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7 00:20

겨울 유럽여행 (12) 프라하 : 스타보브스케 극장과 그 날 저녁 ├ 겨울 유럽여행 (2018)

1.

스타보브스케 극장.




유럽에서 아름다운 극장을 꼽으라면 못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는 극장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됐고, 덕분에 영화 아마데우스의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 날 오후, 이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서 공연을 예약했던 것은, 단지 "유명하고 아름다운 극장에서 극을 관람하는 행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극이든 상관없었다. 그냥 저 스타보브스케 극장에 입장하여 객석에 앉게만 해줄 공연이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당시는 연말이라 인기있는 공연의 표는 다 팔리고 없었지만, 다행히도 비인기 공연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늦게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체코 국립극장 홈페이지(https://www.narodni-divadlo.cz/en)에서 7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대의 2층 박스석 티켓을 구입했다.




별도의 티켓팅 과정은 없었다. 메일로 온 이티켓 출력물이 티켓 그 자체였다.

극장 입구에서 A4용지에 흑백으로 인쇄한 이티켓을 보여줬더니, 직원이 날 2층으로 안내했다. 2층에는 둥글게 꺾인 복도가 있었고, 번호가 적힌 박스석의 문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내 자리는 10번 방의 뒷자리였다.

나는 힘차게 10번 방의 문을 열어제꼈지만, 그 안에는 나보다 먼저 온 체코인 가족들이 오손도손 앉아있었다. 각 박스에는 4자리의 의자가 있었는데, 앞의 3자리는 그 가족들의 자리였고, 뒤에 남은 1자리가 내 자리였다. 가족들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 날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 가족들의 당황한 표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상상해보시라. 연말에 가족들끼리 기분 좀 낸다고 박스석을 잡아 연극을 보러 왔는데, 어떤 외국인이 꿈뻑거리며 그 박스석에 들어와 뒷자리에 비집고 앉는 모습을 말이다.

문과 벽으로 막힌 그 조그맣고 단란했던 공간은 낯선 이방인의 출현으로 어색해졌고, 나는 정적 속에서 땀을 삐질거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좌석이 내가 돈 주고 예약한 좌석인 걸. 박스석이 이런 개념의 좌석인 줄은 어제 라 트라비아타를 보며 처음 알았단 말이다.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며 뚱한 표정으로 앉았다.




그런데 뒷자리다보니 공연장 전체와 무대가 잘 안보인다. 내가 이 연극을 보러 온 이유는 공연장을 보기 위해서인데, 앞에 세 명이나 앉아있다보니 영 시야가 가려지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공연 내내 그 사람들의 뒷통수만 보겠다.

혹시나 싶어서 핸드폰으로 이번 공연의 좌석을 확인했다. 비인기 연극이라 많은 좌석이 비어있었는데, 특히 10번 방의 옆방인 11번 방이 비어있었다. 하하하. 여기다, 여기! 나는 공연장이 어두워지고, 더 이상 관객들이 입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가 11번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11번 방은 비어있었다. 나는 다른 의자에 짐을 풀고, 옷걸이에 외투를 걸어놓은 뒤, 어깨를 으쓱하며 다리를 뻗고 앞자리에 앉았다. 이건 제법 편하군.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는 공간에서 무대를 관람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짜릿한 일이었다. 이것 봐, 공연 보면서 표정관리 할 일도 없고, 편하게 코를 파면서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하하하하하!





2.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서 본 연극의 제목은 "파랑새"였다. "파랑새"라고 하길래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나오나 싶었는데, 거기서 모티브만 따왔고, 내용은 전혀 다른 현대극이었다.

무대효과는 다양했고, 배우들의 표정도 생동감 넘쳤고, 사람들이 많이 웃기도 하고. 뭐 나름 재밌는 연극이었던 것... 같다. 추정형인 이유는 이 연극이 오직 체코어로 진행됐기 때문에 나는 무슨 소린지 1도 못알아먹었기 때문이다.

