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7 00:11

하노이 주말여행 (7) 여행 끝 ├ 하노이 주말여행 (2018)

1.

발마사지가 끝나고, 호안끼엠 호수 북쪽의 넓은 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이라고 해야할지... 회전 교차로를 포함한 거리 일대를 차가 못다니게 막아놓고, 광장처럼 쓰고 있었다. 주말에만 나타나는 이 일시적인 공간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편의상 이 포스팅에선 계속 '광장'이라고 하겠다.





광장은 차가 들어올 수 없게 막아놔서 걸어다니기 편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참 힘들었다. 특히 광장 바로 앞 차도는 혼잡 그 자체였다. 자동차, 오토바이, 사람, 인력거, 자전거 등등이 뒤섞여 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양보와 질서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욕심이었다. 차선이나 신호랄 것도 없는 혼돈의 도로에서, 운전자들은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그 광경에 혼이 빠져 길도 건너지 못하고 멈칫멈칫 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접촉사고를 일으켰다.




그래, 이 도로에서 사고가 안 날 수가 없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고를 어떻게 처리하나 구경했다.

그런데 자동차 운전자, 이런 일이 굉장히 익숙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창을 열고, 오토바이 운전자를 한 번 픽 보더니, 부딪친 상태의 오토바이를 손으로 슬쩍 들어 바로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다시 차창을 닫고, 마저 제 갈 길을 갔다. 오토바이 운전자도 대수롭지 않게 그 자리를 떠났다.

......

아, 하노이에서 저 정도의 접촉사고는 사고 축에도 못 끼는구나.

나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다시 길을 건너기 위해 도로의 흐름을 살폈다.





2.

쭈뼛 멈칫 움찔 등의 의태어를 몸 이곳저곳에 달고, 간신히 길 건너서 광장 쪽으로 넘어왔다.

하노이의 도로 상황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방금 전 도로는 유난히 정신이 없었다.




화려한 상가 건물 속 익숙한 다국적 프랜차이저들이 보인다. 특히 파파이스 반가움. 얼마만이야.




광장(?)은 대충 요런 모습이다. 가운데 분수가 있고, 그 주변을 상가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삼거리인데, 그 중 호수와 가까운 두 개의 거리의 차량을 통제하여 걸어다닐 수 있게 했다.





광장 분수대 옆쪽엔 젊은 베트남의 청소년, 청년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구경꾼들은 원을 그리고 서있었는데, 그 층이 생각보다 두터워서 안쪽의 일들이 보이질 않았다. 무슨 공연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있나 궁금해서 까치발을 들고 구경했다.

가운데에선 젊은애들 몇 명이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었다. 제법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길래 좀 지루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오며 그들의 칼군무가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안무를 맞추고 있는 음악은 K-POP이었다.

구경꾼들 : 꺄아아아악! 싸랑해요! 싸랑해요!

구경꾼들은 전주를 듣자마자 서툰 한국말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박자에 맞춰 무언가를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이돌 멤버 이름을 쭉 읊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돌을 잘 몰라서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경꾼들 : 꺄아! 나 이거 알아! 같이 춰!

심지어는 사진 찍던 구경꾼들이 흥을 못참고 뛰쳐나와 함께 안무를 맞추고 있었다. 처음엔 플래시몹처럼 짜온 후 뛰쳐나오는 건가 했지만, 계속 구경하다보니 그들은 그냥 그 가수를 너무 좋아해서 안무를 다 외우고 있을 뿐인, 공연을 구경하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플래시몹보다 그 쪽이 더 대단하군...







이 공연들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다. 내가 거의 두어시간 넘는 시간을 이 주변에서 보냈는데, 그동안 저 춤판의 써클은 계속 유지됐다. 워어, 케이팝 진짜 대단하네.





3.

한편, 이 광장의 한쪽 끝에선 홀로 케이팝과 사투를 벌이는 베트남 전통 악기 연주가가 있었다.





연주가는 케이팝에는 전혀 미동도 없이, 어딘가 구슬프고 느릿한 선율을 끊임없이 연주했다.

