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5 00:49

남미여행 (56)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 아이레스 마지막 날 ├ 남미 배낭여행 (2014)

*** 이 날 포스팅에 사진이 많이 없는 이유는 이 날 찍은 사진 메모리 카드를 털려서 그렇슴다. 다 웨이가 찍은 사진인데 내 마음에 흡족한 사진이 적어 조금만 올림... 흑흑...





1.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무른지... 음... 얼마나 지났지? 대충 일주일 정도 되어가나?

하여간 내일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도 안녕이다.

여태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굉장히 즐거웠는데, 마지막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인상이 확실하게 정해질 것 같다. 페루의 아레키파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내내 즐겁다가 마지막 날에 그 사단(카메라 고장+끙끙 앓음)이 나는 바람에 우울한 도시가 되어버렸으니.

그러니 바로 오늘, 이 마지막 하루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또 이곳에 올지 안올지를 결정하는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니까.

나는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팡팡 친 뒤, 힘차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2.

웨이 : 오, 리! 또 너야?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화도 시킬 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웨이를 만났다. 아무래도 숙소가 같은 블럭에 있다보니, 이렇게 계속 만나게 되나보다. 그건 그렇고 또 너라니, 누가 할 소리를.

웨이 : 넌 어딜가도 있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이야?
나 :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의 기준이 뭐야?
웨이 : 자연스럽단 소리야. 근데 그거 알아? 오늘부터 지하철 파업이래.
나 : 엥?
웨이 : 숙소에서 아침 먹다가 뉴스 봤어. 지하철 안다닌대.


확실히 현지어를 할 줄 알면 습득하는 정보가 많군.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지하철 대신 버스나 두 다리를 이용하겠다고 말했다. 웨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지금부터 레콜레타 묘지에 가서 에비타의 묘를 볼 거라 했다.

웨이 : 리. 에비타의 묘는 봤어?
나 : 응? 아직 못 봤어.
웨이 : 그럼 아직 레콜레타 묘지는 안갔구나.
나 : 아, 아니. 레콜레타 묘지를 가긴 했는데, 에비타는 못 봤어.
웨이 : ...? 레콜레타 묘지에 갔는데 에비타는 보지 못했다고? 어떻게 그럴수가?


그러게...

나 : ...묘지 안에서 길을 잃어서...
웨이 : ......? 뭘 어떻게하면 묘지 안에서 길을 잃어? 너 길 잘 찾잖아?
나 : 그러게... 그게 그렇게 됐어.


웨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럼 너도 지금부터 레콜레타 묘지에 가야한다고 (have to go) 말했다. 나는 왜 have to 냐고 물었고, 웨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왔으면 당연히 에비타의 묘를 봐야하는 거지,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런가? 뭐... 그렇게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귀가 얇은 난 3초 정도 눈을 끔뻑이다가 그럼 레콜레타 묘지에 가겠다고 했다. 웨이는 내가 곧바로 오케이 싸인을 보낼 줄은 몰랐는지, 좀 당황해하다가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길을 앞장섰다.

하지만 웨이가 가는 방향은 반대 방향이다. 난 웨이를 불러세우고 반대 방향으로 가야 레콜레타 동이 나온다고 알려줬다. 웨이는 또 한번 당황해하다가 다시 머쓱한 웃음을 짓고 걸어갔다.





3.

하지만 단번에 레콜레타 묘지까지 가지는 못했다. 제법 험난한 여정이었다.

쇼핑할 수 있는 가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 : 나 저 옷가게에... 앗, 페소가 모자라잖아!
암환전상 : 깜비오. 깜비오.
나 : 30달러만 바꿔줘!
암환전상 : 오케이 레이디.
웨이 : ......
나 : 뭐야, 이 원피스, 내가 전날 산것보다 10페소나 싸게 팔고 있잖아!
웨이 : 흠흠. 이제 슬슬, 레콜레타로...
나 : 오, 웨이! 너 운동화 산다고 하지 않았어?
웨이 : 음? 오! 운동화 싸게 파네? 좀 신어보고...
나 : 잠깐만, 스카프 세일하네!?
웨이 : 이 신발 어때, 괜찮아?


이런 식.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쇼핑의 천국이라더니... 천국은 아니고 개미지옥 같다. 끝없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상점들이란...





꽤 긴 거리를 걸으면서 쇼핑을 하고나니 둘 다 지쳐버렸다. 웨이와 나는 열량 보충이 시급하다며 레콜레타 동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테이크 런치 세트를 사먹었다.





4.

웨이 : 팁은 이 정도면 될까.
나 : 팁 주지마. 저 웨이터 백인 테이블이랑 우리 테이블이랑 태도 완전 다른 거 알아?
웨이 : 그래도 안주면 안되잖아.
나 : 난 주기 싫어. 오히려 지금 화를 낼까 말까 고민중인데?


