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8 21:44

겨울 유럽여행 (16) 베네치아 : 아쿠아 알타와 카페 플로리안 ├ 겨울 유럽여행 (2018)

1.

2018년 1월 1일 아침.

야간버스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베네치아 Tronchetto 버스 터미널은 산타루치아 역에서 조금 떨어져있다. 구글링해보니 산타루치아 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 걸어가려고 몇 발자국 떼다가 곧 멈춰섰다. 짐은 무겁고 몸은 피곤하군...




그래서 버스 터미널과 산타루치아 역을 연결해준다는 피플 무버(1.5유로)를 타기로 했다. 딱 두 정거장 가는데 1.5유로라니 조금 아까운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몸이 편해야지.




이건 트레인 내부에 부착되어 있던 첫차/막차 시간.





2.

피플 무버를 타고 산타루치아 역 근방에 도착했다. 돈 냈으니 역까지 데려다주는줄 알았는데 내리고보니 역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계단이 섞인 길을 또 한참 걸어야만 했다. 뭐야, 이 무쓸모 1.5유로짜리 피플무버.

낑낑거리며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었는데도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내가 참 많이 사랑하는 베네치아는, 정말인지 캐리어 끄는 여행자가 여행하기에 넘나 힘겨운 도시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죄 많은 베네치아 같으니라고.

그 따위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역 입구에서 다음날 탈 피렌체행 기차표를 끊었다. 비수기라 그런지 자리는 한참 남아있었다.

다음날 움직일 표도 끊었으니, 이제 숙소로 가볼까. 이번에 예약한 숙소는 여기서 한참 떨어진 산 마르코 광장 근처다. 걸어가기엔 멀고, 역시 바포레또(수상버스)를 타기로 했다.

참고로 바포레또 1회 편도권은 7.5유로. 무지 비싸다. 반면 1일권은 20유로. 하루에 바포레또를 세 번만 타도 이득이다. 일단 상식선에서 그렇기는 한데, 난 아무리봐도 이번에 바포레또를 세 번이나 탈 것 같지 않아서 그냥 편도권을 끊었다. 이번엔 안돌아다닐 생각이니까.

티켓오피스에서 편도권을 사다가, 저번 여행에서 어떤 직원과 싸웠던 일이 떠올랐다. 흥.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군. 이번에도 그렇게 괘씸하게 굴어봐, 더 과하게 화를 내고 깽판을 칠 것이야. 나는 뭔가 심정적으로 무장한 채 티켓오피스 직원들을 대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다 똑같겠지. 동양인이라고, 어린 여자라고 무시하지 말라고. 그리고 난 이제 어리지도 않다고. 난 괜히 흥칫거리며 표를 구입한 뒤 몸을 돌렸다.




어디보자, 어떤 바포레또를 타야하나.

나는 티켓오피스에서 좀 떨어진 적당한 곳에 짐을 내려놓고 노선을 쭉 훑었다. 산 마르코... 광장까지... 음음, 2번 바포레또를 타면 되나...

노선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혼자 고민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 참한 아가씨처럼 "어머나!" 정도의 감탄사였으면 좋았을텐데 걸쭉한 목소리로 "으악 시부럴 뭐야!" 라고 외쳤다 - 그 누군가를 쳐다봤다. 그 누군가는 티켓오피스 직원이었다.

나 : 뭐야, 왜 그래?
티켓오피스 직원 : 이것 봐, 너 티켓오피스에 지갑을 두고 갔잖아!


그러면서 티켓오피스 직원이 내민 것은, 밴쿠버에서 노점 아저씨 꼬셔서 반값에 샀던 싸구려 지갑, 그러니까 내 지갑이었다! 아마도 아까 티켓 결제를 하고 창구 앞에 두고 왔나보다.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원!

