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2 00:24

대구 여행 - 가만히 있어도 HP가 차는 약령시 ├ 남부지방

친구를 보러 대구에 다녀왔다.

친구와 나는 대구에 1도 연고가 없지만 친구의 일정상 어쩌다보니 대구에서 만났다. 친구 일정 때문에 대구까지 가냐고, 대단한 의리 나셨다고 누가 그랬는데, 기본적으로 나는 떠도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괜찮다. 원래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여기저기 잘 돌아다닌다.

대구에 가기 직전 아빠에게 감기가 옮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지 말고 그냥 쉴까 싶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1년에 만나는 횟수를 한손에 꼽을 정도의 희귀한 몬스터였고 또 이미 숙소까지 다 예약한 터라 그냥 갔다.

다행히 감기는 심해지지 않고 금방 나았다. 머물렀던 지역 때문인가 싶다. 우리가 대구에서 머물렀던 지역은 약령시라고, 뭔가 한약방과 약재상들이 잔뜩 몰려있는 동네였다. 한약 냄새로 진동을 하는 거리 때문에, 돌아다니기만 해도 HP가 차는 느낌이었다. 대구에 이런 동네가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숙소는 약령시에 있던 봄고로 게스트하우스 2인실. 사실 역이나 터미널 근처의 호텔을 잡을까 생각했었는데 마땅한 체인 호텔이 안보여서 그냥 게하로 잡았다.

내가 친구보다 먼저 대구에 도착해서 먼저 체크인을 했다.

짧게 쓰는 숙소 평.


*** 봄고로 게스트하우스

단점 : 방이 좁음. 2층 침대라 불편했음.

장점 : 좁은 방이라 라지에이터로 금방 따뜻해짐. 숙소 주인분들 굉장히 친절하심. 가벼운 조식 제공함. 지하철역이 가까운 편. 약령시 가운데에 있는 게하라 주변 구경하는 재미가 있음. 객실 비번을 손님 전번 뒷번호로 해주신 센스.





감기에 걸렸다고 하자 게하 주인분이 한약방을 추천해주셨다. 3대째 하고 있는 한약방이라고 했다.

한약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 세 번이나 일부러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주인이 없었다. 게하 주인분께 그 점에 대해 물어보자 "아아, 거기 사장님 많이 돌아다녀요" 어쩌구 하시더라. 아니 이게 뭐람. 왜 가게를 두고 돌아다니신담. 어쨌든 그래서 약을 못먹었다. 그냥 편의점에서 타이레놀 사먹음.

두번째 방문에서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이 한약방의 2대째라고 하셨다. 2대째, 3대째, 이런거 괜히 멋있다. 나는 한약방의 시스템이나 가업 비밀 같은 게 궁금해서 역사의 산증인 같은 인상의 할아버지께 이거저거 여쭤봤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께선 몇 번 대답을 해주시다가 지치셨는지 어, 어험, 우리 아들, 왜 안오지? 어험험, 하시더니 아들도 찾을 겸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마실 나가셨다.

아니 가게에 나밖에 없는데 어디 가신담. 이렇게 가게 비워도 되나요? 아들의 가게를 비울 정도로 제 수다가 힘드셨나요? 흑흑...




한약방에서 거부당한 환자는 친구 녀석이 약령시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친구를 맞이하러 갔다.

너무나 허기졌기에 만나자마자 밥을 먹으러갔다. 먹으러 간 곳은 약령시에 있는 거송갈비찜이라는 가게.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타고 있길래 아까 돌아다닐 때부터 신경쓰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리 먹으려고 가니까 사람이 얼마 없었다. 운 좋네.

먹고 나와서 보니까 또 대기줄이 생겨있었다. 하하하.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몸 아플 때 돌아다니면 운의 총합이 맞춰지는 건지 이런 소소한 타이밍이 잘 맞는 경향이 있다.