점심을 해결한 레스토랑에서 웨이와 의견차가 생겼다. 팁 때문이었다. 우리를 서버한 웨이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기를 시키는데 어느 정도로 익힐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웰던으로 가져오고, 후식도 골라야 하는 건데 자기 멋대로 아이스크림으로 가져왔다. 그릇은 테이블에 버리듯이 내려놓고, 기껏 웨이가 스페인어로 질문을 해도 못 알아듣는 척 했다. 그냥 그 사람 스타일이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좋으련만, 우리 근처의 백인들의 테이블에선 완전 싹싹한 모습을 보여 날 빡치게 만들었다.

웨이 : 워워. 진정해, 리.
나 : 짜증나잖아! 이거 인종차별로 걸고 넘어질 수도 있는 거야! 아니 인종차별이 맞지!
웨이 :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팁을 내지 않고 가면 역시 수준이 떨어지네 어쩌네 생각할 거야.
나 : 팁은 웨이터 서비스에 달린 건데 그 서비스가 완전 구리잖아! 여기서 팁 주고 가면 호구로 알 걸.
웨이 : 자자, 진정하고.


웨이는 자신의 지갑에서 동전을 몇 푼 꺼내어 테이블에 던져놓고, 날 끌고 나왔다. 아오, 저 동전을 저기에 왜 두고 오냐고.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웨이터에게 화났다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열받는거라고오오!

웨이 : 다니가 알려준 거 있지 않아? 왜, 그...
나 : 열받는 것들을 마음 속 상자 안에 넣고 나중에 생각하는 거? 난 나중에 생각해도 열받을 것 같은데!
웨이 : 그래도 일단 상자 안에 넣어봐. 우리 묘지 갈 건데, 그렇게 부들거리면서 가면 안되잖아.
나 : 음... 뭐... 그렇지.


다니의 도인 같은 온화한 얼굴을 떠올리며 방금 전 일들을 상자 안에 넣었다.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웨이 : 좋아, 그럼 레콜레타 묘지로...
나 : 끄아아! 역시 열받아! 다시 돌아가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고 나오지 않으면!
웨이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좀 참으라고!






5.

결국 마음 속 상자를 5겹 정도로 둘둘 싸매고 나서야 좀 진정할 수 있었다.

웨이 : 좋아. 이제 충분히 경건해졌지?
나 : 응.
웨이 : 그럼 정말 가는 거야. 레콜레타 묘지로.
나 : 응.






웨이와 다시 찾은 레콜레타 묘지는 여전했다. 여전히 묘역 같지 않았다.

웨이는 이곳이 죽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산책로 같다고 말했다. 나도 잘 조성된 산책로라는 의견에는 동감했지만, 그래도 말을 할 때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지는 걸 보면 우리 모두 죽은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는 거고 그렇다면 100%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산책로는 아닐 것이란 말을 했다.

웨이 : 그럼 반반 산책로네.
나 : 반반?
웨이 : 삶 반, 죽음 반.


그렇게 시간 때우기용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서양인 커플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서로 해맑게 웃으며 끈적한 포즈를 취했다. 웨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카메라를 받아들고 그 커플을 찍어줬다. 커플은 감사하다며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 : 표정이 왜 그래? 너도 사진 찍어줄까?
웨이 : 음, 내가 아무리 인증샷을 좋아한다해도 다른 사람들의 묘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싶진 않아.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웨이 : 난 나 대신 이 동상 사진을 찍겠어. 나랑 비슷하잖아.

나는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봤고, 웨이는 자신이 미소년 천사 동상과 닮았다는 헛소리를 이어나가는 대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에비타의 묘를 찾아갔다.




그리고 에비타의 묘를 단번에 발견한 웨이. 웨이는 어깨를 으쓱하곤 날 돌아보며 말했다.

웨이 : 여기 있네.
나 : ......
웨이 :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길을 잃고 여길 못 찾을 수 있는 거야?


그거 하나 찾았다고 잘난 척은... 부들부들...




어쨌든, 에비타. 에바 페론.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사랑받는 퍼스트레이디다.

에바는 영부인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많은 빈민층을 만나며 그들을 구제하려고 애를 쓴 여자다. 아름다운 외모, 타고난 호소력 짙은 목소리, 배우 시절에 익혔을 감정 표현, 그리고 물불 가리지 않는 자선 사업과 노동 운동... 아르헨티나의 서민들에게 에비타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성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페론주의의 모순을 자신의 인기로 가리고, 계획성 없는 복지 정책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침체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에비타를 수식하는 말 중 가장 유명한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는 타이틀은 그녀에 대한 다양한 평가로 인해 달린 것이다.

부정적인 평가이든 긍정적인 평가이든 후대에게 참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는 그녀지만, 그녀가 33년 남짓한 짧은 인생을 격정적이고 극적이게 살아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임시방편인 복지 정책보다 더 현명한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그녀의 최선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에비타는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자기 재산을 축적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부를 재분배하지 않았던가.

