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5 01:20

그랜드 프레리의 겨울 └ 캐나다 생활

* 한 줄 요약 : 매우 춥고 눈이 많다.
* 유의 사항 : 사진만 있고 별 내용 없으니 여행기를 보러 오신 분들은 스킵하셔도 됨.
* 언제 : 2013년 말 ~ 2014년 초의 사진.


내가 지금 '남미 여행편'이나 '구청장님과의 대모험'등의 포스팅을 하지 않고 생뚱맞게 그랜드 프레리의 겨울 포스팅을 하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이유 :

우유니 포스팅을 하려면 우유니 사진이 필요한테 우유니 투어 중 카메라가 고장나는 바람에 막바지엔 폰으로 찍었는데 그 사진이라도 포스팅 자료로 쓰려고 했으나 한국으로 돌아와서 핸드폰을 바꿨기 때문에 옛날 폰을 찾아서 노트북과 연결한 뒤 사진을 옮기는 작업을 하는데 남미 여행 출발 전 생활했던 캐나다 알버타 주의 중소도시 그랜드 프레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보여 두근거려서.






내가 이 도시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러니까 11월 초.

집 앞에 서 있던 나무가 아름답게 물들었다.

완연한 가을이구나, 저 청명한 하늘과 노오란 잎의 나무를 보라, 어쩌구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을 한 그 날 밤 바로 첫 눈이 왔음.

내가 눈이 참 빨리 왔다며 신기하다는 말을 하자 다들 "올해는 첫 눈이 왜 이렇게 늦게 왔을까" 하며 신기해 했다.

신기해하는 포인트가 다름.


나 : 제가 이 도시에 발을 들여서 첫 눈이 늦은 거죠. 열정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절 환영하기 위해서!

다들 개소리라며 무시함.






우리 가게에서 본 하늘. 아직은 눈이 안쌓여 있음.

참고로 여기도 제법 높은 지대라 (기억상 아마 해발 600m~700m정도) 하늘이 낮아보인다.






첫 눈이 온 지 일주일 뒤.

아침에 일어나 거실 창가로 갔는데 모양새가 많이 달라져 있다. 어느새 눈이 이렇게 왔대.






첫 눈이 온 지 보름 뒤 퇴근길.

셰리라고, 같이 일하는 아줌마 차를 타고 퇴근했었다. 셰리와는 중간에서 이간질 하던 사람 때문에 사이가 잠깐 멀어지기도 했었으나, 나중에는 그 사람의 자작극인 것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셰리는 미안해하며 눈에 띄게 날 챙겨줬고, 부활절엔 부활절 선물이라고 내 이름이 적힌 목걸이를 선물해줬다.

내가 캐나다를 떠난 이후로도 페이스북으로 "너 언제 돌아와, 빨리 같이 일하자" 라며 연락을 주고 받았었지... 보고 싶은 셰리 아줌마.






11월의 어느 날. 밤중에 목말라서 주방에 갔다가 본 광경. 달빛이 쌓인 눈에 반사되어 사방이 밝았더랬다.







이 사진은, 그, 언제냐. 눈물의 우유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사진이구나.

우유가 먹고 싶어서 근처 편의점 가려는데 난 차도 없고 운전 면허도 없다. 넘어질까 두려워 조심조심 걸었더니 편도로만 30분이 걸렸다. 그런데 그나마도 우유를 사서 집까지 돌아가다가 중간에 엎어지는 바람에 우유가 터졌다.

내 생애 최고로 서러웠던 날.







그래도 하늘은 이뻤던 이 날은 11월 22일.

어, 우리 사장님 생신날이었네.






12월이 되자 운전은 점점 힘들어지고

온도도 점점 내려갔다.






핸드폰에 12월 달의 온도를 캡쳐해놓은 파일이 있더라.

근데 생각보다는 안 추웠다. 한국보다 건조해서 그런 듯.






12월이 되자 앞집에 쌓인 눈은 더욱 더 두터워졌다.






창문을 내다보며 남의 일인 양 눈이 참 많이 왔구나 허허거리며 테라스 뒷문을 열었다.






뭐야 이게.






우리 테라스 바닥이 이렇게 높았던가.






슬리퍼로 적당히 눈을 쓸어내리려다가 발이 푹 빠져 으아아 소리를 지른 뒤 포기하고, 팔을 내밀어 뒷마당에 눈꽃 핀 옆집 나무를 찍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난 몰라. 난 못 봤어. 잘 거야.





