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3 12:13

여수 여행 (2) 빅오쇼 게스트하우스 ├ 남부지방

오늘은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만.





1.

언제부터인가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고를 때 평점이나 시설, 위치보다도 남아있는 침대의 갯수에 집착하게 되었다. 남아있는 침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이 적은 쾌적한 환경(!)에서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여수에서 가게 된 빅오쇼 게스트하우스도 그런 맥락에서 선택한 숙소였다. 다른 숙소들이 전부 '오늘의 스마트 특가! 남은 자리 단 1개!' '최고의 위치! 남은 자리 단 1개!' 등으로 광고할 때, 빅오쇼 게스트하우스는 별다른 악평도 호평도 광고문구도 없이 고고하게 많은 자리수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곳에 예약을 걸었고, 곧 여수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

그리고 여수 공항에 내린 뒤, 꼬박 한 시간을 달려 마침내 숙소에 도착한 나.




숙소는 어마무지하게 컸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아기자기한 규모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었다. 큰 규모의 모텔급 건물을 뜯어고쳐 게스트하우스로 만든 느낌이었다. 아니면 체인점 호스텔 같은 느낌.

카운터에 가자 사장님으로 보이는 청년... 아저씨... 청년... 음... 하여간 어떤 사장님이 맞이해주셨다. 사장님은, 어, 약간 오세득 셰프 닮은 상이었다.

나 : 이름은 뭐구요. 예약한 홈페이지는 부킹닷컴이요.
사장님 : 아, 6인실 신청하신 분이네요? 그런데 저희가 오늘 방이 많아서요.
나 : (오, 4인실로 업그레이드 해주려나?)
사장님 : 4인실 드릴테니까 혼자 지내세요. 키는 여기 있고요.


!!!!!!

업그레이드까지만 생각했는데 아예 독방을 줘버렸다! 참고로 여기 6인실 도미토리는 조식 포함 2만 2천원이다!

나 : 우와! 감사합니다! 우와!
사장님 : 하하. 편히 쉬세요.






3.

카드키를 이용해 들어간 4인실 룸은 제법 쾌적했다.






온도 적당. 습도 적당. 냄새 오케이. 조명 오케이.
바닥 깨끗. 화장실 깨끗. 냉난방 완비. 와이파이 빵빵.

모든 조건이 내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방을 썼어도 가격대에 비해 괜찮을 환경인데 나 혼자라니! 난 이 방을 혼자 쓴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 혼자다! 발가벗고 춤을 춰도 아무도 모를 거야! 넘나 좋은 것!

혹시 손님이 아예 없어서 나 혼자 이 방을 쓰는 건가 싶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식당으로 나온 사람들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더라.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묵고 있었다. 그냥 사람에 비해 방이 남으니까 온 사람들끼리 방을 쓰게 해주는 것 같았다. 보통은 청소하기 힘드니까 한 방에 밀어넣지 않나? 사장님이 넉넉한 분이시구만.





4.

여수 1일차 관광은 다음 포스팅에서. 여기선 계속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를 해보겠다.

여수 1일차 관광을 마치고 나서 숙소로 늦게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하고 보일러를 켠 뒤 침대에 누워 딩가딩가 쉬려고 했다. 그런데 방이 생각보다 빨리 따뜻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방이 커서 그런가? 보일러 온도를 더 높혔지만 여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에 당시 감기 끝물인 상태였는지라 점퍼를 껴입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보일러가 고장났나... 이상하다... 등등의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잠에서 깬 나는 방안이 열대야처럼 덥다는 사실에 놀랐다. 입고 있던 옷은 잠결에 벗어서 던져뒀는지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보일러가 고장나기는! 엄청 작동 잘하는구만!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보일러 온도를 낮췄지만, 그 훈훈함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으으, 따시니까 좋구만.





5.

여수 2일차.




전날 엄청 돌아다녀서 오래 잘 줄 알았는데 습관이란 역시 무서운 놈인지라 일찍 일어났다. 훈훈한 온도에서 잤더니 피로도 싹 가신 것 같았다. 창문 밖 하늘에는 해가 낮게 떠 있었다.




8시 쯤에 아침을 먹으려고 6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 식당에는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올라갔나? 허나 난 원래 아침을 7시 쯤에 먹어서 배가 넘나 고픈 것이다. 빨리 뭔가를 먹어야겠다. 나는 조리대를 살펴보았다.




조리대에는 몇 대의 후라이팬과 토스트기, 식빵과 요거트와 야채, 그리고 무려 계란(!!!!) 등이 구비되어 있었고, 다른편에는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있었다. 오오. 식후 커피 예약.

