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7 23:30

몽골 자유여행 (11) 거대거대 징기스칸 동상 ├ 몽골 자유여행 (2017)

1.

몽골 여행을 준비하던 당시, 여러 현지 투어업체로부터 메일을 통해 투어 스케줄을 받아본 적이 있다. 한국에선 구하기 어려운 몽골의 여행 정보,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어디어디를 찾아가며, 이동 시간이 얼마나 걸리며, 어느 정도의 가격이 바가지 마지노선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솔깃한 투어가 있으면 자유여행 대신 투어를 이용하려 했으나, 가격대비 솔깃할 정도의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 투어업체들이 알려준 여러 스케줄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명소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징기스칸 동상 Genghis Khan Statue"이었다. 테를지 외 여러 국립공원을 몇 박으로 다녀오는 프로그램에선 마지막에 꼭 동상을 보는 스케줄이 껴있었고, 가이드와 함께 그 동상만 보러 가는 당일치기 투어나 울란바토르에서 그곳까지 라이딩만 해주는 프로그램도 많았다. 몽골 여행자 포럼에선 "울란바토르에서 징기스칸 동상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해?" 하는 질문글이 꾸준히 올라왔다.

...동상 따위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거야? 물론 어떤 도시에 유명한 동상이 있다면 그걸 보러 걸어갈 수는 있다. 그런데 도시에서 차로 1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라면, 게다가 대중교통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그 정도의 노력을 투자해야할 만큼 가치가 있는걸까? 그래봤자 '동상'인데?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던 과거의 나는, 동상 따위를 보러갈 시간에 다른 걸 보러가자 싶어 계획에서 그곳을 빼버렸다. 그리고 다른 일정을 넣어뒀었다...

뭐, 계획이 그랬단 거다. 이 놈의 여행이란 녀석은 절대 내 계획대로, 내 예상대로 흘러가질 않는다. 도대체 '머물던 캠프에서 여직원이 날 빡치게 만들어서 따졌더니 게르 주인이 사과의 의미로 이곳을 구경시켜 줄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겠냔 말이다.

그런 이유로, 예정에도 없던 징기스칸 동상을 보러 가게 됐다.





2.

혹시라도 이곳에 정보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 요약글 먼저 씀.


<징기스칸 동상 요약>

-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이지만 차밀리는 시간대면 두세시간 정도 잡아야할듯. 1차선임.

- 도로 직선상 (서) 울란바토르 - 테를지 국립공원 입구 - 징기스칸 동상 (동) 요 순서대로 있음.

- 동상이 엄청 큼. 진짜 큼. 허허벌판에 서있는 거라 그 위용감이 어마어마함.

- 동상 아래엔 박물관&기념품샵이 있음. 박물관 내용은 고만고만함.

- 기념품샵에 있는 옷가게에서 돈 내고 몽골 전통복을 입어볼 수 있다고 함.

- 전망대는 동상의 팔꿈치 정도의 위치에 있음. 전망대에서 보는 평원 풍경이 제법 각별함.

- 근처에 독수리랑 사진 찍을 수 있는 유료 포토존 있음. 진짜진짜진짜 독수리랑 사진 찍어보고 싶었는데 주인이 화장실 갔는지 찾질 못해서 못찍음. 힝. 나중에 독수리 축제 기간에 시간 낼 수 있으면 그거 보러 몽골 또 가야지...





3.

다시 여행기로 돌아와서.

10월, 몽골의 날씨는 매우 쾌청했다. 게르를 떠나기 전 푸세에게서 곧 눈폭풍이 올 것 같다는 이야길 들었었는데, 이런 새파란 하늘을 보니 눈폭풍은 아직 먼 것 같다.

나미와 헤어진 나는, 짱쎈 몽골 기사 아줌마의 차를 타고 징기스칸 동상까지 달려갔다. 가는 길은 정말 무서웠다. 이 아줌마의 운전 실력은 어마무지해서, 빵빵거림은 기본이요, 담배를 뻐끔뻐끔 피며 질주하다가 느리게 가는 다른 운전자들을 보면 창문을 내려 욕설을 날리기도 하고, 우핸들 차량인 주제에 1차선 우측통행 도로에서 쉴새없이 추월을 하려고 들었다.

그래, 특히 우핸들 우측통행...

