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21:41

나가사키 온천여행 (2) 슌요칸에서 하룻밤 ├ 엄마랑 온천여행 (2015)

1.

밤 9시 즈음, 미합중국 대통령의 친가가 아닐까 의심되는 나가사키 근교 마을 ‘오바마’에 도착했다.




우리가 1박할 숙소는 오바마 버스 터미널 바로 옆 건물인 ‘슌요칸’ 이란 료칸이었다. 낡고 오래된 3층짜리 본관과 7층짜리 별관이 붙어있는데, 본관 쪽은 무슨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더라.

구청장님 : 어머,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곳 같아. 근데 목재 건물이네. 화재에 취약하겠어.
* 구청장님은 우리 엄마의 별명으로 구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
나 : 우리는 콘크리트로 지은 별관에 머물거긴 한데, 그래도 비상구 잘 봐둘게요.

역시 소방관의 부인과 자식이었다.





2.

나 : 나 여기 예약했는데, 예약자는 enat이고. 체크인 좀 부탁해.
프런트 : ??????
나 : 설마, 노 잉글리시?
프런트 : 잉글리시? 아... 리틀, 어 리틀, 쏘리...


프런트에서 일하는 정장 입은 할아버지가 영어를 잘 못하신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젊은 직원들은 이미 퇴근한 것 같다. 구청장님은 영어든 일본어든 다 똑같은 외국어이니 나는 알아들을 수 없노라 라는 표정으로 뒤에서 눈을 끔뻑거렸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소파에 앉아계시라고 한 뒤, 할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다.

나 : 나, 듣다, 일본어, 오케이. 일본어. 듣는거. 가능. 체크인. 빨리. 오케이?
프런트 : 아, 소우데쓰까. 오케이, 오케이.


프런트에 있는 할아버지는 공손한 어투로 말을 시작했다. 예, 당신네 방 키는 이겁니다, 아이고, 결제로 비자카드를 쓰신다고요? 제가 카드 기계를 잘 못 다룹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일 체크아웃 할 때 결제 부탁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온천이요? 온천은 이용 시간은 여기 쓰여 있고요, 지금은 여자가 2층 온천탕을 쓰고 남자가 1층 온천탕을 쓰는데 내일 아침이 되면 여자가 1층 온천탕을 쓰고 남자가 2층 온천탕을 씁니다. 아, 노천 온천이요? 꼭대기 7층 가면 있습니다. 다 이해하셨나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영어를 못해서...

민망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가며 미안한 어투로 료칸을 설명하는 할아버지. 아냐, 영어 못 말하는게 뭐 그렇게 큰 죄라고. 여긴 일본이잖아. 왜 그런 죄 지은 느낌으로 말씀하세요.

어떤 대화 중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캐나다에서 만났던 일본인 친구 히로미가 이런 말을 했었다.


한국은 손님이 왕이야? 일본은 손님이 신이야.



으음,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계속 나한테 절을 하며 이야기를 하니 숭배 받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 와중에 우리의 구청장님은 소파에 가서 앉아 계시라는 내 말은 무시한 채, 내 옆에 짝 달라붙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같이 설명을 듣는 척 했다. 이곳은 한국어가 전혀 안 통하는 외국이라는 사실을 저 할아버지를 통해 인지하셨는지, 당신 딸과 떨어지기 싫으셨나 보다. 떨어지면 국제 미아 되니까 잘 붙어 다니라는 언니의 말을 철저하게 이행중인 구청장님.





3.

손님을 숭배하는 프런트 직원에게서 키를 받아 방에 들어갔다. 우리 방은 별관 5층에 있는 객실이었다.




구청장님 : 어머, 무슨 영화에 나오는 방이네. 바닥도 천장도 다 풀로 엮었나봐.

다다미를 보며 신기해하는 구청장님. 마음에 들어하신다. 휴, 다행이다.

구청장님 : (중얼) 근데 좀 춥다. 옛날 건물이라 그런가 봐.

