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7 22:59

베네치아 (11) 쓸쓸한 도르소두로 ├ 베네치아 일주일 (2014)

1.

베네치아 본섬은 운하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산 폴로, 카나레지오, 도르소두로, 산 마르코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오늘 가볼 지역은 도르소두로Dorsoduro라는 지역이다.




베네치아 본섬의 남쪽 끝에 위치한 도르소두로에 가기 위해, 나는 영수증과 직원의 싸인이 달린 ACTV 카드를 들고 쭈뼛거리며 2번 바포레또에 탑승했다.

참고로 2번 바포레토는 베네치아의 대운하를 지나는 수상버스 중 하나로, 대운하를 지나는 다른 바포레또로는 1번 바포레또가 있다. 1번은 모든 정거장에 정차하는 완행, 2번은 주요 정거장만 정차하는 급행이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2번 바포레또는 흐린 하늘 아래에서 차가운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대운하를 따라 흘러갔다. 나는 오늘 아침에 구입한 긴팔 티셔츠를 쓰다듬으며 이거라도 입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리알토 다리는 대운하를 건너는 많은 다리 중 최초로 지어진 석조 다리다.

2번 바포레토를 타고 이 리알토 다리를 지날 땐 감회가 남달랐다. 예전에 유럽여행을 하면서 베네치아에 왔을 때 리알토 다리를 건너보기만 했지 전체샷을 찍지는 못해 아쉬웠었는데, 그 아쉬움을 오늘에야 풀고 가는구나 싶어서였다.

여태까지 베네치아에 와서 이전에 못해서 아쉬웠던 경험들을 리스트에 적어두고 하나씩 지워갔었다. 예를 들면 무라노 섬에서 유리공예 보는 거라던가, 본섬에서 자보는 거라던가, 산 미켈레 섬에 가보는 거라던가...

오늘은 '배를 타고 대운하를 따라가며 리알토 다리를 구경하는 거'라는 긴 항목을 리스트에서 지울 수 있었다. 흐흐.

이런 사소한 아쉬움들을 하나하나 보충할 때마다 못다한 게임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것 같아 즐겁다.





어느새 2번 바포레또는 도르소두로 지역의 아카데미아 바포레토 정류장에 정차했다. 나는 하도 바람을 맞아 얼얼한 얼굴을 손으로 부비적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2.

배에서 내린 나는, 정류장 바로 앞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찾은 학생 단체 관람객들에 어디다가 발을 디뎌야할지 망연해했다. 그 미술관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넘쳐나는 경주 천마총 혹은 불국사 상태였다. 나는 인파를 뚫고 미술관 뒷쪽 골목길로 피신했다. 원래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릴까 말까 꽤 고민을 했었는데, 고민을 해결해줘서 고맙구나, 얘들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뒷쪽은 굉장히 조용했다. 처음엔 인적이 드물어 좋다 생각했지만 점점 고요하다 못해 스산하단 느낌이 들게 됐다. 뭐야 이 지역의 인구밀도 불균형. 넘나 심각하잖아.

나는 조용한 도르소두로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들락날락거리다가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발견했다. 이 곳에 관한 포스팅은 저번에 했으니까 링크 남기고 패스.

링크 : http://enatubosi.egloos.com/1911852





3.

페기 컬렉션을 나온 뒤, 또 이 골목 저 골목 정처없이 걷다가 도르소두로의 끄트머리까지 이동했다.




도르소두로의 끄트머리에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이 있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 의회에서는 흑사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새 성당을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신의 가호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그냥 잠잠해질 때가 됐을지, 하여간 흑사병의 공포는 베네치아를 떠났고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로부터 몇 십년 뒤, 의회에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당을 세운다. 그 성당이 바로 이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담겨있어서 그런지 성당은 베네치아에 지어진 다른 성당들과 비교했을 때 특히 더 아름답고 거대하게 지어졌다. 그 위풍당당하면서도 정교한 외관 때문에, 이 성당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바포레또를 타고 여길 스쳐지나가기라도 하면 꼭 카메라를 꺼내든다.