미니미니랑 왔더라면 미니미니가 알아서 요리해줬을텐데 - 미니미니는 어렸을 때부터 요리가 취미여서 레시피의 폭이 넓은 전문가고 난 우리집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일반인이다. 미니미니가 기계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요리사가 됐을 것이다. 뭐 여튼 그런 이유로 그와 다니면 요리는 미니미니 몫, 여행 일정은 내 몫이곤 했다. 덧붙여 이건 자랑인데 내 주위엔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비몬도 요리를 잘해서 어디 놀러가면 걔가 맨날 밥해주고 그랬고, 유럽에 같이 갔던 친구도 요리를 잘해서 학생 때는 걔가 해준 밥을 종종 얻어먹곤 했다. 캐나다 있을 땐 요리사 삼촌들이랑 같이 살았었다. 나는 아무래도 주변에 요리사를 두는 복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 - 지금은 혼자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해먹어야했다. 나는 미니미니의 어깨 너머로 본 광경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무언가를 해먹었다.




내가 해먹은 볼썽사나운 무언가.

...음. 지금 식당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비웃음 당할 뻔 했어. 얼른 먹어서 없애야지.





6.

아침을 다 먹어갈 즈음에 사장님이 올라오셨다. 나이스 타이밍!

나는 내 볼썽사나운 그릇을 팔꿈치로 슬쩍 가리며 지도를 펴고 여수의 새로운 볼거리에 대해 알려달라고 사장님께 여쭤봤다. 사장님은 고민하다가 나보고 어디어디를 가봤냐고 물어봤다.

사장님 : 돌산도 쪽은 가봤어요? 향일암이라고 있는데.
나 : 거기는 두어번 갔었어요. 한번은 일출보러, 한번은 낮에.
사장님 : 돌산대교랑 이순신대교 사이의 해안길도 갔었겠네요? 돌산공원도?
나 : 갔었어요. 오동도도 가봤어요. 레일 바이크도 타봤어요. 산업단지도 가봤어요. 무술목도 가봤어요.


저번 포스팅에도 썼듯이 나는 이번이 여수에 세번째 오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올 때마다 뭔가 다 둘러보지 못한 듯한 부족한 느낌을 받아 그걸 채우고 싶어서 여행 후보 리스트에 항상 여수를 끼워놨었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니 은근 둘러본 곳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흐음.

사장님은 내가 가봤던 곳들을 듣더니, 이미 볼만한 데는 다 봤다는 투로 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어쩔 수 없지, 하고 지도를 접은 뒤 설거지를 하러 갔다. 설거지를 다 하고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겨 내려가려는데 사장님이 급히 나를 불렀다.

사장님 : 아, 거기. 거기 있어요. 지도 펴봐요.

그러더니 지도에서 몇군데를 짚으며 갈만한 곳을 알려주셨다. 요새 뜨는 곳이라나. 오, 이런 거 좋다. 현지인만 아는 고오급 정보! 나는 그곳에 꼭 가보겠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여기는 뭐, 다다음 포스팅에서 써보겠다.





7.

방에서 짐을 챙기고 청소도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해놓은 뒤,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바깥 공기는 외투를 입을 정도가 아니었다. 날이 따뜻하구만.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꼬깃꼬깃하게 접어 가방에 넣었는데, 도통 가방이 잠기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날 공항에서 샀지만 여행 내내 그 존재를 잊었던 질소 빵빵한 과자를 꺼내어 간신히 잠갔다.

다행히 가방을 잠그기는 했는데, 손에는 과자라는 짐이 생겼다. 으음, 손에 뭐 들고다니는 거 안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지금 과자를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으음...

나는 이 과자를 감사의 의미를 담아 사장님께 버리기로... 아니 선물로 주기로 하고 다시 6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아까 사람이 없었던 것에 반해 식당은 바글바글했다. 다들 이제야 아침을 먹으러 나왔나보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디에?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계셨는데, 왜인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출입구쪽에 있나 하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아니 어디로 가신거람? 한번만 더 가보자 하고 6층으로 갔다.

이 1층과 6층의 넘나듦은 엘리베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단이었으면 내려간 그 타이밍에 어쩔 수 없지 하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여간 다시 찾아간 6층에도 사장님은 없었다. 나는 여행자 한 분께 사장님의 행방을 물어봤지만, 그 분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래서 밖에 나가 사진이나 찍으며 기다려보자 생각하고 식당에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 동네 사진을 찍었다.






