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6 11:19

남미여행 (27) 페루 :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하다 ├ 남미 배낭여행 (2014)



이쯤에서 적절한 지도 투하. 새로 산 노트북에 포토샵이 없어서 구글맵에 그림판으로 끄적.






0.

성스러운 계곡 투어가 끝나고, 오얀따이땀보에 혼자 남겨진 나.

오얀따이땀보에서 마추픽추 아랫마을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아구아스 칼리엔테스, Aguas calientes)까지 가는 열차는 늦은 밤 10시에나 있었다. 그 앞 시간 열차들은 내가 예매할 당시 다 팔리고 없거나 비쌌더랬다.

투어가 끝난 건 5시. 5시간이나 남았다. 그 동안 뭘 하지?

뭘 하긴. 마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다가 카페 같은 곳에 앉아서 시간이나 때우자.





1.



오얀따이땀보의 기념품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옆으로 매는 짐 가방 하나를 건졌다. 잉카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는 큼지막한 가방이었는데, 최근 들어 짐이 늘어나 쇼핑백에 짐을 쑤셔 넣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될 녀석이었다. 정작 구매한 가방의 단독 사진이 없어 아쉽네.





2.

골목이 예뻐 보여서 혼자 타이머 맞춰놓고 사진 찍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보고 웃음. 웃지 마. 너네도 혼자 다녀봐.





3.

시위대를 만났다.




처음엔 페스티벌인가 하고 쫓아가봤는데, 경찰들이 통제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선 시위였다. 뭐라고 외치며 행진을 계속 했는데, 무슨 말을 외치는 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삽자루가 들어간 깃발을 흔들었었는데, 노동권이나 공사 중단... 뭐 그런 것에 관련된 걸까? 음, 알 수가 없다.





4.

레스토랑이 많았던 골목.




어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때울까 했으나 고르질 못하고...




한참을 수확없이 돌아다니던 enat은 결국 광장에 있던 한 카페에 들어가 과일 요거트 따위의 음료를 마셨다. 맛은 평범했음.




카페 앞 광장 파노라마 샷. 해도 지고, 사람도 안 보이고, 어쩐지 쓸쓸한 광경이다.

카페 점원 언니의 도움을 받아 Wifi를 연결했다. 누구랑 대화를 하고 싶은데, 한가한 사람 없나. 여기가 저녁이면 한국은 지금쯤... 새벽? 이른 아침이려나. 다들 바쁜 시간대일텐데... 에이 됐다, 그냥 연락하지 말아야겠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혼자 테이블에 엎드려 네이버 뉴스 같은 걸 봤다. 이 뉴스, 저 뉴스, 실시간 검색어, 의미 없는 링크 타기...





5.

카페에만 앉아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린다. 또 돌아다니기로 했다.

돌아다니다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와 프링글스 한 통, 레이칩 한 봉지를 손에 넣었다. 과자 부스러기만 손에 넣었을 뿐인데 부자가 된 기분이다. 아껴서 먹기로 했다.





6.

아직도 저녁 7시다. 열차 타려면 3시간이나 남았다. 미쳐버리겠다.




더 이상 마을은 못돌아다니겠다. 남은 시간은 오얀따이땀보 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역 입구에서 경비원인지 경찰인지 하여간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표를 확인하고 들여보내줬다. 표가 없으면 역 자체에 못 들어가나 보다. 하긴, 마추픽추 가려는 여행자들 치고 이 역을 거쳐 가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소매치기나 날강도 같은 범죄가 발생한다면 이런 곳에서 발생하겠지. 또 열차에 몰래 숨어 타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의해야 할테고.

하지만... 뭐... 시간도 안됐는데 오얀따이땀보 역에서 뭐할껀데에에에 어차피 열차는 3시간 뒤에나 출발인 거어어어얼...





7.

기다림에 지친 여행자는 역내 카페에서 1+1 행사를 하고 있는 피스코 샤워를 마셨다.




급격하게 알딸딸해진다. 으어어.





