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7 14:52

여수 여행 (4) 여수 밤바다 ├ 남부지방

0.

포스팅이 늦어진 이유 : 넘나 예쁜 여수 밤바다를 보고 와서 기분 좋게 포스팅하고 싶었는데 사진이 넘나 구림. 분명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봤을 땐 그럴듯 했는데 컴퓨터로 옮겨서 확인하니까 사정없이 흔들려있음. 이걸 어떻게 수정하나 고민함. 게다가 여수 밤바다는 예전에도 '국내 여행지 좋았던 곳들 운운'하는 포스팅에서 극찬을 했었기에 또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부담스러움.

그래서 마구마구 괴로워하다가 시간이 흘러갔던 것이었다!

뭐, 느낌표까지 붙일만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하여간 고민하다가 걍 적당히 포스팅하기로 함. 힝. 진짜 포스팅보다 백만배 즐겁고 백만배 예쁜 곳인데 요새 글도 못쓰겠고 사진도 구리고 괴로운 것이다아...





1.

여행기로 돌아가서.

나는 이순신 광장 근처 정류장에서 돌산 공원 가는 버스를 탔다. 이순신 광장 - 돌산 공원을 잇는 버스들은 은근히 배차간격이 길었다. 관광지라서 자주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의외였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지나, 돌산공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버스가 빙빙 돌았는지 제법 시간이 걸리더라.




돌산대교를 지나 우회전 도로가에 있던 돌산공원 버스 정류장은, 뭔가 차가 쌩쌩 달리는 인적 드문 곳에 있었고, 그 정류장에 내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이곳에 내리는 게 맞나 두리번거리며 내렸고, 곧 돌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하곤 안도했다. 분명 '돌산공원 입구'라는 버스 방송을 듣고 내린건데 내리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괜히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기분이 든다. 확실한 길인데도 그 길을 선택한 사람이 나 혼자뿐이면 괜히 긴가민가 할 때가 있다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보이는 풍경은 시원시원했다. 저녁의 여수 바다구만.

돌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버스 정류장 반대편에 있었다. 다행히도 신호등이 있어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워낙 차가 쌩쌩 달리는지라 신호등이 다 고마웠다.





돌산공원으로 오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는데, 갑자기 바다에 부서지는 해가 내 눈을 강타했다. 으아아, 눈뽕이다! 근데 그 이전에 엄청 멋진 광경을 본 것 같은데!

나는 눈이 부신 것을 참고 작은 눈을 더 작게 만들어 실눈을 떴다. 지는 해가 바다에 비쳐 미친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올라가는 것도 잊고 그 광경을 한참을 바라봤다. 여수는 이런 곳까지 반짝이는구나...





3.

반짝이는 바다를 뒤로 하고 오르막길을 따라 걷기를 십 여 분. 돌산공원에 도착했다.






돌산공원을 걸어서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바다와 싸우는 어부들의 조각과 위령비. 돌산공원엘 세 번째 왔지만 이 조각상을 눈여겨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밌는 책은 몇 번을 읽어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포인트가 수두룩하던데, 이건 여행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여수는 참 재밌는 여행지라니까.




돌산공원은 이번이 세번째고, 이번 여행이 여수의 세번째 방문이므로 난 돌산공원을 여수를 여행할 때마다 찾아간 게 되겠다. 하지만 난 아직 그 유명하다는 돌산공원의 해상 케이블카를 타보지 못했다. 첫번째 방문 때엔 아예 케이블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질 않았다. 두번째 방문 때엔 케이블카 종료시간보다 5분 늦게 와서 아깝게 못탔다.

그리고 이번 세번째 방문 때에는, 음, 음, 역시 못 탔다. 혼자타면 무진장 외로울 것 같아서. 나중에 미니미니라도 데리고 와서 타야겠다 생각했다.

그럼 뭐, 케이블카도 안탈건데 왜 돌산공원에 왔느냐면, 이곳은 케이블카를 빼고도 여수의 야경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케이블카 건물 옥상에는 여수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그곳으로 올라가봤다.




케이블카 전망대에서 보이는 모습. 갤럭시 A5 2017 파노라마 샷.

전망대는 역시 멋진 뷰를 보여줬다.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바로 앞에 보이는 주차장이 거슬리는 것... 그래서 고개를 치켜들고 시선은 멀리했다.