지갑을 받아들고 벙쪄있는 내 어깨를, 직원은 팡팡 두드리며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밝은 미소로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말한 뒤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으으, 나는 지난 여행의 일과 아무 상관없는 저 직원에게 쌀쌀맞게 굴었는데, 오히려 저 직원은 지갑을 찾아주고 축복까지 해주는구나아... 정말인지 과거에 얽매여 흥칫거렸던 내가 부끄럽다.

너 이자식 베네치아, 빚(?)은 돌려받은 걸로 하마. 이제 다시는 그 일로 투덜거리지 않을게.





3.

나는 재차 지갑 등의 중요물품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Ferrovia 정거장에 도착한 바포레또를 타고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대운하를 따라가는 2번 바포레또였다.







겨울 바닷바람 때문에 얼굴은 차갑다못해 얼얼했고, 카메라를 든 손은 새빨갛게 시려왔다. 그래도 배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1분 1초라도 더 눈에 담고 싶은, 보잘 것 없는 여행자의 마음이었다. 도대체가 이놈의 베네치아는 7년 전에도, 4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떻게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여전히 아름답냔 말이다.

넌 진짜 변하질 않는구나. 아마 내가 죽고 나서도 이 모습 그대로겠지. 뭔가 치사하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4.

산 마르코 광장 정거장에 내린 나는,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아 숙소까지 이동했다. 이번에 예약한 숙소는 "호텔 피렌체 Hotel Firenze"란 곳이었다. 마치 부산의 "경주 호텔" 같은 느낌이군.

이 베네치아에 위치한 "호텔 피렌체"의 최대 장점은 위치였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딱 한 골목 떨어진 위치! 광장까지 걸어서 농담없이 과장없이 진짜 딱 1분 거리였다.




이번 여행에선 베네치아에 딱 하루 머문다. 그래서 '베네치아에서 딱 하루 머문다면 무엇을 볼까?'에 초점을 맞춰봤다.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역시 내겐 "산 마르코 광장의 야경"이 최고다. 아무래도 베네치아에 그만한 광경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 호텔로 골랐다. 가뜩이나 야간 버스 때문에 피곤할테니, 호텔에서 푹 쉬다가 밤중에 코 앞에 있는 산 마르코 광장이나 보고 와야겠다, 하고. 다른 건 하지 말고, 오로지 그 산 마르코 광장의 야경만 즐기며 쉬는 거다.

...뭐 여행 전 계획이 그랬단 거다. 언제나 그렇듯 계획이란 건 늘 빗나가고, 사람의 습성이란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이다. 베네치아라는 요망한 녀석은, 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내 피곤한 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결국 이 날 저녁, 나는 산 마르코 광장 뿐만이 아니라 베네치아의 온 골목을 홀린 듯 누볐더랬다...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써보겠다.





5.

베네치아 관광 제 1번지 산마르코 광장 근처, 유서 깊고 땅값 비싼 동네에 위치한 호텔답게, 피렌체 호텔은 상당히 좁고 작았다. 각오는 했었지만, 정말 좁고 작았다... 체크인 한 건 나중이었지만, 흐름상 호텔 소개글을 먼저 써본다.



〈firenze hotel〉


- 장점 : 숙소에서 쉬다가 내킬 때 산 마르코 광장에 갈 수 있다는 건 최고의 장점. 위치가 진짜 좋다. 1인실이었는데 그 좁은 곳에도 욕조는 설치되어 있었음. 덕분에 그 동안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유서 깊은 건물, 친절한 직원들, 웰컴드링크, 엘리베이터 등등 다 마음에 들었다. 하나 더. 조식에 나오는 크로와상 샌드위치가 진짜 맛있다.

- 단점 : 좁다.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그 방에서 두평 더 줄이면 됨. 근데 그 좁은 방에 알차게도 이것저것 들어있어서 기특(?)함.





퍽 유서깊어보이는 호텔 전면.




요 좁은 통로로 들어가면 문이 나온다.




낡고 비좁은 복도. 그래도 관리를 잘 하는 건지 깨끗하긴 했다.



그리고 짠! 이게 바로 내가 머물렀던 1인실.




