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2 23:02

겨울 유럽여행 (13) 프라하 : 성 미쿨라셰 성당 ├ 겨울 유럽여행

1.

새로 옮긴 리틀 쿼터 호스텔에서의 첫 아침이자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아침, 그리고 2017년의 마지막 날.

숙소는 안락했고 알코올은 적당했기에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비실거렸는데 프라하를 떠날 때가 되자 몸이 좀 나아진 것 같다.

아침으로 뭘 먹을까 하다가 호스텔 조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값은 5유로. 호스텔 조식치곤 비싸지 않나 생각했지만 워낙 평이 좋아서 흔쾌히 조식권을 구입했다. 조식권은 리셉션에서 구할 수 있고, 식당은 지하에 있다.

포스팅을 할 때면 늘 생각한다. 먹기 전에 사진을 찍어뒀다면 참 좋았을텐데, 하고. 그러나 먹기 직전의 나는 사진이고 뭐고 자신의 식욕에 충실하게 움직일 뿐이다. 무슨 말이냐면 찍어둔 사진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치매예방학습이라 생각하고 기억나는대로 써보겠다. 식빵, 모닝빵, 스크램블 에그, 계란 후라이, 소세지, 베이컨, 햄, 시리얼, 우유, 과일쥬스, 요거트, 토마토, 익힌 야채, 샐러드, 치즈, 과일쨈... 이 정도 썼으면 됐겠지? 80살 먹어도 오케이지? 하여간 조식으로 5유로에 상당하는 다양한 먹을거리가 제공됐다. 다양한만큼 맛이 부족할수도 있을텐데, 그렇진 않고 전부 평타 혹은 평타 이상은 쳤다. 신선한 재료를 쓴 것 같군. 이 정도의 퀄리티라면 5유로를 받아도 될 것 같다.




어라? 사진이 있긴 있었네? 정신없이 먹다가 배가 좀 불러올 즈음에 친구에게 보내기 위해 찍은 사진인가보다. 두 접시를 한꺼번에 먹고 있던 과거의 식탐쟁이 나.

음식을 흡입하던 내 옆에는 동양인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한국인처럼 보였다. 나이는 나보다 5살~6살 정도 많으려나. 뭐, 여행왔겠거니 하고 또다시 그릇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여태까지 장염으로 인해 많이 먹지 못한 - 생각해보니 아프긴 아파도 먹을 건 다 먹고 아파서 지금 쓰면서 조금 양심에 찔림 - 한을 이곳에서 풀고 가련다!

먹는 속도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다다랐을때, 많은 여행자들이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룹별로 무리를 지어 테이블을 넓게 차지하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재잘거림과 포토타임으로 가득찬, 기운 넘치고 즐거워보이던 그룹 여행자들...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식당은 여행자들의 웃음과 수다로 인해 활기를 띄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나는 음식들로 행복했던 시간도 잊은 채, 조금 위축되는 기분을 느끼며 포크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나처럼 쭈뼛거리며 밥을 먹던 옆의 남자에게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나 : 여행 오셨나봐요? 쟤들 시끄럽죠?

그 남자분은 당황한 듯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남자 : 네? 아, 예. 여행, 왔어요. 유럽은 처음인데... 어제 막 왔고... 여기 호스텔도 제가 잡은 게 아니고... 여동생이 잡아줬어요. 제가 해외 여행이 처음이라...

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사람! 나는 초심자의 운을 믿기 때문에 자신을 초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에게 잘 대해주면 그들의 운을 나도 받는다. (심지어 나는 가끔씩 운을 위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여행 초보자처럼 굴 때도 있는데, 아무래도 여행의 신은 내 생각보다 똑똑한지 걸러내는 것 같다)

그는 처음에 얼떨떨하게 대답하다가, 내가 계속 호응을 해주자 점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갔다. 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그 활기찬 식당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즐겁게 밥을 먹었다.

