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6 08:52

강릉 여행 (4) 해송길 따라 경포대로 ├ 중부지방

1.

안목해변에서 경포대까지 가는 해안 도로는 해송으로 뒤덮혀있었다. 이 해송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라고 하더라. 분명 바다내음이 느껴지고 바닷소리가 들리는데 걷고 있는 곳은 소나무 숲속이라니 놀라웠다.





나 : 걷기 좋은데?
미니미니 : 피스타치오가 느껴져.
나 : 피톤치드를 말하고 싶은 거지?
미니미니 : 농담이었어.
나 : 농담이었길 바래.


사실 안목해변에서 경포대까지 가는 길은, "강릉 바우길"이라고 하는 강릉 트레킹 코스 중 해안가를 따라 걷는 바우길 5코스에 속한다고 한다. 걸어서 한 시간, 버스로도 한 시간이라면 걷는 쪽이지, 하고 걸은 것 뿐인데 그 길이 유명한 트레킹 코스였다니. 행운이었다.

이제와서는 사진이 조금 아쉽다. 새로 산 보급형 핸드폰의 폰카가 괜찮길래 그냥 그것만 들고 다니며 찍었는데, 이건 폰카들 중에 괜찮은 축인거지 역시 카메라만은 못하구나.

미니미니 : 이거 봐! 누가 솔방울로 글을 적어놨어.




나 : 오. 이것도 정성이네. 멋지다.
미니미니 : 아, 실수했다.
나 : 응?
미니미니 : 내가 만들었다고 했어야 했는데.
나 : 속아줄까? 어머, 날 위한 이벤트야? 이제 저 나무들 사이로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는 건가? 나는 특별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을 틀어줬으면 좋겠어. 먹으면 반지가 나오는 케이크는 어디에? 영상은 저쪽 하늘에서 드론으로 찍고 있는 거지? 영상 검수할거야. 매우 기뻐.
미니미니 : ...얼른 가자. 경포대가 기다리고 있어.







해송길은 조용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바다를 나란히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세상 흘러가는 이야기, 어렸을 때 겪은 억울한 일, 유명한 드라마 이야기, 조카의 참을 수 없는 귀여움, 친구가 한 농담,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과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의 목록, 책에서 본 슬픈 이야기, 소나무에 관한 지식 배틀, 듣고 있는 음악에 얽힌 이야기 등등.

그러다보니 경포대가 코앞이었다.





2.





어느샌가 해송길은 끝나있었고, 우리는 계속 길을 걸어 코닥필름을 판매하는 낡은 슈퍼와 모던한 디자인의 카페가 뒤섞인 동네로 들어갔다. 시골인지 도시인지 분간을 못하겠는 동네 너머로 해변이 보였다.




이렇게 오늘의 목적지인 경포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가깝구만!

도착한 기념으로 여태까지 걸어온 해솔길을 평가해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풍경이 좋아 지루한 줄 몰랐고, 또 걷기도 편해서 부담없는 트레킹 코스였다. 가끔씩 인적 드문 초소가 나오거나 갑자기 저쪽 도로에 승합차가 멈춰서거나 할 땐 나 혼자였으면 조금 무서웠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거의 해가 다 질 저녁 무렵에 걸은 거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한낮에는 어떨지 모르겠네.

아, 그리고 우리야 안목해변에서 경포대 쪽으로 걸은 거지만, 반대로 경포대 쪽에서 밥을 먹은 뒤 해송길을 따라 안목해변으로 내려가 커피를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음 점수를 매기자면, 별 다섯개에 세개 반을 주겠어요. 이 정도면 내 기준 고득점이에요. 앞으로 별 네개 반짜리 길도 나오니까 기대해줘요.




편한 길이었다곤 하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시간을 꼬박 걸으니 지친다. 체력이 저질이 되긴 했나보다. 나는 바다 앞에 주저앉아 조금 쉬기로 했다.






안목해변에서는 바다 사진이 구렸는데 여기는 또 파랗네. 시간과 날씨 탓이겠지.




참 맑기도 하다. 확실히 동해는 동해다. 아까 안목해변에서 월미도 앞바다 이야기를 잠깐이라도 꺼낸 게 미안할 정도다.

경포대에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많아 어딘가에서 인증샷이라도 찍으려고 했는데, 그것들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어떡할까 하다가 원래 이번 여행에선 사진을 건지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또 당시엔 포스팅할 생각도 없었으니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외장하드 한 번 날린 이후로는 어딜 가도 사진에 대한 순수한 욕심이랄지 구도의 집착이랄지 하는 것들이 조금 사라진 것 같다. 막상 지금 이 여행을 포스팅하려니까 남아있는 사진이 없어 그 때 욕심부리지 않은게 아쉽지만.