그 아줌마의 차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였다. 상상해보시라. 당신은 왼쪽 조수석에 안전벨트 따위로 묶여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다. 그리고 당신의 자리에선 반대편 차선에서 거대한 트럭이 달려오는 게 보인다. 그 때 오른쪽에 앉은 짱 무서운 인상의 운전자가 앞차를 추월하겠다며 중앙선을 침범하려고 한다. 당신은 안전벨트를 붙잡고 맞은편에 차 온다고 엉엉 울며 소리 지르고, 운전자는 혀를 차며 다시 차를 뺀다. 그 순간 달려오던 트럭이 아슬아슬하게 당신의 옆을 스쳐지나간다. 이런 상황이 몇 시간 동안 몇 십 번이나 계속된다...

...솔직히 그 땐 동상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그냥 안전하게 울란바토르에 도착했으면 좋겠단 생각만 했다.





4.

목숨을 걸어가며 도착한 징기스칸 동상은 저 멀리서부터 우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컸다.

아, 이거 그냥 '동상'이 아니었구나. 이런 걸 왜 그냥 동상이라고 부르고 있어? 좀 더 신경써서 '자이언트'나 '그레이트' 같은 걸 붙여서 불러주지 않을래? 이 아래부터는 자이언트 그레이트 징기스칸 동상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나라도 그렇게 불러야겠다.




개선문 같은 입구 너머, 원근법을 가볍게 무시하는 저 거대한 기마상을 보라!

아, 참고로 사진은 차 안에서 자이언트 그레이트 징기스칸 동상의 주차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기사분께서 빠르게 좌회전 했기 때문에 급하게 찍었는데 그런 것치곤 그럭저럭 잘 나온 것 같다.

기사 아줌마는 주차장에 차를 멈춰 세우더니, 감흥 없는 얼굴로 얼른 가서 구경이나 잘 하고 오라고 (손을 까딱거리며 몽골말로 뭐라고 했는데 아마 이 말이 맞겠지) 했다. 그리고 좌석을 뒤로 제낀 뒤 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아줌마는 저 거대거대한 동상을 몇 번이나 봤을테니 별로 신기하지 않은 모양이지. 나는 이렇게나 입이 쩍 벌어지는데 말이다.

나는 최대한 빨리 보고 오겠다고 몸짓으로 말한 뒤, 차에서 나와 동상이 있는 곳까지 걸어올라갔다.






말 위에 앉아 황금 채찍을 들고 있는 징기스칸의 투박한 모습. 날씨가 좋은 탓에 햇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왜 하필 이런 허허벌판에 저런 거대한 동상을 세웠을까? 울란바토르 시내에 지었으면 찾아오기도 편하고, 더 많은 관광객들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바로 이 자리가 징기스칸이 황금 채찍을 발견한 전설 속의 장소라고 한다. 게다가 이 자리엔 앞으로 동상 말고도 여러 관광 복합 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이런 외딴 곳에 자이언트 그레이트 징기스칸 동상이 세워진 까닭은 감상적인 이유와 실용적인 이유가 합쳐진 것이었다.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명이라 불평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오랜만에 타이머 셀카를 찍었다. 이런 진취적이고 고무적인 장소에선 승리의 포즈를 취해야한다. 우하하!

근데 패션 참... 델 + 모자 + 운동화 + 검은 점퍼 + 보조가방이라니 그 땐 몰랐는데 정말 이상하고 난해한 조합이군. 지금 보니 참 부끄럽다.




입장료(기억이 안나는데 구글링하니까 8500투그릭이라고 함)를 내고 동상 아래 전시관에 들어갔다.

사진 가운데 엄청 귀중하게 모셔진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바로 황금채찍을 거대화시킨 거라고 한다. 왼쪽에 짤렸지만 뭔 거대한 천과 가죽 쪼가리 같은 게 보이는데, 저건 몽골의 전통 장화를 거대화시킨 거라고 한다.

기마상부터 채찍, 장화까지. 몽골 사람들 얘네들은 왜 이렇게 거대한 걸 좋아해? 한 때 대륙을 호령했던 자들의 스케일이라 이건가? 참으로 자이언트 그레이트 하군.




지하에는 박물관이 있다. 뭐 마두금이나 전통 게르 같은 것들이 있고, 나머지는 역사 유물인데 유물들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별 게 없어서 휘휘 둘러보다가 곧바로 전망대로 향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전망대라 할 수 있겠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따라 말머리에 오르면 그 거대한 징기스칸 동상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는데, 이게 또 제법 볼 만 하다. 투박한 얼굴과 강인한 표정은 이들이 생각하는 딱 이상적인 징기스칸의 모습인 것 같다.




손가락조차도 늠름하다! 황금 채찍을 쥔 오른손과,




오른손에 비해 뭔가 귀여운(?) 뭉툭한 왼손도 살펴볼 수 있다. 장갑인가?





