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8 20:39

남미여행 (64) 파나마 : 안녕 남미 ├ 남미 배낭여행 (2014)

1.

파나마에서 12시간 경유하는 비행기를 선택했던 과거의 나 덕분에, 나는 피곤해 죽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파나마 운하를 보러가야만 했다. 아주 고맙다, 신나게 여행 계획을 짜던 과거의 나야.

일단은 공항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입국 심사를 받으러 심사장으로 갔는데, 심사관들이 한가하게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뭐야, 이 심사장답지 않은 느긋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는. 나는 으흠, 으흠 소리를 내며 나의 존재를 알렸고, 그걸 들은 한 심사관이 날 돌아보곤 빙그레 웃으며 여권을 달라고 했다. 물론 중남미 슈퍼패스 대한민국 여권이었기에 심사는 10초만에 끝났다.

입국 심사관 : 파나마에 여행 온 거야? 내가 도장 예쁘게 찍어줄게!

그러면서 도장에 잉크를 잔뜩 묻히는 심사관. 아, 아니, 그렇게 잉크를 많이 묻히면 안되는데...

난 말리려고 했으나, 심사관은 그보다 빠르게 도장을 내리눌렀다.

물론 잉크를 잔뜩 묻힌 바람에 예쁘게 찍히기는커녕 여권에 잉크가 잔뜩 번져 엉망이 됐다. 심사관은 내 여권을 보고 헉 소리를 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고, 주위에 있던 다른 심사관들이 무슨 일인가 구경을 왔다가 처참한 꼴이 된 내 여권 페이지를 보곤 그 심사관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심사관은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여권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심사관은 이대로 여권을 접으면 다른 페이지에도 잉크가 묻을 거라며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잉크를 말린 뒤에야 내게 여권을 돌려줬다.

뭐야, 파나마... 뭔 입국심사장이 이래... 나는 처음 보는 심사장의 분위기에 당황해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2.

파나마 공항에서 파나마 운하까진 어떻게 가야할까.

지도를 보니 파나마 운하는 수도인 파나마 시티 근방을 지나고 있었다. 제법 가까워보이길래 일반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올까 하는 생각을 10초 정도 했다가 다음 비행기편에 대한 걱정 2%와 귀찮음 98% 때문에 포기했다. 그냥 속 편하게 공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를 하기로 했다.

투어 정보를 얻기 위해 인포메이션에 갔는데, 너무 이른 시간 탓인지 아무도 없었다. 난 파나마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 결코 탐험정신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 시간을 때웠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막 출근한 인포메이션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직원은 나같은 질문을 하는 여행자들을 많이 봤는지 단번에 답을 해줬다.

직원 : 저~쪽으로 가서 투어 신청하면 돼.

직원 말대로 저~쪽으로 갔더니 눈에 띄는 색의 여행사 조끼를 입은 언니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물어보니 봉고차로 10명 정도가 모여 파나마 운하를 다녀오는 거란다. 가격을 물었는데... 가격... 하아... 기억이 안나... 당시 기억으로는 다른 교통편으로 파나마 운하를 다녀온다고 따져봤을 때 드는 돈과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싼 편은 아니구나 싶은 정도였으며, 또 그렇다고 해서 터무니없이 비싼 편은 아니구나 싶은 정도였으니... 한 60~70불 정도? 하여간 그 정도 가격은 했던 것 같다. 난 여행 중 계속 들고 다니던 자잘한 현금들 - 미국 달러를 탈탈 털어 값을 지불(파나마에선 미달러도 공용화폐)한 뒤, 호객언니의 안내대로 봉고차에 올라탔다.

나처럼 파나마 운하를 보기 위해 몇시간씩 경유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봉고차는 금새 여행자들을 채우곤 공항을 떠났다.




파나마 공항은 바다 위의 섬에 위치해 있다. 해안 도시인 파나마 시티와는 해안 다리로 이어져있다.

그 덕분에 파나마 시티로 가는 동안 병풍처럼 펼쳐진 마천루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스카이 라인이 제법이야.




달리는 차안에서 대충 찍은 빌딩 사진.

