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4 19:49

몽골 자유여행 (4) 게르 생활 적응기 ├ 몽골 자유여행 (2017)

1.

내가 머물렀던 Dream Adventure Mongolia는 굉장히 작은 캠프였다. 게스트 게르가 3, 4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캠프의 규모에 비해 부지는 상당히 넓었고, 각 게르의 간격도 제법 멀었다. 그래서 산책하러 밖에 나가도 사람을 마주칠 일은 극히 드물었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어도 눈 앞에서 대면하는 게 아니라, 거의 이런 식이었다.

- 어라? 저기 먼 발치에 사람이 보인다.
- 금발인걸로 봐서 장기 투숙객인 메리인 것 같다.
- 내게 손을 흔드는구나. 나도 흔들어야지. 간만에 사람을 봤다.


게다가 게르에는 창문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다. 그러니 방 안에서 쉬고 있을 땐 그 인영조차도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란 걸 감안한다면, 전 포스팅에 올렸던 원맨쇼 동영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다들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혼자 카메라 설치하고 폼 잡고 걷고 뛰고 뒷짐지고 아장아장 총총총거리면서 다닐 수 있었던 거다.

...미니미니가 오늘 하루종일 그 동영상 가지고 날 놀렸는데 아마 누구나 그런 멋진 곳에 갔는데 인적이 드물고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나처럼 영상이든 사진이든 뭐든 찍을 거다. 미니미니 너도 찍을 거다. 안찍고 배기겠냐!

아, 이야기가 잠시 샜다. 하여간 게르 캠프 내에선 사람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걸 감안하고, 글을 쭉 읽어주시길 바란다.





2.

내가 머물렀던 게르.





단 사흘 머물렀지만 엄청 정이 들었던 고마운 게르다. 다른 게스트 게르에 비해 화장실과 주방이 가깝다는 이점이 있다. 물론 그래봤자 2, 3분은 걸어야하는 거리지만 말이다.




- 뭘 보냐. 닝겐.

처음 내가 이 게르에 짐을 풀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내 게르 지붕 위에서 쉬고 있었다. 나중에 이 고양이의 이름이 심바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심바 새끼...

이 녀석은 틈만 나면 개들에게 냥펀치를 먹였다. 그리고 잽싸른 몸놀림으로 개들의 사정권을 빠져나갔다. 가끔씩 액체 같은 몸뚱이를 이용해 주방에 들어가 절도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나랑 잘 놀다가도 수틀리면 날 마구 할퀴거나 물어버리곤 했다. 내 손등에는 아직도 녀석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냥아치 새끼...




그렇게 성격이 나쁜데도 쓸데없이 귀엽게 생긴 요물 같은 새끼...

그렇게 손과 팔에 상처를 입었는데도 계속 심바에게 다가가는 나 역시 멍청하기 짝이 없고...




너 따윈... 방심했을 때 이렇게 만져버릴거야...




마구마구 만져버릴 거라고!!!!!





3.

헉.

포스팅 제목이 "게르 생활 적응기"에서 "냥아치 심바의 하루"로 바뀔 뻔 했다.

요물 같은 새끼...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 포스팅을 방해하다니...

잠깐 마당에 나가 심호흡하고 돌아와서 다시 게르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4.

내가 머물렀던 게르의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나랑톨 시장에서 봤던 나무 침대가 벽을 둘러싸고 4개 놓여져 있었다. 침대에는 여러 수납공간이 있었지만, 방 하나를 통째로 썼던 나는 짐을 바닥에 늘어놨기 때문에 수납공간을 이용한 적은 없었다. 내가 체크아웃 할 때, 미국인 세명이 이 방에 체크인을 했는데, 걔네들은 여러명이라 그런지 수납공간을 알뜰히 활용하더라.

가장 안쪽에는 거울이 하나 있다. 내 꼴이 지금 사람인지 짐승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다.




게르 가운데에는 나무 난로가 있다. 이 녀석 덕분에 몽골의 그 추운 밤과 새벽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물론 그를 위해서 난 1시간 간격으로 깨어나 불을 확인하고 장작을 넣고 다시 불을 지피는 등의 사투를 벌였지만 말이다. 잠이야 원래 잘 설치는 타입이라 그냥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만으로 감사하기로 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서 더 다뤄보겠다.

