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3 20:42

겨울 유럽여행 (11) 프라하 : 호스텔을 옮기다 ├ 겨울 유럽여행 (2018)

1.

호스텔을 옮겼다.

숙소를 옮기는 일은 무진장 귀찮은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호스텔 호머는 딱 어젯밤까지 빈 자리가 있었고, 오늘밤은 Full이라 다른 곳을 찾아 나가야만 했다. 관광도시 중의 관광도시인 프라하, 그것도 연말의 프라하는 숙소 구하기가 넘나 어려운 것이다.

미리 예약해놨던 곳은 "리틀 쿼터 호스텔"이라는, 프라하성 근방의 호스텔이었다. "호스텔 호머"보다는 살짝 비싸지만, 사진으론 괜찮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에 별 고민없이 예약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리틀 쿼터 호스텔"은 참 좋았다. 하지만 가는 길이 넘나 힘들었다. 지옥을 맛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호스텔 호머에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해먹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체크아웃할 때 굴뚝빵 덕분에 친해졌던 그 직원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자! 이제 리틀 쿼터 호스텔까지 가야한다.




호스텔 호머는 구시청사 근방이고, 리틀 쿼터 호스텔은 프라하성 근방이니, 갈 길이 까마득했다.

구글로 찾아보니 트램이 다니긴 했는데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거리가 상당했다. 나는 툴툴거리며 캐리어와 가방을 챙겨 그 우둘투둘한 길을 따라 트램 정류장까지 이동했다.




정류장에서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 근방으로 가는 길.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왔다.

어라? 오늘은 강매고기 안먹었는데.

배에 좋다는 약도 먹어뒀는데.

왜 아프지.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약을 꺼내어 멍하니 바라보았고, 만 하루만에 그 약이 위염약이며 장염에는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약효과의 반대효과로 장이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앗, 이 신호는... 빨리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신호...!

단언컨대 내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절박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더러운 소리하지 말라, 웃긴 소리하지 말라, 등등의 이야기는 하지 마시라. 이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이며 한편으론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이 달린 문제인 것이다. 나는 엉거주춤한 포즈로 식은땀을 흘리며 트램에서 버텼다. 트램이 멈출 때마다 관성에 의해 뱃속이 출렁거리던 그 느낌이란... 정말인지 떠올리고 싶지 않다.

트램에서 내려 호스텔까지 가는 길은 또 어찌나 가파르고 멀던지. 가는 길에 농담 아니고 진짜 울 뻔 했다. 길목에 있던 스벅 등의 카페라도 들어가서 화장실을 갈까 생각했지만 짐이 워낙 거추장스러운데다가 도난 및 분실의 우려도 - 나는 짐 봐줄 사람 하나 없는 나홀로 여행객이고 이곳은 동유럽이다 - 있어서 그냥 참고 숙소까지 갔다.

호스텔의 체크인 시간은 오후였기에, 카운터에서는 짐만 맡아두고 이따가 오라고 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제발 화장실만이라도 쓰게 해달라고 말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카운터에선 의외로 순순히 체크인을 해줬다. 나는 이 세상 참 훈훈하다,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등등의 생각을 하며, 객실 옆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살아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3.

내게 아침 일찍 체크인을 해주고 깨끗한 화장실을 내어줬던 "리틀 쿼터 호스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그 호스텔에 관한 평을 남겨놓는다. 은인과도 같이 감사한 호스텔이라 점수가 많이 후하다.




리틀 쿼터 호스텔 (Nerudova 21, 프라하, 110 00, 체코)

부킹닷컴에 후기 올릴 때 썼던 프레이즈 : (동생은 없지만) 내 동생이 배낭여행간다면 추천할 호스텔.

단점 1) 네루도바 거리의 중간에 있다.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는데 그 추운 겨울에도 땀이 삐질삐질 남. 사실 더워서 땀이 난 게 아니고 화장실 가고 싶어서 땀이 난 거긴 하지만. 어쨌든 힘들었다.

단점 2) 숙소 입구를 찾기가 힘들다. 무슨 빨래방(?) 간판이 달려있어서 한참 헤맸다. 두 번이나 그 문 앞을 지나침.

장점 1) 건물 내부가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편안했다. COZY란 단어는 이런 호스텔에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장점 2) 새하얀 화장실!!!!!! 화장실은 무진장 깨끗했고 그 수도 제법 많았다. 화장실 만만세다.

장점 3) 조식은 여태까지 다녔던 많은 '호스텔(호텔 말고 호스텔)' 중 다섯 손가락에 꼽을만큼 많은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고 하나하나의 퀄리티도 괜찮았다.

