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4 13:15

강릉 여행 (2) 오죽헌 ├ 중부지방

1.

전혀 그럴만한 포스팅이 아닌데 이전 포스팅에서 덧글로 많이들 기대해주셔서 상당히 깊은 고민의 늪에 빠졌다. 큰일났다. 강릉에서 별 일 없었는데. 그냥 강릉 다녀온 이야긴데. 어떡하지. 이번 여행을 요약하면 1) 강릉에 갔다 2) 우와 강릉! 3) 안녕 강릉 인데. 뭐 재밌는 일... 없었나? 누가 나한테 시비걸거나 사기치지 않았나? 으으... 없어... 없다구...

...

별 일 없었으니까 질질 끌지말고 하루빨리 포스팅으로 털어야(?)겠다.

다음 포스팅 갑니다.


라고 써두고 바로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회식 땜에 밀려서 이제야 씁니당. 씨부럴... 회식 싫어...





2.

버스 정류장에서 길을 건너 오죽헌으로 향했다.




오죽헌의 위치를 알려주는 조형물에는 "세계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라는 말이 써있었다.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세계최초 타이틀이었는지라 피식 웃고 지나쳤다.

그나저나 저 조형물, 어쩐지 수면 위로 나온 상어의 대가리 같은 느낌이다. 동해를 앞에 둔 도시답군.




매표소에서 잠시 줄을 섰다가 3000원을 내고 표를 획득했다.

강릉 시민은 평소엔 할인, 일요일엔 무료입장이라는 혜택을 받을 수 있더라. 내 뒤에 서있던 분들은 강릉 분들이었는지, 그 할인혜택 문구를 본 뒤 "아이고 내일(일요일) 올 걸, 괜히 오늘(토요일) 왔네"하는 탄식을 내뱉으셨다. 그러다가 곧 그래도 반은 할인 되서 좋다며 만족하시더라. 음, 이해한다. 예상치 못한 할인은 액수가 어쨌건간에 사람을 기쁘게 만든다.

인천토박이이자 아이도 노인도 아닌 나는, 요일이 어쨌든간에 3000원을 내고 표를 사야만 했다. 할인 받아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뒷분들을 보며, 난 인천에 있는 섬에 갈 때 뱃삯이 할인되니까 괜찮아! 따위로 자신을 위로했다.

오죽헌은 생각보다 부지가 넓었다. 신사임당과 이이 율곡의 생가는 매표소에서 어느정도 걸어가야만 했다. 그 넓은 부지에는 생가 말고도 정원, 시립박물관, 기념품점 등의 건물이 있었다. 생가부터 먼저 둘러볼까 생각하며 그쪽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구석 한편에 금방 막 지은 듯한 희한한 구조물이 보였다. 




이영애와 송승헌의 손도장. 사임당 드라마 촬영 기념으로 만든 건가 보다.

요새 드라마를 하도 안봐서, 그 드라마에 신사임당이 나온다는 것 빼고는 관련 내용을 아무것도 모른다. 사실 아직 그 유명한 도깨비도 이제 막 보기 시작함. OST 좋아서 맨날 돌려듣곤 했었는데 정작 드라마는 볼 시간이 엄슴. 짬내서 몰아볼 거니까 스포 금지요. 공유 왤케 잘생겼지. 아직 1화 2화밖에 안봤는데 공유의 잘생김이 머릿속에 떠다님. 하아...

...? 너무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다. 다시 여행으로 돌아와서.

사진 아래쪽에 살짝 보이는 그림자는 새로 산 보급형 핸드폰으로 열정을 담아 사진을 찍는 한국인 관광객(2X)의 그림자이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다.




입구에서 이런저런 볼거리들을 지나 신사임당과 이이 율곡이 살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된 건 이이 율곡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사당 건물과 그 옆에 운치있게 드리운 소나무, 뒷배경으로 적절하게 깔린 하늘과 나무들이 제법 그림 같아, 입구에 서서 사진을 찍어봤다.

사진 찍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보니 어린 이이 율곡 선생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똘망똘망하게 생긴 아이가 모델워킹을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린나이에 벌써부터 워킹하는 모습이 남다르구만. 부모님 카톡을 안다면 이 사진을 보내주고 싶다.




사당을 바라보고 왼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5000원짜리 지폐에 새겨져있는 '오죽헌'이다. 의미있는 건물이 나왔으니 한 템포 쉬고 다들 아실만한 위인 이야기로 넘어가보겠다.





3.

현모양처라는 타이틀에 가려져있으나 실상은 천재 엄친딸이었던, 조선시대 여류화가 신사임당. 그녀의 친정은 여기 강릉이었다.




