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1 22:49

남미여행 (21) 페루 : 안좋은 일들은 연달아서 ├ 남미 배낭여행 (2014)

1.

다음날 아침. 니콩이를 떠올리며 우울하게 일어났다. 원래 콜카 캐년에 갈까 했었는데, 카메라가 없으니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그보다도 일단 니콩이의 안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의미없이 침대에 누워 인터넷 뉴스만 뒤지다가, 시간에 맞춰 카메라 수리점에 찾아갔다.

그런데 이런, 아침 11시에 오라던 카메라 수리점의 문이 닫혀 있다.

옆 가게에 물어보니 점심 먹고 오면 열려 있을 것이란다.

젠장...


다시 숙소로 갈까, 아니면 구경할까, 무얼할까 하다가, 어제 다녀왔던 아레키파 메르카도(아레키파 시장)에 가서 쇼핑이나 하기로 했다.




2.

여러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옷을 샀다. 살 땐 예뻐보여서 샀는데 나중에 입어보니 별로였다. 아우 슬퍼.

옷이 담긴 비닐봉투를 손에 들고 메르카도 중앙 건물을 돌아다니다가, 현지인들로 가득찬 시장의 간이 음식점에 멈춰섰다. 사람들끼리 옆으로 밀착하여 옹기종기 밥 먹는 광경이 어쩐지 고국에 있는 시장통 같아, 자연스럽게 돈을 내고 볶음밥을 받아왔다.



사진은 핸드폰으로 찍음.

아 근데, 먹다가 음식에서 진득한 머리카락이 나왔다. 배낭여행 중에 웬만해선 음식 안남기는데 도저히 못먹겠어서 그릇을 두고 일어섰다. 에이, 오늘 왜 이래.




3.

점심을 먹고 오후 1시쯤 카메라 수리점에 찾아갔다.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는데, 전날 영어로 통역해주던 아저씨는 없고, 다른 아저씨가 가게를 보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나 : 그래서, 내 니콩이는!? 고친거야!?
수리점 아저씨 : 오케이, 오케이.
나 : 우와아! 정말!? 잘 작동되는거야? 시험해봐도 되는 거지?
수리점 아저씨 : 오케이!


영어라고는 오케이 밖에 모르는 아저씨였다.

나 : 오, 내 니콩이! 켜진다! 찍힌다! 고쳤구나!
수리점 아저씨 : 머니.


머니도 알고 있었다.

얼마냐고 묻자 수줍게 계산서를 나에게 내미는 아저씨. 그 가격은...

나 : 미화로 100불!? 10만원!?
수리점 아저씨 : 오케이.
나 : 너무 비싸!
수리점 아저씨 : 오케이!


뭐가 오케이야! 비싸단 말야!

상세한 내역을 요구하자 그 아저씨, 뭐라뭐라고 적어가며 설명하는데, 역시 스페인어라 잘 모르겠다. 에라이.

나 : 에이씨... 알았어. 우리 니콩이 살아났으니까 됐어. 돈 줄게, 줄게.
수리점 아저씨 : 오케이!


구매가의 1/3의 가격을 내고 되살아난 우리 니콩이. 괜찮아, 얼마가 들던간에 네가 살아난걸로 충분해. 이 언니는 정말 기뻐.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10만원을 지불한 이 가게에서 수리를 잘못한 바람에 찍는 사진마다 왼쪽 부분에 자체 블러 효과가 나고, 또 우유니에선 그런 참혹한 일이...

후... 우유니에서 투 비 컨티뉴.




4.

어째 여기 아레키파, 어제 저녁, 카메라를 떨궜을 때부터 하향세 느낌이다. 아레키파에서 쓸 수 있는 여행운을 다 썼나.

지금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다. 이런 여행자의 감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대로 다녔다가 고생한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다. 콜카 캐년이고 뭐고 포기하고, 아레키파에서 쿠스코로 가는 버스를 예약해야겠다.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여행사들을 돌아다니며, 쿠스코로 가는 버스 가격을 비교했다. 대부분 야간 버스였는데, 나스카에서 와카치나로 올 때 탔던 야간 버스에서의 끔찍한 밤이 아직도 생생하여, 야간 버스는 제끼고 주간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아레키파에서 쿠스코까지는 꽤 장거리라 주간 버스를 운행하는 버스 회사가 얼마 없었는데, 그 중 가장 저렴한 가격을 제시했던 CIVA 버스를 예약했다.

CIVA 버스...


