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8 15:59

몽골 자유여행 (8) 사과 └ 몽골 자유여행

1.

우리는 홀스맨의 친구네 집에서 나와, 다시 말을 달려 게르 캠프(Dream Adventure Mongolia)로 돌아왔다.

살짝 유쾌하지 않을 일이 있었다. 홀스맨과 빌리의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2.

홀스맨.

그는 친구의 게르에서 아이락을 조금 과하게 마신 상태였다. 살짝 취한 상태로 실실 웃던 그. 내가 여태까지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밝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기분이 좋은가보다 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빌리는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캠프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정비했다. 그런데 그 홀스맨, 손을 휘휘 저으며 자신은 그곳에서 늦게까지 더 놀다가 캠프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빌리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좀 벙쪄버렸다.

일단 그는 아직 근무 중이다. 우리를 데리고 승마 투어를 나온 거란 말이다. 빌리와 메리가 아무리 이곳 생활에 익숙한 장기 여행자라 해도, 손님들 보고 알아서 캠프로 돌아가라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친구인 여직원과는 오늘이 마지막 밤일텐데, 이렇게 술에 취해 친구랑 놀아도 괜찮은 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던 건 여자친구인 여직원 뿐이었나?

나는 상식 외의 일을 벌이는 홀스맨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몽골말을 모르니 뭐라 할 수 있나.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내 옆에 있던 빌리는 익숙한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앞장서서 말을 몰았다.





3.

빌리.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빌리는 내게 게르 생활과 승마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전날 세수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면서 잠들었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말을 탈 때 많은 것을 알려줘서 내가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 그의 그 친절함 덕분에 많이 어색했다.

빌리가 얼마나 친절했냐면, 메리와 내가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걸 굳이 한국어로 번역해서 내게 알려줄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대화는 이어지는데, 자꾸 메리의 말을 끊어가며 '친절하게도' 통역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메리의 이야기를 낚아챈 후엔, 계속해서 '친절하게도' 한국어를 이용해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메리는 자신의 말이 몇 번이고 끊어진 것도 모자라 우리가 자신은 모르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나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나는 빌리가 서툰 한국어로 하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영어로 전달하며 대화에 끼워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 입장에선 오히려 그게 더 불편하고 기분이 나빴는지, 말을 몰아 우리와 떨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쫓아갔지만, 숙련된 기수인 그녀를 내가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빌리가 메리를 쫓아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를 바랬으나, 친절하지만 눈치없는 그는 나와 나란히 달리며 "오, 빨리 달리네요,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말은 말이에요..." 어쩌구 따위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계속 했다.

아아, 모르겠다. 남의 감정까지 신경 쓰기엔 내가 너무 피곤하다. 나는 적당히 빌리의 말을 끊은 뒤, 그냥 머리를 비우고 말을 달리게 했다. 말은 내 발길질에 신나게 달려갔다.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건 말 너 뿐이구나. 고맙다.





4.

게르 캠프가 가까이 보일 즈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빌리는 내 말이 사람을 태우는 것에 익숙치 않은 말이라 제법 지쳤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들으니 지친 것 같아보이긴 하더라. 나는 말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연신 쓰다듬어줬다.




걸어가는 도중 빌리는 내게 사우나를 하지 않을거냐고 물었다. 자신들은 오랜만에 근육을 써줬기 때문에 사우나로 릴렉싱할 것이라 했다. 그러고보니 이 게르 캠프에는 사우나 게르가 있었지. 하지만 사우나를 하면... 땀이 나잖아. 땀이 나면... 씻어야 하는데. 사우나 게르 옆에 샤워장이 있긴 했지만, 그곳은 야외 시설이라 무진장 추울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머무는 동안 그 누구도 그 샤워장을 이용하지 않았더랬다. 샤워도 못하는데 사우나라니. 나는 못하겠다. 안할래.

내가 사우나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자, 빌리는 놀라며 왜 관심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그거 알아? 한국에는 사우나가 널려있어. 여기까지 와서 굳이 사우나를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고 말았다. 빌리는 사우나의 왕국에 살아서 좋겠다며 껄껄거리고 웃었고, 곧 메리에게 그 이야길 전달했다.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하하 웃고 말았다.

