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9 18:23

남미여행 (30) 페루 : 삭사이와망과 볼리비아 비자 받기 ├ 남미 배낭여행 (2014)

1.

마추픽추에 다녀온 다음 날.

오늘의 일정은 별 거 없다. ‘왔던 길 그대로 쿠스코까지 돌아가기’가 목표다.




우선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열차를 타고 다시 오얀따이땀보로 내려갔다. 오얀따이땀보에 도착한 때가 점심쯤이었다.

오얀따이땀보 역에 내리자 꽤 많은 수의 승합차가 쿠스코까지 가는 여행자들을 불러 모았다. 어차피 쿠스코까지 가는 방법은 100솔이 넘어가는 비싼 개인 택시 아니면 이 승합차 단체 택시 밖에 없으니, 승합차를 선택하고 올라탔다.

승합차는 한참을 달려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에 내리자 벌써 늦은 오후다. 아무 것도 한 일은 없고, 이동만 했는데 하루가 다 사라졌다. 멍하다.




전에 묵었던 호스텔로 들어가 새 방 체크인을 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빨래를 햇볕에 말리러 뜰로 나왔다. 뜰 한 쪽의 앵무새는 여전히 신나게 떠들고 있어서, 조금 같이 놀아주다가 밥을 먹으러 나갔다.

아르마스 광장까지 나가서 그럴듯한 걸 먹기엔 귀찮다. 호스텔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없나 배회하다가, 거대한 닭고기와 감자튀김을 싸게 (한화로 4천원 안팎?) 파는 집을 발견했다. 포장해서 숙소에 오니 벌써 밤이다.




점심이자 저녁인 닭고기와 감자튀김을 침대 위에서 뜯으며, 쿠스코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 내일 하루 동안 무엇을 할지 정리했다. 내일 해야 할 일은...


1) 볼리비아 비자 받기 : 남미권 대부분의 나라에 무비자 입국 가능한 만능 대한민국 여권으로도 볼리비아만큼은 들어갈 수 없다. 쿠스코 소재의 볼리비아 대사관에 가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아야 한다.
2) 삭사이와망 다녀오기 : 신성한 계곡 투어 때문에 구매했던 통합 입장 티켓, 그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는 갈 만한 유적지인 삭사이와망에 다녀와야겠다.
3) 한식 먹기 : 쿠스코 소재의 유일한 한인 식당에서 마지막 한식을 먹도록 하자. 매우 중요. 별표.
4) 엽서 : 쿠스코 우체통을 찾아 미래의 나에게 엽서 부치기.
5) 쿠스코 야경 보기 : 쿠스코 시내의 야경을 보고 오자.



좋아! 이 정도라면 미련 없이 쿠스코를 떠날 수 있겠는걸.

닭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스스로 세운 계획을 뿌듯해했다.





2.

다음날 아침. 어제 정해놓았던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우선 볼리비아 비자 받기. 비자를 받기 위해선 쿠스코 소재의 볼리비아 대사관에 가야 한다. 아침에 가면 업무량이 적어 빨리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대사관 여는 시간인 8시 반에 맞춰 가기로 했다. 구글링으로 얻은 대사관 주소를 구글맵으로 찾아봤는데, 걸어서 가기엔 좀 멀어 보였다. 이럴 때는 당연히...

나 : 택시!

숙소 앞에서 사설 택시를 잡았다. 건실해 보이는 청년이 씨익 웃으며 목적지를 물었다.

볼리비아 대사관 주소는 Av. Oswaldo Baca 101, Urb Magisterio이다. 종이에 적어 온 주소를 보여줬더니, 그 청년, 잠시 고민을 하다가 편도인지, 왕복인지 물어왔다.

나 : 왕복은 아니고... 대사관 먼저 갔다가 삭사이와망에 갈 건데. 그렇게도 가능해?
택시 청년 : 여기 갔다가, 삭사이와망까지? 음, 그럼... 음... 5솔?


더 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게 부른다. 흥정을 해야 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나 : 좋아. 고!

