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2 23:33

나가사키 온천여행 (6) 운젠지옥 ├ 엄마랑 온천여행 (2015)

1.

온천마을 운젠. 그 운젠을 대표하는 명소가 바로 지옥 온천이다.

온천이 있는 곳은 당연하지만 지열이 집중된 곳이다. 지열로 인해 유황 냄새가 자욱하게 깔리고 증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모습은, 실제로든, TV로든, 어디서든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그 모습이 그냥 지리적으로 그런 지역이겠거니 하겠지만, 옛날 사람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길을 걷다가 타이밍이 나빠 폭발하는 증기에 맞게 되는 사고도 종종 있었을 것이고, 아예 열기 때문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았을테니까.

끔찍하게도 이곳에선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있었다고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다. 저 고온의 증기와 물에 사람을 집어넣었다가 뺐다가 하는 짓을 며칠에 걸쳐 반복하며 고문했다고 한다. 그 기독교인들에겐 이곳이 정말 지옥이나 다름 없었겠지.





2.

나 : ...라고 해요.
구청장님 : 꺅! 너무 끔찍하잖아!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거야!
나 : 어... 여행지 설명한 건데...
구청장님 : 으으, 너무 싫다, 상상했잖아.


참고로 저 구청장님은 진짜 구청장님이 아니라 우리 엄마의 별명이다. 이 설명은 아마 포스팅 끝날 때까지 하게 될 것 같다.

구청장님 : 그래서, 여기 있는 지옥물을 우리가 쓰는 거야?
나 : 응. 아까 호텔에서 온천 갔다왔잖아요. 그 물이 여기서 수로 이어서 가져온 물이에요.


구청장님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운젠지옥의 온천물은 다른 온천물에 비해 산성도가 높다고 한다. 보통 온천을 하고 나면 성분을 몸에 흡수시킨다고 샤워하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데, 이 운젠 지옥은 산성도가 높아 빨리 씻어내는 쪽이 좋다고 했다.

나 : 그럼 보러 갈까요?
구청장님 : 거기 멀어? 얼마나 걸어야 해?


피곤하셨던 건지 위치를 물어보는 구청장님.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 : 호텔 바로 뒤에요.





3.

그래서 구청장님과 함께 슬리퍼를 신고 호텔 뒤로 나가 운젠 지옥을 돌아봤다.








구청장님 : 어머어머... 땅에서 연기가 막 나네! 진짜 지옥 같다!

구청장님은 놀랍다는 듯 두 손으로 작게 박수를 치며 돌아다녔다.

구청장님 : 너도 이런 건 처음 보지?
나 : 나? 난 뭐... 예전에 봤었어요. 저기 어디냐, 지구 반대편 볼리비아에서.
구청장님 : 그래? 혼자서만 좋은 거 잘 보고 다녔네.


죄... 죄송하다고 해야하나!?





4.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 때가 단풍이 지기 바로 직전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만약 이주일, 아니 일주일만 더 늦게 왔더라도 산이 새빨갛게 물든 광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구청장님 : 좋지 않아.
나 : 네?
구청장님 : 몇주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거라며.
나 : 아, 그럼 단풍 볼 수 있었을 거란 말인데... 그게 좋지 않다고요?
구청장님 : 난 추운 거 싫어. 지금도 좀 싸늘한데 단풍 들면 더 추워질 거 아냐.
나 : 그래도, 산이 더 붉었으면 예쁘기도 하고...
구청장님 : 싫어.


단호박 구청장님.

그래서 나도 별 수 없이 단풍을 못봤지만 일찍 와서 날이 따뜻한 편이라 매우 좋다, 더 늦게 왔으면 단풍은 봤겠지만 매우 추워서 좋지 않았을 거다 등등의 선언을 해야만 했다. 구청장님은 내 항복 선언(?)을 듣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5.





걷다보니 연기가 아주 자욱한 구간이 있었다.

구청장님 : 바로 여기야! 내가 저기로 달려갈테니까 서로를 찍어주자!

아다다다 달려가는 구청장님. 연기 속 신비로운 사진을 찍고 싶으셨나보다. 좋아. 몇 컷 찍어드리지!




그러나 구청장님이 달려가는 동시에, 한 고양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고양이 : 인간. 운젠은 처음이냥.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자신의 몸을 비비는 것이었다... 허억...

이 귀여운 생명체를 어찌해야할지 알지 못했던 난,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양이가 떠날 때까지 쭈그려 앉은 상태로 얼어있었다. 뭔데, 뭔데 나한테 와서 애교질인데. 넌 대체 누군데 이러니. 고양이가 이렇게 귀여운 동물이었어!? 난, 난 개파야. 난 개파라고!

한참 뒤, 고양이는 내게 흥미를 잃은 듯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난 고양이가 내게서 멀어진 후에야 일어설 수 있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던 구청장님이!




얼른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늦었다.

저 멀리, 아무리 기다려도 몸을 보이지 않는 딸을 포기한 채 풍경만 찍고 있는 구청장님이 보였다.




결국 삐지심.

크윽... 고양이 때문에...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귀여움을 가진 고양이의 매력 때문에...!


