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0 20:31

이베리아 반도 (0) 들어가기 전에 ├ 이베리아 반도 여행기 (2014)

1.

남미 여행을 마친 나는, 잔뜩 지쳐있던 몸을 이끌고 쿠바 바라데로 리조트에 가서 향락을 즐겼다. 그건 정말 향락이라 말할만한 생활이었다. 쿨쿨 자다가, 배고프면 연회장가서 밥 먹고, 수영장에 가서 칵테일을 마시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쿨쿨 자고, 또 배고프면 밥 먹으러 가고...

시간을 재는 것도 무의미하다. 쿠바 바라데로 리조트에서의 일주일은 빠른듯 느린듯 느낄 것도 없이, 두리뭉실하게 지나갔다. 나는 녹은 아이스크림같은 존재가 되어, 만사태평 무사안일 복지부동한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배낭여행을 해야만하는 처지에 놓였다. 다음 목표는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이다. 다시 몸을 추스리고 긴장감을 가지고 여행을 할 때가 왔는데, 한 번 녹은 아이스크림은 스스로 얼려고 하질 않았다. 한번 피우기 시작한 게으름은 내 행동을 장악해버렸다.

나는 그렇게 게으름의 결정체를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스페인과 포르투갈 일대를 여행했다.

기상시간은 보통 10시. 인터넷에 산재해있는 여행 정보도 알아보려 하지 않고, 적당적당히 다녔다. 멋진 사진을 찍을만한 곳이 있으면 잠깐 반짝하고 기운을 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벤치에 앉아 배를 긁으며 일광욕을 했다. 아마 긴장이 풀린 탓도 클 것이다. 위험하다고 알려진 남미를 떠나 안전하단 인식이 박힌 유럽에 간 거였으니.

결론. 그래서 지금의 나는 굉장히 곤란한 것이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있었던 일들은 기억이 매우매우 희미하단 말이다.

긴장없이 여행했고, 태평하게 생활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진짜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다.

나야, 대체 그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2.

그래도 그 알량한 5만원짜리 똑딱이를 들고 사진은 열심히 찍은 것 같다. 잘 찍은 건 아니고 열심히 찍은 거다. SD카드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이 드럽게 많다. 남미에서 카메라 못들고 다닌 한풀이를 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그냥 도시마다 사진만 몇 장 올리고 끝낼까 싶은 생각도 굴뚝같다. 2년 전의 나는 대체 무얼 하고 다닌 건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쨌든 사진 속의 멋진 곳을 다녔습니다 하하핫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이고, 사진을 보고 글을 쓰다보면 어떻게든 당시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으니 노력해... 보.... 겠..... 슴........ 다..........





3.

우선 일정부터.




리스본 - 마드리드 - 그라나다 - 론다 - 세비야 - 바르셀로나

요런 순이다. 평범하게 짰다.

저렇게 계획을 세우고 여행 다니는데 한국인 여행자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다. 스페인이 원래 한국인들이 많이 여행하는 곳이었던가? 잠시 의문을 가졌던 나는 곧 버저를 울리고 정답을 외쳤다. 내 스페인 여행 루트는 꽃보다 할배에 나왔던 그 루트 그대로였다. 순서가 반대로긴 하지만.

그 탓에 만나는 한국인 여행자들 몇몇은 그런 소리를 했다. 꽃보다 할배 때문에 어딜 가도 한국인들만 있다고. 그래서 여행 온 거 같은 기분도 안들고, 짜증난다고. 하지만 나는 그동안 한국말이 통하는 한국인에 굶주려 있었기에 그 사실이 무진장 고마웠다. 한국인이시네요. 어디서 왔어요. 물론 한국에서 오셨겠죠. 여행 어때요? 즐거워요?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

글을 쓰면서 느낀다. 확실히 써내리기 시작하면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르는구나. 나는 방금 내가 여행중에 한국인 여행자들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자연스럽게 작성한 뒤에 떠올랐다. 우와. 글은 역시 위대하구나. 생각 정리할 땐 역시 글이 짱이구나. 기록의 동물 만만세다.

어쨌든 여행 도중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캐릭터 강한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세비야에서 많이들 만나 우르르 몰려다닌 것 같은데, 그 때의 이야기는 제법 즐겁게 써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오, 세비야에서 있었던 일들도 막 기억나기 시작했다.