페루 시내를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택시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은 페루 소재의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인데, 공강일 때 차를 끌고 나와 택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택시 청년 : 너도 대학생이지?

음... 대학생...이지? 당시에 졸업은 안했었으니.

나 : 대...학생 맞아. 휴학하고 놀러 왔어.
택시 청년 :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택시비 싸게 해 준 거야.
나 : 하하하! 고마워.


그런데 이 청년, 길을 잘 못 찾는 것 같다. 대사관 주소를 보고 그 근처 동네까지 이동한 뒤, 동네 사람들에게 주소를 물어가며 이동했다. 어쩐지 오래 걸리는 걸.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 청년, 땀을 흘리며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택시 청년 : 이 쪽은 처음이라... 있어봐... 거의 다 왔어...
나 : 괜찮아. 오래 걸려도 가기만 하면 돼. 점심 전에는 가겠지.
택시 청년 : 아냐... 다 왔다고... 끄응...


동네를 빙글빙글 돌기를 수 분 후. 드디어 쿠스코 소재의 볼리비아 대사관에 도착했다. 하얀 외벽의 삼층집이었는데,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였다. 입구엔 작은 글씨로 Consulado de Bolivia라고 적혀 있었다.

나 : 잠깐만 기다려! 나 저기서 일 보고 올게.
택시 청년 : 응, 나 어차피 시간 많아. 기다릴게.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 ‘귀찮음’ 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은 안경 낀 여자가 나를 맞이했다.

안경 낀 여자직원 : 볼리비아 비자?
나 : 응. 이게 내 여권인데... (주섬주섬)
안경 낀 여자직원 : 잠깐. 필요한 서류를 불러줄게. 다 있나 체크해 봐.


안경 낀 여자직원이 불러주는 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 비자 신청서 : 이건 그 쪽에서 줌
- 증명사진 : 캐나다에서 비자 연장할 때 찍어놨던 사진 중 남은 거 제출
- 여권 사본 : 복사하는 거 까먹어서 대사관 근처 인쇄소에서 복사
- 항공권 사본 : 남미 여행 최종 목적지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토론토로 빠져나가는 e-ticket 인쇄
-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서 사본 : 한국에서 접종한 뒤 받은 증명서를 복사하면 되는데, 내 서류를 받은 여자는 황열에 관한 건 필요 없다며 여권만 복사해 오랬음. 근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제출했다는 걸로 봐서 이건 직원 실수인 것 같음. 준비해가는 게 맞음.
- 신용카드 사본 : 신용카드 앞면을 복사해가면 됨.
- 볼리비아 숙소 예약증 사본 : 보통은 부킹 닷컴에서 볼리비아 소재의 무료취소 가능한 숙소를 예약한 뒤 예약증을 인쇄하고 취소하면 된다더라. 난 그것도 모르고 "나 숙소 예약 안했는데. 가자마자 2박 3일 투어 이용해서 칠레로 빠져나갈 거야. 예약증이 꼭 필요해?" 라고 물었고 그 여자는 됐으니까 그냥 여권이나 복사해 오라고 했다. 아무래도 당시 날 맡았던 여자가 몹시 일하기 귀찮았거나 다른 바쁜 일이 있는 상태였나 보다. 여하간 내 경우는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고, 보통은 숙소 예약증 사본이 꼭 필요하다고 하니 비자를 받으실 분들은 앞에서 설명한 방법으로 꼭 준비해 가시길.



서류를 마련해서 여권과 함께 제출하자 잠깐만 기다리란다. 그래서 1층에 있는 의자에 3분 정도 앉아 있었다. 곧이어 직원이 내려와 나에게 볼리비아 30일 체류 비자 도장이 찍힌 여권을 돌려줬고, 좋은 여행을 하라며 문 밖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대사관에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데 비자를 받으러 온 걸까... 무지 급하게 발급해주고 내쫓네.

뭐 어때. 덕분에 서류 부족한 것도 많은데 비자 발급까지 받았다. 아이 싱나.

