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7 20:38

타이중 (7) 싱위와 티타임 └ 타이중 힐링여행

1.

르웨탄에 다녀온 다음날 아침. 조금 늦잠을 잤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나는, 옷을 대충 챙겨입고 로비로 나왔다. 그리고 식권을 이용하여 호텔 조식을 먹으려다가, 어제의 그 뻑뻑했던 햄버거를 떠올리곤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물론 햄버거는 맛있었지만, 국물,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 근처에 국물 파는 집은 없을까?

나는 로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할 일 없어보이는 직원 한 명을 발견하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머무는 동안 처음 본 직원이었다.

나 : 있잖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영어)
직원 : 무슨 일이에요? (한국어)


...

......


?????????


나 : 어? 한국...말? 한국인이에요?
직원 : 저 대만인이에요. 어떤게 필요하세요?


그녀의 한국어는 완벽했다.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나 : ...거짓말이야! 한국사람이죠?
직원 : ㅋㅋㅋㅋㅋ 아니에요! 저 대만인이에요. 한국말 배웠어요. 한국 좋아하거든요.
나 : ...뭐지? 이거 몰래카메라에요? 어디 카메라 있는 건가?
직원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에요! 저 대만 사람 맞아요!






2.

그 직원의 이름은 싱위라고 했다. 나는 일단 싱위에게 이 근처에서 국물을 파는 식당이 있는지 물어봤다. 싱위는 잠시 고민하더니 지도를 꺼내어 길을 알려줬다. 그러나 곧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싱위 : 거기 메뉴, 다 중국어에요. 어려워요.
나 : 오... 괜찮아요. 아무거나 찍어서 먹으면 되니까.
싱위 : 그럼 안돼요!


그러더니 싱위는 자신의 카톡을 열어 내 아이디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카톡으로 가게 메뉴 사진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싱위 : 그럼 제가 번역해드려요! 그거 보고 메뉴 고르세요.
나 : 아니 뭐 그렇게까지...


다른 곳(쿠바 같은 곳)이었다면 의심하며 경계했겠지만 여긴 타이완이잖아! 그래서 나는 그 친절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나 : ...도와준다면 나야 좋죠! 고마워요!
싱위 : 맛있는 아침 식사 하세요!






3.

숙소에서 싱위가 알려준 곳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였다.




싱위는 내가 길을 못찾을까 걱정했는지 가게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나는 내가 찾은 가게 사진으로 싱위에게 화답했다. 싱위는 마치 내 어린 조카가 서툰 손놀림으로 글자를 썼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똑똑하다며 칭찬해줬다. 외국인에게 한국말로 "잘 했어요! 똑똑한 사람이에요!"라고 듣는 건 제법 특이한 경험이었다.




주변 가게들은 문이 닫혀있거나 열려있어도 사람이 없었는데, 이 가게는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싱위가 알려준 밥집은 동네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맛집인가 보다.




싱위는 내가 국물을 간절하게 원했던 걸 기억하고, 내게 그런 메뉴를 골라줬다. 더불어 계란 반찬까지! 나는 싱위가 보내준 사진을 들고 사장님께 다가가 그대로 보여주며 여기 이 동그라미가 쳐진 걸로 달라고 했다.




곧 나온 "국물"과 "치즈계란전".

"국물"은 이런저런 야채와 어묵 비슷한 것과 간 비슷한 것이 들어가 있었다. 나중에 싱위가 말하기를, 그 집에는 세 가지 종류의 "국물"이 있는데, 아침에는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끓여서 판다고 했다. 아마도 전날 팔다가 남은 재료들을 아침에 와장창 넣고 팔팔 끓여 파는 듯 했다. 잡탕이라 할 수 있겠군. 국물맛은 나름 시원하니 괜찮았고, 아침에 국물이 간절했던 내겐 엄청나게 감사한 메뉴였다.

"치즈계란전"은 계란 후라이에 치즈를 뿌린 걸 예상했는데, 계란에 밀가루 반죽을 섞어서 얇은 전처럼 만들고 그걸 반으로 접어 가운데에 치즈를 넣은 요리였다. 이것 역시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과 치즈계란전을 맛있게 먹었다.

국물과 치즈계란전을 먹다보니, 뭔가 고기 맛이 나는 무언가가 먹고 싶어졌다. 나는 이번엔 싱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메뉴를 골라보기로 했다. 메뉴판에서 적당히 고기 육자가 들어간 음식을 시켰다. 옆에 엄지척도 붙어있으니까 괜찮겠지!