계속된 기억복원으로 조금 고무된 기분이다. 왠지 이렇게 쓰다보면 여행 전반을 다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은 리스본부터 시작하니,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부터 차근차근 글을 써봐야겠다.





대항해시대의 그 리스본부터 시작!







덧글

  • 눈아찌 2016/06/20 21:41 # 삭제 답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란 것의 의미가 일상적인 의미와 다른 거라는 걸 문득 고백하고 싶네요...
    일전에 enat님 새글이 올라왔나 보려고 이글루스의 테마를 클릭하는데 '여행' 테마가 아니라 '개그' 테마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탓이 아닙니다.
    enat님 탓입니다.
  • enat 2016/07/01 11:21 #

    아니 왜째서 개그!? 그게 왜째서 제 탓인가요!?
    이게 다 눈아찌님이 개그필터를 끼고 보셔서 그렇습니다.
    제 진중하고도 무게있는 여행기를 개그로 보지 말아주시죠!

    근데 기대하고 계신데 스페인편 생각이 잘 안나요.
    이러다가 그냥 사진만 올려버리고 끝낼지도...
  • 키르난 2016/06/20 21:50 # 답글

    다음편!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근데 저게 꽃할배 루트였군요. 그러고 보니 꽃청춘 루트도 이미 밟으셨더랬지요. 아, 그건 청춘이라기보다는 지나간청춘의 이미지였지만...
  • enat 2016/07/01 11:23 #

    다음편! 다음편...을 쓰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ㅇ<-<
    포스팅 중간저장 속의 제가 리스본 공항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어요.

    ....흐엉....
  • Tabipero 2016/06/20 22:12 # 답글

    제가 스페인에 갔을 때는 꽃할배를 보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곳곳에서 한국사람을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터키에 갔을 때 한국인지 외국인지 분간 안 되었습니다. 코스가 뻔하니까 이스탄불에서 본 사람들을 파묵칼레에서도 보고, 카파도키아에서도 보고...

    여행의 시작이 리스본인 건 대서양으로부터 와서인가요? 아무래도 동쪽에서 출발하게 되면 바르셀로나부터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더군요 ㅎㅎ
  • enat 2016/07/01 11:30 #

    꽃할배 이전엔 곳곳에서 보셨었을텐데 꽃할배 이후엔 어디서든 보실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소도시 론다에 갔었는데 저도 거기가 한국인 마을인 줄 알았어요 ㅋㅋ

    터키도 비슷한 상황이군요.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인이라고 표현해야할지...
    뭐, 요새는 중국인들이 더 많아졌다고들 하는 것 같지만요 ㅋㅋ

    아,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와서 리스본에서 시작했습니다.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제가 왔던 루트의 반대로 가더군요 ㅋㅋㅋ
  • 바이올레타 2016/06/20 22:51 # 삭제 답글

    방송의 영향이란게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꽃누나의 영향인지 저도 크로아티아에서 현지 택시 기사에게 "요즘 한국 사람이 많이 오던데 무슨일 있냐?"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ㅋㅋㅋㅋㅋ 실제 제가 여행했던 시기는 한겨울이라 그렇게 바글바글할(?)정도는 아니었지만, 길거리나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이 꽤 됐어요. 이전보다 정보나 후기도 확실히 많고...
    여유있게 지내다보면 행동패턴이 단순해지니까요 ㅋㅋㅋㅋ 그래도 사진 또한 기록인지라, 쓰시다 보면 많이 기억나시지 않을까요..! 다음 여행지로 점찍어둔 곳이 이베리아 반도라, 이낫님의 재밌는 이야기 이번에도 기대하겠습니다. +▽+
  • enat 2016/07/01 11:35 #

    확실히 꽃시리즈가 여행계에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최근의 아프리카편이 나간 이후엔 꽃청춘에 나온 루트 그대로의 투어도 많이 생겼다더군요. 라오스도 여행사가 많이 생겼다고들 하고요 ㅋㅋㅋ
    크로아티아 현지 택시기사가 느낄 정도라니 알만하군요. 꽃시리즈의 여행뽐뿌 엄청나...
    으음... 제 여행기는... 사진을 보면서 떠올리려고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점점 여행기가 아닌 수사일지를 쓰는 듯한 기분이... 생각이 안나는 건 아닌데 뭔가 한번 딱! 꽂히지를 못하니 계속 미루고 있네욤. 어떻게든 시간내서 써보기는 하겠슴다! ㅋㅋㅋㅋ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6/06/21 11:41 # 답글