난 결과가 어떻든간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행동하며' 산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존경하기에, 경의를 갖고 그녀의 묘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6.

나 : 에비타의 묘도 보고. 임무 완수했네.
웨이 : 그래. 이제 어디갈까? 너 오늘 마지막 날이잖아. 가고 싶은 곳 없어?


이제는 동행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갈 곳을 물어오는 웨이.

그러게, 가고 싶은 곳이라. 가고 싶은 곳이라면...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난 일요일에 다녀온 카미니토 거리가 생각났다. 지난번엔 나 혼자여서 맥주도 마시지 못했던 그곳. 난 웨이에게 카미니토 거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웨이는 자기도 그곳을 가이드북에서 봤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카미니토 거리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려면 버스카드가 필요하다. 저번에야 운이 좋아서 대신 버스비를 내준 사람이 있었다지만. 그 이후로 버스를 탈 일이 없어서 - 택시와 지하철만 이용했다! - 카드도 사놓지 않은 것이다.

난 웨이에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버스들은 현금을 받지 않는다고 (사실 동전은 받는다던데, 아르헨티나에 와서 동전을 본 일이 없다) 알려줬더니, 웨이는 그럼 버스카드를 사자며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슈퍼마켓에선 버스카드를 팔지 않았다. 물어보니 SUBE라고 적힌 마켓이나 우체국에 가면 살 수 있단다. 슈퍼마켓 아저씨가 알려준대로 SUBE라고 적힌 마켓까지 한참 걸어갔다. 하지만 그 마켓에선 버스카드를 팔지 않고 충전만 가능하다 했다. 그러면서 우체국으로 가라고 알려줬다. 또 우체국까지 한참 걸어갔다. 우체국에 갔더니 번호표를 뽑아야한데서 번호표를 뽑고 한참 기다렸다. 막상 버스카드를 살려니까 자기네 카드 다 떨어졌다고 또다른 판매가게를 알려줬다. 그래서 그 판매가게까지 또 한참 걸어가서야 카드를 구입했는데, 그 판매가게 주인 왈, 자기네 충전카드기계가 마침 고장났으니 우체국으로 돌아가 충전하란다. 그래서 우린 또 우체국까지 한참 걸어가서 번호표를 뽑고 충전을 기다려...

나 : 크아아아아아! 버스카드 하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웨이 : 진정해.
나 : 고작 버스카드인데! 아니 그보다도 왜 버스에서 지폐를 안받는데! 크아아!
웨이 : 상자. 상자에 넣자. 다니를 생각해.
나 : 크아아... 아... 휴... 상자. 상자에...


결국 해가 뉘엿뉘엿질 때 즈음에야 버스카드를 충전하고 카미니토 거리로 가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충전된 버스카드를 마침내 손에 넣었을 땐 너무 기뻐서 둘이 환호를 지르며 버스카드와 인증샷을 찍었다.

근데 버스카드를 거꾸로 들었었네. 지금 사진 확인하면서 처음 알았다.





7.

지하철이 파업한 것 때문인지 버스는 만원버스였다. 마치 출퇴근길 9호선 같았다. 우리는 땀범벅이 되어 카미니토 거리에 내렸다.

웨이 : 돌아갈 때 저걸 또 타야하나...
나 : 아, 그건 걱정마. 여기가 종점이라 돌아가는 버스는 앉아서 갈 수는 있을 걸...
웨이 : 휴...





하지만 지친 기색도 잠시, 곧 원색으로 가득한 카미니토 거리에 들어서자 기운이 솟아났다. 이곳의 밝은 건물들은 사람의 마음도 밝게 해주는 것 같다. 우리는 활기찬 거리에 동화되어 거리 이곳저곳을 구경다녔다.






저번에 혼자 왔던 때와 똑같은 풍경인데도 그때보다 더 즐거웠다. 역시 혼자보단 둘이 좋다.




역시나 교황님과 인증샷을 찍는 웨이.

아, 참고로 웨이 인증샷은 웨이 카메라로, 내 인증샷은 내 카메라로 찍었기에 남아있는 사진은 웨이밖에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인증샷도 웨이 카메라로 찍을 걸. 젠장.




아저씨 같은 짓을 하는 웨이.

난 일단 사진을 찍고 그거 디게 별로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웨이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않고 사진을 확인하더니 만족했다.





한참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다가, 탱고 무대가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사진은 다른 카페의 사진이지만, 대충 저 카페와 비슷하게 생긴 카페였다.

무대와 가까운 곳에 앉으면 탱고 음악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대화를 못할 것 같았기에, 무대와 한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앉고보니 길바닥이었지만 뭐, 바람도 시원하게 통하는 자리인게 마음에 든다.

무엇을 원하냐고 묻는 웨이터에게 나와 웨이는 동시에 외쳤다.