고기 반찬 같은 걸 기대했는데 고기가 들어간 토스트란다!

취소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음식이 벌써 나와버렸다.




고기와 계란이 들어간 토스트... 엄청 목메인다아...

싱위 : 시키기 전에 저한테 물어봤어야죠!
나 : 잘 고를 줄 알았어요... 자만했어요...


결국 안에 있는 고기만 쏙 빼먹고 빵은 어느정도 먹다가 버렸다.




후식은 가게 옆에 있는 편의점표 야쿠르트. 토스트만 빼놓고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였다.





4.

아침을 먹고, 타이중 중앙역 뒷쪽 까르푸에서 쓰잘데기 없는 직장용 기념품을 잔뜩 산 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까르푸에서 1+1으로 팔던 사과맛 우유도 샀는데, 나 하나 먹고 싱위도 하나 줬다. 싱위는 감격해하며 우유를 받았다. 에이, 감격까지야.

직장용 기념품을 캐리어에 넣기 위해, 짐 정리를 좀 했다. 그러다가 얼굴 마스크팩을 발견했다. 이 녀석들은 여행할 때면 늘 챙기지만 늘 안하고 돌아간단 말이지. 나는 짐정리를 위해 마스크팩과 로션 샘플들을 모아서 호텔 직원들에게 돌렸다. 호텔 직원들은 한국의 화장품이라며 행복해했다. 특히 싱위는 "아까 우유도 줬잖아요! 왜 자꾸 주기만 해요!" 등등의 말로 감사를 표했다.

짐정리가 끝난 뒤, 마사지를 받기 위해 싱위에게 마사지샵에 대해 물어봤다. 싱위는 처음에 네이버(진짜 네이버였다. 타이완인이 네이버를 열어서 한국어로 "타이중 마사지샵"을 쳐서 내게 보여줬다. 타이완인이!)에서 검색한 "춘부라오"를 추천해줬지만, 나는 어제 거기 가봤는데 힘이 너무 약해서 별로였다고 말했다. 싱위는 그럼 자기네 집 근처에 있는 곳에 가보라며 어떤 마사지샵을 추천해줬다. 거기가 바로 전 포스팅에서 다뤘던 "탕춘리츠"였다.

나 : 좋아요! 그럼 거기에 가볼게요. 다녀올게요!
싱위 : 아, 저기, 혹시 오늘 다른 일정 있어요?
나 : 다른 일정? 왜요?
싱위 : 저녁 식사 같이 먹을래요?
나 : 저녁? 아,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정말이었다. 이 날 저녁, 다른 도시에 사는 웨이가 타이중으로 오기로 했다. 싱위는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럼 저녁 먹기 전 오후에 같이 차를 마시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싱위는 그 말에 반색하며 자신의 쉬프트는 3시에 끝난다고, 그럼 3시부터 함께 차를 마시자고 말했다. 나는 싱위와 티타임 약속을 하고 호텔을 나섰다.





5.

탕춘리츠에서 그 아팠던 마사지가 끝나고, 시내와 공원 등을 구경하다가 3시에 호텔로 돌아왔다. 싱위는 자신의 업무를 마치며 다른 직원들에게 "나 오늘 이 언니랑 놀러 나갈거야 훗훗" 하는 의기양양한 이야기를 했고, 쉬프트가 끝나지 않은 다른 직원들은 싱위를 부러워했다. 싱위와 나는 다른 직원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싱위 : 그럼, 어디서 차를 마실까요?
나 : 잘 아는 카페 있어요? 아는 데 가죠, 뭐.
싱위 : 우우, 사실 여기 카페 잘 몰라요.


엥?

나 : 그치만... 여기 살잖아요?
싱위 : 저 사실, 타이중에 온 지 3개월밖에 안돼서, 여기 잘 몰라요.


현지인인 줄 알았는데 저쪽도 타이중 초짜였다!

나 : 뭣! 역시, 한국인인데 타이완에 와서 타이완인인척...
싱위 : 아니에욬ㅋㅋㅋㅋ 저 다른 작은 지방 마을에서 살다가, 타이중 왔어요. 타이중 잘 몰라요.
나 : 그럼 혼자 살아요?
싱위 : 혼자에요. 가족들 고향에 있어요. 저는 호텔에 일하러 왔어요.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벌써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갑자기 안쓰러워졌다.