역시 고양이는 요물이었어!






6.

운젠 지옥을 쭉 둘러본 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터덜터덜 걸었다.

구청장님과 나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운젠을 둘러보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자세히 기억도 나지 않는, 정말 사소한 이야기들뿐이었지만, 그냥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들이었다.











나 : 내일이면 집에 가네요? 어땠어요?
구청장님 : 너무 짧다. 좋은데, 너무 짧네.
나 : 또 오죠, 뭐. 다음엔 아빠도 같이.


구청장님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샐쭉하며 입을 열었다.

구청장님 : 왜? 난 막내딸이랑만 온 게 더 좋아. 다음에도 우리 둘만 가자.

아빠는 등산 멤버들이랑 히말라야 다녀오라고 하고 우리 둘만 또 온천여행가자는 구청장님. 아빠는 산만 좋아하지, 온천의 즐거움을 모르신다나. 구청장님의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요, 다음에도 우리 둘만 또 가요. 그러다가 아빠가 삐지면 엄마가 알아서 풀어드리고요.




나가사키 도심에서 쇼핑하는 마지막 포스팅에서 계속!






덧글

  • 용용 2016/04/13 02:25 # 삭제 답글

    이런말씀 드리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구청장님(어머님) 너무 귀여우세요 >ㅁ< 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엄마랑 둘이서 여행 가고 싶어요~!! 온천여행 갈 때 이낫님 여행기 참고 많이 할께요~!!!
  • enat 2016/04/16 00:33 #

    실례 아니에요!!! 저희 집에서 귀여움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ㅋㅋㅋㅋㅋ
    엄마랑 떠나는 여행은 또 다른 맛이 있더군요. 제 여행기는 영 도움이 되지 않을테니 조금만 참고하시고 가이드북 많이 참고하세요!!! ㅋㅋㅋㅋㅋ
  • 키르난 2016/04/13 07:41 # 답글

    ... 초반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설명 들으면서 기겁을..... 으아아악.;ㅂ; 원천이 뜨거워봤자, 사람 삶길 정도는 안되지만 화상 입을 정도는 충분히 되잖아요! ;ㅂ; 으아아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ㅠ_ㅠ;
    하여간 고양이는 요물 맞습니다. 아, 참 고양이 귀엽긔... 타이페이에서도 또 한 번 홀리셨으니, 이제는 고양이와 개를 둘다 좋아하시면 되는 겁니다!
  • enat 2016/04/16 00:36 #

    으으 그러니까요 ㅠㅠ 저곳에 사람을 며칠에 걸쳐 뺐다 건졌다, 뺐다 건졌다를 반복했다는군요... 그러면서 개종을 요구했다는데... 으으... 으으으으.... ;ㅅ; 악독하기 짝이 없죠 정말....
    고양이 정말 어쩌면 좋죠 ㅠㅠ 고양이 키우고 싶은데, 집에서 허락하시질 않아 안되겠더군요. 생각해보니 제가 키울 여유시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멀리서만 바라만 볼 뿐... 흐흑...
  • 택씨 2016/04/13 16:39 # 답글

    ㅎㅎ. 볼리비아에서 본 건 이것보다 더 좋지 않나요?
    고양이는 역시... 저도 간혹 다른 일때문에 마당에 나갔다가 냥이랑 놀다가 해야할 일을 까먹곤 합니다만...
  • enat 2016/04/16 00:37 #

    더 좋지만 더 좋은 척을 하면 구청장님께서 삐지실 것 같아 그냥 비슷하다고 얘기했습니다! ㅋㅋㅋㅋ
    마당에 나갔다가 할일을 까먹곤 하시다니ㅋㅋㅋㅋㅋㅋ 정말 요물 맞군요.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6/04/14 10:04 # 답글

    ㅋㅋㅋ마지막 문장은 역시 진리죠:) 삐지면 알아서 풀어드리기ㅋㅋㅋ 전 만약 고양이에게 홀려서 사진 찍는거 깜빡했다간 엄마의 삐짐을 감당할수가 없을거여요....;;;
  • enat 2016/04/16 00:38 #

    아빠의 삐짐은 제가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ㅋㅋㅋㅋㅋㅋ
    잌ㅋㅋㅋㅋ 저도 엄마의 삐짐을 감당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곧 이곳은 외국이고 딸래미한테 의지하지 않으면 국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언니의 충고 때문에 돌아오시더군요 ㅋㅋㅋㅋㅋ
  • 남쪽바다 2017/10/16 10:00 # 삭제 답글

    다가오는 11월에 나가사키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운젠지역 여행정보를 찾기위해 왔다가 흥미진진한 여행기를 정신없이 읽고 글을 남깁니다. 이게 실화냐~~싶을정도로 정말 재밌네요 :) 다른 여행기들에도 어떤 에피소드가 있을지 자주 찾아와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enat 2017/10/18 22:22 #

    와 정보라기엔 별 거 없었지만 재밌게 읽다 가시다니 기쁩니다! 종종 들러주시고 부디 입맛에 맞는 다른 여행기들이 있기를 바래봅니당. 덧글 감사드리고 즐거운 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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