말을 마굿간에 데려다놓고 게르 캠프 쪽으로 걸어올라가는 중, 여직원을 만났다. 그녀는 내게 다이닝 룸에 저녁을 차려놨으니 먼지를 털고 식사를 하라고 했다. 왜인지 풀이 죽은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상태를 신경쓰기엔 내가 너무 피곤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게르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이닝 룸으로 갔다.

저녁 식사로 준비된 음식은 걸쭉한 국물에 담긴 면 굵은 국수였다. 우리나라의 칼국수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 국물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5.

풀린 팔을 이용해 힘겹게 숟가락질을 하며 국수를 먹고 있는데, 여직원이 들어왔다. 여직원은 서론도 없이 다짜고짜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뭔가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어쨌든 요는, 자기가 오늘부로 이곳에서 일을 못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날 아니었냐고 묻자, 여직원은 나중에도 이곳에서 일을 못하게 됐다고, 다시는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날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야? 내 탓이라고?

나 : 왜 못하게 된 건데?
여직원 : 매니저가...
나 : 매니저? 나미가 너보고 일하지 말래?
여직원 : 메일... 네가 메일 보냈다며.


아무래도 내가 말을 타러 간 사이, 나미가 내 메일을 받고 여직원에게 연락을 한 것 같았다. 나는 혹시 답메일이 왔나 싶어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아 포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도시로 나간 후에야 나미의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메일을 보자마자 내게 너무 미안하고 자기가 적절한 보상을 하겠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답메일을 줬었다)

나는 나미가 여직원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나미에게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여직원에게 설명해줬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하루종일 말타는 걸 기다렸으며, 오후 늦게서야 두어시간 타고 이제 들어와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시간을 쪼개고 돈을 쪼개어 이곳에 왔는데, 그토록 기다렸던 여행 일정이 엉망이 되어버려서 기분이 좋지 않다, 누구한테 잘못과 책임을 묻긴 해야하는데 어린 너한테는 화내기 싫었다, 그래서 게르 관리에 소홀한 것 같은 매니저에게 직접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메일 내용도 별로 네 탓을 한 건 아니었다, 하고.

그녀는 내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으며 연신 "아돈노~ 아돈노~" 거렸다. 뭘 몰라? 내게 지금 잘 설명하잖아. 하지만 그녀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진 않고, 그저 자기는 이곳을 정말 좋아하고 남자친구도 이곳에 있는데 여기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돼서 슬프다고만 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원인을 생각하기보단,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여직원 : 나 이제 가.
나 : 어? 내일 아침에 가는 거 아니었어?
여직원 : 우리 엄마가 데리러 왔어. 이제 여기서 일 못해. 난 가야 돼.


여직원은 게르 주인인 푸세의 사촌 동생? 조카? 하여간 친인척 관계라고 했으니, 어떻게 하다보니 그녀의 가족들에게까지 연락이 갔나보다. 어, 그럼 지금 내 메일 때문에 반쯤은 끌려나가는 모양새가 된 건가? 흠, 그렇게까지 몰아세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녀에겐 나름 정붙이고 일하던 첫직장이었을텐데 말이다.

나는 어쩐지 미안한 감정이 들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래도 이건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나 : 어, 그리고, 걔, 네 남자친구 홀스맨 말이야.
여직원 : 응. 어디 간 거야? 일하고 있는 거야?
나 : 걔 술 마시고 친구네 집에서 더 놀다온다고 하던데.
여직원 : ......


나는 그러니까 홀스맨에게 너무 마음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마치 내가 승마를 위해 그를 데리고 나간 탓에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아니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홀스맨이 아이락을 많이 마셨고 친구랑 히히덕거리며 놀고 있다니까? 콩깍지에서 벗어나!

여직원은 힘빠진 얼굴로 자신의 뭔지 모를 이야기를 웅얼대더니, 어쨌든 자기는 이제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독일 가서도 건강하라 어쩌구 하는 말을 했으나, 그녀는 그냥 어색하게 웃은 후 나가버렸다. 음... 으으으음... 찝찝해...





6.

엄청 찝찝한 표정으로 국수의 면발을 들이키고 있는데, 어떤 커플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이 캠프에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아까 말타기 전에 여직원이 말한 '새로 올 사람들'인가 보다. 그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커플은 둘 다 미국인이었는데,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아프리카 TV로 게임 방송을 하고 있고, 여자는 강남 쪽 학교의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단다. 새로운 사람을 반가워하며 맞이하기에 심신이 지쳤던 나는, 내 소개는 하지도 않은 채 뭐 그러냐며 적당히 놀라워해줬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내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아프리카 : 우리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힘들었어. 울란바토르에서 여기까지 5시간이 걸렸어.
나 : 엥? 여기 2시간 정도면 오잖아? 푸세와 나미가 너희를 데리러 간 것 아니었어?
강남 : 이름은 잘 모르겠고, 여기 주인이 우리를 데리러 온다고는 했는데.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택시를 보냈어.
나 : 택시를 보냈다고? 오프로드인데?