나 : 나 가이드북 있으니까, 여기 써있는 곳 가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싱위 : 아니에요! 내가 사줄게요.
나 : 시끄러워요. 나 돈 많아요. 빨리 따라와요.






6.

내가 가이드북에서 고른 카페는 '우웨이차오탕(無為草堂, 무위초당)'이라고 하는, 일본식 찻집이었다. 아리산 우롱차를 팔고 있다고 해서 관심이 갔다. 여행 전 일정을 짜며 아리산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뺐었는데, 그 때문에 기억에 남은 참이었다.

호텔(타이중역)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우웨이차오탕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타이중의 시내 버스는 짧은 거리인 경우 무료로 탈 수 있는데, 여기까지 갈 땐 요금을 냈기 때문에 거리가 나름 떨어진 곳이라 가늠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싱위가 아닌 내가 구글로 알아봤고, 버스 역시 내가 잡아탔다. 싱위는 날 졸졸 쫓아오며 말했다.

싱위 : 이상해요! 길 너무 잘 알아요!
나 : 응?
싱위 : 한국 사람 아니죠? 타이완 사람이에요!
나 : 잌ㅋㅋㅋㅋ 따라하지 마요.
싱위 : 타이완 사람이에요!
나 : 아니라곸ㅋㅋㅋㅋㅋ



싱위와 버스 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에 나는 것 몇 개만 써본다.

- 싱위는 한국 드라마와 한국 예능을 좋아해서 한국말을 배웠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미친 듯이 돌려보다보니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충격적인 건 나보다 한국의 신조어를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요새 TV를 잘 안보다보니 그런 말에 많이 둔해졌었는데, 싱위는 왜 한국 사람이면서 자기보다 더 모르냐며 유행어 몇 개와 줄임말 몇 개를 설명해줬다. 타이완에 가서 타이완인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왔다...


- 싱위는 혼자 한국에 다섯 번 정도 여행을 왔고, 앞으로 몇 달 뒤에 또 갈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이 너무너무 좋단다. 나는 놀러올 때 연락하라고 했다.


-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지나는데 어떤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 한국어 학원이 있다고 알려줬다. 내가 신기해하며 쳐다보니까, 한국어 학원 중 한국 아이돌 가수 중 누구(이름을 들었는데 내가 아이돌을 잘 몰라서 듣고도 까먹었다)의 아버지가 차린 학원이 있는데, 장사가 엄청 잘된다며 부럽다고 했다. 그건 정말 부러운 일이군.


- 싱위가 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 호텔에서 경력을 쌓아 한국에 있는 호텔로 가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워킹 퍼밋을 발급받을 수 있냐고 묻자 워킹 홀리데이를 이용할 거라고 했다. 워킹 홀리데이! 나는 박수를 치며 응원한다고 했다.


- 내가 전날 르웨탄 호수에 다녀왔다고 하자, 자기도 몇 주 전에 르웨탄에 처음 가봤다고 말했다. 내가 날씨가 흐려서 아쉬웠다고 하자, 싱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기가 갔을 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싱위의 실감나는 묘사를 들으며 전날의 날씨에 감사하게 됐다.


- 싱위는 내게 고미습지에 가봤냐고 물었고, 나는 지나가던 사람이 추천(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보겠다)해줘서 알고는 있지만 못가봤다고 했다. 싱위는 엄청나게 아쉬워하며, 타이중에 왔다면 고미습지는 꼭 가봐야한다고, 그러니까 다음에 또 오면 함께 고미습지를 가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 전부터 궁금했던 "왜 타이중은 시내 버스비 10km 이하가 무료인가"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자 싱위는 한국말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하길래 영어로 말해도 된다고 했더니, 엄청나게 유창한 영어로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영어로 쏼라쏼라하는데 갑자기 사람이 달라보였다. 사용하는 언어가 사람의 인상을 이렇게나 좌우하는구나. 여하간 싱위 왈, 우리가 버스를 타는 만큼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시의 지원을 받아 무상으로 버스를 탈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오토바이로 인한 대기오염 해결 방안의 일부라고.


- 한국 드라마를 보면 다들 술 먹을 때 고개를 돌리던데, 왜 돌리냐는 질문을 받았다. 웃어른을 향한 일종의 예의라고 설명해주자, 싱위는 어쩜 이렇게 다르냐며, 타이완에선 그 행위가 무례한 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왜 다들 저렇게 좋지 않은 태도로 술을 마실까 의아해하며 드라마를 봤다고 했다.