메뉴는 딱 하나다. 1인당 8천원짜리 갈비찜 세트(공깃밥, 죽, 음료 포함). 원래 진정한 맛집은 메뉴가 많지 않은 법이지.

갈비찜에 대해선... 딱 세 마디만 남기겠다.

핵맛있음.
울면서 먹었음.
왜 사람이 많은지 알겠음.




훌륭했던 점심을 치하하며 카페에 왔다. 쌍화군과 라떼양이라는 소박하고 따뜻한 카페였다. 테이크 아웃점인줄 알았는데 안쪽에 자리가 있었다. 잠깐 앉았다 가기로 했다.

근데 주인도 직원도 아무도 없다. 이 약령시는 빈 가게가 트렌드인가. 아까 한약방도 그러더니 왜 이곳도...

혹시 물건을 사기 위해선 주인을 잡으러 돌아다녀야 하는 동네인 건가? 몹시 혼란스럽다.





다행히도 몇 분 뒤 사장인지 직원인지 하여간 인상 좋은 언니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화장실에 다녀온 모양이다. 엄청 친절한 인상의 그 언니에게 나는 오도독 쌍화탕(이게 메뉴 이름이다)을, 친구는 쌍화라떼를 주문했다.





내가 시킨 오도독 쌍화탕은 말 그대로 오도독했다. 쌍화탕도 제법 진한 편. 감기 환자에게 좋은 차였다.

쌍화탕을 괜찮게 먹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친구가 먹은 쌍화라떼가 더 맛있었다. 하긴 가게 이름이 붙은 메뉴가 맛있는 법이지...




쌍화탕을 마시고 나오자 몸이 뜨끈뜨끈해졌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약거리. 한약 냄새 풀풀.




머리털 없는 캐릭터들과 함께.




표정이 어마무시했는데 표정을 가려서 아쉬움.




이렇게 길게 쓸 포스팅이 아니었는데 길어져서 당황스러운 나와 약령시 성당 사진.

그 외에도 친환경 에너지 박물관(?) 같은 곳과 몇 군데의 약재상을 방문했다. 먹고 얘기나 나누려고 간 거였는데 그 감기 걸린 몸으로 잘도 빨빨거리고 돌아다녔군. 약령시 버프 효과가 이렇게나 강하다.




좀 돌아다니니까 춥다. 몸 좀 녹일 겸 카페를 한군데 더 갈까 했는데 어떤 건물 지하에서 "약령시 여행자 쉼터" 같은 곳을 발견해서 거길 들어갔다.

기웃기웃거리고 있었더니 직원분이 나와서 쉬다 가라며 쌍화탕을 무료로 주셨다. 무료 시음용 쌍화탕치곤 진했다. 스멀거리던 추위와 감기 기운이 싹 사라졌다.




이번엔 조금 용기를 내어 약령시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친구가 대구는 "서문시장"이 유명하니까 거길 가보자고 했다. 나는 사실 약령시에만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서문시장에서 유명하다는 납작만두를 먹어보고 싶어서 따라가기로 했다.

약령시에서 서문시장은 걸어서 10분 정도다. 금방 시장에 도착했다.

시장구경을 하다가 마침 어떤 분식집에 자리가 났길래 거길 앉았다.




그 유명하다는 납작만두와 떡볶이.

사실 납작만두는 예전에 동대구역에서 밤기차 탈 때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10년 전 추운 겨울,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졸린 눈 비벼가며 오뎅국물과 같이 먹었던 그 납작만두... 맛이... 있었나? 사실 그 땐 뭐든 맛있었던 날씨와 시간과 나이였다. 추억보정도 있었다. 그래서 난 서문시장에서 먹게 될 납작만두가 굉장히 맛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납작만두란 녀석은 내 믿음을 배신했다. 이 자식은 그저 밀가루 만두피에 불과했다. 그 위에 뿌려진 간장과 고춧가루, 양파와 파 조각들... 대체 이게 뭐람? 왜 이걸 돈 주고 사먹는담? 나는 탄식하며 떡볶이에 손을 뻗었다.