작은 문 바로 옆에는 간이 세면대가 있었다. 이 녀석을 이용해 세수나 양치 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 뭐, 이에 관한 이야기도 뒤에서 더 해보겠다.





5.

게르 캠프에는 게스트 게르 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편의 시설이 있었다.




여기는 주방게르. 여기서 키우는 갈색 개 메르시가 항시 주방에서 대기하고 있다. 누군가가 주방에서 나오면서 음식을 던져주는 게 버릇이 된 탓일 거다.

이 캠프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보조배터리를 4개나 들고 갔었다), 이 주방만큼은 태양전지 패널이 있었다. 그걸로 어떤 직원이 핸드폰을 충전하는 모습을 봤다. 물론 발전량은 콧구멍의 콧털만큼이라 게스트까지 챙겨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는 사우나. 푸세는 나보고 사우나를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했는데, 목욕도 아니고 사우나는... 그냥 좀 그랬다. 땀 흘리고 샤워할 물도 없는 걸, 여긴.

게다가 내가 뭐 한국에 있을 때 사우나를 즐긴 것도 아니고 (더워서 1분도 못 앉아있음), 그 1분의 경험을 위해 나무들을 잔뜩 태워야하는 건 더더욱 좀 그랬다. 그래서 나는 사우나를 하지 않았다.




여긴 샤워실. 별을 보며 샤워를 할 수 있다. 한여름이 아니고선 감기에 걸릴 것이다.




저건 화장실. 당연하지만 재래식이다.

푸세식답게 냄새가 어마어마했지만 관리를 잘하는지 내부는 깨끗한 편이었다.




저 먼 곳에 있는 건 다이닝 룸.




식사시간이 되면 이곳에 음식이 차려진다. 물론 식사뿐만이 아니라 티타임을 가질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여행자들과 담소를 나눌 수도 있는, 말 그대로의 다이닝 룸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몽골의 전통악기 마두금을 연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예술적인(?) 영상은 나중에 공개.




이곳은 마굿간. 몽골에서는 말을 방목으로 키워서, 말들은 보통 초원에서 자기네들끼리 풀 뜯고 논다. 그러나 밤이 되면 홀스맨이 그 말들을 마굿간으로 몰아온 뒤 재운다. 밤엔 캄캄해서 위험하니까 그렇겠지. 누가 훔쳐갈 수도 있고.

낮에는 암컷 야크들의 젖을 짠다던가 하는 자잘한 일을 이곳에서 하더라. 다음날 일정이 엉망이 되어버린 덕분에 야크젖 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6.

그 외 게르 주변.

게르 주변은 뭐... 뭐...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그냥 대자연이다. 게르 주변이 대자연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대자연 속 귀퉁이에 게르가 있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이 정도의 소개 정도면 이 게르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기엔 충분한 것 같다. 이제 이야기를 해보자. 이 게르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약간의 불평과 약간의 짜증과 약간의 불만이 조미료로 더해진 이야기를.





7.

게르 캠프의 주인인 푸세와 나미가 캠프 생활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떠난 덕분에, 나는 첫날 이 게르를 이용하는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누가 직원인지 정도는 알려주고 갔어야지.


게르에서 일하는 사람 중, 서툴지만 유일하게 영어를 쓸 줄 아는 여직원이 있었는데, 나는 이 여직원이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사실 나미가 그 여직원을 내게 소개시켜줄 기회가 있긴 했다. 나미는 막 도착해서 어리벙벙한 내게 게르 소개를 시켜주다가, 마침 근방을 지나가던 여직원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몽골어로 인사를 했다. 바로 이 때, 이 여자가 게르의 직원이라는 걸 내게 소개시켜줬어야 했다. 하지만 나미는 그녀와 그냥 인사만 하고 끝냈다. 심지어 내가 옆에서 궁금해하며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 친구야!"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 때문에 난 정말인지 그 여직원이 그냥 이 동네 사는 사람이거나, 나미의 친구인데 이곳에 숙박하거나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일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고! 그래서 늦은 오후, 그 여직원이 내게 저녁을 먹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 질문이 함께 밥을 먹자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여직원 : 저녁 먹을거야?
나 : 아, 나는 아까 점심을 늦게 먹었거든. 그래서 지금은 배가 불러. 이따 먹으려고. 너 먼저 먹어.


