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6 01:49

'씀' 대나무숲

'씀' 앱에서 썼던 작은 일기 같은 것들. 새벽 감성 한가득.





1.

글감 : 회색

다이소에서 레몬밤 키트를 샀다. 키트 상자에는 물만 주면 자란다고 쓰여있었다. 난 그 무책임한 광고 문구를 철석같이 믿고 매일 같이 물만 줬다.

3주가 지났다. 아직도 싹이 트지 않았다. 다들 화분을 갖다 버리란다. 물만 주면 자란댔는데. 왜 발아하지 않지? 속상해진 나는 막대기로 화분을 쑤시고 흙을 뒤집으며 씨앗을 찾아보았다.

흙을 뒤집자 회색빛으로 가득한 무언가가 잔뜩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들여다봤다. 곰팡이였다. 흙 속을 곰팡이가 뒤덮고 있으니 씨가 자라려야 자랄 수 없었겠지 싶었다. 그것도 모르고 물만 줘댔으니 곰팡아 무럭무럭 자라라 하고 습기를 와장창 제공해댄 꼴이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회색빛 곰팡이 투성이. 내 모습인가 싶어 한참을 그리 보고 있다. 주말에 곰팡이 걷어내고 다른 걸 심어봐야겠다. 볕 드는 곳으로 자리도 옮겨야지.





2.

글감 : 눈길

나홀로 당신의 그 눈길에서 많은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니겠지만.





3.

글감 : 정전

쿠바에 있는 올인클루시브 리조트에 묵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아는 동생과 함께 2인실에서 지냈는데, 그 방은 대연회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방이었다. 바다뷰도 수영장뷰도 정원뷰도 아닌 식당뷰라니. 우리가 정말 싼 방을 고르긴 골랐나보구나. 별 볼 일 없는 뷰 때문에 테라스는 찬밥신세였다.

어느 날이었다. 대연회장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들어왔는데, 마른하늘에 갑자기 번갯불이 떨어지더니 불이 픽 하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전력공급장치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우리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테라스로 나가보았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대연회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 애기 우는 소리, 서로 부딪쳤는지 싸우는 소리, 말리는 직원들의 황망한 소리... 그 소리에 맞춰 핸드폰 불빛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작은 빛들이 도도도 떠다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 위로 번갯불이 떨어졌고, 이번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도도도 떠다니는 불빛이 천둥소리에 놀라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시끄럽던 잡음도 마에스트로 천둥님에 의해 동시에 사라졌다. 천마에 대단한데?

천둥이 끝나자 곧 스콜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연회장은 흐르는 빗물과 함께 다시 시끄러워졌다.

우리는 객실로 들어오기 전 받아온 피냐콜라다를 쨘 하고 부딪치며 그 소란을 감상했다. 먼 곳에서 남의 고생과 고난을 술과 함께 감상하다니 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악취미적인가. 우리는 불근신한 서로를 욕하며 마저 구경했다. 우리의 식당뷰 테라스가 빛을 발한 순간은 바로 정전이 된 이 때였더랬다... 하하.





4.

글감 : 무언가

대학 졸업식날.

내게 참 많이 잘해줬고 내가 참 못되게 굴었던 그 오빠는, 정문 앞에서 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련하게도.

그는 대체 내가 언제 이 정문을 지나갈 줄 알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걸까. 또 그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날 어떻게 단번에 찾아내고 달려온 걸까.

달려오는 동안 그의 표정이 여러 번 변했다. 나를 보고. 내 뒤의 가족들을 보고. 내 옆의 남자친구를 보고. 그러더니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내게 자신의 손에 든 무언가를 건넨 그는, 잘 살아야 한다고 전한 뒤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구냐고 묻는 엄마에게, 어, 그냥, 친구, 라고 얼떨떨하게 답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그 무언가를 뜯어보았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빨간머리 앤의 퍼즐 액자였다. 앤이 매튜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벚꽃길을 지나 자신의 가족, 자신의 친구, 자신의 연인, 자신의 꿈과 만나게 된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내 행복을 빌어준다는 의미일까? 초록색 지붕을 향해 나아가라고? 글쎄, 그렇게 복잡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림이 예뻐서 고른 걸까?

뭔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가슴이 먹먹했다.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5.

글감 : 지구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네게 미안하다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공항 공중전화를 들고 네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많이 미안했다고. 다 내 잘못이고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널 탓해서 미안하다고.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나는 다시 겁쟁이가 되어버렸어. 네가 날 잊고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나 같은 게 너한테 연락해서 괜히 기억나게 해버릴까 걱정됐어. 더 상처주기 싫었어. 사실 다 핑계야. 그냥 내가 겁쟁이였어.

지금은 사과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어. 나 혼자 이곳에 남아 작은 글씨로 미안하다고 적어봐. 참으로 의미없게도. 미안해.





6.

글감 : 당부

엑셀 함수 건드리지 마세요.





7.

글감 : 다그침

수업이 끝나고 집엘 오니 몸이 약한 백구가 죽어가고 있었다. 어린 나는 뭘 어쩌지도 못한 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기도하며 이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날은 아마 내가 아는 모든 신이 연차를 쓰고 휴가를 떠난 모양이었는지, 백구는 힘없이 축 늘어지기만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그에게 죽지 말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오히려 내 손길에 안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지만 아마도 그때 내 마지막 얼굴을 보고 가려고 했는 모양이지. 필사적으로 하교 시간까지 날 기다렸을 녀석을 생각하면 아직도 많이 아프다.








덧글

  • 순수한 산타클로스 2018/02/16 02:14 # 답글

    ㅠㅠ...
  • enat 2018/02/16 19:44 #

    새벽이라 그랬어요...
  • Jimena 2018/03/14 11:54 # 삭제 답글

    감성적인 장문 사이에 느닷없이 엑셀함수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시다니. ㅎㅎ 귀여워서 웃고 말았어요. 이낫님의 감성과 현실적인 유머감각 정말 좋아합니다~!
  • enat 2018/03/14 15:46 #

    앗 이 포스팅을 다시 보게 만드시다니 어딘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숨고 싶군요... 근데 전 회사 대리님이 엑셀함수를 너무 건드렸었어요 진짜 증오스러울 정도로... ㅋㅋㅋㅋㅋㅋ 여튼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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