고전동화인 파랑새처럼 남매가 주인공이고, 그들이 펼쳐가는 꿈 같은 모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악당으로 나오는 놈들도 있었는데, 악마나 장난끼 많은 요정 같은게 아니라, 뭔가 사이버틱한 은빛 갑옷의 괴물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혼신 어린 억양과 태도, 표정 등을 보며, 저 대사가 과연 무슨 뜻인가를 상상하며 열심히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이 연극은 아침에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는 남매의 모습으로 끝나겠구나' 정도였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당연하게도 무진장 지루했다. 그래서 중간에 나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직 이 스타보브스케 극장의 내부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기에, 인터미션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것 때문에 왔는걸.

나는 재미없는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때처럼 뇌를 겹겹이 무장한 뒤, 딴 생각을 하며 1막이 끝나길 기다렸다.





3.

마침내 1막이 끝났다. 나는 누구보다도 더 크게 환호와 박수를 치며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됐다! 마침내 이 극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어!

많은 이들이 휴식을 위해 밖으로 나갔지만, 나는 내 박스석에 남아 마음껏 사진을 찍어댔다.








이거다, 이거! 난 이 화려한 극장 내부의 모습을 보기 위해 1시간 동안 멍 때린 것이었다!







이건 디카로 찍은 거!





여기는 박스 내부 사진. 좁고 따뜻하다. 코를 파도 아무도 모른다. 넘나 좋은 박스석.




이건 배경 음악과 음향 효과를 담당하던 무대 아래의 연주석.


음, 이 정도면 됐다. 이제 볼 거 다 보고 찍을 거 다 찍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연극을 2막까지 보는 건 넘나 시간 낭비인 것이야. 컨디션도 좋지 않고 말이야. 나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하하. 참 화려하고 예쁘장한 극장이었어.







4.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어제는 맑았는데, 오늘은 또 왜 이런담? 꾸물꾸물한 하늘을 보니 힘이 쫙 빠지는군. 나는 졸린 눈으로 트램을 탔다. 가는 길에 서서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씨도, 컨디션도 별로다. 좀 쉬어야겠군. 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책도 보고, 밀린 웹툰도 보고, 이래저래 꼼지락거리다가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눈이 떠졌다. 몸이 으슬으슬한게 영 이상했다.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부비적거리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베를린남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아무래도 이 카톡 소리에 깬 것 같다.

점심에 내게서 배터리를 빌려갔던 그는, 지금 프라하성이라고 했다. 내가 숙소가 바로 그 근처라고 말하자, 그는 그럼 숙소 근처로 가서 보조배터리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 우산은 있나? 아까 굉장히 가벼운 옷차림이었는데. 비 오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니 알아서 하겠단다. 뭘 알아서 하겠단 거야?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내 몸도 가누기 힘들었기에 일단 약속만 대충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네루도바 거리 아래의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자다 일어났는지라 나갈 준비를 하는 바람에 좀 많이 늦었는데, 그럼에도 내가 먼저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 베를린남이 나타났다.

나 : 아, 여기에...요... 아니!?
베를린남 : 살려주세요... 죽을 거 같아요... 아 진짜 프라하...


베를린남은 '물에 빠진 생쥐'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쫄딱 젖어있었다. 옷을 입고 샤워기 수압을 최대로 해놓은 뒤 한시간 정도 샤워를 하면 저렇게 되겠지 생각했다. 어쩐지 눈도 퀭한 것이 아까 쌀국수집에서 봤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누가 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그는, 일단 기다리라며 라떼를 사들고 왔다. 고맙게도 내 것까지 계산해줬다. 거지 같은 몰골의 여행자에게서 커피를 얻어먹다니... 이거 굉장히 미안한걸...

베를린남은 베를린남대로 엉망이었지만, 뭐 나라고 정상은 아니었다. 장염과 감기 기운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몽롱한 상태였으니. 우리는 잠시 진정의 시간을 갖기로 한 뒤 말없이 따끈따끈한 라떼를 홀짝였다. 반 정도 비우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베를린남 : 아... 카페인... 다시 태어난 느낌이야...
나 : ㅋㅋㅋㅋㅋㅋ 뭔 일이 있었던 거에요?