나&웨이 : 세르베사(맥주)!




웨이는 맥주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하며 홀짝홀짝 마셨다. 싱글벙글할 만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에 있지,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지, 그동안 흘린 땀을 맥주로 보충하고 있지, 앞에 미녀가 있지.

웨이 : 잠깐, 마지막에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나 : 부정하는 거야?


그 때 정말 타이밍 좋게, 길거리를 지나는 한 청년이 내게 "뷰티풀~"을 외쳐주고 지나갔다. 나는 그에게 "알고 있어^^!" 라고 소리쳤고, 그 청년은 뒤돌아서 윙크하더니 사라졌다. 웨이는 이런 상황은 처음 보는 광경이라는 듯 얼이 빠져 말했다.

웨이 : 여자들은 저렇게 남자들이 다가와서 예쁘다고 해주고 그러는 거야?
나 : (뻥이지만) 늘 있는 일이야. 귀찮다고.
웨이 : 나도 지나가는 여자에게 잘생겼단 소리 들어보고 싶다...
나 : ㅋㅋㅋㅋㅋㅋ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런 걸 부러워하지 말라고.





중간에 웨이터가 와서 찍어준 사진.

어쨌든 구성진 탱고음악 덕분에 분위기는 흥겹고, 대화도 즐겁고. 우리는 연거푸 건배를 외치며 맥주를 마셨다.





8.

웨이 : 그렇게 맥주를 연거푸 마시는 게 아니었어...
나 : 완전 동감해... 살려줘...


카미니토 거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중심가로 돌아온 우리는 후회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자신들의 신장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웨이 : 유... 유료여도 되니까... 화장실이...
나 : 도대체 이 동네엔 화장실이 어디에... 어디 스타벅스 없나...





프랜차이저를 찾는 우리 앞에 난데없는 시위행렬이 나타났다.

웨이 : 으아아... 비켜... 비켜주세요... 실례합니다...
나 : 아, 치지마! 아... 치지 말라고!


간신히 시위행렬을 뚫고 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도너츠 가게를 발견하고 (미스터 도너츠? 던킨? 기억이 잘 안난다)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각자의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수십 초 후, 우리는 개운한 얼굴이 되어 다시 만났다.

나 : 다시 태어난 느낌이야.
웨이 : 이 가게에 빚을 진 느낌이야.
나 : 그럼 갈까.
웨이 : 좋아.






9.

전날 응이 언니와 새초미네 아파트에 놀러가기로 한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다. 나와 웨이는 가벼운 몸으로 마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쇼핑가를 돌아다니며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웨이 :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밤이 아름다운 도시 같아.
나 : 완전 공감. 저 갤러리아 좀 봐. 건물이 황금빛으로 빛나잖아.
웨이 : 오오. 저런 건 사진 찍어야지.





웨이가 갤러리아 사진을 한참 찍길래, 나도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하며 가방에 손을 뻗다가 말았다. 어차피 저번에 찍은 사진도 있고, 뭔가 지금은 카메라 쥐고 있기 귀찮은 걸.

그 때의 나에게 전하고 싶다. 그 때 카메라를 꺼내어 쥐고 있으면 되는 거였다고. 하지만...

나 : 웨이. 사진 다 찍었어? 우리 저기 길 건너서 왼쪽으로 쭉 가면 응이 언니네 아파트야.
웨이 : 아, 그래? 그럼 거기로... 아, 신호등 조금 있으면 빨간불 된다. 다음 신호에 건너자.


그 때의 나에게 전하고 싶다. 그 때 다음 신호를 기다리지 말고 뛰었어야 했다고. 하지만...

나 : 그래. 오늘 하루종일 걸어서 다리 아프다.

나는 웨이와 횡단보도 앞에서 뭐라뭐라 수다를 떨었다. 물론 시덥잖은 내용이었지만 - 누가 길을 더 잘 찾느냐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이 더 길눈이 밝다는 유치한 말싸움이었다 - 서로 대화에 엄청나게 열중했다. 그러는 사이에 횡단보도 앞에는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우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승부라며 누가 더 응이 언니네 집까지 잘 찾아가나를 내기하기로 했다. 그 때 신호가 변했고, 대화에 집중하느라 신호를 보지 못한 우리의 양 옆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도로로 쏟아져 내려갔다.

툭.

누가 내 등을 치고 지나갔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가벼운 접촉.

난 그 낯선 터치에 신경도 쓰지 않고 마저 횡단보도를 건넜고, 웨이와 내기에 대해 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얼마나 걸었을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그러니까 뭔가 등에 맨 가방이 이상한...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등에 맨 가방을 황급히 풀렀다. 분명 꼭 잠가뒀던 가방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사색이 되어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웨이는 얘가 이야기하다말고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가 눈이 뒤집혀서 가방을 더듬거리는 걸 보고 얼떨떨하게 물었다.