앞에서 순순히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다시 올라탔다.

택시 청년 : 일이 잘 풀렸나보네?
나 : 응. 의외로 빨리 끝났어.
택시 청년 : 이제 삭사이와망으로?
나 : 고!



<어제 세운 계획>
1) 볼리비아 비자 받기 : 남미권 대부분의 나라에 무비자 입국 가능한 만능 대한민국 여권으로도 볼리비아만큼은 들어갈 수 없다. 쿠스코 소재의 볼리비아 대사관에 가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아야 한다.
2) 삭사이와망 다녀오기 : 신성한 계곡 투어 때문에 구매했던 통합 입장 티켓, 그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는 갈 만한 유적지인 삭사이와망에 다녀와야겠다.
3) 한식 먹기 : 쿠스코 소재의 유일한 한인 식당에서 마지막 한식을 먹도록 하자. 매우 중요. 별표.
4) 엽서 : 쿠스코 우체통을 찾아 미래의 나에게 엽서 부치기.
5) 쿠스코 야경 보기 : 쿠스코 시내의 야경을 보고 오자.






3.

삭사이와망에 도착했다. 택시 청년은 날 유적에서 더 가까운 곳에 내려주겠다며 입구를 지나 한참 안 쪽까지 들어 가줬다. 고마워서 원래 택시비였던 5솔과 늘 가지고 다니는 1달러를 한 장 더 얹어서 계산했다. 택시 청년은 혹시 또 택시를 타거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연락할 일은 없었다.


삭사이와망 Sacsayhuaman. 쿠스코 외곽, 고도 3701m에 위치한 요새로, 규모가 상당한 유적이다.





쿠스코 시내에 남겨져 있는 잉카 시대의 석벽보다 훨씬 더 거대한 돌들로 이뤄진 석벽을 확인할 수 있다. 잉카인들의 자랑인 석공 기술이 유난히 빛나는 요새다.

물론 이 삭사이와망 요새, 요새라는 역할은 이미 끝난지 오래고, 전 세계 많은 요새 유적들이 그러하듯이, 최근에 들어서는 쿠스코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꼽히고 있다. 감시탑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니, 전망이 탁 트여있을 수 밖에.

아래부터는 삭사이와망 전망대에서 바라본 쿠스코 구시가지 사진이다.





붉은 지붕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쿠스코 구시가지.




아르마스 광장도 보인다.




쿠스코 외곽. 쿠스코 시내를 둘러싼 산들의 꽤 높은 곳까지도 집들이 빼곡하다.




여기는 아예 정상까지 점령.




전망이 너무 좋아서 쉴 새 없이 파노라마로 돌렸다.

역시 쿠스코 최고의 요새다. 이렇게 다 내려다 보이니 여길 차지만 하면 끝장나겠네. 그래서인지 잉카 부족들끼리 여길 두고 자주 싸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전망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사진 찍다가 몸을 돌렸다.




요새 맞은편엔 작은 굴들이 많았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저기로 나오고, 또 저기로 들어가면 거기로 나오는 복잡한 굴이었다. 어떤 동굴은 너무 캄캄해서 아빠를 따라 굴 속으로 들어간 아이가 울어버릴 정도였다.

이런 굴에서 전투라도 벌어지면 대혼란이었겠는걸.




우는 아이를 달래주며 동굴 속에서 나왔는데, 요새 저 편에 알파카 떼가 출연했다.

단체로 피크닉 나왔나.




새끼 알파카.




졸졸졸 뒤를 쫓아갔더니 어미에게 달려가 젖을 빨더라.




다들 털이 덥수룩한데, 야생 알파카인가? 유적지 내라서 사육하는 알파카라면 출입이 불가능 할 것 같은데.

어디 소속(?)의 알파카인지 잘은 모르겠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풀만 조용히 뜯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사진 찍었다. 마추픽추에서 보지 못한 (힘들어서 찾아볼 생각도 못한) 알파카의 한을 여기서 푸는구나.




핥핥거리며 계속 쫓아다님.