5.

여기서부터는 베를린남의 이야기.

베를린남은 나와 헤어지고, 구글을 통해 '프라하성'이 프라하의 대표 관광지라는 걸 알게 됐단다. 그래서 프라하성엘 갔다. 그 때만 해도 비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간간히 눈발이 날려서 낭만적이었단다. 마침 노점에서 핫와인을 팔고 있어서 그걸 사먹었는데, 하얀 눈송이와 핫와인의 취기 때문에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기도 하는 등의 감성적인 시간을 보냈단다.

그런데 프라하성을 구경하면서부터 그 눈은 비로 변하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지만 어디에서도 우산을 팔지 않았다. 쩔쩔매면서도 입장료가 아까워서 구석구석 다녔는데, 그러면서 점점 몸은 젖어가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게 되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상황이 찾아왔단다. 그러다가 프라하성 안쪽에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게 됐는데, 거기서 파는 굴뚝빵이 정말 따뜻해보여서 굳이 그걸 먹기 위해 줄을 서느라 또 한참동안 비를 맞았단다. (그러나 굴뚝빵은 내가 전에 썼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임팩트가 있거나 하는 빵이 아닌지라, 그는 실망했을 것이다.)

그 이후, 내가 있는 숙소 근처의 스타벅스로 오기까지, 이번엔 또 길이 복잡해서 뭘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단다. 그럴 수 있다. 프라하성 주변이 워낙 길이 복잡해야 말이다. 설상가상 프라하성 주변은 인터넷과 GPS가 잘 안터진다. 그 말인 즉, 구글맵의 현위치 기능이 엉망이란 소리다. 자주 다녀본 사람이라면 어라 구글맵 GPS 오류났네? 하고 지도만 보고 걸을텐데, 베를린남은 또 그것도 아닌지라 현위치를 잘못 찍는 구글맵에 홀려 여기저기 빙글빙글 돌았단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스타벅스에 도착했고, 마침내 지금에 이른다.

베를린남 : 아 정말... 프라하 진짜 최악이야...
나 : 아니, 비맞은 것 빼고 아까는 분위기 좋았다며요!?
베를린남 : 아냐, 아니에요... 프라하 완전 별로야... 죽을 것 같아... 프라하가 날 싫어해...


프라하를 좋아라 하는 나로썬 안타까웠지만, 그 이상 프라하를 변호하기에 그는 너무나 딱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막 머리라도 감은 듯한 그의 헤어스타일과 푹 꺼진 퀭한 눈, 그리고 그의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그는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웃을 수 있는지에 대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기력이 딸려 그냥 슬픈 눈으로 커피만 홀짝였다.

아, 웃겨. 슬픈데 웃기네. 이런 느낌이구나, 내가 고생한 걸 포스팅 했을 때 읽는 방문자분들의 마음이.





6.

베를린남은 자신이 프라하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 아니 여행 중에 겪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징징거리며 이야기했다. 그 베를린남이 얼마나 징징거렸냐면 내가 일기장에 "베를린남=징징이"라고 짤막하게 메모할 정도였다. 아니 뭐, 사실 이해는 간다. 얼마나 멘붕이겠어. 아무 정보도 없이 유럽에 왔다는데. 그러나 너무 징징거렸다. 징징이가 맞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어가며 경청했고, 그는 앞으로 자신의 일정을 어떡하면 좋냐고 내게 조언을 구했다.

나 : 얘기 들어보니까 베를린에서 제일 좋았다는 것 같은데?
베를린남 : 맞아요! 베를린은 최고였어... 친구들이 있어서요.
나 : 그럼 베를린으로 돌아가요? 지금 너무 힘들잖아요. 좀 쉬다 오지?
베를린남 : 음!?


베를린남의 여행은 몇 달 간의 장기여행이었고, 지금은 초중반부였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그가 굳이 고행을 이어갈 필요는 없을테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의지할 수 있는 친구네 집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프라하에서 베를린까진 4시간 밖에 안 걸린다고?