신사임당은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본 아버지 덕에, 넉넉한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또한 출가 후에도 아버지의 신중한 신랑감 고르기 - 너무 잘난 집안이면 시집살이 할 거고 너무 못난 집안이면 먹고 사느라고 그림 한 장 못그릴테고 중간 정도가 좋겠구나 -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에서 모범적인 현모양처라 추앙받던 그녀였지만, 실제 그녀의 삶은 아내라면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게 당연하다는 당시의 성리학적 질서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는 게 재미있다.

출가 후, 신사임당은 시집인 서울과 친정집인 오죽헌을 오가며 자식들을 기르게 되는데, 그 자식들은 신사임당의 유전자 때문인지 오죽헌의 정기 때문인지 하나같이 똑똑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 그 중에서도 조선 역사에 한 획을 쓴 아들이 있었다. 어찌나 대단한 아들이었는지 태몽마저 신이로웠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오죽헌이라는 별당이 등장하는 것이다.




오죽헌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방을 보면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한자 그대로 용꿈을 꾼 방이라는 뜻이다. 신사임당이 셋째 아들을 가졌을 때 이 몽룡실에서 검은 용이 날아드는 꿈을 꾸었고, 그 이후 아들을 출산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이이 율곡이다.

사실 이 오죽헌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문화재로서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오죽헌이 '여류화가 신사임당의 생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자 이이 율곡의 생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존경받을만 했지만, 이이 율곡이 주목받았던 것에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조선 중반부터 실권을 잡았던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이이 율곡은 자신의 문파에 속한 후대들에게 그에 걸맞는 인생 후보정(?)을 받게 되어 유학자들의 한없는 존경을 받게 되었고, 이이 율곡과 더불어 신사임당 역시 그들의 입맛 - 타 여성의 귀감이 되는 순종적인 현모양처 - 대로 포장되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역사는 승리자들의 것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4.

오죽헌 별당 뒷쪽에는 매화 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그 매화는 신사임당과 이이 율곡이 직접 가꾼 나무라고 전해진다.





매화에 물을 주거나 가지치기를 하는, 혹은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화폐모자의 소박한 한 때를 상상하려 애써보았다. 꽃이 피어있었다면 상상하기 더 쉬웠을텐데.




요 나무는 매화 맞은편에 있는 나문데 수령이 600년이나 된 배롱나무라고 한다. 이 역시 신사임당과 이이 율곡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나무 되시겠다.




나무 사진들을 올리는 김에 오죽 사진도 올려본다. 사진 왼쪽에 있는 대나무는 줄기가 얇아서 티는 잘 안나지만 검은 대나무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시커먼 대나무들이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이곳에 오죽헌이란 이름이 붙었다.

보다 또렷하게 나온 오죽들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가 마음에 안들어서 지우고 다시 찍으려했는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와서 까먹고 못찍었다. 대체 누가 전화를 걸었길래 까만 대나무 찍는 것도 까먹은 것인가. 그 전화의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5.

오죽헌 별당에서 문을 지나 건너가면 안채와 사랑채가 나온다.




햇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잔잔하니 따뜻하고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나무들도 멋지고 하여간 집터 참 좋다.

이런 좋은 환경 속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고, 또 당시의 다른 여자들에 비해 자유로운 운신 속에서 친정을 오가며 육아를 할 수 있었던 신사임당이었지만, 그녀라고 마음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정신적 고통은 남편의 외도로 시작됐다.

남편이 만난 여자는 주막집 여성이었다. 신사임당은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리고, 여자로써의 질투보다도 아이들의 교육과 유교의 예법을 근거로 들어 남편의 외도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남편은 끝끝내 그 주막집 여성을 첩으로 맞이했고, 신사임당 사후에는 아내로 들이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이이 율곡은 그 문제로 아버지와 크게 싸우기도 했다.

어쩌면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머리가 비상하고 완벽했던 자신의 아내에게 열등감이 있지는 않았을까 싶다. 처가살이를 하며 자존심에 상처 입었을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거기에 태어난 자식들마저 하나같이 아내처럼 천재들이니 얼마나 소외당하는 기분이었을까. 뭐 남편쪽을 이해하라면 이해할수야 있겠지만서도, 내 일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거지 실제로 당한 신사임당은 얼마나 기막히고 슬펐을까 싶다.




생가를 쭉 둘러보고 나오며 생각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남편감이었다는데 결국은 그런 결말이었다. 배우자를 고르는 일은 정말인지 어려운 일이구만.





6.

생가에서 박물관 쪽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에서 이것저것 봤는데 사진을 안찍어둬서 기억이 안난당. 기억나는 건 오히려 박물관 옆에 있던 기념품점이었다. 신사임당 그림을 이용한 예쁜 소품들이 많아 계속 구경하다가 엽서와 노트를 사버렸다. 엽서는 미니미니 선물로 줘버렸고 노트는 요새 들고다니며 이것저것 그림 그리는데 써먹고 있다. 매우 흡족함.