감동은 의외로 떡볶이에서 터졌다. 대체 떡볶이에 무슨 마약을 탄 건지는 몰라도 양념이 환상적이게 맛있었다. 내가 최근에 먹은 떡볶이 중 제일 맛있었던 떡볶이는 춘천에 있던 팬더하우스 떡볶이였는데, 서문시장의 떡볶이는 그것과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납작만두는 맛이 없었지만 떡볶이 국물에 적셔진 납작만두는 최고의 별미였다. 뭐지 이 비법 소스는?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주는 이 양념... 아름다울 정도다.




갈비 먹은지 얼마 안되서 떡볶이 먹었더니 배부르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서문시장 근처의 달성 공원으로 향했다.




저녁 먹기 위해 운동 열심히 함.

왜 대구까지 가서 동네 공원의 운동기구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음.




달성 공원에는 동물원도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독수리.

하늘의 제왕이 철창 안에 갇혀있는 걸 보니 안타까웠다. 측은한 눈으로 보고 있었더니, 독수리가 철창 앞에서 자신을 구경하는 미개한 인간들을 향해 자신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리곤 푸드덕거렸다. 그저 푸드덕거렸을 뿐인데 돌풍이 불었다. 깜짝 놀랐다. 우리 뒤에 있던 어떤 커플은 꺅꺅거리며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우리는 그 거센 바람에 섞여 날라왔을 세균과 바이러스 따위를 걱정하며 독수리를 노려보았다. 감히 네가 만물의 영장에게 바람을 먹여? 그러나 독수리는 다시 한 번 푸드덕거릴 것처럼 날개를 폈다. 아이, 미안해요, 쉬는데 방해해서! 우리는 기겁하며 도망갔다.

하늘의 제왕 말고도 이 공원엔 동물들이 많았다. 또 기억에 남는 건 새 중의 새인 황새였다. 황새는 성대가 없어서 딱딱거리는 부리 소리로 대화를 한다고 한다. 딱딱거리는 소리 들어보고 싶다 어쩌구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황새가 딱딱거려줬다. 우리 말을 알아들은 걸까? 신기해라. 감사한 마음에 나도 같이 이로 딱딱거려줬다. 딱딱!




동물원까지 한바퀴 돌고나니 넘나 피곤하다. 우리는 서둘러 "가만히 있어도 HP가 차는 약령시"로 돌아갔다. 한약 냄새를 맡자 몸이 다시 회복됐고 기력이 돌아왔다. 놀라운 효과다. 아마도 약령시 전체를 수호하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어서오세요 약령시를 찾은 여행자들이여... 그대들의 가는 길에 축복을... (띠로리~ 파티원 전체 회복)

...같은.




출출하진 않았지만 저녁시간이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유명한 스시집에 갈까 했는데 해산물이 별로 끌리지 않았다. 유명한 스시집 옆의 은화수 식당에 갔다. 가게 인테리어가 넘나 예뻤다.

근데 알고보니 체인점이었다. 개인 식당 같은 감성이었는데 속았군.





음식은 꿀맛이었다. 카레도 돈까스도 깍두기도 넘나 맛있었던 것. 그래, 맛있으니까 체인점을 냈겠지. 행복했다.




친구가 투썸 케이크 쿠폰이 있어서 투썸에 왔다. 다른 카페 케이크 쿠폰이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투썸 케이크 쿠폰이라니 지나칠 수가 없다. 투썸 케이크는 언제 먹어도 맛있단 말이다.

이 케이크는 처음 먹어보는 케이크였는데 (주로 티라미수를 먹는다) 이것 역시 꿀맛이었다. 너네는 왜 이렇게 케이크를 잘 만드는 거니? 흑흑.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셀카 찍으면서 놀고 음악 듣고 각자 욕할 사람들 실컷 욕한 다음에 잤다. 이 다음날은 별 얘기가 없어서 (오전 중에 각자의 생업 지역으로 돌아갔다) 포스팅할 꺼리도 없군.