삭사이와망 유적 옆 왼쪽 언덕에는 예수상도 있었다. 가기 귀찮았지만 - 마지막으로 언급하지만 여기는 해발 3700m! 움직이면 숨차는 동네 - 아바나에서 봤던 예수상이 생각나 약간의 수고를 들여 찾아가봤다.




예수상.




역시나 뷰는 좋았다.

나에게 자꾸 잉카 문명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달라붙는 삐끼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삭사이와망과 예수상 사이에는 텅 빈 공터가 있다. 날이 좋아서 가족 단위로 피크닉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연 날리는 모습을 보자 어렸을 적 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날렸던 연이 생각나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뭐, 내가 날렸던 건 방패연이었지만. 여기는 새 모양의 연이네.




마지막으로 멀리서 바라본 삭사이와망 사진.

안녕! 이제 내려가야지.


<어제 세운 계획>
1) 볼리비아 비자 받기 : 남미권 대부분의 나라에 무비자 입국 가능한 만능 대한민국 여권으로도 볼리비아만큼은 들어갈 수 없다. 쿠스코 소재의 볼리비아 대사관에 가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아야 한다.
2) 삭사이와망 다녀오기 : 신성한 계곡 투어 때문에 구매했던 통합 입장 티켓, 그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는 갈 만한 유적지인 삭사이와망에 다녀와야겠다.

3) 한식 먹기 : 쿠스코 소재의 유일한 한인 식당에서 마지막 한식을 먹도록 하자. 매우 중요. 별표.
4) 엽서 : 쿠스코 우체통을 찾아 미래의 나에게 엽서 부치기.
5) 쿠스코 야경 보기 : 쿠스코 시내의 야경을 보고 오자.





4.

연 날리러 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쿠스코로 돌아 가냐고 묻자, 삭사이와망과 예수상 사이의 샛길로 내려가다 보면 쿠스코 시내란다.




사람들의 말만 믿고 내려가는 중.




한 10분, 15분 정도 걸었을까. 커다란 광장이 나왔다.

쿠스코 구시가지 바로 윗 언덕에 위치한, 산 크리스토발 성당이 있는 광장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쿠스코 역시 기가 막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서 잠시 멈춰섰다.




기가 막히긴 하다.




미니어처 효과를 준 아르마스 광장.

내려다보는 각도나 광경이 삭사이와망 전망대와 비슷해 사진을 많이 찍진 않고, 난간에 기대 바람을 실컷 쐬다가 내려왔다.




길 따라 내려가는 중. 곧바로 아르마스 광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살짝 방향을 틀어 오늘의 세 번째 목표인 ‘한식 먹기’를 하러 한인 식당에 들렀다.





5.

쿠스코에 있는 유일한 한인 식당 사랑채.

아레키파에서 현지 음식에 호되게 당한 후,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하루 한 번은 꼭 한식을 챙겨 먹으러 이 곳에 왔었다. 어머니 손맛까진 아니더라도 외국 음식에 지친 내 위장과 심신을 달래주던 식당이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조금 아쉽다.

역시 조용하고 상냥한 직원 아저씨가 주문을 받았다. 웬만한 찌개류는 다 먹어 봤으니, 이번엔 고기 덮밥 같은 걸 시켜야겠다.




맛있었음.

덮밥을 우걱우걱 먹다가, 내 뒷자리에 앉은 사람,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트게 됐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이스라엘 여자,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일본 남자였다. 한인 식당에서 만난 외국인이라니, 의외로 이 식당은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나 보다.