올ㅋ 아직 해가 안졌는데도 볼만하다. 역시 항구도시 넘나 좋은 것!

오밀조밀한 건물들과 항구, 배들이 꼭 미니어쳐 같았다.




그 유명한 케이블카도 보인다. 내 언젠가는 저걸 타보고 말리. 오늘은 말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옥상에 궁전같은 장식이 되어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왜인지 내 오랜 기억들이 꿈틀거리는데... 저거 뭐더라... 저거... 저거... 그래, 생각났다! 돌산 해수타운 찜질방!

그러니까 그래... 그것은 어언 8년 전. 한겨울에 내일로 티켓을 끊고 여행을 다니다가 여수에 도착한 나는, 당시 별 볼거리도 없던 돌산공원을 정처없이 헤매다가 저 해수타운 찜질방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찜질방에서 그 동네 아줌마랑 친해져서 컴퓨터실 왼쪽 벽 근처가 제일 따뜻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곤 그곳에 자리를 깔고 잠을 잤더랬지... 통유리창으로 빛나는 돌산대교가 보였고... 그걸 바라보며 삶은 달걀과 식혜를 먹었던... 그 아련한 기억... 우후후...

지금 생각하면 그 땐 어떻게 찜질방에서 잠을 잤나 싶다. 나 요새 완전 예민해서 찜질방에선 거의 못 자는데. 깜깜함+조용함+뜨거운 바닥이 아니면 잠을 잘 설치는 피곤한 몸이 되어버렸다. 어려서 여행다닐 때 어른들이 '네 나이 때 여행 안다니면 나중에 가기 힘들다' 등등의 말을 많이 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가? 나이들면 몸이 예민해지는 건가? 하여간 요샌 찜질방에서 잠 못 잔다. 누워서 베개만 베면 아무데서나 잘 자던 당시의 어린 내가 부럽군.




해는 아직도 높다! 야경을 보려면 제법 오래 기다려야겠는데?

나는 전망대에 기대어 일몰과 야경까지 기다려볼까 했지만,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찼다. 이 때는 아직 3월 중순이었고, 해가 일정 각도를 넘어가면 추워지는 때였다. 나는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적당히 바람을 막아주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전망대로 올라오기로 했다.

그러나 전망대 아래층에 구비된 좌석은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어디 앉아서 그림이라도 그리며 시간을 때울까 했는데. 천상 서서 기다려야겠구만.

나는 좌석 옆 창가에 서서 음악을 듣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질 않는 것 같아 강릉에서 산 노트를 꺼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저 아래 보이는 그림 그리는 아저씨를 그려볼까. 그 다음엔 아까 봤던 케이블카를... 음... 선 비뚤어졌당.




나는 비뚤어진 선을 컨트롤 제트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곤 그냥 대충대충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슥삭슥삭 한 장을 그리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저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여수의 여자만(汝自灣)이 떠오르는군. 여자만이 그렇게 일몰이 예쁘다는데. 다음에 오면 그걸 보러 가야겠구만. 아직도 볼거리가 참 많이 남은 이곳은 여수.

여자만이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 처음에 여자만이란 만 이름을 들었을 때 "그 만 앞바다에 '남자도'는 없어?"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썰렁하다며 비웃음 당했지만, 난 진심이었다. '여자만'과 '남자도'... 안 어울리나? 겁나 잘 어울리는데!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그런 섬은 없단다. 뭐하는 거야, 여수시 관광청 공무원들. 아무 섬이나 하나 붙잡고 남자도란 이름을 붙이란 말이지!

...점점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군. 다시 여행기로 돌아가서.




딱 두 장을 그리고 나니까 그새 해가 넘어가고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역시 그림의 힘은 위대하다. 타임워프가 가능해.

나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 때우기는 됐던 그림들을 가방에 넣어두고 다시 전망대로 올라갔다.





4.



돌산공원 케이블카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수의 야경. 고개를 왼쪽에서부터 천천히 돌려 오른쪽까지 꺾으면, 돌산대교에서부터 거북선대교까지 이어지는 여수의 밤바다 전체를 다 내려다볼 수 있다. 제법 볼만한걸.