여직원의 영어는 많이 서툴렀다. 발음이 엄청 좋아서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자기가 할 줄 아는 문장을 말할 때의 발음만 좋은 거였고 의사소통 능력은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날엔 그걸 몰랐다.

여직원 : 저녁 안 먹어?
나 : 아, 여기 게르 캠프에서 3끼 전부 차려준다고 했거든. 난 걱정말라고.
여직원 : ......????


그 여직원은 잠깐 민망한 웃음을 짓다가, 알겠다고 말한 뒤 다른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답했다는 것을.

뭔가가 이상하게 꼬였다는 걸 깨달은 건, 해가 지고 나서 한참 뒤, 장작불도 지펴놓지 않아 싸늘하게 식은 텅 빈 다이닝룸에 들어갔을 때였다.





8.

이상하다. 분명히 저녁을 준댔는데. 왜 여태까지 아무도 내게 저녁을 제공하지 않는거지? 보통은 다이닝룸에 저녁 차려놓지 않나? 근데 왜 저녁이 안차려져있지? 밥을 대체 몇시에 먹을 수 있는 거지? 이걸 누구한테 말해야하지? 누가 일하는 사람이지?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밖에서 누군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게르 캠프에 가로등 불빛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작디 작은 내 손전등에 의지해 길을 걸어야만 했다. 나는 혹시라도 누군가 듣고 나올까 싶어서 익스큐즈미를 허공에 대고 외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맛있든 맛없든 대충 끼니만 챙겨먹으면 괜찮지만, 반대로 대충 챙겨먹지도 못해서 배가 고파지면 눈이 뒤집혀버린다. 나는 누군가에게 들리지도 않을 익스큐즈미로 직원을 찾다가, 나의 이 배고픔과 굶주림이 무진장 부당한 것만 같아 화가 났다. 내가 그렇게 많은 걸 바랬나! 호화스러운 밥상을 원한 것도 아니고! 그냥 끼니만 챙겨주면 되는데! 삼시세끼 다 챙겨준다는 나미의 말과 다르잖아! 직원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푸세랑 나미는 어딜 간 거야!


으아아아아아!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해먹겠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은 나는, 정신적으론 약간 발톱을 세운 채 주방 게르를 향해 달려갔다. 다이닝 게르에서 주방 게르까지의 그 짧은 길이 어쩜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지. 달리는 동안 게르 캠프에서 키우는 개 - 메르시와 에이미가 쫓아와 놀아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 개들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뛰었다.

주방 역시 장작을 피우지 않았기에 싸늘했다. 나는 그 싸늘한 주방을 휘휘 둘러보며 음식을 찾았다. 놀랍게도 벽 쪽의 작업대 위에 음식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지만, 그 여직원이 아마 날 주려고 음식 준비를 해뒀다가 내가 저녁을 안먹겠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주방에 버려두고 간 것 같았다) 그 거대한 그릇에 담긴 몽골식 만두는 몹시 맛있어보였고, 나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그 만두들을 먹을만큼 챙겼다.

음식이 차가우니 뭔가 따뜻한 것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곧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을 찾았고, 서랍장에서 티백을 찾아 홍차를 우리고 프림과 설탕을 넣어 밀크티를 만들었다.




몽골식 만두와 밀크티. 이게 첫째날 내 저녁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장작불이 지펴진 내 따뜻한 게르로 돌아가 맛있게 냠냠쩝쩝 먹었다. 그리고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였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했다.





9.

식욕을 해결하고 나니 깨달은 사실 하나. 나는 아직 씻질 않았다는 거다. 샤워는 못한다지만, 그래도 세수나 양치는 해야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씻는 걸까?


