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6 19:39

겨울 유럽여행 (8) 프라하 : 존 레논 벽 ├ 겨울 유럽여행 (2018)

1.

낮잠을 자다가 깼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속이 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 몸도 안좋고 추운 날엔 따뜻한 스파가 제격인데. 나는 혹시 프라하에 괜찮은 스파가 있을까 싶어 검색을 해봤고, 검색 도중 프라하의 명물이라는 "비어 스파"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나, 아쉽게도 그 "비어 스파"는 연말까지 모든 예약이 마감되어 있었다. 저런저런.

스파는 물 건너 갔고, 그럼 오늘 오후엔 뭐를 하면 좋을까. 나는 "프라하에서 할 일" 목록을 주섬주섬 꺼내어 검토하다가, "존 레논 벽화에 낙서(LOVE&PEACE)하기"를 골랐다. 그래, 이거다. 이어폰 꽂고 IMAGINE 같은 거 들으면서 평화를 외치면 왠지 나의 지친 심신이 치유받을 것만 같다.

나는 겉옷을 입고, 예의 그 "몽골 모자"를 챙겨 쓴 뒤 밖으로 나갔다.





2.

날씨는 오전보다 화창했으나, 기온은 더 내려가있었다.




호스텔에서 나가자 구시청사 탑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는 게 보였다.

어이구, 또 시계쇼 시간대인가 보다. 나는 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까를교 쪽으로 걸어나갔다.




어이구. 까를교 쪽은 사람이 더 많다.

전날 비올 땐 사람이 그렇게 없더니, 하늘이 쨍해지니까 사람들이 몰렸나보다.


▼ 아래부턴 카메라로 찍은, 날씨 좋은 날 오후의 까를교












3.

존 레논 벽으로 가려면 까를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구불텅거리는 프라하의 옛길을 따라 걷다보면 곧 목적지다.





존 레논 벽 John Lennon Wall.

이 벽에 존 레논에 관한 그래피티와 비틀즈의 노랫말이 쓰여지기 시작한 건 체코 공산정권 시절부터다. 공산 치하에서 억압되던 많은 청년들은,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며 벽에 다양한 메세지를 새겼는데, 그 중에서도 자주 인용됐던 문구는 당시 유행하던 비틀즈의 가사였다.

정부에서는 (그들 기준의) 반정부 문구로 가득한 벽을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이 벽의 소유주가 몰타 공화국 대사관이기 때문이었다. 낙서를 허락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지지해준 몰타 대사관 덕분에 프라하 시민들의 기원과 저항은 이어졌고, 마침내 공산주의는 붕괴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평화의 문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나도 뭔가 락카 스프레이를 사서 멋지구리한 문구를 새겨보고 싶었는데, 여기가 관광지라서 그런 건지, 락카 따위가 있을만한 대형마트를 찾기가 힘들었고, 또 그나마 찾아낸 마트에 가도 락카 스프레이 같은 건 팔질 않았다. 흐응... 해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나는 가방에서 일기 쓰는 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볼펜을 꺼내어, 벽 한귀퉁이에 붙어 힘들게 끄적였다. 볼펜이 벽에 잘 안먹어서 여러번 힘주어 긁어야만 했다. 이렇게, LOVE&PEACE를... 한 글자씩 적어서...




LOVE까지 쓰고 나니 팔이 아프고 손이 시려웠다. 나는 사랑이 있으면 자연스레 평화가 오는 법이지,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여기까지만 쓰기로 했다. 큼흠흠.




여튼 됐어! 조금 어거지라도 미션 수행 완료야!

나는 뿌듯해하며 벽을 마주보고 섰다. 왠지 존 레논의 IMAGINE이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잘 안터지는 데이터를 이용해 노래를 틀었다. 데이터 수신 상태가 엉망이라 간혹 끊기긴 했지만, 3분 남짓한 그 평화의 노래는 이 작은 저항의 벽과 매우 잘 어울렸다.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벽 앞에 서서 내 나름대로의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4.