3.

해변이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바다 바로 뒤에는 경포호가 있었다.

나 : 경포대에선 달이 다섯 개가 뜬다고.
미니미니 : 그 얘기 저번에도 들은 것 같은데.
나 : 기억 못할테니까 다시 말해줄게.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술잔에 하나, 내 마음에 하나, 이렇게 뜬단 말이지.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처음 듣고나서 한 이십 몇 년 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지금 네이버에 검색해보니까 마지막 하나는 임의 눈동자에 뜨는 거라고 한다. 이십 몇 년만에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이다. 흠, 쓸데없이 로맨틱한 문구구만...

그치만 아마 내가 제대로 말했다면 미니미니는 분명 그 특유의 표정으로 눈을 뒤집어 깐 뒤 희번덕거리며 "어때? 보여? 보여?" 하며 쫓아왔을 거고 난 겁에 질려 도망갔을 거다. 잘못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경포호를 따라 찾아놓은 음식점으로 가다가 발견한 소나무. 보고 또 보고 기념 소나무란다.

나 : 보고 또 보고라니! 나 완전 어렸을 때 했던 드라만데!
미니미니 : 아, 엠비씨에서 하던 그거?
나 : 응. 그 당시에 엠비씨에선 보고 또 보고가, 케이비에스에선 정 때문에가 히트쳤었지.
미니미니 : 정 때문에는 뭐야?
나 : 신장 주는 거 있잖아! 가족 간의 사랑! 눈물! 감동!
미니미니 : ?신장? 잘도 기억하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유일하게 우리 가족들이 안방에 모이는 시간이 이 저녁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엄마는 방바닥을 걸레질하고 언니와 나는 장농에 들어가서 걸레질이 끝나길 기다렸다. 걸레질이 끝나면 아빠는 우리보고 내려오라고 한 뒤 장농에 있던 요와 이불을 꺼내어 바닥에 펼쳤다. 그리고 네 가족이 이불 위에 옹기종기 모여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구나...

미니미니 : 왜 갑자기 말을 안해?
나 : 그냥. 옛날 생각 쪼끔 했어.






4.

찾아간 음식점은 야간 얼큰 우동이라는 집이었다. 줄여서 야동.




간판 앞에 19금 딱지도 붙어있고 뭔가 희한한 컨셉이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식당 내부는 멀쩡(?)했고 사장님도 멀쩡(?)했다. 난 뭘 기대하며 갔던 걸까? 흠흠.

일하시는 분들은 모두 친절했다. 다만 테이블에 비해 일하는 분들이 적어 몹시 바쁘게 뛰어다니셨는데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많이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별로 배고프지가 않아, 가볍게 먹을만한 곳을 찾다보니 우동집으로 오게 된 거였다. 그런데 막상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 냄새를 맡자 이것저것 다 시키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그것도 시켰다.




배고프지 않은데다가 음식을 많이 시켜놓으니 얼마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불렀다. 그래서 많이 남겼다. 돈이 생각보다 꽤 나왔는데 그 돈이면 회나 가볍게 먹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비싼 술을 마실까 했나 싶기도 하고... 하여간 과도한 주문 실수로 인해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지출이 나와서 가슴아픈 곳이었다. 흑흑.





5.

소화도 시킬 겸 밤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여름 밤바다는 많이 본 적이 있어도, 겨울의 밤바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니, 저 때가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가? 겨울이라고 하기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렇다고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렀고... 그리고 사실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뭐 요새는 기억 안나는 일들이 기억 나는 일들보다 더 많아졌기 때문에 언젠가 어디선가 봤을 수도 있어서 말이다. 슬슬 처음이라는 말을 붙일만한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때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너저분한 사족들이 널려있지만 그럼에도 '겨울의 밤바다를 처음 봤다'고 굳이 쓴 이유는, 지금 당장 그 때 본 경포대의 밤바다와 비교할만한 광경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난 것도 아닌데 그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치는 파도의 소리란... 캄캄해서 보이지 않는 만큼 청각이 예민해져있던 터라 그 철썩거리는 소리는 더 크게 다가왔다.




나 : 좋네. 바다는.
미니미니 : 좋지. 바다니까.


떨어진 곳에서 놀러온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펑펑펑. 불꽃은 궤적을 제대로 그릴 새도 없이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 : 바다가 보기에 우리도 저럴까?
미니미니 : 흠.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려나.
나 : 에이, 무슨 소리야. 예쁘잖아.


혹시 바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 귀를 귀울여봤지만, 들려오는 건 파도 소리 뿐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러고 앉아있었다.




사천으로 가는 길에서 계속!






