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9 18:23

베네치아 (4) 무라노 섬에서 드디어 유리공예를 본 이야기 ├ 베네치아 일주일 (2014)

공포의 밤 포스팅에서 그 다음날 무라노 섬, 부라노 섬, 토르첼로 섬을 갔다고 언급했었다. 오늘은 그 섬들에 대한 이야기나 한 번 써볼까 한다.



1.

제일 먼저 간 곳은 무라노 섬.

무라노 섬... 혹시 아시는가? 무라노 섬에 얽힌 내 슬프고도 기구한 사연을...

그래, 그것은 2011년, 동네 친구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막 베네치아에 도착해서 너무나 들떠있던 그 당시의 우리... 우린 그 때 피자 한 판을 사서, 베네치아 본섬에서 바포레또를 타고 15분? 20분? 하여간 좀만 가면 나온다는 무라노 섬을 갈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유리공예도 보고, 어디 벤치에라도 앉아 따끈한 피자를 먹으며 놀 생각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바포레또를 잘못 타버렸다...


바포레또는 베네치아의 모든 정류장을 들리며 (여행자보단 동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완행 비슷한 바포레또였던 것 같다) 나아갔고, 우린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내려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당시만 해도 난 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생판 다른 세상을 여행하는 건 그 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발만 동동 구르며 무라노섬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간신히 무라노 섬에 도착한 우리는 800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리 공예를 보기 위해 공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우리를 맞이한 것은 닫힌 셔터 문이었다. 혹시나해서 다른 공방에도 들렀다. 열려있는 문에 가슴이 뛰었지만 곧 주인이 밖으로 나와 셔터를 닫아버렸다.

그렇다, 이미 유리 공예를 구경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바포레또 위에서 보내버린 바보 여행자 2명...


거리가 휑한 무라노 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슬픈 사연이 있는 무라노 섬.





2.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3년 후. 2014년 어느 가을.

마침내 그 때의 과오를 씻을 기회가 찾아왔다. 남미와 스페인 등지를 여행한 후, 마지막 여행지로 어디를 갈까 (당시 프라하와 베네치아 둘 중 하나를 정하지 못해 비행기표도 사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2011년의 그 무라노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 그래. 난 아직 그 무라노 섬에서 유리공예 제작과정을 보지 못했다. 남들 다 보고 온다는 유리공예 장인들의 손길을... 난 아직 보지 못했단 말이다! 유럽에 와있는데 그 아쉬움 가득한 베네치아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 외에도 난 베네치아에서 하지 못한 일이 참 많았다. 뭐, 하나하나 따져가다 보면 포스팅 내용이 또 산으로 갈 것 같으니 그건 다른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고.

어쨌든 지금 당장은 유리 공예. 유리 공예를 봐야하는 것이다! 가자, 베네치아. 가야만 한다, 베네치아!





3.

그렇게해서 오게 된 베네치아.

도착하자마자 그 공포스런 밤을 보내고, 베네치아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했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맑았다.

난 두말할 것도 없이 무라노 섬으로 향했다. 이 날 바포레또를 타면서 상당히 골치아프고 짜증나는 일이 있었지만 이것 역시 다른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내가 까먹을 것 같아서임. 나중에 이 포스팅 읽다가 기억나겠지.




여차저차 바포레또를 타고 무라노 섬에 도착했다. 근데 선착장이 뭔가 이상하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물이 잔뜩 불어나있었다. 일반 통행로까지 물이 들어오다니 역시 보통 폭풍우가 아니었어.





고인 물에 비친 하늘이 너무 예뻐서 찍음.

아, 그러고보니 이 날 산 마르코 광장에 갔으면 장난 아니었겠다. 아쿠아 알타까진 아니더라도 거의 그 비슷한 상황은 연출 됐겠는 걸. 왜 그 생각을 그 때 못하고 지금 하고 있지? 아직도 수련이 한참 부족한 여행자 enat.