그의 여동생은 기자라고 했다. 해외 특파원인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일이 많다고 하더라. 이제 자신은 그 여동생을 만나러 프라하 중앙역까지 가야하는데, 길을 잃지 않고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너무 떨리고 걱정된다고 했다. 꺄아악! 어떡해! 낯설음과 떨림이라니 여행 중에 느낄 수 있는 가장 최상위의 것이잖아! 왠지 그 기분이 전염된 것 같아 괜히 내가 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려야겠지. 나는 구글맵을 켜서 대충 길을 알려주고, 그 밖의 프라하에 관한 팁을 아는대로 이야기해준 뒤, 건투를 빈다며 즐거운 여행 되시라고 했다.





2.

체크아웃을 하고, 호스텔에 짐을 맡긴 뒤 프라하 성쪽으로 설렁설렁 걸어 올라갔다. 아침 산책 코스가 프라하 성 부근의 동네라니 엄청 호화스럽다.

아래로는 사진들.











프라하에서의 일정을 길게 잡아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그런 거 하나 없이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7년 전 처음으로 프라하에 다녀오고나서, 힘이 들 때면 "프라하에 가서 맥주 한 잔만 하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해왔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또 이렇게 프라하에 와서 맥주를 마시며 돌아다녔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바쁘고 아픈 일정 속에 잊었던 그 감사함을 마지막 날에서야 느낀다. 나는 지금 프라하에 있다고.




헤헷.





3.

그 감사함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 신과 만날 수 있는 장소에 가보기로 했다.

프라하성 아래, 네루도바 거리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다보면 거대한 성당 하나가 나온다.




성당의 이름은 성 미쿨라셰 성당. 성 미쿨라셰는 영어로 성 니콜라스인데, 성 니콜라스는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성인이다. 동화나라라는 별명이 붙은 도시에 참으로 어울리는 성인인 것이다. 모시는 성인 때문에 크리스마스 공연이 참 어울리는 성당 같아 한번 정도는 이곳에서 연말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맞질 않아 결국 보지 못했다. 아쉬워라.

참고로 프라하에는 성 미쿨라셰 성당이 두어군데 (이상? 내가 아는 곳은 두군데인데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있다. 한군데는 강 건너 구시가지 광장 귀퉁이에, 다른 한군데는 프라하성 아랫마을, 그러니까 네루도바 거리 아래쪽에 위치한다. 전자보다는 후자의 규모가 훨씬 크다.

이곳의 입장료는 70Kc. 그런데 오로지 현금, 그것도 코룬(Kc, 체코 화폐)만 받는단다. 프라하 막날이라 코룬을 남겨놓지 않은, 카드와 유로 뿐인 나는, 근처 환전소에서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해놨던 유로를 꺼내어 소액 환전했다. 미쿨라셰 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환전소의 환전율은 진짜 나쁘더라. 소액만 환전했는데도 제대로 손해본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다. 입장료를 그만큼 더 낸 셈 쳐야지. 나는 입을 삐죽이며 성 미쿨라셰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나는 감탄하며 고개를 꺾어 천장을 구경했다. 다양한 장식과 조각은 보존이 잘 된 편이었고, 금칠 역시 보존 상태가 좋아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성당의 2층 발코니에도 올라갈 수 있다.

2층 발코니에는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실 그림보다도 천장화를 더 가까이 볼 수 있고 1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다른 여행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그림은 뒷전이고 발코니에 붙어서 열심히 사진만 찍더라.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나름 경건한 마음을 갖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기도 비슷한 걸 했다. 왠지 감이 좋은 것이, 뭔가 신의 응답이나 영감을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응답이 온 건 전혀 다른 곳이었다.

- 카톡!

신의 음성이 들리기도 전에 카톡이 우렁차게 울렸다. 뭐야? 나 원래 진동으로 해놓는데. 아까 수면 무음 바꾼다고 만지작거렸었는데 뭘 잘못 만졌나?

화면을 켜봤다. 베를린남이었다.