구청장님의 조용한 말 한마디에 충성스런 짐꾼은 번개같이 베란다로 나가 창문 커튼을 치고 베란다 미닫이문을 닫은 뒤 히터를 틀었다. 히터를 30도로 맞춰놓자 1분도 안돼서 방이 훈훈해졌다.

구청장님 : (TV를 틀며) 텔레비전은 일본 방송 밖에 안 나오겠지?

노트북을 가져와 한국 드라마를 틀어드렸어야 했는데! 짐꾼은 자신의 무능함에 탄식했다.

구청장님 : 어머, 구석에 바퀴벌레가 있어!

짐꾼은 기겁을 하며 근처에 있는 아무거나 집어 들고 내리쳤다. 뭐야, 룸에 왜 바퀴벌레가 있어! 청소 제대로 안 해? 이것들이!

나 : 프런트에 따지고 와야겠어!
구청장님 : 그러지 마아~ 낡은 건물인데 있을 수도 있지.


눈이 뒤집혀 프런트로 따지러 내려가려는 나를 구청장님이 말렸다. 프런트에서 친절하게 해주지 않았냐, 영어도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따질 거냐, 무슨 문화재급으로 오래된 건물이면 나올 수도 있지 않느냐, 큰 바퀴벌레도 아니고 작고 귀여운 (?) 바퀴벌레였다, 집을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도 낡은 저택에서 바퀴벌레는 반드시 나온다, 우리 집도 그렇지 않느냐, 우리는 한국인인데 외국 나가서 깽판 치면 한국이 욕먹는다, 여기는 시골이라 한국인이 잘 안 올 것 같은데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만들어주자, 1인 외교관 모르냐, 이런 곳 나와서는 그러는 거 아니다, 어쩌구 저쩌구...

짐꾼은 정신적으로 '화병을 깨어 무릎을 꿇고 훈계를 듣는 아이'가 되어, 막 깨어나려던 전투 본능에게 오늘은 쉬라고 명령한 뒤 깊이 반성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그냥...

사실 방에서 바퀴벌레 나온 건 큰 문제가 되질 않는다. 만약 혼자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잡은 뒤 체크아웃 할 때 조용히 언급만 해주고 나갔겠지. 그저 ‘엄마’가 ‘내가 고른 호텔의 객실’에서 ‘바퀴벌레를 봤다’는 게 못 견디겠는 거다. 난 구청장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왔는데. 구청장님은 완벽하게 휴식을 즐기며 딸과 하는 여행이란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셔야 하는데. 왜 바퀴벌레 따위가 나타나서 좋은 분위기 다 깰려고(?) 하는 거야! 내가 바퀴벌레 나오는 숙소를 잡은 게 되잖아! 에잇, 정말. 저 바퀴벌레 녀석, 조용히 지나갈 것이지 왜 우리 구청장님 눈에 띄어가지고... 투덜투덜.





4.

바퀴벌레 때문에 조금 씩씩거리며 짐을 풀다가, 노천탕 닫는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길래 거기부터 다녀오기로 했다.

옷을 유카타로 갈아입고 (난 바로 탕에 뛰어들려고 속옷까지 다 벗고 유카타를 입었는데 구청장님은 어찌 여자가 밖에서 그렇게 입을 수 있냐며 겉옷 위에 유카타를 걸치셨다.) 방 안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가린 얼굴이 미묘한 것은 아직도 새 노트북에 포토샵을 못 깔았기 때문. 요새는 포토 스케이프 쓴다.





5.

슌요칸의 노천탕은 7층, 옥상에 있다. 천공의 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전망이 서쪽 해안가 쪽으로 뚫려 있기 때문에 탕에 몸을 담그고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끝내준다 하더라. 물론 우리가 천공의 탕에 갔을 땐 캄캄한 한밤중이라 그런 걸 기대할 순 없었고, 그냥 달빛을 쐬며 몸을 담글 수 있다는 점에 의의를 뒀다.

카메라를 들고 가긴 좀 그래서 핸드폰으로 찍었는데 내 폰카가 야간 촬영에 몹시 취약해서 사진 상태가 참담하다. 그래도 참고용으로 올림.





