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8 22:42

겨울 유럽여행 (36) 로마 : 감흥없는 요리사와 로마 둘러보기 ├ 겨울 유럽여행 (2018)

1.

테르미니 역 젤라또 가게 파씨에서 만난 사람은, 며칠 전 피렌체 호스텔에서 알게 된 요리사 형님이었다. 피렌체 포스팅을 워낙 오래 전에 했기에 기억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요리사 형님은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도시의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가진 술이나 음식을 베푸는 선량한 사람이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나 추억을 쌓았던 사람을 다른 도시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그동안 각자 어디를 여행했는지 이야기했다. 내가 피렌체를 지나 아씨시, 오르비에토 등의 이탈리아 중부 소도시를 들렸던 것처럼, 요리사 형님도 다른 소도시에서 즐거운 추억을 쌓은 것 같았다. 형님이 다녀온 마을은 스폴레토라고 하는 마을이었는데, 사진을 보니 아씨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요리사 형님은 그 말 그대로라고, 이곳은 아씨시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 했다. 과연.

젤라또 가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배가 고파져서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모처럼 테르미니 역 근처라 한식을 먹을까 했으나, 요리사 형님은 "로마"의 "이탈리안 식당"이 가고 싶다고 했다. 수도의 음식맛이 궁금한 건가. 정말인지 투철한 직업정신인 것이다. 알아본 곳이 있냐고 묻자,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구글이 도와줄거야. 나는 구글맵을 켜고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그나마 구글 평점이 높은 레스토랑을 찾아봤다. VECCHIA ROMA라는 식당이 눈에 띄었다.





VECCHIA ROMA.

주소 : Via Ferruccio, 12/b/c, 00185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FnYoLaQAVJs




메뉴가 나왔지만 읽지 않았다. 뭔 글씨가 이렇게 많아.

그는 요리사답게 내게 음식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으나,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어서 (배고파서 귀에 잘 안들어왔다) 아무거나 골랐다. 내가 고른 건 조개가 담긴 봉골레 파스타 같은 거였다.

요리사 형님은 신중하게 메뉴를 탐독하다가, 앤쵸비 피자와 다른 사이드 메뉴를 골랐다. 앤쵸비? 그거 맛있나? 흐응.




식전빵과 하우스 와인.

와인 맛이 괜찮다며 이탈리아어로 뭐라뭐라 웨이트리스에게 이야기하는 요리사 형님. 그러다가 웨이트리스와 친해져서 뭔가 대화의 장이 펼쳐졌다. 요리사 형님은 이탈리아로 오기 전 폴란드에서 몇 년 간 체류했었는데, 그 웨이트리스도 마침 폴란드 인이었고, 그래서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 했다.

물론 나는 이탈리아어도 폴란드어도 할 줄 몰랐기에 그냥 그들에게 따사로운 미소를 지어준 뒤 와인이나 홀짝였다.





식전 메뉴.

나는 그냥 맛있게 먹었는데 요리사 형님은 뭔가 탐색하는 듯한 느낌으로 먹었다. 요리사란 참 피곤한 직업이야. 먹을 때도 긴장을 늦출 수 없으니.




내가 고른 봉골레 파스타. 모래가 씹히기도 했고 좀 비려서 별로였다.

뭐야, 괜찮은 레스토랑인 줄 알았는데 맛이 왜 이런담.




요리사 형님이 고른 앤쵸비 피자.

...이건 짱 맛있었다. 앤쵸비란 게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이건 이렇게 맛있는데 내 파스타는 왜 이 모양이야? 맛없는 메뉴를 고르는 내 능력이 어김없이 발휘됐군. 하여간 피자 맛있어서 계속 뺏어먹었다. 앤쵸비란 게 요로코롬 맛있구나. 냠냠.





2.