....

........


ㅋㅋㅋㅋㅋ개좁앜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침대랑 가구도 개구렼ㅋㅋㅋㅋㅋㅋ!!!


이 가격에 이 침실 퀄리티는 너무하잖아! 라고 외칠 법한 객실이었다. 아무리 베네치아라고 해도! 그래도! 베네치아면 다냐! 물론 다겠지! 마치 객실이 내게 갑질을 하는 것 같군! 너 따위가 베네치아에서 1인실에 머물겠다니 한참 모자라! 더 수련하고 오도록 해! 따위의 느낌이라고!

하여간 처음에 방 들어갔을 때 횡설수설할 정도로 충격을 받긴 했다. 호텔 리뷰에서 "정말 좁다" 어쩌구를 읽고 왔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호텔의 1인실이 아니라 감옥의 VIP 독방 느낌...




그 와중에 조명이랑 액자는 이쁘닼ㅋㅋㅋㅋㅋ

뭐 대충 이런 퀄리티의 객실이긴 했는데, 그래도 첫인상과 다르게 짐을 풀고 쉬면 쉴수록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 편안한 감각에 일조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무우지 흡족했던 화장실!

침실의 크기를 포기하고 욕조를 두다니! 유럽에서 욕조 있는 숙박시설 은근히 찾기 힘든데! 나 같은 목욕 덕후에게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특히나 오늘처럼 춥고 비오는 겨울날엔 더욱! 야간버스를 타고 와서 근육이 뭉치고 피곤한 내겐 더더욱!

진짜 욕조의 존재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처음에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따위의 목적대상 불분명한 감사를 외쳤던 기억이 난다. 여기 머물면서 몇 번이나 목욕했는지 모른다. 침대 위에 있던 시간보다 욕조에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기도...

하여간 됐어! 이거라면 침실의 허접함도 용서할 수 있다. 이걸로 넌 내게 평점 8점은 먹고 가는 거야!




요건 객실에 있던 핑쿠핑쿠한 어메니티. 나와 정말 잘 어울리는군.




먹으라고 준 거. 초콜릿이랑, 과일이랑, 쥬스 따위들. 목욕하고 나와서 해치웠다.




옛날 디자인의 객실키. 외출할 땐 프론트에 맡기면 된다.




웰컴 드링크. 칵테일이랑 화이트와인 중에 고를 수 있다. 가벼운 안주거리와 함께 나온다.

객실 설명서에는 야외바에 가면 웰컴 드링크를 받을 수 있다고 쓰여있었는데, 이 날은 비가 잔뜩 오고 날씨가 영하권이라 야외바가 열지 않았더랬다. 뭐야아. 나두 웰컴 드링크라는 거 마셔보고 시포오.

데굴데굴 구르다가 프론트에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방으로 가져다주겠단다. 기쁨의 훌라춤을 추면서 5분 정도 기다렸더니 멋지게 차려입은 직원이 칵테일을 배달해줬다. 공짜술 만세!




비좁고 낡은 객실이었지만, 뭐 그건 베네치아 본섬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서비스와 화장실이 다 해먹은 괜찮은 호텔이었다. 다음에 가도 머물 의향이... 의향이... 다른데 더 찾아보고 괜찮은 곳 없으면 ㅋㅋㅋ 다시 머물 의향이 있다.





6.

다시 시간을 돌려서, 호텔 체크인 전으로.

호텔 피렌체의 체크인 시간은 1시였다. 야간 버스를 타고 이른 아침에 도착한 나는 체크인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호텔이 워낙 좁아서 로비 층엔 쉴 만한 소파 같은 것도 없었다. 산책이나 하다 와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부은 눈을 부비적거리는 내게, 프론트 직원이 '준비가 되는 대로 들여보내줄테니 어디서 커피라도 마시고 오라'고 했다. 딱히 불쌍한 척을 한 것도 아닌데, 요래 신경써주면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나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한 뒤 프론트에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슬슬 산책이나 할까 했는데, 몸이 영 피곤하다. 어휴, 뭘 걸어,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일단 허기나 채우고 앉아서 쉬어야겠다. 어딜 가서 쉴까 고민하다가, 산 마르코 광장에 위치한 카페 플로리안에 가보기로 했다.