무엇보다도 계속 베를린 이야기만 하는 걸 보면, 다른 도시에 가서도 베를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제대로 즐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엔 베를린으로 가서 그 추억에 덧붙일 다른 추억을 쌓은 뒤 마음을 가다듬거나, 환상에 좀 금이 가거나, 둘 중 하나라도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내 생각엔 후자가 될 확률이 크지만 말이다.

베를린남 : 그러고보니 나 짐도 너무 많아서... 한국에서 쓸데없이 짐을 너무 많이 가져왔어요. 이거 어디다 버릴 수도 없고. 너무 거추장스러워요. 그냥 버릴까?

진짜 부잣집 도련님인가? 짐이 거추장스럽다고 버린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 : ...그걸 왜 버려요? 한국으로 택배 부치면 되는 걸.
베를린남 : 오! 그 생각은 못했는데!


놀라워하던 그는, 다시 5초만에 근심어린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영어 수준으론 도저히 택배를 부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 : 그러니까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친구네 집에서 좀 쉬고, 짐도 친구 도움 받아서 한국으로 부치고, 그러라고요. 유학생이면 한국까지 가는 항공택배 싼 곳도 알 걸요. 그대는 지금 베를린에 가서 치유 좀 받아야해요. 그리운 약도 좀 하고.

마지막 문장은 농담이다. 어쨌든 가볍게 제안한 내 말을 무겁게 검토하던 그는, 또 질문을 던졌다.

베를린남 : 그럼 베를린에서 어떡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하기에 그는 너무 딱한 몰골이었고,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나 : 음, 동선은 좀 꼬이겠지만, 거기서 쉬다가 독일 남부 거쳐서 스위스로 넘어가요. 아니면 베를린에서 짐 부치면 가벼워질테니까 저가항공 타도 되고. 그 이후엔... 아무리 그래도 이탈리아는 좀 보고, 비행기 타고 스페인 넘어가요. 스페인 아웃이라며요? 그럼 딱이네.
베를린남 : 오오, 오오... 근데 나 오스트리아 가고 싶은데. 빈은 가야하잖아요.
나 : 아, 난 안 가봐서... 그럼 베를린에서 프라하 다시 거쳐서 빈으로 가던가 아님 야간버스 타던가 아님 저가항공 타도 되고요. 지도 보면서 부담없이 동선 잡아봐요. 정답 같은 건 없고 유럽은 생각보다 작다고요?


그는 그게 좋을 것 같다며 그 방향으로 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경우의 수가 워낙 많지만 요 정도로 가이드라인 잡아주면 알아서 경로 짜서 가겠지.

나는 여튼 간에 고생 많았다고,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뜨신 물에 샤워하고 쉬라고 했다. 헤어질 때 커피 얻어먹은 게 고마워서 기간이 만료됐다는 24시간권 교통권을 대신 끊어줬는데, 그걸로 굉장히 미안해하더라. (마치 내가 '이런 거지꼴을 한 여행자에게 커피를 얻어먹어도 될까'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 역시 '이런 병자꼴을 한 여행자에게 교통권을 받아도 될까'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척, 쿨한 척 됐다고 손사래쳤지만, 사실 난 1회권만 끊고 다녀서 24시간짜리 티켓 가격을 잘 몰랐고 사주고 난 후에야 생각보다 비싸다는 걸 알게 되어 남몰래 크허억 했다.





7.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같은 징징이 베를린남을 숙소로 보내고, 오페라를 보러 또 칼린 극장으로 갔다. 몸이 안좋아서 보러가기 진짜 귀찮고 싫었는데 티켓 끊어놓은 게 아까워서 갔다.





전날 저녁에도 왔었던 칼린 극장이지만, 오늘은 1층이다.

티켓값은 6만원 정도였는데, 무대 바로 앞에서 두번째 가운데 자리였다. 이 황금석이 6만원이라니. 확실히 저렴하긴 하다.




아직 사람이 차기 전의 칼린 극장. 나중엔 빈자리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찼다.

