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8 19:48

겨울 유럽여행 (28) 치비타 : 죽음으로 살아가는 마을 ├ 겨울 유럽여행 (2018)

1.

치비타 디 반뇨레조 Civita di Bagnoregio.




오르비에토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치비타 역시 오르비에토처럼 절벽 위에 지어진 도시이나, 아직까지 제법 큰 도시를 유지하고 있는 오르비에토에 비해 이곳은 심한 지반 침식으로 잔뜩 닳아버린 상태다. 침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는 10명 남짓한 주민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이 작고 유서 깊은 마을은 "죽어가는 마을", "사라지는 마을" 등의 안타깝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별명으로 불린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절벽 위의 작은 마을이라니, 여행자 입장에선 방문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기에,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단순하게 썼지만 사실 고민 많이 하고 내린 결정이다. 오르비에토에서의 여유 있는 하루를 포기하고 치비타까지 가기로 결심한 거니까.





2.

근데 말이다,

인터넷에서 "오르비에토에서 치비타 가는 방법"을 열나게 찾아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로마에서 치비타 가는 방법"밖에 안나오더라. 다들 오르비에토에선 치비타를 가지 않는 건가? 로마에서 당일치기로들 오는 건가? 버스 시간이나 버스 정류장, 티켓 가격 같은 정보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사설 여행사 - 고대도시 치비타로의 당일치기! 단돈 XX유로! 점심 포함! - 광고만 잔뜩인 거야?

나는 전날 밤 침대 위에서 두어 시간 넘게 구글링을 해대다가, 신통한 답변을 찾지 못한 채 답답해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러니까 오르비에토 둘째 날 아침, 숙소에서 조식을 먹으며 여행 중인 한인 가족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치비타에 다녀온 뒤라고 했다. 그들에게 치비타로 가는 방법을 물었으나, 자신들은 렌트카를 이용해 여행 중이라 대중교통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저 "차가 아니면 힘들텐데...?" 하는 말뿐이었다. 전날 봤으면 자신들이 태워줬을텐데 아쉽다고 말씀하는 걸 들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웃었다. 물론 속으론 한숨을 쉬었다.

조식을 먹은 뒤, 두오모 앞 광장의 관광안내소가 오픈하는 시간엘 맞춰 찾아갔다. 전 포스팅에서 '카푸치노 마시며 그림 그리기'의 전 일이었다. 나는 무지 중요한 일이란 표정으로 치비타에 어떻게 가냐고 물어봤고, 인포메이션 직원은 특별한 질문도 아니라는 듯 밝게 웃으며 오르비에토와 반뇨레죠(치비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마을)를 잇는 버스 시간을 알려줬다.




이렇게 단순하게 해결될 일을... 나는 왜 전날 몇 시간 동안 구글링을...

조금 허탈하기도, 조금 다행이기도 싶은 마음이었다.

아마 이 때부터 마음 놓고 여유있게 오르비에토를 즐긴 것 같다. 두오모 앞에서 사진도 잔뜩 찍고,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를 마시기도 하고, 서점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시계탑에 오르기도 하고, 등등.




아, 그렇지. 버스 타는 장소가 조금 문제였다.

인포메이션 왈, 치비타로 가는 버스는 마을에 있는 Piazza D'Armi에서 타면 된다고 했다. 지도상 오른쪽 상단의 X표가 쳐진 곳.




근데 구글맵엔 암만 Piazza D'Armi라고 쳐도 안나오는 거였다. 그것 때문에 아주 환장을 했었다. 인포메이션에서 준 종이 지도가 있어도 구글 지도에 검색되지 않는 곳이면 왠지 불안해하는 구글의존증 환자가 바로 이 몸이시다.

불안해하며 찾아간 Piazza D'Armi, 그곳의 구글맵 표기는 Ex-Caserma Parking 이라는 주차장이었다. 전날 갔던 St. Patrick's Well(산 파트리치오의 우물) 근처였다. 나 같은 환자가 또 있을까봐 적어둔다.

*** Tip : Ex-Caserma Parking이 오르비에토-치비타 구간의 종점이며, 거기서 절벽 아래로 내려가 오르비에토 기차역을 한번 들렀다가 치비타로 출발한다. 만약 오르비에토 절벽 위 마을에서 출발하는 거면 Ex-Caserma Parking에서 타는 게 편하고, 로마 등의 다른 지역에서 오르비에토 역으로 와서 버스를 타는 거면 오르비에토 기차역에서 타는 게 편하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3.