식사를 마친 뒤, 요리사 형님이 콜로세움을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로마에 별 기대는 없으나 콜로세움 정도는 봐줘야 할 것 같아서랬다. 이 무슨 로마를 향한 거만한 태도... 꼭 내가 피렌체에서 '피렌체에 별 기대는 없으나 두오모 정도는 봐줘야겠지' 운운 했던 것 같군...

나는 놀라게 될 거라면서 요리사 형님을 데리고 콜로세움으로 갔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니, 소화도 시킬 겸 슬슬 걸어갔다.




요리사 형님 : 흠. 생각보다 작네?

뭣!?

요리사 형님 :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별 거 없네?

뭐어엇!?

요리사 형님은 감흥없는 얼굴로 사진을 한 장 대충 찍더니, 이제 가자고 했다. 나는 버둥거리며 콜로세움의 위대함을 설명하였으나, 요리사 형님은 졸린 눈으로 끔뻑이며 내게 로마에 유명한 다른 곳은 없냐고 물었다.

나 : 어... 트레비 분수?
요리사 형님 : 그럼 거기 갈까?


그래서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3.

콜로세움에서 트레비 분수로 가는 길목, 아마 트라야누스 시장 건너편이었던 것 같다. 그쪽에 제법 큰 식료품점이 있었는데, 요리사 형님이 그 가게를 홀린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았다. 콜로세움에 반응하지 않던 그가, 식료품점에는 반응을 한다?




나 : 어... 뭐... 잠깐 들릴까요?
요리사 형님 : 그래? 그래도 돼? 그래도 괜찮지?
나 : 어... 네, 들어가죠?
요리사 형님 : 그래! 가자! 잠깐만이면 돼! 잠깐만!


요리사란 직업은 참으로 피곤한 직업인 것이다.

나는 장난감 가게를 지나치지 못하는 조카를 돌보는 기분으로 식료품점에 들어갔다.





이 때의 나는 요리에 1도 관심이 없어서 (요리는 엄마와 미니미니가 하는 거였고 나는 먹기만 했다)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아쉬운 일이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요리를 하게 된 지금의 나라면 아마 주의깊게 살펴봤을 것이다... 그렇다! 요새 나는 요리를 한다! 요리하는 여자다! 요리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의 문을 열어제꼈다! 이제 쇼핑몰에 가서 옷을 보는 대신 식재료를 본다! 하하하!

하지만 저 땐 그 즐거움을 몰랐으니, 그냥 술이나 파스타 말린 거나 보고 말았다. 아쉽다. 이탈리아 식료품점에서 이탈리안 음식을 다루는 요리사를 바로 옆에 두고 기껏 본다는 게 술이나 파스타 말린 거라니. 이건... 이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나 : 어, 뭐, 이제 갈까요?
요리사 형님 : 로마의 식료품점은 참 크다... 좋다...
나 : 어, 그래요. 좀만 더 이따가 가요.
요리사 형님 : 정말 좋다... 이것도 파네... 흠 이 도구는... 이 재료는... 하아...






4.

요리사 형님을 질질 끌며 (끌지 않으면 문 닫을 때까지 그 가게에 있을 것 같았다) 데리고 이동한 곳은 트레비 분수였다. 그래, 콜로세움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트레비 분수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지! 자, 보라! 이 시원한 분수와 유려한 조각을!




요리사 형님 : 음?
나 : 어때요? 이건 멋지죠?
요리사 형님 : 이거 롯데월드에 있는...
나 : 아냐! 아니 그거 맞는데... 아니 그거 아니에요!
요리사 형님 : 뭐, 별 건 없네.


콜로세움에 이어 트레비 분수까지...! 대체 이 남자는...!

이 정도면 로마에 별 거 없기로 작정한 것 같다. 로마에 1도 감흥 없기를 각오하고 온 것 같다! 나는 요리사 형님과 로마의 교감 연결을 포기하고, 그냥 나 혼자만 로마와 교감하기로 했다.