조금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자꾸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아 거기 좋은데 옆에 사람이 나오네 운운으로 눈치를 주는 바람에 멍하게 바라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좀 춥다. 감기에서 벗어난지 이틀 정도 지난 때여서 어쩐지 이곳의 거센 바람이 불안불안했다. 나는 아까 올라오기 전 편의점에서 산 쌍화탕 큰 병을 하나 꺼내어 목에다 가져다댄 뒤, 이 정도면 다 봤으니 이제 바람 덜 부는 다른 곳으로 가보자 결심했다.




느긋하게 풍경을 즐기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또 아쉬운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라본 것보다 멋진 풍경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똑딱이의 작은 화면 혹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본 결과물은 제법 만족스러웠는데 집에 와서 컴퓨터로 확대해서 보니 영 아니라 무지 실망해버렸다. 사실 야경 사진 어려운 건 당연한 거고 작은 화면이랑 큰 화면으로 볼 때 다른 것도 당연한 건데 요새 하도 사진을 안찍다보니 잊고 있었다.

하여간 새로 산 스마트폰이나 갖고 있는 똑딱이는 다른 거 찍을 땐 제법 쓸만한데 야경을 찍기엔 모자라다. 음, 이렇게 된 거 지금 이 포스팅 빨리 끝내고 야경 잘 찍을만한 카메라 있나 좀 알아봐야겠다.





5.

나는 돌산공원 케이블카 전망대에서 내려와 돌산공원의 다른 전망대를 찾아갔다. 그곳은 도로가에 나무데크로 짜여진 전망대로, 돌산대교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아까 케이블카 전망대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아 - 그렇다고 사람이 적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여유는 있었다 -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제법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다.

나는 데크에 팔을 살짝 기대고 돌산대교를 오가는 차들과 그 아래를 지나다니는 배를 구경했다.





그렇게 느긋하게 구경하다가,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뭐지? 뭔가가 부족한 이 느낌은... 음... 음... 그래!

나는 급 주머니를 뒤져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를 틀었다. 음음. 바로 이거야!
아름다운 풍경엔 아름다운 음악이 필요하지! 그나저나 이 여수찬가는 암만 들어도 좋다. 도통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나는 1곡 반복재생을 눌러놓은 뒤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계속 돌산대교를 내려다봤다.





6.

이번엔 바라보고 있던 돌산대교 쪽으로 내려가봤다.




여전히 여수밤바다를 틀어놓고 돌산대교를 건너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 두 분께서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행색은 전형적인 중년의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두 분이서 함께 여행을 오셨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재잘거리시는 모습이 엄청 생기넘쳐 보였다. 나는 흐뭇하게 그 아주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갑자기 그 아주머니들이 뒤를 돌아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주머니1 : 학생, 저기 저 섬 이름이 뭐에요?
아주머니2 : 저 섬에도 뭔가 유래가 있죠?


......?

나는 아주머니들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곧 돌산대교 옆의 작은 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까 전망대에서 봤던 그 섬이군. 근데 저 섬 이름이 뭐지? 나도 알고싶다.

나 : 저도 여수 사람이 아닌지라... 그러게요, 저 섬은 뭘까요?
아주머니1 : 어머. 난 여수 사람인줄 알고!
아주머니2 : 에구, 모르는구나. 호호호!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멀어져가는 아주머니들. 아무래도 내가 편안한 옷차림에 작은 가방만 들고 있어서 여기 사람인 줄 알았나보다. 무슨 섬인지 알았으면 여수 사람인척 하고 알려주는 거였는데. 아니 적당히 지어내서라도 알려드릴 걸 그랬나. 이순신섬이라던가, 장군섬이라던가...

그런 생각을 혼자 했었는데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보니 진짜 장군도라는 이름이더라. 뭐야, 나 촉 엄청 좋네? 아니면 언젠가 들었다가 새까맣게 까먹었던 걸 내 무의식이 발굴했던 것일수도 있고.





7.

그런 적당적당한 일을 겪으며 다리를 걸었다.

그런데 돌산대교는 생각보다 길었다. 전에 돌산대교에서 야경을 봤을 땐 차 안이었고, 그래서 돌산대교도 금방 통과했었다. 다리 위에서 잠깐 신호에 걸려서 보게 된 야경에 꺄아아 아름다워어어 운운으로 행복해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두 다리로 직접 걸으니까 왜 이렇게 다리가 길고 먼 건지!