징기스칸을 등지면 몽골의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그 풍경을 내려다봤다.

현재 이 평원은 그가 이 평원을 호령하던 800년 전의 풍광과 얼마나 다를까? 800년 동안 이들은 어떤 발전을 이룩했지? 이 부지에는 어떤 시설들이 들어차게 될까? 몇 년 후면 엄청난 관광지가 되어있을까? 평범한 몽골 시민들은 이 동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써쓰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얼마나 보존될 수 있을까?

뭉게뭉게 생각의 구름을 띄우며 바람을 쐬던 중, 단체 손님들이 올라오길래 자리를 비켜주고 내려왔다.





5.

우연한 기회로 본 것치곤 멋진 곳이었다. 눈이 시리게 맑은 하늘도 내 감상에 한몫했다. 아마 나중에 복합 관광 단지가 제대로 조성되고 이런 저런 건물들이 주변에 들어차면 더 괜찮은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흡족해하며 다시 차로 돌아갔다. 조금 서둘렀다. 기사 아줌마를 오래 기다리게 했다간 왠지 큰일날 것 같아서. 아니아니,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배려 차원에서 서두른 거다.

서둘러서 움직였더니 몸에서 땀이 난다. 이 놈의 델이란 녀석은 생각보다 따뜻한 것이다. 난 걸쳐 입었던 검은 점퍼를 벗고, 도도도도 뛰어갔다. 다다다다가 아니라 도도도도인 이유는 델 때문에 보폭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점퍼를 벗고 델을 보이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꼈다. 처음엔 좀 당황했으나 곧 그 시선을 즐기게 됐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관종의 씨앗은 존재하는 것이다. 훗, 어때? 내 델 부럽지? 나랑톨에서 산 거야. 허리에서부터 얌전하게 떨어지는 이 베이지색 천, 아름답지? 나는 좀 의기양양해져서 괜히 모델 워킹으로 걸었다.

그런 내게 말을 거는 무리들이 있었다.

여행자1 : 캔 아이... 테이크... 어 포토...?
여행자2 : 사진, 사진. 포토. 함께. 투게더.


...?

한국인들이 내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기사 아줌마에게 빨리 돌아가야 하는 급박한(?) 순간이지만, 이 재밌는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꿈뻑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좋다며 날 가운데에 두고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내게 땡큐, 엑설런트 어쩌구를 말한 뒤, 찍힌 사진을 보며 뭔가 만족해했다. 난 그들을 놀릴 심산으로, 사진을 보는 그들의 뒤로 스윽 다가가 말했다.

나 : 여행 오셨나봐요.
여행자1 : 우어어어! 한국말 잘한다!
여행자2 : 한국말 배우신 거에요?


......?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를 잘하는 몽골인 여자 취급을 받았다.

내가 놀리려고 했는데 혹시 이들이 날 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서툰 한국어를 사용하여 좀 더 장난을 칠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 기사 아줌마를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재미없게도 나는 한국인이며 여행을 왔다, 이 델은 나랑톨 시장에서 판다, 가격은 얼마다, 모자도 얼마니까 관심 있으면 사봐라 등등의 말로 모든 오해를 풀었다. 그 여행자 둘은 내가 한국인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 몽골인인줄 알았다는 칭찬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 이야기를 건넸다.

델을 입은 내가 두 여행자들과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자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걸 보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함께 사진을 찍자는 권유를 할 것 같은 포즈와 표정이다. 앗, 안돼! 이 이상 사진을 찍어줬다간 기사 아줌마를 화나게 할 거야. 나는 여행자들과 마무리 인사를 한 뒤 다른 관광객들은 못본체하며 서둘러 차로 돌아갔다.





6.

기사 아줌마는 살짝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늦어서 불쾌한 건가 싶었는데, 계속 관찰하니 그냥 그 표정이 디폴트값인 것 같았다.

내버려둘까 했으나, 방금 전에 델 버프를 받아 여행자들과 즐겁게 이야기했던 게 이어져서, 나는 이 아줌마에게도 재잘대기 시작했다. 나 완전 분위기 탔단 말이지. 인상 무서운 기사 아줌마, 내가 웃겨줄게! 무뚝뚝한 사람들에게 집적대면서 그들의 표정을 바꿔주는 건 내 주특기지! 몽골어를 잘 모르니 의성어와 의태어가 가득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신나서 까불까불거렸다.