나 : 이렇게! 이렇게 멋진 분수인데! 왜!
요리사 형님 : 어, 거기 있어봐. 사진 찍어줄게.
나 : 응?





...사진은 잘 나왔다. 나는 요리사 형님에게 로마감성을 느낄 줄 모르는 아저씨라며 매도하는 것을 멈췄다. 사진 잘 찍어주는 사람은 잘 대해줘야 한다. 암암.





5.

트레비 분수를 지나 스페인 계단으로 가는 길. 아까 테르미니 음식점에서부터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를 거쳐 계속 걷고 있자니 속이 더부룩했다. 아무래도 먹고 바로 걸었더니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어느 신호등 앞에서 소화불량을 호소하자, 요리사 형님은 캄파리 소다를 먹자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먹으면 소화를 도와주는 식전주 같은 거라고 했다. 그런 게 있어? 신기하군.

나 : 그거 어디서 사요?
요리사 형님 : 아무데서나... 저기 가보자.


요리사 형님이 가리킨 곳은 평범한 레스토랑이었다. 형님 왈, 웬만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선 캄파리 소다를 판다고 했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며 졸졸 따라갔다.

요리사 형님 : 쏼라쏼라쏼라.
웨이터 : 쏼라? 쏼라쏼라.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대화 후, 그 캄파리 소다라는 게 나왔다. 작은 리큐르 병에 담긴 캄파리와 소다수가 섞인 음료였다.




우선 색깔이 참 예뻤다. 예전에 쿠바에서 먹었던 식용색소를 잔뜩 탄 음료 같아. 나는 의심쩍어하며 요리사 형님을 쳐다봤지만, 그 형님은 소화에 도움을 줄 거라며 자신의 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흠, 그렇단 말이지. 나도 그 모습에 고무되어 내 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맛은... 음... 부루펜 시럽에 사이다 섞은 맛이었다.

캄파리 소다... 분명 식전주라고 했는데... 그럼 입맛을 돋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맛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게 뭔가, 뭔가... 꼭 약 먹는 기분이었다. 약 같은 맛이니까 작용도 뭔가 빠를 것 같다!

나 : 오, 왠지 소화가 되는 것 같아!
요리사 형님 : 그렇게 빨리 소화가 될 리 없어.


흥,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고.





6.

스페인 계단에 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저녁을 떠나보내는 시간대였다. 저녁과 밤 사이의 언저리... 사진 잘 찍는 사람들이 사진 찍을 때 색이 가장 예쁘게 나온다고들 말하는 그 시간대였다. 그날 따라 날씨는 선선하니 좋았고, 아직 캄캄하지는 않은 하늘 아래 이제 막 켜진 불빛이 반짝거려 아름다웠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적당하니 느긋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계단 중간에 앉아 광장과 분수를 내려다봤다.




요리사 형님 : 오, 여기는 좀.
나 : 오! 드디어!
요리사 형님 : 그래, 괜찮다. 나쁘진 않네.


...드, 드디어 성공이다! 저 로마에 감흥이 1도 없는 요리사가 저 정도의 반응을 보이다니!

나는 흐뭇해하며 양손 주먹을 쥐고 해냈다는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보던 요리사 형님은, 절대 내 뿌듯함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요리사 형님 : 뭐, 피렌체보단 아니지만!

그러더니 핸드폰을 열어 네이버 창을 키더니 웹툰을 보는 것이었다.

으아아, 그냥 이 정도 되면 감명받은 척이라도 좀 해라! 웹툰 꺼라! 로마 관광지에서 웹툰 보지 마라! 으아아아!







감흥 없는 요리사는 어쨌든, 나 혼자 감명받아서 이 사진, 저 사진 찍었다. 저 날의 스페인 계단은 유난히 예뻤다.





7.

피렌체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 포스팅에서 '물리'라고 칭했던 여행자가 있다. 나와 동갑내기이고,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으며,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 파티 이후 요리사 형님과 의기투합하여 밤새 술을 마시다보니 서로 친해졌다는 사람이다.