눈을 감고 전통 음악을 즐기는 그를 보라! 구경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계속해서 연주를 하고 있는 저 당당함! 케이팝에 지지 않고 베트남 전통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저 우직함! 더워 죽겠는 온도인데 두터운 베트남 전통복과 운동화를 신고 있는 저 패션까지! 증말 멋진 아저씨 연주가다!

나는 아저씨의 연주를 몇 곡 들어준 뒤, 열렬한 박수와 함께 팁을 주고 자리를 떴다. 열정! 근성! 노력! 넘나 좋은 것.





4.

목이 마르다. 카페에 가서 땀 좀 식히기로 했다. 요 광장 안쪽엔 전날 내가 비를 맞다가 안식을 취했던 '더 노트 카페'가 있었다. 악몽 같았던 어젯밤을 위로해줬던 '더 노트 카페'... 고마우니까 매상을 올려주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가자 직원들이 날 바라보곤 아는 척을 했다. 나는 사실 사람 얼굴을 잘 못 외워서 이 직원들이 어젯밤의 그 직원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뭐, 날 알아보니 맞겠지. 그 직원들은 오늘은 비가 안와서 다행이야~ 멀쩡한 얼굴을 보니 좋네~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덕분에 감사했다~ 너희 보고 싶어서 또 왔어~ 어쩌구 하는 이야기로 화답했다.

주문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갔는데, 2층은 자리가 꽉 차있었다. 에잉, 어제는 사람 없었는데, 역시 인기 많은 카페였군.




그래서 1.5층으로 내려왔다.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다락방? 같은 느낌이었는데, 2층의 공간배치와 뷰가 훨씬 좋아서 손님들은 전부 2층으로 가는 것 같았다. 호호호, 나는 사람 없는 1.5층에서 좀 쉬다가겠어.




주문한 오렌지 쥬스와 레드 벨벳이 나왔다. 오렌지 쥬스는 45,000동, 레드 벨벳은 40,000동. 총 85,000동 (한화 4250원 정도). 베트남 물가에 비해선 조금 가격이 있는 편이지만 한국 물가에 비하면 무진장 저렴한 수준이군. 맛도 괜찮았다.

벽에 적혀있는 쪽지를 하나씩 읽어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직원 중에 한 명이 슬그머니 올라와 내 옆자리에 앉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갑자기 다가와서 뭔가 하고 궁금했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녀는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으음, 이런 건 귀찮은데. 나는 적당히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빨리 사진에 '찍혀줬다'. 사진에 찍혀줘야 날 내버려둘 것 같아서. 과연 그녀는 예상대로 나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건지곤, "그럼 즐거운 여행!" 어쩌구 이야기를 하며 물러났다.

아마 내 사진은 그녀의 SNS 어딘가에 '오늘 만난 한국인 친구!' 어쩌구 하는 글과 함께 올라가겠지. 성가시긴 해도, 이건 그녀가 이 카페에서 일하며 건진 소소한 재미니까, 그냥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사진을 대가로 조용함을 얻은 나는, 이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오늘도 카페의 벽에 쪽지를 남겨놓고 오기로 했다. 쪽지에 뭘 쓸까 한참을 고민했다. 딱히 생각나는 문구가 없었다. 음... 음...

그래서 여행 당시 제법 자주 들었던 김연자 선생님의 '아모르 파티'를 적어놓고 나왔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크으, 이 노래는 진짜야.





5.

카페에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예쁘게 길어지는 날씨 좋은 날이었다.

저녁은 참 좋다. 왜 저녁은 짧을까. 난 저녁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 아쉽단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진찍는 내 앞을, 어떤 아저씨가 달려나갔다. 핸드폰 액정 화면에 잡힌 그 아저씨는 정말 멋있어서, 환청이라도 들린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친구! 저녁은 짧지 않아! 네가 달리면 돼! 자, 달리자구!" 어쩌구 하는 듯한 느낌의... 청춘드라마의 대사 같은...

...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곤 몸을 돌렸다.





6.

저녁밥을 먹으러 왔다.




저녁식사는 Mỳ Gà Tần(49 Hàng Bồ, Hàng Gai, Hoàn Kiếm, Hàng Gai Hoàn Kiếm Hà Nội)라고 하는 곳에서 먹었다. 이곳은 제대로 건물이 갖춰져있는 식당이 아니라, '거리의 음식점'이다.

