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1:07

남미여행 (29) 페루 : 지친 몸으로 마추픽추 ├ 남미 배낭여행 (2014)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몬타냐에 올랐다가, 땀범벅이 되어 내려온 나.

몬타냐 출구에서 등산객 인원 체크를 위한 명부에 싸인을 한 뒤, 남은 기력을 짜내어 마추픽추 유적 초입부까지 내려갔다.



아아, 마추픽추!


산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신비한 공중 도시, 잉카 제국 최후의 도시, 1983년대에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자 2007년도에 새롭게 뽑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그 타이틀 긴 유적 도시를 보기 위해 이 몸께서 먼 길을 달려 왔도다! 그러니까 지금, 풀려서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이 다리를 내 의지대로 움직여 네 녀석의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이 들려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네 녀석의 풍경을 관람해주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을 보채어 네 녀석의 사진을 찍어주겠어! 지금! 당장!




지금... 당... 당장...? 으으... 조... 조금만 있다가...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난, 유적 입구로 가는 길목에 주저 앉아 정신줄을 놓았다. 샌드위치와 스크램블 에그라는 알량한 아침을 먹고, 점심은 아침 식사할 때 남은 빵과 정상에서 다른 여행자들에게 받은 아몬드로 때웠으니, 이런 상태론 해발 제로에서 산책을 하는 것도 힘들겠다 싶었다. 하물며 해발 이삼천의 언덕 많은 유적 탐방이야. 어이쿠, 못해, 못해.

그렇게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경비 아저씨(유적 관리인? 감시자? 안내인? 뭐라고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친근한 단어를 썼음)로 보이는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 통로니까 다른 곳 가있으라고 하려나? 괜히 혼자 지레짐작하고 주섬주섬 배낭을 들어올리려는데, 경비가 그게 아니라며 두 손을 좌우로 흔든 뒤 말을 걸었다.

경비 : 치나? 괜찮아?
나 : 코리아나야. 괜찮아. 나, 저기 몬타냐. 꼭대기. 등산. 헥헥.
경비 : 몬타냐에? 어휴, 쉬어, 쉬어.


걱정해준게 고마워서 방글방글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그 경비아저씨는 내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 근처에 서서 나를 수호(?)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여행자1 : 어, 우리도 저기 앉아서 쉴까.
여행자2 : 그래. 저기 그늘 좋다.
나 : (앉으려나? 좀 옆으로 비켜줘야...)
경비 : 그럴 순 없지.
여행자1&2 : !?
나 : (!?)
경비 : 그 쪽으로 가면 안돼. 여기 일방통행 지역이라, 가던 길로 계속 가도록 해.
여행자1 : 그런 게 어딨어!?
경비 : 진짠데. 여기 룰이야.


내가 자리 잡고 앉은 자리가 마침 일방통행 지역이란다. 하지만 그 자리는 지나가고 나서야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여서, 누구든 지나갔다가 고개를 돌려 괜찮은 자리라 인식한 뒤, 몸을 돌려 뒤로 가야만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경비는 역방향으로 걸어와 내 옆에 앉으려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다. 그런 상황이 두세 번 반복되자, 조금 민망해져서 경비에게 물어봤다.

나 : 있잖아, 나도 아까 저렇게 역방향으로 걸어서 여기 앉았는데... 나 여기 앉아도 되나?
경비 : 엥? 앉아, 앉아. 괜찮아. 쉬라고.
나 : 고, 고마워.


덕분에 그늘 좋고 통풍 좋은 자리에 나 혼자 앉아 늘어져 있을 수 있었다. 뭔가 대단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라 조금 민망하다.




한 30분 정도 앉아 있었나. 이스 초창기 시리즈에서 아돌이 가만히 서있으면 피가 차는 그런 느낌으로 기력을 회복시킨 뒤, 몸을 일으켰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경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경비 : 코리아나! 뷰 보러가?
나 : 뷰?
경비 : 저쪽. 올라가. 마추픽추 다 보여.


전망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나 : 어, 거기 가려고.
경비 : 그래? 꼭 가. 내 친구 있어. 사진 찍어달라 그래.


전망대에 있는 친구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잘 찍어준다는데. 아마 함께 경비일을 하시는 분이 있나보다. 알겠다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전망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뗐다.




