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2 11:01

겨울 유럽여행 (5) 프라하 : 흐린 오후 ├ 겨울 유럽여행 (2018)

1.

내가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프라하의 날씨는 하루씩 걸러 흐렸다 - 맑았다 - 흐렸다 - 맑았다. 프라하성에 다녀온 날은 그 중 흐린 날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흐린 하늘 아래를 돌아다녔다.

파란 하늘에 쨍쨍한 햇빛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프라하에서만큼은 흐린 날씨도 환영했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고기압 (추정) 때문인지 맑은 날씨엔 귀가 떨어져나가게 춥고 흐린 날씨엔 어느 정도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이 흐려도 그 따뜻함에 감사하며 다닐 수 있었다.

아래부터는 그 흐린 날의 오후에 있었던 소소한 일들이다.





2.

프라하성을 내려와, 까를교 옆 다리인 마네수프교를 건넜다.

까를교는 까를교 자체가 목적인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에 다리보다도 '블타바 강 위의 관광지'라는 느낌인데, 마네수프교는 차도와 인도, 트램 라인이 깔려 본디 다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모양새였다.





마네수프교에서 바라본 까를교와 프라하성. 보다 낯선 각도라 좋다.




마네수프교 끝자락에 위치한 루돌피넘 극장. 체코 필하모닉의 상주 극장이다.

프라하에 오기 전, 공연을 세 개 예약해놨다. 두 개는 플로렌스 쪽에 있는 오페라 극장에서, 한 개는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이었다. 이미 세 개나 예약해놨는데 또 이렇게 멋진 극장이 나타나면 난 어떻게 해야하는가.

혹시나 싶어 근처에서 공연 시간을 대충 훑어봤는데, 내가 예약한 것들과 시간이 겹치더라.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겹치지 않았더라면 공연 티켓을 또 지를 뻔했구나 싶어서 말이다. 뭐, 사실 프라하에서의 공연 티켓은 지른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긴 하지만.




이건 루돌피넘 근처 건물인데 그냥 트램 지나가는 게 예뻐서 찍음.





3.

구시가지 광장과 크리스마스 마켓. 날이 흐리니까 트리나 마켓도 밤처럼 불을 켜놨다.

여기에 눈송이 좀 떨어져주면 참 로맨틱할 것 같았는데, 프라하의 하늘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흐린 날씨면서도 건조하기 그지 없더라. 결국 체류하는 동안 함박눈 내리는 프라하나 눈 쌓인 동화 속 프라하 등의 연출은 단 한 컷도 벌어지지 않았다.

모처럼 겨울인데. 아쉬워라.










그러고보니 "프라하에서 할 일" 목록에는 '구시가지 광장에서 멍 때리며 맥주 마시기' 미션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마켓 때문에 예상했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게 벅찰 정도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시야도 장애물 때문에 좁고 번잡스럽기 짝이 없는데 무슨 수로 머리를 비우고 멍 때리겠는가.

게다가 날씨가 추워서 속을 차게 만드는 맥주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차라리 핫 와인을 마시겠어.

아무래도 그 미션은 나중에 더운 여름날에나 다시 와서 해야될 것 같다.





4.

구시가지 광장의 성 미쿨라셰 성당을 지나가다가, 공연 쪽지를 보고 홀린 듯 들어갔다.




근데 이것도 내가 예매한 공연 시간대랑 겹쳤다. 허허.

아쉬워하며 미쿨라셰 성당만 좀 둘러보다 나왔다.






샹들리에가 유난히 예뻤음.

다음 번엔 이곳에서 공연 한번 보고 싶다.





5.

프라하 구시가지의 흔한 거리 공연.




혼자라서 조금 쓸쓸한 여행을 대번에 즐겁게 만들어주는 아주 고마운 분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연주가 있으면 박수와 함께 꼭 팁을 낸다. 멋진 음악에 값을 치뤘다는 게 사람 기분을 참 좋게 만들더라. 옛날엔 그런 거 몰랐었는데 요새는 그런 게 참 좋다.








6.

이쯤 돌아다니니까 피곤하다. 빨리 호스텔로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내가 머무는 호스텔로 가려면 구시청사를 지나가야 한다. 얼렁 가자. 슝슝!




슝슝은 무슨. 길이 막혔다.

구시청사 앞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면 이유는 한 가지 뿐이다. 정각의 시계탑 쇼. 그걸 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나보다. 나는 이곳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들 내가 시계탑 쇼를 보기 위해 자신보다 더 앞자리로 가려는 줄 알고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우이씨. 그래서 정각까지 지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소박한 자동 시계탑쇼를 구경해야만 했다.

아 그야 뭐 몇 백년 전에 이런 걸 만들었다니 경이롭고 신기하긴 한데, 또 볼 정도까진 아니란 말이다... 으음...





7.

인파를 뚫고 숙소로 돌아왔다.




지친다. 좀 자련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엎어졌다.





8.

1시간 정도 잤을까. 눈을 부비적거리며 깼다.

온돌이라는 훌륭한 난방장치가 없는 이 유럽의 호스텔은, 미적지근한 라지에이터 따위에 모든 난방을 맡기고 있었고, 그래서 나처럼 가녀린 소녀(!)가 잠옷만 입고 자기엔 추웠다. 어쩐지 몸이 좀 으슬거리는게, 옷을 더 껴입고 잤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이럴 땐... 그래, 따뜻한 스프로 몸을 뎁혀야겠군.

그러고보니 요 호스텔 앞 레스토랑에서 굴라쉬 스프를 파는 것 같았다. 그거 좀 사다가 호스텔 로비에서 후루룩 먹어야겠다. 나는 옷을 대충 껴입고 목도리를 두른 뒤 밖으로 나갔다.




