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4 12:40

겨울 유럽여행 (30) 로마 : 산 탄드레아 성당과 야경 ├ 겨울 유럽여행 (2018)

1.

판테온에서 조금만 걸으면 나보나 광장이다. 원래는 나보나 광장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나보나 광장은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정신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라면 옛날에 다 지났는데 왜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겸, 새해 겸해서 열어놓은 건가? 알쏭달쏭했지만 어쨌든 요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에 김이 팍 샜다. 밤에 왔다면 전등 불빛 버프 때문에 또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시간은 아직 불을 켜기엔 이른 때였고, 그래서 설치된 마켓과 놀이공원 등의 모양새는 조잡해보였다. 게다가 사람들, 특히 애기들이 잔뜩 뛰어다니고 있었고, 길 한편엔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었고, 무엇보다도 테러 위험 때문에 몸수색하는 입장줄이 매우 길었다.

으음, 아냐, 오늘의 나는 여기에 가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산 탄드레아 델라 발레 (Sant'Andrea della Valle) 성당이었다.




Corso Vittorio Emanuele II, 00186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4guWBpifMD52)

산 탄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은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다음으로 큰 쿠폴라를 가진 성당이라고 한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쿠폴라가 워낙 압도적인 크기라 이곳이 그 다음이란 게 와닿지는 않다만... 하여간 로마의 성당들을 쭉 줄세워놓고 보면 여기가 2등이라고 한다.

사실 유럽 어느 곳에 가도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을 법한 느낌의 수수한 외관 때문에 (특히 내가 바라보는 쪽에선 쿠폴라가 보이지 않았고, 성당의 규모도 작아보였다), 별 기대없이 시간이나 때워야지 하고 들어갔던 곳이다. 무료 입장이기도 했고, 잠깐 앉아서 기도하는 척 쉬고 와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압도당했다.







처음 느낀 감각은 딱 하나였다. "노랗다".

문을 열고 들어가 몸을 돌리면, 시원하게 탁 트인 성당 내부가 펼쳐지는데, 그 내부가 노랗기 그지 없었다. 외벽과 천장, 그리고 샛노란 느낌의 저녁 채광은, 마치 황금의 방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웃거리던 여행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나에게, 성당 직원이 다가왔다.

직원 : 저기, 이 성당 멋지지?
나 : 웅!
직원 : 여기 무료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 이거 한 번 들어봐.
나 : 아?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이끌려가 헤드폰을 받아들었다. 직원은 헤드폰을 통해 성당에 대해 공부한 뒤, 이 유서깊고 아름다운 성당을 후원하고 싶다면, 나가는 길에 후원금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아항. 과연.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헤드폰을 장착했다.

가이드 내용은 제법 알찼고 내용과 동선이 잘 짜여있어 돌아다니기 편했다. 다만 영어 오디오 가이드였고, 그래서 처음엔 열심히 집중해서 들었지만, 나중엔 지쳐서 그냥 귀에 꽂아놓고만 다녔다. 듣다보니 왠지 영어듣기 평가 같아서... 나는 대한민국의 7차 교육과정을 성실히 따른 학생이었고 그래서 수행평가로 영어듣기 평가를 질리도록 봤기 때문에 이런 단조로운 목소리로 계속되는 설명을 견딜 수가 없다.





제단 뒤의 벽화에는, 성 안드레를 기리는 성당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십자가형을 당하는 안드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개를 위로 젖히면 천장화가 펼쳐진다. 그림에 입체감이 있어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산 탄드레아 성당 직원들도 자신들의 천장화에 자부심이 있는 듯, 성당 한가운데에 거울을 가져다 놓았더라.





천장화를 보고 있으면 고개가 아프니, 그 거울에 반사된 천장화를 살펴보라는 배려였다.

"이 좋은 걸 우리만 볼 순 없지! 자, 어서 보도록 해!"란 느낌일까...

그러고보니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오디오 가이드도 그렇고, 이 성당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성당에 상당한 자부심 및 전파 의지가 있는 듯 했다. 여행자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다.





2.

성당 안에서 한참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오니 배가 고프다. 시간이 거의 저녁을 향해가니, 고플 때도 된 것 같다.

근처에 가볍게 먹을만한 음식점이 있나 찾아봤다. 그러다가 솔솔 풍기는 피자 냄새에 이끌려 피자 가게에 들어갔다.




Sofia Pizza Napoletana (9 Corso del Rinascimento, 3, 00186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 1AgRs7e57L62) 라고 하는 피자 가게였다.

피자 가게의 직원 언니는, 좀 셌다. 많이 센 언니였다.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우리 언니 때문인지 나는 센 언니들한테 약하다. 사나운 표정으로 일을 보던 언니는, 내가 모진 세상과 역경에 지친 가여운 소녀의 얼굴을 하고 카운터 앞에서 머뭇거리자, 괜찮다며 주문을 하라고 했다.

나 : 저기... 뭐가 뭔지... 추천 좀 해줄래?
직원 언니 : 뭐, 추천?


그 언니는 인상을 썼고, 나는 그냥 아무거나 고를걸 괜히 귀찮게 했구나, 당신의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내가 고르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그 언니는 인상을 풀고 두어개의 피자를 골라줬다.

직원 언니 : 나는 이거랑, 이게 괜찮아.