- 마찬가지로, 왜 다들 밥을 먹을 때 고개를 숙이고 먹냐는 질문도 받았다. 그것 역시 예의라고 하자, 싱위는 또다시 어쩜 이렇게 다르냐며, 타이완에선 밥그릇을 들고 먹는 게 예의라고 했다.

나 : 한국 밥그릇 본 적 있어요? 놋그릇, 쇠그릇, 뭐 그런 건데.
싱위 : 본 적 있어요! 한국 식당에서 일했었어요. 엄청 뜨거워요!.
나 : 그래서 우리는 밥그릇을 들고 먹을 수 없어요. 옛날부터 그런 열전도율이 높은 그릇을 사용해와서 현대에 와선 예의처럼 되어버렸죠. 타이완의 그릇은 나무나 사기로 만들죠?
싱위 : 맞아요! 그래서 타이완에선 들고 먹을 수 있어요.
나 : 그런 문화적 차이죠.



- 나는 싱위에게 왜 타이완 사람들은 그렇게 친절하냐고 물었다. 싱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절하던가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남들을 돕는 걸 좋아한다고는 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싱위는 엄청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싱위 : 제가 누군가 돕는 거, 기회잖아요.
나 : 기회? 무슨 기회요?
싱위 : 누구를 도우면 제가 그 사람이랑 친구가 될 수 있잖아요.
나 :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
싱위 : 응. 그럼 나는 친구가 생겨서 좋잖아요. 다른 좋은 일도 생길 수 있어요.
나 : 그럼, 누구를 돕는 건, 내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기회인 거에요?
싱위 : 그렇죠!


생김새는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타인을 대하고 있었다.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라니.
별다른 고민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는 싱위를 보면서,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태까지 쌓아올린 내 머릿속 "도움"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쪽이 좀 더... 좀 더... 예쁠 것 같아서.





7.

불금이란 건 전세계 공통이었는지, 타이중의 도로는 잔뜩 길이 막혀있었다. 덕분에 우웨이차오탕까지 가는 데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싱위와 나는 뭐가 그렇게 재밌었던 건지, 시간에 공백을 두지 않고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내가 그렇게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싱위와는 끊임없이 대화가 오고 갔다.

우웨이차오탕이 있는 거리는 엄청 번화가 느낌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싱위는 우웨이차오탕을 향해 바삐 걸으면서도, 내게 "저 쪽에 있는 음식점은 엄청 유명해요. 저기 타이중 왔으면 꼭 가야해요. 그러니까 타이중에 다시 와요."라던가, "저 쪽에 있는 음식점은 비싸지만 맛있는데, 여행자들은 저기 꼭 가는데, 왜 저기도 안가봤어요. 그러니까 타이중에 다시 와요."라는 말을 계속 해댔다. 나는 꼭 다시 올테니까 그만 하라고 했다.




여기가 그 무수히 많은 맛집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자리를 잡은, '우웨이차오탕(無為草堂, 무위초당)'이다.




우웨이차오탕은 일본식 가옥과 중국식 정원이 혼재된 정통 다도 찻집이다. 밖에서 보기엔 차만 딱 팔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안에 들어가보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스낵과 식사도 가능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엔 식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메뉴판을 보고 적당한 메뉴들을 골랐다. 그런데 내가 고른 메뉴 중 어떤 메뉴의 재료가 다 떨어졌나보다. 카페 직원 언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싱위에게 뭐라뭐라 설명을 하니 말이다. 싱위는 그 말을 해석해서 내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빠르게 나는 다른 메뉴를 짚으며 "그럼 대신에 이걸로, 이걸로 줘요."라고 말했고, 직원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싱위는 의심쩍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싱위 : ...타이완인...
나 : 응?
싱위 : 방금 저희 말 다 알아들었어요! 타이완인이에요!
나 : 아니, 그냥 눈치롴ㅋㅋㅋㅋ
싱위 : 타이완인이에요!






음식보다 먼저, 일본식 다도 도구가 등장했다. 아리산 우롱차를 내려줄 기특한 녀석들인가보다.





엄청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것 같은 직원 언니가 나타나, 우리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우선 뜨거운 물을 주전자 밖에 붓고, 안에도 붓고, 버린다... 버린다?

나 : 왜! 왜 물을 그냥 버려?

싱위가 내 질문을 직원에게 대신 물었고, 직원은 주전자를 데우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 외에도 뭔가를 잔뜩 하다가, 드디어 잎을 넣고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그 물을 버려버린다.

나 : 왜! 왜 찻물은 그냥 버려? 주전자는 다 데웠잖아!