3.

근데 어디로 가야 유리공예 제작과정을 볼 수 있는 거지? 스페인에서 즉흥적으로 정하고 온 거라 그 흔한 가이드북도 없다. 생각해보니 스페인에서도 가이드북은 없었지. 또 생각해보니 남미에서도 가이드북은 없었(옛날버전 남아메리카 론리플래닛을 캐나다 헌 책방에서 구했었는데 도움도 안되고 무거워서 쿠스코에서 버렸다)구나. 따지고보면 가이드북 없는 게 내 여행에서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어디로 가야 유리공예 제작과정을 볼 수 있는 거지?

그 때 한 한국인 커플이 내 앞을 지나갔다. 여자가 "오빠, 이쪽으로 가야 유리공예 공짜로 볼 수 있대"라고 말하며 남자를 끌고 갔다. 한국인 여행자 만세! 난 한국말 모르는 중국인같은 표정을 짓고 그 커플을 슬금슬금 쫓아갔다.




그 커플은 이곳으로 들어갔다. 그래, 그러니까 여기가 유리공예 제작과정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공방이군. 후후후...

커플의 뒷통수만 뚫어져라 보며 걷는 내가 참 스스로도 수상쩍어 보여서, 혼자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 공방에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 서서 관람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난 안내인이 서란 대로 얌전히 서서 (그 커플의 뒷자리였다) 가슴 벅찬 표정으로 공방의 일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크으... 이런 거! 이런 거 너무나 보고 싶었어!


보고 있어, 2011년 9월 11일의 나?


보고 있지? 그 때의 널 대신해서 내가 왔어. 오로지 널 위해서! 프라하가 아닌 베네치아를 택해서! 그 폭풍우 몰아치는 공포의 밤을 보내고! 지금 이 무라노 섬에 다시 와서! 유리공예 보고 있다고! 크윽...




몇몇 사람들은 이런 게 뭐가 재밌냐는 듯 사진 한장 대충 찍은 뒤 바로 나갔다. 내 앞에 있는 커플 역시 아쉽지만 (혼자 정들어서?) 얼마 있지 않아 나가버렸다. 바보, 바보들! 너희들, 이게 얼마나 엄청난 광경인지 알아? 동방의 어떤 소녀는 말야, 이 광경을 다시 보기 위해 3년이란 시간을 기다려 이 물의 도시를 찾았단 말이지! 너희들은 좀 더 감동을 보일 필요가 있어!





근데 뭐... 계속 반복만 하네. 흠. 흠흠... 의외로 별 거 없... 흠흠. 아니, 아니다. 이제 충분히 봤으니 나갈까.





이건 다른 공방의 유리 공예품 제작 과정.

혹여라도 무라노 섬의 평화를 깨부수는 여행자가 있으면 들고 있는 유리봉을 휘둘러 벌할 것 같은 느낌의 장인 아저씨가 유리를 다듬고 있었다.




2011년에 같이 와서 이 광경을 보지 못한 친구에게 이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4.



생각없이 길을 걷다보니 민가가 나왔다. 내 특기다. 정처없이 걷다가 관광이랑 전혀 상관없는 지역 찾아가는 거.

여튼 무라노 섬에도 당연하지만 사람이 살겠구나. 유리공예 장인들과 관광업 등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집일테다.




그 쪽 지역에서 만난 고양이.

그러고보니 베네치아에서 고양이 참 많이 봤다. 쥐 잡는 용도로 고양이를 많이 풀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멀찌감치서 고양이를 불러봤지만 내게 한치의 의심도 풀지 않고 계속 노려보길래 그냥 가던 길 갔다. 흥. 나도 어차피 개犬파야.





걷다보니 운하가 있는 곳까지 나옴.

이야, 수위가 아슬아슬하다. 저기에 조금만 더 물을 끼얹기라도 하면 보트가 인도 위로 올라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물론 바다랑 연결되어 있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진짜 아슬아슬해 보여.