게르에는 아까 앞에서 이야기했던 조악한 간이 세면대 같은 게 있긴 했다. 구조는 간단했다. 위쪽에 물을 붓는다. 아래쪽의 밸브를 연다. 물이 졸졸졸 나오면 그걸로 씻는다. 근데 대체 그 위쪽에 부을 물이 어디에 있냔 말이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물을 뜰 수 있는 수돗가나 어딘가에 붙어있는 수도꼭지 등을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이 넓고 어두운 게르 캠프에서 그런 것들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까 해가 떠있을 때 미리 찾아볼 걸, 사진이나 찍으며 천하태평하게 노는 게 아니었어! 도대체 이놈의 게르는 왜 이렇게 크고 캄캄한 건지, 돌멩이는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소똥은 왜 이렇게 지천에 널려 있는 건지! 하여간 총체적 난국이다! 물! 씻을 물! 도대체 씻을 물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10.

그렇게 춥고 캄캄한 게르 캠프를 나홀로 헤매던 와중, 누군가가 저 위쪽의 게스트 게르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본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전등 불빛을 봤다. 나는 그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렇게 간신히 만난 한 명의 사람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간절함을 담아 소리치며 뛰어갔다.

나 : 기다려! 기다리라고! (한국어) 아니, 웨잇, 헬프미이이이! (영어)
이름 모를 사람 : 오? 무슨 일이에요! (한국어)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지? 저 사람 한국어를 쓴 건가?

나 : 어... 한국 사람?
이름 모를 사람 : 나 미국 사람! 한국어 알아요! 내가 거기 가요! 거기 있어!


그 사람은 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뛰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이름 모를 사람은 익숙한 듯 가볍게 뛰어 내 앞에 도착했다. 자기를 빌리라고 밝힌 그 사람은, 내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한국어로 물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반가워하며 그 사람에게 물었다.

나 : 나, 물! 물이 필요해요! 혹시 물 어디서 뜨는지 알아요?
빌리 : 목 말라요?
나 : 아, 씻을 물! 씻을 물 어디서 구해요?
빌리 : 나 지금 씻을 물 받으러 가요. 떠다줄게요.
나 : 그럼 나도 같이 갈게요. 어디서 뜨는데요?


빌리는 내게 게르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내가 어디서 물을 뜨는지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그를 쫓아갔다. 빌리는 그럼 조심히 따라오라며 날 데리고 물을 뜨러 갔다.





11.

3분? 5분? 어두워서 시간 감각도 흐려진 것 같다. 하여간 나는 몇 분 정도 걸으며 빌리와 대화를 나눴다.

빌리는 푸세의 친구로,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몽골에서 긴 여행 중이라 했다. 이 게르 캠프에선 제법 오랜 시간을 머물며 승마를 연습했고, 승마 연습 후 앞선 두 달 간 여자친구와 함께 말을 타고 몽골을 여행했다고 했다. 지금은 다시 캠프로 돌아와 쉬고 있는 중이라고.

나 : 우와, 말을 타고 여행했다고요? 말 잘 타나봐요!
빌리 : 우리 그냥 타요. 몽골인! 말 잘 타요. 그만큼은 못타요.
나 : 그래도 대단하네요. 근데 한국말은 어떻게 알아요?


빌리 왈, 자신의 외가 쪽 친척이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5살 때까지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며 한국말을 배우다가, 6살 때부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시민으로 살았다고 했다.

빌리 : 그래서 나 한국말, 5살 한국말이에요. 한국말 못해서 혼나요. 할머니한테.
나 : 아니에요! 빌리 한국말 엄청 잘해요. 제 조카만큼 잘해요.


거짓말 한 건 아니다. 내 조카는 5살이니까.

빌리 : 고마워요. 아, 저기서 물 떠요. 병에 담아요.





12.

빌리가 날 데려간 곳은, 아까 말들이 풀을 뜯던 곳 근처에서 봤던 작은 개울가였다.

나 : 어? 설마...
빌리 : 여기 물 깨끗해요. 먹는 거, 끓여요. 씻는 거, 이거 써요.
나 : 아... 아?



...여, 여기선 시냇물로 씻어야 하는 거였어?


첨단 과학 기술의 혜택이 가득한 대도시 문명 사회의 구성원이었던 나는, 시냇물로 씻는다는 개념에 쉽사리 익숙해지지 못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빌리가 앞에서 워낙 태연하게 물을 받고 있어서 티를 내진 못하고 그냥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리자, 나 자신. 여기선 원래 이런 건가봐. 촌티내지 말자고.