시계탑에서 내려와 숙소에서 재정비를 한 나는, 시간에 맞춰 버스 종점(Ex-Caserma Parking)으로 향했다. 종점에 도착한 시간은 버스 시간으로부터 1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이 종점 겸 주차장은 후미지고 낡아빠진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래서 분위기 역시 음침했다. 여기가 맞나? 버스가 세워져 있는 걸 봐선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다행히 나 말고 다른 여행자 두어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역시 쭈뼛거리는 기색으로 주차장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그들에게 치비타에 가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했다.

나 : 여기가 맞겠지?
여행자1 : 버스가 여기 있으니까 맞는 것 같아!
나 : 그럼 버스 기사님만 기다리면 되겠다. 현금 받겠지?


태평하게 말을 건 나와 다르게, 다른 여행자들이 놀라며 앞다투어 말했다.

여행자2 : 응? 아냐! 티켓 있어야 돼.
여행자1 : 너 티켓 안샀어?


아무래도 버스 티켓을 사야하나 보다.

나 : 티켓? 버스탈 때 티켓 사야돼? 여기 종점이니까 어디 팔겠지. 어디 보자...
여행자1 : 오, 여긴 티켓머신이 없어.
여행자2 : 중앙 거리에서 사야 한다구. 얼른 사와야 해!
나 : 뭐? 아니, 아니 무슨 그런...


버스 종점에 버스 티켓머신이 없다니! 나는 황당해하며 종점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티켓을 팔 만한 그 흔한 담배가게 하나 없었다. 이 종점은 마을 중앙에서 제법 떨어진 곳인데, 아무리 작은 도시라 해도 내가 마을 중앙까지 뛰어가서 제시간에 티켓을 사올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난 티켓을 어디서 파는지도 모른다고! 마을 중앙이라니 이 무슨 추상적인...!

나 : 아니... 그런... 그럼... 나는...
여행자1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뛰어! 뛰라고!
여행자2 : 우리가 최대한 버스 기사님을 잡아둘게. 어서 달려!


여행자들의 외침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어디서 버스 티켓을 구할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아버지께 물려받은 방향 감각과 공간 능력, 그리고 어머니께 물려받은 추진력과 행동력으로 그 '버스 티켓'을 구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선 여행자들의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야!





4.

나는 숨이 턱에 닿는다는 관용구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며 마을 중앙에 도착했다. 산소가 모자라 머리가 핑 돌았지만 고개를 돌려가며 버스 티켓이라고 써붙인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나: 찾았다!

내가 발견한 가게는 'Corso Cavour, 423, 05018 Orvieto (Hostaria Posterula 옆건물)' 에 위치한 평범한 담배 가게였는데, 문 앞에 버스 티켓이 붙여져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문으로 달려가 벌컥 열어제꼈다.

나 : 티켓! 버스 티켓! 치비타로 가는 버스 티켓!
주인 아주머니 : 오, 세상에. 조용히 하지 못하겠니!?


주인 아주머니의 일갈에 놀라, 헐떡이던 숨을 멈춘 채 입을 꽉 다물었다. 가게엔 담배를 사러 온 할아버지 한 분과 주인 아주머니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내가 깨버려 주인 아주머니가 화난 것 같았다. 나는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기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찼지만 입술을 꽉 닫아 가슴이 위아래로 벌렁거렸다.

주인 아주머니 : 세상에, 쟤 좀 봐, 헐떡이고 있잖아! 숨 쉬어, 숨 쉬라고!
할아버지 : 아가씨, 따라해봐, 습- 하-
나 : 아니 그게 아니라 버스 티켓. 치비타로 가는 버스 티켓!
주인 아주머니 : 얘, 숨을 좀 고르라고!
할아버지 : 습- 하-
나 : ...습- 하-...


아니, 한시가 바쁜데 이 사람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하지만 그들은 내 숨이 정상적인 범주로 돌아올 때까지 티켓 이야기를 꺼낼 생각도 없어보였고, 나는 별 수 없이 내 숨을 골라야했다.

나 : 우움, 나... 치비타로 가는 버스 티켓... 한 장 줘.
주인 아주머니 : 그래. 어디보자...