다시금 언급하지만 사진 왼쪽이 자동 블러 처리된 건 아레키파에서 카메라 고치다가 렌즈가 맛가서 그런거다... 아이구 속상해.

여하간 경비 아저씨가 가라고 한 곳은 마추픽추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 (요 사진은 나중에 마추픽추 아랫마을 내려가서 찍은 거다.)

구글에서 찾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전망대에 '오두막 전망대'라는 이름을 붙였더라. 전망대 이름이 오두막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에 오두막이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로는 La casa de los guardianes라는 이름이 붙어있어, 망지기의 집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단다. 정리하자면 '망 보는 사람을 위한 오두막이 있는 전망대'가 되겠다.

내가 전망대에 올랐을 땐 마침 관광객들이 쫙 빠진 타이밍이었는지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난 유적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마추픽추의 풍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 마추픽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과도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달리 무슨 말을 해야하나. 난 아무 감탄사도 내뱉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멍하니 아래만 바라보았다.

마추픽추를 다녀온 건 벌써 1년이나 더 된 일이지만, 지금도 이 사진을 보고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유적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 정오가 지나 살짝 비스듬한 방향으로 살갗에 닿는 오후의 햇살, 전망대 밑에서 웅성웅성 들려오는 세계 각국의 언어들, 조금은 벅차고 조금은 외로웠던 복잡미묘한 감정까지.

잉카인들이 남긴 세계에서 제일 불가사의하다는 유적을 바라보며, 하고 싶었던 일이자 해야만 하는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살짝 긴장이 풀려 한숨 비슷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마침내 여길 왔어.




그런 감동적인 순간을 담기 위한 기념비적인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카메라를 올려놓고 타이머를 맞출 구조물도 없고, 사진 찍어달라 부탁할 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왔던 개 인형 몰리로 인증샷을 남기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 : 치나?
나 : 코리아나.


반사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고개를 돌리자, 아까 일방통행 경비와 똑같은 옷을 입은 아저씨가 서 있었다. 어, 이 아저씨가, 아까 일방통행 경비가 알려준 그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경비인가?

또다른 경비 : 사진 찍을래? 포토 오케이?

통성명 전에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열정적인 아저씨. 뭐, 나야 땡큐지. 난 그에게 카메라를 맡긴 뒤 수줍게 포즈를 잡았다. 하지만 경비가 손가락을 칫칫 흔들더니, 좀 더 뒤로 가서 저 마추픽추를 내다보란다.

나 : 더... 더 뒤로? 무서운데.
또다른 경비 : 안떨어져. 더 뒤로. 그렇지. 아니, 고개는 저 쪽.


뭔가 포즈까지 상세하게 교정해준다. 대체 얼마나 잘 찍어주려고 이래?

또다른 경비 : 오케이. 쿨.

포즈를 취하자마자 뜸도 들이지 않고 사진을 다 찍은 뒤, 날 부르는 경비 아저씨. 참 나, 얼마나 잘 찍길래 저렇게 단번에 찍어놓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거야? 대체 얼마나...




....


그렇게 난 인생샷을 얻었다.


나 : 뭐야! 엄청 잘 찍었잖아!?
또다른 경비 : 하하. 굿? 오케이?
나 : 완전 쩔잖아! 대박이잖아!
또다른 경비 : 나 이 장소에서만 몇 년을 일함. 하루에도 여행자들 사진 수십장을 찍어줘.


그래서 최적의 장소와 최적의 포즈, 최적의 타이밍을 아는 것이었다. 역시 경험이 실력을 쌓는구나.

나 : 대단해, 대단해. 완전 전문가다. 이 사진은 이번 여행 베스트 샷이 될 것 같아.
또다른 경비 : 하하, 뭘 이 정도로.


칭찬이 싫지 않았는지 코를 찡긋하며 배실배실 웃는 경비 아저씨.

또다른 경비 : 그럼, 마추픽추를 마저 구경하라구. 즐거운 여행 되길!
나 : 응! 땡큐 베리 감사!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져 뿌듯해하며 유적 속으로 향한 나.

전망대는 유적에서 제일 높은 끄트머리에 있기에, 세월이 쌓인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유적의 중심부로 갈 수 있다.


계단에서 내려갈수록 도시는 점점 가까워져오는데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도시로 들어가는 길목, 웬 돌무더기가 잔뜩 쌓여있다. 이 곳은 채석장으로 추측되는 곳이란다.