훗훗훗... 카페 플로리안...


그동안 거렁뱅이 학생이라 가지 못했던 그 유명한 카페 플로리안... 상상 속에서만 가보았던 그 300년 된 카페... 언젠가 카사노바 같은 엄청난 어른이 되어 멋진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 들어가서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리라 다짐했던 그 곳...!

아직 엄청난 어른도 아니고 멋진 스커트에 하이힐은커녕 야간 버스에서 입었던 꾸깃꾸깃한 옷에 운동화지만, 그래도 이곳에 갈 돈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만세고 신성한 노동 만세며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말 만세다. 나는 기쁨의 스텝을 밟아가며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7.

호텔에서 1분 만에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한 나는, 곧 모든 것을 잊고 놀라운 광경에 멈춰섰다.

그건 베네치아에 이상 조위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 겨울에 볼 수 있는 모습이었고, 전세계 사람들이 한번쯤은 이 도시의 이 시즌에 와서 구경하고 싶은 풍경이며, 물의 도시를 더욱 물의 도시처럼 만들어주는 현상이었다. 그건 바로...






아쿠아 알타!!!!

우기 시즌과 만조가 겹쳐 바닷물이 베네치아로 범람하여 들어오는 현상을 아쿠아 알타(Acqua Alta)라고 한다. 현지인들은 당연하고도 귀찮게 받아들이는 겨울철 현상이지만, 관광객들에겐 굉장히 신비로운 광경일 수밖에 없다. 물의 도시가 진짜 물의 도시가 된 거니까. 그래서인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장화를 신고 첨벙첨벙 뛰어다니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광장 한켠의 노점가게에서 장화를 팔고 있었다. 딱 봐도 조잡한 일회용처럼 보이는 그 비닐스러운 장화는, 딱 10유로였다. 만약 그 가게에서 장화만 팔고 있었다면 난 헤벌쭉 입이 벌어져 그 장화를 구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게에서는 예쁜 숄이나 털가디건도 팔고 있었고, 그것들의 가격도 10유로였다. 아, 아니... 저 허접한 장화와 예쁜 숄의 가격이 왜 똑같은거람. 내가 왜 그 돈을 주고 저 조악한 장화를 사야하는 거냐고. 에잇, 정신 차리자, 나 자신!

나는 장화 살 돈을 아껴 나중에 옷이나 사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곤, 턱이 높아 물이 들어오지 않는 곳을 밟고 돌아다녔다. 사실 그건 잘한 선택이었는데, 이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나자 물이 싹 빠져서 더 이상 장화가 필요없게 된 거였다. 이 날 저녁에 그 장화 살 돈으로 마음에 드는 옷들을 사기도 했고... 뭐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다뤄보겠다.

아래는 그 바닷물로 가득찬 산 마르코 광장의 사진들.

유럽에서 제일 가는 응접실에 물이 담긴 모습이다.

















8.

내 컨디션이 영 아니었다보니 조금 돌아다녔는데도 잔뜩 지쳐버렸다. 그제야 카페 플로리안이 생각났다. 아차, 나 카페 가려고 여기 온 거였지.

카페 가는 것도 잊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고 있는 건 산 마르코 광장으로부터 아쿠아 알타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된 탓이다. 불가항력이었다고. 그러고보니 오늘의 베네치아와 나는 합이 좋은 걸? 티켓오피스 직원이 지갑도 찾아주고, 호텔 직원도 친절했고, 아쿠아 알타도 구경하고 말야.

그럼 카페 플로리안으로부터는 뭘 받게 될까? 뭐가 됐든 좋을 거다. 아무리 커피 맛이 이상해도, 아무리 자리값이 비싸도, 난 그냥 그 카페에 앉아있는 경험만으로 행복할 것 같아.