빌리는 그 개울가 중에서도 물을 쉽게 뜰 수 있는, 낙차가 제법 있는 명당자리를 알려줬다. 그는 그 자리에 쪼그려앉아 물을 떴다. 으아, 손 시렵겠다! 나는 내 몫은 내가 뜨겠다고 했지만, 캄캄해서 위험하다며 자신이 대신 물을 받아줬다.

나 : 고마워요! 이 물이면 이제 씻을 수 있어요.
빌리 : 게르 저쪽이죠? 물 무거워요. 들어줄게요.
나 : 아니에요, 괜찮아요! 들고갈 수 있어요!
빌리 : 에이, 들어줄게요.


빌리는 캠프생활 초짜인 나를 위해, 내 게르까지 물을 길러줬다. 나는 엄청 고맙다고 했고, 빌리는 그런 내게 간이 세면대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번 더 알려줘서 고맙군.





13.

빌리 : 어, 근데...
나 : 네?
빌리 : 여기 불 꺼졌어요. 장작 안넣었어요?
나 : 네, 네? 장작 넣어야해요?


아까 초저녁에 어떤 남자 직원(영어를 못해서 말이 안통했다)이 각 게르를 돌아다니며 장작으로 불을 지폈었다. 덕분에 게르 내부는 따뜻하다 못해 더웠고, 나는 이 열기로 새벽까지 나나보다 싶어서 그냥 내버려뒀었다.

그런데 빌리는 경악하는 것이었다. 불이 벌써 꺼진 것에 대해.

빌리 : 아직 밤 9시에요. 불 꺼졌어요. 새벽에 추워요.
나 : 그,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빌리 : 이거 장작 계속 넣어야해요. 근데 불 꺼졌어요. 잠깐만요.


빌리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더니, 나보고 종이 같은 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가방을 뒤지다가 영수증을 꺼내어 빌리에게 줬고, 빌리는 그 영수증과 성냥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불이 꺼져 식어가는 난로 안쪽에 영수증을 넣었고, 그 뒤 장작을 몇 개 쪼개어 그 종이에서 쪼개진 장작으로 불이 옮겨가게 했다. 후후 불면서 산소 공급도 좀 해주고, 쪼개진 장작에서 큰 장작으로 다시 불을 붙이고...




나는 빌리가 행하는 그 모든 과정을 어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봤다. 그 과정이 앞으로 내가 이 게르에서 밤이면 밤마다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하는 일련의 행동이 될 거라는 걸 알지도 못한 채.

장작불이란 건 생각보다 쉽게 꺼지는 녀석이었다. 내가 미처 장작을 넣지 못하고 불을 꺼트릴 때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빌리가 이 때 어떻게 했었는지를 열심히 떠올리곤 그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나는 빌리처럼 능숙하진 않아서, 장작에 불을 붙이기 위해 30분 동안 쭈그려 앉아서 애꿎은 성냥만 부러트린다던가, 영수증이란 영수증은 다 태워먹고 더 이상 태울 게 없어서 잔돈을 태워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던가, 불씨를 살리기 위해 후후 불다가 재가 눈으로 들어가 데굴데굴 구른다던가, 난로에 손을 데어 그 재투성이인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빤다던가 등등의 바보 같은 짓을 벌이긴 했지만 말이다.





14.

장작에 불까지 붙여준 빌리. 그는 내게 있어서 마치 프로메테우스와 같았다. 나는 빌리메테우스에게 연거푸 고맙단 인사를 전했고, 빌리는 혹시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 때 자기 게르로 오라며, 게르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리고 자신의 게르로 돌아갔다.

빌리 덕분에 물과 불도 구하고, 캠핑을 위해 필요한 여러가지 사실들도 알게 됐다. 아이고, 한숨 돌렸네. 나는 이 게르의 유일한 조명도구인 촛불을 켠 뒤 게르 침대에 뻗었다.




...그리고 나중에 게르 주인인 푸세를 통해 알게 된 사실.

푸세 왈, 사실 씻을 물은 직원들이 페트병에 받아서 간이 세면대 옆에 가져다둔다고 한다. 물통이 비는 걸 가끔씩 체크한 뒤, 알아서 물을 받아 가져다주기도 한단다. 장작 역시, 불이 꺼지지 않게 몇 시간에 한번 꼴로 와서 체크를 한다고 하고.