존 레논 벽을 떠나 조금 돌아다녔다. 근데 돌아다닐수록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거기에 배는 또 어찌나 고픈지. 생각해보니 아까 화장실에서 많은 것들을 비워낸 뒤 아무것도 먹질 않았다. 많이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다. 우이씨. 5분 전까지 존 레논의 벽 앞에서 세계 평화를 기원했던 상냥한 미소의 소녀는 사라졌고 그저 낯선 땅에서 춥고 배고프고 다리아픈 불쌍한 여행자가 나타났다.

그 불쌍한 여행자는 근처 어딘가에 아시안 음식점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따끈한 쌀밥이 무진장 먹고 싶었다. 물론 쌀국수도 오케이다. 그러고보니 전날 동행에서 만났던 어떤 사람이 "최근 프라하에 쌀국수가 상륙해서 엄청 인기가 많대요" 어쩌구 얘기를 했었다. 어디 보자, 쌀밥이나 쌀국수 파는 집 없나?

나는 희망을 가지고 구글링했으나, 요 동네는 체코 정통식을 파는 집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쌀' 들어가는 음식들은 전부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 구시가지로 돌아가야겠군.




다시 까를교를 건너 구시가지까지 걸어가기엔 춥고 배고프며 힘들다. 나는 근처 트램 정류장으로 가서 구시가로 향하는 트램을 탔다.




30분짜리 1회 교통권을 구입하고.




칙칙폭폭 구시가지로 고고.

숙소 근처까지 바로 가는 트램이 있긴 했는데, 그거 기다리다간 얼어 죽을 것 같아서 그냥 근처까지 가는 트램 아무거나 탔다. 당시 내가 트램에 타서 찍은 셀카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코와 귀가 빨갰고 표정은 또 어찌나 불쌍하고 가련했는지 모른다. 가여운 나 자신... 어서 뭐라도 좀 먹자.




트램은 시민회관 앞에 날 내려줬다. 안뇽. 오늘 아침에 봤던 시민회관.

사실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 바로 옆에 유명한 쌀국수집이 있긴 했는데, 도저히 거기까지 걸어갈 힘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시민회관 근처에 있는 아무 중국집엘 들어갔다.




엄청 구려보이는 상가 지하에 위치한 중국집. 평소 같았다면 이런 곳은 거들떠도 안봤겠지만 지금은 쌀밥과 국물이 넘나 간절한 것이다!

나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그 중국집에 들어갔고, 중국인들은 중국말로 쏼라쏼라 나를 맞이했다. 체코 땅에서 장사하면서 영어도 체코어도 쓰지 않는 굉장한 사람들. 중국어로 음식 주문하는 정도는 배워둬서 다행이야...





별 기대 안하고 시킨 볶음밥과 완탕.

진짜 별 기대 안했는데 넘나 맛있어서 울면서 먹었다. 서빙보던 귀여운 남자애가 나보고 맛있냐고 물었고 나는 하오쯔를 외쳤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음식점의 음식이 맛있던 거였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쌀밥에 굶주렸던 거였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당시의 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으니. 어째서 쌀이란 것은, 그리고 탕이란 것은 이렇게나 맛있는 것일까. 나는 저돌적으로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음식을 흡입했다.

하하. 정말 훌륭한 음식이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로 계산을 했고, 꽤 많은 양의 팁을 남겨 내 기분을 표현했다. 서빙보는 귀여운 남자애가 고맙다고 했다. 하하하. 아냐. 너희들이 날 살린 것을.





5.

그리고...

뭐,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내 장염은 아직 낫지 않았기에, 나는 그 먹은 것들을 아주 완벽하게 도로 배출해냈다. 거기에 추위에 떨다가 급하게 밥을 먹은 것 때문에 체기까지 생겼다. 하하하. 이로써 위장 모두가 너덜너덜해졌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니미니가 챙겨준 약이 위염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한 알 가지고는 안듣나 싶어서 그냥 또 약을 한 알 더 먹고 말았다.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외친다. 임마, 약 상자에 적힌 효능 효과를 잘 읽어보라고. 아무 약이나 주워먹지 말라고!

하지만 과거의 나는 미래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재주 따위 갖고 있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그저 힘이 쭉 빠진 채 숙소에서 쥐 죽은 듯 쿨쿨 자다가, 예약해 둔 오페라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라 트라비아타 감상부터 계속!