기념품까지 건지고 나오는 길. 출입구 쪽에 위치한 정원에 들렀다.

멀리서 몽글몽글하고 하얀 무언가가 있길래 설마하고 들린 거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매화가 맞았다. 이 때가 3월 첫째주였는데, 평균 개화시기보다 살짝 빠르게 피어난 녀석들이 있었다. 아직 바람이 찬데, 좋다고 나와서 뭐하는 거야.

미니미니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공유가 왔다 갔나보네"라고 했다. 뭐야. 나 아직 도깨비 안봤어. 뭔진 모르겠는데 스포하지마!






하여간 오죽헌 구경의 마무리는 꽃놀이였다. 나는 봄바람을 흥얼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안목해변에서 계속!






덧글

  • 2017/03/14 13:3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enat 2017/03/14 14:20 #

    ㅠㅠ 정말 아름다운 곳 가시는군요 ㅠㅠㅠㅠ 진짜 가고 싶었던 곳인데 제가 갔을 땐 그쪽이 겨울이라 가질 못했었거든요 ㅠㅠㅠㅠㅠㅠ 캬아아 도움 드린 것도 없는데 도움 받았다 하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당. 즐거운 여행 되시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덧글 감사합니다 :)
  • LionHeart 2017/03/14 17:13 # 답글

    신사임당과 이이에 대한 소개 및 개인적인 감상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전 오죽헌은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어서,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보게되어 좋네요.

    매화꽃 사진도 정말 이뻐서, 저도 꽃 사진 촬영 출사라도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강릉은 늘 근처 스키장 갈 때만 방문하고 여행으로는 가본 적이 없기에 다음 이야기도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
  • enat 2017/03/16 07:49 #

    오죽헌은 봄이 한창일 때 가시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입구쪽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팻말을 보니 신사임당 그림과 비슷하게 가꾸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갔을 땐 흙더미만 있았는지라 ㅠ 제대로 가꿔진 걸 상상하니 또 한번 가고싶어지네요 ㅋㅋㅋ

    저는 오히려 스키장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어서 @.@ 스키장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눈이 많으려나...
  • 지나가다 2017/03/14 21:39 # 삭제 답글

    사임당 드라마가 잘되었으면
    저게 관광에 +몇강쯤 되었을텐데말이죠
    모래시계나 겨울연가 촬영지처럼요
    안타깝게도 드라마가 망한듯 ㅋ
  • enat 2017/03/16 07:53 #

    드라마가 잘 안됐나보죠? 하긴 강릉에 관한 기사를 찾아봐도 도깨비 얘기만 나오고 사임당은 거의 못본 것 같군요. 저런저런...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7/03/16 10:59 # 답글

    와 꽃 엄청 예쁘네요. 저는 이낫님 여행기는 ㅋㅋ 별다른 이야기 없어도 상어 머리가 튀어나온 듯한 조형물 이런 감상 읽는 재미로 봅니당:) 많이많이 써주세요 공유 잘생겼죠...
  • enat 2017/03/16 21:27 #

    잌ㅋㅋㅋㅋㅋ 제 여행기의 포인트는 상어 머리가 튀어나온 듯한 조형물 뭐 이런 거였군요 ㅋㅋㅋㅋㅋ 뭔가 부담없이 쓸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
    공유 진짜 왤케 잘생겼죠... 도깨비 초반 보는데 넘 좋네요 흐
  • 용용 2017/03/21 00:34 # 삭제 답글

    대박대박 포스팅 폭풍 업데이트!!!!!!!!

    오죽헌! 뭔가 어렴풋이만 알았는데ㅠㅠ 신사임당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잘 몰랐어요..
    원수같은 남편이네요 정말 ㅠㅠ 에휴... 모든걸 다 갖춘 여자를 두고......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서 오히려 방문하기 더 좋을 것 같아요! ㅎㅎㅎㅎ
  • enat 2017/03/23 12:35 #

    매주마다 여행을 가니까 빨리 포스팅 안하면 대박 밀리겠구나 싶어서 부지런히 밥먹고 포스팅했습니다... 그렇지만 흑흑... 퇴근 후에 다른 일도 할 거 많은데 아무리해도 포스팅거리가 줄질 않네요... ㅇ<-<

    웬수떼기같은 남편입니다. 오히려 모든 걸 다 갖췄기 때문에 질투심 등을 느낀 게 아닐까 싶어요.

    한창 봄일 때 가면 정원도 잘 가꿔놨을테니 한적하게 돌기 좋을 것 같습니다! 강릉으로 떠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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