웨이 : 왜, 왜 그래?
나 : 내 카메라, 내 카메라!
웨이 : 응? 가방에 없어?
나 : 가방문이 열려있었어! 이번엔 내가 열어놓고 다닌 거 아니라고!
웨이 : 으응? 뭐라고?


웨이까지 합세하여 가방을 뒤졌지만, 카메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근처 벤치에 앉았다.

웨이 : 어... 그러니까...
나 : 응...
웨이 : 당... 당한거야?
나 : 응. 도난당해 버렸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어떤 간 큰 놈이 가방문을 열고 카메라를 가져가? 대체 얼마나 지퍼를 신중하게 열었으면 내가 못알아채? 아니 그보다도,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많았을텐데 그걸 그냥 보고 내버려뒀단 말야?

웨이 : 세상에. 세상에! 나도 옆에 있었는데!
나 : 하하...
웨이 : 말도 안돼!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벌 받아라!


처음엔 좀 멍했는데, 옆에서 방방 뛰는 웨이를 보자 머리가 차분해졌다.

나 : 웨이. 괜찮아. 어쩐지 이럴 것 같았어.
웨이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군지는 몰라도 네 카메라를 훔쳐간 놈은 병에 걸리고 3대가 불행하며 시험에도 떨어지고 취직도 못할거야. 시궁창 인생을 살 거라고!
나 : 웨이. 그건 너무 심하잖아. 그냥 매일 새끼 발가락을 문지방에 찧는 정도의 형벌이면 족해.
웨이 : 넌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네 카메라가 털린 거라고!
나 : 아니 뭐, 어제 메모리 카드 바꿔놔서 다른 사진들은 잘 있고... 기껏해야 오늘 하루 사진들 날라간 거고... 그 카메라 칠레에서 산 거지만 그렇게 비싼 거 아니었고... 쓸 때도 왠지 내 카메라가 아닌 것 같더라고... 됐어, 뭐.
웨이 : 어휴. 차라리 소리치고 화를 내라고! 열받잖아!


보통 저렇게 화내는 포지션이 나고, 말리는 포지션이 웨이였는데, 이번엔 뭔가 반대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열받지는 않았다. 그냥 그 카메라는 내 물건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카메라 도난을 알아차린지 한 5분만에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했고, 다시 벤치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응이 언니네로 향했다. 웨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화를 내지 않는 나를 보며, 애가 너무 충격을 받아 이렇게 됐다는 뉘앙스의 말을 중얼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날 쫓아왔다.





10.

나 : 분명 이 건물인데...
웨이 : 응. 응이가 알려준 주소가 여기가 맞는데... 여기 8층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응이 언니네 아파트는 입구에 락이 걸려있는 아파트였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면 전자키로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에게 그런 전자키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경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터폰으로 안에 있는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락만 걸려있었다. 이게 뭐야. 초대받았는데 들어갈 수가 없네.

나 : 음, 어떻게든 응이 언니와 연락을 해야하는데... 전화번호도 모르고...
웨이 : 그치. 우리 여태까지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을 주고받았잖아.
나 : 근데 나 데이터가 없어서, 와이파이 연결해야하는데...
웨이 : 나도 데이터가 없어서... 나 아까부터 와이파이 잡으려는데 이 근처엔 무료 와이파이가 없나봐...
나 : 어... 어떡하지...


웨이와 나는 아파트 입구에서 쩔쩔매다가, 급기야 "응이야!" 혹은 "응이 언니!"를 사방에 외쳐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듣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지는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얼굴을 내민 건 시끄럽다고 욕지거리하는 다른 건물의 아저씨뿐이었다.

나 : 어, 어떡하지!? 이 방법은 실패야...
웨이 : 그렇다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가 나오기 위해 문을 열면 바로 뛰어들어가자.
나 : 오, 그래, 그럼 되겠다!


그래서 나와 웨이는 잠복근무하는 형사처럼 아파트 앞에서 수상쩍게 서있었다. 10분? 15분?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떤 아저씨가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아파트 입구를 열고 나왔다. 우리는 때는 이때다 하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아파트 입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저씨 : 뭐야! 너네들! 멈춰! 뭐야!

개를 들고 있는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다말고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뛰다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음... 응? 아니... 뭐... 왜... 우리는... 우리는 선량한 여행자일 뿐이야! 그저 이 아파트의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없어 누군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얼른 뛰어들어가는 것뿐인데 뭘 그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거야!

웨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아저씨를 향해 굉장히 정중하게 '우리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것 뿐입니다. 실례되는 일이라도?'라는 질문을 던졌고,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며 뭐라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1층에 내려와있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웨이는 우리는 절대 수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당당하다는 포즈로 엘리베이터 닫음 버튼을 눌렀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 같은 순수한 아이가 수상한 사람일리 없잖아요'하는 느낌을 풀풀 풍기며 닫히는 문 사이로 웃어보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코믹 영화에 나오는 어설픈 좀도둑 2인조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웨이 : 확실히 어색하긴 했지... 지금.
나 : 그래, 다음번에 이런 상황이 오면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하자.


