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9 08:47

여수 여행 (6)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 ├ 남부지방

1.

다시 이순신 광장으로 돌아온 나는, 서울행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한시간 반 정도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넉넉잡고 30분 정도? 그럼 약 한 시간 정도가 남는다. 그동안 무얼할까 고민을 하다가, 쇼핑가에서 옷이나 보기로 했다.

그러나 어째 보는 옷들마다 영 마땅찮아 보였다. 이 옷은 무늬가 좀 그렇고... 이 옷은 사이즈가 없고... 이 옷은 막상 사면 안 입을 것 같고... 살만한 옷이 보이질 않았다. 이런 날 쇼핑 계속하다간 이상한 옷들만 여러개 사던데. 관둬야겠다. 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그냥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노닥거리기로 했다.

그렇게 카페를 찾아 느긋하게 걷다가, 왠 표지판을 만났다.




[천사벽화골목]


...벽화골목? 또야?

나는 살짝 코웃음치며 그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이 놈의 벽화골목은 어디 한군데에서 히트치니까 온갖 동네에서 다 따라하는구만. 서울, 인천, 부산, 통영, 수원, 전주, 대구, 광주... 벽화마을이 있는 도시들 중 당장 생각나는 도시들은 이 정도일까. 아마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을거다. 물론 어두컴컴한 골목보단 환하고 밝은 벽화가 그려진 골목이 미관상으로도 정서상으로도 치안상으로도 좋다. 환경이 개인과 집단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니까. 그래서 칙칙한 골목에 페인트질을 하는 것 자체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엄청 특별한 명소인 양 광고해대는 것에는 좀 질리는 참이었다. 이화동 벽화마을이나 감천문화마을이 명소였던 것은 희소가치 때문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어딜가도 엇비슷한 벽화마을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곳을 그 지역의 필수 여행 코스처럼 홍보해버리니 김이 새는 것이었다. 무슨 프랜차이저냐고.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이다가, 아무리 여수가 좋아도 벽화마을의 클리셰(?)를 깰 순 없을 것이다, 적당히 날개 있고 어린왕자 있고 유명한 시 적혀있고 그렇겠지, 안봐도 뻔하다 등등으로 생각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시간도 남으니까, 올라가서 확인한 뒤 그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해줘야지. 그리고 킬링타임용 셀카나 몇 방 찍고 내려와야겠다.

나는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2.

천사벽화골목은 진남관 바로 맞은편 고소동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진남관이 내려다보인다.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 도중 찍은 진남관. 이 각도도 제법 괜춘하군.








이순신과 관련 깊은 동네라서 그런지, 입구쪽엔 제법 많은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테마가 있는 벽화로군. 이런 거 좋지.  






이순신 벽화를 따라가다보면 중턱에서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와 타루비를 만날 수 있다. 

비각이 왜 하필 이런 오르막길의 민가 틈에 세워졌나 했는데,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곳은 포루였으며 이순신 장군님이 이 자리에서 군령을 내리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진남관 쪽에서 이어지는 전라좌수영성은 여기까지 포함되는 걸테다.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주변에 작은 주택들이 들어찼지만, 조선시대 땐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본다. 




비각이 있는 곳에서 내려다본 골목. 

오른쪽 담벼락에 기와지붕처럼 그려놓은 게 귀엽다. 먼 곳에 빼곡히 박혀있는 집들도 재밌고. 




여기까지 구경을 하자 제법 괜찮네 싶어졌다. 골목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고, 날씨도 선선하니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어디보자, 남은 시간이... 뭐... 조금만 더 가볼까?

나는 돌아갈 버스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벤치 위 화살표가 나있는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보기로 했다. 






3.

처음엔 심심풀이로 걷던 거였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나는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세상에" 혹은 "미쳤나봐" 등등의 짧은 감탄사만 내뱉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길 반복했단 소리다.

왜 그랬냐고?