요리사 형님 : 그 물리가 지금 바티칸에 있대. 투어 한다나.
나 : 오? 같이 저녁 먹자고 해봐요.
요리사 형님 : 응, 바티칸 투어 끝내고 마치고 나오면, 아마 1~2시간 후일 것 같다네.





그래서 바티칸 방향으로 또 걸었다.

...테르미니에서 바티칸까지 내 다리 열일 하는구나.

스페인 계단에서 테베레 강까지 슬슬 걸어가자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원래는 바로 산탄젤로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골목 하나를 잘못 들어가 대법원이 있는 움베르토 1세 다리로 나와버렸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다리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야경을 마주했다.




로마에 이런 뷰포인트가 있었어? 난 정말 몰랐어!

나 : 우와, 와! 저 이 위치의 이 각도의 이 뷰는 처음 봤어요! 우와!
요리사 형님 : ...이야, 이건 제법 멋있다.


밤이 되자 금방 추워졌다. 어쨌든 1월인 것이다. 강바람은 차디찼고, 인적은 드물었으며, 체온은 점점 떨어졌다. 귀가 시려왔다. 그치만, 그치만 도저히 다리 위를 떠날 수 없었다. 두고 가기엔 대성당의 쿠폴라와 산탄젤로 다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이것을 로마에 1도 감흥없는 요리사를 데리고 다니며 로마를 변호하느라 피곤했던 내게 로마가 주는 선물로 여기며 감사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옆을 슬쩍 보니 요리사 형님도 감탄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각도를 잡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나 : 솔직히 이건 인정?
요리사 형님 : 인정. 뭐, 멋지네, 로마.


그렇지!

요리사 형님 : 근데 저건 로마가 아니라 바티칸이잖아? 바티칸이 멋있는 거잖아?

그으냥 로마가 멋있다고 해애애!





8.

움베르토 1세 다리를 건너 산탄젤로까지 가는 강변에는, 헌책을 파는 자그마한 가판대들이 줄지어 세워져있었다. 이곳에선 헌책도 팔고, 엽서도 팔고, 사진첩이나 가벼운 기념품도 팔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리가 다 있을까!





근데 요리사 형님은 이곳에서도 요리책만 봤다.

왜 이렇게 요리 외길이야, 이 사람은!?




여기는 그 강변 가판대를 마주하고 중간 즈음에 있는, Biblio Bar 라는 바 겸 카페다.

Chiosco delle bancarelle Bibblio Bar

Lungotevere Castello, 00193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vgFVNMcxqD42

개인적으로 무진장 고마운 공간이다. 왜냐면 내가 갑자기 추워진 바람에 무진장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이곳 주인장이 기꺼이 화장실을 쓰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나중에 와서 꼭 커피 한 잔 할게.

나는 상쾌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멀찌감치서 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요리사 형님에게 이탈리아 사람들은 넘나 친절하며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단 이야길 했다.

요리사 형님 : 그렇게 불쌍하게 물어보는데 나라도 화장실을 그냥 열어줬을거야.
나 : 내비두셔! 어쨌든 시원하고 좋다!





근방엔 간이 스케이트장도 있었다. 낮엔 영상인데 빙판을 계속 유지하는 게 신기하네.

스케이트는 1도 못타기 때문에 타자고 해봤자 엎어질 것이 뻔하여 안타기로 했다.





9.

그렇게 강변을 따라 걸어, 산탄젤로를 지나, 마침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폴라가 보이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아, 이 광경, 친구와 처음 유럽여행 할 때 봤던, 유럽의 마지막 장면이다. 머릿속 시계가 뱅글뱅글 돌면서 과거의 어느 시점을 찾는 것 같았다. 아아, 이 야경을 보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었지... 7년 전의 어렸던 나야, 여길 내가 또 왔어...