요 가게임.




들어가서 굴라쉬 스프 포장이 되냐고 묻자 자기네들은 국물을 담을 만한 포장용기가 없어서 안된다고 했다. 이럴수가. 나는 엄청나게 실망하는 표정을 보이며 나는 진짜 굴라쉬 스프가 절실하다고 얘기했다. 웨이터는 당황해하며 그럼 차려줄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아. 그렇네. 난 왜 꼭 포장을 하려고 했던 거지. 먹고 가야겠다.

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헤죽 웃어보이곤 테이블에 착석했다. 웨이터는 내 이랬다저랬다하는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그럼 굴라쉬 스프 하나 드릴까요, 하고 물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곧 허연 파우더가 뿌려진 빵에 굴라쉬 스프가 담겨져 나왔다. 가격은 150코룬.




뚜껑을 열면 뜨끈뜨끈한 스프가 빼꼼!

추위에 떨다 먹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엄청 맛있게 먹었다. 웨이터가 와서 맛이 어떻냐고 물어봐서 흐엉 맛있어엉 흐어엉 하고 울면서 말했다. 예전에 플젠에서 먹은 굴라쉬 스프의 맛과 스타일하곤 조금 다르긴 했는데, 우리나라 해장국도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니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뜨끈뜨끈한 걸 먹으니 좀 살 것 같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이번엔 옷을 잔뜩 껴입은 다음 침대에 늘어져 잤다.

다시 눈을 뜬 건 저녁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정도 앞두고였다. 전날 유랑에 '동행'글을 올렸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연락을 많이 해서 그들을 모아 만나야만 했다...




동행은 처음이라 엄청 긴장해서 나갔던 저녁 식사에서 계속!






덧글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8/02/02 11:09 # 답글

    악ㅋㅋㅋ 굴라쉬 스프 드릴까요, 하고 당황했을 웨이터의 모습 ㅋㅋㅋ 이왕이면 먹고오는게 좋죠! 음식은 항상 따뜻하게! 서빙될때! 먹어야 제맛이 나잖아요. 요즘 문체가 뭔가 좀 바뀐 느낌이에요. 오늘 글만 그런가??ㅎㅎ 예쁜 옷으로 드레스업! 하고 공연 보고오시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은데 공연 후기는 아직 오려면 멀었나 봅니다:) 추운 겨울에는 역시 맥주보단 뱅쇼!
  • enat 2018/02/02 13:21 #

    문체가 좀 바뀌었나...? 옆 직장동료 이야기 들으면서 손가락으로는 도도도도 포스팅을 하니 조금 다르게 느껴지실지도 몰라요 집중을 못해서... ㅋㅋㅋㅋㅋ
    드...레스업을... 우움... 당시 캐리어를 작은 걸 들고 가서 이쁜 옷을 못가져갔어요... 드레스업이야 증말증말 하구 싶었는데 옷도 없고 추워서 따뜻한거 입구 싶고 감기 기운있어서 점퍼도 안벗고 앉은 자리 고대로 석상처럼 앉아 코 훌쩍이면서 본...
  • LionHeart 2018/02/02 11:40 # 답글

    옛 건물이 많이 남아있어서 어두운 날씨에도 분위기에 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ㅁ;
  • enat 2018/02/02 13:22 #

    흐린 날씨도 비오는 날씨도 프라하의 아름다움을 가리진 못하더라고요! 하늘이 꾸리꾸리하니까 스산한 맛도 있고 좋았어요 :)
  • 냥이 2018/02/02 13:44 # 답글

    트램은 tatra사의 T3계열이군요. 저는 KT85D계열도 봤습니다. ( http://nambal.egloos.com/1915957 , http://nambal.egloos.com/1915955 )
  • enat 2018/02/05 08:55 #

    전 무슨 트램인지도 모르고 타고 다녔네요 ㅋㅋㅋ 딱 보면 아시는게 신기해요
  • 냥이 2018/02/05 10:52 #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지요. t3계열은 구 소련이었던(&소련과 함께했던) 나라에 많이 수출(?)되었지요. 북한에도 파란색 t3트램이 있죠.
  • 라비안로즈 2018/02/02 19:13 # 답글

    음... 기본적인 질문인데요... 저 빵에 스프가 담겨나오면.. 빵은 버리는건가요.? 아님 먹는건가요?

    미국에서 빵에담긴 스프도 먹고 빵도 먹어치우니 같이있던 미국에 먼저온 언니가 쪽팔리다고 것까지 먹음 어쩌냐고 너무 호들갑피우던데... 사람들 다 쳐다본다고..(...) 빵은 먹는건지 아닌지 궁금하네요^^;;;

    프라하는 눈 팡팡오는 그런곳으로 생각하는데 흐리다니.. 아쉬우셨겠습니다.
  • enat 2018/02/05 09:51 #

    어... 먹으면 안되나요? 어차피 빵인데 '-'
    사실 빵에 담긴 스프는 스프가 주가 아니라 스프에 적셔진 빵이 주가 아니던가요!
    미국의 어떤 레스토랑에서 드셨는지, 또 그 레스토랑의 에티켓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이 뭐라 할만한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굳이 손님이 나서서 호들갑 피울 문제는 아니었나 싶어요. 먹을 걸 줘서 먹었는데 그게 왜..? ㅠ
  • 라비안로즈 2018/02/05 15:38 #

    그렇죠?? 빵도 먹을껀데... 그언니분이 좀 호들갑떨었던걸로.. ㅎㅎ

    유럽이 더 따뜻했겠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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