내 질문에 그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원래라면 자신들을 데리러 왔어야 할 주인 푸세. 그는 급한 일이 생긴 바람에 택시를 보내겠다고 했다. 택시는 원래 약속했던 시간에 제대로 왔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그 택시기사는 테를지 쪽의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도통 길을 찾지 못하여 한참 동안 이 넓은 테를지 국립공원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강을 건넜다가, 언덕을 넘었다가, 평원을 끝없이 달렸다가, 다시 강을 건넜다가, 어쩌고 저쩌고. 도중에 택시 기사가 길을 묻기 위해 여기 사장(푸세)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연락이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꼼짝없이 테를지 평원에 갇힌 꼴이 됐다고.

나 : 그래서 어떻게 온 거야!?
강남 : 현지인 게르에 몇군데 들렀거든. 이 곳을 아는 사람을 만나 간신히 물어물어 찾아왔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아니 대체, 푸세와 나미, 너희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고객 관리가 하나도 안되고 있다고!

아프리카 : 아 그렇지, 하나 더 있어. 택시기사의 차는 오프로드용이 아니었어. 평범한 승용차였어.
나 : 오, 그럼 그의 차는...
아프리카 : 응. 거의 맛이 갔어. 난 그가 제대로 울란바토르까지 돌아갔을까 염려돼.


남이 고생한 이야기는 참으로 재밌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흥미 다분한 동정을 해줬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역시나 남이 고생한 이야기는 참으로 재밌는 것이었는지, 그들 역시 눈을 빛내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고, 아까 내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강남 : 세상에, 여기 직원들 너무하는 거 아냐?
아프리카 : 여기 트립 어드바이저 1위 게르 캠프 아니야? 대체 이 게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 : 모르겠어. 언제쯤 푸세와 나미를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심리 치료 중에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푸는 방식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과 내 대화는 딱 그 꼴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이 게르와 엮여 마음고생한 사람이 이 하늘 아래에 나만 있다는 게 아니란 걸 아는 것은 참으로 힘이 되는 것이었다.

나 : 와, 세상에. 나 방금 전까지 기분 진짜 별로였거든. 근데 너희 덕분에 나 진짜 기분 나아졌어. 진짜 고마워.
강남 : 오, 무슨 소리야. 네 이야기를 들어서 나도 뭔가 풀린 기분이야. 내가 더 고마워.
아프리카 : 나도야. 하하하!






7.

아프리카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고,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저녁 먹은 식기를 치웠다.

밖으로 나가니 사우나 게르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빌리네 커플이 사우나를 하는 모양이다. 아프리카 커플은 자신들도 사우나를 하고 싶다며 그곳으로 갔고, 나는 세숫물이나 뜨러 가야겠다 싶어서 수통을 챙겨 시냇가 쪽으로 내려갔다.

게르 캠프의 주인, 푸세가 캠프에 도착한 건 그 즈음이었다. 우리는 게르 캠프의 길가에서 만났다. 시간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고, 난 플래쉬를 이용해 길을 걷고 있었는지라 그가 날 부를 때까지 그인 줄도 몰랐다.

푸세 : 오, 세상에. 리! 헤이!
나 : 어, 거기 그건... 푸세? 오호라, 푸세!


나는 잠시 멈춰섰다. 그야말로 "오호라!"였다. 내게 그 마음고생을 하게 만들고 이제야 나타났단 말이지. 하하하.

여기서 그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느냐에 따라 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감식하는 눈으로 다가오는 그를 바라봤다. 사과와 용서냐, 진흙탕 싸움이냐. 어느 쪽으로 흐를지는 오로지 네게 달렸어, 푸세. 어디 한 번, 입을 열어봐!

푸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두 팔을 벌리고 말했다.


푸세 : 리, 괜찮아? 힘들었지? 너무 미안해!

나 : 응?
푸세 : 세상에, 네가 하루 종일 기다렸을 줄은. 네 일정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려서 미안해. 내 직원이 엉망이라... 다 내 잘못이야.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정말 미안하게 됐어.