마침 천공의 탕에는 아무도 없어서, 우리 둘이 전세내고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구청장님 : 어머 따뜻해. 몸이 풀린다아아.
나 : 으으, 좋다.


난 탕에 들어가는 걸 굉장히 즐기는 편이다. 뜨끈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온 몸이 무장 해제되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로마시대 최고의 향락이 목욕 아니었던가! 그래서 평소에도 목욕탕에 간다는 말을 향락을 즐기러 간다는 말로 치환해서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목욕탕에 가는 건 나 뿐이다.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 언니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 벗는 게 싫다며 목욕탕 가는 걸 꺼려한다. 그래서 가족들이랑 목욕을 즐겨본 경험이 거의 없다. 집안에 여자가 셋인데 다들 소녀처럼 부끄러워해서 목욕탕에서 내 등 밀어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크윽, 외국에 나와서 드디어 엄마랑 같은 탕에 몸을 담그게 된 것이다! 그것도 노천탕! 감격스럽다!

나 : 엄마, 한국에서는 목욕탕 안가잖아. 근데 여기는 들어오셨네?
구청장님 : 당연한 소릴? 여기까지 와서 온천에 안들어가면 아깝잖아.


소녀의 부끄러움을 이긴 아줌마 정신 만세!





6.

몇 십분 뒤, 구청장님과 나는 머리 위로 김을 풀풀 풍기며 발갛게 물든 얼굴로 탕에서 나왔다.

구청장님 : 아이, 기분 좋아.
나 : 여기에 차를 마시면 딱이죠!


객실에 배치되어 있는 녹차 잎으로 차를 우려먹으려는데, 핫 포트가 보이질 않았다. 물을 어떻게 끓이라는 거야?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중년의 남성. 아까 그 할아버지 직원은 아니다. 혹시 영어가 통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를 하며 질문을 했다.

나 : 있잖아, 여기 핫 포트가 없어서 그러는데.
프런트 : 에... 스미마셍?


안 통한다.

나 : 티 먹을 건데, 핫 포트... 어... 핫 워터...
프런트 : 에... 에?


아까 그 할아버지보다 영어 못하는 것 같다.

나 : 그 뭐냐, 아타타카이 미즈, 나 필요한데...
프런트 : 아, 객실에 전기 포트 있어요. 거기에 물을 담고...
나 : 없어, 없어. 그니까 포트를 가져다 주면...
프런트 : 에... 에에?


거기에 눈치도 없는 것 같다. 망했다.

나 : 있어봐, 내려갈 테니까.
프런트 : 에에? 스미마셍?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곧 내려간다는 말을 일본어로 뭐라고 하나 고민하다가, 이게 무슨 멍청한 고민인가 하고 전화를 끊은 뒤 바로 프런트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 찻잎을 가지고 가서 이걸 마시려는데 뜨거운 물도 핫 포트도 없다는 걸 마임으로 보여줬다. 결국 일본어도 영어도 쓸모가 없다. 마임이 최고다.

프런트 : 아! 스미마셍, 스미마셍. 왜 객실에 핫 포트가 없었죠? 저희 하우스키퍼가 실수 했나 봐요. 잠시만요, 잠시만요.

3분 뒤, 고개를 숙여가며 뜨거운 물을 내오는 프런트 직원. 아예 거대한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줬다. 무, 무거워... 그냥 전기 포트를 주지...

프런트 : 객실까지 가져다 드릴까요? 무거우실까봐...
나 : 괜찮아. 들 수 있어. 여하간 고마워.
프런트 :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와 미안하다고 인사를 해대는 프런트 직원. 아이 참, 민망하게...





7.

우여곡절 끝에 따뜻한 물을 얻어 차를 내려마셨다.

구청장님 : 오묘한 게 차가 맛있다. 여기 모찌 같은 거만 있어도 좋았을 텐데.
나 : (번쩍) 다녀오겠습니다!


군기 바짝 잡힌 신입사원처럼 번쩍 일어섰다.

구청장님 : 아이, 뭘 가. 밤중인데 그냥 차만 마시자.
나 : 아니에요, 나도 배고프고... 1층에 매점 있던 것 같으니까 갔다 올게요.