여기서 돌을 캐다가 그 경이로운 석공기술로 돌을 다듬어 하나하나 쌓아가며 도시를 세웠겠지.



아래서부턴 그 경이의 도시 마추픽추를 살펴본 사진들.




1) 채석장 뷰가 좋아 타이머 셀카 삼매경에 빠진 나.

2) 위에서 바라본 신전 및 왕족의 공간이 있는 중요 지역.

3) 마추픽추 유적의 메인 게이트를 통과하면 보이는 길. 와이나픽추가 굽어보고 있다.

4) 마추픽추 유적의 어느 뒷골목(?). 그새를 못참고 또 타이머 셀카질. 어떻게든 이 현실감 없는 유적에 '내'가 있었다고 증거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여라.




1) 태양의 신전. 신전 내부에 자연석이 놓여져 있다... 아니, 자연석이 놓인 곳에 신전 벽을 둘러 세운 게 맞겠다. 안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어서 들여다보려면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하는데, 얘가 태양의 신전이라는 걸 아래에 내려와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사진은 없다. 다리아파, 다시 못 올라가.

2) 왕족의 무덤. 저 희한한 모양으로 만든 동굴의 입구 안쪽이 무덤이다.

3) 콘도르의 날개를 본따 만든 콘도르 신전.

4) 물의 거울. 납작한 돌그릇에 물을 받아두고, 거울로 쓴 것이라 추정하고 있단다. 물론 추정일 뿐, 저 물의 거울로 태양과 별을 관측했을지, 하늘을 담는다는 느낌의 상징적인 물건이었을지... 정확한 목적은 이 곳에 살던 잉카인들이 다 사라져버려 아무도 모른다.




1) 2) 퍼즐 맞추듯 짜맞춘 돌.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석조기술이다.

3) 두 개의 돌담 사이에 뭐가 있나 다가갔다가 절벽이라 깜짝 놀람. 돌담 사이로는 서늘한 우르밤바 계곡의 바람이 불어온다.

4) 어딘가의 돌담에 기댄 이름모를 여행자의 후리한 포즈.




여기저기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유적지 중턱, 전망 좋은 곳에 나란히 서서 계단식 밭을 찍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래, 먹는 거 중요하지.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잉카인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나를 알려주는 계단식 밭을 바라보았다.




어떤 산비탈이어도 계단으로 깎아 경작하겠다는 잉카인들의 의지가 엿보이는 밭. 모라이와 피삭을 거쳐, 세 번째로 보는 잉카의 계단식 밭이다.

마추픽추에 있는 계단식 밭은 40단이란다. 각 단에는 감자나 옥수수 따위가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존에서 전해졌다는 코카 역시 한 단을 차지하곤 무럭무럭 자랐을 것이다. 농작물을 수확한 다음엔 밭의 끄트머리에 세워져 있는 저장고에 두었을테고.

자, 먹을 건 계단식 밭으로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마실 건?




이렇게 높은 곳에 산다면 제일 걱정인 것은 역시 물일테다. 어떻게하면 도시 전체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을까.

기술 하나만 제대로 배워두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잉카인들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 자신들의 최고 장기를 이용했다. 바로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톤 마이스터급(?) 기술을 동원하여, 돌 안쪽에 구멍을 파 수로를 만든 것이다. 이 수로가 얼마나 계획적이고 정교한 수로였냐면, 물을 저장하기 힘든 산 꼭대기에서도 365일 내내 마르지 않으며, 왕족과 귀족, 평민이 계급 순으로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뚫은 수로였다고 한다.

계급 사회의 부조리 어쩌구 이전에, 일단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수로를 만든 잉카인들의 그 돌 깎는 기술에 대해 박수를 쳐주고 싶다.




비교적 쉽게 돌아볼 수 있는 지역은 대충 다 돌아본 것 같다. 유적 전체의 1/3 정도 관람한 거려나. 아직 못 본 부분이 더 많은데. 더 돌아봐야 하는데. 그러나 그새 또 체력이 방전됐다. 체력이 예전 같지가 않다. 아니,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원래 저질 체력이었다. 여하간 어딘가 앉아서 쉬어야겠다.