아, 좋으니까!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은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이 아니라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강조를 해야한다면 '벽화'가 아니라 '고소동'의 '골목', 그리고 높은 위치임을 알려주는 '천사'라는 단어라는 것이다.

벽화도 물론 작업하신 분들이 잘 그리셨다. 감각적이고 느낌있는 벽화들이 많았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저 너머의 배경이 워낙 압도적이었는지라 도저히 벽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벽화보다도, 그 너머의 여수가, 진짜 짱이었다! 당시 느꼈던 소녀소녀한 감성을 표현하자니 나 10대 때 많이 썼던 그 따위 옛날 말(캡짱이 아닌게 어디야)이 나오는데 하여간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여수는 진짜 짱짱이었다!

내가 왜 이 벽화골목 표지판을 심드렁하게 바라본 거지? 이곳은 평범한 벽화골목과는 다른데 말야. 벽화보다는, 골목의 위치가. 항구 바로 앞에 있다는 점이, 시내에 아파트 단지가 없다는 점이, 근방엔 뷰를 가로막는 구조물이 없다는 점이 말이다. 

조금 전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이곳이야말로 여수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며 여수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곳인데!

나는 과거의 자신을 한없이 부정하고 반성하며 골목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고소동 벽화골목에서 바라본 여수 낮바다.

이런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내 멋대로 상상회로를 가동시켰다. 여기 어디 옥탑방에 집을 구하고... 아침에 일어나 여수의 바다내음을 맡으며 식사를 하고, 점심엔 빛나는 여수 앞바다를 바라보며 작업(뭔지는 몰라도 그냥 예술활동... 창작활동!)을 하다가, 밤이 되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여수 밤바다를 감상하는 거지...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헤다가 잠들고...

우와, 상상만 했는데도 엄청 낭만적... 낭만적이다! 갑자기 여수에 가서 살고 싶어졌어! 여수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여수에 무슨 일자리가 있나 좀 찾아봐야겠다!





4.

다니다가 본 벽화 중에는 인증샷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재밌는 벽화도 있었다.




뭐 이렇게 그네타는 흉내를 낼 수 있는 벽화라던가...




강아지에게 달린 산책줄을 잡을 수 있는 벽화라던가...




타일로 만든 아기자기한 벽화도 있었는데...




그 벽화 너머의 풍경이...




예술 작품보다 더 예술 같은 여수의 풍경이...


...헉!

이거 보시라!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벽화를 보다가 갑자기 풍경으로 초점이 옮겨간단 말이다!

내가 찍은 사진들을 순서대로 보면, 벽화1-벽화2-벽화2 뒤의 풍경1-풍경1의 확대샷-풍경1 옆의 풍경2-풍경2와 3-풍경 1,2,3의 파노라마... 이렇게 흘러간다. 당시 사진을 찍던 내 의식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순서... 참 알기 쉽죠.





5.

그 의식의 흐름대로 찍어놨던 사진들을 어느 정도 추려서 쭉 올려본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마주쳤을 때 손에 쓸만한 카메라가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내 핸드폰이 애써서 그 역할을 대신 수행했는지라 다행이다 싶다. 전날 배터리 빠방하게 충전해놓길 참 잘했다.




이 때는 3월 중순이었다. 가녀리게 핀 꽃 뒤로 보이는 여수.




오밀조밀한 지붕 아래로 보이는 항구.




낮의 돌산대교와 장군도. 밤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사실 이 세 장을 길게 합쳐놓으려고 했는데 포토샵이 오류나서 꺼지는 바람에 걍 안하기로 함.




여기는 이발손데,




글씨는 잘 안보이겠지만 라면도 끓여주고 냉아이스커피도 타준다고 함.

한문과 영어를 동시 사용하여 강조할 정도면 얼마나 시원한 커피일지!




역시 이순신의 고장 아니랄까봐 연들이 그려져있다.

연 벽화 옆엔 요새 어딜가든 있는 (심지어 동네 음식점엘 가도 있는) 천사 날개가 있었다.