거리의 음식점은 위생 때문에 계속 피해왔는데, 사람이 계속 땀에 찌들다보니 (아침에 호텔 체크아웃을 해놓은 상태라 내겐 샤워할 공간도 휴식을 취할 공간도 없었고, 그래서 난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에 찌든 상태였다... 앞으로 밤 비행기 탈 땐 밤을 보내지 않더라도 1박을 더 잡아서 중간중간이라도 편히 쉬어야겠다고 생각함) 위생이고 뭐고 별로 중요치 않게 됐다. 내가 더 더러운데, 뭘. 그래서 그냥 별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인도에 큰 의자와 작은 의자가 쭉 놓여있다. 이게 이 식당의 홀이다. 큰 의자는 식탁 역할이고, 작은 의자는 제 역할을 한다.

음, 그러니까 거리에 쭈그려 앉아서 먹는 거임.




셔터가 닫혀진 문 앞에 젓가락과 라임, 휴지 등이 놓여있으니 셀프로 이용하시면 되겠다.


이곳의 메뉴는 단 한 가지, "닭고기 라면". 영수증을 안받아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대충 4만동(한화 2천원)으로 기억한다.

한 가지 웃겼던 거. 나는 레모네이드를 시키지 않았는데 그걸 가져다놓고 나중에 레모네이드+닭고기 라면을 합쳐서 돈을 받더라. 대충 5만동 정도였나? 나는 내가 만만해보여서 나한테만 그런가 싶었는데 다른 손님들한테도 그러더라. 허허, 것 참.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어쨌든 레모네이드는 맛있었다.

하여간! 나는 닭고기 라면을 시켰고, 직원(주인의 가족 같은 느낌이었음)이 어디론가(아마 다른 건물에 있는 주방이겠지)로 달려가 그릇에 닭고기 라면을 담아왔다.




이게 바로 그 닭고기 라면 되시겠다!

...

......

처음에 음식 받고 좀 멘붕이었다. 뭐 이딴 비쥬얼의 음식을 먹으라는 건지, 이딴 음식을 돈 받고 팔고 있는 건지 싶었다. 나는 맹한 눈으로 젓가락을 휘저었다. 안쪽엔 닭다리 등 뼈가 붙어있는 닭고기 조각들이 들어있었다. 고기는 제법 크군. 고기는 합격이야. 닭고기는 늘 옳지.

그보다도 이 시커먼 국물... 일찍이 나는 이것보다 더 새카만 암흑물질을 내 뱃속에 넣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먹어도 되는 것인가.

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한 입 마셨다.

...

......

어? 오!

뭐지? 이번엔 면과 함께!

...

......

오! 오오오옷!

생긴 건 무슨 석유 찌꺼기에 생라면 올려놓은 주제에, 엄청 건강한 맛이었다! 한방 느낌 나고, 쑥 냄새 나고, 면도 적당히 잘 익어서 맛있었다. 이거 완전 내 취향이구만! 국물 좋아하는 내 입맛 취향 저격! 나는 닭고기 라면 국물을 렛츠 드링킹 꿀꺽꿀꺽했다. 그 더운 하노이에서 뜨거운 국물을 입 안에 쏟아부으니, 가뜩이나 땀범벅이던 몸은 더더욱 땀투성이가 됐다. 그래도 괜찮아! 이 국물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국물이야!

훗... 과연, 구글 평점 4.0 이상의 가게... 제법이군.

나는 닭고기 라면을 남김없이 싹싹 비워냈다. 진짜 내 취향 그대로를 담아낸 라면이었다. 이곳에 들리지 않고 하노이를 떠났더라면 정말 아쉬울 뻔 했군... 후후...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이다. 애들 입맛이거나 한방 느낌 별로 안좋아하는 분이라면 입에 안맞을 수도 있음! 하여간 나는 진짜 맛있게 먹었다.





7.

닭고기 라면 집에서 한두블럭만 걸어가면 하노이 야시장이다.

후후... 하노이 야시장...

