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0 21:42

여수 여행 (1) 국내여행

1.

여수는 보석같은 도시였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대뜸 여수 이콜 보석이라 하면 얼마나 설득력이 없을지 나도 잘 알고는 있지만 어제 막 여수 여행을 끝내고 온 나로썬 저 문장을 제일 먼저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런지는 여행기를 통해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고, 일단 한 번 더 언급해야겠다. 여수는 정말 보석같은 도시였다. 반짝반짝거리는.





2.

사실 이번에 여수에 가게 된 이유는 단 한가지 때문이었다. 남은 마일리지 좌석 티켓.

토요일 늦은 아침. 강릉 여행 포스팅을 마친 난, 어딜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남해를 보고싶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해라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경남 쪽이든 전남 쪽이든 너무 멀다. 혹시 KTX가 남아있나 찾아봤지만 남은 표는 없었다. 버스를 타봤자 지금 출발하면 저녁에나 도착할 것이다. 그건 또 싫은 걸. 아, 난 어제 왜 술을 먹어가지고 늦잠을 자버린 거람. 안그랬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 첫차를 타던가 했을텐데.

나는 시간을 되돌려주는 마법같은 도구가 없나 생각하다가,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마법같은 기구를 생각해냈다. 뭐겠어, 비행기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나 싶다.

난 스카이스캐너를 열고 항공권을 찾아봤다. 그런데 주말이라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표가 비쌌다. 뭐야, 고작 국내선, 그것도 제주도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비싸게 내고 가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돼지 저금통에 동전 모으듯 모아뒀던 마일리지를 써야겠다. 나는 다른 포인트나 마일리지 적립같은 걸 잘 못하는 편이지만 아시아나 마일리지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모으곤 했다. 겁나 유용하거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마일리지 항공권을 찾아보니 제주나 부산 같은 이용객 많은 노선들은 다 팔려있었다. 그런데 여수행은 좌석이 5자리 정도 남아있었다. 당일 찾은 마일리지 항공권 좌석치고 많이 남은 거다.

그나저나 흠... 여수? 여수에 공항이 있었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남은 시간을 봤다. 탑승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여기서 김포공항까지 2시간이면 충분하겠군. 나는 마일리지로 표를 구입하고, 적당히 짐을 꾸린 뒤 옷을 대충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가자! 여수로! 이번 목적지는 여수다!

여기서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적당히 꾸린 짐에는 칫솔과 머리끈과 고데기가 빠져있었고, 대충 껴입은 옷은 여수의 날씨와 맞지 않았더랬다... 후후...





3.




야수도 애수도 아닌 여수로 가기 위해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지하철을 이용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

아침을 늦게 먹어서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왠지 공항 편의점을 보니 무언가 먹고 싶어졌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나는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코너에서 이걸 집었다가 저걸 집었다가 하다가, 결국 카레맛밥에 닭다리살이 올라간 밥바Rice Bar라는 희한한 음식을 샀다.

구입한 밥바를 전자렌지에 돌려 따끈따끈하게 만든 뒤 입에 물었다. 오, 제법 맛있다. 역시 우리나라 편의점 음식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대한민국 가공식품 산업의 희망찬 미래를 소망하며 티켓을 출력하러 갔다. 카운터에는 사람들이 줄 서 있길래 그냥 기계에서 체크인 했다.




늘 생각하지만 국내선 티켓은 왜 이렇게 영수증 같은지 모르겠다. 비행기 티켓 같지가 않아서 몇 번 쓰레기통에 버릴 뻔 했다. 지금 내 노트북 옆에 꼬깃꼬깃하게 종이접기 된 채 놓여져있는데 누가 저걸 보고 비행기 티켓이라 생각할까. 흐응.

티켓을 들고 보안 검색대로 바로 가려다가, 검색대에 무언가 먹으면서 들어가도 괜찮았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급한 것도 아니고 일단 근처 벤치에 앉아 다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밥바는 생각보다 밥알이 자유로웠다. 바Bar로 만들거면 삼각김밥 정도로 딱딱하게 뭉쳐놔야 하는 거 아냐? 왤케 밥알들이 돌아다녀... 하지만 카레양념이 된 그 밥알들은 정말 맛있었고, 난 밥풀이 어디로 튀던간에 신경쓰지 않고 닭다리살과 함께 정신없이 씹어먹었다.

밥바를 다 먹어치운 뒤, 밥바 포장껍데기와 떨어진 밥풀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섰다. 그런데 검색대 앞에서 공항 직원이 신분증과 티켓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 맞다, 여기선 그런 것들을 보여줬어야했지. 공항에선 모든 일들이 매번 새롭다. 이번엔 특히 밥바에 정신이 팔려서 더 새로웠다.