나는 히죽거리면서 광장 한 켠의 카페 플로리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가 그 동안 꿈꿔왔던 카페 플로리안의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을 얻었다.




2018년 1월 1일 아침의 카페 플로리안 (일기장에 쓴 글) :

1) 음악이 없다. 카페 플로리안의 악사들은 어딜 간 거야!? 1월 1일이라고 쉬는 건가? 겨울이라 너무 추워서 야외연주를 안하시나? 음악이 없는 카페 플로리안이라니, 너무해!

2) 사람이 너무 많다. 아침이라 여유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할 정도로 많다. 특히 한국인 단체 손님이... 너무할 정도로 시끄럽게 사진을 찍는다... 너무할 정도로... 내 상상 속 카페 플로리안 돌려내...



아니 그래, 음악이 없는 것까진 이해를 하겠다. 해피 뉴이어고, 이른 아침이고, 추운 겨울이고, 악사들도 쉬어야하지 않겠어.

그런데, 한국인 단체 손님! 그 단체 손님들이 너무한 거다! 어느 쪽이냐면 난 여행 중에 한국인 만나는 걸 좋아하고, 한국인들에게 각자의 여행 이야길 듣는 쪽을 좋아한다. 타지에서 비슷한 생김새에 같은 말 쓰는 사람 만나면 반갑잖아.

근데 그 한국인 단체 손님들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한숨만 나왔다. 그렇게 바쁜 카페에서 아이들에게 포즈를 잡으라 하며 손님과 웨이터들의 동선을 방해하고, 자리에 착석하여 웨이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카운터에 줄서서 소리 질러가며 메뉴를 고르고, 그 카운터 줄 때문에 여유 있어야 할 홀이 어수선하고, 300년 된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이 있을 웨이터들을 무슨 술집 직원 부르듯 손으로 까딱까딱하며 사진 찍어달라고 요청하고...

나는 처음에 카페 플로리안에 입장했을 때, 웨이터가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본체만체해서 이건 또 무슨 인종차별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웨이터는 그럴만 했다. 동양인 단체 손님이 자신을 질리게 만들었으니 나도 얼마나 똑같게 보였겠어!

이건 가이드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 솔직히 단체 가이드를 받는 분들이면 외국 생활에 익숙치 않거나 이쪽 문화를 잘 모르는 분들이 얼마나 많겠어. 그런 분들께 가이드가 이쪽 나라 예절을 미리 알려주고 신신당부를 해줬다면 어땠을까 싶다... 아닌가? 이건 가이드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아니 보통 한국에서도 음식점이나 카페 가서 저렇게 시끄럽게 굴면 폐 끼치는 거 아닌가?

반대로 생각해보라고. 우리나라의 엄청 유명하고 유서깊고 격식있는 문화재급 찻집에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떠들면서 들어와서 존중도 없이 시끄럽게 메뉴 시키면 좋겠냔 말이다. 히잉. 이건 무슨 동네 만남의 장소에 위치한 스타벅스보다 더 정신없고 시끄러우니 원...





9.

나는 웨이터의 안내를 기다렸지만, 한 웨이터가 다가와 그냥 빈자리 아무데나 앉으라고 했다. 그래, 뭐, 누가 안내해 줄 여유도 없겠다. 홀은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나는 그의 말대로 빈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뉴를 받아 쭉 훑어봤다.




가격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렴했다. 나는 카페 플로리안의 메뉴가 막연하게 비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 왜 학생 때 여길 못 왔던 거야? 나 그렇게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냈나? (응)

메뉴 선정이 끝나고, 또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그 바쁘게 움직이던 웨이터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기다림을 보여준 나를 드디어 자기가 접대해야 할 손님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나는 참치 샌드위치와 민트 초콜릿을 시켰다. 그가 내 주문을 받는 동안에도, 홀은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의 소란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그쪽에서 시선을 멀리하며, 드디어 찾게 된 이 카페 플로리안의 우아한 내부와 장식 따위를 바라봤다.