이스라엘 여자는 군 복무를 마치고 여행을 온 거라고 했고, 일본 남자는 대학생인데 휴학하고 여행을 온 거라고 했다. 둘 다 아직은 마추픽추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찾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나 괜찮은 호스텔 등의 팁을 공유했다. 정보 공유 이외에도 깔깔거리며 시답잖은 이야기로 꽃을 피웠는데, 간만에 외롭지 않게 식사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제 세운 계획>
1) 볼리비아 비자 받기 : 남미권 대부분의 나라에 무비자 입국 가능한 만능 대한민국 여권으로도 볼리비아만큼은 들어갈 수 없다. 쿠스코 소재의 볼리비아 대사관에 가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아야 한다.
2) 삭사이와망 다녀오기 : 신성한 계곡 투어 때문에 구매했던 통합 입장 티켓, 그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는 갈 만한 유적지인 삭사이와망에 다녀와야겠다.
3) 한식 먹기 : 쿠스코 소재의 유일한 한인 식당에서 마지막 한식을 먹도록 하자. 매우 중요. 별표.

4) 엽서 : 쿠스코 우체통을 찾아 미래의 나에게 엽서 부치기.
5) 쿠스코 야경 보기 : 쿠스코 시내의 야경을 보고 오자.






6.

사랑채에서 든든하게 밥을 먹고 직원 아저씨께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왔다. 역시나 아르마스 광장에는 많은 여행사 삐끼들이 가득했다.

삐끼1 : 모라이~ 모라이 투어~
나 : 다녀왔어.
삐끼2 : 그럼 신성한 계곡 투어~ 헤이, 투어는 하고 가야지~
나 : 글쎄, 거기도 다녀왔다고.
삐끼3 : 마추픽추 기차표 끊을래?
나 : 어제 다녀왔다니까!


다녀왔다고 말하며 거절하기가 귀찮아질 즈음, 전혀 다른 내용의 말이 들려왔다.

여자 삐끼 : 마사지~ 25솔~ 마사지~

음? 마사지?

지친 내 귀로 들려오는 달콤한 단어. 마사지였다. 솔깃한 표정으로 삐끼를 바라보니, 삐끼가 쪼르르 달려와 단 돈 25솔(한화 만 원 정도)이면 전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고 꼬셨다.

으음... 만 원 정도면... 받아볼 만 하지 않나. 우리나라에서 전신 마사지 받으려면 몇 만 원 하는데.

나 : 좋아. 나 마사지 받을래.
여자 삐끼 : 응! 날 따라와!





날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 위치한 어떤 마사지 샵으로 데려가는 여자 삐끼. 내부는 뭔가 어두침침한 게, 예전에 발을 접질러 방문했던 동네 한의원의 치료실 같았다.

겉옷을 벗으라고 한 뒤, 날 침대에 엎드리게 하는 여자 삐끼. 이윽고 내 담당으로 보이는 마사지사가 등장했다. 마사지사는 커텐을 치더니, 기존의 마사지 크림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기능이 있는 마사지 크림을 쓰면 10솔 정도 추가가 된다고 했다. 그래봤자 다 합쳐서 35솔, 만 오천 원도 안 되는 거잖아? 난 순순히 그러라고 한 뒤 다시 엎드렸다.

으으, 전신 마사지라니. 기대 된다. 마추픽추 산에 오르며 뭉쳤던 근육들이 다 풀리겠지!

콩닥거리며 기대하는 내 어깨 위로, 마사지사의 손길이 뻗쳐 왔다.


톡. 톡.


....?



톡. 톡. 살살. 톡.


........?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권의 그 강렬하고 짜릿한 마사지가 아니었다. 이 한없이 가볍고 감질 맛 나는 손길은 무엇이냔 말인가!

내 뜨악한 심경이 나도 모르게 온 몸으로 표현됐는지, 마사지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마사지사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
나 : ...아, 아니... 음... 아냐. 계속해.
마사지사 : 네.



톡. 톡. 조물조물. 살살.


뭔가 다양한 방법으로 근육을 톡 톡 건드리는 게, 어디서 본 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손 맛’은 전혀 없다.

바보! 마사지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란 말야! 우리 엄마가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 1급이란 말야! 실습 대상으로 많이 당해봐서 무진장 잘 안단 말이야!


톡. 톡. 톡. 조물조물. 살살.


그게 아니야아아아! 내 어린 조카가 안마해도 이거보단 잘하겠다! 이 여자... 마사지를... 마사지를 유튜브로 배운 게 틀림없어!