성당 앞에서는 산 마르코 광장의 대종루가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 앞에 앉거나 서서 대종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폼잡고 한 장 찍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큰 돔과 작은 돔, 이렇게 두 개의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팔각형의 큰 돔이 여행자들을 맞이해준다. 이 성당 중앙의 큰 돔은 성모의 자궁을 상징한다고 한다. 돔의 중앙쪽은 울타리를 쳐서 갈 수 없으며, 바깥쪽으로 둘러서 다녀야 한다.




살루테 성당은 무료 개방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산 마르코 성당에 비하면 굉장히 한가했다.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붐비는 베네치아에서 무료 관광지가 이토록 조용하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성당을 거닐었다.




큰 돔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돔의 공간이 나온다.

작은 돔 아래에는 의자들이 깔려있는데, 아마 성당을 찾은 신도들을 위한 자리 같았다.

사진에 보이는 조각상 뒷쪽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데, 정해진 시간마다 오르간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마침 연주 시간대에 찾아갔는지라 운좋게도 오르간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예전에 음악의 도시 편에서 올렸던 동영상. 다시 올려본다.




확실히 BGM이 깔리냐 안깔리냐의 차이는 크다. 나는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아까는 휘적휘적 대충 구경했던 아름다운 조각상과 제단, 그림 등을 감격에 젖어 감상했다. 성스러운 브금의 효과는 대단하군.





4.

성당에서 나와 섬 끝으로 갔다.

섬 끝에는 알 수 없는 길다란 건물이 있었는데, 뭔가 공사장 냄새도 나고 천막 같은 걸로 가려져 있어서 "뭐야?"하고 지나갔었다. 알고보니 그 건물은 옛날에 세관 건물로 쓰이던 '도가나'라는 곳이라고 하더라.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해서 쓰이고 있다는데, 아마도 내가 갔을 땐 보수 공사라던가 리모델링 따위를 하고 있었나보다.

사진을 보니 건물 내부도 제법 멋지던데 못보고 와서 아쉽다.




도가나의 기둥 중 바다를 향해 나있던 기둥. 기둥 왼편으로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이 보인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니 사람이 나밖에 없길래 똥폼 잡고 한 장 찍었다. 흠흠... 좀 고독해 보이는 여행자 같으려나.





5.

그 외 고독한 척 하는 여행자가 본 고독한 베네치아의 풍경들을 올려본다.

나는 컨셉이었지만 베네치아는 정말 고독해보였다. 베네치아는 일년 내내 사람들로 붐비는 활기찬 도시가 아니었던가?

예전에 가이드북에서 "베네치아, 그 중에서도 도르소두로는 구경거리도 많고 의미있는 공간도 많은 곳이지롱^^ 그래서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롱 ^^" 따위의 글을 읽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갔을 땐 전혀 아니었다. 여기서 본 인파래봤자... 기껏해야 아까 아카데미아 미술관 앞의 단체 학생 손님 정도? 이 날 날씨가 워낙 흐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도르소두로에서 본 풍경들은 우울하고 느릿한 음악이 어울리는 풍경들 뿐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저녁이다. 오늘 충분히 걸어다녔으니 바로 숙소로 가서 쉴까 했지만, 이 쓸쓸한 풍경들을 오늘 하루의 마지막 풍경으로 하고 싶기는 않았기에, 딱 한가지만 더 보고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도르소두로의 자테레Zattere 정류장에서 산 조르조 마조레 섬으로 가는 바포레또에 탑승했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섬에서 계속!






덧글

  • 紅桜 2016/11/08 01:06 # 답글

    이낫님은 언제나 필체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ㅠㅠ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ㅋㅋㅋㅋㅋ

    마냥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 뿐만 아니라 고독하고 어둑어둑한 분위기의 여행지도 좋죠. 그런 곳에서는 글이 잘 써질 것 같네요! ㅋㅋㅋ
  • enat 2016/11/10 11:40 #

    감사합니당. 최대한 그 때처럼 쓸려고 노력합니당 ㅋㅋㅋ

    고독하고 어둑어둑한데다가 플러스 추웠어요 ㅠㅠ
    바람막이를 들고 나갔어야 했는데 찬 바닷바람에 정신이 얼얼해졌었네요 ㅋㅋㅋ
  • 존평씨 2016/11/08 16:56 # 답글

    기둥에 기대어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enat님 모습...