장점 4) 카드키! 입구부터 각 층의 문, 객실 문까지 카드 하나로 패스했다. 개인 짐 보관라커도 동일한 카드로! 무거운 열쇠꾸러미 따위 이제 안녕! (전에 머물던 호스텔 호머는 열쇠를 한꾸러미 줬었다. 이건 대문, 이건 현관, 이건 객실, 이건 사물함... 어휴)

장점 5) 도미토리룸에는 침대마다 커텐이 있었다. 덕분에 프라이빗하게 지낼 수 있었음.

총평 : 별 다섯개에 별 네 개반! (어디까지나 호스텔 기준)

아마 다음번에 프라하 방문시 또 괜찮은 호텔방이 없거나 하면 이곳에서 생활할 것 같다.





4.

샤워까지 했더니 개운하다. 나는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뻗었다.

핸드폰을 보니 어제 그 베를린남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베를린남 : 뭐 드실래요?

어제 내가 맥주값을 계산했다고 자신이 점심밥을 사겠단 말을 했는데 그걸 지키려는 모양이다. 착한 사람이군. 나는 속이 안좋아서 따뜻한 스프나 쌀국수 같은 걸 먹고 싶다고 했고, 그 사람은 내 경위 - 강매고기 때문에 세균성 장염에 시달려서 화장실에 들락날락 하고 있다 - 를 듣더니 지사제가 있다며 그걸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고마워라. 하지만 난 많은 경험을 통해 지사제가 내 몸에 잘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마음만 받아야지.

우리는 구시가지 근처에 있는 쌀국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저번 꼴레뇨 원정대에서 누군가가 "요새 프라하에 쌀국수가 상륙해서 쌀국수 붐이에요~ 짱맛있음 꼭 드세요~"란 이야기를 해줬었는데. 잘 됐구나 싶어졌다.





5.

베를린남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





약국은 쓸데없이 고풍스럽고 예뻤다.

나는 약사 언니에게 "내 증상에 대해 구글 체코어 번역기로 돌린 캡쳐본"을 보여줬다. 아까 숙소에서 미리 준비해뒀었다.




약사 언니는 내 캡쳐본을 보더니, 알겠다며 약을 처방해줬다.




내 말이 잘 통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요 약을 처방받았다. 어째 가는 나라마다 약국에서 약을 한 번씩은 처방 받는 기분이다. 이 정도면 약을 기념품으로 수집해도 되겠는데?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다가 "그냥 상비약을 제대로 챙겨!"라고 꾸지람을 받았다. 쩝.

다른 얘기지만, 한국에서 장염약을 처방받았을 땐 약을 먹으면 바로 나았더랬다. 근데 이 약은 바로 괜찮아지지는 않았고, 증상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장염약이 센 건가? 아니면 이 약이 유럽인들에게 특화된 약이라 한국인한텐 천천히 듣는 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서서히라도 좋아지니 다행이다. 이제 나는 괜찮을 거다. 맛있는 거 먹어야지.





6.

베를린남과 만나기로 한 음식점은 Zebra라고 하는 쌀국수집이었다.




위치는 내가 전에 머물던 호스텔의 바로 옆이었다. 이사(?)하기 전에 약속을 잡았더라면 편했을텐데.

Zebra의 직원들은 친절했으나 내게 뭔지 모를 장난을 쳤다. 내 서빙을 맡았던 직원은, 내가 처음 가게에 들어섰을 때, 웃으면서 검지 손가락을 들더니 하늘을 찔러댔다. 어... 2층으로 가라는 말인가? 쭉 둘러봤지만 이 음식점엔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없었다. 내가 "여기 2nd Floor 없잖아. 무슨 소리야?"라고 되묻자, 이번엔 그 직원만이 아니라 요리하고 있던 직원들까지 키득거리면서 검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찔러대는 것이었다.

다들 웃고 있는데 나만 웃을 수 없는 상황은 좀 불편하다. 나는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들은 대답해주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웃었다. 슬슬 짜증나는걸. 나는 정색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날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끊어진 건 베를린남이 가게에 들어섰을 때였다. 베를린남이 내 자리 앞에 앉자, 거짓말 같이 그 직원들의 불편한 웃음과 시선이 사라졌다. 어, 이 사람, 의외로 도움이...? 내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 베를린남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고, 이 상황에 대해 나도 제대로 설명하질 못하겠어서 나도 잘 모르겠다고, 음식이나 시키자고 했다.