기세 좋게 내려갔는데 1층 매점 문이 닫혀 있다. 이럼 곤란한데!

또다시 프런트로 가서 벨을 누르는 나. 오늘 프런트만 몇 번째 방문하는지 모르겠다. 이번엔 할아버지 직원이다.

나 : (일본어) 편의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프런트 : 편의점 말입니까? 에,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데... 멀어요. 방향은 저 쪽이고...
나 : (영어) 걸어서 10분 거리면 뛰어서는 금방 가지 않을까? 한 5분?
프런트 : 에... 에...


5분 걸린다는 것에 동의를 못하는 건지,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그러는 건지. 에이, 한 번 다녀와 보지 뭐.

나 : 나막신 좀 빌려줘! 편의점 다녀올게!
프런트 : 에, 조심히 다녀오세요.






8.

무슨 10분이야.

거짓말쟁이 할아버지.

처음엔 밤 산책 가는 기분으로 나왔지만, 아무리 걸어도 편의점이 나오질 않아 당황했다. 5분 정도 걸었을까, 이 마을, 어째 인적도 드물고 가로등도 적어 좀 무섭다. 유카타를 입고 나와 보폭도 작아 답답하다. 나막신인데 여차하면 뛸 수는 있을까.




마음을 졸여가며 걷다보니 종아리가 뭉쳐왔다. 아이고, 야밤에 이게 뭔 고생이야. 편의점은 또 왜 이리 멀어. 아우, 유카타 때문에 빨리 못 걸어서 불편해. 나막신도 생각보다 불편하네. 운동화에 추리닝을 입고 올 걸. 온천 들어갔다 왔는데 또 땀나겠네. 아우 정말!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 나막신을 바삐 움직이다 보니, 길 저편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건가, 고요하고 어두침침한 이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빛, 저 녀석이 편의점인가.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패밀리 마트가 외롭게 서 있었다. 아, 물론 아무것도 없는 평지는 아니고 주차장이었겠지만, 당시 내 눈엔 저 패밀리 마트가 망망대해의 외딴 섬 혹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바로 위에서 망망대해의 외딴 섬 혹은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표현했던가. 난 외딴 섬 혹은 오아시스에서 비상식량을 비축하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물건들을 집었다. 닥치는 대로 바구니에 넣은 것 같다. 한화로 대강 2만원 어치 정도?

카운터에 가서 바구니 한보따리를 내려놓았다.

편의점 직원 : 예~ 어~서오세요~
나 : 계산 해줘요.
편의점 직원 : 적~립 카~드는 있~습니까?
나 : 응? 어... 응?


강세를 이상한 곳에 둬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건 무슨 억양이야. 당황해서 영어로 잘 모르겠다고, 뭐라고 했는지 물어봤으나, 편의점 직원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계속 이어 말했다.

편의점 직원 : 적~립 카~드는 있~습니까?
나 : 어... 어.... 내가 일본말을 잘 몰라서...
편의점 직원 : 적~립 카~드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 : 쏘... 쏘리, 뭐라고?
편의점 직원 : 적~립 카~드는 있~습니까?


세 번 정도 같은 말을 한 뒤 서랍에서 직접 적립 카드를 꺼내어 보여주는 직원.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없다고 했더니 그 직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산을 진행했다.

편의점 직원 : 계산~은 카~드로 하시겠습니까, 현금으~로 하시겠습니까?
나 : 현금...
편의점 직원 : 이천~엔 받았~습니다. 여기 거스름돈입~니다.


얼떨떨하게 계산을 다 마치자, 직원은 또 그 이상한 억양으로 잘 가라고 인사했다. 희한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자, 그 직원, 손님이 없다면 살아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건지, 미동도 없이 무표정하게 카운터에 서있었다. 혹시 게임에 나오는 상점 NPC는 아닐까. 버그 때문에 이상한 말투를 쓰는 건 아닐까.

이상한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긁으려다가 방금 구매한 푸짐한 비닐봉투가 손목에 걸려있어 실패했다.