    낭만적이면서 뭔가... 배고파 보여요.
  • enat 2016/11/10 11:44 #

    .............!!!!!!

    그러고보니 저 때 배고팠어요.... 컵라면 먹고 싶었어요....
    http://www.egloos.com/egloo_logo.php?slt=1&imgsrc=http://pds26.egloos.com/pds/201611/10/08/b0103808_5823decd36ce1.jpg#
  • 존평씨 2016/11/10 12:26 #

    좋은 광고다!!!!!
    축하합니다.
    곧 농심에 취직되겠군요.
  • enat 2016/11/11 20:58 #

    이런 사진으로 취직된다면 지금부터 구글 로고만 미친듯이 합성합니다
  • 에스j 2016/11/09 02:10 # 답글

    분위기도, 사진에 찍힌 모습도 쉬크하군요. 게임으로만 접해본 베네치아... 언젠가는 가보리!!
  • enat 2016/11/10 11:47 #

    아련아련하고 예쁜 도시에요! 베네치아, 프라하, 로마 등등의 도시들은 언제나 추천해드립니다 ㅠㅠ 크 또 가고 싶어라...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6/11/10 11:06 # 답글

    맞아요. 저도 베네치아의 인파에 치이고 치이다가, 그날 저녁에 우연히 내려서 보았던 이 성당 앞의 서늘함을 잊지 못해요. 뭔가 쓸쓸한 풍경... 유럽의 응접실이라던 산마르코 광장에서 그토록 가까운데, 활기찬 비발디의 연주도 저 멀리 사그러들고 이 곳은 엄청나게 고요하고... 사람들도 듬성듬성 서있고.......... 물 위로 지던 노을이 너무 이뻐서, 괜히 서글펐던 기억이 나네요.
  • enat 2016/11/10 11:49 #

    아 덧글 묘사가 넘 아름다워서 상상했네요.
    저는 저 날 날씨가 흐려서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원래 인적이 조금 드문 편이긴 한가보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산 마르코가 코앞인데도 말예요! 주변에서 베네치아에 다녀온다 하면 도르소두로의 살루테 성당은 꼭 추천해줘야겠어요!!!
  • 용용 2016/11/16 01:19 # 삭제 답글

    고독한 느낌도 좋은데요??!!! 날씨 흐릴때 사진 찍기 정말 힘든데ㅠ 이낫님은 고독한 느낌을 담아 멋진 사진을 찍으셨군요+ㅁ+ 예술로 고독을 승화하기 ㅋㅋㅋㅋ 라고 하면 너무 오글거리나요??? 이탈리아 여행기 읽을수록 가고픈 마음이 솟구쳐요ㅠ!
  • enat 2016/11/16 22:05 #

    보정도 한몫 했습니다! 흐린 날씨의 사진도 포느님의 손이 닿으면 봐줄만해지죠...
    고... 고독한 느낌... ㅋㅋㅋㅋㅋㅋ 사실 저날 화장이 이상해서 사진도 이상해가지고 뒷모습만 계속 찍었던거긴 한데 그게 또 이렇게 고독을 씹는 여행자가 됐네요 ㅋㅋㅋㅋㅋㅋ
    이탈리아는 저도 진짜 다시 가고 싶은 나라 중 하난데 요새 지진이 잦아서 조금 무섭기도 하고 안타깝고 막 그러네요 흑흑...
  • 또이 2016/11/21 17:04 # 삭제 답글

    몇분이서 같이 다니시는건지요???
    혼자 찍으신 ( 얼굴은 왜 ?? ㅎㅎ;; ) 사진이 많아 보여서... 저는 남자인데도 혼자선 못다니겟던데요 ㅎㅎ;;
    암튼 enat님 포스트 읽는게 요즘 낚이 되버렷네요... 못가는 설움을 enat님 포스트로 대신 +_+;;;;
    잘보고 가구여,, 아직 못다읽은건 내일로 ㅎㅎ;;;
  • enat 2016/11/21 21:25 #

    혼자 다닙니다 'ㅂ' 저는 버릇이 됐는지라 혼자가 편합니다 ㅋㅋ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요새는 여행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옛날 사진 들추며 즐거워하고 있네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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