요리사 형님 : 저깄다! 물리! 이봐, 물리!

아차, 오늘은 추억감성에 젖을 때가 아닌가 보다. 동행인이 있으니 말이다. 나는 회상하는 것을 멈추고 요리사 형님의 시선을 따라 물리를 찾았다. 과연 도로 건너편에 물리가 서있었다. 그런데...

나 : 어, 근데 혼자가 아니네?
요리사 형님 : 저 자식... 여자를 데리고?


왜인지 분노하는 요리사 형님이었다.





우리는 산탄젤로 다리를 건너며 인사를 나눴다. 물리는 여전히 쾌활했고, 물리 옆에 있는 여자는 밝지만 어색한 듯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 여행자는 한국에서 주식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했으니, 여기선 주식이라고 부르겠다.

주식은 스페인을 거쳐 이탈리아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중요한 물품, 그러니까 지갑과 태블릿, 카메라, 여권, 유레일 패스 등등을 도난당했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나와 요리사 형님의 큰 탄식이 나왔다) 맞아, 바르셀로나는 소매치기가 종종 있긴 하다. 스페인 여행기 포스팅을 하다가 중단한 바람에 이 블로그에 쓴 적은 없지만, 나도 바르셀로나에서 카메라 털릴 뻔 하긴 했었다. 여유가 된다면 그 때 이야기도 써보고 싶군.

하여간 그 이후 어찌어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주식. 그녀는 들리는 도시마다 숙소에서 친구를 사귀어, 같이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로마의 숙소에서 물리를 만났다고 했다.

주식 : 제가 오늘 물리 오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물리 : 응? 아냐, 나도 여행하는 거고 뭐 겸사겸사인걸.


나와 요리사 형님은 귀중품 잃어버려서 어떡하냐고, 여행 초반에 너무 심하게 덴 거 아니냐고 걱정했으나, 주식은 밝게 웃으며 그렇지만도 않다고, 오히려 그런 경험 덕분에 이 세상에 자길 도와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고 어떻게든 여행은 이어져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좋다고 했다. 세상 긍정적인 사람이다. 다행이군.





10.

통성명도 했겠다, 다같이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맛있는 레스토랑은 나보나 광장 근처에 많다카더라 하는 이야길 누군가 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나보나 광장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 근처니까 걸어가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저녁 내내 두 다리로 로마 관광지 다 돌고 있다. 내일 내 다리 괜찮을까. 이따 자기 전에 미니미니가 챙겨준 휴족시간 붙여야겠다.

하여간 이쪽 동네는 그래도 제법 다녀서 길을 안다. 나는 나만 믿으라며 씩씩하게 앞장섰다.

씩씩하게 앞장선 것치곤 추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까 낮엔 더워서 얇은 가디건만 입고 나왔단 말이다. 내가 덜덜 떨면서 걸어가자, 요리사 형님이 자신은 마침 더웠다며 웃옷을 벗어줬다. 세상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두어번 정도 사양했으나 진짜 덥다고 하길래 그냥 받아서 입었다. 우하, 따뜻하다.

그 광경을 본 물리는 주식을 향해 자신은 절대 옷을 벗어주지 않을테니 기대하지 말라고 선언했고, 주식은 필요도 생각도 없다고 웃으며 답했다. 참으로 흐뭇한 대화로군.




모두와 함께 들어간 음식점은 CANTINA e CUCINA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사람이 북적북적한게 뭔가 맛집같은 느낌이었다.




Cantina e Cucina

Via del Governo Vecchio, 87, 00186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TBZnezf71or




안에 들어가면서 내가 목이 칼칼하다고, 이러다 감기에 걸릴 것 같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요리사 형님은 용케도 그걸 캐치하더니, 그럼 생강꿀차를 먹으라 했다.

나 : 그런 메뉴도 있어요?
요리사 형님 : 주방에 있으면 해주겠지? 저기요!


