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2 22:57

즉흥여행 (6) 유채꽃 만발한 첨성대 ├ 남부지방


* 3년전에 임시저장해놨던 포스팅인데 이거 쓰다가 캐나다에 가버려서 마저 작성을 못하고 임시 저장글에서 썩고 있었음... 마침 봄철이니까 추천도 할 겸 마저 대충 이어 쓰고 올림!


불국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내려왔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돌아갈 버스표를 끊은 뒤, 남은 시간 동안 첨성대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첨성대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친구가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단다.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는 내 친구는 아무런 고민없이 월성동 주민센터에 들어갔다. 왜 거길 들어가냐니까 주민센터 화장실은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기 때문에 괜찮단다.

...음, 과연, 이것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찾는 숙녀의 지혜군.




친구가 화장실에 가있는 동안 난 먼 하늘만 바라보며 기다렸다.

생각해보니 어려서부터 이 친구와 다닐 때면 매번 내가 기다렸던 것 같다. 과학실 갈 때도 기다려, 화장실에서도 기다려, 급식실에서도 기다려... 약속 장소에 30분 늦는 건 기본이고, 결국 1시간 뒤에도 안나와서 집까지 찾아간 적도 허다하고... 뭐 이렇게 기다린 기억 뿐이람.

그러고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여름방학 끝나기 전날 갑자기 집으로 전화를 해서 몇 백 문항이 넘는 숙제의 답을 알려달라고 졸라서 3시간 동안 통화를 하며 답을 불러준 적이 있었지. 내 마지막 여름방학 저녁의 여유를 빼앗긴 기분이라 답을 불러주면서도 분통이 터졌었는데. 평소에도 얘는 '숙제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며 아침에 와서 내 숙제를 베끼곤 했는데. 어쩔 땐 일기장을 베끼기도 했지. 얘는 기억이나 할까 몰라.




그렇게 어렸을 적 이 친구와 다니며 억울했던 기억들이 급 떠올라 부들부들거리며 하늘만 바라보고 있기를 십 여분.

드디어 화장실 숙녀께서 볼일을 보고 나왔다. 볼일을 끝마쳐서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나온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첨성대로 가자고 했다.

나 : ......
친구 : 왜 그래?
나 : 내가 어떻게 너랑 아직까지도 친구인 건지 모르겠다.


친구는 내 말을 감동적인 우정의 문장으로 생각했나 보다.

친구 : 그러니까 말이야! 16년이나 이렇게 친하게 다니는 걸 보면 다들 놀란다니까.

악의 없이 싱글싱글 웃는 친구의 얼굴을 보자 부들거리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관두자. 첨성대나 보러 가자.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첨성대 쪽으로 걸었지만, 곧 그 찝찝한 기분은 사라졌다. 엄청난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첨성대 앞에 펼쳐진 유채꽃밭이 그 엄청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 : 세상에, 야! 야! 이게 뭐냐!
친구 : 이게 뭐야! 와! 진짜 이게 뭐야!





인생에서 유채꽃밭을 처음 보는 친구와 나는 신나게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노란 꽃들 사이로 하얀 나비가 돌아다니는 걸 보고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깔깔거리며 쫓아다녔다.

나야 당시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냥 신나게 뛰어다닌 거지만, 나비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여유만 된다면 올 봄에 또 놀러가서 거닐고 싶다. 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당시의 우리는 꽃보다 예쁜 20대 중반의 처녀들이었기 때문에, 유채꽃 옆에서 셀카를 잔뜩 찍었다.

그래서 올릴만한 사진은 이 정도까지. 나머지 사진들엔 이쁜 척하는 여자들 얼굴이 들어가있어서 뺐다.




원래 목적이었던 첨성대를 찾았다. 외지인에겐 입장료가 있어서 멀리서 줌하고 찍었다.

어쨌든 첨성대를 보러 왔다가 들판 가득한 유채꽃을 보게 된 거니까, 일단 첨성대에게 땡큐.






버스 시간이 다 됐는지라, 아쉽지만 유채꽃밭을 뒤로 하고 버스 터미널로 돌아갔다. 이제 인천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 3년 전의 '즉흥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틀 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매 순간이 마냥 즐거웠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달 중 하나인 5월, 봄날의 기억.

지금보다 3년만큼 어리고 3년 정도 철없던 나.


당시의 나는 캐나다에 가기 전이었고, 앞으로 닥칠 불확실한 모든 일들에 대해 막연하게 '잘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떨림과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저 때만 해도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날 힘 정도는 갖고 있었다. 내일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당장 내킬 때 떠날 수 있는 여유 정도는 있었던 것이다. 또 나와 함께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의 나는 어떨까. 아무리 여러가지를 준비중이라고는 해도, 분명 하루 정도는 어딘가 다녀올 수 있을만한 시간이 있을텐데, 그럴 시간이 있다면 그냥 집에서 자는 쪽을 선택한다. 길을 걷다 예쁜 꽃을 보고 멈춰서서 즐길 줄 아는 여유도 사라졌다. 나와 함께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날 친구들은 이제는 연락하기도 힘들다. 다들 너무나 바쁘고 분주하다.

문득 멈춰서서 생각했다.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건가? 나는 좀 더 천방지축과 좌충우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애가 아니었던가? 앞으로 닥칠 불확실한 모든 일들에 대해 막연하게 '잘 될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애가 아니었던가? 기분 내키면 떠나버리는 바람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봄날이잖아. 날씨 좋잖아!"라는 단순한 이유라고 해도?