제법 시간이 걸려, 주문한 참치 샌드위치와 민트 초콜릿이 나왔다.

이런데서 파는 거니까 자리값이겠거니 하고 맛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또 의외로 맛있었다. 흐응, 제법이군.





내 앞에는 할머니 두 분께서 앉아계셨다.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니, 그 분들은 미소를 지으시며 화답하셨고, 자연스레 대화의 장이 펼쳐졌다. 그 할머니들은 파리에서 오신 분들로, 두 분은 절친이라고 했다. 파리지앵이라 그런가 두 분 다 패션 센스가 좋으시군. 특히 검은 옷 할머니의 귀걸이가 넘나 예뻐서 귀걸이 칭찬을 했더니 으쓱하며 좋아하셨다.

할머니 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단체 관광객 손님이 사진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바쁘게 움직이던 웨이터와 부딪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 한 분께서,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파리지앵 할머니1 : 어휴, 난 베네치아가 이번이 7번째인데, 오늘의 카페 플로리안이 제일 바쁜 것 같아.
나 : 나는 베네치아가 3번째지만, 카페 플로리안은 오늘이 처음이야.
파리지앵 할머니2 : 호호호, 한가할 때 왔으면 좋았을텐데. 첫 경험이 너무 시끄럽구나.


...그러게요.




그 파리지앵 할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하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각자의 패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저 할머니들에 비해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저 나랑톨 시장에서 샀던 몽골 모자 덕분에 간신히 꺼낼 말은 있었다. 하하하.

그나저나 서양은 이게 좋다. 세대가 다르고 나이차가 어마어마하게 나더라도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나이에 따라 위계질서가 잡힌 우리 나라에선 힘든 일이지.




할머니들은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는 작별인사를 한 뒤, 마저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아까보다 한결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이었다. 처음에 카페 들어왔을 땐 음악없음&소란스러움 공격에 뭔가 울컥울컥 했었는데, 할머니들이랑 대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풀리는군.

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아까 어떤 관광객이 사진 찍어달라고 손가락으로 까딱까딱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그 웨이터가 내 계산서를 가져다줬다. 내가 미안할 건 없지만 그래도 왠지 미안한 마음에, 웨이터에게 따로 팁을 쥐어주고 나왔다. 수고한다, 고생한다, 뭐 그런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사실 팁은 마음이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관광객들을 상대했던 그 웨이터는 그제야 슬쩍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고, 내가 카페를 나갈 때까지 나와 아이컨택을 하며 미소지었다. 다행이다. 하하.

아무쪼록 다음번 방문 땐 소란피우는 사람이 없고, 대신 음악이 있길 바라며, 카페 플로리안을 뒤로 했다.




겨울의 베네치아 풍경으로 계속!







덧글

  • 라비안로즈 2018/04/09 00:28 # 답글

    프라하에서 이탈리아로 훌쩍 가셨군요. 단체... 단체(...) 가이드의 설명의 부재가 참 그르네요.
  • enat 2018/04/12 14:54 #

    원래 이탈리아만 쭉 돌려고 했었는데 '연말의 프라하'에 환상이 있었는지라 프라하를 빼먹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ㅋㅋㅋ 그래서 야간버스를 감수하고 프라하-이탈리아 일정으로 만들었었어요 ㅋㅋㅋ
    이탈리아 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이었는데 ㅠ 단체 손님들의 예절이 아쉬운 아침이었어요 ㅠ
  • 존평씨 2018/04/09 12:49 # 답글