유적 안에서도 구석탱이,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 조용한 방을 골라 들어갔다. 이 방은 무슨 용도로 쓰였으려나. 누가 살았으려나. 잘은 모르겠지만 힘들어 죽겠으니 일단 쉬었다 가야겠다. 원래 이 방의 주인도 내 지친 얼굴을 보면 이해해줄거라 믿으며 의자처럼 보이는 구조물에 걸터 앉았다. 으음, 조금만 쉬자. 충전되어라, 내 몸아, 포션 같은 건 없으니 그냥 알아서 충전되어라...






혼자 텅 빈 방에서 쉬니 어느정도 체력이 회복된 것 같았다. 난 다시 힘차게 일어나 사진을 찍으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알고보니 난 회복된 게 아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다시 다리가 풀려옴과 동시에 약한 현기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일이 이렇게나 피곤한 일인 줄 몰랐다.

하지만... 아직 구경 못한 곳들이 많은데.

내 다리 : 이제 좀 내려가자.
내 머리 : 아직 저 쪽 반대편은 아예 못 둘러봤잖아. 힘내서 더 구경하자.
내 다리 : 아 뭐래. 나 이제 못 움직임.
내 머리 : 그래도, 좀 더 힘내서...
내 어깨 : 야, 나 가방 무거워.
내 발 : 난 욱신거려.
내 위 : 여기 텅 빈지 오래됐어.
내 입 : 침 말라. 먹을 거 내놔.
내 머리 : ....


신체 부위 곳곳이 날 원망하는 듯한 환청이 들려와서, 난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그래, 니들...아니 나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내려가자.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보며 유적에서 내려왔다. 아우, 정말. 아침에 몬타냐에서 너무 힘 뺐어.




마추픽추와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를 잇는 버스표를 편도로 사버려서, 돌아갈 땐 걸어서 내려가야 했다.

언제 또 이 깊은 산중을 걸어 내려간담. 눈 앞이 캄캄하다.




반쯤 풀린 다리로 쉬지 않고 내려가는 중.

내려가는 도중에 보이는 풍경들은 참 멋졌다. 곳곳에 만들어진 계단식 밭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재밌었고.

사실 난 산을 오르는 건 꽤 하는 편인데, 내려가는 걸 잘 못한다. 성격이 급해서 우당탕탕 내려가다가 곧잘 미끄러지고 곧잘 넘어져댄다. 기억은 안나는데, 가족들 말을 들어보면 어렸을 때도 산에서 콩콩거리고 내려가다가 데굴데굴 구른 적이 많다고 하더라.

뭐, 그래서... 별 얘긴 아니고 그냥 내려가는 길에 두세 번 엉덩방아 찧었다고.




그렇게 엉덩이에 흙을 묻혀가며 내려가던 도중, 울창한 숲 속에서 희한하게 생긴 동물을 발견했다. 한 나무에 다섯 마리 정도가 매달려 있었는데, 내가 자기네들 영역을 침범했는지 나무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날 향해 꺆꺆소리로 위협하더라.

동물학엔 조예가 없어서 뭐라는 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보고 흥분해서 낑낑대는 소리가 제법 귀여워 사진을 찍어뒀다.




한참을 걷다보니 드디어 평지다. 할렐루야다. 대체 내려오는데 얼마나 걸린 거야? 몇 시간은 내려왔겠는걸?

시계를 확인해보니 정확하게 50분이 지나있었다.


....믿을 수 없어! 몇 번 엎어지기도 하고 이상한 동물들한테 위협도 받고 좁은 산길을 오르는 버스를 만나면 치일까봐 길 구석으로 다니며 덜덜 떨던 대 모험의 시간이었는데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단다. 체감 시간이 얼마나 느려진거야! 잉카의 주술인가? 마추픽추에 홀렸나? 도통 알 수가 없네.




연거푸 갸우뚱거리며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마을로 돌아왔다.

난 오늘 하루 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마추픽추 탐험이라는 대모험을 하고 왔는데, 이 마을은 아침에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마추픽추에 다녀온 게 혹시 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뭉친 근육과 욱씬거리는 뼈마디가 오늘의 여정은 환상이 아니었다고 증명해주고 있었다.

지친 표정으로 어기적거리며 전날 묵었던 숙소(Hospedaje - Cafe PLAZA)로 들어갔다. 숙소에 맡겨둔 짐을 찾고 다른 숙소(이 숙소 옆에 비슷한 가격이면서 더 좋은 환경을 갖춘 방이 있어서 그 곳으로 옮길 예정이었다)로 가려는데, 그 와중에 굉장히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 : 맙소사, 리! 널 여기서 또 만나다니!
나 : 아.... 아닛! 너희들은!?