덧글

  • LionHeart 2017/03/16 11:08 # 답글

    '보고 또 보고'라니...98년 273부작 드라마를 보셨던 분이라니 간접적으로 연배가 ㅎㅎㅎ
    제가 '겹사돈'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된 작품이었지요. 그밖에도 데이트 중 응가하러 가던 정보석씨의 연기라던가, 아이를 낳지 못해 고생하던 김지수 씨의 연기도 기억에 남는군요. 그러고보니 '상상임신'이라는 것도 이때 처음 알게된 것 같아요. 우와... 추억이...
  • enat 2017/03/16 20:55 #

    으잌ㅋㅋㅋㅋ 본의 아니게 나이 누설이라니! 언급하지 않으셨으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뻔 했는데!
    근데 그게 273부작이나 됐나요!? 인기가 많아서 계속 연장하고 연장하고 연장했던 기억은 나는데 그 정도일 줄은... 정말 엄청나군요 ㅋㅋㅋㅋ 그러고보니 겹사돈 이야기가 나왔었죠! 사실 기억이 좀 흐릿했었는데 덧글보며 내용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네요 ㅋㅋㅋ
  • 라비안로즈 2017/03/16 14:38 # 답글

    ㅎㅎㅎㅎ 저도 언젠가 걷고싶은 길입니다. 강릉에 살면서도 ㅋㅋㅋ 못해본게 많아욤. 애들 두놈 다 얼릉 어린이집 보내고 신랑과 같이 호적하게 걷고 싶네욤.
  • enat 2017/03/16 20:59 #

    강릉 진짜 예쁜 곳 많더라구요... 이번 강릉 여행 때 진짜 계속 걷기만 한 것 같은데 풍경이 질리지가 않더라고요! 라비안로즈님은 그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계시니 여유만 생긴다면 언제든 가실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 이글루스 알리미 2017/03/17 09:06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3월 17일 줌(zum.com) 메인의 [이글루스]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코양이 2017/03/18 12:36 # 답글

    동영상의 바다소리에 마음이 편해집니다....
  • enat 2017/03/20 23:04 #

    파도 소리가 좋죠... 저도 잠 안오는 밤에 핸드폰에 저장된 영상 돌려보며 잠들곤 합니당!
  • 지나가다 2017/03/18 14:32 # 삭제 답글

    옛날에 인근 송정 솔밭에서 토막 시신이 발견된적이 있고
    미제 사건으로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ㄷㄷㄷ
    지금은 뭐 경포쪽이 강릉 시내보다 밝고 사람 많지만요 ㅎㅎ
  • enat 2017/03/20 23:07 #

    ...!!!!!!!!!!!
    엄청 무섭잖아요!!!!! 토막살인사건이라니... 미제라니... 흐어... ㅠㅠ
    경포쪽이 밝다고는 해도 솔밭쪽은 여전히 많이 외진 느낌이던데... 흐어어...
  • 용용 2017/03/21 01:05 # 삭제 답글

    1.으앜ㅋㅋㅋㅋ 뛰는 미니미니님 위에 나는 이낫님
    드론으로 찍고 있는 거지??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해송길 +ㅁ+... 외장하드님 ㅠㅠ 다시금 묵념하게 되어요

    3.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치얼스 끄악ㅋㅋㅋㅋㅋㅋㅋㅋ '작업멘트로 딱인데요!'라고 생각했다가 듣는 사람입장 헉소리 나겠다 싶네여 아흑ㅋㅋㅋㅋ(미니미니님 제외 ㅎㅎㅎ'어때?보여?' 이러고 쫓아오실것 같다니 ㅎㅎㅎ)

    5.ㅠㅠㅠ 좋네요. 이낫님도 밤바다도 미니미니님도 놀러온 사람들이 하는 불꽃놀이도...
  • enat 2017/03/23 12:30 #

    1. 원래는 끈질긴 녀석이라 무슨 말장난을 해도 끝까지 붙들고 세치혀로 싸우지만 저 땐 조용히 물러나더군요. 후후...

    2. 해송길 아름답죠! 나중에서야 카메라 똑딱이라도 가져갈 걸 그랬구나 아주 조금 후회했어요. 그 사건 이후로 워낙 사진 찍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다보니 요새는 핸드폰으로만 찍고 다닙니다 ㅋㅋㅋㅋ

    3. 걔는 아저씨같은 농담과 아저씨같은 감성을 좋아해서 그런 느끼한 말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로맨틱한 말 절대 못하는 부산 남자 같으니라고.

    5. 그리운 밤바다에요. 특히 사무실에서는... 아, 불꽃놀이 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딴얘긴데, 불꽃놀이 하는 분들 중에 어떤 분은 하늘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불꽃을 쏘고 계셨었어요. 마치 대자연과 싸우는 불꽃이구나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여간 희한한 사람들 참 많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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