주인 아주머니는 다급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굉장히 태평한 몸놀림으로 버스 티켓을 꺼냈다. 그리고 한 장을 뜯어 내게 건냈다.

나 : 여기 돈! 고마워!
주인 아주머니 : 얘, 거스름돈 받아가!
나 : 네...


아까와 마찬가지로 느긋한 속도로 돈을 세는 아주머니였다. 나는 그 한가로운 모습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아주머니는 내 가게에 들어온 이상 조급함을 보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단호함으로 날 멈추게 했다. 힝...

주인 아주머니 : 자. 거스름돈.
나 : 고마워! 안녕!


나는 티켓과 거스름돈을 손에 꼭 붙들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뒤로 주인 아주머니의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5.

나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머리는 띵했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버스에 시동이 걸려 있었으니까!

나 : 으아아! 기다려! 기다려!
버스 기사 : 워, 워워워.
나 : 치비타! 반뇨레죠! 치비타!
버스 기사 : 하하하! 알아. 멈추라고!


시동을 걸어놓고 잠시 버스 옆에 나와있던 버스 기사는 내가 그러다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며 날 진정시켰다. 나는 뻘쭘해하며 걸음을 느리게 했고, 버스 기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네가 천천히 걸어와도 이 버스는 떠나지 읺을거라고 했다.

나 : 나, 티켓! 요거! 치비타!
버스 기사 : 그래그래. 숨 좀 고르고. 습- 하-
나 : 우웃... 습- 하-


아까 그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도, 지금 이 버스 기사도, 왜 이렇게 나보고 숨을 고르라 하는 거야. 내가 진짜 죽을 상을 하고 달려왔나? 흐응.





버스 기사는 내 티켓을 확인하곤 날 버스 안으로 들여보냈다. 버스에는 조금 전 날 응원해주던 다른 여행자들이 먼저 타있었다. 그들은 헐떡거리는 날 보더니 무사 버스 탑승을 축하해줬다.

하하... 그저 근처의 소도시에 가는 것 뿐인데 왜 이렇게 지치지... 나는 웃옷을 벗고 빈 자리 아무데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후하... 여튼 타서 다행이다...

*** Tip : 오르비에토-치비타 노선의 버스 티켓은 오르비에토의 마을 중앙 담배가게에서 팝니다. 절벽 아래 오르비에토 역이 아니라 절벽 위 오르비에토 마을에서 버스를 타실 거라면 미리 사두시길...





6.

버스는 오르비에토 역에 정차하여, 마을에서 태운 여행자보다 훨씬 많은 여행자들을 태웠다. 다들 로마나 피렌체에서 온, 치비타를 당일치기로 보기 위해 온 여행자들인가 보다.




여행자들을 잔뜩 실은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나는 창밖으로 아스라히 보이는 오르비에토를 구경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버스 타기 전 폭풍 달리기가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졸다가 깨어나니 반뇨레조였다. 한 시간 조금 안 걸린 것 같다. 생각보다 가깝군!

이제 여기서부터 좀 걸어서 치비타까지 가야한다. 치비타까지는 걸어서 15~20분 정도란다.

근데 어디로 가야하지? 사람들을 따라갈까 했으나 대강의 방향은 알아둬야 할 것 같아 근처 기념품점에 가서 물어봤다. 버스 정류장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어찌어찌 걷다보면 표지판이 나올거란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해두고 치비타를 향해 차박차박 걸었다.




치비타로 가는 표지판 발견!

사실 마음이 조금 급했다.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왔으니 치비타에 빨리 가서 "와 대단해! 역시 고생하길 잘했어!"라고 외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얼른 치비타에 가서 얼른 사진을 찍고 얼른 밥도 먹고 얼른 구경하고 얼른 감탄한 뒤 얼른 오르비에토로 돌아가야지!

그러다보니 괜시리 마음이 초조해졌다.




반뇨레조를 찾는 여행자의 99%의 목적이 치비타일테니, 길목엔 치비타로 향하는 표지판이 잔뜩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표지판들을 세우기로 한 반뇨레조의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며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걸었나? 반쯤은 뛰었다.





7.

사실 이런 걱정도 좀 했다.

혹시라도 치비타에 별 게 없으면 어쩌지?