돌아가는 와중에 쳐묵쳐묵한 녹차맛 아이스크림. 뭔가를 먹으며 걸으니 금방 숙소더라. 음, 아까는 배가 고파서 멀게 느껴졌었나봐.





9.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앞에 구청장님이 길 잃은 아이의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 : 아이 깜짝이야. 왜 나와 계셔요.
구청장님 : ...시간이 지나도 안 오잖아. 실종됐나 싶어서.


무슨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청장님 : 요 밑에 간식 사러 간다는 애가 30분이 지나도 안 오잖아.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여기 직원한테 뭐라고 물어봐야 하나. 경찰은 또 어떻게 불러야하나. 경찰한테는 뭐라고 말해야하나. 나는 이렇게 국제 미아가 되나.

편의점이 편도 10분 거리에 있다고 얘기를 하고 나갔어야 했는데, 얼른 야식을 먹고 싶다는 마음에... 아이쿠.

구청장님 : 됐고, 그거 뭐야? 먹을 거야?





10.




샌드위치, 모찌, 쿠키, 바움쿠헨, 메론빵, 푸딩, 블루베리 요거트, 메론 주스 기타 등등.

구청장님 : 어머나, 빵 진짜 맛있네. 유명한 베이커리 빵이야?

편의점 빵입니다.

근데 진짜 사온 것들이 전부 다 맛있긴 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 게, 달콤하고, 부드럽고, 진득하니... 하아, 지금 당장 일본 편의점 가서 달콤한 거 잔뜩 사오고 싶다. 일본 다시 가서 편의점만 쭉 돌고 싶다.





11.

취침시간. 이불을 펴려는데, 이부자리 위에 깔 시트가 안 보인다. 여기는 시트 안 깔고 그냥 쓰나? 그냥 깔면 되나? 그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나 : 누구세요?
프런트 직원 : 쓰미마셍, 쓰미마셍.
나 : 뭐야?


문을 열고 나가자, 아까 내 ‘뜨거운 물’을 못 알아들은 프런트 직원과 한 하우스키퍼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나 : 왜요?
프런트 직원 : 방에 시트 없죠? 시트 갖다 드리려고...


동시에 하우스키퍼 아주머니가 내게 깨끗한 시트 두 장을 건넸다.

프런트 직원 : 저희 직원이 시트를 깜빡했다고... 너무 죄송합니다.
하우스키퍼 :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해서...
프런트 직원 & 하우스키퍼 : 쓰미마셍, 쓰미마셍.


둘이 번갈아가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괜찮다고 얼른 대답을 해준 뒤 시트를 받았다. 뭔가... 뭔가 준비가 안 되어 있잖아, 여기. 왜 이렇게 객실에 물품이 부족해? 아까 핫 포트도 그렇고, 시트도 그렇고.

뭔가 떨떠름하긴 한데 머리를 조아리며 쓰미마셍 하는 모습에 달리 뭐라 할 수도 없어 그냥 어색하게 고맙다고 말하고 문을 닫았다. 시골 사람들이 운영해서 그런가,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을 주는 료칸이다.





12.

잘 준비를 다 끝내고 누웠는데 부산스럽게 몸을 보채는 구청장님.




구청장님 : 잠이 안와.
나 : 일본이니까 시차는 없을테고, 밤늦게 온천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런가?
구청장님 : 심심해. 안 되겠어. 글을 써야겠어.


그러더니 탁자 앞에 앉아 늘 갖고 다니는 수첩을 펴서 글을 쓰시는 것이었다.

나 : 뭐 쓰는데?
구청장님 : 오늘 있었던 일.
나 : 일기?
구청장님 : 여행기지.





구청장님은 일필휘지로 여행기를 써내려갔고, 몇 분 뒤 그것이 엄청난 대 서사시인 듯 양 낭랑한 음성으로 낭독했다. 내가 블로그에 여행기 포스팅을 작성하는 건 의외로 엄마의 영향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와는 다른 관점의 여행기에 덧글 다는 느낌으로 추임새를 넣어드렸다. 구청장님은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이 나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셨고, 나는 열심히 그 이야기를 청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어...



새벽 3시에 간신히 잠든 enat의 일본여행 짐꾼기는 다음편에 계속!