사실은... 귀찮아서 멍하니 보다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면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폰카로 대충 한 장 찍고, 또 멍하니 보다가 폰카로 대충 한 장 찍기를 반복했다. 이제 카메라를 훔쳐간 사람의 정강이나 새끼 발가락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도 사라진 것 같다. 막상 카메라가 없는 상태가 길게 지속되자 과거의 나는 왜 그렇게 사진에 집착했나 싶기도 하다. 사진이야 인터넷 찾아보면 많은데 뭐... 사진 찍어서 뭐해... 그냥 구경이나 잘 하자고... 사진이 아니라, 내 눈과 마음에 새기자고...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여행하던 나는, 이 바로 다음날 토론토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디카를 구입했다. 그리고 쿠바 바라데로 리조트를 가기 위해 만났던 동생 떨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디카 없어서 혼났네.

역시 사람은 여행 다닐 때 카메라가 있어야해!





3.

봉고차는 잠시 달리다가 한 공원에 멈춰섰다.




바다가 보이는 공원이었는데, 공원 한가운데에는 탐험가처럼 보이는 동상이 세워져있었다. 저렇게 존재감있게 세워진 상인데 설명을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겠다.

동상의 주인공은 바스코 누네즈 데 발보아 Vasco Nunez de Balboa. 신항로 개척 당시 파나마에 상륙했던 탐험가다. 처음에는 다른 정복가들처럼 파괴와 학살을 자행하다가, 한 인디언 부족의 추장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원주민에게 우호적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그 추장과 모종의 협약이 있었는지, 인간적인 대화를 하고 뉘우친 건지, 남은 자료가 없어서 자세한 건 알려져있지 않다.

나중에는 황금을 찾기 위해 파나마의 밀림에서 고생고생하며 탐험하다가 태평양을 발견한다. 발보아는 태평양이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바다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발견했으니까 단순하게 '남쪽 바다'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까 저 동상은 발보아가 지긋지긋한 밀림에서 벗어나 태평양을 발견했을 때 '으아아 이건 남쪽 바다야아아!'라고 외쳤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공원도 마침 태평양 바로 앞에 있겠다, 매우 적절한 위치 선정이다.

마저 그의 삶을 후술하자면, 태평양 발견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내면 좋겠지만, 파나마 지역의 새 총독은 그의 인기를 시기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발보아와 친했던 원주민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그의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제거해버렸다. 고락을 함께했던 친구와 동료들을 한순간에 잃은 발보아는 그것도 모자라 누명을 쓰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한 사람의 일생을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참 기구하고도 가혹한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보면 인기와 명성, 업적 같은 것들이 세상 사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나 싶다.





4.

해안가에 위치한 파나마 시티의 중심가는 굉장히 깨끗하고 쾌적했다.






과연 파나마 운하의 바로 옆에 있는 도시다웠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부의 축적도 21세기에 들어서의 일이다. 그 전까지 파나마 운하는 미국의 배를 불려주고 있었으니까.

원래 파나마는, 현재 이웃하고 있는 나라인 콜롬비아에 속해있던 주였다. 당시 중남미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머리를 쓰던 미국은, 파나마에 운하를 뚫고 단독으로 많은 이점을 차지하고 싶어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콜롬비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미국은 파나마 주에 있던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에게 파나마 운하 건설권과 운영권, 운하 일대의 군사 주둔권까지 넘겨준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파나마는 자신들의 국토를 관통하는 운하에서 미국이 부를 쌓는 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70년대 후반, 파나마 정부는 미국과의 담판으로 운하를 1999년도 말에 반환받기로 약속한다. 아마 미국은 20년 정도라면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계속해서 기한을 늘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반환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초조해진 미국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운영 기간을 늘리려고 온갖 꼼수를 부렸으나, 1999년 12월 31일, 어떤 연장도 없이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에 반환된다. 2000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운하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자국민들의 배를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다. 파나마 운하는 아직도 유일한 태평양 - 대서양을 잇는 운하로서, 파나마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어주고 있다. (니카라과 운하가 개통된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5.

가이드 : 자, 파나마 운하에 도착이야. 이제 구경하면 돼!

파나마 운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듣다보니 어느새 파나마 운하 전망대였다. 우리는 간단한 소지품만 들고 내렸다. 가이드 말로는 전망대와 전시관이 함께 있다고 했는데, 가격은 15불이니 미리 준비해두라고 했다.

나 : 있잖아, 나 학생인데...
가이드 : 국제학생증 있어? 오! 그럼 10불이야. 잘됐네.