출근길. 차 타고 가는데 앞창문 앞에 딱 별모양 눈송이가 떨어져서 찍음.






앞에 큰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시야가 흐려졌던 이 날은 12월 29일.






밤에 사슴이 출몰한 12월 31일.






유난히 하늘이 예뻤던 1월 9일.






대체로 이렇게 눈보라가 치기 때문에 흐린 날씨가 계속 되어서, 전 사진처럼 저녁 노을이 지는 하루는 드물었더랬다.






일하던 카운터에서 창문으로 보이던 주유소.

한겨울 아침에 출근해서 주유하는 손님을 받으면 개짜증났었다. 디젤이 관에서 얼어 막혀있는 경우가 많았더랬지...

결제를 했는데 왜 기름이 안 나오냐고 따지던 손님들, 얼어서 그러니까 다른 기계를 이용해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나, 거기도 기름이 안 나온다는 손님들, 미안해서 영하 삼십도의 눈보라 치는 밖으로 얄량한 반팔 유니폼 한 장 입고 뛰쳐나가 모든 기계를 두들기며 얼지 않은 주유구를 찾던 나, 그런 날 보고 더 미안해하며 괜찮다고 반쯤 우는 손님들, 마침내 얼지 않은 기계를 찾아 손님과 함께 하이파이브를 하는 나...

그렇게 손님들과 역경을 딛고 친해지고 나면 가끔씩 팁도 받고 선물도 받고 그랬었다.






뭐, 이런 다양한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

당시엔 눈 오는 게 별로 신기하지도 않아서 스마트폰으로 대충 찍고 말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무지 이국적이고 신기한 풍경들이다. 저 땐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온지 1년차, '눈'은 다시 낭만적이고 가슴 뛰는 녀석이 되었다.

하루는 해가 쨍한 날에 여우비처럼 여우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 해가 쨍하게 빛나는데, 그 햇빛 아래 흩날리는 눈발들 사이로 무지개가 떴었더랬다.

그런 아름다운 풍경들을 그 땐 '올ㅋ' 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쉬운 순간들이었나 생각한다.


지나고 봐야 안다는 말을 어른들한테 참 많이 들었었는데 이제서야 조금 공감이 된다.



아직도 스마트폰에서 사진 발굴한 게 많이 남아서
남미 여행이나 나가사키 여행 포스팅하다가 쓰기 싫어지면 올려보도록 하겄음!






덧글

  • 키르난 2015/11/15 08:36 # 답글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그러나 강원도 산골짝에 들어가면 '이 악망의 X덩어리!'를 외치며 좌절하는 그런 풍경이군요.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설신이 땡깁니다. 크로스컨트리용 스키는 쓰기 어려울 것 같고, 꿩 대신 닭...이 아니라 스키대신 설신을 사면 그래도 걷기 낫겠지...요?;;
  • enat 2015/11/20 12:17 #

    악마의 덩어맄ㅋㅋㅋㅋㅋㅋ 한국에 온 뒤, 눈만 오면 소스라치게 놀라던 지난 겨울, 친구들이 군대 다녀왔냐고 그러더라고요. 군대는 아니고 캐나다에 다녀왔다 이눔들아!!! ㅠㅠ
    설신!!! 눈 쌓인 언덕엘 가도 눈에 빠지지 않고 가볍게 슥삭슥삭 날라다닐 것만 같은 그런 신발!!!! 캐나다에서 정말 필요했던 신발이었어요. 전 방수가 안되는 운동화 한 짝 가지고 연명했죠... 다행히도 캐나다 자체가 워낙 건조해서 신발이 젖어도 금방 마르긴 했습니다만... 크흑...
  • 라비안로즈 2015/11/15 09:20 # 답글

    누...눈 ㅠㅠ 저는 제주도에 와서도 눈을 봐도 별 감흥이 없네요.
    저에겐 여전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ㅆㄹㄱ나... 악마의 x덩어리...밖에 ..