    언제나 부끄러움은 그걸 아는 사람의 몫이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관광이란 enat님처럼 삶을 즐기고 정신적 풍요를 느끼기 위한 게 아니라 낸만큼 본전을 뽑으러 가는 거니까요.
    남는 건 사진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여행갔다 오신 분들 캐리어엔 호텔의 잡다한 물품과 여객기 안 담요가 나오는 게 비일비재하지 않나요.
    여행문화의 성숙이 문제라기보단 경제적인 게 모든 기준의 최우선이란 게 문제인 거 같아요.
    마음의 여유란 게 너무 없죠. 우리 사회는.
  • enat 2018/04/12 14:59 #

    덧글을 쭉 읽으면서 음음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마음의 여유란 게 너무 없죠 우리 사회는' 을 혼자 따라읽었더니 옆자리 직원이 뭔 일이냐고 묻네요 ㅋㅋㅋ 여튼 납득이 가는 설명이라서 뭔가 더 씁쓸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요. 사실 제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을 상상해봐도 해외에 나가서 그러지 않을거라는 믿음도 없고요.
  • Tabipero 2018/04/09 20:38 # 답글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들 보면 우리가 중국 관광객 욕할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지가 한 세대가 안 되었으니 여행문화 성숙이고 뭐고 말하기도 좀 이른 것 같고, 매너 등이 체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에 나왔다는 해방감으로 그리 행동하는 게 이해가 안 갈 건 아닙니다만...그런 사람들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다면 싫긴 하겠네요.

    플로렌스 호텔을 보니 예전에 오카야마에서 묵었던 호텔이 생각나네요. 3천엔에 아침 저녁까지 다 줘서 뭐 이런 혜자스런 호텔이 다 있나 했더니 방이 정말 좁았더랬지요...저는 가이드북에서 베네치아 섬은 너무 비싸다고 해서 그쪽은 알아볼 엄두도 안 내고 메스트레에 호텔을 잡았는데 역시나 섬이 가성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그런지 웰컴드링크 등으로 그걸 좀 만회해 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ㅎㅎ
  • enat 2018/04/12 15:10 #

    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보다 긍정적이며 애잔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네요. 잘 못오는 해외 나와서 신기하고 신나고 즐겁고 그래서 방방 뛰면서 사진 찍으러 다니고... 뭐 그런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역시 같은 공간에 한번 더 같이 있으라면 그 때도 똑같이 질색할 것 같습니다 ㅋㅋㅋ

    3천엔에 아침 저녁까지 챙겨주면 진짜 땡큐한데요!? 관광할 곳이 많거나 늦은 체크인을 해서 방에서 잠만 잘 거라면 저는 오카야마 갈 때 거길 묵겠습니다 ㅋㅋㅋ

    저번에도 본섬에서 야전침대같은 도미토리에 당해놓고 ㅠㅠ 여전히 베네치아 본섬에서의 숙박을 포기하질 못하겠더라고요. 다음번에 가게 되면 본섬 말고 리도나 무라노 섬 등지에서 묵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서도 본섬 같은 퀄리티의 호텔을 만나게 된다면... 그냥 그 다음부턴 메스트레에...
  • LionHeart 2018/04/18 15:12 # 답글

    아아...제가 가고 싶었던 이탈리아 ... 베네치아... 너무 부럽습니다아...
    enat님 여행기로 대리만족이라도 느껴야겠어요. ;ㅁ;
  • enat 2018/04/18 23:39 #

    베네치아는 정말 아름답죠! 몇 번이고 찾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에요... 또 가고 싶네요... ㅠㅠ
  • kanei 2018/05/25 21:22 # 답글

    어머나... 예전에 후쿠오카에서 단체 한국인 관광객들 (대부분 아줌마 아저씨들) 보고 엄청 경악했던 적이 있는데 유럽에서도 그러고 있군요 ...... 매너는 물에다 말아드셨나..... 아무도 한소리 안했다는게 신기하네요. 제지줄 법도 한데 말이죠
  • enat 2018/05/28 22:37 #

    단체 코스로 오는게 정해져 있으니까 수입 때문에 그러는 건지... 그런 수입 신경 안쓸 정도의 카페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제지 없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웨이터가 상대를 잘 안하고 무시하기는 했어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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