시바 버스...


시바...


후... 이 역시 투 비 컨티뉴.




5.

쿠스코 가는 버스를 예약한 뒤, 구도심 근처 아무 카페에 들려 음료수를 마셨다.



사진은 막 고친 따끈따끈한 니콩이로.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괜찮아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즐거운 수다를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혼자여서 조금 아쉬웠던 곳.




6.

내일 쿠스코로 떠난다는 생각에 들떠 숙소로 돌아왔다. 밖에선 아무 문제 없이 멀쩡했다. 그런데...

그래, 바로 호스텔의 대문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지독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뭐지? 이상하다. 빈혈인가?

갸웃갸웃하며 내 방으로 올라가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아까 느꼈던 현기증이 다시 일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이 감각, 만취했을 때 그 감각인데? 그딴 생각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슬며시 눈을 뜨니 얼굴이 바닥에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난 잠시, 정말 생뚱맞게도 숙소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던 것 같았다.

머리를 손으로 감싸쥐고 간신히 침대로 기어올라왔다. 그러니까, 이 상태는...

자신의 상태를 정밀하게 점검하려는 노력도 무색하게, 머릿 속엔 한가지의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프다. 아파 죽을 것 같다.





7.

왜 갑자기 이렇게 아픈거지? 영문을 모르겠다.

몸을 몇 번 뒤척이다가, 곧이어 깨질 것 같은 두통에 괴로워하다가, 중간에 헛구역질이 나와 화장실로 몸을 질질 끌며 들어갔다. 토하고는 싶은데 잘 안나온다. 아, 뭐야, 대체.

오늘 시장에서 먹은 비위생적인 볶음밥. 머리카락이 나왔던 그거. 그걸 먹고 탈이 난 건 아닐까.
아니면 햇볕 쨍쨍하고 더운데 쉬지 않고 걸어다녀서 일사병에 걸렸나.
카페에서 먹은 음료수는 괜찮았던가.

짐작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숙소여서 전화도 없고, 설령 전화를 건다 해도 주인 아저씨는 영어를 모르고, 바디 랭귀지라도 제대로 된 도움을 청하려면 로비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정말 몸을 어떻게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아까 아침에 숙소에서 나갈 때 나무로 된 겉창문까지 닫아둬서, 방에는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았고, 그 어두운 공간 속 침대에 널부러진 채 아프단 말만 혼자 중얼거렸다. 아프다, 아파. 진짜 아픈데.

캄캄한 방, 무지 아픔, 몸도 못가누겠음, 도와줄 사람 없음.

내 상황을 파악하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으면 어쩌나. 내일이 체크아웃인데 그럼 주인 아저씨가 내일 날 발견해줄까. 내 여권 보이는 곳에 있으니까 신원 파악은 빠를거야. 이 소식을 들으면 가족들은 슬퍼하겠지. 친구들은 쟤 언젠간 저럴 줄 알았어 운운하며 애도해줄거야. 그리고...


고통과 우울한 생각 때문에 눈물이 났다. 그렇게 침대에 뻗은 채로 두 시간 정도, 엉엉 울다가 아파서 몸부림치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8.

울다가 목이 쉬어버려 꺽꺽대고, 마침내 흐느끼는 것도 힘들어질 무렵에서야, 가방에 멕시코에서 구해뒀던 아스피린 한 알이 남아있던게 생각났다. 간신히 찾아 삼키고 다시 누워 안아프게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뭔진 모르겠지만 잘못했고 그냥 안아프게만 해주세요. 나 착하게 살았잖아요. 왜 이러시는데요.

그렇게 한참 하늘의 높은 분께 투덜거리다보니, 아스피린 기운이 도는 건지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아프긴 해도 참고 걸을 순 있을 것 같았다.

이 원인 모를 통증을 가라앉히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말이라 병원이 열었을지도 모르겠고, 사실 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 근처 돌아다니면서 약국 간판은 많이 봤는데 병원은 본 기억이 없다. 그래, 일단 약국에 가서 현지 약을 구해야겠다. 현지에서 감염된 세균 혹은 바이러스 때문에 아픈거라면 현지 약이 잘 통하지 않을까.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훌쩍거리며 숙소를 나섰다. 돌아다니면서 약국 간판을 많이 봤다고는 했는데, 막상 찾으려니까 잘 모르겠다. 거리에서 무턱대고 영어가 통할 것 같은 사람들을 붙잡고 약국이 어딨냐고 물어봤다. 세번째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듣고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약국을 알려줬다. 고맙다고 하고 알려준 대로 그 약국을 갔더니, 이런 젠장, 주말이라 문이 닫혀있다. 다시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근처에 있는 약국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식으로 세 번을 반복하여 마침내 문이 열린 약국을 찾을 수 있었다.