전날 폭우 때문에 가지 못했던 하노이 야시장! 오늘은 꼭 정복해주겠어! 내가 잔뜩 소비해주겠다고!





...

이제 문 여네...

넘나 빨리 온 것 같다... 이 때 시간이 기억으론 저녁 7시 쯤...

나는 이제 막 열기 시작한 야시장을 구경하며 슬슬 걸었다. 만약 처음부터 활기차게 활짝 열려있는 야시장을 봤더라면, 환한 조명 아래에서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물품들을 봤더라면, 나는 아마도 지갑을 열고 칠렐레 팔렐레거리며 쓰잘데기 없는 기념품을 이것저것 잔뜩 골라 샀을 것이다.

하지만 봉투를 뜯고, 판매 물품을 어지럽게 쏟아내고, 하나씩 정리해가는 준비과정을 보고 있었더니, 구매욕이 급 사그라들었다. 재고 박스를 보면서 내가 저걸 왜 돈 주고 사나 싶고... 조명이 없으니 예쁘게 보일 물품들도 안예뻐보이고...

...내가 그동안 해온 소비생활은 디스플레이에 좌지우지 됐었던가? 야시장을 둘러보며 자신의 소비 생활을 돌아보게 됐다...




몇 십분 후, 야시장이 활짝 열렸으나, 나는 이미 흥이 깨질대로 깨져버린 상태였다. 별로 뭐 사고 싶지 않고, 상품 좋은 거 모르겠고, 규모는 또 왜 그리 큰 건지 걸어다녔더니 다리 아프고, 에잉, 몰라.

나는 툴툴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혹시라도 야시장 가시는 분들은 일찍 가지 마세요. 저처럼 됩니당.





8.

숙소로 돌아왔더니, 첫째날 밤부터 나를 반겨주던 잘생긴 직원이 날 맞이해줬다. 나는 그에게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잘생긴 직원은 길이 밀려서 30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나는 꽤나 상쾌한 얼굴로 다리를 쭉 뻗고 소파에서 쉬었다.

그러고보니 하노이 여행 첫번째 포스팅에서 이런 글을 썼었다.


- 나중에 (호텔) 체크아웃을 할 때, 설문조사를 해달라고 하더라. 설문지에 불편했던 점에 대해 적는 게 있어서 벌레 나왔다, 청결에 신경 써라, 메일 안읽더라, 메일 좀 읽어라, 어쩌구 저쩌구를 쭉 써줬다. 그걸 본 직원들은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냐, 너무 미안해서 어떡하냐고 하길래 괜찮다고, 별로 신경 안쓴다고 답해줬더니 더더욱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아니, 나 진짜 괜찮은데. 저렴한 가격(1박에 2만 5천원 꼴)으로 좋은 방 받아서 편하게 잘 쉬다 가는데. 쩝.

- 공항으로 가기 전, 어떤 잘생긴 직원이 미안하다고 다시 한 번 사과하며 기념품을 주더라. 베트남 여자가 그려진 초록색 쟁반이었는데, 이걸 원래 주는 건지, 진짜 미안해서 사과하는 의미로 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잘생긴 직원이 진심을 다해 사과하며 주는 선물이니 감사하며 받기로 했다.



그 초록색 쟁반을 이 때 받았다.




쨘. 호텔에서 기념으로 주는 것치곤 예쁘다.

잘생긴 직원은 내 기뻐하는 모습을 보더니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하하, 공짜로 주는 기념품인데 좋지 않을리 없지! 오늘 발 마사지 샵에서 커피 핀도 받고, 호텔에선 쟁반도 받았네. 하노이 사람들은 미안함을 선물로 푸는가 보다.

그나저나 내가 계속 잘생긴 직원이라고 써서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잘생김을 계속 강조하나 싶으시겠으나, 강조가 아니라 그냥 내 안에서 그의 별명이 '잘생긴 직원'이었다. 조각 미남이라기보단 그냥 동글동글한 강아지 상+훈훈한 동네 오빠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잘생긴 직원 : 너는 한국에서 뭐해? 공부해? 일해?
나 : 나 일해. 너는? 아, 괜한 걸 물어봤다. 일하고 있지.
잘생긴 직원 : 하하! 사실 나 학생이야. 이건 짬이 날 때 하는 거고.