이곳에서 뭔지 잘 모를 국물과, 덮밥과, 윙을 시켰다. 뭔지 잘 모를 국물은 동남아 특유의 향이 강한 국물이라서 미묘한 맛이었지만, 덮밥과 윙은 환상이었다.

사실 유럽에서 아시아 음식을 먹는 건 그리움과 익숙함 때문에 먹는 거지, 맛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먹는 건 아닌데, 이곳의 덮밥과 윙은 진짜 맛있었다. 그 베를린남도 근래 먹은 것 중 가장 맛있고 제대로 된 식사였다며 행복해했다.





7.

밥을 먹고 나니 슬슬 오후 공연 시간이었다. 사실 이 날 오후엔 스타보브스케 극장에 연극을 잡아놨었다.

나는 포만감에 행복해하며 늑장을 부렸지만, 베를린남은 그러다가 공연에 늦으면 어떡하냐고 자기가 더 발을 동동 굴렀고, 식사 계산을 한 뒤 빨리 극장으로 가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베를린남 : 늦으면 어떡할라고!
나 : 아, 괜찮아요. 5분 전에만 들어가면 되죠.
베를린남 : 그러다가 티켓 날리면 어떡해요!
나 : 음냐. 괜찮아요. 비싼 것도 아니고.


사실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Zebra 음식점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이번에 구한 티켓은 7천원짜리 티켓이다. 꼭 보고 싶었던 공연도 아니고, 단지 스타보브스케 극장을 구경하려고 산 것뿐이다. 나는 손을 까딱까딱하며 천천히 걸었고, 그런 사정을 잘 몰랐던 베를린남은 내 느긋함에 기막혀했다.

나 : 그럼 갈게요. 보조 배터리 이따가 돌려줘요~

저 가엾은 여행자는 배터리 충전기가 맛탱이가 가서 핸드폰 배터리가 10% 남아있었다. 그는 프라하에 대한 아무 사전 정보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의 구글맵이 없으면 관광 자체를 하질 못한다. 그래서 내 보조배터리 - 나는 몽골 이후로 여행 갈 땐 보조배터리를 4개 정도 들고 다닌다 - 를 빌려줬다.

베를린남 : 알았어요. 공연 잘 보고 이따 연락해요!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서 계속!






덧글

  • Tabipero 2018/03/03 22:47 # 답글

    호스텔 위치는 지도만 봐도 언덕배기 냄새가 나는게...그래도 카드키 시스템은 잘 해놨네요. 예전 크로아티아에서 저도 열쇠를 세 개나 받았는데 ㅎㅎ
    프라하 약국은 몇백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이 생겼습니다.
  • enat 2018/03/04 12:52 #

    네에... 네루도바 급경사 거리에 위치한 호스텔이었어요. 오르는데 힘들었습니다..... 여튼 그럼에도 좋은 평을 줄 수밖에 없는 편안한 호스텔이었어요 ㅋㅋㅋ 근방에 늦게까지 여는 맥주집도 있어서 좋았고요!
    약국치곤 올드하고 고풍스럽죠? 아픈 덕분에 약국 구경도 했네요 ㅋㅋㅋ
  • 라비안로즈 2018/03/04 11:58 # 답글

    음.. 두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거... 인종차별적인 장난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분이 저는 많이 나빠서 나갔을듯합니다. 게다가 베를린남...에게도 상황설명하도 음식점을 바꾸었을꺼예요.

    enat님은 둥글둥글하신 성격이신가봐요... 저같음 빼박 클레임걸고 나갈껏 같은 그런....?
  • enat 2018/03/04 12:57 #

    인종차별보다는 여성에게 치는 장난 같았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유색인종이었고 동양인들이 곧잘 방문하는 음식점이라 인종차별이란 생각은 안들었어요... 여튼 그런 장난만 빼면 제대로 서빙을 해줘서 그냥 먹었네요 ㅋㅋ 다행히 음식도 맛있었고요.

    사실 프라하 있을 땐 돈에 장난질만 안치면 오케이였어요. 차별보다도 빌에 장난질치는 애들이 많아서 그걸로 싸우고 다녔네요 ㅠㅋㅋㅋ 그건 나중 포스팅에서...
  • LionHeart 2018/04/18 14:38 # 답글

    프라하 약국 간지 철철 넘쳐나는군요. ;ㅁ;
    더해...화장실 건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
  • enat 2018/04/18 23:26 #

    방문객 여러분들껜 멋진 약국 사진만 보여드리면 되는데
    별로 궁금하지 않으실 화장실 이야기까지 알려드려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