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1 23:28

몽골 자유여행 (6) 화가 났던 이유 └ 몽골 자유여행

1.

울란바토르에서 게르 캠프로 가던 차 안.

푸세는 나보고 왜 이렇게 짧게 머무냐고, 몇 주 머물면 좋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직장인이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서 여행을 다니는 거라고, 그래서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활동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푸세는 뭘 제일 해보고 싶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말타기라고 답했다. 특히 내가 머문 이 게르 캠프는 하루 숙박에 3시간 정도의 무료 말타기를 허용해주기 때문에, 말을 안타면 넘나 아까운 것이다.

나 : 나, 말 진짜 타보고 싶어. 나 말 타러 몽골 온 거거든!
푸세 : 말 타는 거 재밌지! 그리고 또?
나 : 너희 게르 캠프에선 현지인 게르에 방문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푸세 : 가능해! 그럼 오늘은 캠프 가서 쉬고, 내일 오전에 말을 타고 쉰 다음, 오후에 현지인 게르에 가면 되겠다.
나 : 오, 좋아, 좋아! 그리고 여유 되면 또 말 탈 거야. 말 타는 거 진짜 재밌을 것 같아!
푸세 : 하하하! 알았다고! 넌 즐겁게 말을 탈 수 있을 거야. 우리 말들은 순하거든!






2.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푸세는, 날 게르 캠프에 데려다준 직후,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가 그 날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니 바쁘겠거니, 또 이미 직원들에게 내 일정에 대해 숙지시켰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당연히 아침이면 말을 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물을 길어와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착한 말을 탔으면 좋겠다 상상하며 히히덕댔다. 하지만 여직원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 식사가 늦어졌다. 나는 내 일정이 밀렸으려나 걱정하며 여직원에게 물어봤다.

나 : 있잖아, 나 말 타는 거 말이야.
여직원 : 아, 말?


여직원은 잠깐 눈을 치켜뜨고 머리를 굴리더니 내게 말했다.

여직원 : 말은 오후에 탈 수 있어.
나 : 응? 오후에는 현지인 게르에 가기로 했는데?
여직원 : ...그래? 음, 그럼 오후에 말을 타고 현지인 게르까지 가면 돼.
나 : 그럼 오전에는? 나 오전에는 뭘 해? 왜 말을 오후에 타야 해?


여직원은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다가 영어가 힘들었는지, 곤란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으며 오후에 말을 탈 수 있다는 말만 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한숨을 쉬며 그럼 오전에 할 만한 일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뒷산 하이킹을 추천했고, 그래서 나는 에이미와 함께 뒷(돌)산에 다녀왔다.





3.

점심 식사 후.

다시 들뜬 나는, 여직원에게 몇 시쯤에 말을 탈 수 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하하 웃다가 지금은 일단 야크젖을 짜러 가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따라 야크젖 짜는 걸 구경갔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야크와 직원들의 지지부진한 기싸움과 그들만의 몽골어 대화는 날 따분하게 만들었다.

야크젖을 다 짜고, 여직원은 같이 야크젖을 짜던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직원과 들러붙어서 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직원들끼리 사이가 좋은가보다 했는데 점점 둘이 뽀뽀를 하질 않나 몸을 더듬질 않나 해서 날 당황시켰다. 여직원은 내 당황한 모습을 보더니 더 불이 붙었는지(?) 그 남직원과 더 부비적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몽골 사회에선 게스트 앞에서 직원들끼리 저런 행위를 하는 것이 용인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불쾌감을 표현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직원 : 왜? 왜? 놀랐어?

어느새 여직원이 내 앞에 와서 물었다. 정색할까 하다가, 너무나 순박하게 묻길래, 그냥 장난스럽게 너는 나쁜 여자라고, 남자친구 있다고 했으면서 저 남직원과 그렇게 노는 거냐고 말했다. 그러나 여직원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여직원 : 아냐, 쟤야! 내 남자친구가 쟤야!
나 : 뭐? 네가 여기 와서 사귀었다는 남자친구가, 저 직원이었어?
여직원 : 응!


나는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남직원에게 속으로 도둑놈 새끼라고 외쳤다. 막 고등학교 졸업한 애를 살살 꼬셔가지고 뭘 하는 거야. 그것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망측하게 놀고 있냐고.

내 생각과는 다르게, 여직원은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직원 : 근데 우리 오늘 마지막 날이거든. 나 내일 집에 가서 독일 갈 준비를 해야하니까.
나 : 음... 그래.


20대 초중반의 한창 젊은 애들이라면 남의 시선 신경 안쓰겠지. 그리고 자신들의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누구에게나 다 예뻐보일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개민폐에 불과하지만... 뭐 어쨌든 그래, 마지막 날이라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4.