게다가 걸으니까 여기 대박 무섭구만! 옆에선 차가 쌩쌩 다니고 인도는 폭이 좁고 그랬는지라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특히 대형 버스나 트럭이 지날 땐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곤 했다. 여수밤바다 노래소리도 차소리에 묻혔다. 뭐야! 그 감성 넘치는 허어어~~가 안들릴 정도잖아! 으으, 이래선 야경을 즐기지도 못하겠군. 예전에 썼던 여수 밤바다 추천글 - 돌산대교 위에서 바라본 여수의 밤바다 짱짱맨 운운을 수정해야겠어. 그건 차 위에서만 멋지지 걸어서는 못즐기겠단 말이지!

미니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그 즈음이었다.





7.

미니미니 : 나 빼고 다니니까 좋나.

왜인지 툴툴거리는 말투다. 뭐야? 지금 나는 생각보다 먼 거리 + 쌩쌩거리는 차 + 노랫소리 부재로 심기가 불편하단 말이다. 나는 평소였다면 장난으로 받아칠 대답 대신 짜증이 섞인 말투로 그에게 답했고, 미니미니는 이런 반응이 나올줄은 몰랐는지 잠깐 망설이다가 뭔가 머쓱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뚱한 상태로 쓸데없는 대화를 계속하다보니 마침내 한없이 이어지던 돌산대교도 끝이 났다. 무사히 다리를 건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긴장된 상태로 오래 걸었더니 좀 쉬고 싶다.

어디 앉을만한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정자가 하나 들어왔다. 돌산대교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있는 정자였다. 좋아. 저곳에 가서 좀 쉬어야겠군. 나는 긴장된 몸을 풀며 정자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오른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은...





나 : 오!
미니미니 : 응? 왜?
나 : 오! 여기 대박! 여기 야경 대박!
미니미니 : 음? 어떻길래?


어떻기는! 환상적이지!

빛나는 돌산대교랑 거북선대교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돌산대교 너머의 돌산공원도 빛나고 있고, 대교를 건너는 자동차들도 빛나고 있고, 저 멀리 건물들도 빛나고 있다! 이야, 이거 미니미니 카메라를 빌려왔어야 했는데! 핸드폰으론 야경이 안찍혀!

나는 내 온 힘을 다해 내가 보고 있는 야경을 묘사했고, 미니미니는 그 묘사를 듣기보다도 갑자기 짜증내고 툴툴거리던 내 말투가 변했다며 안도했다. 그러더니 이제 기분이 좀 풀렸냔다. 어... 뭐... 나 기분 나빴었나?

나는 여태까지 그가 짜증내고 툴툴거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짜증내고 툴툴거렸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나보다. 나는 잠시 방금전의 대화를 쭉 복기한 뒤, 순순히 그에게 사과했다. 사과를 불러일으키는 전망이로다.





8.

전화를 끊고 더 야경을 보다가 슬슬 내려가기로 했다. 여기서 다시 이순신 광장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네이버 지도를 찍어보니 돌산대교 입구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란다. 나는 지도에 찍힌 정류장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이 정류장, 뭔가 으슥한 곳에 있다. 사람은 지나다니지도 않고 돌산대교 건너려고 지나가는 차들만 쌩쌩 달리더라. 주변에 밝은 곳이라곤 이 정류장밖에 없는 걸. 조금 무섭다. 무서우니까 빨리 버스가 왔으면 좋겠는데 버스는 도통 오질 않는다. 아이 참.

나는 다시 한 번 네이버 지도를 찍었고, 이곳에서 이순신 광장까지 직선거리로 제법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걸어서 한 2,30분 정도? 그 정도 거리인 걸 진작 알았다면 아까 버스 정류장으로 안오고 그냥 걸어갔을텐데. 하지만 지금 걸어가기엔 버스 기다린 시간이 넘나 아까운 것이다아. 그래서 무서워도 조금만 더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신 나는 그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용한 발라드로 시작했지만, 부르면 부를수록 뭔가 쾌감이 커졌다. 개방된 공간인데 내 목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뭐 이런 신나는 상황이 다 있나. 나는 용기를 내어 고음이 들어가는 후렴부를 불어제꼈고, 나중엔 롹 가수에 빙의되어 샤우팅을 하며 버스를 기다렸더랬다. 아! 넘나 신나는 것! 소리 질러! 다 함께! 캬오!