하지만 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 물은 내가 떠서 사용했고, 내 불도 내가 지펴서 사용했다. 직원의 도움 같은 건 없었다. 그건 아마 빌리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빌리 혼자 물을 뜨러 간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문명사회에 찌든 나로썬 굉장히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고, 그 때문에 이 잡일을 내가 해야한다는 사실에 별다른 불만이 있진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 아마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그들에게서 그 일을 배우며 일감을 빼앗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내 선택일 뿐이다. 어쨌든 직원들은 제 일을 해야한다. 그게 주인인 푸세가 만들어놓은 이곳의 규칙이니까. 하지만 그러질 않은 것이다. 이 작은 게르 캠프의 규칙과 배려는 직원들에 의해서 깨지고 있었다. 왜지? 푸세(주인)와 나미(매니저)가 없으니까 다들 일에서 손을 놓고 있는 걸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걸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사소한 것처럼 보이던 그 문제들은, 계속 쌓이고 쌓이다가 다음날 오후에 펑하고 터져버렸다. 뭐가 터졌냐면, 내가 터졌다. 뭐, 그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하게 될 것 같다.




아침에 물 뜨러 가는 영상으로 계속!






덧글

  • 2017/10/15 00:08 # 삭제 답글

    으아아 @@
    그래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저런데에 밤에 혼자 있으면서 불피우는것도 못하고 그러면 정말 무서울거 같아요
    직원들이 왜 그랬을까요
    쥔장도 그냥 오래있지도 않고 자릴 비우는 집이라니 그랬던 걸까요
    다음이야기에서 문제가 좀 해결되었기를
    왠지 이쪽은 화가 났는데 아무렇지 않게 스르륵 넘어가면서 해결되어 기분이 미묘한 결말일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말이 다리 짧고 통통한게 뭔가 익숙한 몸매네요 ㅠㅋ
    초원에 개울이 있고 단풍든 나무들도 있고 말도 있고
    쓰다듬게 해주는 고양이도 있고 하악하악
    근데 고양이가 할퀸 상처는 잘 치료하셔야 한대요
    얼른 잘 나으시길
  • enat 2017/10/18 22:00 #

    빌리 만나기 전엔 눈앞이 좀 캄캄했었는데 ㅋㅋㅋ 다행히도 빌리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왜 그랬는지는 좀 나중에 밝혀집니다.
    이마에 딱콩 먹이고 싶은 이유입니다.
    에휴ㅋㅋㅋㅋㅋㅋ

    풍경 너무 좋죠! 저런 그림같은 풍경속에 들어가서 생활한 게 아직도 꿈만 같아요 ㅋㅋㅋ
    고양이 상처는 흉터처럼 남을 모양인지 아물기는 다 아물었는데 사라지질 않네요! 심바새끼... 요물같으니...
  • 라비안로즈 2017/10/15 00:40 # 답글

    헐... 좀.. 그르네요;;; 역시 사장이 있어야 직원들이 일하는데.. 너무하네요
  • enat 2017/10/18 22:01 #

    직원들이 생각보다 어렸거든요ㅠㅠㅋㅋㅋㅋ
    그 이야기는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된 둘째날 오후의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 요엘 2017/10/15 12:25 # 답글

    아놔ㅋㅋㅋ 빌리ㅋㅋㅋ
    계속 심각하게 보고있다가 미국인인데 한국말하는거에서 빵터졌어여. 이낫님은 한국말하는 외국인을 참 잘만나시는거같아요. 신기방기.
  • enat 2017/10/18 22:02 #

    제가 요새 영어를 다 까먹어부려서 한국말하는 외국인을 붙여주는 신의 가호일까요? ㅋㅋㅋ 저도 신기합니다.
    빌리 생긴 건 근엄한데 말하는 건 꼭 5살 아이가 말하는 거 같아서 웃겼어요 ㅋㅋㅋㅋㅋ
  • 나인테일 2017/10/15 16:47 # 답글