그는 성심성의껏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화를 낼까 말까 고민했던 내 자신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살짝 흡족한 미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를 바라봤고, 그는 내가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푸세 : 내일 낮에 울란바토르로 돌아가지? 자 들어봐, 내가 이러이러한 일들을 해줄테니까 말야.

푸세가 보상으로 제시한 조건들은 다음과 같았다.


- 내일 낮의 무료 점심식사 (원래는 아침식사까지만 포함되어 있다)

- 현지 유목민의 집 재방문 (오는 길에 홀스맨과 연락을 했던 것인지 내가 어떤 게르를 방문했는지 알고 있었다. 거기서 아이락을 마셨다고 하자 그건 그냥 없는 셈 치자고 하며 내일 제대로 된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 칭기즈칸의 거대 동상 방문 (칭기즈칸의 거대 동상은 몽골의 유명 관광지인데, 울란바토르에서 테를지 국립공원보다 30분 정도 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곳이다. 내일 집에 가는 길에 그곳에 들러 내가 관람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8.

나는 그가 제시한 조건의 내용보다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온 힘을 다해 사과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그에게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푸세는 내가 웃자 조금 안심했는지, 괜찮다고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내가 저 사우나 안쪽에도 화가 난 여행자들이 있다고 일러주자, 푸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알고 있다고, 빨리 가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말했다. 가여운 푸세. 나는 푸세에게 비즈니스란 어렵지 힘내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해줬고, 푸세는 애써 웃으며 사우나 쪽으로 향했다.

나중에 푸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듣게 되었다. 그들은 날 게르에 데려다 준 이후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다가 지프차가 고장나서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차를 고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다른 차를 어디서 구할 때까지 울란바토르에 발이 묶였다고 한다.

딱 그 하루 동안의 일이었다. 직원들은 근무 태만이었고, 한국인 손님은 화가 나서 메일을 보냈고, 새 방문객을 데리러 가야하는데 못가게 됐고, 핸드폰 배터리가 닳아 택시 기사의 전화를 못받았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악몽같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늦은 밤에야 그를 만나 사과를 듣게 되었지만, 아마 이 늦은 시각이 푸세에겐 가장 빠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깨끗하게 화를 풀고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9.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세숫물을 떠서 - 푸세가 내 수통을 보곤 물을 떠다주겠다고 했지만, 난 내 세숫물 정도는 내가 알아서 뜰 정도로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위치가 물 뜨기 좋은 위치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난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푸세는 너 진짜 고생 많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자신의 손님이 성격도 좋고 긍정적인 여행자라 감사하단 소리를 했다. 아니, 웃으라고 한 소린데 그런 애잔한 표정을 지으며 칭찬(?)하지 말라고. 그런 표정으론 별로 칭찬 같지도 않단 말이지 - 내 게르로 돌아갔다.

푸세의 지시로 엄청나게 불이 떼진 내 게르는 후끈후끈했다. 사우나 안한다고 했는데 내 게르를 사우나로 만들어버리다니. 나는 더위에 투덜거리는 사치를 누리며 대충 씻은 뒤, 자리에 누워 팔다리를 대자로 편 채 잠을 청했다. 피곤한 하루였기에 잠은 금방 들었다.

그 단잠은 야심한 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 내 잠을 깨울 때까지 계속 됐다...




황당한 방문객의 이야기부터 다음편에 계속!






덧글

  • 스트로보 2017/11/19 00:25 # 삭제 답글

    푸세가 그나마 상식적인 대응을 해줘서 다행이네요.
    고구마 백 개 먹은 심정으로 읽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사이다 한 모금 마신 기분이ㅋㅋㅋㅋ
    그나저나 저 게르에서 만난 서양인들 중 한국 관련 지분이 이렇게 높은 건... 우연일까요??
  • enat 2017/11/25 10:42 #

    많이 고구마였나요!? 요새 제 안의 고구마 경계가 많이 높아져서 왠만한 일도 다 우웅... 우웅...하고 넘기는지라... 남미여행 할 때의 투사(?)가 아닙니당...
    한국관련 지분이 높은 건 ㅋㅋㅋ 서양애들 왈 몽골만 가기 위해 여기까지 오는 건 좀 그렇고 한국이나 중국에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그러네요! 다음 포스팅에 언급해보았어요! ㅋㅋㅋ
  • aa 2017/11/19 17:42 # 삭제 답글