오르비에토에서 여유롭고 한가하게 오후 나절을 보낼 기회를 포기하고 여기까지 온 건데, 마음 졸이며 전날부터 가는 방법 검색하다가 관광안내소에서 배우고 땀 빼가며 버스 티켓을 구한 뒤 다시 반뇨레조에서 달리다시피 한 속도로 걸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정작 그 치비타에 뭐가 없으면 어쩌지? 어휴, 그럼 과거에 고생한 내가 얼마나 실망할까.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기대를 하지 말자. 치비타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야. 거긴 아무것도 없다! 별 거 없다! 나는 그냥... 그냥 유명한 관광지에서 인증샷 찍으러 온 거다! 뭐 별다를 게 있을라고. 고생해놓고 보상 못받는 거 이 세상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야? 그러니까 나야, 너무 기대하지 말자!

사실 이건 내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 잔뜩 노력해놓고, 최대한 기대하지 않는 것. 나중에 실망하기 싫으니까, 결과와 보상에 무심한 척 하는 것. 그 나쁜 습관이 여행 중에 또 튀어나왔다.

그런 내 마음을 비웃듯, 혹은 안쓰럽게 여기듯, 땀빼며 걷고 있던 내 시야에 치비타가 들어왔다.




치비타 : 응? 뭐가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 누르면 커짐.

망망대해의 외딴 섬인듯, 치비타는 겨울 관목으로 우거진 계곡 사이에 불쑥 솟아 있었다. 하늘에는 낮은 구름이 물결처럼 잔뜩 깔려있었는데,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이 풍경을 해저에서 바라보는 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나는 멋쩍어하며 치비타에게 사과했다. 기껏해야 내 작은 실망감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널 잠시나마 낮춰봤구나. 그리고 고맙게도 그런 내 작은 이기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멋진 광경을 선사해주는구나, 하고.





8.

치비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주중/주말 입장료가 달랐다.




입장료 말고도 와인과 관련된 체험을 인포메이션에서 신청할 수 있나보다. 참고하시라고 사진 올려봄.




주중이어서 3유로 내고 티켓을 끊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Via S. Maria del Cassero를 따라 걸었다.

별로 현실감이 없는 풍경이었고 나는 멍청한 눈을 끔뻑이며 다리 위를 걸었다. 문득 내가 너무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나 싶어져서 내 주변 사람들을 슬쩍 둘러봤는데, 다들 나와 진배없는 표정이었다. 다행(?)이군.




다리는 제법 길었고 그래서 걷는 동안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제 이 문 너머로 '죽어가는 마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천공의 마을', '죽음으로 가는 고요하고 조용한 중세 마을'인 치비타가 나타난다. 자, 가보자!





9.

어, 근데...




치비타의 별명이 '죽음으로 가는 마을'이랬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활기 넘치고... 여행자 많고... 물론 대도시처럼 시끄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조용하지도 않잖아!

대체 언제부터 '죽어가는 마을'이란 이명이 붙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치비타는 결코 '죽어가는 마을'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마을'을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로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침식은 계속 되고 있고, 거주 인구수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며, 100년 안에 이곳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으나, 치비타는 영 죽음을 앞둔 마을 같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 가득했다!




사실 '죽어가는 마을'이라길래 거기서 뭐 먹을 데가 있으려나 싶어서 간식을 챙겨왔지만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꽤 있었다. 손님도 제법 많았다. 나는 다시금 이곳이 왜 죽어가는 마을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가 거의 차있었으나, 늘 그렇듯 난 혼자라서 별로 자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좁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켰다.




Primi : Gnocchi al profumo di bosco con fonduta ai quattro formaggi e funghi porcini

프리미(첫 번째 접시)로 뇨끼를 시켰다. 치즈와 풍기 포르치니를 끼얹은 뇨끼였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 난 내가 풍기 포르치니가 들어간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또 뇨끼는 왠지 밥 같을 것 같아서 시켜봤는데, 제법 맛있었다.




Contorni : Verdura cotta di stagione

콘토르니(곁들여 먹는 접시)로는 익힌 야채를 시켰다. 우리나라 나물 같은 걸 상상하고 시켰는데, 참기름 대신 올리브 오일이 뿌려진 걸 제외하면 제법 비슷했다. 이것도 마음에 들었다.

배탈에서 구원받은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지라, 많이는 안시키고 딱 요것만 시켜놓고 적당히 먹었다. 흡족한 식사였음.





10.

배를 채우니 좀 걷고 싶어졌다.