그러더니 이탈리아어로 쏼라쏼라하는 요리사 형님.




생강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달달한 홍차가 나왔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요리사는 대단한 것이다. 나 혼자였다면 메뉴만 보고 따뜻한 차가 없음에 아쉬워하며 다른 메뉴를 시켰을텐데.

차를 좀 마시니까 목이 풀리는 것 같았다. 좋아, 좋아.





요리사 형님의 진두지휘하에,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시켜 나눠먹었다. 샐러드, 피자, 고기, 감자튀김 등등. 뭐 하나 맛없는 메뉴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 선량한 여행자들, 분위기 좋은 인테리어.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잘게 쪼개어 음식과 함께 신나게 섭취했다.




요건 와인 사진. 음식과 함께 곁들여 마신 와인이 제법 맛있어서 이름을 찍어놨다.




여기는 2차로 갔던 MIMI E COCO라는 와인바.

Mimì e Cocò

Via del Governo Vecchio, 72, 00186 Roma RM, 이탈리아, https://goo.gl/maps/wMWiaWLC72t

잘생긴 웨이터와 감각적인 내부디자인 때문인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바였는데, 간신히 한 테이블 남아서 거길 비집고 들어가 함께 와인을 마셨다.

누군가는 프랑스 와인보다 이탈리아 와인이 더 맛있는 것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거기에 동의하며 자신이 여태까지 마신 와인 중 가장 맛있는 와인에 대해 이야기 했고, 누군가는 지금 와인이 문제냐며 웨이터의 조각 같은 얼굴을 보라했고, 또 누군가는 다음 메뉴 시킬 때 저 웨이터를 오래 붙잡아두자는 이야길 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이야길 나눴다. 이탈리아에서의 이야기, 이탈리아에 오기 전 들렀던 다른 나라에서의 이야기,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의 이야기, 한국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 그렇게 산발적이고 맥락없는 술자리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잔을 기울였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는 요리사 형님의 이야기였다. 가난했던 요리 연수 시절, 없는 형편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도와줬다가 본전도 못찾은 이야기였다. 따지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멍청하다고, 왜 속았냐고 할 법한 이야기였지만, 세상엔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자조적인 표정을 지으며 그런 이야길 하는 요리사 형님에게, 나는 프라하에서 만났던 어떤 청년에게 받았던 말을 돌려줬다.

나 : 괜찮아요. 그 사람이 나쁜 거에요. 처음엔 좋은 일 하신 거였잖아요? 그거 다 적립되는 거에요! 다 돌아올 거에요. 다 잘 될 거에요.

아마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길 하라고 그 청년에게 그런 이야길 들었나보다. 내 서툰 이야기에 물리와 주식도 맞다며 맞장구쳐줬다. 요리사 형님은 고맙다고 말한 뒤 그제야 편하게 웃었다.





11.

거나하게 취한 우리들은, 이렇게 맛난 와인을 퍼마셨는데 이거밖에 돈이 안나왔냐고 행복해하며 계산을 한 뒤 가게를 나섰다. 밤의 로마 시내는 캄캄하고 차가웠으나, 우리는 와인과 수다로 몸이 뎁혀진 터라 추운 줄도 모르고 거리를 걸었다. 취한 미소로 취한 대화를 나누며.

다들 테르미니 역에 숙소가 있었고, 나만 숙소가 콜로세움 근처였다. 그 셋은 어차피 가는 길이라며 나를 콜로세움 근처의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요리사 형님은 다음날 아침이면 로마를 떠나고, 물리와 주식은 아직 로마 일정이 남아있지만 투어 등으로 빡빡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하지만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 늘 그렇듯, 우리는 언제든 만날 것처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아마 더 연락할 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신기하게도 이들과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가끔씩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사람 좋은 요리사 형님이 구심점이다. 로마에는 감흥이 없던 요리사 형님은 로마에서 만난 사람들에겐 감흥이 있었는지 가끔씩 안부도 묻고 물리와 주식을 모아 자기 한국 들어가면 다같이 만나자고도 하고 그런다.