...없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그 때 차 창문을 열고 지나간 사람이 있었다면, 그래서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샤우팅 소리에 놀랐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 땐 제가 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7.

그렇게 열창하길 20분. 드디어 이순신 광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이 동네 버스 진짜 안다닌다.

나는 정들었던 노래방 정류장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이순신 광장으로 갔다.




이순신 광장의 그 희한한 모양의 길쭉한 전망대에는 불이 들어와있었다. 낮보다 더 예쁘네.




광장 끝에선 저 멀리 수산시장도 보였다. 저번에 왔을 땐 저기서 하모 사먹었었는데.




나는 잠깐 광장 앞 바다의 바람을 쐬다가 종포 해양공원으로 향했다. 이순신 광장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걸으면 종포 해양공원이다.






밤의 종포 해양공원은 거리도 예쁘고 불빛도 예쁘고 멀리 보이는 돌산대교와 거북선대교도 예쁘고... 그냥 다 예쁜 곳이었다. 군데군데 있는 포장마차는 운치 있어보였고 가족이나 연인 단위로 놀러나온 사람들도 즐거워보였다. 한마디로 정말 좋았다. 더 이상의 단어를 생각할 수 없는, 그냥 정말 예쁘고 좋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말 예쁘고 좋았던 곳에 나는 혼자였다.

이 좋은 밤바다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외롭더라. 나는 이 좋은 곳에 왜 혼자 있단 말인가. 포장마차는 고사하고 누군가와 함께 벤치 아래에 앉아 맥주라도 한 캔 마시고 싶은데. 그 누군가와 "아, 좋다." / "음. 좋군." 정도의 대화만 나눠도 좋으니까, 그냥 아무나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 이래서 장범준도 나 지금 여수 밤바다에 있다고 그렇게 허어어거리며 전화를 건 것인가. 정말인지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풍경인지라.

나는 여수 밤바다의 화자에 빙의되어 당장 생각나는 미니미니에게 전화를 걸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가족 모임이랬지. 전화하기 힘들거다. 그럼 무비몬에게 연락해볼까. 아니다. 주말이라 남친 만날텐데 뭐. 아니면 동네 사는 친구한테 연락해볼까. 아니다.
공부중이랬지. 아니면 지방 사는 친구한테 연락해볼까. 아니다. 야근중이랬다. 아니면 잡담이 오가고 있는 단톡방에다가라도 거리 사진을 보내볼까. 으음. 누군가와 연락하고 싶은데 막상 연락하려니 주저하게 되는 걸. 아, 갑자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게 느껴진다아...

그렇게 거리에서 갈 길을 잃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enat이었다.





8.

그런 날 달래준 것은 버스킹 공연이었다.

아직 날이 서늘해서 누가 공연을 할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공연을 하는구나, 무슨 곡을 연주하나 들어볼까, 정도의 느낌으로 자리에 앉았다가, 나도 모르게 공연 하나하나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여수 밤바다를 배경으로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운치있고, 유쾌하고, 신박한 공연들은 내가 방금 전까지 외로워했었다는 사실도 잊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마술쇼가 최고였다!

마술사 분의 성함을 알았으면 여기에 쓸텐데 자기소개할 때 사람들이 박수쳐서 이름을 제대로 못들었다. 아우, 나도 진짜 말소리 캐치 못한다니까. 하여간 이 마술사 분의 쇼와 쇼보다 더 재밌는 빅재미 실수와 "이건 어려운 거! 될 때까지 한다!" 등등의 다부진 대사와 삑사리나는 기합소리 때문에 엄청 많이 웃었다! 아니 보통 기합 넣으면 하! 허! 하지 않나? 왜 기합 소리가 더 힘빠지는 허엉! 끄앙! 거리는 소리냐고 ㅋㅋㅋㅋ









나 진짜 쇼 다 끝날 때까지 박수 열심히 치고 환호해주고 응원해주고 그러면서 무진장 행복하게 봤는데 그래서 진짜진짜 팁 많이 내고 싶었는데... 가진 현금이 숙소에 지불할 신사임당 1장밖에 없어서 못드렸다. 세종대왕이었어도 진짜 드렸는데 신사임당은... 제가 아직은 신사임당을 척하고 낼 만큼 담이 크지 못해서... 그리고 월급날이 멀었기에... 숙소에다가 돈도 내야하고... 흑흑...