치비타에 오기 전엔, 조용하게 잠든 마을을 방해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다닐 줄 알았는데, 마을은 나보다 앞선 여행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미 잠에서 깬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뭐가 조마조마할까! 그래서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여긴 여름에만 여는 식당인 듯? 지금은 겨울이라 문을 닫은 것 같았다.




여기는 광장 교회 앞. 여행자들 몇 명이 앉아있다.




광장은 요래 생겼다. 마을 규모만큼 아주 작은 편이고 중앙엔 울타리로 막힌 우물이 있다.




처음엔 이 카페에서 뭘 먹으려고 앉았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은 탓인지 웨이터가 안오더라.

그래서 아까 위의 식당으로 이동해서 밥 먹음.




그러고보니 이 동네, 고양이가 참 많았다.

고양이가 볕 잘 드는 곳에 느긋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찍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리고, 고양이는 그걸 귀찮아하며 도망가고, 관광객들은 고양이를 쫓아가고, 뭐 그런 모습이 치비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라고 별 수 있나.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정말 요물 같은 게...




난 말야 개파라서...




너희들 같은 고양이들...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흥!

그러면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enat이었다...









대체 누구냐, 이 마을을 '죽어가는 마을'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마을에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는 그런 별칭으로 인해 관광객들이 몰려 사라지기 직전의 이 마을이 다시 살아나게 될 줄 알았을까?

어쨌든 침식은 막을 수 없겠지만, 남은 기간만이라도 계속 이런 모습으로 활기 넘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치비타에서 내려왔다.





11.

치비타의 좁은 골목을 따라 돌아다니다가 마을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변해있었다.




태양의 위치는 서쪽이었고,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던 구름은 사라졌다.

노을빛이 아름다운 저녁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깨끗한 하늘이라니.




이런 노을빛 마을이라니!




저녁 노을에 반사되어 온통 주홍빛으로 물든 치비타는 곧 하늘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아보였다. 나는 그제야 이 마을의 이명인 '죽어가는 마을', '사라지는 마을'에 실감하며, 치비타가 저 노을빛과 함께 사라지면 어떡하나 싶은 황당한 걱정 속에서 정신없이 치비타를 바라봤다.

이건 말도 안된다. 말도 안되는 풍경이다.





정말인지 이런 풍경을 볼 수 있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의 나는 뭐가 그렇게 조급했고, 뭐가 그렇게 안달이 나있었으며, 또 제풀에 지쳐 아무것도 없을거라고 결과를 속단했을까.

나는 몇 시간 전의 나에 대해 다시 한번 더 반성했다.

여기에 오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던 주제에, 조금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대해도 됐었다. 조금 더 고대해도 됐었다.





저녁은 찰나였다. 나는 치비타가 가장 아름답게 올려다보이는 포인트에 서서, 노을빛이 서서히 흩어지는 모습까지 바라보았다. 마침내 태양빛이 닿지 않고 치비타가 점차적으로 무채색으로 돌아간 후에야, 나는 몸을 돌릴 수 있었다.




반뇨레죠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며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끄적였다. 조금 거창할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느낀 것 그대로 쓴 거다.



*** 오늘 치비타에서 배운 것 :

조급해하지 말 것, 체념하지 말 것, 결과를 속단하지 말 것.

실망하기 싫어서 도망가지 말 것. 자신의 노력에 떳떳할 것.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더 원해도 되고, 소망해도 되고, 기대해도 된다.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상하는 것보다, 더 멋진 무언가를 가져다 준다.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계속!







덧글

  • PennyLane 2018/09/08 22:47 # 답글

    죽음으로 살아간다는데 사진은 마치 판타지영화의 한장면들 같네요. 저 마을 메모해두겠습니다.
    그나저나 ㅋ 이탈리아에서 제시간에 차 타려고 뛰어다니는 사람이 흔하진 않을것같네요. 아마 이낫님께서 그날 그 마을의 슈퍼스타셨을거예요!!!
  • enat 2018/09/11 22:02 #

    마을이 깎이고 깎여나가 외딴 섬 혹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는 탓일까요!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풍경이긴 했습니다!
    읏... 전 아마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느긋하게 살아가긴 글렀습니다 ㅋㅋㅋ 버스가 늦게 가거나 늦게 오거나 상관없지만 제가 늦는 건 용납할 수가 없어ㅅ...! 자 이 바쁜 동양인들을 보세요 이탈리아 사람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의 딸이 바로 저...!
  • 잘나가는 꼬마사자 2018/09/09 10:23 # 답글