8.

혼자 여행하면 이게 안 좋다, 이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천 년 만 년 같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면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정리해서 얘기하고, ‘나... 사실은 그 때 그랬어...’ / ‘정말? 네가 그랬단 말야?’ 따위의 진실 고백 같은 것도 하고, 대박 잘 나온 인생샷 혹은 웃음 터지는 엽사들을 그 작은 디카 액정 안에서 돌려보며 깔깔거리며 웃고, 서로에게 푸념을 던지거나 재미없는 농담 따먹기, 둘이서 할 수 있는 자잘한 게임 등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혼자고... 원래 혼자 마음먹고 여행을 시작한 거긴 하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오얀따이땀보 역사 벤치에 쭈그려 앉아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간절히 바랬다.





9.

열차가 지연되는 바람에, 10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서야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열차의 앞 칸들은 낡은 지하철 같은 느낌으로, 현지인들이 탈 수 있는 값싼 칸이어서 사람들이 정신없이 몰렸다. 여행자들이 탈 수 있는 비싸고 고급진 칸은 저 뒤에 있어서, 난 인파를 헤치며 뒷쪽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마음이 텅 빈 상태로 열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앞에고 옆에고 뒤에고, 전부 커플이거나 삼삼오오 뜻 맞는 친구들끼리 모인 여행자들인 것 같았다. 다들 내일 찾아갈 마추픽추가 기대되고 흥분되는 건지, 서로 활짝 웃으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조... 좋겠다...

달리 함께 떠들 사람이 없었던 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다. 아이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나를 위로해줬다. ‘무정한 사람아~ 이 밤도 나으 모든 거~엇을 앗으려 하나아~’

철없던 사람아.





10.

열차에서 청승맞게 웅크려 있다가, 갑자기 내가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나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런, 나 아직,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묵을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 쿠스코에서 미리 알아보고 예약해뒀어야 했는데, 어디 방은 있으려나?

열차 칸을 오가며 승객들의 짐을 챙겨주고 간식을 주는 등의 서비스를 해주던 페루인 남자 승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나 : 있잖아, 너 여기 살아?

페루인 승무원은 신비로운 동양인 여인이 자신의 거취에 대해 묻자 당황하며 대답했다.

페루인 승무원 : 응? 나? 어, 나 쿠스코 사는데... 왜?
나 : 에이, 그럼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잘 모르겠네.
페루인 승무원 : 맛있는 술집은 알아!
나 : 술집 말고, 호스텔이나 호텔 아는 곳 있어? 민박...그, 까사?
페루인 승무원 : 아....


곰곰이 생각하던 승무원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페루인 승무원 : 그럼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도착하면, 같이 술 마시러 가자! 술 다 마시고 그 근처에 괜찮은 숙소 같이 찾으면 되겠네!
나 : ...그냥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도움이 안 되네.





11.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 자정이었다. 난 아직도 어디서 잘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사실 정하지 못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숙소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 아니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여행 한 두 번 해!?

같이 술 마시고 놀자는 승무원에게 꺼지라는... 아니,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고 기차에서 내렸다. 저 승무원의 도움을 안받아도 괜찮을까? 한밤 중에 호텔 문을 두드리며 돌아다녀도 안전한 동네일까? 아오, 걱정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여행에서 인생운을 다 써버려서 복권이 당첨되지 않는 나답게, 문제는 간단히 해결됐다.

그 늦은 밤 12시에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역엔 삐끼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삐끼1 : 우리 방 싸요!
삐끼2 : 우리 방은 더 쌈!





많은 삐끼 아저씨 중 제일 싼 가격을 부르는 아저씨를 쫓아갔다. 한화로 1만원? 1만 5천원? 정도 하는 돈으로 더블 룸을 주겠단다. 지붕만 있어도 감지덕지라 생각하며 따라갔더니, 침대 1개에 보조 침대가 딸려 있고 온수가 나오며 와이파이도 빵빵한 방을 주더라. 아... 살았다...