5불을 절약했다! 역시 학생증 만들어두길 잘했어!

가이드 : 아차, 지금 배 들어왔대요! 원래는 전시관을 둘러보고 전망대로 가는데, 전망대 먼저 가자!

이런 행운이! 우리는 앞장 선 가이드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나 : 저 배인가?
가이드 :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눈앞에 배가 있잖아!
나 : 응?


가이드의 말에 따라 시선을 돌려봤다.




나 : 헉.

배는 무지막지하게 컸다. 너무 커서 운하의 부속물이겠지, 하고 무의식 중에 넘어간 건가. 솔직히 저 정도 크기가 움직인다는 건 상상이 잘 안가잖아. 그냥 평범한 빌딩 아니냐고, 저 정도면.










당연하지만 배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덩치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다.

느리게 기어가는 배를 보고 있으니 1분도 지나지 않아 몸이 근질거린다. 배가 떠나면 어쩌나 걱정하며 바삐 전시관까지 올라왔는데, 아마도 우리는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어떤 여행자들은 하품을 하며 사진을 찍다가 전시관을 구경하겠다며 내려갔고, 또 어떤 여행자들은 배는 뒷전으로 하고 수다를 떨거나 딴청을 부리며 놀았다.

그 명성과는 다르게 방문객들에게 취급이 너무한 파나마 운하...

뭐, 사실 나도 좀 지루해져서 와이파이를 잡고 카톡을 했지만...





전시관은 제법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3D 영화관람, 직접 배를 몰아보는 체험, 운하의 역사 등등... 그런 것들이 있긴 했는데 자세히는 기억이 안난다. 방금 흥미로운 게 많았다고 쓰긴 했지만 뭐가 흥미로웠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니 나 자신도 황당하다. 에어컨이 빵빵해서 시원했단 사실은 명확하게 기억나는데. 쩝.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 1층에서 아까 본 배가 여전히 그 자리인 게 보였다.

아마 물이 차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눈 한번 깜빡이고 사진 찍고 돌아섰다.




봉고차로 돌아가는데 희한한 버스를 발견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아까 파나마 운하를 봤던 것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버스 사진을 찍었다. 몇 커트의 인증샷을 찍고 나서야 한 아줌마가 "근데 파나마 운하를 두고 이런 버스 따위와 기념 사진을 찍다니 파나마 운하가 불쌍해!"라고 말해 우리 모두를 웃겼다.





5.

투어라면 당연히 있는 기념품 가게 타임.

봉고차는 원주민 마을처럼 보이는 기념품 가게에 멈춰섰다. 가게에서는 원주민들이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팔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다들 나처럼 여행 말미에 파나마에 들린 건지, 지쳐보이는 표정으로 봉고차에 앉아있기만 했다. 가이드는 쇼핑이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떠냐고 자꾸 권유했으나, 우린 이미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정신줄을 놓은 상태였다.

미안 가이드님... 그러게 운하 보기 전에 기념품 가게에 들렀어야지... Zzzz...




그렇게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녹초가 된 채로 공항으로 돌아가는 우리들.

위 사진은 구름이 그림같아서 찍었다.





공항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다가 본 바다의 잔물결.

희한한 모습이구나 생각하며 공항에 도착했다.





6.

다시 공항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몇 시간만의 출국 심사다. 역시나 별다른 거 없이 그냥 통과했다.

공항에서는 제법 넓은 면세점을 구경했다. 근데 살만한 게 없더라. 아니, 내가 쇼핑할 체력이 되질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힘을 내서 대충 카메라를 파는 가게만 몇군데 골라 돌아다녔는데, 매장에 나와있는건 신제품밖에 없어서 구매는 관뒀다. 신제품을 사서 뭐해. 어차피 또 고장나거나 잃어버릴텐데. 카메라라는 건 그런 거 아냐?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다음날 토론토에서 5만원짜리 캐논 디카를 샀는데 (직원에게 나는 카메라를 고장내거나 잃어버리니까 제일 싼 걸로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쿠바 바라데로 리조트에서 진짜 또 고장나더라.