그들은 페루 여행 도중 만났던 제노바 커플이었다. 파라카스에서 세비체를 먹고 눈이 퉁퉁 부은 나를 위로해주고, 멜리사에게 속아 함께 바예스타스 섬 투어를 하고, 아레키파 노천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쳐 꺅꺅거리고 인사를 했던 그 커플.

제노바 커플 : 리, 정말 넌 페루 어디든 존재하는구나! 우리 여행은 너로 시작해서 너로 끝나겠어!
나 : 하하! 누가 할 소리를. 나도 페루 와서 너희 엄청 봤네 ㅋㅋㅋ
제노바 커플 : 우리는 쿠스코에서 막 왔어. 내일 마추픽추를 보러 가지!
나 : 난 방금 마추픽추에 다녀왔어!
제노바 커플 : 꺆! 어땠어, 어땠어!?


어땠기는, 판타스틱 했지!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제노바 커플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난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티켓을 구한 일, 몬타냐에 오르면서 고생한 일, 마추픽추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 내려오는 길에 본 희한한 동물 등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내가 경험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제서야 내가 정말 마추픽추에 다녀왔다는게 실감이 났다.




제노바 커플과 서로 좋은 여행 되라고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지고, 새로 구한 숙소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방은 샤워실이 딸린 개인실로,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매우 깨끗한 호스텔이었는데, 1박에 한화로 2만원 안팎이었다.

방에서 샤워를 한 뒤 물기를 털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서늘한 시트가 피부에 닿자 기분이 좋았다. 온 몸이 욱씬거렸지만, 이 정도 고통이야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 마추픽추에 다녀왔는걸. 고생 많았어. 아플만 하다고.

침대 위에서 몸을 뒤집고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며, 카메라에 있던 사진을 핸드폰으로 옮겨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낸 뒤, 동네 슈퍼에서 산 레이칩을 와삭와삭 씹어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수고했어 나 자신, 애썼다구, 나 자신.



세상이라도 구한 듯 뭔가 커다란 만족감에 취해있는 enat의 남미 여행기는 다음편에 계속!





덧글

  • 바이올레타 2015/10/29 22:0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페루 여행으로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어오게 됐는데 필력이 좋으셔서 단숨에 여행기를 다 읽어버렸네요 ㅎㅎㅎㅎ
    마추픽추..다녀온 사람들 다들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신비로운 유적지라고 하더라구요.
    저도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싶은 곳인데 다녀오셨다니 너무 부럽습니다! 꽃청춘 방영할때도 페루편을 진짜 재미있게 봤었는데 마침 방영할 때쯤이 여행시기셨다니 방송 보면서 굉장히 공감되셨을것 같아요 ㅋㅋㅋ
    제노바 커플은 저곳에서 벌써 세번째 ㅋㅋㅋㅋ 여행하다 보면 루트가 겹치는 경우가 많아서 A도시에서 만났던 사람을 B도시에서 또 만나고 그런 일이 생기더군요. 우연한 인연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인것 같습니다ㅎㅎㅎ
  • enat 2015/10/30 10:19 #

    아이쿠 정주행 감사합니다. 글 쓴 저도 정주해 하려면 힘들던데! ㅋㅋㅋ
    신비로움과 불가사의라는 단어를 이 세상에 구현한다면 그게 바로 마추픽추가 아닐까 싶어요. 그 정도로 기묘한 유적이라서 여행자들 마음을 울렁이게 만드나봐요!
    여행 도중에 외로울 때마다 한 주 한 주 꽃청춘 받아 봤었는데 ㅋㅋㅋ 외로운 한 마리 늑대(?)에게 큰 도움이 됐죠. 꽃청춘은 아직도 가끔씩 돌려보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는 프로그램 같아요.
    제노바 커플 ㅋㅋㅋㅋㅋ 만날때마다 너무 반가워서 서로 Ohhhhh!!!! 하고 외치게 되더라구요. 이탈리아 사람과 한국 사람이라니 반도 국가 기질이란게 진짜로 있는 건지 감성도 어째 잘 통하고 ㅋㅋㅋㅋ 여튼 저들 덕분에 페루에서 소소하게 즐거웠었더랬죠!
  • Tabipero 2015/10/29 22:43 # 답글

