.




위 은행의 뜰.

옛날에 지은 건물을 그대로 가져와 은행으로 쓰면서 뜰이 남은거겠지.




심지어 패스트푸드점도 백색. 스타벅스도 백색.

주변 건물들과의 조화를 위한 저 노력 아름답지 않은가.




새로 지은 건물들 중엔 백색이 아닌 것들도 많지만, 그나마도 베이지색이다. 통일감을 위해 자기 색을 최대한 죽인 듯 하다.




먼 옛날에 지어진 건물들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점, 쓰임새는 조금 달라졌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쓰이고 있다는 점, 새로 지은 건물이라도 최대한 주변 건물들과 조화를 맞추려는 점 등등.

'백색의 도시'란 오래된 별명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던 건, 이 도시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9.

그새 배가 출출해져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레스토랑 거리로 들어왔다. 여기 식당가도 백색 투성이구나.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조금 고민하다가 끌리는 곳에 착석했다. 음식을 시키고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멍 때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 : 오, 리!
나 : ????? 뭐, 뭐야?


의자를 제대로 세우고 고개를 들자, 어쩐지 낯이 익은 금발의 남자와 여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 사람들, 어디서 봤더라...

???? : 우리 기억 안나!? 파라카스! 보트!
나 : 오, 그래! 너희! 제노바 커플!


그들은 파라카스에서 같은 호스텔을 썼던 제노바 커플이었다. 내 눈이 퉁퉁 부어서 다들 웃을 때 유일하게 날 걱정해주던 손님이었고, 함께 멜리사에게 속아 낡은 보트를 타고 바예스타스 섬 투어를 한 동지이기도 했다.

제노바 커플 : 너무 신기하다! 우리 막 나스카에서 왔거든!
나 : 하하하! 역시 페루 여행자들은 경로가 다 비슷하구나. 나도 나스카에서 오늘 아침 막 왔어.
제노바 커플 : 버스 너무 힘들었어... 이제 우리 숙소에 짐 풀고 자려고... 후후...
나 : 버스... 나도 알아... 10시간 정도 걸리지... 후후후...


서로의 고충을 아는 터라 무슨 이야기를 하든 간에 깔깔거리고 대화할 수 있었다. 적잖은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가, 제노바 커플은 이제 정말 침대로 가서 쓰러지고 싶다며 작별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제노바 커플 : 리! 다른 곳에서 또 보자!
나 : 그래. 어디선가 또 보겠지!





제노바 커플이 떠나자마자 로모 살다토가 나왔다. 나이스 타이밍.

우연한 마주침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 생글거리며 고기를 씹었다.




10.



점심을 먹고 기념품점에서 쇼핑 좀 했더니 어느새 저녁이다.

아레키파 대성당을 보러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왔다.




저녁놀에 백색 광장은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여전히 사람 참 많다.




성당 앞에선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즐거워 보인다... 나도 친구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

부러움에 그 단체 관광객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그 쪽 계단에 걸터 앉았다. 으으, 난 외롭지 않아. 기지개를 펴며 아르마스 광장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구슬픈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뭐야 이 감성적인 음악은... 마음이 슬퍼진다...

입은 헤 벌린 채 시선을 멀리 하고 누구랑 같이 왔으면 즐거웠으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나한테 말을 건다. 돌아보니, 옆에서 구슬픈 선율의 음악을 연주하던 청년들이었다. 말 걸어준게 고마워서 씨익 웃었더니, 어디서 왔냐, 이름이 뭐냐, 페루 좋냐, 노래 불러줄까 등등의 질문들이 쏟아졌다. 둘이 키득대면서 애매모호한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말하는게 제법 귀여웠다.

귀여워서 대화를 계속 받아줬더니, 자기네들이랑 같이 노래하면서 밤새 놀잔다. 뭘 또 밤새 놀아. 누나는 바빠. 외로웠던 여행자 모드에서 바짝 날이 선 경계모드로 돌아왔다. 계속 들이대는게 귀찮아져서 가볼 곳이 있다고 하고 일어섰다.

기타청년들 : 에엥? 어딜 가는데? 우리랑 놀자니까!
나 : 어... 어디 갈 곳이 있어... 저...


그 때 마침 아레키파 대성당의 저녁 개방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성당 안쪽으로 몰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음, 저거다.