9.

나 : 저기, 내가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픈데 토할 것도 같고... 근데 토는 안나오고...
약국 직원 : $*%^&$#&? &^*&???
나 : ....


약국 사람들 전부 영어를 모른다. 의약계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외국어에도 능통할 거란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나 : ....어... 머리... 머리가 아프고...

머리에 손을 대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 그리고 배도 아프고....

배에 손을 대고 끄으응 소리를 내줬다.

나 : 토할 것 같은데 토는 안나오고...

헛구역질 하는 모션을 보여줬다.

약국 직원 : !! ㅇㅋ!


그렇게해서 얻은 약 두 종류. 하나는 두통약, 하나는 복통약인가. 이딴 식으로 약을 받아내서 먹어도 되는 건가. 약물 오남용이 세계 사망 원인 통계 몇 위였더라.

일단 약을 받아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서 또 헐떡이며 침대에 쓰러졌다. 아, 모르겠다. 지금도 죽을 것 같은데 이 약 먹고 죽더라도 억울하진 않을 것 같다. 생수를 찾아 약 두 알을 삼켰다.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지쳤던 건지, 그 뒤의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다. 아마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아파서 골골대는 enat의 페루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핑백

  • Everyday we pray for you : 남미여행 (★) 정보 겸 요약 겸 정리 포스팅 2016-07-01 11:13:03 #

    ... 리는 필수다. 3) 음식 잘못 먹으면 훅간다. 현지 음식 먹겠다고 시장에서 밥을 먹던 나, 당일 저녁 끔찍한 두통과 복통으로 쓰러졌다. (http://enatubosi.egloos.com/1869050) 가격 좀 싸다고 사람 없는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세비체를 시켜먹은 나, 당일 저녁 알레르기로 눈이 퉁퉁 부었다. 먹는 건 진짜 ... more

덧글

  • JOSH 2015/07/12 01:38 # 답글

    헐... 고산병인가요.
  • enat 2015/08/11 13:43 #

    고산병은 아니고 뭔가 식중독? 같은 거였던 것 같아요. 비위생적인 음식 먹고나서 저렇게 아팠으니 ㅠ
  • 키르난 2015/07/12 06:34 # 답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글 읽는 것만으로도 괴롭고...ㅠㅠ 여행 다닐 때 카메라 망가지면 당황하고, 거기에 아프면 서러운데, 또 뭔가 사건은 계속 터지고...ㅠㅠ
    근데 저렇게 망가진 니콩이는 재수리로도 부활이 안되었나요?;
  • enat 2015/08/11 13:45 #

    ㅋㅋㅋㅋㅋㅋ으으 아프면 서러워요... 저 때만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ㅋㅋㅋㅋㅋ
    누가 남미여행에서 고생했던 얘기해달라고 하면 제일 먼저 꺼내는 이야기가 저 얘기에요 ㅋㅋㅋㅋ

    니콩이는 재수리로 썼지만 얼마 안있어 고장났어요.
    제대로 안고쳐주고 10만원 가져간 수리점 아저씨..
    흐흑..
  • 야기꾼 2015/07/13 22:36 # 답글

    ... 아아.. 뭔가 눈물이 앞을 가리는 여행 후기여야 하는데.. CIVA 시바 3연타에에서 빵터져서 왠지 죄송한 마음입니다. ;;
  • enat 2015/08/11 13:45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음 한방 노렸는데 걸려드셨군요. 다행입니다.
  • Unojo 2015/07/14 10:46 # 삭제 답글

    항상 나쁜일은 몰아서 오는거 같네요 ㅠㅠ 완전 멘붕이셨겠어요 게다가 타지에서 아픈게 제일 서러운데...!!! 그래도 힘든 여행이 기억엔 제일 남는다는 ㅠ
  • enat 2015/08/11 13:47 #

    안좋은 일들은 왜인지 연달아 터지더라구요. 특히 혼자 여행할 때 아프면 서러움 대폭발 흐흑...
    아레키파는 좋은 도시였는데 저 아팠던 일 때문에 떠올리면 치가 떨리는 도시가 됐어요 ㅋㅋ큐ㅠ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