    그 황당한 방문객이 빌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저는 예전에 몽골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외국인 커플이랑 다른데 갔다가 남자쪽에서 여친 잘 때 와서 들이대서 화냈던 적 있어서ㅜㅜ
  • enat 2017/11/25 10:44 #

    아닙니다! 빌리는 아닙니다! 빌리는 자기가 어릴 때 써왔던 한국말을 많이 쓰고 싶어할 뿐이었지 그냥 눈치없고 착한 애였어요 ㅠㅠ 그런데 남자쪽에서 여친 잘 때 와서 들이다는 건 거의 공포 수준이네요. 남자가 그러는거 녹음 녹화해서 여친한테 보여주고 싶다...
  • 오메... 2017/11/20 16:12 # 삭제 답글

    마지막줄이 공포영화 예고보다도 더 무서운데요. 흐미.. 설마 물 떠오는 것도 직원들이 해야할 일이었던가요?
    물뜨는 거 잘하게됐다고 하는 말에 애잔하게 봤다니. 아니 진짜 남의 사랑놀음에 이낫님 왤케 고생을.ㅠㅠㅠ
    오늘 서울은 첫눈 내렸는데 따땃한 핫코코아 한잔하시면서 다음편도 올려주세요.
  • enat 2017/11/25 10:46 #

    앗 무섭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긁적긁적...
    물 떠오는 건 직원들이 할 일이 맞았습니다! ㅋㅋㅋ
    근데 바빠보이기도 했고 재밌기도 해서 그냥 그걸 알게 된 이후에도 제가 했어요.
    아침에 급하게 쓰고 밖에 나가려는 길인데 따땃한 핫코코아는 나가서 사먹을게요! 감사합니다 :)
  • LionHeart 2017/11/21 10:51 # 답글

    6.
    한국과 인연있는 분들이 많이 찾는 게르네요; 빌리도 그렇고, 여행을 간 나라에서 한국과 인연이 있는 제3국의 외국인을 만나는 확률이 높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3명이나 만나시다니...그것도 시장이나 도심이 아니라 사람도 별로 없는 몽골 게르에서 말이죠. 엄청난 인연이군요. ^^
    아픔을 공유하는 심리치료가 있습니다만...이제 떠나실 enat님과 달리 막 도착하여 앞으로 게르에서 지낼 아프리카와 강남은 enat님 경험을 듣고 내심 불안해하지 않았을까요? ^^;
    9.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절단신공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_+
  • enat 2017/11/25 10:48 #

    그것도 다들 미국인이고 말예요! ㅋㅋㅋㅋ 관련해서 다음 포스팅에 써봤습니다. 뭐 아무리 그래도 신기하지만요!

    ....!?
    .............!?!? 그건 생각하지 못했네요. 저는 시원시원하게 얘기했지만 아프리카와 강남은 이제 막 도착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으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르겠다 한국와서 연락해보니 슈퍼하게 잘 여행했다고 했어요! 뭐 잘 지냈을 거에요! 하하하!

    그냥 졸려서 끊은 건데 절단신공이 되어버렸어요 '0' 잘 끊었구나 과거의 나야!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7/11/23 11:24 # 답글

    아 진짜 이렇게 끊으시면 어떡해요ㅠㅋㅋㅋㅋ 스포받고 싶어지잖아요 ㅋㅋㅋ 진짜 하루만에 저렇게 엉망이 되어버리다니, 이런거 보면 가끔은 이래서 대형 체인이 좋다는 생각을 해요 어떤 불운한 사정이 생겨도 매뉴얼로 커버가 되는.... 마지막은 제발 불 확인하러 와주는 거면 좋겠네요ㅠㅋㅋㅋㅋㅋ
  • enat 2017/11/25 10:52 #

    시스템이 커버쳐주는거 있죠! 저도 그래서 체인호텔 좋아하고 여행 준비하면서 체인 예약을 먼저 해두는데, 꼭 여행일이 다가와버리면 그 체인을 취소하고 (무료취소일도 넉넉하잖아요! ㅋㅋㅋ) 더 저렴하고 현지인스러운 걸로 가게 됩니다... 보통 카드값 결제일에 그런 결정을 내리죠...
    마지막은 불 확인하러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더 포근하고 말랑한 게 찾아왔어요! 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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