학비를 벌기 위해 공부와 알바를 병행하는 건가! 어쩜, 참으로 기특하다.

나 : 학생이었구나! 무슨 공부하고 있어?
잘생긴 직원 : 공학 공부하고 있어. 전자 공학.


게다가 공돌이었다! 어쩜, 네가 바로 베트남의 미래로구나.

그 직원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30분은 후딱 지나가버렸다. 택시가 왔고, 잘생긴 직원은 내 짐을 들고 앞장섰다. 어쩜, 배려심까지 갖췄다니.

나는 어깨에 매고 있던 보조가방에서 지폐를 꺼내어 그에게 찔러줬다. 짐 들어줬으니 가벼운 팁이라고 준 건데, 그에겐 그 금액이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잘생긴 직원 : 진짜? 나 주는 거야? 이걸?

그러더니 이런 건 예상 못했단 극적인 표정을 하곤 고맙다며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어맛, 이런 느닷없는 포옹, 어쩜 박력까지 갖췄어!

그러나 그는 내 베트남 모자에 부딪혀 튕겨져 나갔다. 아? 나 지금 모자 쓴 상태였어? 그는 잠시 머쓱해하다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 눈치 없는 베트남 모자가! 미니미니의 저주인가?

잘생긴 직원 : 그럼 잘가! 베트남에 또 놀러와!
나 : 그래그래, 안녕! 좋은 일들만 있기를!






9.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 되는가 싶었으나, 공항까지 가는 동안 훈훈함이고 뭐고 다 날려버렸다.

호텔에서 불러준 택시는, 그래, 그건 그야말로 지옥에서 달려온 죽음의 택시였다.

나는 택시에서 극한의 공포를 맛봤다. 끊임없는 추월, 줄지 않는 속도, 울려퍼지는 경적, 버스한테도 길을 내주지 않는 뚝심, 오히려 버스의 진로를 방해하며 앞서는 패기... 심지어 차선은 두 갠데 차와 차 사이로 들어가 차선 두 개에 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리는 기현상을 목격했다. 택시가 가운데로 들어가 경적 울리니까 양 옆의 두 대가 어후 미친놈, 하는 느낌으로 공간을 내주더라.

나는 시간 많다고, 그러니까 천천히 가달라고 슬쩍 이야기했으나, 영어를 전혀 못하는 분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슬로우를 모를까? 혹시 말이 통하지 않은 척을 하셨던 건 아닐까? 모르겠다. 하여간 택시는 무지막지하게 달렸고, 나는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덜덜덜 떨며 공항이 어서 나오길 간절히 바랬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살아서 공항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나는 살아있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기 직전,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나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그는 내가 직원에게 팁을 건네는 모습을 봤고, 그래서 팁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당신처럼 운전하는 사람에게 팁을 줄 순 없어. 난 진짜 무서웠단 말야. 나는 고맙다고 인사만 한 뒤 공항으로 들어갔다.





10.

공항은 쾌적했고, 시원했고, 깨끗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이 날 만큼 공항이 좋았던 적이 있나 싶다. 꾀죄죄한 호안끼엠 근처 구시가지에서 지내다가, 이런 현대적이고 기술집약적이며 인류의 과학이 살아 숨쉬는 건물을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여행은 언제나 돌아가기 위해 하는 법이지. 얼렁 돌아가자, 한국으로!

비행기는 비엣젯, 3*3 좌석이었고, 내 자리는 창가쪽 자리였다. 내 옆좌석에는 외국인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았다.

밤비행기에 창가 자리였지만, 하노이에 올 때 탔던 제주 항공과는 다르게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유난히 흐렸거나, 비엣젯 실내가 밝았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겠지. 나는 아쉬워하다가, 곧 몇 시간 뒤에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자두기로 했다. 그래서 베트남 모자를 얼굴에 쓰고 잠을 청했다.

나는 편해서 그리 했지만, 옆에서 보기엔 웃긴 모습이었을 것이다. 뾰쪽하게 튀어나온 모자를 얼굴에 걸치고 잠든 소녀(나)의 모습이라니. 내 옆에 앉은 외국인 연인 둘이 날 보고 키득거리는 게 들렸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꾸도 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다. 에잇, 몰라. 많이 웃으세요. 난 그냥 잘 거야.