그런 이유로 팁도 못 드리고 이 신사임당을 율곡 이이 선생님이나 퇴계 이황 선생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다가 감사 인사도 못 드리고 자리를 뜨게 되었다. 제가 뭐 해드릴 수 있는 건 없고 이렇게 포스팅이라도... 흑흑...

여하간 마술사 분 덕분에 축 쳐져있던 기분이 다시 샤라랑 살아났다.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마술같은 분이었다.

진짜 대단한 마술사로 성공하실거에요. 나중에 또 뵀으면.





여수 밤바다 총평. 사람을 그립게 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딱 그리울 정도지 더 이상 외롭지는 않게 손 내밀어주는 많은 공연들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뭐 이런 보석 같은 곳이 다 있나.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주황색 가로등 불빛으로 물든 해양공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아, 너무 좋다.








8.

빛나는 거북선대교의 사진으로 끝내고 싶지만, 적지 않으면 아쉬울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사족같지만 덧붙여본다.

여수의 보석같이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어떻게 가야할까 고민하며 버스를 찾으니 내가 있는 해양공원에서 555번 버스를 타면 우리 숙소까지 간단다. 나는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운치있는 음악들을 흥얼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저 멀리서 버스가 오길래, 정류장까지 가서 저걸 타면 얼추 맞겠다 싶었는데 버스는 정류장에 멈추지도 않고 쌩 지나가버렸다. 아, 아니, 저기? 그래도 정류장에 멈추기는 해야... 저기?

나는 눈이 점이 된 채로 한 15분 정도를 기다렸다. 그랬더니 다시 555번 버스가 왔다. 이번에도 그 버스는 멈추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더라. 아니, 여기 버스 정류장 아니야? 잠깐만! 여기 손님 있잖아! 버스 승객 있다고요! 555! 어디가는데! 나 태우고 가야지!

이번에도 놓칠 순 없다! 나는 자신을 독려하며 지갑 든 손을 들고 전력질주하여 버스를 쫓아갔고, 버스는 정류장을 한참 지난 앞에서 간신히 멈춰섰다. 그런데 그게 날 보고 멈춘건지 저 앞에서 사람을 태우려고 길을 막은 승용차 때문에 멈춘 건지 잘 모르겠다. 후자라면 교통의 흐름을 끊고 무단정차를 하여 버스의 폭주를 막아준 그 승용차에게 땡큐함.

이제 버스를 탔으니 금방 숙소에 가겠군. 그럼 아까의 그 여수 밤바다의 여운을 느껴볼까? 난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감성 충만한 음악을 틀었다. 그러나 곧 꽂은 이어폰을 빼버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가는 길에 정류장이 있어도 역시나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난 내가 대체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난 건지 감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감성 충만한 음악 대신 버스 안내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내려야할 정류장 안내 방송이 나왔다.

버스 안내 방송 : 이번 정류장은, 휴게소. 휴게소 입니다.

휴게소 정류장! 우리 숙소 앞 정류장! 바로 여기다!

난 방송이 나오자마자 벨을 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벨을 누르기도 전에 벌써 익숙한 풍경이 차창 너머로 지나갔다. 어라? 방금 그거 휴게소 정류장 아니었나? 나 방금 저 정류장에 내려야했는데? 방송이 왜 이렇게 늦게 나온...? 아니 빨리 벨을... 아니 근데 벌써 휴게소 정류장 지나쳤는데... 방송은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나와야하는 거 아냐? 저기... 저기 555? 555?

나는 당황하며 벨을 눌렀고, 당연하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친 휴게소 정류장이 아닌 그 다음 정류장에 멈춰섰다. 아니 이게 뭐야. 버스가 얼마나 빠르면 방송과 동시에 정류장에 도착하냐고. 아니 이게 뭐야. 아니 이게 뭐야!