한나절 동안의 대구 약령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사진 몇 장 올리고 끝내려고 했다) 시간이 늦어져서 좀 놀람. 빨리 자야겠다.







덧글

  • 열아홉 2018/03/02 02:12 # 답글

    저도 이번에 친구 만나러 대구 가는데 납작만두 먹고와야겠어요 ,, 옴뇸뇸,, 맛있겠다
  • enat 2018/03/03 20:50 #

    납작만두보다 떡볶이가 더 맛있어요 떡볶이도 꼭 드세요! 저 떡볶이 별로 안좋아하는데 저기껀 맛있더라구욤 욤욤뇸
  • 개성있는 설인 2018/03/02 09:38 # 답글

    저 대구사람이에요 처음간거 치곤 알차게 잘 놀다 오셧네용! 저도 모르는곳을 가봣다니 한번 가봐야 겟네요
  • enat 2018/03/03 20:51 #

    대구인이시군용 아주 먼 옛날에 대구 찜질방 한번 다녀온 적은 있었는데 한나절이라도 제대로 둘러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네요. 약령시 근처에 예쁜 카페가 많아서 좋았어요~ :)
  • LionHeart 2018/03/02 11:18 # 답글

    이번에도 대구 한 번도 못가보았는데 가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약'을 테마로 하고 있는 여행지가 독특하네요 ㅎㅎ 심지어 이를 즐기기 위해 아프기까지 하는 센스까지 -ㅁ-
  • enat 2018/03/03 20:52 #

    !!!!!!
    그렇습니다 제 감기기운과 몸살 이 모든 것은 약령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책략이었죠!!!!! (아님)
    자 감기몸살에 걸리신 많은 분들 약령시로 떠나세요!!!!
  • PennyLane 2018/03/02 13:47 # 답글

    약령시가 의외로 괜찮네요? 친구 결혼식 때문에 대구 갔는데 볼 거 없다며 결혼식만 보고 부산가서 놀랬는데!!!!
  • enat 2018/03/03 20:54 #

    원래 자신의 고장엔 볼만한 게 없는 법이지요... 제가 인천사람인데 인천에 뭐 없어요... ㅋㅋㅋㅋㅋ
    근데 친구분의 말도 일리있어용 대구vs부산이면 부산이죠 역시!
  • Tabipero 2018/03/02 21:48 # 답글

    가만히 있어도 HP가 차는 곳이라니요 ㅋㅋㅋ 대구는 볼거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는 곳 은근 많은 것 같아요.
  • enat 2018/03/03 20:56 #

    한약냄새가 거리에 진동을 해서 기력을 회복시켜주더라고요. 진정한 플라시보 효과의 땅...!
    사실 그렇게 볼거 없는 동네여도 친한 사람이랑 잘 먹고 잘 얘기하면 좋은 여행지가 되죠 :)
  • jes 2018/03/03 17:51 # 답글

    약령시 너무 좋죠~ 그쪽으로 새로 카페랑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생겨서 뭔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랄까요?ㅎㅎㅎ 약전골목에서 동산병원쪽으로 해서 서문시장 넘어가시면 예쁜 성당들이랑 신명고등학교 옆 쪽으로도 괜찮아요! :) 제가 대구 출신이라.. 잘 즐기고 가셨다니 기분 좋네요.
  • enat 2018/03/03 20:59 #

    카페!!!!도 예쁜곳 참 많아서 여기저기 들어가볼 생각이었는데 친구가 빨리 배부르는 바람에 한군데밖에 못가봤어요. 뱃고래 큰 사람과 함께였다면 약령시 카페를 제패하고 돌아왔을 것을...!
    예쁜 성당에 가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하고 지나쳤나봐요~ 그것들은 전부 다음의 즐거움으로 남겨둬야겠어용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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