베를린남 : 주무시고 계심?
베를린남 : 어디세요?
베를린남 : 저 좀 도와주세요 ㅜㅜ


신과의 대화를 방해한 그는 바로 징징이 베를린남이었다. 이 작자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내게 징징거리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 날은 야간 버스를 타는 날이었고, 나는 야간에 이동하는 무언가를 탈 땐 꾸미질 않는다. 옷도 헐렁헐렁하게 입고, 화장을 하지도 않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다닌다. 야간 버스 타는데 몸이 불편하면 견디질 못하니 아예 아침부터 트레이닝 복을 입는 것이며, 밤중에 꼼꼼하게 씻질 못하니까 아예 화장 자체를 안하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무슨 말이냐면,

결론 → 누군가를 만나기 굉장히 귀찮은 날임!

난 진짜로 이 날 아무도 만나지 않고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정말인지 민낯의 온전한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고! 하지만 어쩌겠나. 하필 또 이런 성스러운 공간에서 선량한 척 착한 척은 다 떨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던 중에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니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냔 말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떤 멍청이가 도움을 청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도 당신의 피조물이잖아요, 이런 젠장 지금 제가 여기서 기도중이 아니었다면... 아닙니다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주십쇼" 운운으로 기도를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이트리스와 쌈박쌈박한 사건으로 계속!





덧글

  • 붕숭아 2018/03/13 00:04 #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낫님 너무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팬이예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다음편 기대하고있어요 벌써!!!
  • enat 2018/03/14 10:18 #

    우잉 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다음편 슉슉 써볼게요! 회사일이 많지 않으면요!
  • 레아 2018/03/13 10:27 # 삭제 답글

    그 분은 무슨 일을 벌이시고 도움요청까지 하시는걸까 ㅋㅋㅋㅋ 궁금해요!! 빨리 다음편 !
  • enat 2018/03/14 15:48 #

    다음편!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올릴게요!!!! ㅋㅋㅋㅋㅋ 사실 별 일 아니었으니 넘 궁금해하시지 마세요!!!
  • PennyLane 2018/03/13 11:04 # 답글

    아오 베를린남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본인에게는 굉장히 중대한 일이었겠지만 객관적으로보면 뭔가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쉽게 해결될 일인데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듯한 그런 느낌적느낌이군요........
  • enat 2018/03/14 15:49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혹시 감이 좋다는 말을 주변에서 잘 들으시는지요...? 정확하십니다 ㅋㅋㅋㅋㅋㅋ
  • 라비안로즈 2018/03/13 12:49 # 답글

    아...아오 민폐인이네요. 베를린남...
    신이 니가 이 녀석좀 처리해줘야겠다... 라고 알려주네요. 이래서 징징이는 받으면 안되는게..
  • enat 2018/03/14 15:52 #

    ㅋㅋㅋㅋㅋ 귀찮았지만 그렇게까지 민폐인은 아니었어요! 음 뭐랄까 약간 불쌍하고 측은한 느낌이 있어서, 어휴 그래 도와줘야지 하고 도와주게 되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다음 포스팅에 느낌적인 느낌을 함 써볼게용 ㅋㅋㅋ
  • 냥이 2018/03/13 18:37 # 답글

    아, 대충 뭔지 알겠습니다. (아마 음식점 영수증 때문인듯...식당에서 알아서 척! 붙혀서...)저는 저 성당 앞을 지나가시만 했지 안은 안 봤는데 저 내부도 멋지게 해놨네요.
  • enat 2018/03/14 15:57 #

    저 사람이 도움을 구한 문제는 다른 쉬운 문제였어요! 그 이후에 음식점 영수증에 관한 일이 진짜로 있긴 했는데 ㅋㅋㅋ 다음 포스팅에서 써보도록 하죠!
  • LionHeart 2018/04/18 14:51 # 답글

    사진을 보니 좋지 않은 환전율을 감수하고서라도 방문할 가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성당이 아니었으면 enat님께서 베를린 남을 구제해주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네요. ㅎㅎ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기대됩니다.
  • enat 2018/04/18 23:32 #

    더 멋지게 찍었으면 좋았을텐데! 사진을 제대로 못남겨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ㅠㅠ 그래도 방문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곳이었어요.
    베를린남을 도와주긴 했지만 그건 간단히 해결됐어요!
    그보다도 같이 밥먹으러 간 곳에서 문제가 생겨버려서 ㅠㅠ 제가 고른 식당이었는데 트러블에 휘말리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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