다음번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11.

응이 언니와 새초미가 머무르는 방의 현관문을 두들겼더니, 응이 언니가 왜 이제야 오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문을 열어줬다.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자신들은 입구에 락이 걸려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며 미안해했다. 우리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아파트 내부는 제법 깔끔했다. 방 2개에 작은 욕실 2개, 깨끗한 부엌이 하나. 그러면서도 가격은 내가 머무는 호텔 가격의 2배 정도인데, 이곳에서 2명이 머무니까 결국 1인당 내가 머무는 호텔 가격에 이런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는 거였다. 확실히 혼자보다는 둘이 좋군. 부럽다.

새초미 : 얼른 이리로 들어와! 상을 차려놨거든.
응이 언니 : 그래, 음식이 식지 않을까 걱정했어.





새초미 : 그렇게 크게 차린 건 없지만...
응이 언니 : 마트에 재료가 별로 없어서 말이지.


겸양을 떠는 둘의 말과는 다르게, 차려져 있는 상은 훌륭한 한식 한차림이었다.

제육볶음, 오이무침, 계란미역(?)국, 그리고 따끈따끈한 쌀밥...

이 같은 대접을 받아본 게 얼마만이더라. 나는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뭘 이렇게까지 차렸냐고 말했다. 솔직히 누가 상차려주는 건 라면뿐이어도 행복한데, 거기에 정성이 들어간 밥과 반찬들이라니... 크으...

나 : 세상에, 결혼하고 친정가서 밥상 받는 기분이에요!
웨이 : 오! 너희 요리 잘하는구나? 냄새가 아주 좋아!


나는 이런 훌륭한 밥상엔 훌륭한 술이 필요하다며 가방에서 와인을 꺼냈다. 멘도사에서 산 '인생 와인'의 마지막 병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두지 못해 맛이 좀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와인의 맛을 본 응이 언니와 새초미는, 세상에 무슨 이런 와인이 존재할 수 있냐며 환호를 질렀다.




웨이는 응이 언니와 새초미가 밥을 하고 내가 술을 꺼내자, 자신은 베풀 게 없어서 민망하다며 이따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응이 언니는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냐고 했지만, 웨이는 확고하게 설거지는 자신의 담당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꺼내어 치즈!

사진을 찍은 뒤엔 흡입!

개인적으론 제육볶음(응이 언니의 작품이었다)의 매콤한 소스가 환상이어서, 양념을 잔뜩 가져와 밥을 비벼먹었다. 웨이는 매운 음식을 잘 못먹는 체질이었는지, 제육볶음을 한번 맛봣다가 계속 와인과 계란미역국을 마시며 입안을 달래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행복한 식사시간 뒤, 웨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가방에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냈다.

내가 꺼낸 건 주말 프리마켓에서 샀던 낡은 일러스트 엽서들이었다. 뭔가 선물을 주고 싶기는 한데, 줄만한 게 엽서밖에 없어서... 하지만 다행히도 다들 기쁘게 엽서를 받아줬다. 응이 언니네와 웨이는 아직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주말을 보내지 않아, 주말 프리마켓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구경한 프리마켓에 대해 묘사한 뒤, 하루 종일 구경해도 모자라니까 단단히 준비하라고 - 같이 갔던 독일인 여자는 구경하다가 중간에 지쳐서 숙소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 일러줬다.




그리고, 마테차.

프리마켓에서 샀던 마테차 컵과 찻잎을 꺼내 우려 마셨다. 물론 아르헨티나 전통식으로 - 빨대를 돌려가며 썼다는 거다 - 마셨다. 하지만 내가 찻잎을 너무 많이 담근 탓이었는지, 차는 굉장히 썼다. 결국 몇 번이나 희석시켜서 마셔야 했다.

새초미 : 근데 이렇게 예쁜 컵도 프리마켓에서 파는 거에요?
나 : 이거 예쁜 축에도 못 들어요! 더 예쁜 컵 많은데, 이걸 입구에서 사버리는 바람에 못 샀어요.
응이 언니 : 나도 이번주에 가서 꼭 사야겠다!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를 하자 웨이는 무슨 말일까 궁금해하며 멀뚱멀뚱 있었다. 아차, 영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새초미와 응이 언니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우리는 웨이를 위해 서로 영어와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한국어로 주석을 덧붙였지만, 웨이는 그걸 보더니 그냥 한국말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라 했다.

그 이후엔 동네 친구집에 온 것처럼 침대에 엎드려 서로 사진 보여주고, 사진 교환하고, 여행 이야기하고... 그랬다.

아, 그러고보니 내 카메라 이야기도 나왔구나.