5.

이번엔 저번과는 다르게, 여유롭게 돌아다니며 다양한 유리 공예품과 조각품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어느 상점에서 알록달록한 푸른 계열의 유리로 장식된 목걸이와 귀걸이를 샀다. 예뻐서 베네치아에 있을 때 자주 하고 다녔는데, 얼마 안 있어 유리와 연결부위가 똑 떨어졌다.




뭐야, 메이드 인 무라노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부실해! 속았나!

여튼 저 목걸이는 지금도 그냥 저 상태로 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나중에 순간 접착제 쓸 일 있으면 이것도 겸사겸사 붙여야지 생각만 하는 중.





6.

관광을 마치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




익숙한 공원이 나왔다. 으음? 이곳은... 아아, 기억이 날 것 같아... 이곳은...!

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것을 찾았다.




그래! 이 조각상! 크으, 넘나 반가운 것! 반가우니까 다양한 각도로 촬영!




저 조각상을 바라보며 피자를 먹었었지!

아직도 그 짜게 식은 피자의 맛을 떠올리라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야!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고릴라 포드를 설치하고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왜 저런 해괴한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느냐는 듯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동상은 친구와의 소중한-소중한? 아냐, 고생한-추억이 담겨있는 동상이란 말이지!

마지막까지 정말 완벽하게 한풀이한 시간이었다. 아아, 역시 베네치아에 오길 잘했어!




이제 배를 타고 다른 섬에 가볼 시간이다. 다음 섬은...



시작의 섬 토르첼로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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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키르난 2016/02/29 20:05 # 답글

    베네치아는 언젠가 가게되면 카니발 시즌에 가리라! 하고 있는데 그 생각 저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문제..ㄱ-; 근데 아쿠아 알타도 꼭 보고 싶었으니 이거, 다 경험해보려면 최소 두세 번은 가야하나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적금을..(...)
    여행자다보니 유리컵이나 화병 같은 커다란 건 못들고 오셨군요. 게다가 의외로 빨리 망가졌다니 아쉽기도 하고..;ㅂ;
  • enat 2016/03/01 13:54 #

    저도 카니발 시즌에 또 가고 싶어요! 경비야 뭐... 저 이상한 병동 호스텔(?)도 그 때가 되면 엄청 비쌀 것 같지만요... 흐흑...
    아쿠아 알타도 ㅋㅋㅋㅋ 아, 아마 카니발이 겨울에 열릴텐데, 아쿠아 알타도 겨울에 자주 일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카니발 시즌에 장기체류하면 두 개를 동시에 보실 수 있겠죠! 유후!
    네... ㅠㅠ 커다란 건 역시 무서워서 못사겠더라고요. 목걸이도 넘나 아쉬운 것... 흑흑
  • 택씨 2016/03/01 13:25 # 답글

    음. 여행에서 못본 것에 대한 열망은 그냥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것 같아요.
    저도 우유니 사막의 환상적인 모습을 못보고 와서... 지금이라도 다시 달려가고 싶어요;;
    하하. 바다의 높이 을 10cm 정도 올리시려면... 북극의 빙하를 1/100 정도 녹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낫님은 개과 같아요. 그나저나 여행을 다니니 정말 사람들이 나뉘더라구요. 저희 팀에도 개과인 40대 남자가 있었는데 가는 곳 마다 개와 놀았어요. 아타카마 마을에서도 저는 냥이랑, 그 분은 개랑!!