    마추픽추에 가고 싶어지는 사진들입니다. 특히 인생샷이라는 사진 정말 멋지네요!
    사진 보며 침 흘리고 있지만 현실은 일본 이상의 거리는 귀찮아서...;;
    머리와 다리가 다투는 경험, 저도 여행 다니면서 적잖이 겪었습니다. 20대 중반까지는 머리가 이겼는데 이제는 다리가 이기네요(...) 요새는 다음에 또 올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다닙니다.
  • enat 2015/10/30 10:26 #

    경비아저씨가 의외로 사진을 잘 찍어줬어요. 이참에 사진사로 투잡을 뛰어보시지!
    한국에서 페루 갈려면 너무 멀어요. 직항...은 없는 걸로 알고, 미국 한 번 거쳐서 가야 할텐데, 어후 그 비행기 시간... 어후... 절래절래.
    아앗, 저도... 옛날엔 힘들고 지쳐도 뭔가 오기와 근성으로 무작정 돌아다녔었는데, 요새 들어선 고생할 필요가 뭐 있나, 몸 편한게 제일이지 싶은 생각으로 다니게 되더라고요. 이런 변화가 당연하다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네요 ㅋㅋㅋ
  • 2015/10/30 00: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10/30 10:2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키르난 2015/10/30 08:42 # 답글

    고생 많으셨습니다.;ㅂ;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지만 베스트샷을 보고 나니 저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모락모락...;ㅂ; 하지만 전 제 체력을 압니다. 무리일거예요..ㅠ_ㅠ;
  • enat 2015/10/30 10:31 #

    흐어어 정말 과거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고생많았다고ㅠㅠㅠㅠㅠ
    마추픽추에서 다리와 머리가 싸우는 기묘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ㅅ;

    아아앗 그렇지만 저 같은 저질 체력도 다녀왔는걸요! 키르난님이 무리일 리 없어요!
  • memoraser 2015/10/30 10:55 # 답글

    와... 멋있어요!!
  • enat 2015/11/04 22:04 #

    괜히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아니죠!!
  • chemica 2015/10/30 12:27 # 답글

    오 .. 멋지네요 ... 잘 보고 갑니다 ..
  • enat 2015/11/04 22:05 #

    방문과 덧글 감사합니다 :)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5/10/30 14:21 # 답글

    경비아저씨 귀여워요:) 저는 요즘 열심히 체력 기르기 위해 운동중이에요! 마추픽추 트래킹을 위해!!!!!
  • enat 2015/11/04 22:06 #

    경비아저씨들 덕분에 편하게 쉬기도 하고, 인생샷(!)도 남겼어요! ㅋㅋㅋ
    우와아ㅏ아 마추픽추 트래킹!!!! 3일짜리 그거요!?!? 우와 전 엄두도 못냈는데!!!! 엄청 청춘!!!!!!! 크 엄청 멋지네요 크으!!!!
  • 사평 2015/10/30 17:12 # 답글

    오랜만의 포스팅이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enat 2015/11/04 22:07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택씨 2015/10/30 21:04 # 답글

    햐아~ 어디가서 사진찍어야 되는지 외워두어야겠어요!!
    인생샷은 정말 멋있어요!!
    돌담은 지금 다시 보아도 신기신기. 꼭 사진찍어올거예요.
  • enat 2015/11/04 22:08 #

    다른 곳은 필요없고! 일단 전망대! 마추픽추의 오두막 전망대에서 사진을 꼭 찍으셔야 합니다아아!
    제가 체력이 딸려서 많이 못돌아다녔는데, 실제로 가게 되면 훨씬 넓은 유적 규모를 보고 놀라실테고, 훨씬 멋진 풍경을 보며 '얘는 왜 이렇게 사진을 못찍어왔엌ㅋ' 이러실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
  • kate 2015/12/12 06:56 # 답글

    분열을 일으킨 신체부위들은 언제쯤 다시 화합되었나 모르겠네요 ㅎㅎㅎㅎ
  • enat 2015/12/14 20:39 #

    샤워실의 뜨끈뜨끈한 물로 대동단결했습니다 ㅋㅋ
  • 유이 2016/09/22 10:51 # 삭제 답글

    우와.. 네이버메인보고왔는데.. 인생샷진짜멋지네요
  • enat 2016/09/22 20:51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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