3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얼마나 비웃을까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언제나 바쁜 녀석이라고.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힘들고 제일 괴롭다며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세상의 좋은 것들은 다 놓치고 살고 있다고.

혹시 3년 전의 내가 이 포스팅을 끝내지 못하고 계속 임시저장글에 남겨뒀던 건 3년 후의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너는 좀 더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즐길 줄 아는 녀석이었다고. 좀 떠올려보라고.


과거의 나야, 네가 맞다. 나는 그런 애였다.




저장된 사진 속 버스표의 날짜를 보니 5월 1일.

여기서 결심했다. 난 올해 5월 1일이 오기 전에, 햇살 좋은 따뜻한 어느 봄날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곳으로든 훌쩍 떠나버릴테다.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 없다. 일단 떠나고서 생각해봐야지.




다른 즉흥여행으로 찾아오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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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용용 2016/03/22 23:58 # 삭제 답글

    도입부에 웃다가 후반부엔 눈물이 고이네요
  • enat 2016/03/23 19:31 #

    울지마세여! 포스팅 당시 음악이 감성적이어서 이상하게 변모해버린... ;ㅅ;
  • 호랑타조 2016/03/23 00:25 # 답글

    와....유채꽃......작년 8월에 갔을 때는 다 코스모스랑 연꽃 천지였어요. 그것도 엄청 이뻤습니다ㅠㅠ
  • enat 2016/03/23 19:32 #

    우앙 코스모스랑 연꽃도 볼만했겠는걸요! 경주는 계절마다 가기 좋은 도시인 것 같아요
  • 찬별 2016/03/23 10:46 # 답글

    이 포스팅 사진들이 유난히 아리땁네요. 뭔가 다른 카메라로 찍으셨던가요?
  • enat 2016/03/23 19:34 #

    저때가 2013년도니까... 한참 쓰던 카메라는 캐논 익서스105 똑딱이였습니다! 굉장히 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녀석이라 카메라가 손에 익기도 했고 보정도 어떤 식으로 하면 예쁜지 감으로 익혀버렸는지라 그렇게 보이실 거에요!
    뭐... 캐나다 세탁기 속에서 장렬하게 사망했지만요...
  • 타누키 2016/03/23 11:01 # 답글

    오 글 한편이 멋지네요. ㅎㅎ
  • enat 2016/03/23 19:35 #

    지금 다시 읽어보니 밤중에 쓴 자기반성 일기글인데 부끄러워지는군요 ㅇ>-<
  • 장님 눈아찌 2016/03/23 11:24 # 삭제 답글

    걱정마세요.
    나이는 먹어도 기본적인 성격은 어디 안 가요.
    모난 곳이 닳아서 좀 둥굴어지긴 해도 모양이 변한 거지 소재는 그대로니까요.
  • enat 2016/03/23 19:36 #

    오! 그건 희소식이네요.
    전 나이 70을 먹어도 천방지축 사고뭉치겠군요!! 히히
  • 2016/03/23 11: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3/23 19: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키르난 2016/03/23 11:55 # 답글

    다음 즉흥여행은 4월 13일.... 새벽 6시에 첫 투표를 마치고 바로 버스 타고 나가시는 겁니다!
    만...; 결국 여행은 시간과 체력과 돈 셋 중 하나가 부족한 상태에서 떠나게 되더군요. 셋 모두를 만족하는 여행은 없나봅니다.:)
  • enat 2016/03/23 19:40 #

    그 제안은 몹시 끌리지만... 새벽... 새벽 6시... 꼭 새벽 6시여야 하나요!? ㅋㅋㅋㅋㅋ 으으으
    시간과 체력과 돈 셋 중 하나가 부족한 상태 ;ㅅ; 몹시 공감됩니다. 저야 늘 돈이 부족한 여행이었기에... ㅋㅋㅋㅋ
  • 택씨 2016/03/24 11:03 # 답글

    오!!1 유채가 가득한 모습은 첨 봅니다.
    오히려 이게 더 어울리는군요. 매번 볼 때마다 느끼지만... 첨성대가 유물치고는 너무 아담하다고 느껴지더라구요. (더 넓은 광장에 덩그라니 있어서 더 그런듯)
  • enat 2016/03/24 22:19 #

    저도 텅 빈 벌판에 첨성대 있는 모습만 알고 있었는데, 언제 또 유채꽃을 심었는지 아주 흐드러지게 피었더라고요!
    첨성대는 아담한 사이즌데 가까이 가려면 요금을 내야하는게 더 충격적이에요ㅠ ㅋㅋㅋ
  • 라비안로즈 2016/03/27 15:08 # 답글

    저는... ㅜㅜ 즉석급여행 떠나고 싶어도.. 저한테 딸려있는 두명..(한명은 걸어다니지만 통제불가, 나머지 한명은 그나마 뱃속에 있어 통제가능(???))이 있어 조금 힘드네요.. 제주도 성수기 되기전에 한번 놀러오셔요~
  • enat 2016/03/28 14:00 #

    둘째셨군요! 통제불가 첫째는 동생 생겨서 넘나 기쁘겠어요 ><
    안그래도 가족들과 제주도 놀러가려고 이렇게 일정 짜보고 저렇게 일정 짜보고 있습니다!
    몸조리 잘하시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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