내가 움찔거리는 걸 본 마사지사는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마사지사 : 혹시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아플리가 없잖아!


속으로 태클거는 내 몸 위로 마사지사의 미숙한 안마가 계속되었다. 그래, 역시 거저는 없는 거야. 만 원 냈으면 만 원 어치의 야매 안마를 받는 거야.


톡. 톡. 톡. 톡. 조물조물. 살살.


난 만사 포기하고 잠에 빠져 들었다. 그냥 낮잠 자러 들어왔다고 생각하자. 자리 값이라고 생각하고...

Zzz...


한 시간 정도 지났나. 잠에서 깨어나자 내 살을 톡톡 건드리던 귀여운 안마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난 멍한 눈으로 머리를 긁적인 후, 땀이 송골송골 - 톡톡 건드리는 거라도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 맺힌 안마사에게 수고했다고 팁을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마사지를 받으면 뭉친 근육들이 다 풀릴 줄 알았는데, 어설프게 건드려놔서 근육들이 더 아픈 것 같다. 뻐근한 몸 이곳저곳을 돌려가며 쿠스코에서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마저 지워나가기로 했다.



쿠스코의 마지막 밤 포스팅에서 계속







덧글

  • 11thCTR 2015/11/09 19:00 # 답글

    톡.톡.톡.톡. 조물조물... ㅋㅋㅋ
    초반에 미묘하게 감성이 메마른 느낌이다가 후반부 마사지사의 톡톡에서 빵 터지네요. 어떤 마사지인지 잘 상상은 안되지만, 느낌만은 알 것 같습니다. ㅋㅋㅋ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그 동안 회사일로 정신없어서 감상 댓글도 못 썼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쓰네요. :)
  • enat 2015/11/09 21:52 #

    미묘하게 메마른 느낌ㅋㅋㅋㅋㅋ 아, 사실 오늘 시간이 남아서 무표정으로 쭉 써내린 거라ㅋㅋㅋㅋㅋ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했는데 앞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그렇네요ㅋㅋㅋㅋㅋㅋㅋ 변함없이 예리하심
    바쁘신 와중에 읽어주시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누군가 제 글을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ㅋㅋㅋㅋ
  • 키르난 2015/11/09 19:03 # 답글

    매번 글 시작부분을 읽으면서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야!) 근데 이번에는 최근들어 드물게(...) 고난과 역경 없이 무난하게 다 클리어 하셨군요! 등산도 없고 상당히 손 쉽게 비자 받고 유적지 갔다가 설렁설렁 돌아와 맛있는 식사..+ㅠ+ 하지만 마사지는 아쉽군요.ㅠ_ㅠ
  • enat 2015/11/09 21:54 #

    마음의 준빜ㅋㅋㅋㅋㅋㅋㅋㅋ 으으 저도 여행 중에 평화로운 하루 정도는 보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 포스팅에 이틀이나 들어 있는데도 몬타냐 산 한두시간 오른 것보다 잔잔하네요 ㅋㅋㅋㅋ 몸 사리며 얌전하게 지낸 것 보면 마추픽추의 후유증이 크긴 했나봐요 ㅋㅋㅋㅋ
  • Tabipero 2015/11/09 20:23 # 답글

    계획 다섯 개 띄워놓을 때부터 저 계획이 어떻게 꼬이는 건지 신경쓰였습니다. 간만에 평화로운 여행기군요 ㅎㅎ
  • enat 2015/11/09 21:57 #

    잌ㅋㅋㅋㅋ 안꼬여요! ㅋㅋㅋㅋㅋ 제 여행도 하루 정도는 평화로울 수 있다구요ㅋㅋㅋㅋ 본격 평화로우면 어색한 여행기!
  • 택씨 2015/11/09 20:42 # 답글

    삭사이와망 돌맹이들도 너무 멋있어요!!!
    저렇게 덩치가 큰 돌도 모양을 맞추다니... 너무 신기해요.
  • enat 2015/11/09 22:00 #