후후... 그럴 줄 알았어... 카메라라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7.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남미도 이젠 안녕이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기내식을 먹는데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대충 먹고 내버려두니까 눈 깜짝할 새에 쓰레기가 내 앞에서 사라져서 놀랐는데 아마 눈 깜짝할 새라는 건 내 생각일 뿐이고 그저 스튜어디스가 치울 때 졸았던 것뿐일 게다. 하여간 그렇게 비몽사몽한 채로 날아 토론토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을 보니 새벽 1시.

왜 이런 늦은 시간에 도착한 거람.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추운 거람. 난 눈을 부비적거리며 캐리어에서 바람막이를 꺼냈다.

9월 중순의 토론토... 그러고보니 작년 이맘 때에도 쿠바에 다녀와서 아침이 올 때까지 공항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그걸 반복해야하나?

난 와이파이를 연결해 숙소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질 않았다. 작년에도 공항에서 밤을 샜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져서 새벽 3시까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안되겠다. 작년과는 피로도가 너무 다르다. 나는 검색을 하다가 '토론토에 찜질방이 있어요! 완전 한국식 찜질방! 짱좋짱좋!'이라는 글을 발견했고, 일단은 이 찜질방으로 가서 쉬기로 결정했다. 찜질방까지 가는 교통편을 찾아보니 버스를 두어번 정도 갈아타야만 했다. 내가 토론토에서 하루이틀 버스 타보나. 흐흥, 이 정도야 갈아탈 수 있어!

당시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새벽 3시라고. 그냥 공항 호텔을 이용해.


결국 찜질방 찾는데만 2시간이 걸렸잖아. 3시에 출발해서 5시에 들어갔잖아.

나는 그 때 찜질방이라고 하길래 막연하게 한국의 찜질방을 생각했다. 한국 찜질방은 대로에 대문짝만한 간판을 달고 있지 않나. 그래서 당연히 내가 가려는 토론토 찜질방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토론토 찜질방은 골목길에 있으며,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주변은 굉장히 으슥했고, 아스팔트 위로 캐리어 끄는 소리는 너무나 컸다.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매서운지, 너무 추워서 바람막이의 모자를 뒤집어썼다가, 모자를 뒤집어쓰니 주변이 잘 안보여서 다시 모자를 벗고, 다시 추워져서 바람막이의 모자를 뒤집어쓰는 등의 행동을 무슨 의식처럼 반복했다. 캐리어와 여러 가방들은 심하게 거추장스러워서, 괴한이 달려들어도 도망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위험했을 때를 뽑으라면, 그건 저 중남미의 나라들을 돌아다닐 때가 아니라 그 고요한 새벽, 토론토의 으슥한 골목을 누볐던 바로 이 때였다. 그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심지어 핸드폰 배터리는 5%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알량한 핸드폰을 들고 공항에서 캡쳐해둔 파일에만 의지하여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블럭을 잘못봐서 원래대로라면 찜질방이 있어야 할 위치에 철거 예정일 것 같은 빈 건물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걸 봤다.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뭐지? 망한 건가? 찜질방 어딨지? 저기, 찜질방 어딨지? 여기 있어야 되는데, 응? 여기 있어야 되는데!

하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내가 블럭을 잘못 찾아왔다는 걸 깨달아 다시 원래대로 길을 갔다.

얼마 가지 않아 불이 켜진 건물 1층에 한국말로 찜질방이라고 적힌 창문을 발견했다.


진심으로 울 뻔했다.


날씨는 너무 추웠고, 짐 또한 너무 무거웠다. 이제 손에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 손이 아닌 것 같은 손으로 간신히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찾아오는 미친 손님들은 없을테니, 카운터는 비어있었다. 난 저기요! 저기요!를 외쳤고, 곧 당직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나와 뚱하게 결제를 해주고 탈의실 열쇠를 줬다.

난 탈의실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또 살았구나.





8.

뜨끈뜨근한 물에 몸을 담그고, 다시 나와 대충 매트를 깔고 곤히 잠들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아 정말 과거의 내가 불쌍해죽겠다. 왜 나는 찜질방을 갔지? 그 피곤한 몸으로 굳이 토론토 공항에서도 먼 찜질방까지 찾아가 매트 깔고 곤히 잠들다니... 그냥 돈 좀 들여서 호텔가면 될 것을...

추측해본다면 아마 공항에서 비몽사몽간에 정신 못차리고 내가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원한 게 아닐까 싶지만... 뭐 추측뿐이다. 나도 당시의 날 모르겠다.