앞으로 삐끼한테 잘 대해주고 거절할 때도 웃으며 거절하기로 한 enat이었다.





12.

욕실에서 후딱 씻고 침대에 누웠다. 새벽엔 추울 것 같아 스웨터를 두 개나 껴입고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자 또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혼자 여행할 때면 한 3주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외로움이 지금 왔나 보다. 오늘은 안되는데. 내일은 마추픽추 보러 가는 날이란 말야. 남미 여행 일정 중 어찌 보면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날인데, 이렇게 축 쳐진 기분으로 되겠냐고.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베갯잇을 적시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자칭 내 여행의 후원자 (자신이 젊었을 때 꿨던 꿈을 내가 이뤄주는 거라며 후원을 해주겠다고 해서 5천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맞았다... 복권 당첨되면 해주겠다고는 했다) 인 그리즐리 삼촌의 메시지였다.

그리즐리 : 건강하냐? 건강은 챙겨가면서 여행해라 어쩌구 저쩌구.

크흑... 나야 건강... 건강하... 크흑....



타이밍 잘 맞춘 메시지 한 통에 괜히 울컥했다. 나 여기 오는 길은 엄청 외로웠고, 저기 아레키파에선 무지 아팠고, 파라카스에선 눈 퉁퉁 부었고, 리마에선 대머리한테 사기 당하고... 할 말은 많은데 그걸 어떻게 정리해서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여행 잘 하고 있다고, 이따 아침이면 마추픽추 올라간다고 답신을 보내고 말았다.

그렇게 평범한 인사를 주고 받았을 뿐이었는데 뭔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안부 묻기가 외롭고 힘든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5천만원보다 더 큰 걸 받았다. 그리즐리 삼촌, 삼촌은 내 여행의 후원자가 맞았네.



청승질 멈추고 마추픽추에 오를 힘을 얻은 enat의 마추픽추 여행기는 다음에 계속!





덧글

  • 키르난 2015/10/16 12:31 # 답글

    왠지 쓸쓸하고, 허무하고, 춥습니다....;ㅂ; 단순히 창문을 열어 놓아 추운 것이 아니라 괜히 마음이 시린 이야기가..;ㅂ; 그래도 숙소를 빨리, 그것도 꽤 시설 좋은 곳으로 고를 수 있었던 건 다행이네요. 드디어 다음 편이면 마추픽추인가요.+ㅁ+
  • enat 2015/10/16 18:26 #

    여행 중에도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는지 ;ㅅ; 흑흑
    숙소 껀은 정말 ㅋㅋㅋ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역 앞의 삐끼 아저씨들이 어찌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근데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때 나올때 다르다고, 숙소 처음 들어갔을땐 오오 감사 오오 하다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까 좀 눅눅한 것 같기도 하고, 가구에 쌓인 먼지와 녹슨 화장실 문 등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ㅋㅋㅋ
  • 택씨 2015/10/17 09:57 # 답글

    저는 잠시 잠시 여행을 다녀서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지만 정말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같은 심정이 될 수 밖에 없을 거 같군요. 음;;
  • enat 2015/10/29 21:21 #

    장기 여행의 가장 큰 독은 ㅠㅠㅠㅠㅠㅠ 외로움이더라구요. 괜히 외롭고, 쓸쓸하고, 기죽고... 뭐, 조금이라도 응원의 메세지를 받으면 금방 힘나서 다시 일어서긴 하지만요! 그래도 그 외로웠던 순간만큼은 진짜 세상을 다 빼앗긴듯한 기분이에요 ㅋㅋㅋㅋ
  • 2015/10/18 15: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10/29 21:2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kate 2015/12/12 03:18 # 답글

    언젠가 부터 혼자 다니는 여행이 힘들어졌어요
    나이 드니 더하네요 ㅎㅎ
  • enat 2015/12/18 16:27 #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게 제일이죠 ㅠㅠ 저도 요즘엔 웬만하면 혼자 다니지 않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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