나 : ....저기. 저기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가서 기도하려고.
기타청년들 : 그래. 기도 다 하면 여기로 와. 우리랑 놀자.


대꾸없이 그냥 웃으면서 손 흔들고 성당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하여 예정에도 없던 대성당 구경.

사람들이 대성당으로 쑥쑥 들어가길래, 문 앞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원래 저녁엔 무료로 개방하는 거라면서 너도 얼른 들어가란다.




내부는 대성당답게 서늘했지만, 뭐, 눈에 들어오는 건 그닥 없었다. 시를 대표하는 카테드랄이니까 뭔가 대단한 작품도 있을테고 건축 양식도 특별한 점이 있을테지만, 아는 게 없으니 달리 뭘 둘러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뚱한 얼굴로 제단 쪽만 빤히 쳐다보다가 나갔다.

...빤히 쳐다보다가 나가면 안되는 거였다. 기도를 했어야지, 멍청아. 앞으로의 여행을 위한 기도를 말야. 축복이 필요한 시점이었단 말이다. 하루 뒤 일도 예측 못하는 가여운 범인 같으니라고...




뭐 여튼.

뒷문이 열려있길래 대성당 건물을 그대로 관통해서 뒤로 나갔더니,




아까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 거리가 나왔다. 아, 이게 또 이렇게 연결되네.




11.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식당가에서 뭘 한담. 다시 성당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아까 로모 살다토를 시켜 먹은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언니가 날 알아보고 밝게 웃길래 자리에 앉았다.

이래봬도 여성의 미소에 약한 여자다.




배는 부르니, 피스코 샤워나 한 잔 달라고 했다.

맛있게 쪽쪽 빨고 있는데, 해피 아우어라 1+1 이라고 했다. 다 먹고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편한 자세로 깡칵테일(?)을 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맞은편엔 처음 보는 남자애가 앉아 있었다.

...뭐야, 얘는? 언제부터 저기 앉아있던 거야?


사실 저 남자애가 어떻게 내 앞자리에 앉게 된 건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굉장히 능글맞고 유들유들하게 말을 걸며 자연스럽게 앉은 것 같다. 마침 혼자서 술 마시기 조금 심심했는데, 잘됐구나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이름이... 뭐랬더라... 요한? 요셉? 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었는데... 그럼 후안인가? 후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니까 그냥 후안이라고 부르자. 하여간 후안은 볼리비아 사람으로, 가족들과 페루 여행을 왔다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뮤지션으로, 자기도 무슨 악기를 다룰 줄 안다나.

후안 : 우리 가족들이 여기 바에서 오늘밤에 연주하거든! 놀러와!

주소만 받아놓고 안갔다.




후안은 엄청 말이 많은 애였는데, 나에게 관광 정보를 알려주겠다며 아레키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어디에 가면 무슨 전망대가 있다, 저기에 가면 무슨 교회가 있다, 재래 시장에는 꼭 가봐라, 지도에 표시해줄테니까 지도랑 펜 꺼내봐라, 기타 등등.

그러다가 또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게 된 건지, 한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한테 한글을 가르쳐 달라길래, 코가 으쓱해져서 세종대왕 이야기를 하며 한글에 대해 썰을 좀 풀었다. 후안은 한글에 대해 설명을 들은지 10분만에 '보니타' 란 글자를 풀어쓰기로 써냈다.

후안 : 이거, 내가 보니타라고 쓴 거 맞지?
나 : 응 맞아. 근데 이렇게는 표기 안하고, 이렇게 모아쓰는건데...
후안 : 그래? 그렇구나! 근데 보니타는 예쁘단 뜻이야. 너 이쁘다고. 한국 여자들은 다들 이렇게 예뻐?


음, 한글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그냥 꼬실려고 소재를 꺼낸 거였군.

나 : 내가 예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호텔에 있는 남자친구는 내가 혼자 외출할 때면 언제나 걱정하지.
후안 : 나, 남자친구 있어?
나 : 호텔에서 몸 안좋다고 쉬더라고. 병이 났나봐.





가여운 후안은 약간 풀이 죽은 느낌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몇 번 주고 받다가, 남자친구가 걱정하겠다며 이제 호텔로 가겠다고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안은 잘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고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12.



남자친구는 개뿔.

아레키파 대성당의 야경이나 보러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신이시여, 오늘도 거짓말을 범한 제 입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사실 이런 거짓말을 하며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은 저입니다요.