제법 재밌는 뷰를 가졌더랬다. 참고로 여기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빅오쇼인 이유는 저 멀리 바다쪽에 있는 동그란 원, 저기에서 펼쳐지는 쇼가 빅오쇼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쇼가 열릴 땐 여기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경도 한단다.

사진을 찍고 몸을 돌리는데 사장님이 "저 찾으셨다고요? 무슨 문제 있어요?" 운운의 말을 하며 나타났다. 나는 사장님께 과자를 버리고... 아니 선물했고, 다음에 여행 올 일 있으면 또 오겠다고 전했다. 사장님은 감사하다며 즐거운 여행 되시라고, 그리고 올라가는 길에 광양에 들릴 수 있으면 지금 매화가 엄청나니까 거기 들러서 매화 축제를 구경하라고 하셨다.

음, 내일 출근만 안하면 갈텐데.

하여간 끝까지 정보를 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8.

이번 여수 여행에서 '여수가 마치 보석 같았다', '반짝반짝거렸다' 운운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내가 좋은 숙소를 만났다는 사실도 한 몫 할 것이다. 사장님의 배려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던 게 감사해서 여행 이야기보다 먼저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를 하게 됐다.

뭐, 사실 쭉 써놓고 보면 그곳에서 포스팅 하나를 다 잡아먹을만큼 대단한 스토리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소소하게 편했던 그 감각이 계속 기억에 남아 어떻게든 따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기본에 충실한 객실, 과도하지 않은 친절, 적당한 거리감, 그렇지만 요청할 땐 최선을 다해 베풀어주는 도움 등등이 참 마음에 들었더랬다. 호텔이나 리조트도 아니고 게스트하우스 리뷰 쓰는데 이렇게 열심히 쓸 정도로 ㅋㅋㅋ

하여간!

이름과 건물 외관은 아주 쪼끔 촌스럽지만 건물 곳곳에 세심한 배려와 정성이 엿보이는, 오세득 닮은 사장님네 빅오쇼 게스트하우스로 놀러가세요. 추천 팡!




다음편부터 진짜 여행기 계속!






덧글

  • ㅇㅁㅇ 2017/03/23 19:50 # 삭제 답글

    오오 숙소 좋네요
    이제 이낫님 포스팅하셨으니
    꽉꽉 차서 자리 없어질듯ㅎㅎㅎ
  • enat 2017/03/27 09:11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생각보다 제 블로그에 사람이 많이 오진 않아요! 흑흑 ㅋㅋㅋ
    장사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생각하긴 합니다만! ㅋㅋㅋ
  • Tabipero 2017/03/23 20:43 # 답글

    이렇게 칭찬 일색인줄 모르고 저는 무슨 트러블이라도 생긴 줄...ㅎㅎ
    여름 내일로 시즌에는 흥하겠네요~
  • enat 2017/03/27 09:18 #

    제 여행 포스팅의 여태까지의 흐름상 트러블이 나올 타이밍이었지만 다행히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흥했으면 좋겠는 곳이었어요 ~ :)
  • LionHeart 2017/03/24 16:19 # 답글

    저는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한 번도 지내보지 않아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요.
    관심도 있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이용해보고 싶긴 합니다만, 짐의 안전도 걱정되고 잘 때 타인 신경쓰지 않고 편히 자고 싶다보니 좀처럼 기회가 없네요. ^^;

    숙소에서 보이는 뷰가 인상적입니다. 여수에 저렇게 이쁜 지붕을 가진 집들이 모여있었군요.
  • enat 2017/03/27 12:23 #

    외국의 호스텔 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저렴저렴 여행만 했는지라 호스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본 적이 많은데 (ㅠㅠ) 사실 복불복이에요! 같은 방에서 진짜 좋은 사람들 만나고 진짜 좋은 사장님 만나고 그러면 멋진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는데 완전 이상한 사람들 만나면 ㅋㅋㅋ 잠자리가 지옥으로 변합니다. 저도 요샌 복불복을 오가는 게스트 하우스보단 안전하고 편안한 호텔을 선호하는 편이긴 한데 요새는 워낙 급 떠나다보니 좋은 호텔들이 다 팔려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게스트 하우스로 묵게 되네요 ㅋㅋㅋ

    여수도 참 예쁜 동네더라고요! 빨리 이거저거 소개하고 싶은데 영 시간이 안나네요 ㅋㅋㅋ 짬내서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2017/03/25 23:3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3/27 12:2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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