    마지막 줄 너무 아름답네요. 죽음으로 살아가는 마을 이라니 enat 님 글 제목 맞나 하고 다섯번 확인했어요 ㅋㅋ 이탈리아 버스 시간은 항상 그렇죠 뭐. 습-하 하고 숨 고르는 거도 뭔가 종특인거 같아요...ㅋㅋㅋㅋㅋ 하지만 enat님이 저질체력으로 간신히 뛰어와서 막 타려 하는데 그러면 저라도 숨좀 고르라고 막 말하고 싶을 거여요!ㅋㅋ
  • enat 2018/09/11 22:09 #

    치비타 별명이 il paese che muore라고 "죽음으로 가는 마을"이라고 한대요! 그래서 처음엔 치비타 : 죽음으로 가는 마을, 하고 포스팅 쭉 썼는데 다 쓰고 보니까 전혀 죽음으로 가고 있질 않더라고요 ㅋㅋㅋ 그래서 "살아"를 붙였더니 저런 진지하고도 무거운 제목이 됐습니다....
    제 가엾은 얼굴과 비틀거리는 몸짓은 국적무관 모든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죠! 자 사자님께서도 앞으로는 절 좀 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주시길!
  • 애기곰 2018/09/11 22:47 # 삭제 답글

    방향감각과 공간감각 하;;;
    제가 워낙 길치라 그렇지 않아도 길치를 위한 가이드라인같은 걸 요즘 찾아보고 있거든요.
    근데 길치는 불치병이니 주변에서 사랑으로 감싸줘야 한다느니, 방향감각은 개선의 여지가 낮다는 비관적인
    의견들을 접하고 꽤 의기소침해하고 있던차에 enat님을 보니 무척 부럽습니다. enat님은 부모님께 정말 좋은 재능을
    물려받으신거에요^^
    치비타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같은 곳의 배경이나 모델이 되었을 것 같은 곳이네요. 실제로 가서 보면
    뭔가 그 느낌이나 분위기가 장난아닐 것 같은 곳.
    이탈리아는 몇달을 여행해도 부족할 것 같아요. 정말 아름다운곳,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요즘 열심히 로또를 사고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엔 방법이,,,ㅎㅎ


  • enat 2018/09/20 22:44 #

    앗 근데 저도 저렇게 써놓긴 했는데 사실 타고난 공간감각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행 다니면서 길도 많이 잃고 이상한데로 새고 방향 잘못 잡아서 한참 헤매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ㅋㅋㅋ 근데 그렇게 많이 헤매고 다니니까 늘더라고요! 길치는 불치병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적용되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저희 아버지께 물려받은 걸 정정하자면 방향감각과 공간감각보다는 다음엔 결코 길잃지 않겠다 이 악무는 정신이려나요 ㅋㅋㅋ
    아 이탈리아병에 걸리셨군요 저도 그래요 저도!!! 이탈리아는 몇달을 여행해도 부족하겠죠!!! 이탈리아니까요!!! 이탈리아는 진짜 가고 싶은 소도시들이 많아요 ㅠㅠ 여행 중에 만난 이탈리아 요리사 형님이 가끔씩 이탈리아 사진 보내주는데 진짜 부럽더라고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돈이 없으니... 회사 지사를 이탈리아로 뚫어서... 어떻게든 이탈리아에 가는 방법을... 으으...
  • 이글루스 알리미 2018/11/09 08:06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11월 09일 줌(http://zum.com) 메인의 [허브줌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enat 2018/11/11 20:33 #

    감사합니다~
  • 튜닝 2018/11/09 11:13 # 삭제 답글

    하룻밤 새 마을 중앙부 만 남고 주변이 무너져 내렸답니다.
    물론 남은 부분 제외한 주민과 건물들 모두 매몰됐겠죠.
    오르비에토에서 버스가 제 시간에 다니나 보네요.
    예전엔 한 시간 늦게 오고 그랬는데 .. , 지금은 오히려 관광지가 돼서
    다리도 제법 튼튼하게 새로 놨군요.
  • enat 2018/11/11 20:34 #

    그런 슬프고 비극적인 과거가... 알고 보니 달리 보이네요.
    제가 탄 버스는 오르비에토가 종점이라서 제시간에 출발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다른 다리였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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