어쨌든 푹 자고 - 정말 푹 잤다. 그야말로 꿀잠이었다. 쿠스코에서 앵무새가 깨워주던 그 날 아침과 비슷한 수준의 상쾌함을 느꼈다. - 일어나니 이미 오전 10시다. 난 매점에서 여행 중 정말정말 먹고 싶었던 찜질방표 컵라면과 찜질방표 맥반석 계란을 구입했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고 있자니, 그랜드 프레리 식구들이 떠올랐다. 내가 살아서 캐나다에 돌아온 걸 빨리 알려야겠다. 나는 우선 사장님께 전화를 했다.

사장님 : 뭐야.
나 : 사장님! 저 캐나다 왔어요! 살아있어요!
사장님 : 안죽고 돌아왔네? 껄껄.


사장님께 안부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은 나보고 20대 때 할 수 있는 가장 값지고 즐거운 일을 했다며 뭐라뭐라 얘기하셨다. 토론토에서 캐나다 생활 정리하고, 유럽 거쳐서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니까 이제 못보는 거냐며 조심히 한국으로 돌아가란 말씀도 하셨다. 나는 그동안의 생활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냥 그렇게 끝난, 별다를 것 없는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으흑거리며 달걀을 깐 뒤 입에 넣는데 그 때 막 울음이 터졌다. 나는 마치 대길이가 울면서 삶은 달걀을 먹었던 씬처럼 혼자 찜질방 매점석에 앉아 엉엉 울면서 맥반석 계란을 먹었다.




너무 울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겐 안부 전화를 못하겠더라.

그리즐리 삼촌과 특전사 오빠, 그 외 다른 캐나다와 한국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몇 자 돌리다가 피곤해서 다시 잠들었다.





9.

정신을 차려보니 한낮이다. 난 찜질방에서 이보다 더 편한 자세는 없을 것이다 싶은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아아, 끝났구먼. 남미 여행이 끝났구먼.


아까 보내놓은 카톡들에 답이 몇 개 와있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다들 내게 비슷한 질문을 했다. 대충 이런 질문이었다.

친구들 : 여행 중에 혼자라서 힘들지 않았어? 외롭지는 않았고?

음...

어땠더라. 힘들었나? 외로웠나?

뭐, 그렇다. 힘들지 않았다면,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날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대로 힘들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대로 힘들었다. 외로웠냐고? 당연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남미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으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동안 해왔던 어떤 여행보다도 외로웠다.

택시비로 덤터기를 씌우려는 사람도 있었고, 푼돈 뺏는 한인 식당 아줌마도 있었고, 투어를 같이 하는 일행들과 사이가 안좋기도 했고, 아무거나 주워먹다 몸이 아플 때도 있었고, 하수구에 발이 빠지기도 했고, 카메라가 고장나서 새로 샀더니 도난당하기도 했고, 웬 노숙자가 길을 막지 않나 코고는 소리와 이가는 소리에 밤새 뜬눈으로 지새질 않나 근교 마을에 갔다가 폭우를 맞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질 않나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낡은 비행기를 타질 않나 버스를 탔더니 키스하자는 이상한 남자가 있질 않나 짜증나는 일도 잔뜩이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만났을 뿐인데 저렴한 택시를 잡아주는 카지노의 직원들이 있었고, 더 챙겨먹으라며 후식까지 챙겨주는 한인 식당 할아버지도 계셨고, 투어 중에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 자전거로 무모한 도전을 하기도 했고, 눈이 퉁퉁 붓자 밤중에 병원에 데려가준 호스텔 주인이 있었고, 하수구에 발이 빠지자 달려와서 나를 구해준 청년들이 있었고, 카메라가 없는 나를 자신의 카메라로 찍어주던 타이완 여행자가 있었고, 노숙자 때문에 곤란한 날 도와준 멕시코의 상냥한 모자와 밤새 잠을 못자 버스에서 졸던 나에게 마테차를 건네던 사람들과 물에 빠진 생쥐꼴인 나에게 길을 알려주던 동네 사람들과 낡은 비행기를 타고 온 내게 필요한 물품을 골라주던 여행자와 키스하자는 남자를 피해 리우까지 오자 날 환영해주던 호스텔 사람들까지 잔뜩 있었다. 짜증나는 일들보다도 더 많은 즐거운 일들이 있었다. 오히려 힘들고 외로웠기 때문에 더 감사한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힘들지 않았냐,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에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나 : 힘들었어. 외로웠어. 근데, 좋았어.
친구들 : 그게 뭐야 ㅋㅋㅋㅋㅋㅋ


그러게. 그게 뭐람.