    사람키의 세 배 네 배는 되는 거석들을 가지고 깎아서 돌벽을 만든 걸 보니 정말 석공쪽은 만렙 찍었구나 싶었습니다 ㅋㅋㅋㅋ
  • 토론토 2015/11/09 21:20 # 삭제 답글

    잘읽었습니다~! 간만에 릴렉싱한 포스트네요 ㅎㅎ 경치사진 너무 멓졌습니다
  • enat 2015/11/09 22:01 #

    다음 포스팅도 릴렉싱할것 같은데 합칠 것 그랬나봅니다! ㅋ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찬영 2015/11/09 21:47 # 답글

    아 너무 재미있어요 enat님 글 보며 남미에 대한 꿈을 키워왔는데 드디어 가게되었답니다 !! 기쁘네요
  • enat 2015/11/09 22:13 #

    으으 남미여해애애애앵!!!!!! 전반적으로 다 도시는 건가요!?!?!? 아후 부러웡 아후아후 다시 가고 싶네요 ㅠㅠ
  • 2015/11/09 23:1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11/10 21: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마스터쌔미 2015/12/05 03:40 # 삭제 답글

    쿠스코에서 볼리비아 비자 발급이 가능한가요? 제가 아는 지인이 갔을 때 볼리비아 대사관 안해서 다른 지역으로 가서 비자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 enat 2015/12/14 21:01 #

    아이쿠 덧글을 이제야 봐서.... 2014년 8월 기준, 쿠스코에서 비자 발급 가능합니다.
    지인이 가셨을 땐 대사관 휴무일 같은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참고로 쿠스코에서는 볼리비아가 빨리빨리 나오는데 (어차피 다들 여행 목적이니), 리마에서는 다양한 목적&서류 처리량 등의 이유 때문에 운 좋으면 이틀에서 운 없으면 일주일 정도 걸린다 하더군요. 여행 중 만났던 사람들이 리마에서 비자를 받았다는데 오래 걸려서 발목 잡혔었다고 그랬어요 ㅋㅋㅋ 리마에 관한 건 여행자들에게 들은 내용이니 아주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 미쓰림 2016/03/06 14:28 # 삭제 답글

    저도 남미 여행 생각 중이라 지금 포스팅 너무 재밌게 읽고 있어요!! 글쓰시는 능력이 출중하신 거 같습니다. 저는 지금 뉴욕에서 지내는데 한국 돌아가기 전에 남미 여행을 하려고 하거든요~ 볼리비아는 황열병 예방접종이 필수래서 보통 한국에서 예방접종을 맞고 간다는데 글쓴님은 접종내역 없어도 문제없이 비자 발급이 가능했었나요?? 아니면 준비해가셨는데 직원이 필요없다고 해서 안내신건가요? 미국은 병원비가 비싸서 고민이네요ㅠㅠ
  • enat 2016/03/06 22:18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는 건 언제나 자신이 없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납니당.
    황열병 예방 접종은 해갔는데 직원이 확인만 하고 서류를 안받았습니다. 근데 보통 복사에서 제출하는게 맞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갔을 때 직원이 실수한 걸 거에요.
    미국은 음... 확실히 비싸죠. 아니면 여행 중에 남미 쪽에서 접종 하시는 건 어떤가요? 방금 "페루 황열병 주사 맞기"로 구글링을 하니 리마 공항에서도 황열병 주사를 맞을 수 있다고 나오는군요!!
  • coRra 2016/09/28 18:41 # 삭제 답글

    재미나게 잘 봤습니다~~~
    다녀온지 4년정도 지났는데 그 때 기억이~~~~ㅎㅎ
    그리고~ 마사지는 세게 해달라고 말해야 한답니다~~~^^
    그 느낌을 잘알기에~~ 표현이 정말 딱이네용~~~~^0^
  • enat 2016/10/07 12:05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게 해달라그러면 세게 해주나요!?
    세게 해달라그럴걸 ㅠㅠ
    저는 이게 머야 투덜투덜대면서 잠들었습니다. 뭔가 억울하군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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