나는 게르 캠프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둘러보며 내 눈을 정화한 뒤, 여직원에게 다시금 물었다.

나 : 그래서, 나 말은 언제 타?
여직원 : 그게, 좀 있으면 다른 손님들이 오거든. 그런데 그 손님들도 말을 타고 싶대. 그래서 네가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될까? 그럼 다같이 타고 좋잖아.
나 : 그 손님이 언제 오는데?
여직원 : 음, 좀 이따가


이곳에서 좀 이따가라는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나는 아침부터 말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손님들의 말타는 시간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으으음 하는 소리를 길게 끌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 : 있잖아, 나 진지하게, 오늘 아침부터 기다렸어.
여직원 : ......
나 : 내가 먼저 탈 수 있게 해줘.
여직원 : ...알았어. 기다려봐.


그래서 기다렸다.





5.

그러나 아무런 연락도 대책도 없이 오후 3시 반이 됐다.

어제의 경험에 의하면, 이곳은 오후 6시면 캄캄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전기가 없기 때문에 캄캄해지는 그 때가 하루 일과 종료 시간이다.

나 : ......

게르 캠프는 여전히 평화로웠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에이미나 메르시가 놀자고 와서 달려들었으나, 나중엔 그들도 지쳐서 오후의 나른한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잤다.

야외 데크에 앉아 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내 귓가로 바람이 휘이잉하고 불어왔다. 나는 귀에 들어간 바람에 놀라 고개를 파르르 턴 뒤 소리에 집중했다. 방금 바람소리에 뭔가가 실려왔는데. 귀를 쫑긋 세우자 여자와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여직원과 남직원이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지 꺄르르거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깨닫게 됐다.


저것들이, 마지막 날이라 지네들 놀겠다고 일을 안하는구나...


그래, 이거 뭔지 대충 알겠어. 지금 너희들이 로맨스 영화 한 편 찍는다고 한국에서 놀러온 쩌리 여행자 1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여기가 영화 속 배경이 아니라 현실이란 걸 빨리 보여줘야겠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 그들의 웃음소리를 중단시키고 여직원을 불러내어 대체 내가 언제쯤 말을 탈 수 있는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직원은 아까 다른 손님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못기다린다고 했잖아. 나는 이를 악물고 '네가 내 말을 제대로 못알아먹었나본데 나는 지금 말이 타고 싶으며 이것에 대해 빠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난리를 피우겠다'는 메세지를 담아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줬다. 그제야 여직원은 사태를 파악한 것인지 어버버하며 알겠다고 했다.

여직원 : 알았어, 기다려봐.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 : ...뭐? 기다려? 너 내게 또 기다리라는 말을 한 거니?
여직원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구하러 가야해. 홀스맨이 네가 타고 올 말을 잡아올 거야.


그녀 왈, 말들을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내가 탈 말을 구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했다. 그리고 남직원을 보채어 그가 말을 구하러 가게 했다. 아마도 그 남직원이 홀스맨인가보다.


하하, 그런 준비조차도 해놓지 않은 거구나.


매우 화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어린 여직원에게 소리를 지를 순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보다 작고 어린 애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 불편해져서 말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쌓인 이 분노는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매니저에게 이 사태에 대해 씨부리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컨택해야 할 사람은 말단 직원이 아니라 관리자다. 사실 이건 그들의 관리 잘못이기도 하다. 어린 여직원에게 게르 캠프의 모든 일을 전적으로 맡겨놓고 다른 지역에 가있는 것부터 말이다.

나는 여행 전 그들과 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전화번호를 몰랐고, 그래서 메일로 '내가 몹시 화가 난 이유'에 대해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3G가 터지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전 포스팅에서 15분 정도의 거리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왕복 15분이었던 것 같다. 30분이나 걸려 메일을 쓴 것 같진 않음)





6.

Dear 나미(매니저)


나는 오늘 하루종일 말타기만을 기다렸어.


오늘 아침, 나는 말타기를 엄청 기대했어.

그래서 네 직원에게 이야기했는데,

네 직원 왈, 내가 점심 이후에나 승마를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곤 내게 하이킹을 추천했어.

아마 승마 준비를 하는데에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아침 식사 후에 하이킹을 하며 기다렸어.

하지만 점심 식사 이후에도 기다림은 계속 됐어.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서 계속 기다리다가 네 직원에게 또 물어봤어.

그러자 더 기다려야만 한다고 했어.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그 덕분에 나는 좀 화가 났어.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네 직원에게 물어봤어.