싱위는 또다시 내 질문을 직원에게 대신 물었고, 직원은 원래 처음 찻잎을 우린 물은 마시는 게 아니라며, 이건 찻잎을 씻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 혼자 왔다면 왜 먹을 걸 함부로(?) 버리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궁금해서 데굴데굴 굴렀겠구나 생각했다.




두번째 찻물을 우린 뒤, 우리에게 차를 따라주는 직원. 그런데 내 앞에 놓인 찻잔이 두개다. 나는 이번에도 왜 찻잔이 두개나 되냐며 물어보려고 했지만, 직원이 먼저 선수쳐서 설명해줬다. 길쭉한 잔은 향을 느끼는 잔이고, 향을 충분히 느꼈다면 옆의 보통 찻잔에 옮겨 마시면 된단다. 오!

나 : 신기하다! 향을 느끼는 잔이 따로 있다니!
싱위 : 아리산의 차에요. 아리산은 차가 유명해요. 향이 좋아요.


나는 싱위가 먼저 향을 맡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따라하며 향을 맡았다. 음음. 훌륭한 향이다. 이 정도 맡았으면 됐나? 나는 차를 찻잔에 옮겨담고 한 모금 마셔봤다.

나 : 오오!
싱위 : 좋아요?
나 : 하나도 안떫고 가볍고 산뜻해요!


내가 차 끓이면 엄청 떫거나 무겁거나 쓰거나 그러던데. 좋은 찻잎을 전문가가 끓여줘서 그런가? 이런 차라면 이 정도 가격은 하나도 아깝지 않구나 생각했다. 싱위는 내가 말한 떫다, 산뜻하다, 등등의 단어를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표현인거 같다고 느꼈는지 웃었다.





차를 음미하며 마시고 있었더니 곁들여 먹을만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생선이 들어간 만두 같은 걸, 싱위는 고구마볼이란 걸 시켰다. 생선 만두(?)도 하나도 안비리고 엄청 맛있었지만, 고구마볼은 더더욱 맛있었다. 나는 원래 고구마를 별로 안좋아하는 편이라, 싱위가 이 메뉴를 골랐을 때에도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이 고구마볼이란 녀석은 고구마 맛이 날 뿐 고구마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엄청 쫄깃쫄깃하고 따끈따끈한 녀석이었는데... 흐아 또 먹고 싶다...





8.

싱위와 나는 그 이후로도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카페에 거의 3시간 동안 있었으니까, 3시간을 꼬박 떠들어댄거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건지 지금에 와선 기억이 잘 안나지만, 하여간 엄청 떠들썩하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싱위 : 이따 저녁 약속은 누구에요?
나 : 아, 저녁? 친구. 타이완인이에요.
싱위 : 타이완인 친구요? 어떻게 만났어요?
나 : 그건 내가 볼리비아에 있을 땐데...


나는 싱위에게 웨이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풀었다. 볼리비아에서 만난,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가 가능한 유능한 청년의 이야기, 아타카마에서 그 청년을 포함하여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모험하려다가 실패한 이야기, 잠시 헤어졌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야기 등등.

싱위는 웨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고, 엄청 좋은 인연이라며 박수를 쳤다. 그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싱위 : 네? 한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 분이 여행을 왔는데 바람 맞혔다고요!?
나 : 아... 그게...
싱위 : 게다가 타이베이에도 왔었는데 그 분께 연락만 하고 만나지는 않았다고요!?
나 : 움... 그게...
싱위 : 나빠요! 나쁜 사람이에요!


할 말이 없다.

나 : 우우우음... 알아요. 내가 나빴죠...




그 나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덧글

  • 바람 2017/08/27 20:57 # 답글

    잠은 무조건 집에서 자야되는 별난 성격상 어디 여행이랄 만한 것을 못 가는데 여행기를 읽다 보면 나가고 싶어지네요. ㅎ
  • enat 2017/08/27 21:37 #

    저도 집이 아니면 잠을 잘 설치는 편이긴 한데 방랑병에 걸려버려서 여행 중엔 잠을 포기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여행 다녀오면 집에서 이틀 정도 꼬박 자야 피로가 풀리죠... 이 무슨 나폴레옹...
  • 가녀린 맘모스 2017/08/27 20:59 # 답글