덧글

  • 도밍고 2015/11/04 21:55 # 답글

    어머님 너무 소녀...
  • enat 2015/11/04 22:15 #

    나무 한 그루만 봐도 시상을 떠올리시는 완전문학소녀감성을 갖고 계십니다...
  • Tabipero 2015/11/04 22:06 # 답글

    료칸이 뭔가 하나씩 좀 어설프네요 ㅎㅎ 일본은 저런 서비스는 좀 칼같은 게 있으니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만...정말 영어가 안 통하니 클레임도 못 걸겠네요 ㅎㅎ
    편의점이나 상점 같은 곳에 가면 적립카드나 비닐봉투 필요하냐 등등을 꼭 저렇게 기계적으로(?) 물어보는데 일본여행깨나 가본 저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못 알아들으면 융통성있게 넘어가면 좋을 텐데 그쪽은 그게 또 절차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고...몇번 그렇게 하다보니 적당히 눈치보고(여전히 잘 못 알아들은 채로) 손을 젓습니다.
  • enat 2015/11/04 22:20 #

    인간적인 료칸ㅋㅋㅋㅋ 이 무슨 료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료칸 ㅋㅋㅋㅋ
    음음, 정말 말도 안통하니 따지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넘길 수 밖에 없었어요 ㅋㅋㅋㅋ
    편의점에선 녹음된 음성을 틀어놨나 싶을 정도로 같은 말만 해서 당황했었어요. 저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본사의 지침사항인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게 하라는... ㄷㄷ
  • 듀란달 2015/11/04 22:23 # 답글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머님이 귀여우시네요.
  • enat 2015/11/05 13:38 #

    감사합니다. 어머니께 전해드리겠습니다. ㅋㅋㅋ
  • 손님 2015/11/04 22:54 # 삭제 답글

    일본에서 자기네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지만, 손님에게 받을 것은 칼 같이 지킨다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가족과 함께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이야기인데,
    아직 어린 아이가 실수로 테이블 식탁보 위에 똥을 싸버렸는데 직원에게 말하니 와서 하는 말이...

    "교체해드릴까요?"

    선생님은 당연히 여기서 사흘 동안 밥을 먹을텐데 교체를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그러라고 했는데
    별도로 교체 비용(천 엔 정도)를 받았다던...
  • enat 2015/11/05 13:41 #

    식탁보 교체비가 천 엔 ㄷㄷㄷ 세탁비인가... 백엔샵에서 식탁보 하나 사서 까는 게 더 저렴했겠네요.

    받을 건 칼 같이 받는 만큼 자신들의 실수는 곧바로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거로군요. 하여간 재밌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왜 근대사에 있어선 그렇게 인정하질 않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 Lon 2015/11/04 22:55 # 답글

    귀., 귀엽긴 한 료칸인데.. 약간 애매한 느낌도 있긴 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 enat 2015/11/05 13:42 #

    쩔쩔매는 직원들이 귀엽기도 하고 계속 그러니까 짜증나기도 하고... 다양한 감정을 갖게 하는 미묘한 곳이었습니다 ㅋㅋㅋ
  • 1편 2015/11/05 01:10 # 삭제 답글

    ..이 넘 재밌어서 계속 기다렸어요!
    구청장님 팬입니다.
  • enat 2015/11/05 13:43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잌ㅋㅋㅋㅋㅋㅋ 구청장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 eg35 2015/11/05 03:04 # 답글

    어쩐지 요즘 젊은 여성치곤 체력이고 멘탈이고 생존력이 지나치게 높다 싶었는데 아버님께서 히어로셨군요 범의 자식은 범이라고ㅋㅋ
    시민의 영웅께 항상 감사하다고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전해주세요!
  • enat 2015/11/05 13:51 #

    생존력이 높앜ㅋㅋㅋㅋㅋ 잌ㅋㅋㅋㅋㅋ 체력이고 멘탈이고 왜 이렇게 바닥일까 한숨쉴 때가 많지만 생존력은 저 스스로도 인정합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덕분에 그리 된 것 같습니다.