아무래도 인상을 쓴 건 고민하기 위해서였나보다. 별탈없이 대답해주는 모습에 긴장이 풀린 나는, 순박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추천해준 피자를 골랐다. 직원 언니는 자신의 추천을 순순히 들어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곧 피자가 나왔고,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선함을 지지한다는 순진한 얼굴로 피자를 받으러 갔다. 그 언니는 나보고 저쪽 가서 먹으라며 자리를 골라줬고, 나는 또 얌전히 그 언니의 말대로 그 자리에 가서 먹기 시작했다.




근데, 그 추천 메뉴 피자, 진짜 맛있었다. 나는 절대 그 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맛있어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먹었고, 언니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먹던 도중, 몇 명의 손님들이 줄지어 피자를 먹으러 왔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손님도 있었고, 지나가던 남자 손님도 있었고, 가족 단위로 온 손님도 있었는데, 그 언니는 거들먹거리는 손님들에겐 툴툴거리며 사나운 표정을 고수했고, 어린 아이거나 상냥한 미소를 짓는 손님에겐 인상을 누그러뜨렸다. 어쩜...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겐 강한 언니 같아. 멋져.

다 먹은 뒤 쟁반과 쓰레기를 가져다주자 밝게 웃으며 고맙다는 언니. 바이바이하고 가게를 나섰다.





3.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켓 한군데엘 들렀다.




야식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며 둘러봤으나 아까 먹은 피자 때문에 배가 불러서 정작 많이 사진 못했다.

이탈리아어는 아리아리아리아리베데르치 이딴 거밖에 모르기 때문에 제품 포장의 표시광고엔 대체 뭐라고 써있는 걸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 레몬맛 음료수 : 목이 말라서 샀음. 립톤 아이스티 레몬맛 같은 맛이었다.
- 프링글스 : 모든 음식에 실패하게 되더라도 이것만 있다면 문제없다.
- 초콜릿 : 스위스꺼. 역시 스위스의 초콜릿은 세계 제일.
- 와인 : 가볍게 마실거 살려고 했는데 도수가 넘 쎄다... 알콜맛 쩔엉 우엥.
- 린스 : 샴푸가 영 좋지 않아 린스를 구입했다. 근데 별 효과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금발용"이라고 적혀있었다. 뭐야... "흑발용"을 구입했어야 했나...






4.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구경한 야경.









딱히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숙소가 근처이다 보니 동선상 자연스럽게 둘러보게 됐다.

숙소 위치 정말 짱이시다...





거리를 휘젓는 백곰도 봤다. 밤중에 춤추는 백곰을 볼 수 있는 이곳은 로마.




네르바 포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숙소다. 들어가기 왠지 아쉬워서, 포룸 앞 벤치에 앉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끄적끄적 그려봤다.





밝게 빛나는 벽과 사람들의 그림자 때문에, 어쩐지 츄라우미 수족관이 떠올랐다. 로마유적을 보며 수족관을 떠올리다니.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하하.





5.

숙소로 돌아와 싹 씻은 뒤, 마켓에서 사온 음식들을 꺼냈다. 그리고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 핸드폰으로 밀린 웹툰 따위를 보며 그 음식들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행... 행복해... 나란 인간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구나...





6.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밀린 웹툰도 다 보고, 심심해졌다. 나는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로마의 밤은 자신이 1월에 머물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추웠다는 소리다. 그래서 패딩을 입고 나갔다.

옛날엔 숙소를 역 근처에 주로 잡았었는데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위치가 아니라 가격 먼저 생각했던 것 같다... 어디어디가 제일 싼가... 싼 곳을 고르다보니 주로 역 근처였던 것 같다), 언제부턴가 숙소를 웬만하면 관광지 근처로 잡고 있다. 관광지의 조용한 아침, 혹은 고요한 밤을 보기 위해서다. 일정이 다 끝난 시간, 편한 옷차림으로 사람이 빠져 적막이 감도는 관광지를 터덜터덜 산책하는 게 너무 즐겁다. 특별함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느낌이다.

여하간, 그래서 이번에도 밤 늦은 시간, 숙소 근처, 그러니까 콜로세움과 그 일대 주변을 산책했다. 관광지라서 가로등 불빛은 환했고, 이곳저곳에 경찰이 있어서 위험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도시에서 제일 치안이 좋은 곳이라면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관광지니까...





불이 켜진 콜로세움.




콜로세움 한꺼풀 안.




새하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얍얍.




멀리서 잡아봄. 한적하다.




티투스 개선문. 고대 로마 황제의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느낌.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으로 마지막!





7.

야밤에 산책을 하고 났더니 당이 딸린다. 아니, 사실 핑계고 그냥 입이 심심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Flor Gelato에 가서 젤라또를 사먹었다. 직원의 추천대로 페레로 로쉐맛과 쿠키맛을 골라먹었다. 달달한 걸 먹고나니 자연스럽게 짭잘한게 당겨서 옆에 있는 Wings Chicken에 가서 윙을 시켜먹었다.

아마 젤라또와 윙, 둘 다 맛은 그저 그랬던 것 같다. 일기장에 "숙소 근처에 맛집 없네... 내일부터 마트 가면 먹을 거 최대한 많이 사올 것"이라고 써놓은 걸 보니 말이다. 하하.

내일은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말겠다는 돼지 같은 다짐과 함께 하루를 마쳤다.





점심 뭐먹지 고민하는 enat의 여행기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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