오늘의 오페라는 "세비야의 이발사"다. 이번 공연은 희극. 어제의 "라 트라비아타"처럼 무겁고 질척이는 분위기가 아니라 유쾌하고 시원한 분위기라서 관람하는데 마음이 한결 편했다.

사실 "라 트라비아타"는 먼 발치에서 노트에 펜을 굴려가며 감상해서 자세하게 평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세비야의 이발사"는 펜을 굴릴 여유도 없이 그냥 극 속에 그대로 빨려들어갔다가 막이 내려지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왜 사람들이 돈을 들여서 앞자리에 앉는지 이 공연을 통해 알게 됐다. 배우의 표정변화, 미묘한 손짓, 소소한 행동거지, 분명한 숨소리, 객석을 휘어잡는 눈빛연기... 그런 작은 것들이 눈에 다 들어왔다. 인터미션 때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너무 좋아서 울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좋았다. 진짜 너무 좋았다. 피가로의 연기도 좋았고, 조연들의 연기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고, 오케스트라도 좋았고, 오페라 극장도 좋았고, 앞자리인 것도 좋았고, 그냥 다 좋았다. 다 좋았고 재밌었단 단순한 평밖에 남기질 못하겠다.

컨디션이 별로였는데도 굳이 극장까지 찾아와서 보길 잘했다. 아픈 게 싹 날아간 것 같다!




요건 인터미션 때 본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석인데 영상 찍어둔 게 있어서 그냥 올려본다.




어쨌든 차려입진 못했어도 예약해둔 오페라 두 편 다 즐겁게 봤다. 드레스업은 다음 기회에!





8.

오페라가 끝난 뒤, 누군가와 맥주 한 잔을 나누고 싶었는데, 나름 친해졌던 베를린남은 불러내기 미안할 정도로 피곤해보였다. 그래서 유랑으로 동행을 구했는데 감사하게도 또 여러 명의 여행자 분들께서 연락을 주셨다.

4명 정도가 모여서 맥주를 마셨는데, 4명 다 남자였다. 아무래도 밤 늦은 시간에 만나는 거라 여자는 신청하지 않았나보다.

2명은 체코에서 일하고 있다는 아저씨 둘, 1명은 컴공과라는 순진하고 얌전한 남학생, 1명은 외국물을 많이 먹은 듯한 경영학 전공의 남자였다.

전에도 밝혔던 것처럼 나는 남녀 가리지 않고 순진하고 얌전한 학생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 컴공과 남학생과 맥주를 마실 때 굉장히 즐거웠다. 그래서 그 컴공과 남학생의 값까지 내가 치뤘는데, 하도 미안해하길래 나중에 보면 사라고 했더니, 다음날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밥을 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나는 그 날이 프라하 마지막 날이었고, 그는 다른 일정이 있었다) 카톡을 받았다. 아이고, 그걸 또 카톡까지 보내다니. 정말인지 순진하고 얌전한 학생들 너무 좋다. 나는 진짜 괜찮다고, 즐거운 여행 되라고 답했다.

체코에서 근무중인 아저씨 두 분은, "전공이 어떻게~?" / "나이가 어떻게~?" / "학번은 어떻게~?" 등등의 질문을 던져 서열 정리를 하는, 그야말로 아재 그 자체였지만, 그래도 선한 분들이었다. 비록 내 나이를 물은 다음에 생각보다 많다고 놀려댄 분들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분들이었다. 2차 맥주 바에서 모두에게 맥주를 사주셨기 때문에 무진장 감사했다.

외국물을 많이 먹은 듯한 경영학 전공의 남자는 나랑 비슷한 나이대였는데, 뭔가, 뭔가 자의식이 넘치고 있었다. 아마 어학 연수 다녀온지 얼마 안됐거나 워홀 끝난지 얼마 안됐거나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캐나다 워홀 끝났을 당시의 나랑 비슷한 분위기였다. 모임에는 뒤늦게 참여했지만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아재들을 제압(?)하여 판을 장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차로 갔던 레스토랑.