내가 한참을 그러자, 마침내 그 무서운 표정의 기사 아줌마가 반지를 잔뜩 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 먹혔어! 먹혀들었다고! 나는 자신감이 붙어서 더욱 더 깝죽댔고, 기사 아줌마는 그런 날 보며 미소 띤 얼굴로 옷에 달린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뭐라뭐라 했다. 무슨 말이지? 뭐 좋다는 말이겠지! 하하하하!




차가 소 때문에 잠깐 멈췄을 때, 그 기사 아줌마가 폰으로 자신의 말을 번역하여 보여줬다. 그건 날 최대한 빨리 울란바토르에 데려다준다는 말이었다.

어라? 아줌마 그게 무슨...? 난 그런 걸 원한 게 아닌데...?




곧 울란바토르까지의 목숨을 건 레이스가 이어졌다. 신나는 과속과 신박한 추월이 그곳에 있었다. 이건 내 까불거림에 대한 벌인 걸까? 난, 난 그냥 친해지려고 그런 건데... 그냥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조용히 할 수 있는데...

그 어떤 차도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듯 사정없이 추월하여 달리던 그 긴박했던 순간들을, 아마 난 향후 15년 간 잊을 수 없을 거다. 어 물론 15년은 그냥 느낌적인 느낌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7.

울란바토르가 가까워오자, 점점 차들이 늘어나고 도로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사 아줌마의 질주와 추월도 멈췄다. 고마워요, 교통체증. 내 평생 교통체증에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울란바토르와 테를지의 경계에서 방역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차 바퀴쪽에 약품같은 걸 엄청 뿌리더라.

호스를 들고 물만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신기해서 무심코 사진을 찍으려하자 바퀴말고 창문에다가 물을 뿌리더라. 화들짝 놀라 카메라를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였다. 죄, 죄송합니다... 열심히 일하시는데 제가 카메라 따위를 들이대서... 쩝.

방역을 마친 뒤 또 어느 정도 달리자 곧 울란바토르 시내였다. 와! 해지기 전에 시내에 들어오다니! 나는 행복해하며 기사 아줌마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기사 아줌마는 뭐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왜 그러시지?

그러나 나도 곧 그 아줌마의 뭐 씹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울란바토르 시내의 교통체증은 아까 시외에서 겪은 것의 10배는 더 지독한 것이었다. 마침 또 불금이라 차가 엄청나게 쏟아져나왔다. 혹시 걸어가는 게 더 빠르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작은 시내에서만 거의 한두시간 묶여있었다. 아줌마도 나도 엄청나게 지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나는 몇 시간 전 교통체증에게 고백한 걸 취소하기로 했다.





8.

호스텔에 도착한 건 결국 해가 다 지고 캄캄해진 저녁 8시 쯤이었다. 기사 아줌마는 나를 호스텔 근방의 큰길가에 내려준 뒤, 엄청나게 쿨하게 바이를 외치고 부릉부릉 사라졌다. 나는 예의상 손을 흔들어주다가 몸을 돌려 호스텔로 들어갔다.

며칠 전 이용했던 호스텔이어서 직원들 몇몇은 날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변모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어떤 직원은 눈을 빛내며 너 같은 완벽한 몽골인과 사진을 찍으면 이야기거리가 될 것 같다며 함께 셀카를 찍길 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라 네가 몽골인이잖아. 그러나 반박할 힘도 없던 나는, 그가 원하는대로 그의 폰카 앞에서 적당히 사진을 찍어줬다. 인기 많은 사람은 피곤하군.

나는 직원들을 뒤로 한 채 밍그적거리는 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실실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와, 와!

이 얼마만의 문명 사회란 말인가. 폭신폭신하고 향기로운 침대! 수세식 화장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는 히터!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란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당장 이 말똥냄새 나는 델을 벗어버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자랑스런 현대인이 되자!

나는 옷을 훌훌 벗어 던져버리고 샤워실로 직행했다. 곧 뽀송뽀송해진 나는, 히죽거리며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오오 푹신푹신하도다. 나는 이 작은 방의 모든 문명 도구와 시설에 감사해하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쉬었을까. 슬슬 배가 고프다. 나는 꼬로록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외출복을 입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군. 밥, 밥을 먹어야한다. 모처럼의 문명 사회인데 불고문을 받은 따뜻한 음식은 먹어줘야지! 난 급한 발걸음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밤의 울란바토르 재즈 카페에서 계속!