이쪽은 거북선 대교가 보이는 방면. 걷다보니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참고로 귀에는 아침부터 계속 로이킴 음악. 오늘은 하루종일 로이킴으로 달릴 것 같다.




천사카페가 있다고 해서 지역발전을 위해 맛있는 걸 많이 사먹기로 다짐하고 찾아갔는데 보수 공사 중인 듯.

문이 닫혀있었다.




벽화에 적힌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라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요새는 딱히 종교생활도 안하는데 다른 위로보다도 기도해주겠다는 말이 그렇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더라. 어쩐지 '당신의 문제를 나도 함께 고민하고 공유하겠어요'라는 의미 같아서.

이 벽화에 감사해서라도 나중에 다시 이 카페에 찾아와야겠다.




사진을 찍다가 이 비슷한 구도와 느낌을 다른 나라에서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고민했다.

바다... 오르막길... 어... 음... 쿠... 쿠바였나? 지금 옛날 포스팅 보면서 비슷한 사진 찾아보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뭐 어디 있겠지.




마을 이름이 웃겨서 깔깔거린 뒤 글을 읽었다가 이야기 보정받고 예뻐보이게 됨. 참 예쁜 마을 이름이얌.





계속 내려가니 가까워지는 바다와 지붕들.





또다른 주제를 가진 벽화 골목을 지났다. 이번엔 만화 캐릭터들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벽화보다도 반짝거리는 뷰에 눈을 뗄 수 없었더랬다...





6.

벽화골목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며 날 계속 헐떡이게 만들었다. 혼자 어머어머, 세상에 등등의 말을 하며 숨을 거칠게 내쉬는 바람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도 한 것 같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빛나는 광경들을 보게 된 나로썬 불가항력이었다. 여기 안보고 그냥 갔으면 어쩔 뻔 했어. 진짜 큰일날 뻔 했다고.

그렇게 내려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골목은 끝나있었고 바다가 눈앞이었다. 



여기는... 아, 어젯밤에 왔던 종포 해양공원이다. 마술사 아저씨가 공연하던 곳. 

나는 해양공원에서 어젯밤을 떠올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가, 저 천사들의 골목 위에서 새까맣게 잊었던 버스에 대해 간신히 떠올리고, 황급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라?

고작 30분이 흘러있었다. 그렇게 감동하고 그렇게 숨가쁘게 몰아쉬고 그렇게 많은 풍경을 봤는데 겨우 30분이 지났다고? 저 위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나? 나는 잠시 시계의 고장을 의심하며 핸드폰 시계를 다시 한번 체크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허허. 저 위에서 30분이 아니라 3시간은 머물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인데. 다른 세상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뭐, 진지 빨자면,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라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고 길게 기억된다고는 하더라. 맨날 똑같은 걸 보게 되는 학교나 회사에서의 30분과 여행지에서의 30분이 다른 이유다. 이래서 사람은 여행을 다녀야 해. 밀도 있는 시간들로 인생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지. 암암.  

하여간 시간은 넉넉하다. 나는 해양공원 너머로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선 가벼운 운동으로 활성화된 내 위장을 비워주기로 했다. 어디보자, 공중화장실이 여기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마지막 종포 해양공원에서 계속!






덧글

  • LionHeart 2017/05/01 10:52 # 답글

    사진에 보이는 언덕? 산? 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시야를 방해하는 것 없이 멋진 여수 경치를 감상할 수도 있겠네요.
    글을 읽어보면 enat님께서 여수라는 도시에 정말 흠뻑 빠지신 것이 느껴집니다. ^^
  • enat 2017/05/01 15:58 #

    여수 항구 쪽엔 그렇게 높은 건물도 없고 높은 구조물도 없어서 조금만 높은 언덕에 가도 시야가 확 트더라고요! 경치 구경하기 참 좋은 동네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진짜 여수에 푹 빠져있습니다아... 꼭 여수가 아니더라도 여수같은 풍경을 가진 동네에서 살고 싶어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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