나는 허겁지겁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 주민등록증과 비행기 티켓을 꺼냈다. 그리고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공항 직원에게 쭈뼛거리며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보여주고 나서 발견했다. 영수증 같이 얇은 내 비행기 티켓에 아까 그 밥바의 밥풀들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것이었다. 너네가 왜 거기에 붙어있어! 나는 밥풀을 손가락으로 재빨리 제거했지만 카레양념이 되어있던 그것은 자신의 노오란 흔적을 티켓에 남겼다. 뭐야! 사라져! 사라지라고!

티켓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나를, 공항 직원은 약간 한심한 혹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으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4.

난 밥바의 흔적이 가득한 티켓을 들고 무사히 검색대를 지나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근처에 편의점이 또 있길래, 비행기에서 출출하면 먹으려고 쥬스와 과자를 사서 가방 안에 넣었다. 뭐, 결국은 비행기에서 안먹었지만. 아마 당시의 나는 편의점에서 무언가 산다는 행위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난 왜 이렇게 편의점이 좋은 것일까.




곧 탑승한 좌석은 창가자리였다.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이것저것 하고나니 비행기가 이륙했다.

옛날엔 안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선 비행기가 이륙할 때 무진장 긴장된다. 비행기 관련 사고 다큐멘터리를 하도 찾아봐서 그런가? 물론 다른 사람이랑 타면 쎈 척 하느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혼자 탈 땐 두 손 모아 집중해서 기도한다. 으으, 살려주세요, 비행기는 이착륙할 때 사고율이 제일 높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이 비행기는 안그러기를, 무사히 뜨기를, 기체결함이 없기를, 있다면 기장님이 빨리 파악하고 무사히 재착륙하기를, 으으...

기체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자, 안전벨트 등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으으... 양력 만세! 이따 착륙할 때까지 한숨 놓겠군. 난 실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세먼지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김포가 내려다보였다. 이래선 풍경보는 재미도 없군.

버스로 빨라야 네다섯시간 걸리는 여수는, 비행기로는 5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스튜어디스가 준 알로에 쥬스를 마시며 비행모드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었다.

읽고 있던 소설에 빠져들게 될 즈음,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래서 밖을 바라보았는데, 아까보다 훨씬 고도가 낮아져있었다. 음... 여수는 해안가에 있는 도시 아닌가? 아직 바다가 안보이는데 벌써 이만큼 낮아졌네... 뭐지...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계속해서 요동쳤고, 나는 가끔씩 자이로드롭 탈 때 느끼는 그 무중력 상태를 느끼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뭐, 뭔데... 뭐 이상있어? 왜그래... 아직 바다도 안보이는데 왜 그러는 거야...

내가 한가지 착각한 게 있다면 여수 공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도해 쪽이 아니라 광양만 쪽에 붙어있는 거라, 일직선 상으로 내려간다면 당연히 육지가 계속 보이다가 착륙직전 잠깐 광양만을 거쳤다가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여수-해안도시-보통 해안도시의 공항은 바다에 있지! 라고 생각해버려서, 육지쪽에서 계속 고도가 낮아질수록 아직 여수 근처 아닌 거 같은데 왜 이러지 잉잉거렸다. 덕분에 착륙하기 전까지 바짝 긴장해서 또 기도를 했다. 으으, 살려주세요, 제대로 여수에만 도착하게 해주세요, 여태까지 잘못한거 다 용서해주세요, 일단 살려만 주시라... 뭐, 내 긴장과는 무관하게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지만.

이러다가 언젠가는 비행기를 못타게 될 것 같다. 나 왜 이렇게 겁이 많아졌지?





5.

여수의 공기는 따뜻했다.

급격하게 더워진 나는 입고있던 점퍼를 벗어 팔에 걸쳤는데, 그러고 있으니 또 점퍼 안에 입은 티셔츠는 너무 얇은지라 추워져버렸다. 나는 무슨 의식처럼 점퍼를 걸쳤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하다가, 결국 점퍼를 팔만 빼놓은 채 어깨에 걸치는 식으로 추움과 더움의 합의점을 도출했다.




3월의 여수에는 동백꽃이 완연하게 피어있었다. 신기한 건 여수 대부분의 길가에서 동백나무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로수로 심겨있는 나무들엔 새빨간 꽃들이 걸려있었고, 그런 광경을 - 이번이 여수에 오는 걸로는 3번째지만 - 처음 본 나는 조금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왜 동백꽃을 보며 섬뜩한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랬더랬다. 꽃이 너무 빨갛고 큼직해서 그렇게 느껴졌던건지...

뭐, 여수를 여행하며 계속 동백꽃들을 마주쳤더니 점점 익숙해져서 나중엔 같이 셀카도 찍고 그랬지만 말이다.

공항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시내로 가는 버스가 왔다. 노선은 정확히 모르지만 뭐 대충 숙소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것 같더라. 나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할 때까지 꾸벅꾸벅 졸았다. 봄기운 때문에 잠이 솔솔... Zzzzz





6.

화장실에 무진장 가고 싶다.