    초원에도 떼껄룩은 있군요 ㅋㅋㅋㅋ
  • enat 2017/10/18 22:03 #

    떼껄룩이 뭔지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요물같은 떼껄룩! 떼껄룩!
  • 2017/10/15 20:5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10/18 22: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스트로보 2017/10/15 23:16 # 삭제 답글

    우와아아 저였다면 불 뿜는 용처럼 화를 냈을 거예요... (인도 여행 갔을 때 매 순간 숨 쉬듯 화내며 돌아다녔던 기억이ㅋㅋㅋ) 아무튼 갓빌리님이 보우하사 퀘스트를 돌파하고 +생존 하셔서 다행이예요.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네요.
  • enat 2017/10/18 22:07 #

    왠지 당시에는 생존함에 감사함이 먼저라서 분노는 늦게 찾아왔어요 ㅋㅋㅋㅋ 관련된 이야기는 차근차근 해보도록 하죠!
    인도도 한번은 가보고 싶은 나라인데 겁이 많아서 비행기표도 본 적이 없네요. 인도 괜찮으셨나요??
  • 스트로보 2017/10/24 20:04 # 삭제

    인도는... 하아... 인도 가면 숨 쉬듯 화내며 다니거나 아니면 해탈한다고 하던데 저는 전자 타입이어서... 제가 중남미 여행하던 때에 '쿠바가 중미의 인도'라는 소리를 듣고 쿠바를 일정에서 뺀 사람입니다ㅋㅋㅋㅋ 이낫님은 쿠바 다녀오셨으니 인도에 대한 면역력을 갖추신 거예요. 한 번 도!전! 해보셔도 괜찮을 듯 합니다.
  • enat 2017/10/25 17:48 #

    ㅋㅋㅋㅋㅋㅋㅋㅋ중미의 인도ㅋㅋㅋㅋㅋㅋㅋ 앗 아시아의 쿠바가 인도인가요!? 느낌이 확 오네요.
    음... 음... 가야하나... 굳이...
    음...
    네 뭐... 음... 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LionHeart 2017/10/16 12:06 # 답글

    아...이전 포스트에서 어쩐지 불편할 것 같다...싶었는데 이런 일이 (...)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익숙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데, 돈을 받은 직원들이 제 일을 안하니 더욱 불편함을 느꼈을 것 같네요. ;ㅁ;
    스크롤을 내릴 수록 '오...분위기 있는데?'에서 '으아...난 못하겠다...'로 감상이 바뀌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ㅁ;
  • enat 2017/10/18 22:12 #

    근데 당시엔 직원들이 해주는 일이란 걸 몰랐었거든요 ㅋㅋㅋ 그걸 알게되고 화를 내게 된 건 다음날 늦은 오후였습니다.... 그냥 여기선 이런가보다 하고 생활한지라 생활하는 동안은 재밌게 지낸 것 같네요 ㅋㅋㅋㅋㅋㅋ
    제가 캠핑이라곤 1도 모르는 캠핑초짜라 징징거리면서 써서 그런데, 뭔가 캠핑 몇 번 해보신 분들은 쉽게쉽게 지내실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생각보단 할 만 합니당!
  • PFN 2017/10/16 17:16 # 답글

    시냇물이라도 있으셔서 다행
    저희는 물티슈 가져간걸 몇통씩 써가며 닦았습니다 -_-
  • enat 2017/10/18 22:12 #

    저는 그 물티슈를 안가져가서 땅을 치고 후회했지요.
    가져가려고 책상위에 따로 빼놨는데 그걸 캐리어에 안넣고... 나란 사람 정말...
  • 이글루스 알리미 2017/10/23 08:22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10월 23일 줌(zum.com) 메인의 [허브줌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enat 2017/10/25 18:04 #

    '3'!!
  • 오현승 2017/10/26 08:49 # 삭제 답글

    글을 굉장히 재미지게 쓰시네요~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 enat 2017/10/26 09:18 #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 tmdghwkd 2018/02/17 23:09 # 삭제 답글

    오오 재밌게읽었습니다!! 이런 좋은 게르는 가격이 하룻밤에 얼마정도 하나요??
  • enat 2018/02/18 01:27 #

    - 메일 : Ngbx_pg@yahoo.com 혹은 dreamadventuremongoli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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