덧글

  • 요엘 2017/12/18 08:41 # 답글

    이낫님ㅋㅋㅋㅋㅋㅋ 왜 외국가서 외국인 코스프레 하고 계시는 거에여!! 한국말로 했는네 너무 당연하게 한국어하는 몽골인이라고 받아들이는게 웃기기도하고 그 사이에 도대체 얼마나 현지화를 하신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 enat 2017/12/18 23:28 #

    제 델에서 말똥냄새가 진지하게 났었어요. 머리는 며칠째 안감아서 모자로 눌러쓰고 있고... 얼굴만은 깨끗하게 세수했지만 화장을 따로 안해서 자연 그 상태 그대로... 거기에 핵 이상한 검은 점퍼떼기... 옷버려도 괜찮을 점퍼를 가져가서 진짜 디자인이고 뭐고 핵이상했는데...

    으음... 그분들이 착각하실만 합니다... 쩝.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7/12/18 12:09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더 극적으로 표현해보지 그랬어요ㅋㅋㅋㅋ 몽골현지화..... 델은 이야기 들을때마다 궁금하구...
  • enat 2017/12/18 23:29 #

    할로윈 때 파티를 했었다면 제가 저 델을 입고 나갔을지도 몰랐을 거에요. 크 아쉽군요!
  • LionHeart 2017/12/18 13:48 # 답글

    징키스칸 동상 얼굴 정면 샷 정말 멋지군요. 하늘도 새파랗고, 태양 위치도 적절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
    전 나중에 저 주변에 관광단지가 조성되고, 최신식 호텔이 위치하게 되면 ... 그때 방문해야 겠습니다. ^^;
  • enat 2017/12/18 23:34 #

    최신식 호텔급...은 아니지만 나름 신식 게르는 지금도 있어요! 예전에 게르캠프 찾다가 발견한건데 모양만 게르고 내부는 서양식 침대 + 온수 샤워실 등이 갖춰진 곳이었죠! 아, 그리고 테를지에 테를지 호텔이라고 개인 스파가 가능한 스파 호텔도 있어요! 여기도 나름 대자연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좋은 호텔인 것 같구요! 제가 좀 하드한 걸 좋아해서 그런 것 뿐이지 지금도 괜찮은 숙박시설은 찾아보면 나옵니당!!
    음 근데 저도 관광단지 조성된 후가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몇 년 더 기다려보면 알 수 있겠죠!
  • PennyLane 2017/12/18 14:27 # 답글

    트래픽잼 ㄷㄷ 방콕이랑 울란바타르 시내랑 어디가 더 헬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칭기스칸 동상 ebs 다큐에서 봤는데 저기서 현지인 옷 빌려주고 사진 찍고 그러지 않나요? 전 몽골무사 옷 입고 싶었단말예요!!!
    저도 윗분처럼 주변에 리조트 세군데쯤 들어서면 갈지도 모르겠군요
  • enat 2017/12/18 23:36 #

    아직 태국을 안가봐서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보니 저 동남아는 아직 한번도 안가봤네요 ㅋㅋㅋ
    맞아요! 현지인 옷 빌려주는 장소가 있었습니당. 코스츔이 엄청 다양하고 화려해서 델을 입고 있는 저조차 한번 찍어볼까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곳이었죠...
    리조트 세군뎈ㅋㅋㅋ 저도 다음에 다시 몽골에 가게 된다면 좀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만한 곳으로 갈 것 같아요! ㅋㅋㅋ
  • 스트로보 2017/12/21 01:03 # 삭제 답글

    남아프리카에서 트럭투어 할 때 맨날 텐트치고 자다가 오랜만에 침대에서 잔 날이 있었는데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ㅋㅋㅋ 델은 옷장 한 켠에 모셔져 있는 거죠? 겨울 유럽 방한복으로 가져가시면 어떠실까요?(진지)
  • enat 2017/12/21 08:28 #

    와 남아프리카 트럭투어!!! 단어만 봐도 설레네요. 그렇잖아도 이번에 아프리카를 갈까말까 고민 많이했는데 남은 돈 적금 붓고 뭐 붓고 하다보니까 돈이 모자라서 걍 유럽가서 얌전히 놀기로 했습니다. 아프리카는 다음 기회에 꼭! '0'
    델... 델... 사실 모자는 이미 챙겨뒀구요 델은 아직 진지하게 고민중입니다. 그렇게 빨아서 보관했는데도 불구하고 말똥냄새가 가시질 않아서 말이죠...
  • Tabipero 2017/12/24 18:38 # 답글

    전망대라길래 징기스칸 머리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말머리가 전망대였군요 ㄷㄷ
    사방의 풍경을 보니 뭔가 말그대로 대륙스케일이 느껴집니다.
  • enat 2017/12/25 00:12 #

    자유의 여신상처럼 머리쪽에 뚫어뒀어도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말머리라서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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