웨이 : 그거 알아? 드디어 리가 카메라를 도난당했어.
응이 언니 : 뭐라고!? 세상에, 어쩌다가!?
나 : 신호등 기다리려고 서있는데, 누가 가져간 거 같아요.
웨이 : 결국 내가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지. 내가 늘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웨이는 엄마처럼 한숨을 쉬었고, 응이 언니와 새초미는 나보다도 더 발을 동동거리며 말했다.

새초미 :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해!? 여태까지 사진들은 어떡해!
응이 언니 : 너무 속상하겠다! 카메라는 그렇다치고, 사진 다 날라간 거 아냐!
나 : 아, 그게. 때마침 어제 메모리 카드를 교체해서, 사진들은 무사하거든요. 불행 중 다행이죠, 뭐.


둘은 나보고 천운이 함께 했다며 다행이라고 해줬다. 응, 그건 정말 하늘이 도운 거였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12.

어느새 시간이 늦어져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응이 언니와 새초미는 내일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난다는 걸 알고, 즐거운 여행이 되라며 응원해줬다. 특히 새초미는 한국어로 된 아르헨티나 가이드북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내일 이과수에 간다는 걸 듣고는 이과수 페이지를 아무 망설임없이 쭉 찢어서 줬다. 그 이과수 페이지는 이과수 지역을 여행할 때 내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됐다.

그러고보니 응이 언니와 새초미와는 이렇게 만나는게 마지막이다. 아마 앞으로 만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실제로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한 적은 없다. 여행 중에 만난 사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 많이 진부한 표현을 써보자면 - 이 시간, 이 장소의 둘은 언제나 내 추억 속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포스팅을 하며 떠올리는 것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고마운 사람들이 될 테니까. 함께 소고기를 썰고, 탱고쇼를 보고, 홈파티를 했던 이 너무나도 친절하고 착한 여행자들을 나는 아마 평생 기억하게 되겠지.

인사를 계속 하면 눈물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깔깔거리고 웃으며 얼른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둘은 또 밖에까지 나와서 인사를 계속 했다. 아이 참.

새초미 : 이과수 가면 꼭 배는 타봐! 여행 잘 하고!
응이 언니 : 밤 늦었는데 조심히 가고! 웨이, 네가 데려다줘야 해?
웨이 : 당연히 말 안해도 그럴 거야. 굿나잇!
나 : 이제 이 동네도 익숙해서 걱정 안해도 괜찮아요. 얼른 들어가요! 갈게요!






13.

웨이 : 즐거웠다.
나 : 즐거웠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생각나는 사람들이 응이 언니와 새초미라면, 웨이는 어떠려나. 볼리비아 때부터 함께 있었으니, 남미 전반을 그와 함께 다닌 것처럼 느껴진다. 얘랑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우리는 골목길을 지나 대로에 들어섰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 빛나는 오벨리스크.

낮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조용한 7월 9일 거리(Avenida 9 de Julio).

마지막 밤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일주일 내내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마지막 밤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니 더 아련하게 느껴졌다. 항구도시답게 바닷바람이 거리 이곳저곳에 불어왔는데, 그 바람마저도 괜히 분위기가 넘쳐 아름다웠다. 아마도 단단히 콩깍지가 씌인 모양이다. 바람마저도 아름답다니.

근데 옷을 얇게 입은 내게 그 바람은 살짝 서늘했는지, 나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왔다.

나 : 크웨치! 크릉.
웨이 : 크웨치? 이상한 기침소리.


재채기를 하고 코를 훌쩍이는 나에게, 웨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점퍼를 벗어 건네줬다. 아니 뭐, 옷을 달라고 기침을 한 건 아니었는데... 잠시 어쩔까하다가, 호의니까 받았다. 망설이며 받은 것 치곤 굉장히 따뜻해서 포근했는지라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입고 있었다.

마지막. 마지막 밤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자꾸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걷기만 해도 가슴 뛰는 도시, 헤어질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도시. 그 도시의 마지막 밤.

정말인지 여행자라는 사실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여행자는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하니까.

나는 웨이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웨이는 네가 이 도시가 퍽이나 좋았나보다 하며 다행이라는 엄마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얘는 얘 나름대로, 볼리비아에서 내가 찌그러져 있던 모습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이렇게 자기 감정 표현을 하면서 즐겁게 다니는, 어떻게 보면 성장기(?)같은 걸 보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나 : 응 맞아. 나는 이 도시가 너무너무 좋아. 특히 오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더더욱 좋네. 마지막이라 그런가.

너랑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는 말은 오해할 것 같아서 하지 못했지만, 대충 알아들은 것 같았다.





14.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웨이는 끝까지 날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어차피 숙소가 같은 블록에 있으니, 그렇게 마다할 것까진 없었지만.

나 : 즐거웠어. 너랑 여행 중에 만나서 재밌었고. 타이완 가서도 몸 건강하고.
웨이 : 잠깐만, 뭘 헤어지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헤어지는 게 맞지 않나? 오늘이 마지막인데.