버스에서 눈을 뜨자마자 생각한 내용이다.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여수 실시간 버스 앱을 다운받아 정류장이 얼마나 남았는지 파악했고, 대충 세어본 뒤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여수 버스는 또 왜 이리도 운전이 거친지 뒷자리에 앉은 날 미치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버스에서 내리게 된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여기서부터 숙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내 이십몇년을 컨트롤 해온 대뇌가 지금 숙소를 찾기보다는 어딘가에 들어가 해결을 하는 쪽이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고, 나는 내 인생 내내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좌수영 바게트 버거"가게가 있었다. 아니, 이곳은!? 지난 여름 여수에 들렀을 때 방문하여 바게트 버거를 사먹었던 곳이었다! 그래, 그 짭짜롬하면서도 매콤한 버거는 정말 맛있었더랬지...

나는 고향집에 방문한 사람처럼 그 가게로 들어갔고, 버거를 하나 주문해놓은 뒤 태연한 척 화장실 좀 쓰겠다고 했다...

...마침내 새 사람이 되어 나온 내 앞에 축하 선물처럼 좌수영 바게트 버거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단 인사를 전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하, 이것 참 새 삶을 얻은 기분이군. 이제 슬슬 숙소로 가볼까!





7.

숙소는 아까 비행기에 타기 전 김포에서 예약해놓은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네이버 지도에 주소를 친 뒤 방향을 파악하고 걷기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 5분, 6분 정도? 하여간 제법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에 룰루랄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길을 따라 뭔가 소박하고 귀여운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동네에 안어울리게 갑자기 거대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 눈앞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뭐 이렇게 생뚱맞은 건물이 다 있나 생각했지만, 네이버 지도가 일러주길 그곳이 바로 내가 오늘 묵을 숙소란다. 허허. 게스트하우스... 치곤 정말 거대하군. 조금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은 "빅오쇼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잠만 자면 된다는 주의라 왠만하면 숙소 이야기를 잘 안쓰는데, 아마 지금 내가 이렇게 숙소에 대해 묘사하는 이유는 할만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근데 이제 슬슬 졸리니까 여기서 끊고 다음편에 계속 찬스를 쓸 생각이다. 여수 여행기라고 제목을 붙인 것치곤 이제 막 여수에 도착했지만...




다음편에 계속!





덧글

  • Tabipero 2017/03/20 22:04 # 답글

    강릉 포스팅을 업로드하셨을 때 저는 구례에 있었습죠 ㅎㅎ 그새 여수로 가셨을 줄이야!
    여수까지도 KTX가 다니는 시대인데 아직도 여수행 비행기가 있었군요. 하긴 광주행도 아직 있다는데...

    enat님이 특별히 언급하신다고 하니 뭔가 트러블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건 다음을 기약해야겠군요.
  • enat 2017/03/20 22:40 #

    구례! 산수유 축제에 가셨나보네요!
    산수유 꽃이 그렇게 예쁘대서 저도 고민중에 있는데 잘 보고 오셨는지 @.@ 블로그 가서 확인해야겠군요!!!!

    앗 제가 졸려서 끝을 애매하게 마무리했는데 혹시나 언제쯤 포스팅을 이어서 쓸 수 있을지 몰라서 미리 써두지만 트러블은 아니고 좋았어요! 좋은 게스트하우스였습니다! 리얼 추천! 뚜둔!
  • 라비안로즈 2017/03/22 09:23 # 답글

    여수 비행기.. 그래도 타는 사람 은근 있나보네요. 2시간남았는데 5자리밖에 안남았다니...

    다음번도 기대하겠습니다.
  • enat 2017/03/23 12:14 #

    아, 5자리는 전체 남은 좌석이 아니라 마일리지 좌석이 남은 갯수였어요! 실제로는 더 많이 남아서 제 옆엔 아무도 안앉았더랬어요 ㅋㅋㅋ
  • 라비안로즈 2017/03/23 13:24 #

    아... 마일리지 좌석.. ^^;;; 급히 글을 읽으니 다 못읽었군요. 그래도 여수를 마일리지로!!! 마일리지가 꽤 있으셨네요...
  • LionHeart 2017/03/24 16:13 # 답글

    여수...한 번 가보았지만 너무 멀었던 그 곳...
    비행기를 타면 좀 편하게 가려나요? 하지만 저희 집에서 공항까지 2시간이니...계산해보면 KTX나 비행기나 비슷비슷할 듯 하네요 ;ㅁ;
    전에는 서울에서 차로 갔었는데, 한번 가보니 자신이 운전해서 갈 곳은 못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수증 같은 비행기 티켓, 제가 작년에 미국 여행 갔을 때는 대부분의 티켓이 영수증 같았던 것 같습니다.
    국제선도 아마 돌아올 때는 영수증 같았던 것 같네요.
    모두 무인 발권기에서 뽑다보니 영수증처럼 드륵드륵하고 나왔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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