    힘드셨겠습니다 ㄷㄷㄷㄷ
    전 저런데선 못 살아요;;;;(어쩔수 없이 가게된다면 가겠지만 굳이... )
  • enat 2015/11/20 12:19 #

    제주도 눈ㅋㅋㅋㅋㅋㅋㅋ 하늘에서 떨어지는 쓰레깈ㅋㅋㅋㅋㅋㅋㅋㅋ 잌ㅋㅋㅋㅋㅋㅋ 하긴 제주도가 눈이 그렇게 많이 온다면서요. 제 친구가 겨울에 싼 비행기표를 구해서 제주도에 갔는데 3일 내내 눈보라가 쳐서 차 렌트한 걸 시동걸 생각도 못하고 호텔에서만 덜덜 떨며 보냈대요 ㅋㅋㅋㅋ

    저도 1년 가량의 단기간이니 살았지, 길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음... 극심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ㅋㅋㅋ
  • 택씨 2015/11/16 17:32 # 답글

    음. 눈이 온 다음에도 눈과 거리가 지저분해지지 않아 풍경은 여전히 볼만한 걸요.
    한국의 도시에서는 눈올 때는 멋있는데 하루만 지나면 지저분해져서 보기 싫었지요.
    경유관이 얼다니... 진짜 추운 곳이군요. ㅎㅎ
  • enat 2015/11/20 12:21 #

    눈과 거리가 지저분해지지 않는 이유는 지저분해질 즈음 다시 눈이오고, 또 지저분해질 즈음 다시 눈이 오기 때문입니다ㅠㅠ 하하하하 일교차도 굉장히 큰 편이라, 밤엔 영하 30도였다가 낮이 되면 영상 1도, 2도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럼 눈이 녹았다가 밤에 다시 얼어서 운전할 때 굉장히 위험하겠더라고요 ㅇ<-<
    경유관은 너무 자주 얼었어요.... 그래서 아침에 쉬프트 있으면 정말 싫었었더랬죠.... 후후...
  • Jender 2015/11/18 09:58 # 답글

    와 예전 캐나다 어학연수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 때도 눈 덜덜하게 왔던 기억이... 캐나다는 어떻게 찍어도 예술 사진이 찍히던 기억이 납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힘내세요!
    젊음이 부럽네요^^
  • enat 2015/11/20 12:23 #

    캐나다는 도시도 깔끔하고 시골은 고즈넉하니 이뻐서 어딜 가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나라더라고요. 일을 시작하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긴 했지만... 여튼... ㅋㅋㅋㅋ
    저도 오래전에 다녀와서 ㅋㅋㅋ 벌써 2년 전 사진이네요. 지금은 한국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 에어컨업자 2015/11/19 21:47 # 삭제 답글

    와...짝짝짝...멋져요....수고했당게....

    기대기대...

    멋진 포스팅구....
  • enat 2015/11/20 12:23 #

    박수소리 언제나 감사합니다 ㅋㅋㅋ
  • 토론토 2015/11/21 00:21 # 삭제 답글

    저렇게 시골은 아니지만 캐나다사는 사람으로서 뼛속까지 공감이 됩니다... 옛날에 친구가 무스코카에서 결혼을 해서 야외에서 겨울에 사진촬영을 하는데, 친구 머리를 고쳐주려다 손가락이 얼어 잘안움직이는걸 보고 기겁을 햇었지요 후훗..
  • enat 2015/11/22 23:00 #

    ㅠㅠ 야외에서 겨울웨딩촬영.... 으어어... 듣기만 해도 온몸이 시리네요 ㄷㄷㄷ 신부가 엄청 추웠을 것 같아요 ㅠㅠ 웨딩드레스가 모피 이런건 아닐테고 으어어....
  • Shane 2016/07/09 23:50 # 삭제 답글

    거의 10년전쯤 GP에서 워홀 하던때 생각나서 검색했는데....그때 제가 봤던 그모습 그대로네욯ㅎ 그땐 짐보다 샌드오일 잘나가던때라 일거리도 많았었는데~ㅎㅎ 여튼 덕분에 추억 더듬고 갑니다
  • enat 2016/07/16 16:16 #

    요새는 실업률이 제법 된다고 하더라고요 ㅠ

    10년 전쯤 GP에서 워홀 하셨으면 선배님이네요 ㅋㅋㅋ 반갑습니다. 저도 그리워지네요.
  • 노리 2018/01/10 11:47 # 삭제 답글

    그랜드페리.... 이름만으로도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도시입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저는 1999년 도에 있었는데...정말 그리워요..제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ㅠㅠㅠ 너무 그리워요... 눈이 시리도록.....
  • enat 2018/01/13 23:00 #

    헉 ㅠㅠ 저보다 훨씬 전이시지만 저 도시에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분이 계시다니 넘 반갑습니다 ㅠㅠ
    저도 참 많이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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