하지만 저 단순하고 모순된 말로 내 이번 남미여행을 요약할 수 있겠다.


힘들었다. 외로웠다. 그렇지만 좋았다.





10.




리우에서 날아온 엽서로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저 엽서를 리우로 가는 24시간 버스에서, 여태까지 머물렀던 많은 여행지들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써내렸다. 정말인지 소중한 기억들이 가득한 그 장소, 그 시간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은데, 내가 올라탄 버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 갈 길을 달려가더라. 그 버스가 향한 마지막 도시인 리우조차도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는 계속 여행하고 있으니까.

나는 누워있던 몸을 힘차게 일으켰다. 지난 남미 여행을 돌이켜 보는 것도 여기 찜질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만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일단 내일 떨지를 만나서 쿠바에 가야하고, 그 이후엔 스페인으로 건너가 스페인 여행을 해야한다. 특히 스페인 쪽은 IN OUT만 정해져있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도 세우질 못했으니까, 부지런히 계획을 세워봐야겠지.

다시 한 번 여행할 준비를 하자.

우선은 그렇지, 카메라부터 새로 사러 가야겠다!




여기서 바라데로 리조트 → 스페인 여행으로 이어집니다.






덧글

  • 눈아찌 2016/06/18 21:23 # 삭제 답글

    알고 있다와 경험해 보았다의 차이점은 큰 거죠.
    20대까지의 경험이 나머지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와서 생각하는 거지만요.
  • enat 2016/06/20 20:37 #

    저는 아직 20대여서 느끼지는 못하지만, 이미 20대를 보낸 분들 대부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음,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어느정도 변한 것 같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행전의 나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나 싶기도 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 표출이 될런지는 아직도 모르겠네욤. 지나보면 알 수 있겠죠 아마도?
  • 용용 2016/06/18 22:29 # 삭제 답글

    가 닿을 수 없는 어느 한 지점을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만
    여행자의 향수와는 상관없다는 듯 멈추지 않고 달리는 버스에 올라탄 듯
    그렇게 나는 여행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낫님은 언젠가 꼭 책을 내실 것 같아요

    이번 여행기 읽으면서 덧글로 남기고 싶은 말이 많지만 가장 남기고 싶은말은 "재미있는 여행기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ㅠㅡㅠ 진심으로 감사해요. 실제로 제가 여행한 것은 아니지만 남미 여행 마지막편을 읽다보니까 찜질방에서 계란 드시고 있던 이낫님 마음에 감정이입되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어요.

    이낫님 말씀대로 뉴욕여행기 힘내서 써봐야 겠어요+ㅁ+ 잘 쓸 자신은 없지만요 ㅎㅎㅎㅎ

    이낫님 정말 감사해요!!!! 다시 한 번 여행할 준비 하신후에 카메라 사고나서 시작되는 스페인 편도 +ㅁ+ 기대하고 있을께요!
  • enat 2016/06/20 20:40 #

    괴담집을 꿈꾸고 있긴 하지만 (...)

    언젠가 여행기를 책으로 내는 날이 있으면 좋겠네요! 원고 형식으로 정리를 해본적도 있기는 한데 뭐 출판사에 찔러보려면 개요니 의도니 서류를 잔뜩 작성해야하길래 손을 뗀지 오래긴 하지만요 ㅋㅋㅋㅋㅋ 어쨌든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한걸요. 또 응원덧글도 매번 달아주셔서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몰라요! ㅋㅋㅋㅋ

    스페인편도 차근차근 올려볼게요! 그럼 저는 용용님의 뉴욕여행기를 기대할게요!
  • 11thCTR 2016/06/18 23:11 # 답글

    여행기 책자를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낫님 글에서 정말 진솔함이 느껴진달까. 뭔가 특별한 감성이 녹아있는 것 같아서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시면 여행기 책자 꼭 출판하시길!
    콜랙팅을 좋아하는 관계로 꼭 2권씩 사겠습니다! ㅋㅋㅋㅋ
  • enat 2016/06/20 20:43 #