정 많은 사람. 그래요, 한국 오시면 봅시다.

로마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비 오는 로마의 아침장으로 계속!






덧글

  • 라비안로즈 2019/01/29 10:44 # 답글

    오.. 역시 현지어 가능한 사람이 있으니 편하네요. 어디 놀러가서 현지어 모르면 참 불편한게 한두개가 아니죠...

    다음날 몸 괜찮으실지... 걱정됩니다. 다음장... 기다리겠습니다. ㅎㅎ
  • enat 2019/02/14 22:17 #

    요리사 형님 덕분에 저 날 하루는 편하게 다녔어요! 사실 외국 식당가서 맛난 메뉴 고르기 힘든데 잘 아는 분이랑 가니까 좋더라고요! 운이 좋았죠! ㅎㅎ

    다음날... 다음날... 컨디션이 가라앉긴 했는데 나름 분위기 있고 차분한 하루를 보냈어요! 얼른 포스팅해볼게요!!
  • 스트로보 2019/01/29 13:21 # 삭제 답글

    내용이 즐거우니 읽는 동안도 즐겁게 읽게 되네요. 이탈리아음식에 정통한 사람과 이탈리아 여정을 함께 하다니 굉장한 행운!
  • enat 2019/02/14 22:19 #

    혼자 여행 다니면 여러명과 왁자지껄하게 있을 기회가 별로 없는데 가끔씩 요런 이벤트 같은 만남이 있음 신나더라고요! 함께 재밌어해주셔서 감사합니당!
    요리사 형님은 지금 한국 들어오셔서 음식점을 차리셨다고 하더라고요. 함 가보고 싶은데 넘 멀어서 못가보고 있네요 @.@ 쿄오...
  • 은이 2019/01/30 09:01 # 답글

    아아아.. 다른거 두고 식료품 점에 꽂히시는 직업병이시라니! 하지만 사진을 잘 찍어주시니 만족!!! 입니다 ㅎㅎㅎ
    즐겁게 읽었어요!
  • enat 2019/02/14 22:20 #

    요리에 대한 열정은 알겠지만 좀 더 로마에 집중해애앳!!! 하고 외치고 싶었으나 식료품 가게에서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뭐라 하지도 못하겠더라고요 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Tabipero 2019/02/01 21:52 # 답글

    로마 한복판에서 네이버웹툰을 보는 패기라니 ㅋㅋㅋㅋㅋ 그정도면 취존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
    그나저나 이태리어 잘 하는 요리사분은 어찌 보면 치트키네요! 메뉴판에 없는 메뉴도 나오고!

    여담입니다만 이태리행을 목전에 두고 새삼스럽게 소매치기가 걱정되더군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7년인가 전보다 치안상태가 영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다이소에서 소매치기 방지용 물품을 이리저리 찾아보고 있습니다 ㅎㅎ
  • enat 2019/02/14 22:24 #

    저도 여행가서 웹툰은 보는 편이지만 일정 마치고 숙소에서 본단 말이죠! 저 요리사 형님은 왜째서 관광지에서 그걸 보고 있는 건지 ㅋㅋㅋ 아 증말 넘해요!! ㅋㅋㅋ 그래도 덕분에 소화되는 식전주도 마셔보고 메뉴에 없는 차도 마시고 그랬으니... 흠흠... 로마취향과는 별개로 감사하긴 합니다 ㅋㅋㅋ

    앗 이제 이탈리아 가셨으려나요? 이미 다녀오셨으려나요? 좌우지간 소매치기 조심하시고 몸 건강히 맛나고 즐거운 여행 되시길! 혹은 되셨길!
  • 이글루스 알리미 2019/02/18 08:09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02월 18일 줌(http://zum.com) 메인의 [허브줌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jj

cc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검색