숙소 근처의 정류장인 휴게소 정류장과는 다르게 그 다음 정류장은 지독하게 캄캄했고 인적은 드물었다. 아니 드물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군데군데 박힌 가로등 등불을 따라 뛰어가야만 했다. 어디 골목길에서 괴한이라도 뛰쳐나올까봐 무서웠다. 아니 이게 뭐야, 돈 내고 버스 탔는데 이게 뭐냐고! 왜 야밤에 달리기를 하고 있어! 555! 제 번호 같은 버스 같으니라고! 555번 버스으으오오오오555!!!!!

긴장하며 달린 탓에 그 서늘한 저녁에 땀범벅이 되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아하하... 무사히 도착했다아... 게스트하우스 앞에는 오세득 닮은 주인 아저씨가 담배를 피고 있어서, 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찬 공기를 마시며 달리다가 갑자기 따뜻한 공기를 마주하니 온 몸이 녹는다. 나는 완전히 늘어지기 전에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씻었고, 몸을 대충 닦은 뒤 침대에 누웠다. 하하. 자기 전에 운동을 한 덕에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555번에 감사해야하나? 어쨌든 속도만 따지면 택시와도 같은 버스였다. 물론 다신 안탈 거지만!

하지만 그 버스와의 악연은 다음날에도 계속 되었는데... 뭐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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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존평씨 2017/04/07 16:37 # 답글

    장군도라뇨.
    남자도라고 했어야죠.
    그렇게 가짜 이름은 정설이 되고 여자만 남자도가 될 수 있었는데 아까운 기회를 놓쳤네요.
  • enat 2017/04/13 21:58 #

    기회가 아니에욧! 저 장군도는 여자만이랑 거리가 엄청엄청 떨어져있어서 남자도가 될 수 없습니당.
    여자만 앞에 있지 않는 한 남자도는 의미없는 섬이름이 될 거라고요!
  • LionHeart 2017/04/07 18:25 # 답글

    제가 여수에 갔을 때는 밤에 숙소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는데, 저렇게 야경이 이뻤군요.
    관광을 내세우는 도시라 그런가 곳곳이 알록달록 색으로 꾸몄네요. 다음에 여수를 방문하게 될 날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버스...전 버스 타는 것을 싫어합니다. (...) 여러 이유가 있지만, enat님 덕분에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 enat 2017/04/13 22:00 #

    술을 들고 밖으로 나가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정말 멋진 사진을 찍으셨을거에요... 다음에 여수 가시면 멋진 사진 부탁드립니다 제 실력과 제 카메라로는 도저히 야경을 찍지 못하겠어요 ㅇ<-<

    저는 운전을 못해서 싫어도 버스를 타야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ㅋㅋㅋ
  • 까마귀옹 2017/04/11 16:04 # 답글

    1. 돌산공원이란 곳이 산 위+변두리라는 특성상 대중교통-걸어가기로는 정말 가기 귀찮은 곳(...)인지라, 여수 시민들도 그냥 자가용 몰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에는 편하게 렌터카나 택시 등을 이용하시는게......

    2. 나중에 여자만에 가신다면 비슷한 조언. 여자만 갯벌, 섬달천 등은 여수 전체에서도 가장 변두리라서 버스 시간을 미리 보고 계획을 짜지 않으면 오가는데 심각한 애로사항이 꽃필겁니다.
  • enat 2017/04/13 22:02 #

    렌터카>>제가 운전을 못합니다
    택시>>왠지 버스+도보로 갈 수 있는 곳을 택시로 가면 지는 느낌(?)이라...
    그런 이유로 이번엔 버스+도보로 갔지만, 다음엔 조언을 받아들여 운전할줄 아는 친구를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
    여자만에 대해 안알려주셨다면 생각없이 찾아가 일몰을 본 뒤 나중에 차가 끊겨 발동동하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紅桜 2017/04/11 22:33 # 답글

    거리에서 공연하시는 분들이 한국에도 있는거군요.. 거의 본적이 없어서 ㅠㅠ 저도 보고싶어요.

    저도 간혹 그림그리다보면 8시간씩 워프되던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신기하죠...
  • enat 2017/04/13 22:04 #

    여수 해양공원에 거리공연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여수가 멀다면 다음에 불금쯤에 서울 홍대쪽에 가시면 보실 수 있을거에요!
    아 아닌가... 대구는 여수가 더 가까운가..? 음... 거리에 감이 안잡히네요... 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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