낮보다는 한산해진 아르마스 광장.

살짝 쓸쓸해진 내 마음과는 관계없이, 야경 자체는 정말 아름다웠다. 삼각대라도 있었으면 안흔들리게 찍었을텐데. 조금 아쉽다.




광장 주변 거리를 거닐다가, 광장 한 귀퉁이에서 단체로 춤추는 무리를 발견했다. 뭐야, 얘네는. 즐거워 보인다.




구경꾼들이 꽤 많길래, 나도 중간에 껴서 춤바람난 사람들을 조금 구경하다가, 금새 지루해져서 다시 내 갈 길을 갔다.




걸으면서 생각한 거.

그러고보니 저 회랑 위 2층은 레스토랑 투성이던데, 저곳에서 저녁밥을 먹으면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좋아, 내일 저녁 식사는 저 곳으로 낙찰이다.




잡념을 쏟아내고 경건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성당에 들렸지만 벌써 개방시간이 끝나있었다.

성당 옆 쇠창살에 매달려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여하간 아레키파 1일차, 쪼끔 외로웠지만 재밌게 보냈다. 기대했던 만큼 재밌는 도시였네, 여기.

방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먹을 야식을 사들고 호스텔로 돌아가며 살짝 뿌듯해했다.


그래, 마음껏 뿌듯해해라, 과거의 나야. 행복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가여운 enat의 아레키파 여행기는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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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찬영 2015/02/15 12:08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친구ㅋㅋㅋ 재치있게 쫒아보냇네요.
  • enat 2015/02/15 13:37 #

    남미에서 얼굴도 이름도 없는 남자친구 있다는 말을 얼마나 했는지 말이죠... ㅇ<-<
  • 피까소 2015/02/15 12:33 # 답글

    중간쯤 사진에 연두 형광 티 아가씨 이낫님인줄알고 확대해본 1인 ㅋㅋㅋ
  • enat 2015/02/15 13:38 #

    저 여자는 체격이 크잖아요!
  • 키르난 2015/02/15 13:06 # 답글

    ... 어.. ... .... 이 다음 기록, 그리고 나흘 뒤의 낮버스가 두렵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풍전등화.. 아니, 폭풍전야 같네요. 도대체 이 다음에 뭔 일이 있었길래! 혹시 여행기가 늦는 것도 안 좋은 기억들이라 그런걸까요.;ㅂ;
  • enat 2015/02/15 13:40 #

    아니 뭐 별 일은 없었지만서도... 고난에 대한 기대(?)를 너무 크게 해놓으면 나중에 '이딴 일 때문에 전 포스팅에 그런 이상한 암시를 줬단 말야? 나약하군 흥흥' 하시는 건 아니실지... 흠흠

    아 아뇨... 여행기가 늦는 건 자격증 시험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머리가 안돌아가서 외우는데 오래 걸리네요... 쩝쩝.
  • 코양이 2015/02/15 13:59 # 답글

    확실히 여자분들은 외국 여행다니면서 이성문제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거 같네요...그냥 여행하고 싶을 뿐인데 쓸데없이 달라붙지 말란 말이야! 이런?
  • enat 2015/02/22 17:25 #

    맞아요!!!!! 특히나 동양인 여자를 신기하게 여기는 남미권에선... 뭔가 특식 바라보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어서 잔뜩 경계하게 되더라구요. 안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사람 보는 눈 길러지게 만드는 곳이기도 해요 ㅋㅋㅋ
  • Herzlich 2015/02/15 21:41 # 답글

    으으 이렇게 떡밥 던지고 가시면 다음 번 클릭때는 어쩐지 두근두근(?) 합니다ㅋㅋ
  • enat 2015/02/22 17:27 #

    두... 두근두근! ....죄... 죄송합니다...

    다음 포스팅이 좀 싱겁네요... 간 안맞춘 소고기 무국처럼 싱거워...
  • 레아 2015/02/17 18:08 # 삭제 답글

    예쁜 도시네요 :)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궁금...
  • enat 2015/02/22 17:26 #

    초반에 예뻐서 룰루랄라 누비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ㅋㅋㅋ

    후후... 뭐.. 제가 다 멍청해서 일어난 일이긴 하죠.... 빨리 써야지 빨리 음음
  • 업자 2015/04/19 11:33 # 삭제 답글

    수고해부렀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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