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8 11:51

베네치아 (3) 묘지의 섬 ├ 베네치아 일주일 (2014)

베네치아에는 묘지로만 쓰이고 있는 섬이 있다. 본섬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 산 미켈레라고 불리는 섬이다.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가 북쪽 선착장과 가까웠기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이 섬을 보게 되었다.






베네치아에 처음 방문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 섬은 바라볼 때마다 나른한 기분이 든다.

묘하게 졸린 느낌...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는 섬이기 때문일까.




일정이 텅 비던 어느 이른 아침, 나는 산 미켈레 섬에 가보기로 했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내부가 궁금했다. 언제나 외벽만 봐왔으니.


바로 앞 선착장에서 바포레또를 타고 단 5분. 단 5분만에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섬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섬으로 오게 되었다.


섬에 들어가려는데 산 미켈레 섬 앞에 붙은 표지판이 보였다.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거라 확실친 않은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특히,

- 부적절한 옷차림으로 입장하지 마십시오.
- 묘지의 어떤 공간도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 추모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당연한 말이군. 난 카메라를 가방안에 넣고, 잠깐 화장실에 들러 옷차림을 확인한 뒤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얼마있지 않아 섬 내부에서 유가족과 무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 동양인을 보게 되었다. 표지판은 영어로 적혀 있었는데 아마 읽지 못했나 보다. 살짝 가서 알려줄까 했지만 내가 경비원도 아니고 괜한 오지랖인 것 같아 관뒀다. 실랑이가 벌어지면 그게 더 큰 폐일 것 같기도 했고.



음... 근데 뭐, 나도 사진이 없어서 딱히 포스팅할 거리는 없다. 생각나는 것만 쭉 써보겠다.


1. 사실 나도 이 날 날씨가 더웠다면 들어가지 못할 뻔 했다. 유럽에선 조금이라도 더워질 것 같으면 곧잘 핫팬츠를 즐겨입었었기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서 긴바지 + 긴티로 입고 외출한 게 다행이었다.


2. 산 미켈레 섬은 상상했던 것보다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베네치아 본섬에서 매장하는 것이 비위생적이라 여겨져 필요에 의해 만든 섬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려나. 이곳은 어느 곳에나 있는 묘지였고, 그 묘지가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3. 묘역을 걷다가 저 멀리서 정성스럽게 한 무덤을 가꾸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무덤에 적힌 날짜 등을 보니 20년 전에 죽은 20대 청년의 무덤이었다. 그렇다면 저 할아버지는 아마도... 그의 아버지겠지. 20년 동안 매 년... 혹은 매월, 어쩌면 매일 해왔을 그 정성스러운 손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계속 보고 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아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4. 산 미켈레 섬의 제법 안쪽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묘지를 발견했다. 누군가 금방 꽃을 바치고 간 것 같았다.


5. 부속 성당에 들어가봤다. 한 커플이 앉아서 꽁냥꽁냥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지 그 커플을 쫓아냈다. 나는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지만 나도 옆에 있었는지라 같이 쫓겨났다.


6. 산 미켈레 섬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몇 군데 철창문을 끼워넣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그 곳에서 밖의 베네치아 본섬을 바라보는데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빨리 저 살아있는 자들의 섬으로 돌아가고 싶어 섬을 나섰다.





산 미켈레 섬의 바포레또 선착장. 여기서 본섬으로 돌아갔다.

엄... 뭐, 기억을 쥐어짜냈지만 별로 쓸 이야기는 없네. 다음 편엔 좀 더 그럴듯한 내용으로 들고 오게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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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veryday we pray for you : 베네치아 (11) 쓸쓸한 도르소두로 2016-11-07 22:59:17 #

    ... 서 이전에 못해서 아쉬웠던 경험들을 리스트에 적어두고 하나씩 지워가며 했었다. 예를 들면 무라노 섬에서 유리공예 보는 거라던가, 본섬에서 자보는 거라던가, 산 미켈레 섬에 가보는 거라던가... 오늘은 '배를 타고 대운하를 따라가며 리알토 다리를 구경하는 거'라는 긴 항목을 리스트에서 지울 수 있었다. 흐흐. 이런 사소한 아쉬움들 ... more

덧글

  • 키르난 2016/02/28 19:48 # 답글

    ...아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ㅁ=! 나중에 꼭 가보고 싶은 걸요. 밤마다 스트라빈스키 묘지 옆에서는 놀러온 여러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모여 자세를 잡으며 토론하고 있다거나.... 음, 이쪽 망상은 그래도 발랄한 편이네요. 어스름이 깔릴 때라면 어디선가 검은 여인이 나타나 스슥 손목을 잡고 달린다는 망상보다는 훠얼씬...(야!) 괜찮아요. 캐트시님의 가호가 있으면 문제 없을 거예요.
  • enat 2016/02/29 18:27 #

    밤마다 그쪽 부지에서 영혼들의 불새가 펼쳐진다거나... 아니면 봄의 제전 따위가 울려퍼지는... ㅋㅋㅋㅋ 상상하니 좀 무섭군요. 그 전위적이고 기괴한 소리가 펼쳐진다니...
    캐트시님의 가호 ㅋㅋㅋㅋㅋ 으으, 저번부터 자꾸 아리아 얘기 하실래요! 아리아 다시 보고 싶어지잖아요!
    그러면서 집에 있는 만화책 한 권을 집어드는 enat... 흐흐 딱 한 에피소드만... 한 에피소드만 봐야지...
  • Tabipero 2016/02/28 22:29 # 답글

    무라노/부라노 섬에 가는 선착장에서 저 섬이 보이더군요. 저도 저 섬을 보고 ARIA에서의 그 검은 옷 입은 여인이 생각났습니다.
    최근에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보(다 말)았는데, 저곳이 베네치아의 유일한 묘지라면 베네치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묻혀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enat 2016/02/29 18:31 #

    역시 베네치아하면 아리아죠. 베네치아가 일본이었더라면 '아리아 투어'라면서 거기 나오는 옷 입은 직원들이 아리아에 나왔던 명소들을 소개해주는 투어가 있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 아... 진짜 있다면 참가할 것 같다...
    아, 유일한 묘지이기도 한데, 묘지값이 엄청 비싸다고 해요. 예전에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요새는 이곳에 묻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일정 기간 자리를 빌려 몇십년 정도 묻혀있다가 다시 유가족들에게 돌려준다" 운운의 내용을 본 기억이 나요. 쓰면서 생각한건데 아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그 임대 시스템(?)이 생기기 전에 묻혔을테니 아직까지 남아있을 것 같군요!
  • 택씨 2016/02/29 08:34 # 답글

    죽은 자의 장소를 바다로 갈라놓았군요. 정말 저 세상으로 가는 느낌이에요.
    벽을 보니 감옥 같단 생각도 드는군요.

    20년 동안 아들의 묘지를 돌보는 아버지의 얘기는 쨘합니다. 아직도 가슴에 묻지 못할텐데....
  • enat 2016/02/29 18:33 #

    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네요. 바다로 갈라놓은... 베네치아만의 삼도천이네요.
    안쪽에서 저 벽을 바라보면 기분이 더 이상하더라고요. 베네치아는 어딜 가도 바다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으니...

    묘지를 돌보는 손짓이나 표정이 너무 정성스러워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자리를 피했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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