여기서는 컴공과 남학생과 둘이 먹었고, 나중에 다른 분들이 합류했는데, 가게 문을 닫는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2차로 갔던 펍. 현지 느낌 물씬 나서 행복했다. 아재 두 분께서 소개해준 곳임. 역시 현지인은 다르다.





9.

모임을 끝내고, 새벽 1시 정도에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와 그제랑 비슷한 시간에 귀가했군. 장염이 이제 막 나아가는 상태 + 미열이 있는 초기 감기 상태인데 밤마다 자꾸 술이나 마셔대도 괜찮은 걸까. 차라리 사케나 와인이라면 괜찮았을텐데. 맥주는 속을 차게 만드니까 말이다...

그런 것들을 조금 후회하며, 뜨신 물로 샤워를 한 뒤 코 잠들었다. 드디어 내일은 프라하 마지막 날이다.





프라하 마지막 아침에서 계속!







덧글

  • 라비안로즈 2018/03/07 10:19 # 답글

    음.... 으슬으슬 추위가 많이 힘드셨나봐요. 그래도 마지막날이라 다행이었네요. ㅎㅎ
  • enat 2018/03/07 22:01 #

    넴ㅠㅠ 춥고 아프고 속도 엉망이고 열은 나고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런저런 공연들을 무사히 챙겨봤죠 ㅠㅋㅋㅋㅋ
  • 존평씨 2018/03/07 11:21 # 답글

    우리나라에도 저런 극장 하나 정도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클래식 공연 전용극장으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 내한 공연 왔을 때 사용하면 분위기 때문에 더 멋진 공연이 될 것 같아요.
    글을 읽으며 생각한 건데 enat님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시베리아 횡단철도 타거나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스포츠카 타고 횡단, 또는 대형 여객선 타고 인도양 여행할 거 같아요.
    여전히 좋지 않은 장트러블로 이야깃거리를 만들면서. ^^
  • enat 2018/03/07 22:06 #

    완전 동의합니다아아아라고 쓰려고 했는데 그럴 경우 가뜩이나 비싼 가격이 더더더 비싸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치릿하고 스쳐지나가네요. 우리나라 클래식 공연 가격 넘 비싼 것 같아요 ㅠㅠ 지금보다 더 비싸진다면 저는 아마 그런 전용극장이 있어도 안가고 그 돈으로 비싼밥을 쳐묵쳐묵하곘죠...

    감사합니다. 왠지 저도 그럴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아니 그래야겠다!!! 말씀하신 세 개의 여행을 제 생애 안에서 꼭 완수해내도록 할게요 ㅋㅋㅋㅋ
  • 방문객 2018/03/07 23:29 # 삭제 답글

    항상 재밌는 여행기 잘 보고 있어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enat 2018/03/09 16:58 #

    덧글 감사드립니다! 누군가 봐주신다고 하니 부지런히 써야겠군요. 다음 편은 요리조리 주말에 틈내서 써볼게요!
  • LionHeart 2018/04/18 14:48 # 답글

    ' 내가 고생한 걸 포스팅 했을 때 읽는 방문자분들의 마음이.'에서 ... 푸힛했습니다.
    죄송해요, 반은(?) 농담이고, 개인적으로 enat님 여행기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해서 정말 즐겁게 읽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이야기가 담겨있어서요. ^^
    저도 이번에 프랑스 다녀왔고, enat님 글을 본 뒤라 유랑에서 동행을 구할까 싶기도 했지만...실상 프로 혼밥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
  • enat 2018/04/18 23:29 #

    정보를 전달하는 글을 쓰기에 저는 너무 말이 많고 잡담을 많이 합니다 ㅋㅋㅋㅋㅋ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혼밥하실 수 있는 뱃고래가 있으시다면 혼밥이 짱이죠. 굳이 누군가를 만날 필요가 없어요! 저는 위장은 코딱지만한데 식탐은 많아서 누구랑 같이 밥먹지 않으면 배탈납니다 (...) 실제로 이탈리아에선 거의 대부분 혼밥했었는데 그놈의 식탐 때문에 괜히 메뉴 하나 더 시켜서 오버해서 먹는 바람에 소화제를 내내 달고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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