    다듬지 못한 솔직한 감정표출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출판... 출판하면 정말 좋긴 하겠네요! ㅋㅋㅋㅋ 제 글을 출판해주겠다는 출판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2권은 이미 팔린 것이나 다름 없으니 (!) 감사한 마음으로 있을게요! ㅋㅋㅋㅋㅋ
  • 키르난 2016/06/19 06:27 # 답글

    전 폰카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카메라가 없으면 아마 내내 글줄로만 기록할 겁니다.. 넵.; 보는 사람마다 "아직도?"를 외치는 폴더폰이라지요. 하하하.
    남미의 고층 건물들은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러니까 세련된 이미지와는 다르게 좀 ... 음... 심시티?;;;;; 뜬금없이 땅에 건물 하나가 뚝 서 있다는 느낌..? 복작복작하게 서 있는게 아니라 드문드문, 거기에 차도 많이 없고 휑한 공간이라 느껴서 그런가봐요.
    하여간 고생많으셨습니다. 이모저모 힘들고, 카메라도 잃었고. 하지만 사진은 구했고! 그 다음 여행기를 기다립니다.>ㅅ<


    그리고 덧붙임.; 파나마운하는 강 너비의 엄청난 규모를 생각했는데, 저건 ... 그렇죠. 운하라는게 양쪽 해수면의 높이에 맞춰 조정해야하니 크게 만들게 아니라 각각을 막아서 독 형태로..OTL 그냥 수로죠...;;
  • enat 2016/06/20 20:57 #

    폴!더!폰!
    이 범람하는 정보와 귀찮은 인맥 시대에 차라리 폴더폰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ㅠ ㅋㅋㅋ 저와는 별로 관계도 없는 단체카톡이나 어플 광고 진동소리에 귀찮아진 요즘입니다...
    아마 최근에 지어진 빌딩들은 조망권? 일조권? 인지 뭔지 땜에 저렇게 떨어뜨려서 짓는다고 들은 것 같아요! 비교적 옛날에 지어진 빌딩들은 그런 개념없이 지어서 바로 옆에도 짓고 그렇다네요! 막 발전하는 도시라서 좀 휑한 느낌이 드실거 같기도 해요 ㅋㅋㅋ 우리나라의 송도같은 느낌이려나요.

    쩝... 저도 파나마 운하는 조금 실망적이긴 했어요... ㅋㅋㅋㅋㅋㅋ 뭔가 원피스스러운... 그랜드라인스러운... 그런 웅장한 걸 기대했는데 이게 웬 평범한 수로... 쩝.

    다음 여행기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며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당 :)
  • 2016/06/19 11: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6/20 21: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Tabipero 2016/06/20 22:08 # 답글

    오랫동안 이것저것 겪으셨을 테니 여행의 끝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에 울음이 터져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건 끝을 보셨군요. 꽤나 오랫동안 연재하셨던 것 같은데(카테고리를 보니 1년 반 정도 된 모양이네요) 그동안 (몇몇 건너뛴 에피소드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재미있게 잘 봤고 긴긴 포스팅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정주행 or 역주행 할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 enat 2016/07/03 00:19 #

    움 그런가봐요. 저도 모르게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나이 들면서 눈물이 더 늘었어요 ㅋㅋㅋㅋ

    저... 1년 반이나 연재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 카테고리로 모아서 보니 정말 게으르게 연재한게 티가 나는군요. 느리고 진득한 포스팅 함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할 땐 혼자라서 외로웠는데 같이 읽어주셔서 되새길 땐 외롭지 않았어요! 감사합니다 :)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6/06/21 11:42 # 답글

    :) 즐거운 포스팅들 끝이 아쉬웠지만, 이베리아 반도 포스팅이 남아있다는 즐거움을 가지고ㅎㅎ 다시 정주행을 시작해볼까 해요. 사... 사..... 사탕많이 드세요!!!ㅎㅎㅎ
  • enat 2016/07/03 00:20 #

    사탕!?!?!? 왜째서 해피 할로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느리고 긴 여행 따라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베리아 반도 포스팅은 왠지 더 느려질것만 같은 기분인데 마음을 다잡으며 술술 써보도록 노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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