덧글

  • Tabipero 2018/02/16 19:52 # 답글

    뭔가 enat님 여행기 치고는 장염 에피소드가 너무 싱겁게 끝난다 했더니 결국(...)
    플라시보 효과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포스팅을 보고 있자니 얼큰한 국밥 땡기네요. 저녁도 먹었고 주초 여행중에는 1일 1국밥도 했었는데...
  • enat 2018/02/17 14:04 #

    장과 세균은 거짓말을 하지 않더군요...
    어쩜 이렇게 둘이 손잡고 사람을 괴롭히나 싶을 정도였어요. 시원시원하게도 탈수 증세 진행중.

    저도 지금 친척 애기들 피해서 밖에 나왔는데 국밥이나 먹고 들어갈까 싶네요. 애기들 상대하는거 너무 힘들어요...
  • neutras 2018/02/17 06:31 # 삭제 답글

    프라하 시내에 Boscolo라는 꽤 괜찮은 스파가 있는데.. 안타깝네요. 시설은 럭셔리한데 가격은 60유로 좀 넘나, 모 고정도밖에 안되고 좋더라고요. 나름 로컬들에게는 유명한 곳인지, 동료들에게 갈만한 스파 물어보니 이구동성 추천하던데.. 바로 지난달 프라하에 컨퍼런스 발표하러 갔다가 저도 춥고 숙취+배탈에 과로, 몸살까지 겹쳐서 고생 엄청 했거든요. 역시 춥고 몸살나면 스파가 보약이다 싶었더랬습니다.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냥 호텔 직원에게라도 물어보심이...
  • enat 2018/02/17 14:06 #

    아... 직원에게 물어볼걸 그랬네요. 제가 머물렀던 호스텔 직원들이 좀 까칠한 편이라, 걔네한테 묻는다는 거 자체를 생각하질 못했어요. 확실히 아플 땐 스파가 짱이죠. 목욕과 온천과 찜질 스파 이런 단어들 듣기만 해도 넘나 치유되지 않나요... 여튼 다음번 "프라하에서 할 일 목록"을 만들 때 그 스파를 꼭 넣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8/02/17 11:42 # 답글

    스파 좋죠... 비어스파라니 뭔가 환상적이면서도 딱 사고나기 좋겠다느 생각도 들고....ㅋㅋㅋ 아프시면 고생이에요ㅠ_ㅠ 객지 나갈때는 꼭꼭!!! 모든 종류의 비상약을 챙겨갑시닷!!!
  • enat 2018/02/17 14:08 #

    팜플랫을 보니까 [맥주 무제한 + 홉으로 목욕 + 지푸라기 침대에서 휴식] 세트였어요! 시간은 가격마다 다르고요.
    넵 비상약... 챙겨갈게욤... 전 여행중에 한번씩은 꼭 아픈 주제에 왜 약을 챙겨가질 않는 걸까요? 나라는 사람도 참...
  • 냥이 2018/02/18 12:29 # 답글

    존 레논벽이 카를교 지나서 바로 왼쪽이었어요? 저는 찾아 리스트에 올려두고선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 enat 2018/02/22 09:10 #

    길이 좀 구불텅거려서 헷갈리더라고요! 전 구글맵 켜놓고 갔습니다 ㅋㅋ
  • LionHeart 2018/02/28 12:09 # 답글

    으아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집 밖을 나서시다니. 용기와 그 의지에 감탄하게 됩니다. 게다가 저녁은 오페라라니...도중에 나갈 수도 없지 않나요? 저라면 오페라를 위해서라도 쉬었을 것 같은데;

    정말 프라하 사진들...어딜 담아도 끝내주네요. ;ㅁ;
  • enat 2018/03/01 18:35 #

    날씨가 넘 맑았거든요 ㅠㅠ 프라하 와서 계속 흐리기만 했는데 저렇게 맑은 날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어요 ㅋㅋㅋ
    앗 그리고 다행히 저 날의 오페라는 박스석에서 본 덕분에 화장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박스석이 괜찮은 선택이었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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