    우와...
    맞아요 저도 대만의 다른 것보다도 사람들이 너무 친절해서... 구글지도가 워낙 잘 돼있긴 했지만 길 알려달라고 하면 대체로 그 장소까지 데려다 주더라고요!!! 대만 또 가고 싶네요... 여행기 넘 재밌어요
  • enat 2017/08/27 21:41 #

    감사합니다:) 대만은 볼거리보다도 친절한 사람들이 더 매력적인 나라인 것 같아요 ㅠㅠ 그 친절의 근원이 "널 도와주면 내겐 새 친구가 생기는 거잖아~"라고 들으니 감동이 몰려오더라고요. 저도 대만 또 가고 싶어요! ㅠㅠ
  • 존평씨 2017/08/28 09:49 # 답글

    타이완에 사는 착한 한국인 싱위씨가 아니면 모를 뻔 했어요.
    enat님은 나쁜 사람이었어!!!
    게다가 그동안 한국인으로 위장을!!!
    밀입국자다!!!
    밀입국한 타이완 사람!!!
  • enat 2017/09/01 08:27 #

    쉿! 이런 건 비밀 덧글로 달았어야죠!
    어디 신고하시면 안돼요!
    그럼 더 이상 포스팅을 못하게 된다구욧!
  • LionHeart 2017/08/28 11:38 # 답글

    싱위 씨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카톡을 내미는 부분에서 빵터졌습니다.
    저도 중국인 친구가 Tea Pet을 선물해주었을 때, 이게 뭐냐고 물으니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차를 마실 때 처음 물을 버리는데, 그 버리는 물을 따를 때 쓰는 도구라고 하더군요. 제가 받았던 것은 뜨거운 물을 부으면 색이 변하는 인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첫 물을 버린다는 것 외에는 몰랐는데 enat님 덕분에 타이완의 차도에 대해 배우게되는군요. ^^
  • enat 2017/09/01 08:43 #

    저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카카오톡을 다루던 타이완인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
    저도 다도는 잘 몰라서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주전자 뎁히고 첫물 버리고 하는 것 외에도 뭔가 여러가지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홀라당 까먹어버려서 'ㅅ' 기억은 잘 안나지만요! ㅋㅋㅋㅋ
  • 2017/08/28 15:55 # 삭제 답글

    무한도전 박명수씨 프랑스에서 한국어하는 외국인 여럿 만난거 생각나요
    요즘 한류덕에 한국어 하는 외국인 많은데
    한국어 못알아들을거라고 막 말하는 거 보면
    제가 다 심장 쫄깃하고 부끄러워요;;;

    찻집 멋져요!!!
    연못가에서 난간에 기대어 앉아 와지끈 첨벙
    이, 이건 아니고ㅋㅋ
    밑에 비단잉어라도 있음 디저트 나온거 빵 과자부스러기 던져주면서 차 한잔 캬아 ㅋㅋㅋ
    집에 여행다녀온 사람들이 준 중국차 홍차 좀 있는데
    더운물 많이 필요하고 귀찮아서 잘 안마셔요
    녹차 자스민차 같은건 대충 타도 쓴맛 잘 안나는데
    홍차 같은건 제대로 타야 마실수 있는 물건이라서
    누가 저렇게 제대로 잘 타주면 좋겠어요ㅋㅋㅋ
  • enat 2017/09/01 08:48 #

    한국어로 막말하는거 보면 눈쌀 찌푸려지죠...
    외국인한테 한국어로 이상한 말 가르치고 의미도 안알려준 채로 따라하게 하고 막 자기네들끼리 웃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왜 저러나 싶더라고요.
    비단잉어.... 음.... 그러고보니 제가 카페 사진을 많이 안올렸군요. 언급하신 물고기가 실제로 카페에서 살고 있었어요... 홓 나중에 포스팅 해볼게요!
    저도 저 카페에서 아리산 우롱차 찻잎 남은거 싱위가 싸준 덕에 한국까지 가져왔는데 손도 안대고 있어요. 엄청 제대로 타야할 것 같은데 도구도 변변찮아서... 으음 차 전문가한테 돈주고 맡기고 싶네요... ㅋㅋㅋ
  • Tabipero 2017/09/14 04:26 # 답글

    살짝 중국어 억양이 섞인 능숙한 한국어가 음성지원 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이렇게 한국어 잘 하시면 우리나라에서 일해도 잘 해 나가실 것 같네요.
  • enat 2017/09/24 23:00 #

    오늘 카톡했는데 워킹 서류 내고 한국생활 준비중이라고 해요!
    영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하니 뭐든 해도 잘 할 것 같습니다! 아휴, 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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