웨이 : 너 내일 아침 비행기잖아? 내가 버스 터미널 정도까진 배웅해줄게.
나 : 아니 뭐, 그렇게까지...
웨이 : 혼자 캐리어 끌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걷다간 또 뭐라도 털리면 어떡할려고 그래?


나처럼 주의력이 부족한 아이는 도움이 필요하다나.

나 : 오늘 너랑 같이 있는데도 털렸잖아.
웨이 : 그건! 음...
나 : 내 뒤에 사람이 달라 붙어서 가방을 여는데도 보지 못한 게 누구였더라.
웨이 : 아니... 으음...


진지한 애의 당황한 모습을 보는 건 확실히 재밌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와준다는 사람을 너무 놀려먹어선 안되니까, 네가 도와주면 기쁠거라며 내일 배웅해달라고 부탁했다. 웨이는 알겠다고 하고, 내일 아침에 보자며 자신의 호스텔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허겁지겁 돌아왔다.

웨이 : 완전 잊고 있었어! 내 옷!
나 : 아 ㅋㅋㅋㅋㅋㅋㅋ 여기. 너무 편해서 내 옷인줄 알았네.
웨이 : 그럼 내일 봐!
나 : 응. 내일.





드디어 이과수에 가는 느릿느릿한 여행기는 다음편에 계속!






덧글

  • 키르난 2016/05/15 06:02 # 답글

    그리고 내일..+ㅁ+ 이과수...+ㅁ+
    남미 여행에 대한 낭만이 있다면 그건 이과수일겁니다. 꼭 보고 싶은데 게으름이 도져서 과연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한데.. 뭐, 보고 싶다 생각하면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하. 하여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지막 날은 뭔가 일이 많군요. 글 하나에 담겨 있지만 웨이를 만나 돌아다니고 점심 때 서비스로 화를 내고, 다시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그러다가 카메라...;ㅂ; 그나마 메모리를 어제 바꿔 놓아 다행입니다.;ㅂ;
  • enat 2016/05/16 22:17 #

    이과수! 저번부터 언급하시더니 역시 이과수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계시군요!
    제가 제대로 된 카메라만 있었다면... 더 박진감 넘치는 그 모습을 찍어올 수 있었을텐데...
    하여간 이과수는 진짜 짱입니다. 괜히 세계 3대 폭포가 아니에요. 정말 언젠가는 꼭 가셔서 보시기를 강력추천합니다.
    진짜로 제가 제대로 된 카메라만 있었다면 제대로 촬영을... 아아, 카메라... 카메라!!!!!
  • 라무 2016/05/15 12:19 # 답글

    레콜레타 묘지 묘지치곤 매우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 enat 2016/05/16 22:19 #

    아마 저기 묻히려면 몇억정도는 가볍게 든다고 들었습니다. 각각의 묘도 관만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집처럼 지어놨더라고요. 대부호나 유명인사급만 묻힐 수 있는 공간이라더군요..
  • 11thCTR 2016/05/15 13:11 # 답글

    ㅋㅋㅋ.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웨이가 enat님 글을 읽을 수 있게되면 잦은 '아저씨' 표현에 재미있어 할지도요? ㅋㅋㅋ
    하루하루가 파란만장한 여행인듯요. ㅎ
  • enat 2016/05/16 22:21 #

    왜 자기가 아저씨냐며 그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툴툴거리겠지요 ㅋㅋㅋ 상상이 갑니다.
    하루하루 다사다난한 여행도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
  • 용용 2016/05/17 02:43 # 삭제 답글

    왜 눈물이 날라고 하는 걸까요? ㅠㅠ "그러고보니 응이 언니와 새초미와는 이렇게 만나는게 마지막이다. 아마 앞으로 만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실제로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한 적은 없다. 여행 중에 만난 사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 많이 진부한 표현을 써보자면 - 이 시간, 이 장소의 둘은 언제나 내 추억 속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포스팅을 하며 떠올리는 것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고마운 사람들이 될 테니까. 함께 소고기를 썰고, 탱고쇼를 보고, 홈파티를 했던 이 너무나도 친절하고 착한 여행자들을 나는 아마 평생 기억하게 되겠지.

    인사를 계속 하면 눈물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깔깔거리고 웃으며 얼른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둘은 또 밖에까지 나와서 인사를 계속 했다. 아이 참."

    이낫님이 여행기 책으로 내시면 책갈피로 집어두고 노트에 옮겨 적고 싶어요 ㅠㅡㅠ
  • enat 2016/05/23 13:20 #

    으앙 울지마세요 ㅋㅋㅋ
    음 워낙 게으른지라 과연 여행기를 책으로 낼 수 있을지... ㅋㅋㅋㅋ
    용용님을 위해서라도 나중에 돈벌면 개인 출판사라도 차려야하나 고민하게 되는군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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