근데 그 외국인 연인 중 남자 목소리가 넘나 큰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에 움찔움찔 깨다가, 혼잣말로 "아, 시끄러워..."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오자마자 둘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응? 내 말을 알아들었나? 한국말을 아는 사람들인가? 요새 베트남에 한류가 유행한다더니... 괜히 미안하게... 어쨌든 조용해졌군... 쿨쿨.

나중에 알고보니, 그 외국인 연인 중 여자 분은 한국인이었다. 자국민과 외국인의 얼굴도 분간 못하는 나란 인간...

그 여자 분 왈, 지금은 독일에서 일하는 중이고, 그래서 한국에 오랜만에 가게 됐고, 독일에서 베트남 잠깐 들러서 친구 만났다가 귀국길에 오른 참이라 했다. 글로벌하게 사시는 분이구나.

아까 시끄럽다고 중얼거린 게 괜히 미안해서, 남은 베트남 동을 탈탈 털어 물을 사서 나눠드렸다. 비엣젯은 물도 주지 않는 항공기였고, 그래서 구입한 생수는 마치 생명수와 같았다. 그 분은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독일에 오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하나 주셨다. 어, 음, 향후 5년 내에 독일 갈 일이 있으려나... 가게 된다면 연락 드리죠!





11.

한국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반. 수속 밟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기내 반입 가능한 가방 하나만 들고 여행간 거라 짐을 찾을 일이 없어서 시간이 단축됐다.

지하철 타고 집에 갔더니 7시 반 정도. 하하. 출근할 때 일어나는 시간이다. 샤워하고 아침밥 먹고 바로 출근했다.

그 날은 어떻게 일했는지 잘 기억이 안남. 많이 졸았다. 대표님, 월급도둑이 여기 있어요.





12.

어쨌든 하노이 여행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퇴근 후 출발 - 도착 후 출근 여행도 거뜬했단 걸 쓰고 싶어서 출근 이야기까지 늘려서 썼다.

직장인이 되면 넘나 바쁘고 피곤해서 여행할 시간 따위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어리고 젊을 때, 그러니까 학생일 때 부지런히 여행 다니라는 어떤 선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친한 선배여서 장난으로 주말에 가면 되잖앙 '0'? 난 주말에 갈꼬야, 하고 말했다가, 가차없는 볼 늘리기 처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거 왠지 억울하군. 미래의 나는 진짜 주말에 다녀왔단 말이다. 과거의 내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해 여기다가 한 번 더 써야겠다.

주말에 가면 되잖앙 '0'?




끝!






덧글

  • 라비안로즈 2018/06/17 09:15 # 답글

    여행갈 시간은 돈과 시간을 짜내면 갈 수 있죠 ㅎㅎ
    즐거운 여행기 잘 봤습니다. 저도 괌 여행기 마지막만 남아있는데.. 마무리 짓기가 참 힘드네요 ㅎㅎ 짓는순간 완전히 여행이 끝난것 같애서요 ㅋㅋ

    하지만 하나의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다른 여행을 갈 수 있겠죠 ...

    베트남.. 한번 들러보고 싶다 생각드는 여행기였습니다 ^^
  • enat 2018/06/27 21:44 #

    헷 마지막이 젤 어려운 것 같아요 ㅋㅋㅋ 저도 이번 포스팅은 간신히 끝낸 기억이 나네요...
    유럽 포스팅... 언제할지 늘 생각은 하는데 손가락이 안움직이네요... 털썩... ㅋㅋㅋ

    베트남 다낭이 그렇게 좋다고들 하더라고요!
    만약 가신다면 하노이 말고 다낭으로... 하노이는 사실... 별 거 없긴 해요... 재밌었지만 ㅋㅋㅋ
  • PennyLane 2018/06/17 15:35 # 답글

    비엣젯 도착 시간이 5시반..... 이게 제일 꿀팁이네요 ㅋㅋㅋㅋㅋㅋ 출근시간이 7시반인데 왠지 가능할거같아요. 저도 당일 아침 출근 도전해보렵니다.
  • enat 2018/06/27 21:47 #