그랬더니 걔네가 하는 말이, 다른 여행자들이 말타러 온다는거야.

다른 여행자들이 올 때까지 내가 기다려야 한대.

그래서 나는 그럴 순 없다고 했어.

나는 이미 하루종일 기다렸다고.


이제 홀스맨이 드디어 말을 잡으러 갔어.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화가 나있어.

아마 적어도 오늘 안에 말 정도는 잠깐 탈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계획했던 현지인 게르 방문은 할 수 없을 것 같아.


난 네게 네 캠프에서 이러한 일들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어.

알고 있었니?

이러한 일들이 몽골에선 평범한 일이니?

이게 만약 흔한 일이라면,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볼게.


어쨌든 내 메일을 읽어줘서 고마워. 안녕.






7.

메일을 보내고나자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엄청 화났던 것치곤 점잖게 쓴 느낌이군.

자, 이제 어떻게 답이 올까?


벌써 서산에 해가 기웃거리지만, 어쨌든 오늘 안에 말은 꼭 타봐야겠다.

홀스맨이 지금쯤 내가 탈 말을 잡아왔을까 생각하며, 다시 게르 캠프로 돌아갔다.







써놓고 의자에 반쯤 누워 꾸벅꾸벅 졸다가 업로드 누르고 자러 가는 enat의 몽골여행기는 다음편에 계속!






덧글

  • 요엘 2017/11/02 04:11 # 답글

    아이고 속터져 ^^.. 읽으면 읽을수록 속 터지는 상황이었네요. 뭐 본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느낌이었겟지만 그래도 맡은 일은 해줬으면 좋았을것을!! 아무리 어리다지만 일하고 있는 곳에서 저렇게 핑계랑 거짓말로 넘어가려는 거는 좋은 방법이 아닌데.

    매니저의 답장이 매우 기대되기 시작했어요..
  • enat 2017/11/08 22:53 #

    여길 내가 어떻게 시간내서 온 건데! 휴양지나 대도시를 포기하고 이 말똥냄새나는 초원엘 어떻게 온 건데! 어쩜 나에게 이래! 같은 느낌으로 당시엔 속이 타들어갔었죠... ㅋㅋㅋㅋ 그 여직원이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만의 생각이었나봐요 ㅋㅋㅋㅋ...

    매니저의 답장은 조금 나중의 포스팅에서 나옵니다! 헤헤.
  • 바람 2017/11/02 11:05 # 답글

    진행 미숙으로 예상했었는데 태만이었군요.
  • enat 2017/11/08 22:52 #

    차라리 미숙한 거였다면 웃으면서 넘어갔을텐데 그게 아니라 매니저에게 바로 쐈습죠... 흑흑
  • LionHeart 2017/11/02 13:27 # 답글

    으아...다음 편이 정말 매우 기다려집니다. -ㅁ-;
  • enat 2017/11/08 22:57 #

    으아~~ 다음편 포스팅에선 말만 타고 다다음이나 다다다음 포스팅에서 결과가 공개됩니다아!!! 오늘안에 쓸 수 있을까요!? 못쓰겠죠? 아마 잠들것 같아요 전!
  • 엘에스디 2017/11/03 15:40 # 답글

    enat님 안녕하세요! 매우매우오랜만에 덧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ㅜㅜ 포스팅 내용을 보니 화면 너머로 보고 있는 저마저도 분노의 이글거림이....으드드득!!! 아무리 어리고 남친과의 막날이라도 그렇지 본인일도 망각하고 노닥거리기만 하다니 화날거같아요...!!ㅜㅜ 부디 다음포스팅에서는 제대로된 일처리와 사과를 받으셨길요.ㅜㅜㅜ

    그나저나 말타기는....저는 국내 모 동네에서 딱한번 잠깐 타봤는데 비싸고 엉덩이(가랑이?;)가 찢어질거같은 인고의시간을..ㅠwㅠ 말이 저를 싫어하는거같아서 더더욱 슬펐던거 같아요. 쿨척. enat님께선 부디 즐겁게 타셨길요...!!
  • enat 2017/11/08 22:57 #

    엘에스디님 굉장히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갓 고등학교 졸업한 20대 초반의 애기들이 둘이서만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으니 부들부들 떨리더라고요 ㅋㅋㅋㅋ 이것들아! 돈 내고 온 손님 신경도 써달라고! ㅋㅋㅋㅋ

    저도 말 타고나서 엉덩이 근육이 뭉쳐서 일주일 정도 땡기더라고요! 그래도 몹시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그러고보니 국내에선 말을 타본적이 없었는데! 날 좋을 때 어디서 탈 수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ㅋㅋㅋ 날 많이 추워졌는데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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