    마지막 건물은 등대인가요?
  • enat 2016/03/02 21:02 #

    맞아요. 다시 와서 보면 된다고 말은 하지만, 언제 또 와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렇죠 ㅠㅠ
    으으 우유니... 최고의 풍경은 놓치셨나요? 우기라서 기대했는데 아쉽습니다...
    근데 허겅 북극 빙하를 그만큼이나 녹여야 하나요? ㅋㅋㅋㅋ 쉽게 안넘치겠군요 ㅋㅋㅋㅋㅋ
    네! 저 개과 맞습니다! 집에서 계속 개를 키워서 그런지 어딜가도 개들이 달려듭니다. 개냄새(?)를 맞고 오는 것인지 뭔지... ㅋㅋㅋㅋ 저도 그렇게 달려드는 개들을 좋아라하고요! 택씨님은 당연히 냐옹파시겠지요! ㅋㅋㅋ

    등대 맞습니다! 그러고보니 밤에는 무라노섬엘 가질 않으니 등대에 불들어온 걸 본 적이 없네요.
  • Tabipero 2016/03/01 14:14 # 답글

    예전에 완행 바포레토 탔다는 이야기가 그때 이야기군요. 어찌되었건 배다 보니까 정류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소요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군요.

    제가 무라노 섬에 갔었을 때는 전반적으로 휑했습니다. 비수기라 그런 건지, 일요일이라 그런 건지, 시간이 늦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별로 유리공예에 관심도 없고 해서 그냥 길거리에 장식한 유리 공예품이나 쓱 보고 나왔는데 전반적으로 지나는 사람도 없고 휑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안 나더랍니다. 어쩌면 첫인상이 그래서 다음에 또 보러 와야겠다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일본 같은 경우는 비교적 가까워서 이번에 뭘 못 봐도 다음에 보겠다는 생각으로 다니는데, 멀리까지 와서 계획했던 걸 못 본다는 건 정말 아쉽겠네요.
  • enat 2016/03/02 21:09 #

    기억해주셨군요...! 배가 물 위에서 속도를 내려면 한참을 달려야 한다는 걸 그 때 알았어요. 근데 속도를 낼만하면 멈추고, 낼만하면 멈추니! 얼마 안되는 거리인데도 2시간 걸리는 건 당연했어요.

    무라노는 곧잘 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섬이었군요. 이런 무라노...

    당시의 전 가이드북에 쓰여있는 '섬에 갇혀 나오지도 못하고 유리공예기술만 미친듯 팠다'는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내심 무라노섬의 공방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걸 보지 못한게 얼마나 아쉽던지... 아쉬움을 넘어 원통하더군요 ㅋㅋㅋ 아마 그 원통함엔 "2시간이나 달려서 도착했는데 진짜, 진짜 볼 거 없어? 다 닫았어!?!?!?"란 이유도 한몫했을 겁니다 ㅋㅋㅋ
  • Mr 스노우 2016/03/01 22:58 # 답글

    무라노 유리 공방이 저렇게 생긴 곳이었군요 크윽ㅠㅠ 거기다 저렇게 푸르른 빛이 가득한 예쁜 광장이라니...!!!(ㅠㅠ)

    저도 베네치아에서 뒤늦게 무라노 행 비포레또 타고 가서 이미 문닫은 공방들 창가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굳게 잠긴 성당 문 앞에서 또 멍청하게 있다가 해질거같아서 다시 본섬 돌아온게 무라노에 대한 제 기억의 전부랍니다 ㅋㅋㅋㅠㅠㅠㅠㅠ 다시 갈 기회가 있다면 저 사진 찍으신 곳들 전부 다 가볼거에요 ㅎㅎ
  • enat 2016/03/02 21:14 #

    아아, 저만 그런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미 문닫은 공방들 창가... 그 삭막한 거리... 인적도 드물고, 그 흔한 관광품 상점들도 막 문을 닫고 있고.. 흐흑...

    베네치아에 다시 가실 기회가 있으시다면 꼭꼭 적당한 시간에 들러보세요!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또 쏠쏠하더라고요! 아마 이탈리아 요 동네가 유난히 더 그런 것 같아요! 그 쏠쏠한 재미의 최고봉은 로마일 것 같고요... ㅋㅋㅋ 으으, 로마도 다시 가봐야하는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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