    연착만 되지 않는다면 도전할만 합니다! 짐도 위탁수하물 안맡기시면 공항에서 빨리 빠져나오실 수 있어요! ㅋㅋㅋ
    근데 출근시간이 9시가 아니라 7시반...이시군요... 으으 이르다... 회사에 샤워실 있으시면 괜찮으실 것 같기도...!! 으 함부로 얘기를 못하겠네요 으으...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8/06/19 10:33 # 답글

    내년의 enat님이 이글을 보며 욕합니다
  • enat 2018/06/27 21:47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왜영 아니에요 욕 안해요 ㅋㅋㅋㅋ 그치 미래의 나?
  • 민군 2018/06/20 14:06 # 삭제 답글

    진짜 잼나게 사네요 amore fati ... love fate 허... 개척하는게 삶인데 비료를 안 뿌려 놨더니 백날 밭 갈아봐야 돌만 걸리는 삶이란 (...)
  • enat 2018/06/27 21:49 #

    포스팅은 여행 얘기만 있어서 진짜 잼나게 사는구나 하실 수 있는데 사실 대체로 정적인 삶을 삽니다! 여행 아니면 집-회사-술 패턴은 남들과 비슷해요 ㅋㅋㅋ 즐거운 취미를 가져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 2018/06/26 15:1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enat 2018/06/27 21:50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위랑 비 조심하시고 즐거운 하노이 여행 되세요!!
  • LionHeart 2018/07/11 16:26 # 답글

    크...비행기에서 명함을 따내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간만에 들러 여행기 잘 보고 갑니다. ^^
  • enat 2018/07/21 13:21 #

    그 명함을 어디에 뒀는지... 으으 전 왤케 뭘 잘잃어버릴까요... ㅋㅋㅋㅋ 간만에 뵈니까 넘 좋네요 ㅠㅠ 저도 lionheart님 이글루도 안들린지 오래구만유 삶에 여유가 없네요 흑흑
  • 두루 2018/09/26 23:56 # 삭제 답글

    남편이랑 하노이 여행 이틀째, 택시기사한테 사기당할 뻔하고 씨클로 운전수한테 사기당하고... 베트남 사람에 대한 실망과 우울감으로 숙소에서 맥주나 홀짝이다가 이 이글루를 봤어요. 글이 너무 재미있고 제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의 얘기를 보면서 낙담말고 하노이를 더 돌아봐야겠다는 용기를 얻고 갑니다!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하시면 이웃신청을 할 텐데 이글루스라 못하고 가네요 :) 글이 참 좋아서 종종 놀러올게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TMI 1. 여행은 이틀 남았고 이번이 3번째 베트남 방문이에요. 그전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번엔 희한하게 못된 사람을 많이 만났네요ㅠ
    TMI 2. 저와 남편 모두 글쓰는 일을 하는데 enat님의 글솜씨에는 정말 감탄하게 되네요! 간결하되 정확하고 위트있게 스토리텔링하는 솜씨가 일품이세요 :D 저도 포스팅할 때 참고해봐야겠어요.
  • enat 2018/10/02 20:43 #

    앗 여행 끝나고 한국 돌아오셨겠네요! 여행중에 사람한테 사기당하는게 제일 속상해요 ㅠㅠ 예전에 다른 지역에서 사기와 구걸을 연속으로 당했다가 그 날 밤 배신감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ㅠㅠ 음음, 그치만 그렇게 사기치는 사람들과 공갈치는 사람들을 10명 정도 만나게 되면 저를 도와주는 선한 사람을 1명 정도는 어떻게든 만나게 되더라고요!! 아마 그 1명 때문에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여행은 많이 즐거우셨나요? 답글이 많이 늦었지만 좋은 거 많이 보셨고 맛난 음식 많이 드셨기를 바라며 (베트남이 3번째 방문이시라 빠삭하게 알고 계실 것 같아서 이미 그러셨을 것 같지만요~!!)... 편안한 밤 되세요!!
    제 글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부끄럽지만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당~!!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