    감사와 격려 말씀 그대로 전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 용용 2015/11/05 03:15 # 삭제 답글

    나가사키 여행 뭔가 이낫님 여행기 중 번외편 같아서 재밌어요! 어머님도 재미있으시구 ㅎㅎ 무엇보다 여관 프런트 직원 ㅋㅋㅋㅋㅋㅋ뭔가 그 상황이 상상이 가서 글 읽는 내내 웃음 참느라 힘들었어요(회사에서 읽느라) 다음 여행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enat 2015/11/09 18:24 #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가볍게 다녀온거라 번외편 같은 느낌이 드실거에요!
    대충 쓰고 끝내려던 포스팅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얼떨떨하네요 ㅋ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키르난 2015/11/05 09:11 # 답글

    그래도 7층 노천 온천이 있으니 그 모든 것은 용서가 됩니다. 아무래도 노천탕에 약해서..^^;
    뭔가 가족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은 시골 온천여관 같군요. 근데 7층이나 되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일단 긴다이치 하지메나 에도가와 코난이 출몰할 가능성은 낮네요. 아니, 코난이라면 있을지도..?
  • enat 2015/11/09 18:26 #

    으음, 확실히 달빛과 별빛을 보며 몸을 담글 수 있다는 건 크죠... ㅋㅋㅋㅋ
    긴다이치 하지메 ㅋㅋㅋㅋㅋㅋ 코난ㅋㅋㅋㅋㅋㅋㅋㅋ 다행히 태풍이 오거나 오지에 고립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연쇄살인의 조건은 피해서 다행(?)입니다.
  • 타누키 2015/11/05 09:32 # 답글

    포스팅 보니 일본에 부모님 모시고 가고 싶네요.
    푹 쉬는데는 역시 일본일지도~~
    (아직 본인도 못가봐서;;ㅋㅋ)
  • enat 2015/11/09 18:27 #

    비행 시간도 짧아서, 부모님 모시고 짧게 다녀오기 좋은 것 같아요.
    어르신들은 역시 비행 시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이참에 다녀오세요오~~
  • 윤슬 2015/11/05 13:44 # 답글

    어머나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정독하게 만드는 필력!!!!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 enat 2015/11/09 18:28 #

    어머나 정독하셨나요 ㅋㅋ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박 3일 여행이라 분량도 얼마 없으니 빨리 끝내볼게요!
  • 택씨 2015/11/05 19:30 # 답글

    하하. 일본에서는 손님이 신이로군요!! (그러나 일본에는 무수히 많은 신이 있어서 대접은 제대로 못받을 거 같은 느낌인걸요;;)
    일본에서는 저녁에 나가도 별로 치안에 대해 걱정이 들지 않더라구요. 이상하게도 말이죠. 가로등도 어두운데...

    편의점에 산 물품 중에 블루베리 위에 있는 노끈처럼 생긴 것도 빵인가요??
  • enat 2015/11/09 18:30 #

    무수히 많은 신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얘네 나라에선 신이 동네 훈장님 수준으로 많으니.... 신의 위상이... 으음.
    무심코 유카타에 나막신을 착용하고 나갈 정도로 치안에 대한 인식이 좋게 박혀있긴 했습니다! 어두컴컴한데도 말이죠 ㅋㅋㅋ

    아, 저건 푸딩이었어요! 노끈처럼 생긴 건 호박맛 크림을 짜놓은 거였고, 크림 아랫쪽엔 밀크푸딩이 있더라구용.
  • anchor 2015/11/06 09:51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께서 소중하게 작성해주신 이 게시글이 11월 06일 줌(zum.com) 메인의 [이글루스] 영역에 게재 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11월 06일 줌에 게재된 회원님의 게시글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침묵 2015/11/06 19:52 # 답글

    zum 메인에 떴네요 ㅎ
  • enat 2015/11/09 18:31 #

    어쩐지 방문자수가 늘어났다 했네요 ㅋㅋㅋ
  • 하울스 2015/11/06 22:27 # 삭제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청 웃김
  • enat 2015/11/09 18:31 #

    뭐가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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