    저도 스페인 가고싶어요ㅠㅠ 바르셀로나 뜨거운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늘어져있다가 피카소 미술관들어가서 벨라스케스 덕질하는 성공한 덕후의 인상도 다시 보고 싶고ㅠㅠ 샹그리아랑 타파스랑 줄창 먹고도 싶고... 얼마전에 화이트 와인 칠링해서 테라스 나가서 마시면서 수다 떨다가 아 스페인 ㅠㅠㅠ하고 울었는데 여행기로 그 마음이 다시 더해질것 같아요. 글 기다릴게요!!!
  • enat 2016/07/01 11:37 #

    덧글에서 스페인을 향한 엄청난 욕망이 쏟아져내리는데요 ㅋㅋㅋㅋㅋㅋ 울지마세욬ㅋㅋㅋㅋㅋㅋㅋ
    스페인 하면 뜨겁고 강렬하고 막 태양!!! 열정!!! 이런 느낌인데 어째 제가 갔을 땐 비도 많이 오고 날도 많이 흐리고 바람막이 필요하고 막 그래서 여기가 스페인인가 하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어요 ㅋㅋㅋㅋㅋ 아, 물론 바르셀로나 빼고요. 바르셀로나는 머무는 내내 맑은 날씨였던 것 같아요. 근데 바르셀로나가 마지막 도시라 제법 나중에 쓰여지겠...군요ㅠㅋㅋ 기... 기다려주세요...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6/07/01 14:34 #

    찬찬히 써주세요ㅋㅋㅋ 글 보면 당장 비행기부터 결제하게 될지도 몰라서 손이 드릉드릉해요......ㅋㅋㅋ 스페인을 향한 욕망이 막막막 보이시죠 제가 이렇게 검은 속이고 막 음?ㅋㅋㅋㅋㅋㅋ
  • enat 2016/07/03 00:16 #

    아니 왜째서 검은속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손이 드릉드릉하는 그 기분 크 가슴 울렁거리고 막 그런 기분 왠지 알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런 기분을 스페인 옆동네인 이탈리아에 할애하고 있어서!!! 크 근데 천천히 쓰라고 하시면 가뜩이나 느린 포스팅 더 느으려어어지일지도오오몰라아아아요오오오
  • Rondo 2016/06/21 14:56 # 삭제 답글

    남미편 열심히 보고 이 포스팅으로 넘어왔음요! 기대할께요!!! enat님 한메일로 팬레터(?) 보냈어요ㅋㅋㅋ 스팸으로 들어 갔을 수도....
  • enat 2016/07/01 11:38 #

    메일 잘 받았어요!! 스팸으로 들어가진 않았습니다ㅠㅠ!!!
    덧글로 한줄만 남겨주셔도 감사한데 또 일부러 장문의 메일을 보내주시다니 감개무량합니당. 감사합니다!

    포스팅... 스페인 포스팅...
    얼른... 얼른 할게요! ㅋㅋㅋㅋㅋ
  • 용용 2016/07/01 04:22 # 삭제 답글

    정말 인간은 기록의 동물인것 같아요!!
    여행 끝나고 회사일로 정신없어서 어딜 다녀왔는지 여운도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졌었는데 메모장에 뉴욕 다녀온 거 끄적이면서 하나하나 선명하게 생각 나더라구요! +ㅁ+
    깨알같은 에피소드나 스쳐갔던 사람들 기록하면서 뭔가 아련해지곤했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낫님의 기억복원이 수월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당+ㅁ+!!
  • enat 2016/07/01 11:42 #

    키야 역시 글이라는 건 대단한 것 같아요. 뉴욕여행 기억 복원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계시다니 다행이군요!!
    으으 기억 때문에 괴로운 저도 일단 메모장에 짤막짤막하게라도 적어볼까봐요. 그러다보면 왠지 가이드라인이 잡힐 것 같아요!
    응원 감사합니당. 조금씩 써볼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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